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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왕산(火旺山)을 아십니까?. 가만있거라 또 보자. 거 뭐꼬 마이크는 잘 들립니까 하나 둘 잘 들려요?. 인자 시간이 대충 된 것 같으니 고만 일어나소. 거기 김주발씨 고만 일어나소. 뭐 아직 새벽인줄 아나 하긴 오늘은 쪼깨 일찍 일어나긴 했소만 지금이 몇시고 벌서 아홉시가 되 가네. 흠 흠 거 잘 들 잤는교. 잠자리가 별로 불편하긴 해도 다들 잘 잤는가 부네. 산악회 총무 쵭니다. 에... 오늘은 다들 잘 아시겠지만 갈대로 유명한 경남 창녕군에 있는 화왕산엘 갈려고 합니다. 우리 산악회의 주 테마인 백두대간 종주를 잠시 접어두고 낙동정맥의 끝 머리에 있는 화왕산을 등산 하기에 앞서 오늘의 코스를 안내해 주실 박일도 회원의 소개 합니다. 박 회원의 고향이 이곳 창녕인지라 잘 알아서 안내 할 것이니까 잘 듣고.. 거 고만 자고 일어나라케도. 어이 박씨 어젯밤 뭔일 있어소 와 그래 못 일어나는교 여기가 어디 안방인줄 아나. 기사 양반 거 브레이크 세게 콱 한번 밟아주소. 인자 일어났지. 에... 박회원이 오늘 산행에 앞서 화왕산에 관해 몇가지 하실 말이 있을 모양인데 들어봅시다. 자 박 일도씨 고향 소개 한번 해 보소. 아, 아, 이 마이크가 와 이카나. 아, 아, 원투스리포, 뒤에 잘 들립니까. 내 목소리가 원캉 커서 마이크 없이도 들리긴 한데 차 소리 때문에 잠시 마이크를 빌리겠슴다. 방금 총무님 말슴따나 제 고향이 이곳 창녕인기라. 에 창녕하믄 거 뭐라케야되나. 차가 흔들리니까 말도 잘 안되고 내가 본시 차 멀미가 좀 있어서 금새 끝낼라 캉꺼네 나중에 뭐 물어보고 싶은거 있으면 물어보고 그래 하소. 여기서 화왕산 입구인 옥천이란 동네까지 갈라카만 한 30분 걸리니까 내 오래는 안할끼구만. 이거 뭐부터 시작해야 되노 워낙 말빨이 없어서. (고향이야기나 하나 해보소. 거 뭡니까 고등학교 다닐 때 옆집 순이랑 썸씽 같은 거 안 있소?) 썸씽 거 맞심더. 내가요 이래뵈도 한때는 날린기라예. 옆집 순이랑은 아무일 없었지만 근동에 꽃순이 같은건 손으로.... 에이 지금 무슨 소린교. 총무님 말대로 화왕산이랑 고향 소개하라카는데 거 와 잡음 넣고 그라요. 좀 가만 있어보소. 아 저기 조금 보이네. 저 산이 화왕산이데. 저런산은 여기 고속도로 위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산인기라요. 지금 보시는 게 다 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이기라. 일단 산 꼭데기까지 올라가기 전까지는 아무런 말도 하면 안되요. 높이는 한 760즘 되지만요. 우리가 갈려는 코스는 창녕읍내에서 바로 올라가는 환장고개라는 코스가 아니라 옥천이란 동네로 해서 관룡산을 통해 화왕산의 동문으로 가려고 합니다만 그때가지 아무도 화왕산의 산세에 대해 이런 저런 말하시면 안됩니다. 가서 보셔요. 지금 보시는 대로 에구 그러면 후회한다 이겁니다. 이거 말이 되게 길어지네 흠 흠.. 기사양반 거 차 좀 잘 몰아보소 와 이래 흔들거리노. 창녕이라카마는 가만있자 그래 본래 비사벌이라고도 합디다. 비사벌이 뭔고 하니 나는 새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죽는 동네라고도 할 수 있지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 동네는 심심 산골짝인기라 뭐 마땅히 농사지을 땅도 없고 해서 옛날에는 많이 안살았다 이긴데 사실인지는 내 안 살아봐서 모르겠고,... 옛날 얘기하나 하겠슴다. 뭔 얘긴고 하니 옛부터 이 동네에 전해오는 전설 같은 얘긴데 때는 임진왜란이 끝날땐가 봅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이 동네에서 사람 구경할라카믄 몇 리를 가야 한번 볼까 할만큼 완전 작살났다 이깁니다. 그 난리통에 살아남은 사람중에 강씨라는 사람이 부인하고 여동생하고 살았는데 뭐 먹을것이 있어야지. 몇 날을 풀뿌리만 캐 먹고 살다 여동생이 맛이 살짝 간기라. 오빠가 풀뿌리 캐러 가기만 하믄 올캐 언니를 잡아 먹을려고 환장해서 올캐가 집에 붙어 있을수가 있어야지. 할 수 없어 둘이 살던 집을 버리고 골짝으로 골짝으로 들어가 살 수 밖에 없었다 이깁니다. 여동생이야 어차피 맛이 간 상태라 둘이 도망가긴 갔는데 오빠 맘이 어디 그렇습니까. 어쨋든 여동생은 그 질로 죽었는지 그건 알 수 없고... 사람들이 그럽디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몇 해 동안 엄청난 가뭄이 들어 들판엔 제대로 된 풀뿌리조차 구하기 힘들만큼 사람살이가 어려웠던 때라 곳곳에 도적들도 많았다는데 두 부부가 살 곳이라곤 사람들 발길이 닿지 않는 골짝 빡에 없었는지 어쨋든 골짝으로 숨어들어 겨우 살았는데 그 골짝이 어딘고 하니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관룡사 그 골짝입니다. 가 보시면 알겠지만 관룡사에서 턱하니 앞을 보면 엄청나게 가파른 벼랑이 병풍처럼 둘러 있어요. 그 벼랑중간에 암자가 하나 있는데 그 곳이 지금 얘기하고자 하는 벼랑 강씨의 시조 탄생설화이니까 가서 보시거던 내 얘기하고 맞는지 한번 알아보소. 이 부부가 산골짝에 숨어 풀뿌리를 캐는데 사람이 풀뿌리만 먹고는 살수 없는기라. 그들이 필요한 건 곡기인데 그걸 구할 수가 있어야지. 곡기 없이는 얘도 못 낳는 기라. 얘를 놔도 어째 곡기 없이 젖도 안나오는데 ... 하옇튼 그들이 벼랑 근방에 움막을 짖고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어느날 부인이 가만히 보니까 그 높은 벼랑에서 연기가 조금씩 나는 게 보였다 이기라. 남편 몰래 그 벼랑까지 기어올라가 보니 벼랑중간에 굴이 있고, 오늘 가서 보시겠슴다만 그 굴 이름이 굴덤이라고 합디다. 덤이 무슨 말인고 하니 이 동네에선 벼랑을 덤이라고 하지요. 벼랑에 있는 굴이라고 굴덤이라고 하는데 그 안에는 신기하게도 석간수라는 물이 출렁대며 흐르고 있어요. 이 여자가 가만히 들여다 보니까 사내 둘이 굴속에서 밥을 지어먹고 있는기라. 남편한테 쌀을 봤다고 얘기 했겠지. 밤에 남편이 몰래 그 덤을 올라가 굴속을 들여다 보니 사내 둘이 자고 있는기라. 됐다 싶어 쌀자루를 더듬거리는데 두 사내가 벌떡 일어나 그 쌀자루를 뱃으러 와락 달려드는 통에 두 사내가 거짓말 같이 벼랑 밖으로 몸이 쏠리며 벼랑 낭떨어지로 떨어졌다 이깁니다. 목숨과도 바꿀수 없는 쌀자루를 도둑맞는다 싶어 앞 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다 보니 벼랑밖으로 떨어졌다 이긴데 어쨋던 얘기니까 그렇다 생각하시면 되요. 그 부부는 굴덤에서 얘기를 낳을 수 있었는데 그 얘기가 벼랑 강씨의 시조가 되는 그런 얘깁니다. 이 얘기를 아는 사람은 내 엄마하고 나하고 둘이 밖에 모르니까 더 아실려거던 우리 엄마한테 물어 보시고, 내가 하고자 하는 얘기는 관룡사에서 턱하니 앞을 바라볼 때 벼랑강씨의 시조설화가 있는 그 덤을 슥 지나치지 마시란 얘깁니다. 내가 아는 사람들은 금강산 만불상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히 끝내준다는데 그 사람들이 금강산을 다녀오지 않아서 판단의 근거가 뭔지는 모르겠슴다. 저만큼 아, 여기가 소름들판이라 하는데 자 오른쪽을 한번 보셔요. 들판이긴 하지만 이 동네에선 평야죠. 주로 마늘 농사를 짖는데 사람 수에 비해 논이 좀 많은 편이죠. 소름 들판 끝에 저기 보이는지 모르겠슴다만 저기 저 동네가 김일성 둘째 마누라 성혜림이 본가가 보이는데 글세 잘 안보이네. 하옇튼 이 동네는 창녕성씨등이 많이 살고 창녕성씨의 시조가 이 소름들판에 적을 두고 있슴다. 창녕에는 창녕 정씨, 창녕 신씨, 창녕曺씨, 벼랑강씨, 어느 동네 치고 탄생설화가 없는 곳이 있겠습니까 만은 이 동네선 유별나게 많은 성씨의 시조들이 탄생한걸 보면 누군 그렇디다 창녕을 제 2의 경주라고, 그 애긴 좀 있다가 하고, 성혜림 본가엘 가 봤더랬습니다. 99칸 집을 보신 분 계셔요? 옛날 집입니다만 전혀 옛날 같이 느껴지지 않는 집. 99칸 집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집이 그 집입니다. 어느 동네 가 봐도 지금은 99칸 집이 허물어 지고 주인이 바뀌고 그렇습니다만 저 집은 고스란히 99칸의 집이 남아있습니다. 열두대문이 뭔지 아십니까. 대문이 열두개란 얘긴데 거짓말 같다고요?. 첫문을 열고 들면 하인들이 사는 방이 나오고 두 번째 문을 열고 들면 하인 자식들이 살고 세 번째 문을 열면 둘째부인 .. 하옇든 열두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정자가 있습니다. 정자 아래론 열대 우림이 펼쳐져 있고, 그 우림을 끼고 도는 정원엔 메기부터 시작해서 1000여종의 생물들이 우글거리고, 그 정원을 휘감고 있는 기암 괴석 하며 늘어진 수풀하며... 공갈 좀 때려서 아마존 강가를 거니는 느낌을 주는 정원을 한참 거닐다 보면 일본식 정원 같기도 하고 유럽의 성인 것 같기도 한 그 집의 마당엔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옛 영화를 본 듯 마음이 우울해 질것입니다. 본채는 6.25사변통에 다 타버리고 99칸 집들은 기둥이 내려앉고 써금써금 무너지는 기왓장들이 쥐새끼들 똥 오줌에 절여 있죠. 성혜림 오빠가 남로당원이였고, 그 아버지 또한 남로당원이였기에 6.25때 뺄갱이 소굴이였던건 당연했겠죠. 또한 무차별 폭격을 당한것도 당연하고요. 그 잔해들이 치워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는 광경을 보시면 어느 박물관에 가시는 것보다 더 많은 느낌을 받으실 겁니다. 성혜림 가족들이 북으로 가 권력을 잡지 못하고 다시 북의 공작원으로 남파된 성혜림의 오빠가 그 휘황하던 부귀영화를 잡지 못하고 감옥에서 쓸쓸히 목숨을 마친 것을 보면 우리네 삶은 마땅한 사전 같은 게 없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생각들게 할겁니다. 시간 나시거든 창녕땅에 다시오셔요. 그땐 반듯이 그 집에 가셔서 삶의 사전이 있나 없나를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성혜림 본가를 지나 한 20분 가다보면 우포늪이 나옵니다. 우포늪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본인은 그 곳에 고모부가 사셨기에 우포늪의 역사에 관해 어릴적 추억만으로도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옛날 옛적 지구가 막 생겨났을 무렵 신들만 살던 때가 있었죠. 공룡들이 아무데나 발자국 찍고 다닐적 얘기니까 오래되긴 했어도 진실은 결코 숨길 수 없으니까, 그 옛적 실화 한 토막을 하고 우포늪에 대해 얘기 하겠슴다. 육지에서 맨날 신들이 쌈박질에다 우룽우룽 난리를 치고 있을 때 바다밑을 평정한 호세이돈이 할 일이 없어 용왕들하고 고도리 치며 세월을 보낼 때 호세이돈의 오른팔 콜무츠가 심심해 견딜수가 있었야죠. 용왕의 딸들은 해변에서 육지만 바라보고 뭐 노는 총각 없나 기웃거리죠 자기한텐 눈도 안주는기라. 육지에선 전쟁놀이로 포탄이 쏟아지고 총소리 멋지게 나는데 콜무츠는 대빵 고도리 뒷돈 대느라 영 재미가 없는기라. 본시 쌈박질 좋아하던 콜무츠는 어느날 졸개들을 데리고 반란을 일으켰지. 호세이돈을 용궁에 가둬놓고 드디어 육지를 향해 나섰는데... 그때 육지의 신들은 대개 그리스 로마쪽에서 격전을 벌리던때라 그들도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 가던 길이였겠죠. 헌데 용왕의 딸에게 빠져 있던 콜무츠의 부하들이 반도라 하길레 이탈리아처럼 생긴 한반도 아랫녁인줄 알고 그때 용왕의 둘째딸이 한반도에서 단군한테 눈이 멀어 남해 바다가에서 죽치고 있던때라 당연히 한반도 아래쪽으로 불쑥 기어 올라왔겠죠. 수천의 졸개들이 바다를 骊고 불쑥기어 올라와 보니 이 동네가 아닌거라 그들 중 똘똘한 몇은 다시 땅속으로 쑥 기어들어가 이탈리아 반도로 가긴 했는데 나머지 쫄병들은 육지에 올라온 바다 표범처럼 움지일수가 있어야지. 한반도 아랫녁. 이곳 창녕땅이 옛부터 전설도 많고, 신화가 많은 것은 그 콜무츠의 신들졸개들이 어디서 주워들은 신들의 풍월을 쏟아 부었기 때문일거고, 이 동네가 유난히 늪이 많은 것은 그때 이탈리아로 돌아갔던 몇몇 신들이 땅속으로 다시 빠져나갔기에 그들이 빠져나간 땅이 늪이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이 이야기 또한 이 동네에선 극비 사항으로 우리 엄마하고 나하고만 아는 이야기니까 함부로 말하고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동네는 우포늪과 크기는 좀 작지만 번개늪, 장개늪, 목포늪 뿐만 아니라 엄청 많은 늪들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동네이기도 합니다. 세상 어느곳에서도 볼수 없는 이 많은 늪을 우린 후손들에게 영광스럽게 물려 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을 나 또한 감사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간혹 늪이 뭔가라는데 늪이란 강보다 낮은 지대로 물이 바다로 흐르지 못하고 모여 있는 곳을 말합니다. 우포늪의 학술적 조사에 의한 설명을 더하자면 우포는 1억만년전 공룡이 우글거리던 거대한 호수의 중심부로 98년 3월 부산대 김항묵교수가 세진리 일대 야산에서 공룡발자국을 발견했다고 보고 되어 있슴다. 우포늪의 면적은 70만평이고 1000여종의 생명체가 오랜 세월 퇴적물에 의해 많이 자란 수초더미에 잘 살고 있답니다. 람사(Ramsar)협약이란 말 들어보셨죠. 1971년 2월 이란의 람사라는 곳에서 물새서식지로서 특히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련한 협약인데 우포늪이 람사 협약에 의해 보호되고 있긴 합니다만 그게 주변 사람들 특히 우리 고모부 입장에서 보면 영 되먹지 못한 법이라 맘이 편치 않나 봅디다. 우포늪의 식물을 보자면 우리나라 전체 식물의 10%에 해당하는 많은 종류가 있고, 수생식물은 60%를 차지할 정도로 종다양성이 높답디다. 우포를 잘 보시려거던 물안개가 가장 아름다운 해드기 직전 10~30분. 안개속에 들어있으면 환상이란 뭔가에 대해 정답을 찾으실 겁니다. 또한 우포늪은 금강산처럼 사계절에 뚜렷한 반응을 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봄에는 수면을 초록으로 물들인 여러 수초들의 싱싱함을 즐길 수 있고, 여름에는 온갖 곤충들의 세상이, 뇌의 무게가 1mg도 안 되는 곤충들이 우리 사람들처럼 사랑 증오 모성애를 가지고 단체 생활을 하고, 권투선수보다 더 정확하게 한방으로 상대를 쓰러뜨리기도 합니다. 가을은 온통 잠자리 천국이며, 또한 은하수 천국이기도 합니다. 우포늪의 여름 하늘엔 우리나라 모든 별들이 다 뜬다고 하는데 그건 주변에 다른 빛이 없기 때문이랍니다. 겨울에는 바람에 일렁이는 갈대밭을 걷는 것도 좋지만 겨울 우포의 참 모습은 진객, 겨울 철새를 보는 것입니다. 8-9월 저녁 8시엔 개똥 벌레의 불꽃놀이와 장마가 끝날 무렵 목포늪의 왕버들 수림지대 옆은 가시연 천국이랍니다. 고서점에서 가끔 희귀본을 구하듯 오래된 늪에서 오랬동안 못 보았던 새나 곤충을 만나는 것 도한 큰 기쁨이라는데 그건 잘 모르겠슴다. 지금까지 우포늪의 생물학적 관찰은 순전히 창녕여고에서 만든 인터넷을 참조한 거니까 자세히 보시려거던 직접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인자 창녕 톨게토를 빠져 나왔슴다. 여기가 내 고향하고도 창녕인기라. 창녕하믄 창녕장날이 유명하고 창녕장날 하믄 우리 고모부 얘기를 빠트리믄 안되지예. 작년 가을 여든의 나이에 교통사고로 졸지에 목숨을 잃으신 고모부께서 남기신 발자국은 우포늪의 공룡발자국 보다 더 깊이 이 조카의 가슴에 남아 있는걸 보면 확실히 고모부는 멋진 분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이서방이라고 하시는걸 보면 손아래 처남이신 고모부는 산토끼 토끼야라는 동요를 작사 작곡한 창녕군 이방면 이방초등학교 교사 이일래가 살던 동네에서 한발 떨어진 우포늪이 보이는 동네에서 사셨더랬습니다. 지질이도 가난하셨던 고모부지만 주머니에 십원짜리 한 장이라도 있으면 남 못줘서 환장하셨던 그 분이 하셨던 일은 십리가 넘는 동네에서 창녕장날마다 장 보따리 실으나르는 짐수레꾼을 하셨죠. 소 달구지에 한발 가득 짐을 싣고 넘나들던 창녕장날이 그분에게는 살아가는 이유였을수도 있지요. 사람 만나 술마시기를 좋아하셨던 그분이 나중에는 경운기로 짐을 실어 나르시며 평생을 사셨더랬는데 코메디같이 살다가신 그분이야기는 다음에 책으로 나오거던 많이 사서 보시고 짧게 한 토막 해 드리겠습니다. 성질 급하기론 화왕산 호랭이보다 더 급한 그 분이 사위를 둘 보셨는데 큰 사위가 바람을 피다 어찌어찌해서 장인에게 잘못했다고 앞으로 잘 살겠다고 빌러 오는 길이었는데 고모부가 그 꼴을 참지 못하고 작대기를 집어다 사위를 얼마나 때려 팼는지 그 길로 사윈 창녕읍내 병원에 실려가고, 사돈 영감과 멱살 잡고 싸우다 뒤로 넘어져 다리를 부려트렸다는 이야기 하며, 어느핸가 감기가 걸렸더랬는데 이깟놈의 콧불이, 이 동네선 감기를 코에 불이 났다고 해서 콧불이라 합니다, 생전 감기 한번 안 걸린 고모부가 콧불이란 놈한테 영 안되겠던지 감기약을 사 먹었는데 빨리 낳고 싶어서 그랬는지 한꺼번에 며칠분 약을 다 먹고 배가 아파 읍네 병원에 실려가 고생했다는 이야기하며 장날 고모부에게 술 못 얻어먹은 사람은 읍내 사람이 아니란 이야기들을 다 모으면 그야말로 사람이 어떻게 살면 오래 사는기에 대한 정답이 될 겁니다. 여든이 다된 노인이 경운기를 끌고 안개 낀 우포늪 근처를 통해 읍내 장터에 가던길에 마주오던 트럭과 부딪쳐 돌아가시긴 했어도 그때까지 정말 여든 같지 않는 활력으로 씩씩하게 사셨던 고모부를 생각하면 빌빌대는 이 조카 반성해야 할 일이 너무 많습니다. 이 동넨 모두가 사돈의 팔촌되는 사람들이 살다 간 동네이기도 합니다. 고모부가 중매한 사람들이 같은 동네끼리 결혼한 사람만 해도 서너집씩은 되는 걸로 봐서 탁월한 언변을 가지신 것 또한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은 창녕읍내가 좀 만하다고 하셨던 분도 계신데 내가 초등학교 다닐댄 이 동네가 서울보다 큰 동네라고 우겨셨던 노인 두분이 계신데 아직 살아 계신걸로 봐서 서울이 큰지 읍내가 큰지 판가름이 안났나 봅니다. 그 노인 말씀이 자식이 서울산다고 해서 가셨더랩니다. 아들이 서울에 살긴 사는데 이십 몇 년 전 이야긴니까 아마 서울 변두리 어느 동네에 살면서 서울 산다고 했겠죠. 그 노인이 잔득 기대를 하고 아들집에 가서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읍내보다 작거던. 속으로 서울 해봐야 별거 아니다고 하고 동네로 와서 서울이 크다해도 창녕읍내보다 작다란 말로 다른 노인과 싸움이 된겁니다. 다른 노인은 생전 서울에 가 봤어야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읍내보다야 작겠는가. 이성계가 살았고, 이승만이도 살았던 동넨데.. 서울 안간 사람이 서울 간 사람과 싸우면 서울 안 가본 사람이 이긴다느데 어찌된 일인지 그 노인들은 속담을 깨고 서울 가본 사람이 이기는 꼴이 되어 지금까지 우리동네 노인정엘 가면 그 다툼은 계속 되고 있다나 어쩐다나. 하여튼 창녕읍내엔 없는 게 없습니다. 경주만큼 큰 무덤도 많고, 깨진 옛날 그릇도 안 깨진 것까지 합치면 경주보다 더 많고, 경주에는 없는 진흥왕 순수비도 있슴다. 이 동네 순수비는 척경비로 읽히는게 맞슴다. 신라 진흥왕이 이 동네까지 먹는다는 표시로 돌멩이 하나 길게 뽑아 세웠었는데 무지렁이 백성들이 그 높은 뜻을 알 리가 있나. 동네 징검다리를 놓으려다 보니 괜찮은 돌이 하나 있길레 수십년동안 돌다리로 돌멩이의 순수한 역할을 다 하다 어느핸가 동물원에 갖힌 짐승들 마냥 읍내 공원에 끌려와 지붕쳐진 만옥정이란 곳에서 눈비 맞고 달달 떨고 있답니다. 이 돌은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에 있는 순수비 처럼 순수 관경이란 말은 없고 다만 왕이 새 점령지를 다스리는 내용과 이에 관련된 사람들을 열거했으므로 이에 척경비라 일컸는다고 창녕군 문화재 관리국에서 천명 하셨습니다. 문화재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동네 뒷동산에서 장남감처럼 갖고 놀던 고분에 대해 한 말씀 꼭 해야겠습다. 내 고향은 정확히 창녕읍내에서 마산쪽으로 이십리 떨어진 계성군 계남리입니다. 여기서 계남리라는 동네이름을 올린 이유는 어느 박물관에 가도 항상 계성고분에서 출토된 마제석부, 삼엽문 환두대도,양이 부렁배.... 알지도 못하는 못생긴 그릇 몇 개 놓고 출토처와 유물명등을 적어놓은걸 보실겁니다. 사실 우리나라가 이런 유물들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는지 아시는 분 계셔요?. 모르긴 해도 삼십년도 채 안될겁니다. 그때까진 어땟는냐고요?. 그야말로 아이들 장난감에 지나지 않았죠. 창녕이 비화가야 였답니다. 가야국은 강력한 부족국가로 기마부족임을 몇일전 텔레비젼에서 그러더군요. 강력한 지도력을 가진 부족장이 엄청 좁은 동네에서 살기 힘들어 신라와 백제 들과 한판씩 붙어 깨지기도 하고 이기기도 하였지만 부족장들의 힘과 비례하는 많은 유물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는걸 보면 잘 살다 간 부족임은 틀림 없을 겁니다. 우리집이 초가집에서 기왓집을 지으려 흙이 필요했던 70년 초쯤일 겁니다. 계남 고분들이 그때까지 도굴자들 이왼 아무도 관심이 없었을 때라 뒷 동산에 소풀 뜯기러 가는길에 빗물에 씻겨 불숙 불숙 튀어나오는 옛날 그릇, 우린 그렇게 불렀습니다. 밥그릇으로도 쓸수 없는 뭉퉁하고 이상하게 생긴 그 그릇들은 새로 나온 사기그릇에 비해 아이들 눈엔 하나 쓸모 없는 그릇에 불과 했죠. 사기그릇들은 잘게 부셔 연실에 뭍혀 연 싸움에 쓰이기도 하고 맨들한 표면을 손바닥으로 쓸면 느낌도 좋은데 옛날 그릇들은 표면도 꺼칠하고 연실에 쓸 수도 없고, 산에는 지천으로 쌓였는데 집에 갖고 오면 아버지가 지저분하고 어지럽다고 냇가에 갖다 버리라 하지... 그래요 딱 한곳에 쓰일데가 있었어요. 닭 모이주는 그릇으로 썼어요. 파수부유대소호라는 암호같은 이름을 가진 입구가 둥그런 그릇을 캐다 입구를 부셔버리고 닭모이나 주던 그 그릇들이 요즘 박물관엘 가면 엄청난 호강을 하고 있는걸 보면 아버지왈 저런 그릇들은 한 지게 줘도 엿 한가락 안 줬는데.. 그랬어요. 기왓집으로 바꿀려고 흙이 필요해서 동네 아재비 밭을 빌려 그 곳의 흙을 팠더랬는데. 옛날 그릇들이 마치 돌무덤처럼 박혀있어 흙을 뜰 수가 있어야지. 마침 예술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외삼촌이 처음보는 그릇이라 깨지면 안 된다고 곱게 파내어 집 뒷뜰에 소 달구지 한 차 가득 쌓아 두었더랬죠. 아버진 냇가 갖다 버리지 않고 뭐하는 짓인냐고 호통하시고,.. 하여튼 집 뒷뜰만 아니라 동네 구석구석 잡다한 못생긴 그릇파편들이 어지럽게 굴러다니던 70년대 중반 엿장수들이 그릇들을 엿가락과 바꾸어 주기 시작했죠. 아이들은 신났죠 뭐. 산으로 가면 하루 못해도 한 짐씩 짊어지고 오는 그릇들을 엿장수 뿐만 아니라 수집가들이 순식간에 동네를 쓸었죠. 외삼촌이 파 놓은 아름들이 그 그릇들을 엄만 잘 됐다며 빨래비누 두장하고 우리집 사람 숫자만큼 엿을 주곤 다 실어갔죠. 뒷마당이 깨끗하다고 아버진 좋아 하셨고 우린 엿 한가락 더 먹으려 뒷 동산으로 달려가 남들이 캐다 남은 그릇들 주워 또 엿 가락으로 바꾸어 먹은 그릇들만 갖다 놓아도 창녕박물관 두 개는 채우고 남을 겁니다. 아버진 지금도 그런걸 보려고 박물관에 가나 돈이 썩었다고 하십니다. 구마 고속도로가 건설될 때 도로에 편입되는 땅들을 무슨대학교 역사학과에서 몇 달동안 유물 발굴 작업을 하였더랬습니다. 우린 그랬죠 저긴 안나온다. 짜식들 뒷동산에 가면 그릇들 천진데 할 일 없는 사람들이라고.... 그렇게 파낸 땅에서 조차 뭐 청동기 시대 마제석부라는 둥 양이부렁배라는 둥 방송과 신문에 떠덜석 했더랬습니다. 인터넷에 보니까 이렇게 적혀 있네요. 1976년 구마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해 파괴에 직면한 사리고분군이(여기서 제가 주장하고 싶은 건 분명 사리가 아니라 내 고향 계남 고분군이며 이는 창녕 박물관에 가시면 분명히 계남 고분군, 내가 엿 바꿔 먹었던 그릇들이 지천으로 늘려 있던 동네, 그 그릇들은 지금은 어디에서 무었이 되어 있을꼬..) 조사되었으며, 1994년에 구마 고속도로 확장으로 인해 사리 A,B지구 고분군이 부산대 박물관에 의해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횡혈식 석관묘와 횡구식 석관묘, 옹관묘 등이 넓게 분포되어 있음이 확인되었다. 창녕 박물관에서 조사한 창녕지역 고분문화의 현황을 살펴보면 창녕지역은 삼국시대 가야의 일국이였던 비화가야가 있었던 곳으로 그와 관련된 많은 유적들이 남아 있는데 대부분이 고분관계자료로 남아 있다. 특히 창녕지역은 낙동강을 끼고 있는 지리적인 잇점 때문에 가야 및 백제 지역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신라에 의해 일찍부터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지역이다. 고분 유적에 대한 조사는 000호분이 발굴되었으며 화차 2량분의 유물이 출토되었다고 하나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그렇다. 도대체 알 수 없다는 그 말이 진짜이니 대 가야국의 후손으로서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다들 어디로 갔겠는가. 여러분이 생각하시는 것과 똑 같이 어디로 갔는지 나는 안다. 일본 동경 국립박물관의 오쿠라 콜렉션의 유물 대부분이 창녕지역에서 출토된 것이다. 더런 놈들이라고 말하지 않겠다. 무식한 후손들이라곤 말 할 수 있다. 왜 무식한지 아십니까. 지금 우린 창녕에서 계성을 향해 국도를 타고 있습니다. 이 차의 바퀴와 맞닿은 아스팔트에 대해 이야기를 들어보시면 왜 우리가 무식한 놈들이라는 걸 아실겁니다. 조상들이 남들에게 나라를 빼앗겨 어떻게 살았는지 난 모릅니다. 그건 내 책임이 아닙니다. 내게 책임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왜 나라를 빼앗겼는가가 아니라 빼앗긴 나라에서 우린 어떻게 살아 왔으며 어떤 무식한 놈들이 무식하게 해서 이 땅의 정기를 피폐하게 만들었는가에 대해 비판하고, 그런 놈들의 후손들이 감히 자기 조상이라고 절하지 못하게 해야하는데 난 책임을 갖고 있습니다. 내가 즐겨 찾는 뒷산에 언젠가 엄청 큰 무덤이 들어앉았습니다. 큰산의 허리를 불도져로 다 문질러내고 턱 하니 앉은 무덤 주인의 비석엔 이렇게 쓰여져 있었어요. [양화가 악화를 물리치지 못한 아픔을 삭이며 이곳에 영면하다] 약력: 동래고보 졸업, 명치대 정치학부 졸업, 1950년 민주당 경남 도 위원장, 00년 제 5대 국회의원...... 뒷동네 할아버지와 소풀 뜯기러 가는 길에서 먼지와 자갈이 날리는 신작로를 벗어나며 그 할아버지가 심각하게 들려준 이야기는 나에게 그 책임을 지워준 짐이 되었다. "이 길을 누가 냈는지 자넨 모를 거다. 일제 때 우리가 직접 만든 길이였어. 일본 순사들의 눈치도 물론 보았지만 우린 우리 손으로 이 길을 낸다는데 힘이 났어. 비록 풀뿌리에 목숨을 연명할 때였지만 누구 한사람 게으름 부리지 않고 일을 했어. 이 길을 아스팔트로 포장할 땐 우린 그 찐득찐득한 아스팔트가 껌인 줄 알았다네. 아이들은 그걸 껌처럼 씹고 하며 같이 나와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네 .그런데 이 길이 왜 이렇게 자갈길이 됐었는지 자넨 모를 거야" 그 할아버진 주머니를 뒤적이며 담뱃불을 붙이고는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고 높은데 있다는 놈들이 그 모양이니 나라가 그놈들 손에 넘어갔지 해방이 되면서 군(郡)에서 사람들이 나와 곡괭이 하나씩 들고 나오라고 했어. 우린 더 좋은 마을을 만들 수 있겠구나. 아니 그런 생각은 없었어 해방이 되어도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 었을 때니까. 군에서 나온 양복 입은 사람이 사람들 앞에 나서서 뭐라고 그러는지 알아. 일본 놈들이 우리 땅에서 만들거나 지어 놓은 모든 것을 부수어야 한다는 거야. 그들이 만들어 놓은 이 더러운 길로 우리는 다닐 수 없다는 거였어 누가 만들었다고?. 그 양복 입은 사람이 만들었는가?. 그 때 그 사람은 군청에 앉아 그 도로를 만들 때 사람들을 끌어 모은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이 일본 놈이 어떻니 하며 악다구를 퍼 붇다 군에서 내린 결정이니 모두 곡괭이로 그 아스팔트를 파내라는 거지. 자네 생각 해봐 기계로 끌고 와 다져 놓은 그 길을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또약볕에 아스팔트를 한 조각씩 파 낼 수 있겠어?. 그러나 우린 할 수밖에 없었어 왠지 알아. 그 곳에서 그걸 파내는 사람에게 미국에서 주는 배급 밀가루를 탈수 있었거든. 그걸 파내는 심정은 접어 두고, 꼭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그 사람들이 미워서 우린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아. 그렇게 할 일이 없다면 저 냇가 뚝이나 제대로 쌓지 비만 오면 뚝이 무너져 매년 그 물난리를 치르면서도. 그건 안중에도 없었으니 . 자네들은 그러면 안되네 눈을 더 크게 떠야 되네. 정말 일본 놈들이 미워서 이 길을 파내었다면, 지금은 더 좋게 길을 만들어야지 이게 뭐야?. 이 길 위에 굴러다니는 저 자갈들이 어떻게 여기까지 와 있는지 자넨 알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한 집 당 일년에 한 번씩 냇가에 있는 자갈들을 지고 가거나 아낙들은 머리에 이고 여기까지와 무덤만 하게 길가에 모아야 하지 않는가. 그 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일일이 이 집 것은 자갈들이 커서 쓰지 못하니까 다시 가져 오라는 둥 여자 혼자 사는 집에선 하루종일 머리에 저 돌들을 이고 와 그 고생을 하게 만드는 놈들이 뭐가 민족이고 뭐가 국가여. " 할아버지는 자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채 삿대질을 하며 높은 사람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것뿐이라면 내 더 이상 말을 않겠네. 피죽 끓여 먹고살던 이 시골 무지랭이 들이 공산당이 뭐고 이승만이 누군지 알긴 알았어?. 자기들이 잘못해서 나라 뺏기고 그나마 두동강이 난 나라에서 일본 놈들도 하지 않았던 그런 무지막지한 일을 그놈들이 한 거야. 그것도 멀건 대낮에. 이보게 일도. 내 자네한테 이 말을 왜 하는지 모르지만 자넨 들어야 하네. 내게 나보다 두 살 많은 형이 있었어. 그 형이 뺄갱이라면서 잡아가 어떻게 했는지 아나. 짐승처럼 남의 집에서 뼈빠지게 일해 주고 보리쌀 몇 되 얻어먹고 살던 형이 빨갱이면 뭐가 빨갱이야. 글자 한자 읽을 줄 모르는 형이 빨갱이 노릇을 했다고 잡아가서는 마른명태 엮듯이 엮어 바다 속에 밀어 넣었다네. 산채로 수장을 시킨게지. 그해 거제도 앞 바다에 갈치떼가 모래 밭에까지 밀려올 만큼 풍어였다더구먼. 그놈들이 사람 살코기 뜯어 먹고 배터져 죽은 갈치라더만... 이 좁은 창녕군에서 그 때 끌려간 사람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 이놈이 죽이면 저놈이 죽이고 우리가 서로서로 그렇게 피에 맺히도록 원수진 사이야 . 다섯 형제 중 나 혼자 살아 남았네. 그렇게 죽였으면 이젠 정신들 차려야지 아직도 서로를 죽이지 못해 으르렁거리고 있으면 되겠나. 그러면 안되는거야. 이게 무슨 짓이야 그래" 양화가 악화를 이기지 못한 이 시대를 아파하며 영면한다던 국회의원이였고 육이오때 민주당 경남 도 지부장이셨던 그 높으신 분이 그 산에 고이 묻혀 있는 것을 보고 이 땅에 개처럼 살다간 민초들의 울음을 지금 이 아스팔트와 부딪치는 타이어와 같이 답답함을 느끼며 잠시 쉬었다 하겠습니다. 말 나온 김에 짐승같이 살다간 사람들 이야기 하나 더 하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평생 하지 않으려 했는데...... 우리 동네에 김 과장이란 사람이 살았습죠. 어릴때 대통령 다음으로 높은 벼슬이 과장인줄 알았죠. 지금도 물론 그러하긴 하지만. 그 양반이 어디 과장이냐 하믄 창녕군 수리 과장이었죠. 수리과장이란 다시 말해 논에 물길을 만들어 물을 공급해주는 곳이었는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런 사람들 다시말해 글 좀 알고 군청에 들락 거렸던 그 시대 사람들이 토지 개혁인가 아실겁니다. 해방후 논을 골고루 분배해 준다나 어쩐다나. 무지렁이 하루살이 민초들이 그걸 알 턱이 있겠습니까. 무식한게 죄죠. 그 양반들이 연필 가는대로 땅 떵어리 다 차지하고도 남죠. 어디 남 생각 해 주는 양반들입니까. 어찌 친척이라도 되면 몇 마지기 인심쓰긴 했다지만... 무지렁이 노인네는 평생 아니 지금도 일흔이 넘었는대도 그 집의 머슴으로 살고 있고, 그 자식 또한 감방살리로 반평생을 보내고 있는 반면 김과장 자식들은 하늘도 무심하시게 덩떵거리며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아픔에 대해 우린 너무나 오랬동안 침묵해 왔다는데 동의 하십니까. 그라믄 지금와서 어쩌자는 거야. 나도 모르겠어요. 우린 아무런 할 일이 없어요. 그냥 깨갱거리며 그런 일이 있었다고 뒷구석에 쑤셔박혀 궁시렁 거릴 수 밖에요. 그 노인네가 내 친구 아버지이며, 내 아버지의 삶도 그 노인과 별반 다르질 않아서 허접하게 살아오신 우리 어머니 생각하면 사신 날들이 서러워 꺼이 꺼이 눈물이 납니다. 왜들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울 아버진 자식들 입에 쌀 한톨 넣어주려고 벼랑강씨 부부처럼 산 골짝으로 이사 할까 하고 해뜨는 산 중턱에 앉아 담배를 피셨더랬죠. 아랫녁에 땅 한평 팔면 이 산골에선 몇 마지기라도 살수 있을텐데..... 그러면 아무련 자식들 입에 곡기는 채울 수 있을텐데... 그러시다 당신 혼자 편하자고 자식들을 이런 심심산골까지 끌고 올순 없지 하시고 결국 정착하셨던 동네 계남이 저 아래로 보입니다. 지금 건너는 이 다리이름이 공굴 다립니다. 경상도 사람들의 발음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많이 게으르다는 것을, 말씀함에 신경쓰지 않고 가능한 입을 적게 움직여 자신의 의사를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가장 잘 찾은 것이 경상도의 사투리 특징입니다. 경상도 사투리는 결코 입을 크게 벌리지 않습니다. 길게 하지 않습니다. 어릴 때 배우지 못하면 커서 흉내내기 어렵습니다. 이 다리의 이름은 콘크리트 다립니다. 이걸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공굴 다리가 됩니다. 이 동네 이름 또한 콘크리트 다리 옆 동네인데 간단하게 공굴이라고 부릅니다. 공굴다리에 얽힌 많은 사연 중에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근동을 다 돌아보아도 옳은 다리라곤 이 다리 하나뿐인 관계로 거지들의 주거지였다는 것과, 12톤 트럭이 이 다리를 건너다 다리가 내려앉았던 기억, 다른 모든 길은 자갈길 비 포장이였어도 유독 이 다리만큼은 시멘트 길 이였다는 몇 가지 기억들이 납니다. 이 다리를 건너 이제 막 옥천이란 골짝으로 올라갑니다. 작년 10월 셋째주였죠. 화왕산에 5만의 인파로 난리를 쳤더랬죠. 우리가 굳이 9월로 산행을 잡은 것은 10월이면 여기서부터 20리길을 걸어서 옥천까지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10월이면 우린 더 이상 차로는 올라 갈 수 없습니다. 창녕읍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운동장과 차를 주차시킬 수 있는 공간을 모두 할애해도 차가 하도 많아 고속도로에서부터 막혔다면 날더러 거짓말한다고 하시겠죠. 창녕읍내에서 환장고갯길을 통해 올라가던 사람들이 내려오는 사람들과 엉겨 다시 읍내까지 내려 왔다가 마치 문경세제 넘듯이 패를 모아 다시 올라가며 내려오는 사람들을 몰아 정상까지 다시 밀어붙이고 그랬다죠. 봄이면 진달래가 불이 나고 가을이면 억세가 겨울이면 억세가 진짜 불이 납니다. 음력 정월 보름이면 화왕산 산신제를 지내고 그 많은 갈대를 불태웁니다. 올라가 보십시오. 지금 짧은 생각과 느낌으로 화왕산을 말 한다는건 감히 산에 대한 불경이므로 산에 대한 느낌은 직접 보시고 단지 여태까지 잘 못 알려진 사실 하나를 간단하게 말씀드리고 마칠까 합니다. 지금 올라가는 이 골짝은 유별나게 절이 많습니다. 부처도 많고 신도 많은 곳이지요. 그건 처음에 창녕이란 땅이 어떻게 생겼는냐는 역사적 사실을 설명드렸기에 이 골짝의 신들에 대한 이해가 충분하리라 생각 되고요. 참 고려 공민왕때 신돈이란 중을 아시죠. 그분이 출가한 곳이 바로 이 골짝에 있는 절 중에 하납니다. 절이 많은 만큼 성씨의 시조도 많은 곳이라고 했죠. 화왕산에 가시면 창녕조씨 득성비라는 비가 있습니다. 이 산의 특징은 산 꼭데기나 중턱이나 벼랑 가운데서도 물이 철철 나옵니다. 그건 이 땅이 바다에서 융기되면서 지천으로 깔려있던 물줄기들이 엿처럼 늘어져 본시 있던 곳에 그대로 박혀 있기 때문이고요. 왜냐고요?. 화왕산 정상에 배바위라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옛날 바닷가 사람들이 배를 묶어두기 위한 바위였고, 지금도 바위 아랫녁을 잘 살펴보면 풍화된 조개껍데기가 보일겁니다. 뿐만아니라, 화왕산의 억세풀은 강이나 바다가에서 볼 수 있는 억세이며, 토질또한 진흙으로 강가이 흙과 같습니다. 창녕조씨 득성비엔 단지 조계룡이 이곳에서 탄생하다 뭐 이럴겁니다. 어떻게 탄생했냐엔 어떤사람이 화왕산 정상에 있는 3개의 용지(龍池)에서 커다란 조개가 있길레 고을 원님한테 갖다주니 원님이 귀히여겨 아랫목에 놓아두니 사내가 태어나며 양 팔을 번쩍 들어 말하길 내가 창녕조씨 시조 조계룡이다. 그의 겨드랑이 아래엔 曺라는 글귀가 써 있었다는 탄생설화가 있는가 하면,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사실에 귀한 성씨의 조상을 모독할 수 있기에 내가 들은 진실만을 지금부터 말 하려 합니다. 그 분은 창녕 조씨로서 화왕산에서 만난 창녕 분이었습니다. [그건 나도 잘 모르제.... 모르긴 해도 처녀가 정월 보름날 여기 용지(龍池)까지 목욕하러 왔다가 임신을 했다는데, 어떤 사람은 하늘을 승천하는 용이 씨앗을 뿌렸다고도 하고, 누가 알어 처녀가 얘를 뱄는데 무슨 소린들 못하려구. 하여튼 창녕조씨의 시조는 조계룡이고 그의 무덤은 경북 안강에 있는기라] 물어 볼 말없지요?. 그럼 좋은 산행 되십시오. 1999년 2월 정양홍 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