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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回歸하는 色, 혹은 線
손 옥 자
(시인)
*정대구 :'나를 휩싸고 도는 찬 공가 따뜻한 공기로 바뀌기까지는‘-<문학과 창작> 07년 봄 호
*장철문 : ‘풍경’ - <시작> 07년 봄호
*김영남 : ‘언덕에 복송꽃 피니’ - <실천문학> 07년 봄호
*천양희 : ‘활’ - <문학수첩> 07년 봄호
*박주택 : ‘하루에게’ - <시와 시학> 07년 봄호
*한규동 : ‘숨 쉬는 목각인형’ - <문학과 창작> 07년 봄호
“시간의 끝은 누구도 끊을 수 없다”. 월리엄 터너의 <전함 테메레르>를 보고 미술평론가가 한 말이다. 다 아는 것처럼 전함 테메레르는 트라팔가 해전(1805년)에서 영웅 나폴레옹의 몰락을 가져오게 만든 영웅이다. 그림은 1838년 증기선 시대를 맞아 옛 신화를 노을에 묻고 템스강에서 퇴역식(잠수)을 거행하고 있는 모습이다. 타오르는 저녁노을 때문인지 화폭이 온통 홍조다. 하늘도 강도 벌겋게 달아올라 있고 배가 마치 붉은 양수 속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 같다. 그림의 밑에는 “고전의 시대가 끝나고 새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고 써 있다. 그리고 바로 옆에는 <증기기관차>의 그림이 있고 “시작은 끝과 함께 온다 했지만 끝 또한 새로운 시작과 함께 온다”고 적혀 있다.
끝은 없다. 우리 모두는 때가 되면 잠시 돌아가는 것이지. 결코 끝은 아니다.
생각처럼 고향은 쉬운 게 아니다. 버리고 떠났다가 바닥을 치고 돌아온 나에게, 쉬 돌아와주지 않는다. 선뜻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이도 안 드는 새파란 땡감마냥 마냥 난감했다.
그러나 그것은 고향 탓이 아니다
순전히 내 탓이다
고향의 고요에 쉽게 적응 못하는
거친 내 마음을 다스리는 데
반년이 걸렸다
그랬다
처음 얼마동안은
별 수 없이 방문을 자주 여닫거나
마을 안을 헛바퀴 돌 듯 빙빙 겉돌거나
쫒기듯 들어와 샤워를 급히 하거나
그렇게라도 해서 조급한 내 마음을 늦출 수밖에 비울 수밖에
그렇게라도 해서 외지에서 끌고 온 내 몸을 추스르는 수밖에
그제서야 조심조심 자위가 돌고
안온한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내가 놀만한 공간도 조금 보여주고
낯설은 마음을 자리잡아 앉힐 수 있는
흙 묻은 손이 다가왔다
놀라워라, 스파크 전구가 그렇듯, 그제서야
나를 휩싸고 도는 따뜻한 공기가 팍팍 터지기 시작했다
- 정대구 <나를 휩싸고 도는 공기가 찬공기로 바뀌기까지는>
어머니의 몸 속에서 나온 우리는 어디에 서 있든, 어머니의 몸 속이 아니면 다 타향이다. 허허벌판이다. 정대구시인이야말로 “바닥을 치”ㄴ 그로서는 더 할 수 없이 아픈 타향이었을 것이다. 동쪽을 봐도 서쪽을 봐도 막막하기만 한 타향, 그제서야 그는 “버리고 떠났”던 고향을 생각해 낸다. 하얀 고무신 속에서 송사리가 헤엄치던 고향, 다래와 머루가 지천에 널려있던 넉넉한 고향, 그러나 “생각처럼 고향은 쉬운 게 아니”었다. 그가 생각했던 “안온한 어머니의 자궁 속 같은” 곳이 아니었다. 그 “고요”, 그 (냉냉한?) 침묵이 정대구시인에겐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방문을 자주 여닫’기도 하고 “마을 안을 헛바퀴 돌” 듯 빙빙 겉돌기도 했다.
떠나있는 동안 고향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다. “바닥을 치”고 돌아왔기 때문에 그 침묵이 더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추웠기 때문에, “어머니의 자궁 속”의 따뜻함을 생각하고 달려온 고향이였기에, 시인은 그 “고요”를 가장한 냉냉함이 말 할 수 없이 서운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깨닫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마음을 비우기 시작했다. “내 몸을 추스르”기 시작했고, “조급한 내 마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고향은 그제서야 “놀만한 공간도 조금 보여주기” 시작했고, “낯설은 마음을 자리잡아 앉”혀 주었고, 그제서야 “흙 묻은 손이 다가왔다”.
우리의 고향은 변함이 없다. 언제나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따뜻하다. 그래서 때가 되면 사람들은 고향을 생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성공을 한 사람이든, “바닥을 치”ㄴ 사람이든, 아니 어쩌면 남보다 더 크게 성공을 했거나, 더 크게 실패를 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귀소본능이다.
정대구 시인은 달라진 것은 고향이 아니라, 바로 본인임을 깨닫는다. 그래서 스스로를 잘 추스려 “어머니의 자궁 속”에 꼭 맞는 모습으로 만들어 간다. 그렇게 고향은 날 선 것들을 다듬어 평화롭고 둥글게 감싸 안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상수리나무 잎사귀가 지고 있다
길 안과 바깥의
경계를 지우고 있다
붉은 등산복 차림의 사내가 지나고 있다
발끝에 스쳐
소리가 태어나고 있다
그 생사生死를 물을 수 없다
생쥐 한 마리가 눈을 빠꼼히 뜨고 지켜보고 있다.
-장철문 <풍경>
장철문 시인은 첫 행부터 “상수리나무의 잎사귀가 지고 있다”고 서술하고 있다. 부정적 시각의 출발이다. 지고 있는 이파리가 붉은 색이든 아니면 노란 색이든 “잎사귀가 지고 있다”는 것은 절망이다. 좌절이다. 그것이 개인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아픔임에는 틀림이 없다.
또한 시인은 “상수리나무의 잎사귀가 지고 있”는 것으로 “길 안과 바깥의 경계를 지우고 있다.” 경계라 함은 사물이 어떤 표준 밑에 맞닿는 자리가 바로 경계다. 여기서 시인은 바로 회귀하고 있는 나무를 발견한 것이다. 잎도 뭣도 없었던 처음으로 가려는 몸짓을 읽어낸 것이다. 연한 초록으로 태어나 만삭의 진녹색 여름을 지나 가을(상수리)을 낳고 지금 겨울에 서서 뿌리를 향해 몸을 내리는 나무. 다시 봄을 준비하는 것이다.
나무야말로 우리에게 색으로 회귀를 알린다. 초록에서 진녹색으로 노을의 붉은 색으로 그리고 갈색으로 다시 초록으로......
경계를 지우고 있는 나무에게 시인은 “생사生死를” 묻지 않는다. 오히려 “등산복 차림의 사내를 지나”가게 함으로써 떨어진 잎이 “발끝에 스쳐 소리가 태어나”게 만든다. 그리하여 주검(낙엽)을 소리로 부활하게 하여 시인은 상수리나무의 회귀를 돕고 있다.
“등산복차림의 사내를 지나”가게 한 것은 시인 특유의 사랑의 형식이며 피폐해진 죽음의 현실로부터 건져내려는 “살림”의 미학이다. 이 “살림”의 미학은 주검(낙엽), 그 자체에만 겨누어진 것이 아니다. 피폐해진 현실세계, 인간이나 자연에 대한 어떤 외부로부터의 억압이나, 존중되어야할 생명이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것을 향해 있다. 그리하여 시인은 오늘의 현실이 가져오는 패배와 좌절을 회귀하는 나무를 통하여 희망으로 전환하려는 것이다.
수남아제는 염소 끌고
경자누나는 바구니 흔들고
완이 당숙은 남도창 한가락 뽑고
좋겠네 들길은
모두 일 나간 집 대문
우체부 아저씬 기웃거려도 되겠네
탱자나무 울타리 가에 서서 나도
색연필 한 주먹 쥐고 상상하겠네
언덕 위 저 화려한 포옹
포옹이 불러내다 숨기는 것들을
개처럼 하루도 어슬렁어슬렁거리겠네
-김영남 <언덕에 복송꽃 피니>
“좋겠네 들길은”. 좋은 건 들길 뿐만이 아니다. 읽는 우리도 절로 콧노래가 나오고 흥이 느껴진다. “수남 아제는 염소”를 끌고 간다고 했지만 염소가 아닌 들길을 끌고 가는 것이며, 봄을 끌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을 바라보고 서 있는 화자의 상상의 세계까지 끌고 가는 것이다. 그것도 복송꽃 핀 언덕 너머로.
수남 아제, 경자 누나, 완이 당숙은 시인의 시선에서 겹쳐져 있지 않다. 나란히 들길처럼 흐르는 것이다. 그들은 한 걸음 한 걸음 따로 걷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한 덩어리가 되어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시인은 “상상”해 본다. 언덕 위 “저” 화려한 포옹을. 언덕 위 “이” 화려한 포옹이 아니라 “저” 화려한 포옹이다. 시인은 지시대명사를 “저”로 놓고 마음껏 상상을 한다. “이”는 한계가 있지만 “저”는 무한한 상상을 가져올 수 있다. “저”이기 때문에 더 화려해 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김영남시인은 바로 그것을 노린 것이다.
또한 “언덕”은 꿈이다. 꿈은 “이” 곳에 있지 않다. 늘 “저” 곳에 존재한다. 손에 금방 닿을 것 같지만 결코 쉽게 쥐어지지 않는 게 꿈이다. 그래서 시인은 “저 화려한 포옹”으로 거리를 두고 있다. 거리를 두어서 무한한 꿈의 동산을 만들어 놓는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이처럼 회화적 이미지들이 향토적 소재들로 전경화 되어 있다. 그리고 각각의 색깔들은 하나의 의미소로 이루어져 있다. 시인의 유년이다. 위에 열거된 모든 소재들은 시인의 유년을 향하여 가고 있다. “색연필”에 와서는 절정에 달한다.
시 속 화자의 손에는 “색연필을 한 주먹 쥐고”있다. “색연필을 쥐고 상상”하고 있다. 유년의 기억이다. 시인은 유년의 기억을 그려내려고 한 것이다. 언덕에 복송꽃 피고 들길이 환하던 어느 봄날, 수남 아제와 경자 누나, 그리고 완이 당숙이 들길이 되어 시인의 유년으로 돌아오고 색연필이야말로 시인을 유채색의 유년으로 되돌려 보내고 있는 훌륭한 매개체이다. 화려한 회귀다.
활이 구부러졌다
어머니의 등이
구부러졌다
구부러져야 멀리
날아가는 活
구부러진 활도
부러질 때가 있으니
마지막
어머니의 등이 그러하였다
- 천양희 <활>
“활이 구부러져 있다/어머니의 등이/구부러져 있다”. 허리가 구부러졌다고 하는 것은 왔던 곳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회귀의 몸짓이다. 돌아가려는 것들은 모두가 곡선이다.
화살이 활시위를 떠나듯 가슴에 품고 있던 자식들이 하나 둘 품을 떠나면 어머니는 회귀를 준비한다. 자식들로 인하여 꼿꼿했던 가슴이 비워짐으로 인해 점차 땅을 향해 내려온다. 지팡이를 갖다드리고 의자를 갖다드려도 어머니의 회귀의 몸짓은 쉬지 않는다.
굽은 허리로 어머니 스스로 만드신 봉분은 봉우리가 아니라 봉오리이다. 계절의 시작인 봄을 만들어내는 꽃봉오리들. 내가 지금 여름호를 준비하며 글을 쓰는 이 시간에도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차고 올라오는 봉오리들 말이다. 물론 꽃잎도 질 때가 있겠으니 땅으로의 회귀다. 지금 천양희시인의 “활” 속의 “구부러”진 어머니도 허리를 구부리고 처음 꽃씨를 심었던 자리를 찾고 있는 것일 게다. 당신이 갈 자리, 처음 있었던 자리를 찾고 있는 것일 게다.
너는 어디로 가서 밤이 되었느냐 어디로 가서
들판이 되었느냐 나는 여기에 있다 어기서 희미한
눈을 닦으며 귀에 익은 노래를 듣는다
존재를 알리는 그 노래는 추억의 중심으로 나를 데려간다
네가 살아 있을 때 나는 무엇을 했던가
전화를 받고 차를 마시고 또 무엇인가 두려워 마음을 졸였겠지
네가 가고 난 책상엔 먼지가 한 꺼플 더 쌓이고
건물들은 어제를 기억하는데도 지쳤지
네가 풀잎이었다면 나를 풀밭에 데려가는 게 좋겠다
더더욱 네가 그리움 속으로 데려가 다오
그 속에서 온갖 그리움들을 만나 그리움의 기억을
가슴에 새기며 내가 왜 여기 서 있는지를
저 나무에게나 물어보리라
- 박주택 <하루에게>
“하루”는 참 소중하다. 어떻게 보면 우리의 일생이 그 “하루”에 귀속되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얼마나 그 하루를 소홀히 여기는가? 오늘 못하면 내일, 내일 못하면 모레, 모레 못하면...... 하루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언제나 우리와 동행하며 우리의 옆을 지켜줄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착각임을 박주택 시인은 "하루에게“를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너는 어디로 가서 밤이 되었느냐” 첫 행부터 시인은 홀연히 떠나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을 표출해 내고 있다. “너는 어디로 가서 들판이 되었느냐”. 시간이든 사람이든 옆에 있을 때는 그 존재가치를 모른다. 훌쩍 떠나버리고 나면 그때서야 그 자리가 너무도 컸음을 실감한다. 실감할 때는 이미 늦는다는 걸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시간(사람)의 부재라는 심각한 결여상태는 그만큼 강력한 그리움을 일으키게 된다. 그래서 박주택 시인도 “추억” 속으로 데려가 주기를 희망하고 있다. 희망할 뿐만 아니라, “그리움 속으로 데려가” 주기를 요청한다. “그 속에서 온갖 그리움들을 만나”고 싶은 것이다. “온갖 그리움들을 만나” 회포를 풀 뿐만 아니라 제대로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만나”서 제대로 잘 해주고 싶어서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늘 아쉬움 속에 산다. 대상이 떠나고 나면 그 아쉬움은 극에 달한다. 그리곤 말한다. “내가 다시 너를 만날 수만 있다면” 혹은 “다시 그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하고 말이다.
박주택시인도 그리운 어느 때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존재의 결여를 채우려고 그리움에게로의 회귀를 서두른다. 서둘러 “그리움”에 귀속함으로써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그리움의 관념은 시간의 틈새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당신도 그리움에로의 회귀를 꿈꾼 적이 있는가?
북유럽산 자작나무 목각인형,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
접합수술이 불가능한 자작나무 목각인형
부러진 자리에 대일 밴드를 붙이고
고정을 시켜 놓았다.
타박타박 걷던 다리가 흔들렸다
녀석의 또 다른 관절에서 소리가 들렸다
몸 속에는 아직도 투명한 혈액이 흐르고 있었다
뿔에도 머리에도 가슴에도 온기가 흐르고 있었다
투명한 피가 멈추는 지혈제를 바르며
붕대로 다시 감아주었다
치료를 하는 동안 녀석의 온기가 내게로 스며들어 왔다
아직 살아 숨쉬는 자작나무,
나이테가 선명하게 있는 자작나무 목각인형,
가슴이 뜨겁다
-한규동 <숨쉬는 목각인형>
자작나무로 만든 목각인형의 다리가 부러졌다. 시인은 “부러진 자리에 대일밴드를 붙이고” 정성껏 치료를 해준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녀석의 또 다른 관절에서 소리가 들렸다.” 시인은 생각해 본다. 목각인형의 상처에 대하여, 아니 자작나무의 상처에 대하여.
“몸 속에는 아직도 투명한 혈액이 흐르고”, “뿔에도 머리에도 가슴에도 온기가 흐르고”. 시인은 그것이 목각인형의 “피”와 목각인형의 “온기”가 아님을 “나이테가 선명하게 있는” 것을 보고 직감한다. 자작나무다.
시인은 “지혈제”를 발라준다. “투명한 피가 멈추는 지혈제를” 발라 주는 행위는 자작나무의 회귀를 돕는 행위이다. “대일 밴드를 붙이고”, “붕대를 다시 감아 주”어서 유럽의 목각인형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계속되는 “투명한 혈액”의 흐름과 “가슴”의 “온기”와 “나이테가 선명하게 있는”, “아직 살아 숨쉬는 자작나무”를 시인도 어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보내기로 한다. 시인은 자연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한다.
또한 한규동시인은 은유나 시적 이미지를 통하여 암시暗示하지 않는다. 위에서 열거한 것처럼 “아직 살아 숨쉬는 자작나무”로 직접 말함으로써 시 본연의 특성인 암시적 상징성을 무화시킨다. 이것은 독자를 향한 시인의 깊은 배려임이 분명하다. 한규동 시인은 “지혈제”를 발라 줌으로써 자작나무를 숲으로 돌려보내는데 성공한다.
끝은 없다. 회귀일 뿐이다. 우리에게서 떠나간 서럽고 가슴 아픈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이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보자. 그것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아니면 어떤 그리운 그 무엇이든 말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억지로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 있다면 이제 그들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는 건 어떨까? 쥐고 있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 또한 용기이며 사랑이 아닐까? 우리를 떠났던 그 무엇이나, 그 무엇을 떠나왔던 우리는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져보자. 회귀란 돌아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돌아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정대구 시인처럼 고향으로, 장철문 시인처럼 색과 소리로, 김영남 시인처럼 유년으로, 천양희 시인처럼 어머니를 통하여, 박주택 시인처럼 그리움 속으로 들아가 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면 한규동 시인이 만들어 놓은 자작나무 숲은 어떤가?
기독교에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찰라’라고 말한다. ‘순식간’이란 뜻이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는 짧은 동안’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삶에 있어서 지금보다는 훨씬 더 겸손해져야 되지 않겠는가?
“한나절이 우리를 가르고 있구나.
발랑탱, 너는 이른 새벽,
나는 지는 저녁이란다. 내 사랑하는 아이야.“
-이브 몽땅 <이브 몽땅의 고백> 중에서
2007년 <문학과 창작>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