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남아 있는 ‘ㄱ’자 구조의 교회로서 김제의 금산교회와 함께 알려진 익산 두동교회는 건립되기까지의 사연이 재미있다. 1920년대 익산 두동마을에는 미국 남장로교 군산선교부의 윌리엄 해리슨 선교사가 오가며 포교를 했다.
그 당시 익산에는 삼천석 지주였던 박재신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소작농의 세금까지 대납해 줄 정도로 마음이 고운 사람이었으나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그때 선교사 해리슨과 안신애 전도사가 박재신의 어머니와 아내를 전도했는데 “예수를 믿고 기도하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말에 박재신은 여자들의 교회 출석을 묵인했다. 그런데 정말 얼마가지 않아 아내가 임신을 하게되자 뛸 듯이 기뻤던 박재신은 아내가 십리가 넘는 이웃 마을 교회까지 예배를 드리러 가지 않도록 자기 집 곳간을 예배 처소로 내어 주었다. 그렇게 두동교회가 탄생했다.
그런데 그 아이가 5살 되던 해에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낙담이 컸던 박재신은 아내도 교회를 못 나가게 하고 하나님도 교회도 부정했다. 얼마뒤 박재신의 고모까지 세상을 뜨는데, 마침 출상일이 주일과 겹쳤다. 그러자 마을의 교인들이 주일날 출상하는 것을 반대하며 상여를 메지 않겠다고 했다. 격분한 박재신은 예배장소로 쓰던 창고를 닫고 교인들을 내쫓았다. 게다가 대부분 박재신에게 신세를 지며 살아가던 가난한 이들이었기에 박재신의 눈치를 보느라고 하나 둘 교회를 떠났다. 그 바람에 교인들의 수가 20명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이를 보다 못한 교인 한 사람이 교회를 짓기 위해 100평 남짓한 채마밭을 헌물했지만, 가난한 소작농들이라 교회를 지을 일이 막막했다.
그런데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1929년 6월, 안면도 소나무를 실은 배가 군산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났다. 그 바람에 질 좋은 안면송들이 밀물에 쓸려 익산 두동리 근처 성당포까지 밀려온 것이다. 결국 나무를 다시 가져갈 방법이 없었던 나무 주인이 교인들에게 헐값에 나무를 팔았고, 교인들은 그 나무로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안면송은 품질이 우수하고 크기도 장대해 백두산 소나무나 금강산 소나무만큼이나 귀히 여기는 목재였다. 고려 시대부터 궁궐 건축이나 선박 제작에 사용되었고,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을 지을 때에도 안면송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그런데 그 귀한 목재로 하나님의 성전인 교회를 지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한국기독교사적 제4호인 두동교회 건물은 ‘ㄱ’자형 평면 한옥으로, 우진각 함석지붕에 홀처마 형태다. ‘ㄱ’자형 교회는 토착적인 자율성을 강조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교회 건축 유형이다. 실내 바닥에는 장마루가 깔려 있어 한국식으로 바닥에 않아 예배를 드렸음을 알 수 있다. 강단에서 전면을 볼 때 ‘ㄱ’자형 평면 중 남북축을 이루고 있는 곳이 남자석이고 동서축이 여자석이다. 또한 가운데 휘장이 있어서 남자석과 여자석에서 각각 상대편을 볼 수가 없으며, 출입문도 따로 있어서 교회에서 남녀가 마주칠 일은 없었다고 한다.
내부는 지금도 특별한 날에 예배를 드릴 만큼 잘 관리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시절이라 예배 중 갑자기 일본 경찰이 올 것을 대비해서 대피하기 위해 마련한 지하 밀실이 있다.
두동교회를 방문한다면 안내 담당 장로님께 해설을 부탁드릴 것을 권한다. 가난한 소작농 출신의 교인들이 조선 왕궁도 부럽지 않은 아름다운 교회를 갖게 된 이야기며 교인들만 알았던 밀실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 등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한국기독교문화유산해설사 1기생
◎ 답사일 : 2017. 9. 16
◎ 글 출처 : 믿음의 땅 순례의 길, 유성종·이소윤, 두란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