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부터 여름 같은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화창하기 그지없다. 며칠 전까지는 우리가 입국하던 날과 같은 으시시한 날씨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어제부터 날씨가 좋아져 오늘은 어제보다 덥고 구름도 한점 없다. 뉴질랜드인들 대부분은 반소매, 반팔로 다니며, 남자아이들은 윗도리를 벗고 다닌다.
여름이라 하여도 온도는 높지 않다(아마 24-5℃ 쯤 되는 것 같다). 그러나 햇빛은 아주 강력하다. 말로만 듣던 뉴질랜드의 햇빛이다. 눈이 부셔 운전 할 수가 없다(오늘부터 운전을 시작하였다. 학교 내에서 한두번 연습한 후, 용감하게 바로 도로로 나갔다. 괜찮은 것 같다. 오른쪽에 핸들이 있어 익숙하지는 않지만, 운전을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리고 차가 적어 운전하기가 생각한 만큼 어렵지는 않다.) 선글라스가 없으면 운전을 못할 정도로 햇빛이 강력하다.
오늘은 크라이스쳐치 대학 주변을 산책하였다. 한 눈에 보아도 부자 동네로 여겨지는 멋진 저택-주택이 아니라 저택이라 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들이 즐비하다. 책에서나 볼 수 있는 멋진 집과 넓은 정원, 그 안에 갖가지 나무와 꽃들이 피어있다. 물론 이 보다 못한 집들이 크라이스쳐치에 많지만, 나무와 꽃만은 집의 수준에 관계없이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다.
뉴질랜드인들의 중요한 하는 일 중 하나가 정원 가꾸기이다. 집의 좋고 나쁨,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어느 집에서나 정성드려 정원을 가꾼다. Gardener를 불러 가꾸기도 하지만, 꽃이나 잔디는 주인들이 손수 가꾸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길을 가다보면 자주 꽃과 잔디, 나무를 관리하는 키위(뉴질랜드인들을 키위라 부른다)들을 볼 수 있다.
일상이 자연 속에 있고, 일상이 자연을 관리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 사람이 있다 보니, 자연과 하나됨, 자연적으로 사는 것, 자연을 가꾸고 보전하는 것이 너무나 일상적이 되어있다. 어릴 때부터 이런 삶을 사니 그들의 심성이 순수하고 순박할 수밖에 없다.
반면, 우리는 사람 속에 자연이 있다. 그것도 간간이 있다. 도시는 인공 그 자체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스팔트와 콘크리트뿐이다. 이 속에 간간히 나무가 있다. 그러다 보니 나무도 지쳐있다. 사람도 혼자 있거나, 산골짜기에 몇 없이 살면 외롭듯이 나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더욱 맞지 않는 사람들 속에 억지로 끼어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나무와 꽃들도 사람 속에 억지로 서있다. 마치 백화점의 마네킹들처럼,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속에 장식품처럼 서 있다. 그래서 우리 나라 도시의 나무와 꽃들이 불쌍하다.
이런 삭막한 환경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심성과 자연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다를 수밖에 없다. 마치 도시 사람과 산골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듯이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우리 학교에는 자연적인 자연이라고 할 것이 없다. 그러니 여기서 교육받는 학생들의 심성이 어떠하겠는가? 그것도 가장 자연적인 교육이 필요한 초등교육에서 그러하니, 어찌 걱정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우리가 살던 집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엘레베이트를 타고 올라가 문을 열면 집안이다. 하루를 인공물에서 시작하여 인공물에서 끝낸다. 넓은 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것도 자연적인 자연보다 인공적인 자연이 더 많다. 집에서 보이는 것은, 내 것이 아닌 도시민 공유의 땅위의 공간만 보인다. 그것도 만질 수 있는 땅이 아닌, 만질 수 없는 땅위 공간이 대부분이다. 그 공간 조차 먼지와 매연으로 가득하다. 하늘 맑은 날이 갈 수록 줄어든다. 앞산에서 팔공산이 뚜렷히 보이는 날수가 갈 수록 줄어드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눈을 뜨면 집 앞의 정원이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도 손에 잡힐 듯이 있고, 나무도, 꽃도 손에 잡힐 듯한 곳에 있다. 밖이 곧 안이고, 안이 곧 바깥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느끼는 집안과 집 바깥의 엄격한 구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우리는 우리 집이라는 공간 속에 철저하게 폐쇄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은 집안과 밖이 같다. 특히 자연과 나, 나와 너가 우리라는 의식으로 묶일 가능성이 우리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 하늘은 언제나 비 온뒤의 하늘 같이 맑다. 먼지가 없기 때문이다. 한국 같으면 저녁만 되어도 집안에 먼지가 뽀얕게 앉아 있는데, 여기는 일주일이 넘어도 먼지 앉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없다. 앉을 먼지가 없다.
자연도 자연적이고, 사람도 자연적이다. 자연과 사람이 자연적으로 살고 있다. 이런 ‘뉴질랜드 인들의 삶을 보면서,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를 위해 살아왔다기 보다는 일을 위해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일을 위해 존재해 왔지, 일이 나를 위해 존재해 온 것은 아니었다.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였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이다. 인위적인 것에, 외적인 요구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저녁 5시 30분, 정재걸 교수 댁에서 집주인과 계약서 작성 겸 대면식을 했다. 인상이 아주 좋은 분들이었다. 집 주인 아저씨는, 한국에 있을 때 어떤 회사의 자재부를 담당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술 먹을 자리가 많았고, 업무상으로도 여러 사람들을 만나야하는 그런 직업이었다고 한다. 그런 삶이 싫어 이민을 왔다고 하였다. 벌써 12년이 되었다고 한다.
집 주인 이야기로는 뉴질랜드 부동산 가격이 몇 년 사이에 빠르게 상승했다고 하였다. 특히 전 세계 사람들이 크라이스쳐치를 주목한다고 하였다. 무엇보다 안전하고, 자연 환경이 좋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래서 크라이스쳐치의 좋은 집 들 중 미국 사람, 호주 사람, 영국인들이 주인인 집들이 많다고 한다. 좋은 곳에 대한 판단은 누구나 같은 모양이다.
1월 14일
첫댓글 저는 오늘도 일을 위해 학교에 왔다가 일에 대한 계획을 그리며 봉투를 안고 집에 가려고 컴을 끄려다 또 방문하니 정말 좋네요. 그러나 일을 위해 존재하지 않도록 현실에 맞게 노력해야 겠지요? 너무 신선한 뉴질랜드의 자연 경관이 시원하게 들어옵니다.아마 일을 위해 살때마다청량제가 될듯합니다.감사합니다. 교수님
일에 매달려 사는 사람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런 일들이 여유롭고 자연적이며 고요한 자신만의 시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을 잊고 살고 있습니다. 조용하게 자연과 대화하고, 자신과 대화하는 사색의 시간이 필요함을 느낍니다.
인간이 자연속에 있게되면 자연스럽게 자신과의 대화가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공물 속에 있게 되면 나 자신에 집중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자연이 더 그립게 느껴지는 지 모르겠습니다. 교수님의 글을 통해 이름만의 '뉴질랜드'에서 의미가 부여되는 '뉴질랜드'가 형성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