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초창기 고읍교회 모습
고읍교회가 설립될 당시의 시대적 배경은 일제의 지배가 서서히 뿌리를 내리기시작하는
시기이며 의병들이 일어나 일본군과 맞서 전투를 벌이는 일들이 주변과 지역에서
벌어지는 아주 혼란한 시기였다.
이웃마을인 상심리에는 복음이 이미 들어와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그로 인해 고읍에도
작은 복음이 움트기 시작하였다 1907년 변명섭씨에 의해 시작된 가정예배는 2칸짜
리의 방에서 예배를 드려 많은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그래서 1908년에 접어들어서는 온전한 예배처소나 선교사가 없던 마을에 상심리교인
[배운길장로]이 와서 장영규.황학인.정계용등 세가정을 전도하였다.이세가정은 십여
리가 넘는 상심리교회를 왕래하며 얘배를 드렸다.
1909년 상심리로 교회를 다니던 이 세가정이 전도하여 신자가 많아지자 교회의 초석
을 만들어 놓으신 변명섭.황명호 등이 합심 협력하여 예배당을 건축하였다 교회는
2칸짜리 건축물에서 4칸짜리로 증축하였으며 교회를 증축 할 당시 상심리교회와 교인
들의 상당한 도움을 주고받았으며 당시 상황은 "상심리사기"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에 기록되어 있고 알려지고 있다.
*초창기 예배 드렸던 장소[현재 고읍교회]
현재 고읍교회 자리는 초창기에 예배를 드렸던 곳과 같은 자리로 알려지고 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렇듯 고읍교회가 초창기에 교회의 틀을 만들어 갈수 있던 것은 교인들뿐만 아니라
주변의 많은성도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라 생각된다.하지만 초대교회가 부흥하고 복
음을 전파하는데 있어 쉬운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여러가지 어려운 주변의 환경도
있었다.그중 하나가 일제 치하에서의 억압과 신앙의 박해가 아닐수 없다.수많은 선교
사들이 죽음과 고통을 당하였으며 또한 일본군에 대항해 의병들이 일어나고 상교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이로 인해 교회와 마을이 불에 타 없어지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
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일본군과 의병간의 상교 중 양평읍교회와 신점교회가 불에 타 소실
되기도 하였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1907년.가을]
또한 권서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책 중에 한 부분을 인용하면 1907년"밀러"총무는 권서
[이충경.배씨.차씨]들을 고업내[ko up nai]라는 마을로 보냈을 때 그들이 터를 닦아
세은 교회를 볼수 있으며 몇 해 전에 불행한 일이 있었으며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 그 마을 가까운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고 온 마을이 쑥밭이 되었다고 기록
되어져 있다 역사적으로 정확한 년도는 알수없지만 권서들이 남긴 책자의 내용을
빌리자면 1907년 이전에 고읍마을에도 교회와 마을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는 기록인
것으로 추정 된다.
이렇듯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고읍교회는 주변 교회의 도움과 여러 성도의 도움으로
성전을 하나님께 봉헌 할수 있어으며 이 교회의 터전을 시작으로 예수님을 전파하는
일들을 감당하고 지역 발전에 끊임 없이 도움을 주는 역활을 감당 하였다
교회를 세우는 일은 이렇게 주변의 많은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교회를 설립 하는
것뿐만 아니라 양과 질적으로 부흥시키느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으며 지역의 특성상
양반과 상민의 분류로 나뉘어져 있는 지역이다 보니 양반들 보다는 상민들이 다니는
교회라 일절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래서 상민들의 적은 모임으로 시작한 교회였으나 그들의 아픔과 애환을 가슴으로
품어 주고 그들의 고통을 위로하면서 함께하는 공동체로서 역활을 감당하다보니 그
어느 교회보다도 빨리 부흥 발전하였으며 권서들과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부흥회를 시
작하면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으로 인도되었으며 부흥회를 통하여 은혜 받은 성도들이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정성껏 바쳐 교회의 재정 또한 든든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로 인해 4칸짜리 교회가 차고 넘쳐서 다른 장소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고 부흥회를 통해 들어온 헌금과 헌물 그리고 건축헌금을 하기로
작정한 교인들이 자기 재산(땅을 팔고, 패물을 드리고, 은비녀까지도 드려서 집을 사고
교회를 짓는데 힘을 합함)을 하나님 앞에 바쳤다. 또한 상심리 교회의 도움으로 말미암
아 교회를 틀을 만들어 가는데 많음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재정을 가지고 옥천에 있는 가세가 다 기울어진 홍판서의 집을 사서
옮기게 되었다.
1913년 부흥 발전하여 교회를 경기도 옥천면 옥천3리 426번지로 교회를 이전
하게 되었으며 이로써 고읍교회는 옥천지역의 믿음의 전초 기지로서 역할을 감당하고
믿음의 일꾼을 양성하며 지역사회 발전에 도움을 주며 많은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기도
하고 전도하는 일에 전력을 다 했다. 앞으로도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이 터전 위에서 더
욱 전심전력할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 옥천3리 426번지는 그 당시 교회토지와 가옥은 연명으로 한덕리장로외 5인으로
변명섭장로, 황창호장로, 황명호, 장헌규영수, 김성기씨로 되어있다. 面 가옥대장에 보
면 대지와 가옥은 아직도 그분들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옥천3리)
고읍교회라는 명칭이 쓰인 떄는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나 "상심리교회사기"에 나와
있는 것을 볼 떄 고읍교회란 칭호는 상심리교회로부터 교인들이 나온 해인 1909년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창립년월일은 한울목사님이 1955년도에 작성하신 교인 명부에는 1910년 5월
18일자로 적혀있으며, 변명섭장로의 사기록이 있는데 여기에 보면 1907년 5월에 信敎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아마도 1907년 5월 18일은 이 두 역사적인 기록을 종합해서 나
온 이야기인 것 같다.
구전으로도 1907년 5월 18일이 고읍교회의 창립 년 월일로 전래하고 있는데 그 년도
로 보는 것이 사리에 적합하다. 드디어 1913년에 고읍교회에 황준국목사가 처음으로
부임하여 목회를 시작하였다.
<조선예수교 장로회사기> <변명섭장로님의 딸 변재숙님의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