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설적 단소명인 추산 전용선
1)추산의 생애
바람처럼 구름처럼 세상을 살다 가신지 이제 약 40년 정도밖에 되지 않지만, 선생에 대한 기록은 출생에서부터 음악적 계보, 죽음까지 궁색하기 짝이 없다. 여기 기록하는 내용도 정확한지는 자신이 없다. 단지 선생의 가락을 배운 단소 백경 김무규 선생님과 대금 우당 이순조 선생님, 가야금 호전 조계순 선생님과 양금 송보 이기열 선생님께서 기억해 말씀하셨던 내용을 토대로 기록한 것이고 가능한 사견의 기록을 피했다.
그의 출생년도에 대해 약간의 이견을 가진 사람들도 있으나, 1890년 정읍 고부에서 태어나 1965년 까지 75년의 세상을 살다 가신 것으로 생각된다. 전용선은 그의 호를 따라 전추산이라 주로 불렸는데, 죽선 또는 소선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선생은 풍류와 산조에 모두 능한 예인이었다. 지금의 선생은 주로 단소산조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선생은 주로 풍류음악을 즐겼고, 따라서 음악적 바탕은 의심없이 그의 독특한 풍류음악이었다.
추산의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당시로는 그리 궁색하지 않은 집안에서 자란 것으로 생각된다. 추산은 어렸을 적 서당에 나가 공부하기 보다는 단소불기를 즐겼다는 말을 이순조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아침에 서당에 보내 놓으면 서당은 가지 않고 도중에서 단소만 불었고, 때문에 늦게 집에 들어오면 작대기로 맞으며 혼나기가 여러번인데, 그러면서도 사립을 나서면서는 입에 단소를 불고 나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의 모친께서 집안 어른 몰래 머슴들이 아침에 나무를 하러 갈 때, 선생의 도시락까지 싸 주어 머슴들과 같이 산으로 가 머슴들이 나무를 하는 동안 건넛산을 바라보며 좋아하는 단소를 익히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이다. 우당 선생이 스승인 추산 선생님께 누구에게서 단소를 배웠느냐고 물었을 때가 있었는데 정확한 말씀은 없으셨고, 당시 다른 사람들이 단소를 배우는 곳이 있었는데 자신은 직접 배울 처지가 되지 못해 문밖에서 안을 옅보며 벙어리단소로 가락을 익히고, 집에서는 연습을 하지 못하고 들이나 산에서 하루 내 먼산을 보며 단소를 불며 공부를 했다는 것이다. 이때 추산이 처음 사용한 악기는 그곳 마당에 버려진 갈라진 단소를 주워 실로 묶어 불어보니 소리가 나서 불었다는 것이다. 밤에는 들에 쌓아둔 짚가리 속에 들어가 밤새 불고, 단소를 품고 그대로 웅크리고 잠을 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나중 추산 선생의 말씀이 자신은 음률을 먼산의 오르고 내리는 산 능선의 공제선을 보고 음률의 흐름을 깨우쳤다는 것이다. 추산이 어떤 분에게 단소를 배웠는지에 대해 10여년 동안 같이 추산을 모시고 살며 단소를 배운 백경 김무규 선생께서도 물었던 적이 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누가 물어도 누구에게 배웠는지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어떤 비밀이 있었을까? 의문이 가는 부분이다. 추산의 풍류가락은 현재 구례향제풍류로 이어지고 있는데, 이 가락이 1920년대의 정악구락부에서 녹음한 당시의 풍류와 유사한 점이 많은 걸로 미루어 보아 추산의 창작곡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향제풍류가 그의 영향을 받아 크게 변화한 건 사실일 것이다.
추산의 단소와 대금가락의 스승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전해지는 말도 확실한 것이 없다. 선생의 후손들이 지금 어디에 살아있을 텐데 신화가 되어 버렸다. 우당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몇 년 전까지는 경기도 안양인가? 사는 아들과 연락이 되었고 만나 본적도 있다는 것이다. 추산은 가야금에도 아주 능했는데, 가야금은 당시 서울에서 늙어 낙향한 궁정악사에게 한 달에 쌀을 한 섬씩 주고 두 달 동안 배웠다는 것이다. 이 학채도 어머니가 보내준 것으로 쌀 한 섬이 부담도 되었지만, 두 달이 되니까 가르쳐주시던 선생께서 이제는 더 이상 배우지 않아도 되니까 그만 오라했다는 것이다. 추산의 성격상 열심히 공부도 했겠지만, 이때 이미 단소와 대금 풍류가락이 그의 마음속에 있으니 빠른 기간 내의 성취가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추산의 풍류가야금은 소리가 편하고 젊잖으며 농현이 아주 기가 막혔는데, 손가락의 마디 마디를 꺽어 펴 퉁기며 농현을 했다고 우당선생이 말을 전한다. 우당선생의 말씀으로는 지금은 이런 농현을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한다. 추산은 만년에 웃으시며 가끔 "나는 단소보다 가야금 성음이 더 좋은데, 사람들은 날 보고 가야금 타라는 말은 하지 않고 단소만 불라고 하니 원!" 하며 말했다 한다. 추산의 가락으로 오늘날 단소, 대금, 가야금의 악기 분야에서 인간문화재가 나왔으니 그의 음악에 대한 넓이와 깊이를 짐작할 만 하다. 장단은 물론 해금, 양금도 잘했고. 피리와 거문고는 직접 연주하는 경우는 적었지만 가락은 다 알고 있었다 한다. 하지만 그는 단소가 그중 제일 사랑하는 악기였고, 단소에 대한 솜씨는 가히 신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해도 옳다. 혼으로 불어 내리는 그의 송곳같은 힘의 소리가 척추를 타고 내려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한다. 그의 녹음 자료 또한 빈약하기 그지 없다. 그는 이름내기를 싫어해서, 남 앞에 나서기를 꺼리고 녹음을 하지 않았다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그의 음악은 풍류음악과 만정 김소희 선생의 집에서 비오는 날 부는 단소소리를 몰래 녹음한 산조가 전해지고 있는데, 온전치 못해 아쉽다. 추산은 만년에 산조를 짜서 불었지만 그의 음악의 바탕은 풍류가락이다. 오늘날 그의 산조를 제대로 재현을 못하는 것은 그의 풍류를 바르게 먼저 배우고 산조를 해야하는데, 성질 급하게 남도의 더늠으로만 흉내내려고 하니 재현을 못하는 것이라 확신한다. 그의 산조는 그가 짓고 그에 살다가 그에서 끝난 맥이 끊어진 가락이 되고 말았다. 제대로 배운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당선생은 추산이 만년에 산조를 짠 일에 대해 후회했다 라고 말한 적이 있다. 폐부를 훑어내는 비통함이 사람의 심정을 지나치게 상심케 하고 어려운 시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평화로운 음률로 사람들의 정서를 다스리려고 했던 음에 통한 분이었다는 것이다. 그의 집안에는 당시 정읍에서 소리로 이름이 높던 전도성이라는 분이 있었고, 추산의 당숙인 전계문이라는 당시 국악명인으로 꽤 알려진 분이 있었다 한다. 전계문의 대금 풍류는 정경태의 '국악보'에 실려있다는데, 나는 이 악보를 아직 확인을 하지 못했지만, 추산의 대금풍류와 단소풍류는 전계문의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 전계문은 '정읍지역 민속예술'에 보면 허창이라는 사람으로부터 풍류를 배웠다고 하는데, 현재 허창에 대한 기록은 찾지 못하고 있다.
추산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모르는 이유는 그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바람과 같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젊었을 적에 그의 아내가 죽고, 길고 긴 유랑의 삶으로 세상을 떠 돌았다는 것이다. 그의 고향인 정읍, 이리, 전주와 섬진강을 따라 구례, 하동, 진주 등지를 오직 단소를 벗삼아 강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 그러면서 인연이 있고 재주가 있는 사람에게 그의 가락을 전했는데, 그 가락이 지금 전하고 있는 것이다. 단소는 구례의 백경 김무규 선생과 이철호 선생에게, 대금은 정읍의 송파 김환철 선생과 진주 우당 이순조 선생에게, 가야금은 진주 호전 조계순에게 전했다. 이외에도 그의 가락을 조금씩 배운 사람들은 여럿 있었을 것이나, 곧게 그의 풍류가락과 정신을 모두 배운 사람 이들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요즈음 향제 풍류를 한다는 사람들을 가끔 보면 그 중 몇은 경제의 수법과 취법으로, 가락도 일부는 경제의 가락을 하며 향제라고 말하는 사람을 더러 본다. 이는 추산으로부터 온전히 배우지 못하고 일부만 배운 뒤 경제의 가락으로 땜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경제의 악기로 향제의 가락을 연주하며 향제라고 하기도 한다. 대금과 단소는 악기가 경제와 다르고 운지법이 다른 것도 알지 못하고..... , 추산은 배울 만한 재주를 가진 자에게는 먼 거리를 찾아가 가르쳤다고 한다. 우당선생도 추산선생이 찾아와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또 정읍의 한 풍류방에서 "지금 우리집에 재주가 아주 뛰어난 사람이 하나 있는데 그는 잔풍류는 할 줄 아나, 본풍류를 모르고 있으니 추산이 대금을 가르쳐 온전한 사람을 만들어 주게"라는 주인의 부탁을 받았는데, 그는 맹인이며 통소로 이름이 있던 사람이라 했다. - 이 사람을 당시 편재준이라고 들은 것 같다.- 맹인이니 어떻게 가르칠까? 하고 밤새 궁리하여 각 손가락에 실을 묶어 실을 당기면 손가락을 때고 닫을 수 있는 방법으로 가르쳐 보아야지 생각하고, 다음날 그를 가르치는데, 본령산 초장을 불어주니 가만히 들은 그가 보이지 않는 눈을 꿈벅거리며 다시 한 번 부탁해 또 한번 불어 주었더니, 한참 생각하던 그가 '선생님 한번만 더 부탁합니다.'라고 해서 '아! 요놈 봐라.' 생각하며 다시 한번 더불어 주었더니 그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이 그대로 따라 불더라는 것이다. 세 번 불어주었더니 약 3분 정도의 본령산 초장 가락을 틀림없이 하더라는 것이다. 이에 추산이 상당히 놀랐던 모양이다. 그 뒤에 이런 말을 우당에게 전한 것을 보면 말이다. 이 사람이 당시 잔풍류, 뒷풍류까지 추산의 가락으로 고쳐 배웠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사람의 가락을 현재 정읍풍류에서 맥을 이었다고 하고 있다. 추산의 가락을 잘 아는 정읍의 양금 송보 이기열 선생님이 계셨는데 얼마 전 타계하여 아쉽다.
그의 가르침은 아주 엄격했다고 한다. 평소에는 아주 부드러운 분이신데 악기만 들고 앉으면 호랑이보다도 더 무서웠다는 것이다. 그의 앞에서는 악보를 보고 배우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몇 번 해주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어찌나 면박을 주는지 배움을 계속 이을 수 없었다 한다. 이것은 옳은 일일 것이다. 서로 시간 낭비가 아닐테니까. 음악을 악보를 보고 공부를 하면 배움이 게을러 진다.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음악은 손의 재주놀음일 수밖에 없다. 악보를 눈이 보고 손이 그걸 따라한다. 이는 마음을 거치지 않은 것이므로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음 깊은 곳 내면의 자기 소리를 내려면 악보를 보고 연주하면 안 된다.
하여간 추산은 단소를 벗으로 전국을 유랑했지만, 주로 섬진강 주변을 오르내리며 가끔은 백경선생 댁의 수오당에 근거를 두고 10여년 머물기도 했다, 길고 긴 유랑의 인생이었다. 같은 동향인 만정 김소희 선생이 추산을 많이 따르고 가끔 만정의 집에 모시기도 했다는데, 만정의 말에 따르면 돈 많은 풍류를 아는 부자가 모시려고 해도 마음이 청백하고 신세지기를 싫어하여 바람가는 데로 떠돌았다는 것이다. 만정의 부탁으로 만정의 무대에 찬조출연을 하게 되었는데 그 뒤로 서울사람들에게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고, 당시 공연이 끝나고 1963년에 국악상을 받았다는 것이다. 추산의 만년은 극히 곤궁했던게 아닌가 싶다. 백경선생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추운 날씨에 밖에서 죽음을 맞은 것 같으며, 그의 장례를 치르러 백경이 전주에 갔었다는 말을 했던 것이 어렴풋하다. 그러나 곤궁하면서도 음악을 돈으로 팔려하지 않았던 그의 인생, 풍류를 즐기며 살다간 그의 인생, 화장을해 재를 바람에 날렸는지 무덤조차 찾을 수 없는 바람같은 선생의 인생 생각하면 마음이 시리다.
2)추산의 음악
오늘의 시각에서 추산의 음악을 바르게 평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추산선생의 음악 바탕은 정음쪽인 풍류음악이고, 그의 음악적 특색은 단소와 대금 가락에 있다. 물론 그의 가야금 수법도 오늘의 경제의 수법과 사뭇 다른 단정한 수법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의 산조음악은 당시 각 악기에서 산조음악이 나오는 분위기에 따라 추산이 가락을 짜서 불지 않았나 싶다. 그는 풍류를 사랑하고 주로 연주한 것이 틀림없다. 스스로 '정음에 더 힘을 쏟았다'는 추산이 단소산조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오늘날도 그렇지만 듣는 사람들이 마음에 더 쉽게 와 닿는 산조를 좋아한 때문이라고 본다.
그의 풍류음악을 들어보면 손가락을 움직여 내는 화려한 기교의 음악이 아니라, 힘이 느껴지는 정확한 음정으로 단순하고 담담한 선율을 자연스럽고 담백 깔끔하게 처리해 마음을 나타내는 것에서 선생의 심성을 읽을 수 있다. 선생은 가곡과 시조 반주에도 능했는데, 노래하는 자의 소리를 듣고 그 청에 맞추어 반주를 해 주었기 때문에 창을 한 뒤 모두 만족했다는 것이다. 연정 임윤수 선생의 말에 따르면 어느 땐가 충청도 어디의 부잣집에 연정의 소개로 놀러를 가서 집주인의 시조 창 반주를 해주었는데, 주인이 감탄하여 몇 번 더 청했고 다음날 그 집을 나설 때 주인이 당시로는 거금인 논 몇 마지기 값을 주어 추산선생과 연정선생이 같이 나누어 썼다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다.
단소로 산조를 연주하는 것은 쉽지 않다. 단소의 악기 특성상 산조에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극복하고 추산이 불었던 단소 산조는 듣는 이의 전율을 느끼게 한다. 우당선생의 말에 따르면 추산이 산조를 짓기 위해 밤새 단소를 앉아서 누워서 불다가 문득 무의식적으로 몸으로 되어지는 좋은 가락을 잊지 않고 기억해 가락을 지었다고 한다. 추산의 말이 '한가락 만들기가 산고보다도 더했다'고 했다한다. 따라서 그의 단소산조에는 이미 바탕이 되어있는 그의 풍류음악이 녹아 들어 있는 것은 틀림없다. 그의 산조가락을 들으면 알 수 있는데, 다른 산조와 같이 소리더늠이나 시나위더늠에 바탕을 두고 있는 가락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그의 산조를 녹음자료를 통해 오늘날 재현하려면 반드시 그의 풍류를 완전히 익히고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추산과 같은 형태의 곡 지음은 그 곡이 무리가 없고 자연스럽다. 나는 처음에 귀에 달콤한 자극적인 맛의 소리보다는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소리가 최고라고 확신한다. 하여간 추산의 말에 따르면 먼 산의 높고 낮음을 보고 음률의 고저와 길이를 깨우쳤으니, 그의 소리는 바람의 흐름과 같이 자유스럽고 강 흐름과 같이 평화로웠을 것이다.
선생은 풍류 가락전수는 자신과 같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재주있는 할 만한 사람에게 가락을 가르쳤지만, 산조는 가르치려 노력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만년에 우당선생께 산조를 짠 것이 후회롭다는 위의 글에서 그 심정을 옅볼 수 있고, 따라서 맥이 끊어진게 아닌가 싶다.
백경선생은 추산의 음악을 아래와 같이 말하고 있다. "추산의 음악은 가히 죽신의 경지에 있는 소리로 표현할 수 없는 황홀한 경지에 있었어. 그 소리는 누구나 좋아했고 들으면 혼을 뺏기고 빠져들게 되지. 기쁜사람은 더 기쁘게 하고, 슬픈 사람은 슬픔 중 피어나는 기쁨을 얻고 삶의 도리를 알아 자기자리로 돌아가게 했어."라고 표현했다.
음악으로 살다간 그의 삶은 경제적으로 본다면 곤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당시 거문고의 임석윤, 해금의 김천흥과 풍류를 즐겼던 그의 삶이 궁했다고만 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