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교회는 철원제일교회를 모태로 하는데 교회 왼편에 서기훈목사순교기념비가 있다. 1925년 목사 안수를 받고 주로 동부연회 원산 지방과 철원 지방에서 목회자로 사역했던 서기훈 목사는 공산정권하에서 장흥리에 부임하여 전쟁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환경과 조건은 열악했지만 그는 사람들을 위로하며 참 신앙의 본을 보인다. 생활 속에 녹아든 신앙의 삶은 지역민들에게 절대적 신뢰를 받을 만큼 인정을 받았다.
6.25 전쟁 당시 장흥리 주민과 인민군과의 전투는 인민군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곧 이어 국군의 진격으로 공산주의자들을 당황하게 되었고 북으로 떠나지 못한 공사주의자들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곧 치안대에 의해서 처형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서기훈 목사는 대부분 교회의 청년이었던 그들에게 호통을 쳤다고 전해진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느냐?” “사람을 죽이라 가르쳤느냐?”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 하신 주님의 말씀은 서기훈 목사의 내면에 살아 있었고 그것은 장흥교회 청년들에게도 거부할 수 없는 하늘의 소리로 받아드려 졌다. 악의적이었던 공산주의 자들과 가족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서기훈 목사
그러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았고 다시 인민군이 찾아들면서 장흥리를 사이에 두고 총격전이 벌어지고 국군과 치안대는 후퇴를 하게 되었다. 이 때 많은 이들이 피난을 떠났고 서기훈 목사 가족도 피난을 떠났지만 성도들이 떠나지 않고 있음을 알고 다시 교회와 성도들에게 되돌아왔다. 그는 남아있는 성도들을 심방하고 숨어있는 성도들을 돌아보며 장흥리에서 목회를 계속했다. 새벽이면 종을 치며 성도들을 위로했다. 그나마 다행한 것은 떠나지 못했던 공산주의자들과 그 가족들을 처형하지 않았기에 다시 돌아온 지역에서 공산주의자들은 국군의 가족이나 치안대의 가족에게 생명을 빼앗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북한군 정치보위부는 인민군과 총격전을 벌인 장흥리에 책임을 묻기로 했다. 목사이기도 하지만 마을의 어른이기도 했던 서기훈 목사는 이 사건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버려둘 수 없는 존재였다. 들은 서기훈 목사를 연행하게 된다. 그것이 1950년 12월 31일이다.
잠깐 집에 들를 수 있는 시간을 주어졌을 때 그는 찾아온 권오창 속장(후에 목사)에게 시 한수를 적어 주었다. 이 시에서 그는 이미 죽음을 초월한 신앙인임을 보여주고 있다.
死於當死 非當死 (죽을 때를 당하여 죽는 것은 참 죽음이 아니오)
生而求生 不是生 (살면서 생을 구하는 것은 참 생이 아니오)
그는 다시 정치보위부에 수감되었다가 1951년 1월 8일 집단적인 총살이 행해질 때 함께 사문안 계곡에서 순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답사일자 : 2017. 9. 5
첫댓글 철원 다녀오셨군요.저는 올해는 한번도 못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