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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익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돈키호테
전남 진도를 찾아서
제 118차 답사 [2009년 6월 14일 날씨 맑음]
상쾌한 아침이다. 전남 진도의 향취를 맡기 위해 발걸음도 가볍게 진도를 향해 나선다.
7 : 45 익산시청에 총 36명, 회장님 인원 점검 후 출발.
8 : 00 답사를 출발하여 차 안에서 1교시 수업으로 역사문화 교육을 위해 최옥환선생님(전북문화재연구원장)으로 부터 『익산지역의 ‘용(龍)’ 자명(字名) 지명(地名)에 대하여 』라는 주제로 강의를 들었다. 용에 대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와 특성, 용어, 종류와 익산지역에서 용자가 들어가 있는 지역의 지명의 내용 및 특성, 용신앙과 미륵신앙 등에 대하여 들었으며, 최선생님의 추측이라 하며 말씀하셨지만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나에게도 들었다. 이렇게 용자가 들어가 있는 지역이 많은 익산을 보며 왕궁평성과 미륵사지 무왕이 익산에 존재하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9 : 01 서해안 고속도로를 따라 가다가 함평휴게소에서 회장님의 ‘신체의 입력이 있으면 출력을 해야 한다’는 지시를 받고 모두들 휴게소에서 내려 볼 일 들을 보았다.
9 : 12 이택회회장님의 차 안에서 2교시 수업이 시작되었다. 1교시 최옥환선생님의 용에 대한 부가 설명으로 ‘용원설화(이후 ‘별주부전으로 이야기 되었다’ 함)’와 떡 하나 놓고 말하지 않은 사람이 먹기 시합을 한 어이없는 부부이야기도 들으며 한바탕 신나게 웃었고, 2교시 수업으로 준비하신 ‘진도아리랑’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다. 진도아리랑에 대한 기원과 발생, 어원, 역사적 상징과 아리랑 노래의 파급효과 등에 대하여 이전에는 알 지 못했던 내용들을 자세하게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평소와는 다르게 오늘 회장님의 진도아리랑 후창 노랫말들에 대한 특징과 우리 민중들의 일상생활인 노동, 부귀소망, 남녀의 애정, 인간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많은 회원님들의 참석으로 기분이 좋으신 회장님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걸쭉한 입담을 하셔서 우리 회원들의 배꼽이 빠져 나갈 뻔 할 만큼 훌륭한 웃음선생님이셨다. 특히 진도아리랑의 후창은 유머와 위트가 있고, 민중적이며 적나라한 외설적인 성의 묘사, 인생무상, 늙음의 아쉬움 등을 무척이나 해학적으로 만들어 놓은 300여 가지의 노랫말을 읽어 가다보니 목표 IC에 도착하였다. 끝으로 아리랑 노래에서 ‘응응응’ 하는 부분은 무슨 뜻인가에 대한 퀴즈도 내셔서 한바탕 또 웃었다.
9 : 50 해남으로 들어섰다. 수업을 마치고 잠시 창밖으로 보이는 해남의 경치를 보며 진도로 들어갔다.
10 : 12 제 2 진도대교를 건너 전라 우수영이 있었고 이순신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명랑해전이 있었던 울둘목에 도착하였다. 붕향 이종범 선생님이 준비하여 주신 답사자료를 보며 오늘의 진도 답사를 한 곳 한 곳 밟아본다.
10 : 19 우수영관광단지인 명량대첩공원에 들려 이순신장군의 업적과 진도의 민, 관, 군들의 왜군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혈전을 벌였을 그 옛날 울둘목 물줄기를 생각하며 잠시 감사의 묵념을 한다.
10 : 50 울둘목에서는 숭어를 뜰채로 잡을 만큼 많은 숭어가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숭어 한 사라로 잠시 회포를 풀고, 진도의 역사문화 해설사이신 장현추선생님을 모시고 제1 진도대교가 84년에 만들어졌고, 제2 진도대교는 2005년에 개통되었으며, 총 길이 500m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벽파진 으로 출발했다.
11 : 17 노산 ‘이은상’선생님이 비문을 쓰신 벽파진 충무공 전첩비에 도착했다. 전첩비로 오르는 계단 왼쪽에 비를 세운 전문을 보면 정유재란 때 이순신장군은 12척의 함선으로 명량해협(울돌목)에서 3백 여척의 왜선을 섬멸, 유명한 명량대첩(1597)을 거둔다. 벽파진은 바로 그 명량대첩을 거두기 직전 16일 동안 이순신이 머물면서 나라의 미래와 백성의 안위를 고민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작전을 숙고했던 역사의 현장이라고 한다. 비석의 높이는 11m이며 커다란 돌거북 등 위에 얹혀 있으면서 명량해협을 굽어보고 있었다. 돌거북의 크기가 무척이나 커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잠시 이순신장군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그 옛날에 젖어 보며 용장산성을 향하여 출발하며 해설사님을 통하여 진도에는 진돗개·구기자·돌미역의 삼보(三寶)와 노래·서화·홍주를 일컫는 삼락(三樂)의 섬 진도(珍島)라는 이야기와 진돗개가 진도에 들어오게 된 것은 중국 남송(南宋)의 무역선에서 유입되었다는 설과 조선 초기에 진도군 지산면에 설치된 군마 육성 목장을 지키게 하기 위해 몽골에서 들여온 개가 진돗개의 원종이라는 설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11 : 40 용장산성은 1231년(고종 18)부터 침략해오던 몽골과의 전쟁을 벌이기 위해 고려는 수도를 개경에서 강화도로 옮겼다한다. 그리고 40여 년 동안 삼별초가 중심이 되어 몽골과 전쟁을 벌였으나, 1270년(원종 11) 고려는 몽골에 항복하였고, 몽골에 대한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배중손(裵仲孫) 장군이 이끄는 삼별초군은 왕족인 승화 후 온(承化候 溫)을 왕으로 삼은 뒤 진도로 내려와 용장산성(龍藏山城)을 쌓고 몽골에 대항했다는 해설을 듣고 용장산성 궁성터, 용장사 약사전, 석불좌상을 둘러본 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굽이굽이 산새와 아름다운 바닷가, 맑은 공기가 있는 진도의 풍경을 창밖으로 보며 진도읍내에 있는 수정관식당으로 출발하였다.
12 : 32 점심식사 시간이다. 갈치조림과 홍주에 취해 맛있는 점심을 먹느라 시간을 많이 보내, 서전미술관을 방문하기로 하였으나 생략을 하고 ‘전(傳) 왕온의 묘’를 향해 출발했다.
1 : 33 전(傳) 왕온의 묘는 마지막까지 버티던 삼별초의 왕이 몽고의 장수에게 목이 베인 곳이란다. 공민왕의 사촌형이었던 왕온은 이곳에서 붙잡혀 살려서 몽고로 데려가자는 살리자는 의견과 죽이자는 의견에 분분했다고 하는데 그래서 '논수곡(論首谷)'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단다. 왕의 무덤은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밤에 몰래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힘없는 국가의 뼈저린 역사를 느끼게 한다. 외세의 침략과 그들에게 맞선 삼별초의 패배로 잡혀간 진도의 남자만도 일만명이 몽고로 끌려갔다고 하니 힘없는 설움을 느낀다.
1 : 48 산길을 따라가다 슬픈 ‘논수곡’ 사연이 있는 논수동을 지나 쌍계사로 향하다.
1 : 51 첨찰산 쌍계사는 진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첨찰산(尖察山·485.2m) 남서 기슭에 있으며, 신라 857년(문성왕 19)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절 양편으로 계곡이 흐른다 하여 쌍계사라 한단다. 석가모니를 모시는 대웅전은 1982년 수리할 때 발견된 기록에 숙종 23년이라 써져 있어 169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목조삼존불좌상은 가운데 본존불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시불을 모시고 있는 형태로 대웅전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 한다.
2 : 10 운림산방은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인 소치(小癡) 허유(許維·1809-1893)선생이 말년에 거처하며 그림을 그리던 화실로서 일명 ‘운림각’이라고도 한다. 소치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28세 때 대흥사 두륜산방의 초의선사 밑에서 공재 윤두서의 화첩을 보면서 그림을 익히기 시작하여 33세 때 초의선사의 소개로 추사김정희 선생 밑에서 본격적인 서화수업을 했다고 한다. 천부적인 재질과 강한 의지로 시(詩), 서(書), 화(畵)에 능하고 헌종이 쓰는 벼루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는가 하면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권돈인, 민영익, 정학연 등 권문세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1856년 추사가 세상을 떠나자 소치는 고향으로 돌아와 첨찰산 쌍계사 남쪽에 자리를 잡아 집을 짓고 화실을 만들어 여생을 보냈다. 이후 이곳은 소치(小痴)~미산(米山)~남농(南農)~임전(林田) 등 4대에 걸쳐 이어온 한국 남화의 본거지가 되었다고 한다. 첨찰산 기슭에 자리 잡은 운림산방은 연못과 어우러진 정원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운림산방 안에는 소치의 사당과 후손인 소치·미산·남농의 3대 작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소치기념관, 진도의 고유한 문화적 배경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진도역사박물관이 있었다.
2 : 33 진도역사박물관에 들려 우리가 지금까지 답사한 진도의 모든 역사문화유적지를 한 눈으로 볼 수가 있어 재학습의 효과를 얻은 듯해 좋았다.
2 : 40 운림산방을 나와 신비의 바닷길로 가는 길에 진도 아리랑 노래를 부르며 아리랑고개를 넘어 갔다. 우리네 조상들의 삶이 이렇게 힘이 들었나싶은 생각이 들만큼 구불구불 무서운 꼬부랑길이었다. 눈이 오면 이 길은 갈 수가 없을 듯 했다. 가는 길에 해설사님으로부터 신비의 바닷길에 대한 ‘뽕할머니전설’도 듣고 프랑스 ‘삐에르랑디’라는 사람에 의해 우리나라보다 먼저 프랑스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씁쓸했다.
3 : 00 신비의 바닷길에 도착했다. 뽕할머니 동상도 보고 멋진 기념사진도 찍었으나 신비의 바닷길을 볼 수 없음이 아쉬웠다. 해마다 음력 2월 그믐경의 영등사리와 6월 중순경에 진도군 고군면 회동마을과 그 앞바다의 의신면 모도 사이에 바다가 갈라진다고 한다. 일명 "한국판 모세의 기적"이라고도 불린단다.
3 : 40 여귀산 앞을 지나다. 굽이 굽이 아름다운 진도의 산이다.
3 : 49 탑골산 탑립마을을 지나며 수많은 탑을 보고 잠시 긴 여정을 위해 내려서 볼 일들을 보았다.
3 : 58 국립남도국악원 앞을 지나다. 오늘은 휴일이라 쉬는 관계로 명창의 진도아리랑 노래를 들어보지 못해 무척이나 아쉽다.
4 : 00 상만리 오층석탑을 도착했다. 소규모의 탑이지만 우리나라 최남단인 진도에까지 탑이 조성되었다는 것이 신기했다. 홍주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남도석성 출발했다.
4 : 24 남도석성은 고려 원종(재위 1259∼1274), 삼별초가 진도에서 몽골과 항쟁을 벌일 때 해안지방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으로, 삼별초가 제주도로 옮겨갈 때 이곳에서 출발했다고 전해지며, 백제 때 진도에는 3개의 마을이 있었고 그 중 한 마을의 중심지였었고,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시대까지 이어져 오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에 이미 성이 있었을 거라고 진도사람들은 말한다. 성안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살고 있는 내게는 무척이나 인상적인 남도석성인 것 같다.
4 : 40 남도석성을 출발하며 진도에 있는 유일한 보물인 금골산 5층석탑을 향해 갔다. 우리 익산에는 국보가 3개에 보물이 5개에 국가지정문화재가 18개가 있으며 미륵사지에서 출토한 금동향로와 사리장엄이 앞으로 문화재에 등재 된다면 더 많아질 것이다. 이러한 소중한 마한 백제의 역사문화가 숨쉬고 있는 익산에 살고 있다는 것이 무척이나 자랑스럽다.
4 : 50 금골산 5층석탑에 도착했다. 웅장한 바위산을 바라보며 바위로 둘러 있는 산새의 웅장함에 대한 위압감과 아름다움을 함께 느낄 수 있음을 딱부러지게 말할 수는 없지만 그저 내 입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구나” 로 마무리 짓고 싶다. 금골산 바위를 끼고 아래 학교가 있다. 금골산 밑에 있는 학교라 그런지 더욱 정감이 간다.
5 : 42 우리를 위해 진도 역사문화해설을 해 주신 장현추선생님과 아쉬운 인사를 나누고 진도대교를 넘어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익산으로 출발했다.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 지고 진도를 떠나지만 하루에 진도를 본다는 것이 무리인 것 같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좀 더 많은 곳을 보고 싶고 진도의 명물인 진돗개와 눈도 마주치고 싶고 해수욕장이 넓은 바닷가에서 발도 담그며 조잘 재잘 어린 아이 마냥 깔깔 거리고 싶다.
6 : 05 차 안에서 회장님의 특별한 마무리 걸쭉한 입담으로 군밤타령, 방아타령에 대한 옛어른들의 개걸스럽고 배꼽을 쥐게 하는 성에 대해 풍자한 이야기를 들었다. 반백년을 넘게 산 오늘에사 알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 황당했고, 그 뜻도 모르면서 흥명나게 불렀던 것을 생각하니 우스웠다. 집에가면 남편에게도 이야기 해 주어야겠다 생각하며 배꼽을 쥐고 깔깔깔 웃어본다. 오늘 진도답사에서 다하지 못한 즐거움을 위해 특별히 회장님께서 8월 동해안 1박2일을 꿈꾸신단다. 기대가 된다. 그 날이................선답사를 위해 같이 가실 분을 찾으신다.... 그것도 여성동지 한 분만....ㅎㅎㅎ 울 회장님 무척이나 외로우신가보다... 회장님? 오늘 회장님의 마지막까지 저희를 즐겁게 하여 주시기 위해 힘써 주심 감사합니다. 실컷 웃었습니다.
6 : 30 피곤함에 주무시는 분도 계시고 향음주례하자 하시여 박용자선생님께서 준비하신 술과 다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며 차 안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향음주례에 대한 배홍선선생님의 전해오는 예절을 배워 보았다.
8 : 30 드뎌 나의 집이 있는 익산에 도착했다. 피곤한 여정은 익산시가 다 내 집 같다. 친절하신 회장님은 회원님들 발길을 잡고 저녁식사를 챙기신다. 뼈다귀탕과 콩나물국밥으로 저녁을 맛있게 먹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즐거운 나의 집으로 향한다. 오늘 하루도 함께 하신 익산향토문화연구회 임원님들과 회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좋은 시간 만들어 주셔서요~~~
알랴뷰~~ 익산향토문화연구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