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안씨는 고려 중기에 소부소감(小府少監)을 지낸 안준(安濬)을 시조로 하는 소감공(少監公)파,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낸 안영의(安令儀)를 시조로 하는 복야공(僕射公)파, 고려말의 인물 안원형(安元衡)을 시조로 하는 신죽산안씨 등 계보가 연결되지 않은 3개파가 1900년대 전반까지 별도로 족보를 간행해 왔다.
복야공파의 최초 족보인 아래 을축보(1805)의 서문에는 신라말 807년 중국 당나라에서 온 이원(李瑗)의 아들 방걸(邦傑), 방준(邦俊), 방협(邦俠) 삼형제가 우리나라 안씨들 대다수의 조상이라는 설이 나오는데, 이런 설을 기록한 최초 문헌 중의 하나이다. 고려말 족보 서문에서 본 것이라 하는데, 이 설에서 죽산안씨 시조라는 안방준(安邦俊)과 실제 시조로 해 온 안준(安濬)이나 안영의(安令儀), 안원형(安元衡)과 어떤 관계인지는 아무 언급이 없다. 이 족보의 자손록에는 시조를 복야공(僕射公) 안영의(安令儀)로 했다.
죽산안씨 복야공(僕射公) 문중 을축보(乙丑譜,1805년) 서문
안성흠(安聖欽, 1760~1817) 찬
........나의 선친(皇考) 진사공(進士公)께서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동종(同宗) 같은 성 같은 본관이 있음을 들으면 반드시 찾아가 그 세파(世派)를 물어보지 않은 곳이 없이 참고 하였는데, 고려 말 족보 서문에 이르기를 옛 당(唐) 헌종(憲宗) 원화(元和) 2년 정해(807년)에 중국인 이공(李公) 휘(諱) 원(瑗)의 아들 휘 방걸(邦傑), 방준(邦俊), 방협(邦俠) 삼형제가 신라 경문왕(敬文王) 때 왜란이 일어나자 나아가 이를 평난하여 나라와 국민을 편안히 한 공으로 안씨(安氏) 성(姓)을 받았는데 방걸(邦傑) 공은 본관(本貫)을 순흥(順興)으로, 방준(邦俊) 공은 본관을 죽산(竹山)으로, 방협(邦俠) 공은 본관을 광주(廣州)로 하였다 [昔我皇考進士公 爲是慨然 聞有同宗共貫 靡不搜問其世派 而參考焉 麗末譜序曰 在昔唐憲宗元和二年丁亥 中原人李公諱瑗之子 諱邦傑邦俊邦俠三兄弟 公出于新羅敬文王時 適値倭亂有靖國安民之功 故賜姓安氏自 邦傑公始貫順興 邦俊公始貫竹山 邦俠公始貫廣州云].
대저 죽산 안씨(竹山 安氏)는 휘(諱) 준(濬) 공을 비조(鼻祖)로 하는 파가 있고, 휘(諱) 원형(元衡) 공을 비조로 하는 파가 있다. 준(濬) 공을 비조로 하는 파를 연창위파(延昌尉派) 안씨(安氏)라 하는데, 그 대수를 조사하면 우리 복야공(僕射公) 이전의 형제항(兄弟行)에서 나뉘어졌다. 그 근본을 연구해 보면 함께 같은 동족(同宗)이나 문헌으로 증명할 수가 없다. 배움이 얕은 후생(後生)이 감히 밝히기 어려우므로, 그 빠진 것과 함께 후대의 학식이 넓은 사람들의 논의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 [大抵 竹山安氏 有以諱濬公爲鼻祖 有以諱元衡公爲鼻祖 諱濬爲鼻祖 卽延昌尉派安氏 而叩其代數 卽在吾僕射公以前分於兄弟行 苟究其本俱是同宗 而文獻難徵 固不可以後生蔑學所敢質明 如其闕遺 當俟後來博雅之論矣].....
靡 [쓰러질 미, 갈 마] 1. 쓰러지다 2. 쓰러뜨리다 3. 멸(滅)하다 4. 말다, 금지(禁止)하다 5. 호사하다 6. 다하다 7. 물가 a. 갈다 (마) 미불(靡不) : 부정어가 서로 맞붙어 어울려 어구로 쓰여, 더 강한 긍정의 의미를 갖는다. 이렇게 쓰이는 것은 無不(=莫不. 毋不. 亡不. 靡不), 無非(莫非), 非非~, 非不~ 등이다.
멸학(蔑學) : 배움이없다. 질명(質明) : 날이 밝으려 할 무렵. 궐유(闕遺) : 빠뜨린 점이나 소홀히 여기는 부분을 말함. 박아(博雅) : 학식이 넓고 성품이 단아함. 또는 그런 사람. 俟 [기다릴 사, 성씨 기] 1. 기다리다 2. 대기(待機)하다 3. 떼지어 가다 4. 가는 모양 5. 서행하는 모양 a. 성(姓)의 하나 (기)
------------------------------------------------------------------------- 위 서문에서는 고려말 족보를 본 사람이 찬자(안성흠)의 황고(皇考)라 했는데, 이는 선고(先考)를 높여 이르는 말이므로 부친이 본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찬자의 부친은 진사가 아니므로, 황고(皇考)를 증조부로 보고 1693년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인 찬자의 증조부 안세풍(安世豊, 1665-1742)이 이러한 고려말 족보를 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위 서문의 지은이는 농서이씨설의 출처가 자신의 부친이 본 고려말 족보라고 하고 있으나, 그 족보의 실물이 전하지도 않을 뿐더러, 대개 이런 위설을 기록한 문건들은 옛날 족보를 사칭하기 마련이므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저 무렵 발간된 죽산안씨 족보들은 조종운의 씨족원류(1680년경)를 주로 참고하였으며, 고려말 족보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다. 이것이 정말 고려말 족보에서 나온 것이라면 순흥안씨 시조는 방걸, 광주안씨 시조는 방협으로 바꾸어야 하는가? 황당한 내용이다.
위 서문의 특징은 1805년에도 구죽산안씨 두 문중이 연결되는 계보가 없어 고충을 토로하고 있다는 점, 신라말 동래한 중국이씨 아들 3형제가 안씨의 기원이라는 설이 등장하는데 그 출처를 고려말 족보라고 한 점 등이다.
고려말 족보를 봤다고 했는데 왜 거기에는 죽산 두 문중을 연결하는 계보가 없었나? 이로부터 100년을 더 지나 1900년대 초에 죽산 문중에는 다시 새로운 고려말 족보가 몇 차례 나타난다. 두 문중 시조 모두를 807년 동래(東來)했다는 이원(李瑗)의 아들 안방준(安邦俊)의 후손으로 잇는 계보는 비로소 거기에 처음 보인다. 한 권도 전해오기 어려운 고려말 족보가 왜 죽산안씨 문중에만 조선말 일제시대에 수 차례나 나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