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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왕국을 건국했다고 알려진 예맥족의 실체
① 예족과 맥족은 하나의 부족일까?
고구려(高句麗) 왕국은 어느 민족이 건국했을까? 부여(夫餘)·동부여(東夫餘)·북부여(北夫餘)를 통칭해 부여족(夫餘族)이 고구려의 한 일파를 이루었다는 것은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또한 계루부(桂婁部)인 주몽(朱蒙)이 남하하기 이전에 연노부(涓奴部) 등 다른 부족들이 존재했으며, 고구려를 건국한 세력은 부여족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부여족은 민족명이라기보다는 국가명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일반적으로 고구려는 예맥족(濊貊族)이 건국했다고 설명되어왔다. 문제는 부여족이 부여·동부여·북부여 등으로 혼란스럽게 기록되어 있어 그 정확한 실체를 찾기가 쉽지 않듯이 예맥족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먼저 예맥족이 하나의 부족인지 여러 개의 부족인지부터 분명하지 않다. 지금까지 이에 대해서는 견해가 엇갈려왔다. 예맥족이 하나의 부족이라는 견해와 예(濊)와 맥(貊)이 각각 다른 별개의 부족이라는 견해가 그것이다. 이 두 견해 중 예맥족이 하나의 부족이라는 견해가 더 많았다.
과연 어느 견해가 맞는지 옛 기록들을 통해 추적해보자. 먼저 3세기경의 기록인『후한서(後漢書)』‘고구려조’를 보자.
˝구려(句麗)는 일명 맥이(貊耳)다. 따로 별종이 있는데, 소수(小水)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소수맥(小水貊)이라 부른다. 좋은 활을 생산하는데 맥궁(貊弓)이 바로 이것이다.˝
구려는 일명 맥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맥이는 맥족(貊族)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중국 기록에서 별종이란 출신 지역을 뜻하는 용어다.
『후한서』보다 이른 기록인『한서(漢書)』「왕망전(王莽傳)」은 고구려는 맥인(貊人)과 예맥으로 섞어 사용해 우리를 더욱 혼동케 한다.
˝이에 앞서 왕망이 고구려 병력으로 호(胡)를 치려 하자 고구려가 거부했는데 군(郡)에서 강제로 시키려 하자 모두 변방으로 도망갔다. 이들은 범법하는 도둑으로 변했는데 요서대윤(遼西大尹) 전담(田譚)이 이들을 추격했으나 오히려 죽음을 당했다. 주군(州郡)이 돌아와 고구려후(高句麗侯) 추(騶)를 책망하자 엄우(嚴尤)가 상주하여 “맥인(貊人)이 범법한 것은 고구려후 추가 적극 나서서 말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다른 마음이 있는 듯하니 주군에 명하여 이들을 달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지금 그들이 대죄(大罪)를 지은 것이 두려워 반란을 일으켜 부여 족속과 연합할까 두렵습니다. 흉노(匈奴)도 아직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예맥(濊貊)이 거듭 일어난다면 이것이야말로 큰 걱정거리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왕망이 달래지 않자 예맥이 배반하고 나섰다.˝
이 기록은 고구려를 때로는 맥인이라 부르고 때로는 예맥이라 부른다.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맥족’ 또는 ‘예맥족’으로 부르기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때의 고구려후 추는 고구려의 제2대 국왕인 유리명왕(瑠璃明王)에 대한 중국 측의 비칭(卑稱)이다.
『후한서』「동이열전(東夷烈傳)」‘부여조’에는 ‘맥족’도 ‘예맥족’도 아닌 ‘예족’이란 표현이 나온다.
˝부여국은 현도(玄菟)의 북쪽 천 리쯤에 있다. 남쪽은 고구려, 동쪽은 읍루(揖婁), 서쪽은 선비(鮮卑)와 접해 있고, 북쪽에는 약수(弱水)가 있다. 국토의 면적은 사방 2천리이며, 본래 예족(濊族)의 땅이다.˝
부여국은 예족의 땅이라는 것이다.
② 국가라는 뜻으로도 사용되는 예와 예맥
예(濊)·예맥(濊貊)은 민족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때로는 국가를 뜻하는 용어로도 사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혼란이 가중된다.『후한서』와 비슷한 3세기 때의 기록인『삼국지(三國志)』「위서동이전(魏書東夷傳)」‘부여조’에 그런 구절이 있다.
˝지금 부여의 창고에는 옥(玉)으로 만든 벽(璧)·규(珪)·찬(瓚) 등 여러 대(代)를 전해오는 물건이 있어서 대대로 보물로 여기는데, 노인들은 ‘선왕(先王)께서 하사하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도장에 ‘예왕(濊王)이 도장’이란 글귀가 있고, 나라 가운데에 예성(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으니, 아마도 본래 예맥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王)이 되어 살며 스스로 ‘망명해 온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생각하건대 이유가 있는 것이다.˝
‘예왕’이란 도장이 있다는 것은 예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뜻한다. 그 예국의 국새를 부여가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래 예맥의 땅이었는데’라는 구절은 예맥족이 세운 나라가 예국이라는 뜻으로 읽힌다. 실제로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던 예국(濊國)이 있었다.
『후한서』「동이열전」‘예조’에는 “원삭(元朔) 원년(기원전 128년) 예(濊)의 군주 남려(南閭) 등이 우거(右渠)에게 반기를 들고 28만을 이끌고 요동에 내속(內屬)해왔다. 무제(武帝)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삼았으나 몇 년 후에 폐지됐다”고 기록했는데, 예국은 인구가 28만이 넘을 정도로 큰 고조선의 제후국이었다.『한서』「식화지(食貨志)」에는 “팽오(彭吳)가 예맥과 고조선에 걸쳐서 창해군을 두었다”라는 구절이 있다. 팽오가 예맥과 고조선에 걸쳐서 창해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인데, 고조선의 제후국인 예국을 고조선과 대등한 나라로 서술한 것이다. 고조선이 황제국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한서』의 의도적 기술이다.
‘맥족’·‘예맥족’·‘예족’ 등으로 혼란스럽게 기술되어 있지만 여기에도 하나의 법칙이 있다. 맥족을 예맥족이라고 칭한 기록이 있고, 예족을 예맥족이라고 부른 기록도 있으나 ‘예족’을 ‘맥족’이라고 부르거나 ‘맥족’을 ‘예족’이라고 적은 기록은 없다는 점이다. 그러다 어떤 경로를 거쳐 예맥족으로 통합되면서 예맥이란 표현이 나오게 된 것이다.
③ 맥족과 예족의 통합 과정
중국의 고대 사료에서 맥족이라는 단칭 표현이 등장할 때는 고구려를 홀로 부를 때뿐이다.
『후한서』「동이열전」‘고구려조’는 “(고구려가 현도군을 치자 후한은)광양(廣陽)·어양(漁陽) 등에서 기마병 3천여명을 출동시켜 함께(현도군)을 구원케 했으나 맥인(貊人)은 벌써 돌아가버렸다”고 전한다. 고구려를 맥인으로 단칭하는 기록이다. 그런데 같은『후한서』‘고구려조’에는 예맥이라고 칭한 내용이 나온다.
˝(후한의 환제(桓帝)가 조서를 내려)수성(遂成)이 포악무도하므로 목을 베어 젓을 담아서 백성에게 보임이 마땅할지나, 다행히 용서함을 얻어 죄를 빌며 항복을 청하는도다. 선비와 예맥이 해마다 노략질하여 백성을 잡아간 수가 수천명이나 되는데 이제 겨우 수십명만을 돌려보내니 교화(敎化)를 받으려는 마음가짐은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후한의)현관(縣官)들과 싸우지 말 것이며, 스스로 귀순하여 포로를 돌려보내면(그 숫자만큼)속전(贖錢)을 지불하되, 한 사람당 비단 40필을 주고 어린이는 어른의 반을 주겠다.˝
상당히 큰소리친 기록이지만 그 내용은 고구려가 잡아간 한인(漢人) 포로들을 돌려달라는 애원이다. 어른은 비단 40필의 속전을 주고, 어린이는 그 반을 주어 사겠다는 회유책이다. 같은 책의 같은 조항에서 “맥인은 벌써 돌아가버렸다.”, “선비와 예맥이 해마다 노략질해”라고 싸서 고구려를 때로는 맥족으로 때로는 예맥족으로 부른다.
이처럼 중국의 사료는 고구려를 때로는 맥족으로 때로는 예맥족으로 통칭했으나 고구려인을 홀로 예족이라고 부른 예는 찾아볼 수 없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는 초기에 고구려를 구성한 민족은 맥족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후에 맥족이 세력을 확장하여 예족을 통합하면서 예맥으로 불린 것이다. 그리고 ‘예’와 ‘맥’, ‘예맥’의 세 명칭은 그 출현 시기도 다르다.
④ 고구려를 세운 맥족이 예족을 통합하다
『후한서』「동이열전」‘예조’에는 기자(箕子)가 예족에게 예의와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일찍이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를 (고)조선에 봉하니, 기자는(조선 백성에게)의와 농법과 양잠법을 가르쳤다.˝
이 내용이『후한서』‘예조’에 실려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인들이 고조선을 예족의 나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주나라의 무왕은 기원전 1134년에 재위했다는 임금이다. 기자가 고조선의 군왕이 되었다는 내용이지만 기자가 실제 고조선에 와서 왕위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최근에는 기자가 고조선 지역까지 오지 못하고 산동반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이 유물 발굴 결과 드러나기도 했다. 중국인들에게 고조선을 건국한 민족으로 인식된 예족은 훗날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고구려가 왜 고조선 계승 의식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해주는 기록이기도 하다.
맥족도 예족 못지않게 오래된 부족이라고 중국의 사료들은 전한다. 맥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시경(詩經)』「한혁편(韓奕編)」을 보자.
˝드넓은 그곳 한나라의 성은 연(燕)의 백성이 쌓아 올렸네. 조상의 뒤를 이어 왕명을 받아 수많은 만족(蠻族)의 주인이 되었네. 왕께서 한나라의 제후에게 하사한 것은, 바로 추족과 맥족이 사는 곳…….˝
이는 주나라의 려왕(廬王;재위 기원전 878년~828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인데, 맥족의 기원도 예족 못지않게 오래되었음을 말해준다. 맥족은 적어도 이 기록 이전에 존재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시경』에 기록된 것이다.
예맥이란 말이 주로 등장하는 것은 후한(後漢)시대이니 예와 맥에 관한 기록보다는 1천년 이상 후대의 일이다.『후한서』이전에는 제(齊) 환공(桓公) 때의 재상 관자(管子) 때의 기록인『관자』에만 ‘예맥’이란 표현이 보인다.『관자』‘소광(小匡)조’를 보자.
˝환공(桓公)이(……)이 북쪽으로는 고죽(孤竹)·산융(山戎)·예맥(濊貊)에까지 이르다.˝
제나라의 환공 재위기간은 기원전 684년~643년이니 맥인이 기록에 등장한 지 2백여년 후의 일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예족과 맥족이 통합되었다고 보기에는 물가 있다. 이때만 해도 예족과 맥족은 따로 존재했다.『삼국지』「위서동이전」‘동예(東濊)조’에 “그 나라의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각기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전하듯이 예도 처음부터 하나로 통합되지는 않았다. 고구려도 초기에는 비류(沸流)·개마(蓋馬)·주나(朱那) 등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으나 차차 세력을 확장하고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면서 강력한 제국으로 발돋움한 것이다.
고구려도 초기에는 다른 여러 부족들처럼 한 부족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만주·몽골 대륙에 거주했던 대부분의 유목민족들이 그러했듯이 그 차별성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크게 봐서 같은 민족이지만 거주지가 다른 부족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사료에 고조선은 예족으로 기록되고 고구려 세력은 맥족으로 기록되는데, 이는 중국 기록들이 만주와 내몽골 지역에 존재하던 많은 부족들 중 일부분을 예로 통칭하고, 다른 일부분을 맥으로 통칭하다가 고구려가 두 세력을 통합한 후에 둘을 묶어 예맥으로 칭하게 된 결과다. 곧 맥족이 예족을 통합한 후에는 예맥족으로 부른 것이다.
고구려가 한나라와 맞서 싸울 때 중국인들은 고구려를 맥족으로 칭하기도 하고 예맥으로 칭하기도 하는데, 이때쯤이면 고구려가 이 지역에서 활동하던 여러 부족들을 아우르는 대표적인 세력으로 성장했음을 말해준다. 곧 고구려를 형성한 부족은 맥족이었다가, 후에 예족과 부여족을 통합하면서 세력이 강대해진다. 고구려가 예맥족으로 호칭되는 것 자체가 고구려가 강력한 제국으로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예족과 맥족, 그리고 예맥족이란 혼란스런 명칭도 정리하면 고구려의 발전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