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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트완 부르델 (Antoine Bourdelle, 1861-1928)
앙투안 부르델 (Emile Antoine Bourdelle)
프랑스 인체 조각의 역사는 로댕과 그의 제자들 부르델·마이욜·클로델의 흐름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 중에 연구자가 깊이 있게 관심을 가지고 작품에 영향을 받아온 작가는 부르델이다.
부르델은 프랑스의 조각가로 고전의 재생을 꾀하여, 그리스, 로마, 이집트의 고대조각에서 조각미를 탐구하고, 기념비성(性) 속에 신선한 정취를 담은 독자적인 작풍을 세웠다. 그의 특징은 건축적인 구성과 양식에의 복귀였다. 이것은 오랫동안 건축의 지배하에 있던 조각에 근대예술로서의 자율성을 부여한 로댕이 건축과 결별하면서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1889년의 살롱 출품작이 A.로댕에게 인정되어, 그의 조수로서 장기간 사제관계를 맺었다(1893∼1908). 그러나 스승인 로댕과는 대조적으로 고전의 재생을 꾀하여, 그리스의 고대조각을 비롯하여 로마, 나아가서는 이집트까지 조각미를 탐구하고, 기념비성(性) 속에 신선한 정취를 담은 독자적인 작풍을 세웠다. 1888년의 첫 베토벤상(像) 이후 만년에 이르기까지에 20개 이상의 베토벤상이 있으며, 1893년에 주문받은 몽토방 위령비는 6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1909년의 《활을 당기는 헤라클레스》는 획기적인 작품이다.
그 밖의 주요작품에 미국의 여성무용가인 I.덩컨(1878∼1927)과 러시아 무용가인 니진스키(1890∼1950)의 무용에서 구상된 샹젤리제 극장의 장식부조(1912), 보즈의 산 속에 놓인 거대작 《알자스의 성모자(聖母子)》(1922),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알베아르 장군 기마상》(1923) 《아메리카 대륙에 인사를 보내는 프랑스》 등이 있다.
로댕, 아나톨 프랑스 등의 초상조각이 많으며, 유채화 ·수채화와 많은 에스키스(esquisse)도 남아 있는데, 대부분은 파리의 몽파르나스에 있던 아틀리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부르델미술관에 보존 ·전시되어 있다. 그의 특징은 건축적인 구성과 양식에의 복귀였다. 이것은 오랫동안 건축의 지배하에 있던 조각에 근대예술로서의 자율성을 부여한 로댕이 건축과 결별하면서 잊고 있었던 것이었다. 르 베지네에서 사망하였다.
Musée Bourdelle 은 프랑스 파리 의 15 번가 에있는 18 세기의 앙 뜨완 부르 델 (hue Antoine Bourdelle)에 위치한 미술관입니다. 월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열려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파리 메트로 역은 Falguière 와 Montparnasse-Bienvenüe 입니다.
이 박물관은 조각가 Antoine Bourdelle (1861-1929)의 스튜디오를 보존하고 있으며 19 세기 후반과 20 세기 초반의 파리 아뜨리에 의 예를 제공합니다. 1885-1929 년에 Bourdelle의 활발한 스튜디오였습니다.
1922 년에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박물관으로 만들 계획을 시작했다. 1930 년대 초 Gabriel Cognacq 은 스튜디오를 구입할 자금을 제공하여 예술가의 남은 작품을 분산시키는 것을 피했습니다. 박물관은 1949 년에 개관했으며 1961 년 Henri Gautruche 건축가에 의해 1992 년에 다시 Christian de Portzamparc에 의해 확장되었습니다.
오늘날 박물관에는 대리석, 석고 및 동상, 회화, 파스텔, 프레스코 스케치, Eugène Carrière , Eugène Delacroix ,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 Adolphe Joseph Thomas Monticelli , Pierre 등의 예술가가 제작 한 Bourdelle의 개인 소장품 등 500 점이 넘는 작품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Puvis de Chavannes , Auguste Rodin 등이있다 . 루드비히 반 베토벤 (Ludwig van Beethoven) 의 21 편의 연구와 그리스어 및 중세 작품의 문서 사본 및 그의 사본을 비롯하여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 중 일부의 원본 석고 모형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2012 년 6 월부터 박물관 방문객들은 교육, 연대 기적 및 작업에 부응하여 Bourdelle의 예술적 진화를 강조하는 영구 컬렉션을 통해 다른 경로를 따릅니다.
Bourdelle Museum은 2013 년 1 월 1 일 파리 국립 박물관 ( Paris Musées) 에서 통합 된 14 개 도시 파리 박물관 중 하나입니다.
Égreville에 있는 두 번째 Bourdelle 정원 박물관은 1960 년대 후반에 그의 상속인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그것은 56 개의 조각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몬타 우반>, 1914, 이 작품의 청동 버전은 Montauban의 Rue de l' Hôtel de Ville / Rue Marie Lafon에 있습니다. 이 작품은 1911 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부에노스 아이레스 (Jorge Lavalle Cobo) 시장으로부터 주문 받았다. Cobo는 1911 년 조각가의 파리 스튜디오에서 본 켄타 우 루스의 작은 조각을보고 좋아했으며 큰 버전을 위탁했습니다. 1912 년에 주문되었지만 1914-18 년의 전쟁은 청동으로 주조를 지연 시켰고 1916 년 아르헨티나에 이르렀다. 이곳은 Recoleta 광장 근처에서 볼 수있다. [73]
1925 년 또 다른 청동 주조물이 파리 살롱 데 튈르리 에 배치되었습니다. [74]
데생을 기반으로 순간적인 움직임에 주목한 로댕에게서 15년 동안 조각을 배운 부르델, 그런 그이기에 그 둘의 작품이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 찾아볼 수 있는 재미도 선사한다. 대단한 스승 밑에서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해 나아가 결국 ‘근대 조각의 아버지’, ‘로댕의 개혁자’라 일컬어지고 있는 부르델의 삶과 예술의
로댕, 마이욜(Aristide Maillol)과 함께 서양 근대조각의 거장인 프랑스의 조각가 부르델은 주로 건축물과 관련된 조각과 기념비 조각으로 유명하다. 건축적인 그의 조각은 거대한 스케일, 절제된 표현, 평면적인 윤곽으로 특징지워진다. 프랑스 남부 몽토방에서 가난한 가구공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와 니스의 국립장식미술학교에서 살롱 조각의 엄격한 교육을 받은 후 한때 로댕의 조수로 있으면서 <발작>과 <깔레의 시민들> 제작을 돕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는 1910년 살롱 도톤느에 <활쏘는 헤라클레스>를 출품하여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게된다. 이 작품은 절대적인 미를 추구한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영감을 얻은 것으로 고전적인 양식과 활기찬 구조, 평면성이 돋보인다. 부르델은 <몽토방 전사비>, <알베아 장군 기념비>, <마르세이유 오페라극장 부조>, <아담 미키에비치 기념비>등의 대표작과 1,000여점이 넘는 조각 및 드로잉을 유작으로 남겼다.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인 헤라클레스는 괴력을 지닌 전사로 이 작품에서는 전설의 스팀팔리온 새를 겨누고 활을 당기는 긴장된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강조된 근육의 긴장감은 넓게 벌린 양 다리와 활을 당기는 쭉뻗은 팔의 움직임으로 표현되고, 허공으로 향하는 활과 머리의 방향은 강렬한 입체감과 확장된 공간감을 느끼게 한다.
Émile-Antoine Bourdelle
르네상스 이전의 고전미에 대한 동경, 특히 그리스의 아르카익(archaic)한 미술에 대한 강한 향수를 지녔지만 이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식으로 힘과 역동을 표현하며 수많은 걸작품을 창조해낸 부르델의 예술세계는 서양 근대 조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오늘날까지 빛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당시 화단은 현대미술로 향한 행보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던 반면, 건축과 조각은 다른 장르에 비해 별다른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보수적인 성향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댕의 출현은 조각계에 큰 파문을 불러왔다. 로댕은 주관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인상주의 화가와 같은 시각경험에 충실한 제작과 볼륨의 연구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부르델은 로댕의 문하에서 15년 동안 함께 작업하며 그의 영향을 적잖이 받았다. 그러나 거목의 그림자에만 묻히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근대조각에서 현대조각으로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에밀 앙트완 부르델(Emile-Antoine Bourdelle 1861∼1929)은 1861년 프랑스 남부지방의 소도시 몽토방(Montauban)에서 태어났다. 부르델은 그리스의 고대 조각을 비롯하여, 로마, 나아가서는 고대 이집트의 조각까지 두루 섭렵하여 신선하고 독자적인 조각세계를 이루었다. 베토벤에서 헤라클레스까지 영웅적인 남성 인물상을 주로 만들었던 부르델은 웅장하면서도 역동적이며 거칠고 강한 남성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에 바탕을 둔 형태의 단순화를 통해 조각 자체가 독립적인 건축으로 세워지길 바랬다. 그는 인간이나 자연의 사실적 재현을 넘어서서 "조각이란 오브제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단언함으로써 조각이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형식이라는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결국 부르델은 질서의 형식과 조형의 가치 위에 조각과 건축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그의 종합적인 기념비 조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부르델전은 파리 부르델 미술관의 전면적인 협력을 바탕으로 로댕, 마이욜과 더불어 근대조각가 3인 중 한 명인 부르델의 대표작만을 엄선하여 조각 75점, 데생 및 수채화 48점, 총 123점을 소개하는 국내 최초 대규모 단일작가 조각전이다.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은 <활 쏘는 헤라클레스><아폴론의 두상><베토벤의 초상 시리즈>등 부르델의 젊은 시절 작품에서부터 최고 전성기에 이르는 작품까지 상징주의와 표현주의의 특징적 작품들과 단순화 및 종합성의 방향으로 나아간 작품들을 아우르며 부르델이 걸어온 자취를 감안하여 선정된 것들로 근대 조각과 이에 기여한 부르델의 삶과 예술에 대해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함으로써 더욱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르네상스 이전의 고전미에 대한 동경, 특히 그리스의 아르카익(archaic)한 미술에 대한 강한 향수를 지녔지만 이를 모방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의 득창적인 방식으로 힘과 역동을 표현하며 수많은 걸작품을 창조해낸 부르델의 예술세계는 서양 근대 조각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며 오늘날까지 빛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 19세기에 이르는 동안 당시 화단은 현대미술로 향한 행보가 빠르게 전개되고 있던 반면, 건축과 조각은 다른 장르에 비해 별다른 변화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한 채 보수적인 성향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댕은 주관적인 느낌을 바탕으로 인상주의 화가와 같은 시각경험에 충실한 제작과 볼륨의 연구로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부르델은 로댕의 문하에서 15년 동안 함께 작업하여 그의 영향을 적잖이 많이 받았다. 그러나 거목의 그림자에만 묻히지 않고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하여 근대조각에서 현대조각으로 이어주는 교량적 역할을 하였다.
에밀 앙트완 부르델(1861~1929)은 1861년 프랑스 남부지방의 소도시 몽토방(Montauban)에서
태어났다. 부르델은 그리스의 고대 조각을 비롯하여, 로마, 나아가서는 고대 이집트의 조각까지 두루 섭렵하여 신선하고 독자적인 조각세계를 이루었다. 베토벤에서 헤라클레스까지 영웅적인 남성 인물상을 주로 만들었던 부르델은 웅장하면서도 역동적이며 거칠고 강한 남성적인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그는 사물의 본질적인 구조에 바탕을 둔 형태의 단순화를 통해 조각 자체가 독립적인 건축으로 세워지길 바랬다. 그는 인간이나 자연의 사실적 재현을 넘어서서 “조각이란 오브제를 만드는 것이다.”라고 단언함으로써 조각이 그 자체로서 의미 있는 형식이라는 조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결국 부르델은 질서의 형식과ㅏ 조형의 가치 위에 조각과 건축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함으로써 그의 종합적인 기념비 조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부르델은 로댕과 나란히 칭송 받는 근대 조각의 거장이다.
프랑스 남부 몽토방의 고풍스런 가구직공인 아버지를 둔 부르델은 소년시절부터 가구 제작에 종사하는 한편, 훌륭한 소묘나 조각적 재능을 인정받아, 1876년 톨르즈 미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리고 게다가 장학금을 얻어, 1884년 파리로 진출, 에꼴 데 보자르(국립미술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나 팔기에르 수업에 실망해서 곧 퇴학, 이후 독학으로 빈곤과 싸워가며 작품을 제작했다.
1887년이 되면, 최초의 전환점이 찾아왔다. 부르델은 약동적이며, 정열적인 베토벤 음악에 도취되어 베토벤 흉상과 입상을 여러 개 계속적으로 제작하였다. 이 왕성한 제작의욕은 한층 거대한 공간으로 향하여, 1895년부터 몽토방 전사자 기념비에 착수하였다. 또한 같은 해부터 1908년경까지 로댕의 조수로서 일했다.
부르델은 일찍부터 스승 로댕과 반대 원칙을 취하고, 공언하고 있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스승 로댕의 작품이 일절 고전적 양식의 부정 위에 사실주의를 확립한 것에 비해 부르델은 고전적 양식의 속에서 넘칠 듯한 생(生 )의 표현을 풍부하게 건축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스승 로댕의 압도적인 영향에서 점차 벗어나서 제작한 것이 <아폴론의 두상>(1900) 이었다.
부르델이 로댕의 후계자로서 처음 세상에서 인정 받았던 것은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1909) 이었다. 그 후 그의 작품으로서는 샹제리제 극장의 장식부조, <빈사의 켄타우로스>, <봉헌의 성모자>를 시작으로, <과일>, <사포> 등의 대작과 <아날톨 프랑스의 흉상> 등 초상 조각에도 많은 우수 작품이 만들어 졌다. 그리고 기념비 조각의 최대걸작이 되고 있는 것이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세워진 <알베아르 장군 기념비> 었다.
1861년
10월 30일, 에밀 앙트완 부르델, 몽토방에서 어머니 에밀리 레유와 목공예사인 아버지 앙투안 부르델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4년, 아버지를 돕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가구 작업장에 들어간다.
1876년, 일찍이 부르델의 재능을 알아본 에밀 파비용 등의 도움으로 15세에 툴루즈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 본격적인 조각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1884-1886년, 1884년 파리 에콜 데 보자르 국립미술학교에 입학, 콩쿠르에서 2등상을 수상, 2년간 알렉상드르 팔기에르 공방에서 배운다.
1885년, 멘느가 16번지 막다른 골목에 거처를 정하고, 죽을 때까지 이곳에서 살면서 제작에 임한다.
1893년, 로댕 밑에서 보조 조각가로서 일한 이후, 두 사람은 친구 사이가 된다.
1895-1902년, 1895년 몽토방 시로부터 <몽토방 전사자 기념비>의 제작자로 선발된다. 그 기념비의 부분 조각을 여러 차례 제작하여, 국립미술협회 살롱전에 출품한다. 기념지는 1902년 건립된다.
1900년, <아폴론두상>을 제작하고 로댕으로부터의 독립을 확실하게 결정한다. 아폴론 작업은 1909년에 다시 재개한다.
1901년, 3년후 결혼하는 스테파니 반 파리스와의 사이에서 아들 피에르가 태어난다.
1903년, 클레오파트르 세바스토스와 만난다. 부르델의 최초의 학생이었던 그녀는 후에 부르델의 창조의 여신이며 두 번째 아내가 된다.
1905년, 에브라르가 연 파리의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1908년, 로댕의 공방에서 나온다.
1909년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를 제작한다. 그랑드 쇼미에르 아카데미에서 조각 지도를 시작한다. 자코메티와 리시에, 비에라 다 실바가 부르델에게서 기초를 배우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훈장을 받음
1910년, 스체파니 반 파리스와 이혼
1911년, 클레오파트르와의 사이에서 딸 로디아 부르델이 태어남
1913년, 샹젤리제 극장이 준공, 부르델이 설계 단계부터 관여해서, 파사드의 부조와 내부 프레스코와를 시작한다.
1914년, 가장 혁신적인 조각작품 30점을 출품했던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19-1926년, 공적 기관으로부터 두가지의 큰 주문, <봉헌의 성모자>(1919-26)와 <프랑스>(1925)에 착수한다. 이 무렵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1919년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 훈장, 1924년에 같은 코망??을 받음
1924년, 부르델의 작품을 테마로 한 두 권의 서적이 발행된다.
1925년, 미국과 일본에서 전시회가 열린다.
1926년, <알베아르 장군 기념비>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제막된다.
1928년, 200여 점을 모은 최초의 회고전이 브뤼셀의 팔레 데 보자르에서 열린다.
1929년, 파리 알마 광장에 <미키에비츠 기념비>가 완성된다. 투병중이던 부르델은 10월 1일 친구인 으젠 뤼디에의 베지네 별장에서 눈을 감는다.
1931년, 조각 200여점, 유채, 데생, 수채 128점으로 이루어진 중요한 회고전이 오랑주리 미술관에서 열린다.
1949년, 앙투완 부르델 거리로 개명된 옛 멘느 거리에 보존되고 있던 아틀리에에 부르델 미술관이 지어진다.
1972년, 클레오파트르 부르델 사망
2002년, 로디아-뒤페 부르델이 파리시에 부르델 작품을 기증한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ceojjy&logNo=65464229 에서 정리한 것
박숙영, 『부르델』, 창조문화, 2004
부르델은 서양조각이 오랫동안 간과하고 있었던 고딕미술의 아름다움과 고대 그리스 고졸기 조각의 때 묻지 않은 순수함과 건강함을 되살려 냈다. 지적인 설계 속에서 단순한 면과 리듬으로 엄격하게 구축된 종합적이고 건축적인 구조를 지닌 조각을 추구하였다. 당대에 조각의 새로운 장을 연 로댕이 부르델을 “미래의 등불”이라고 격찬한 바 있다.
부르델의 미술사적 가치:
그는 조각에 있어서 그의 스승 로댕의 극적이고 시정이 넘치는 작품을 극복하고 건축적인 덩어리와 양괴에 입각하여 특히 기념비 조각에서 독자적인 예술의 경지를 극명하게 발휘하였으며, 이는 현대 조각에 있어서의 고전적인 양식의 부활과 함께 기념비적인 자율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건축적인 구성과 양식에의 복귀를 추구하였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시도는 오랫동안 건축의 지배하게 있던 그 당시의 조각에 근대 예술로서의 독자적 자율성을 부여한 상징적인 의미의 제시와 함께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한 견고한 구축 가운데서도 신선한 정취가 부여된 독자적인 작품의 확립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부르델은 조각과 사진이 동일한 예술적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지나간 사실의 증거이자 기록물인 사진의 조형 예술과의 관계 속에서 미학적으로 본 것이다.
부르델의 이야기 속으로...:
부르델 조각은 로댕 밑에서 수제자로서 수학한 1900년부터 스승 로댕의 복잡한 여성편력문제로 로댕의 작업실을 나와 독립한 시기인 1910년까지와 1910년 이후 사망하기까지의 두 시기로 크게 나누어 살펴 볼 수 있는데, 1900년에서 1910년까지는 대상의 내면세계의 표현에 깊게 심취한 시기로 이때에 제작된 작품인 <바람 속의 베토벤>, <절규하는 사람들> 등에서 인간적인 고뇌와 같은 내적인 감정들이 극적으로 표출되었고, 1910년 이후에 제작된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 <뮤즈> 시리즈 등에선 부조와 같이 다소 평면적이고 단순화된 형태로 사물들의 형태를 왜곡 및 변형시키고 단순화 시키는 작업을 함으로서 스승 로댕의 그늘에서 서서히 벗어나 그 나름대로의 새로운 형식의 현대 조각이라는 길을 걷게 된다.
그 밖의 유채화와 수채화 및 기타 수많은 에스키스 작품들도 남아 있는데, 대부분은 현재 파리의 몽파르나스에 있던 아틀리에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부르델 미술관에 보존, 전시되고 있다.
<활을 쏘는 헤라클래스>
64 x 60 x 29cm, 1906 – 1909, 청동, MB.1245, 파리, 부르델 미술관 소장
Hercules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정력의 상징인 그는 눈먼 폭력의 수용 가능한 얼굴을 구현하였다. 그의 열두 가지 임무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영웅적 인류의 탄생을 볼 수 있다.
신성한 생명력은 Héraklès archer (Hercules the Archer)의 "bravura piece"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사실, 이 용어로 컬렉터 가브리엘 토마스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은 1910 년 Salon des Artistes에서 칭찬을 받았다.
주인공은 Stymphale Lake의 새들과의 무자비한 투쟁에 뛰어 들어 활을 뻗어 용기를 북돋아준다. 명확하고 아직 담겨있는 추진력이 있습니다. Bourdelle은 "Rodin Saturday"(비공식 리셉션)에서 만난 존경하는 운동선수인 도옌 - 파리 고 (Doyen-Parigot) 사령관 앞에서 점토를 이용하여 고뇌에 찬 포즈를 만들었다.
가슴이 뒤쪽으로 밀고 계약 된 무릎과 오른팔이 왼쪽 다리의 긴장이 표현되어 있다. 고대 그리스의 조각상에서 영감을 얻은 영웅의 가면은 목표물을 향해 발사되는 미사일의 예리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화살은 인류의 궤적이다.-부르델 미술관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