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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학교 스크랩 -들어가는 말-
소망 추천 0 조회 21 08.10.14 16:41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들어가는 말-

 교회의 본질적인 사명(말씀 선포, 교육, 친교, 봉사) 중 그 어느 하나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교육(Didache)이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하다. 교회는 교육을 통하여 성장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올바른 신앙 교육과 훈련을 통하여 신자는 성숙해 가고 그 성숙한 신자로 인해 교회는 발전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건 교육이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교회로서 존재해 갈 수 없다. 특히 현대사회의 교회에서 기독교 교육이 담당해야 할 일들은 더욱더 많아지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교회의 양적인 성장을 추구하는 시대는 지났다. 성서적인 교육을 통하여 보다 바람직한 신자, 세상의 빛과 소금 역할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교회로 성숙해 가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취지하에서 우리는 간략하나마 기독교 교육의 전반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책의 성격과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견고한 학문적 수준의 내용은 아닐지라도 기독교 교육의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 데는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다음과 같이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Ⅰ. 기독교 교육의 정의와 목적
 Ⅱ. 기독교 교육의 성서적 배경
 Ⅲ. 기독교 교육의 신학적 근거
 Ⅳ. 기독교 교육의 사명
 Ⅴ. 가정과 기독교 교육
 Ⅵ. 주일학교 운동과 기독교 교육


 Ⅰ. 기독교 교육의 정의와 목적

 기독교 교육은 무엇을 말하는가? 단적으로 말한다면 기독교 교육이란 그리스도인을 형성하고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 날은 교육을 인간 형성의 기능이라고 파악하는 견해가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를 기독교에 그대로 적용해 본다면 기독교 교육이란 건강하고 바람직한 기독교인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이 기독교인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꾼을 만들어 가는 일이라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음, 즉 하나님의 말씀을 전제로 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학적인 관점에서 형성, 즉 만들어 가는 일(formation)이란 분명치 않은 상태를 분명한 성격을 가진 어떤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시켜 감을 뜻한다. 따라서 기독교인을 형성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과 개인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 간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기독교 교육과 일반 교육은 그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 교육이 이루어지는 형장이 교회이든, 가정이든, 혹은 학교를 비롯한 사회의 다른 현장이든 간에 그것이 온전한 의미의 기독교 교육이 되려면 교회성과 기독성을 반드시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교육의 목적과 교회를 중심으로 한 교육의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기독교 교육이라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성은 외형적 교회뿐만 아니라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교회를 뜻한다.
 이런 의미에서 참기독교 교육의 대상은 인간이며 교육의 본질적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주로 고백하는 교회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교회나 학교, 가정 등의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그 기반으로 한다.
 기독교 교육의 대상은 일반적인 교육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아에서 노년에 이르는 전체적인 연령층을 포괄하지만 그 교육 내용에 있어서 다른 교육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기서 기독교 교육의 목표와 목적을 생각할 수 있다. 근원적으로 기독교 교육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르는 목표는 불신자들을 신자로 만드는 과정, 즉 신앙 고백을 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과정(초신자 교육)과 신자들이 계속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건실한 일군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훈련 혹은 성화의 단계이다.
 그런데 이 기독교 교육의 목표는 각 시대와 사회의 상황과 성격에 따라서 그 강조점과 세부적인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앞서 말한 초신자 교육과 훈련은 그 어느 것 하나에 편중됨이 없이 강조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한국 교회는 후자 즉 신자의 계속적인 훈련과정을 너무 무시하거나 등한시하는 경향이 짙다. 이는 분명히 목회적, 선교적 차원에서 시급히 수정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일차적 목표인 초신자 교육은 굉장히 중요하다.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성서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 안에서 삶을 살아가겠다는 분명한 의지적 결단이며 분명한 신앙적 체험하에서만 가능한 사실이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기독교 교육의 주체는 자기 자신이나 교사, 목사, 부모 등이 될 수 없고 하나님 그 자신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를 받아들이고 그를 사랑하여 그를 따르도록 역사하시며 예수를 닮아 가는 삶을 살게 인도하신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교육의 기본적 구조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복음을 통하여 교회로 불러 모으는 것과 모인 사람들을 증거하는 사람들, 즉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들로 만드는 형성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세속 교육이 문화적 소산임에 비하여 기독교 교육은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점에서 기독교 교육의 어려움이 발생한다. 이른바 일반 교육의 내용은 도덕, 예술, 학문 등 인간의 이성적 산물이기에 그것들은 인간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따라서 그 교육의 효과는 훈련과 연습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 교육의 내용은  성서이기에 그것은 눈으로도 볼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으며, 사람의 마음속에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차원에서는 나올 수 없는, 이른바 하늘로부터 계시되어진 하나님의 복음이다. 따라서 그 내용은 인간과 연속선상에 있지 않고, 그 교육의 폭이나 질에 있어서도 분명히 그 기준이 신적이다.
 어떤 면에서 신앙 교육은 교육의 열의나 정성에 비례하지 않는 교육일 수도 있다. 기독교 교육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고 그 사랑의 뜻과 의지가 인간과 접촉하는 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기에 그 결과에 있어서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적극적으로 응답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 기독교 교육이며 그 교육의 주도권은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교육이라는 실천적 행위는 인간적 측면에서의 효과와 결실에 관계 없이 하나님의 사랑에 감격한 인간의 봉사로써 실천되는 사항인 것이다.
 일반 교육에 있어서나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교육의 목적을 설정하는 작업은 교육 실천의 중심을 이룬다. 그것은 언제나 교육의 방향, 내용, 과정, 방법 그리고 결과를 측정하는 푯대가 된다. 기독교 교육의 목적을 바로 세우고 이해하는 것은 기독교 교육의 핵심적 요인이다. 기독교 교육사에서 성문화된 목적을 설정한 것은 1930년이었다. 미국의 국제 종교 교육 협의회는 폴·뷔스(P.H.Vieth)가 채택한 '종교 교육의 목적'을 내용상 그대로 7개 조문의 목적문을 작성하였다. 10년 후에는 가정 교육에 관한 조항이 하나 더 추가되어 8개 조문이 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② 예수의 생활과 교훈을 본받음
 ③ 그리스도의 품성을 본받음
 ④ 기독교적 세계관 형성
 ⑤ 교회생활의 올바른 참여
 ⑥ 건설적인 가정생활
 ⑦ 기독교적 인간과 확립
 ⑧ 현재 경험과 성서의 경험과의 일치적 관계 설정
 그 후 1946년에 '기독교 교육'이란 용어가 새롭게 채택되면서 교육을 하나의 과정(process)으로 파악하게 되어, 이에 따른 기독교 교육의 정의가 다시 폴·뷔스의 저서 ≪교회와 기독교 교육≫에 발표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기독교 교육을 '그리스도의 복음과 만나게 하여 복음에 의해 이끌리게 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1958년, 5년의 연구 끝에 다음과 같은 기독교 교육의 목적을 설정했다.

 "기독교 교육의 지상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셨던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사랑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며,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기독교 공동체와의 생동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울 여러 방법을 통해 이 사랑에 믿음으로 응답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교회들도 70년대에 접어들면서 각 교단 나름대로의 교육 목표를 세웠다.
 이처럼 교육 목적의 설정은 교육의 내용뿐만 아니라 과정도 규정한다. 위로부터 타율적으로 가르쳐 주입하거나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주체적으로 학습하고 발견하고 성장해 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오늘날 기독교 교육의 경향이다. 이제 우리 시대의 교육이란 인간의 기독교적 성장을 위해 물질적, 정신적, 사회적인 환경을 정비하고 격려하고 추구하며 돕는 것이다. 과학이 극도로 발전하고 복잡해져 가는 문화 속에서 올바른 기독교적 인간으로 커가는 것만큼 중대한 일은 없을 것이다.

 Ⅱ. 기독교 교육의 성서적 배경

 1. 구약성서에서의 교육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서 신앙의 핵심적 요인은 창조와 출애굽 사건이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삶을 허락하셨다는  것과 애굽의 불 같은 고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해내셨다는 사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이 가능하게 했던 민족적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여태까지 그 어려운 역사적 고난 속에서도 지탱하고 존속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선택하였다는 분명한 의식이었다. 이러한 선민의식을 가능하게 했던 사건이 바로 출애굽 사건이다. 출애굽 사건의 살아 있는 증언이야말로 그들로 하여금 모든 고통과 역경을 이기게 하는 힘이었다. 그 사건이 증언될 때마다 그 사건의 담당자였던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슴속에서 강하게 되살아났다. 이 약속은 율법으로 체계화되었고 도 그것은 역사가 거듭될수록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가르치는 자와 증언자들을 통하여 이어져 내려왔다.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교육이었다.
 출애굽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후손들에게 출애굽 사건은 어떻게 생동하는 현재적 사건으로 재현될 수 있었는가? 그들은 셰마(shema)를 통하여 그 일을 수행하였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라"(신6:4-9)

 여기서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자기의 백성으로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해 내신데 대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응답은 그들의 존재와 삶 전체를 드려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다음에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으로 현재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그 자손들에게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자녀를 교육하는 일이 분리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으로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생활은 하나님에게 대한 신앙으로 유지되고, 또 그들의 생활 전체는 계명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지배되었는데, 이와 같은 생활은 반드시 새로 일어나는 세대에 전해져야 하는 일이었다. 만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 점에서 실패함으로써 그 자손들이 하나님과의 계약 관계에서 오는 참되고 유익한 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의무를 다하지 못했다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셰마(shema)에 대한 가르침과 그 책임은 이스라엘 전체 사회에 부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셰마(shema)가 실시된 양상과 방법은 매우 다양했었다. 이를테면 테필린(Tefilln)과 메주자(Mezuzah)의 방법, 그리고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회당에서의 예배와 학교 교육에서 실시되었다. 여기서 테필린이란 성경 말씀을 손목에 매달고 미간에 붙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에 가죽으로 만들어진 작은 두 개의 통이 사용되었다. 그 속에는 성경 말씀 중의 네 구절(참조; 출13:1-10,11-16; 신6:4-9;신11:13-21)을 기록한 양피지가 들어 있다. 이것에 가죽끈을 달아 하나는 손목에 매고 다른 하나는 이마에 동여매어 촉각을 통하여 그 말씀의 내용을 명심하게 하였다. 원래는 하루종일 테필린을 매고 있었으나 나중에는 아침마다 예배 드릴 때만 착용하게 하였다. 또 메주자(Mezuzah)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도록 명심시키는 말씀을 문설주마다 붙인 것이다. 이는 성경 말씀의 두 구절(참조; 신6:4-9; 신11:13-21)을 기록한 양피지로서, 이들을 나무나 금속으로 되어진 갑 속에 넣은 후 이것을 사람이 거주하는 집의 모든 문설주에 붙이게 하였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그 문을 통과할 때마다 메주자 위에 손을 얹고서 "여호와께서 나의 출입을 영영토록 지키시리로다"라고 말한 후 메주자 위에 입을 맞추었다.
 유대의 종교적 축제는 유월절, 초막절 등을 말한다. 이 축제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토라'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의미하는데 그들은 아침마다 그것을 암송하는 교육 방식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와 같이 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집에 있을 때나, 길에 행할 때나, 누웠을 때나, 일어났을 때 등 모든 생의 순간순간마다 하나님을 의식하고 일편단심 그를 사랑하고 경외하는 삶을 살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교육은 바로 그들의 전 생활의 근거였으며 '셰마'(shema)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결정지어 주는 그 공동체의 표현이었다.

 2. 신약성서에서의 교육

 신약성서에서 보면 예수 그리스도는 주위에 모여든 무리들에게 예언자라기보다는 교사라는 인상을 더 강하게 느끼게 한다. 당시의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하여 랍비(Rabbi) 즉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은 다른 유대교의 랍비들과 달라서 권위와 gal이 있었다. 실제로 예수께서는 가르침을 그의 사역에 주된 방법으로 사용하셨다. 그는 종종 병을 고치는 치유자로, 설교자로, 이적을 베푸는 자로 활동하셨지만 역시 그의 모든 사역의 중심에는 가르침이 그 본질을 이루었다. 예수는 자신의 말에 대해서만 교육하신 것이 아니라 제자의 무리를 사역자로 훈련하고 교육시키는 일도 계속하셨다. 그의 제자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을 다시 가르칠 수 있도록 교육시키셨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교육은 분리될 수 없는 상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와 교육의 이러한 관계는 초대교회와 교육의 밀접한 관계로 계승되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신 고로 교회는 그의 가르치시는 사역을 하나님 날의 관점에서 계승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교회를 탄생시킨 다음 교회는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사건을 셰마(shema)라는 교육 체계로 전승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구속 사건을 '디다케'(Didache) 혹은 '파이데이아'(paideia, 양육) 라는 체계로 전달해야만 했다. 따라서 '셰마'(shema)가 이스라엘 백성 전공동체가 이어나가는 공동의 표현이었다면, 초대교회를 이어나가는 신앙 표현은 바로 교육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인 사도 바울은 구속 사건으로서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는 것을 자신의 주된 임무라고 생각하였지만 사도 바울은 그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하였다. 그가 수많은 서신을 기록한 근본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고 그 방법도 역시 하나의 긴요한 교육 방법이었다. 그는 특히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교역에 있어서나 교회 전반에 있어서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대단히 강조하였다. 또 고린도전·후서에는 탈선한 당시 사람들의 부패함에 대하여 기독교인으로서 사회생활을 하는 규범 등을 가르치기도 하였다.
 바울은 여러 저서(서신)에서 교사의 직분을 사도와 예언자와 목사의 직분과 함께 놓고 있다. 그는 교사의 직분을 고전12:28에서는 예언자 다음에 두었고, 엡4:11에서는 전도자와 목사 다음에 두었다. 이 두 구절은 다 교사가 교회의 기능에 있어 중요한 부분임을 밝혀 주고 있다. 당시의 교역자들은 누구나 다 교육에 대한 책임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새신자를 교육하는 것은 이들 교사들에게 맡겨진 일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바울은 교회의 사역에 있어서 교육의 중요함을 인식하였다. 신앙의 근거인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을 기록하였던 바울에게서 이처럼 교육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볼 때, 신약 시대에 있어서 교육의 기능과 위치가 매우 강조되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기독교 교육학자 제임스 스마트(J. Smart)에 의하면 교회가 만일 교회의 다른 기능들, 즉 말씀 선포와 교제와 봉사 등을 무시하고 교육만 할 때 교회는 도덕주의와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것은 유대주의 랍비들과 서기관들에게서 잘 볼 수 있다고 그는 부연 설명하고 있다. 반면에 교회가 복음 선포에만 열중하고 교육에 게을리 한다면 그 또한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목회자들의 교역, 즉 목회는 입으로만 하는 공염불이 아니다. 설교한 말씀을 뒤이어 신자들의 양육과 성장을 책임지지 않으면 교회는 기형적인 성장을 할뿐이다. 따라서 교회에서는 교육과 다른 모든 기능들이 서로 조화롭게 자신들의 기능과 역할을 다해야만 한다. 한국 교회는 말씀 선포의 중요성만 강조하고 교육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올바른 교육이 성립될 수 있는 길을 조속한 시일 내에 찾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육은 봉사의 기능과도 긴밀한 조화를 유지해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교회의 교제라는 측면에는 교인들끼리 서로서로의 사랑을 교육시키기 위한 '교육'적인 성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고, 또한 교회의 교육은 교회의 코이노니아를 교육적 매개체로서 사용할 수도 잇는 것이다. 교육과 봉사와의 관계도 역시 매우 밀접해야 된다는 것은 참된 교회의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기독교 교육학자 레티 러셀(Letty M.Russell)에 의하면, 교회는 교육을 통하여 예수를 증언하는 공동체가 되어서 세상에 나아가 봉사와 선교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교육은 교회의 내적인 사명이요, 봉사와 선교(디아코니아)는 교회의 외적인 사명이다. 교육과 선교는 교회의 참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두 부분이며, 양자는 밀접하게 연관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디다케'와 다른 모든 교회의 기능들(케리그마, 코이노니아, 디아코니아)이 조화를 이루고 자신들이 맡은 역할을 다하며, 그들이 서로서로 밀접하게 관계되고 통일될 때에만 참된 교회가 이루어질 수 있으며 교회의 교육도 보다 잘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Ⅲ. 기독교 교육의 신학적 근거
 
 우리가 여기서 논의할 것은 기독교 교육의 교육 신학적 측면이다. 특히 기독교의 전반적인 교육 체계의 중심이 되는 '하나님의 자기계시'와 '계시를 받아 응답하는 인간의 행위'와 그리고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사이의 만남을 교육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이는 조직신학의 계시론과 인간론 그리고 교회론을 기본 전제로 한 논의들이다.

 1. 계시론에 입각한 근거

 기독교 교육은 그것이 기독교의 종교적 교육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계시 이해는 그 전체의 핵심적 요인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계시'(Revelation)라는 어휘는 라틴어 revelatio 희랍어 apoklysis에서 온 것이며 본래는 숨어 있는 신비의 드러남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러나 계시라는 말이 기독교 신앙과 신학에 의해 사용되면서부터 그 말은 '하나님의 계시'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고 그 해석에 있어서 많은 논의를 수반하였다.
 램(B.Ramm)이라는 신학자는 계시론을 둘러싼 네 가지 신학적 이해를 그 학파별로 설명하였다. 첫째, 근본주의(fundamentalism)가 주장하는 계시인데 그들은 계시를 성서와 일치시킨다. 이들은 성서와 계시를 문자적으로 동일시함으로 계시를 성경에 제한시킨다. 둘째, 개혁주의(reformed theology)가 주장하는 '계시는 구원에 관계해서 이해된다'는 입장이다. 이들에 의하면 성서는 계시의 저금통이 아니라 구원에 해당될 때에만 진정한 계시라는 것이다. 셋째, 자유주의자들의 해석인데 이들은 계시를 삶의 경험, 즉 그들이 생활 속에서 가지는 '종교적 경험'과 '종교적 통찰력'이라는 것이다. 종교 경험이라는 현상의 객관적 차원은 계시 그 자체이고 주관적 차원은 곧 통찰이 되는 것이다. 넷째, 신정통주의자들의 견해인데 그들은 재해석한 계시론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냥 문자 그대로의 말씀이 아니라 삶의 구체적인 정황 속에서 재해석된 말씀인 것이다. 그 말씀은 인간과 역사를 구원하시는 사건이며, 성서는 이 말씀 사건의 기록된 증언이며, 선교는 선포된 증언으로서 계시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네 종류의 계시 이해는 기독교 교육의 계시 이해와 코리큘럼과 교육 과정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2. 인간론적 근거
 
 기독교 교육을 뒷받침하는 두 번째의 신학적 근거는 인간 이해이며, 이 인간 이해는 원초적으로 계시에 상응하는 문제로서 다루어져 왔다. 그러면 기독교 교육학의 신학적 전제로서 인간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신학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로 지음받은 피조물로서 이해하여 왔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정의하려는 데에 있어서는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타락 이후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녔는가? 를 다룸에 있어서 수많은 논쟁이 되어 왔고, 또 그에 따라 각 신학 사조에 따라 기독교 교육의 목표도 달라졌다. 그러므로 기독교적 인간 이해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지만 타락 이후의 인간은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로 그 방향이 이어지며, 그 구원의 길은 무엇인가? 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형성되어진다.
 이 신학적 전제에 대한 입장들은 다음과 같이 대별되어진다. 타락한 인간 안에도 하나님의 형상의 원뿌리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는 자연 신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인간은 타락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믿는 정통주의자들이 있다. 전자는 카톨릭과 자유주의자들이고, 후자는 칼빈과 루터의 개혁 이후 성장한 개신교들의 신학이다.
 이에 영향을 받은 기독교 교육학자들의 인간 이해는 다음과 같다. 호레이스 부쉬넬(Horace Bushnell)이나 제임스 포울러(James Fowler) 같은 사람은 넓은 의미에서 타락한 이후에도 인간 안에 남아 있는 신적 가능성을 교육과 성장의 신학적 근거로 삼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구원 경험은 하나님의 은총과 은혜에서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교육적인 경험에 의한 것이며 나아가서는 그 경험 자체가 구원일 수 있다. 그러나 제임스 스마트(J. Smart), 루이스 쉐릴(Lewis Scherrill), 웰톤 스미스(Shelton Smith) 등은 인간 타락 이후 인간에게는 그 어떤 가능성도 있지 않으며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하여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인간의 구원은 가능하다. 또 한편으로 이 두 가지 방향의 중간 입장에 서 있는 자들도 있다. 이들에 의하면 인간은 낙관적인 존재도,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도 아니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책임적으로 응답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여기서 응답(Response)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응답이며 한편으로는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 앞에서 주체적으로 응답하는 인간의 반응으로서 응답이다. 즉 하나님의 증언자로서 역사 앞에 응답하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에서의 인간론적 전제는 하나님의 계시적 사건에 응답하는 인간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절대적으로 순종하며 따르는 응답하는 자로서의 인간인 것이다.

 3. 만남의 자리인 교육
 
 기독교 교육에 있어서 만남의 자리는 계시, 즉 하나님의 계시와 그 계시에 응답하는 인간 사이의 만남이며, 그 계시를 받고 응답하며 사는 사람들 사이의 만남이기도 하다. 기독교 교육의 근거를 계시의 사건으로 보는 한 만남의 자리는 사건이 일어나는 현실 속에서의 삶의 경험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여기서의 경험은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의미의 종교적 혹은 도덕적 경험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만남의 자리는 자아와 사회 사이에서의 만남(경험)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말하는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을 의미한다. 따라서 만남의 자리란 하나님의 독생자로 이 세상에 성육하신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때문에 이 만남의 자리는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지며 하나님과 인간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기독교 교육의 핵심이 신앙과 계시에 있다고 굳게 믿는 이들은 모든 것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으려 한다.
 또 만남의 자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의 공동체적인 만남이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가진 이들은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만남의 장이 바로 하나님의 계시를 실천해 가는 구체적인 장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근본적으로 이 두 차원의 만남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교육의 목표와 그 방향은 이러한 측면에서 반드시 찾아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교육에서 말하는 만남의 자리는 하나님과 인간의 응답 사이에 일어나는 신앙적 사건이며, 그와 동시에 그 신앙은 인간끼리의 사랑을 전제로 하고, 그 사랑의 원동력을 통한 역사와 만나는 삶의 사건으로 이어져서 발전한다. 이러한 교육을 통하여 교회는 진실한 하나님의 공동체로 성숙해 가며,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져 가는 것이다.

 Ⅳ. 기독교 교육의 사명

 1. 기독교적인 세계관

 기독교 교육의 내용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세상이 새로워진다는 신앙이고 그 신앙을 중심으로 사고하고 실천하며 사는 삶을 가지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생활의 방향과 삶의 내용을 전환시키며 거듭나게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시 선했던 인간이 그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죄에서  구원 받아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새로운 삶의 길을 가게 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기독교 교육의 내용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기독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타락한 본성과 부패한 문화의 길을 걸어가는 인류를 구하시려고, 즉 죄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인간 세계를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성육신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을 통하여 위대한 사랑과 은혜가 확증되었다. 죽음과 부활의 사건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와 참진리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하셨으며, 세사에 질서를 바로 세우시고 인간들이 하나님과 다시금 함께 사는 길을 나타내셨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교육의 내용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기독화인 것이다.
 기독교 교육학자 제임스 스마트(James Smart)는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들에게, 또 초대교회가 새로운 신자들에게 행하였던 교육을 세 가지 방향에서 말하고 있다.
 첫째, 교육은 복음을 전하려는 행위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실로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제자들과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교훈하시고 가르치셨다. 예수는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천국의 실제를 설명하시면서 천국의 생명을 얻도록 인도하셨다.
 둘째, 교육은 제자들에게 복음과 진리의 풍부한 내용을 더 깊게 가르치시려는 의도였다. 창조주 하나님과 자신들의 삶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그들을 깨우치시고 잘못된 옛생각을 버리게 하여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하시었다. 또 이러한 깨달음을 계속해서 주실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약속까지 하셨다.
 셋째, 교육을 통하여 제자들을 예수님의 사역과 같은 일을 하도록 하셨다. 그렇기 위해서는 강한 마음과 예수를 본받는 투철한 자세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점차 이 세상에서 복음사역을 담당할 사도가 되기 위하여 제자로 부름받은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교육과 훈련은 예수가 시작하신 운동, 즉 하나님 나라 운동을 더 힘있고 폭넓게 지속시키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교육적 방법을 근거로 해서 생각해 볼 때 제임스 스마트가 제시한 기독교 교육은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으려는 데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말씀의 계시로써 오는 하나님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과 만나도록 하는 것이며 그것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와의 만남에서 비로소 온전해지며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로 당당하게 설 수 잇다는 것이다.
 기독화의 중요한 내용은 본질적으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신앙이라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기독교 교육의 참된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이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가지는 삶을 살게 하는 데 있다. 이러한 기독교 교육의 내용에 대해서 쉬라이어(G.M. Schreyer)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기독교 교육은 단 하나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곧 사람들을 생명 주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께로 인도하고 그에게 응답하도록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기독교 복음의 진리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과 목적에 스스로를 맡기고 스스로를 공개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 자신을 자유로 주시고자 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찾으시며 그 자신을 주고자 원하신다. 인간의 제일되는 의무는 하나님의 뜻과 부르심에 마음의 문을 열고 응답해 가는 일이다. 기독교의 최고 임무는 이러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원활히 하도록 교육하는 데에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것이다.

 2. 참된 인간화의 길

 기독교 교육의 중대한 사명은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 참된 인간의 길을 가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세속사회의 비인간화가 우리 생활의 전체를 지배하는 때를 즈음하여 기독교 교육이 담당해야 할 큰 사명은 우리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길을 모색하고 노력하는 일이다. 기독교 교육을 통하여 이러한 다원화된 사회 속에서 비인간화된 사람들이 참된 인간화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비인간화는 빠른 속도를 발전해 가는 산업화와 기계화에 그 주요 원인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과학 기술 혁명의 시대이다. 경제적인 급성장과 과학의 발달로 인간이 기계처럼 되고, 사람들은 돈을 숭배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산업사회 속에서는 인간의 삶과 인간의 삶을 위한 여러 가지 기관들이 기계화되고 합리화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은 사라지고, 인간의 인격적인 만남은 퇴락해 가며 참다운 의미에서의 문화가 기술적인 문명에 의해서 압도되어 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비인간화의 파급은 학교 교육에까지 그 여파를 미쳐 교육의 본질적 목적과는 거리가 먼 비인간적인 교육이 실시되었다. 더 나은 물질적 생활을 가지기 위해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주입식 교육으로 길들어야 하고, 중·고등학교에서는 극심한 입시 지옥 속에서 살아야 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때 기독교 교육은 어떤 내용으로, 어떤 방법을 통하여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키워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교육이 이토록 비인간화되어지는 교육이라면 더욱이 기독교 교육(교회 교육)은 '나와 너'의 인격적인 만남을 가르치는 인간화 교육의 온상지여야 한다. 여기에 기독교 교육이 서야 할 자리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독교 교육은 사회와 교육을 인간화시켜야 하는 책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기독교 교육학자 레티 러셀(Letty M. Russell)은 기독교 교육의 목표를 인간의 참된 인간화로 보고 있다. 러셀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 교육은 사람들을 참인간성으로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 사명에 참가하게끔 모든 사람에게 대해서 주어진 그리스도의 초청에 자발적으로 기쁘게 참여하게 하는 일이다."

 이처럼 기독교 교육은 사명과 목적 중에 현대의 산업화와 대결하는 참인간화의 길을 가장 중시하여야 된다. 알게 모르게 하나님을 향하여 바벨탑을 쌓는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칠 인간화의 교육을 기독교는 강하게 살려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일학교를 처음으로 창시한 로버트 레익스의 인간화 정신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볼 필요성이 있다. 그는 애초부터 아무런 문제 없는 정상적인 어린이들을 돌본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버려지고 소외되어 거칠어진 어린이들을 데려다가 교회 교육을 시켰다. 우리는 로버트 레익스의 이러한 정신을 받아들여 정말로 학교나 사회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어린이들, 또 항상 공부를 못해 열등감에 빠져서 헤매는 아이들을 좀더 따뜻하게 포용하고 사랑하는 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들이 사회의 모든 곳에서 무시를 당한다 해도 교회에서만은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러한 교육의 인간화가 교회에서 강하게 일어나야 한다.

 Ⅴ. 가정과 기독교 교육

 기술 사회에서의 인간 회복은 가정을 통한 기독교 교육에 의해 실현되어야 한다. 기독교 교육이야말로 상대적인 가치가 난무하고 황금만능의 물질주의가 판을 치는 이 사회에 확실한 가치를 제공하고 그 방향대로 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가정의 균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제 모든 인류의 문제거리가 되었다. 기독교 교육이 어느 정도 가정의 부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서양에서는 오히려 가정이 전혀 제구실을 못하게 되었다. 단지 가정은 하숙방이나 호텔쯤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해방 전·후의 시기까지만 해도 가족이라는 테두리가 매우 중요한 교육의 현장이었다. 그러나 6.25 이후 급속도로 미국의 문화가 휩쓸려 들어와 교육은 미국식으로 변하고 서양식이 문화적이라는 당치도 않은 의식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에 따라 가정의 풍경도 미국식으로 바뀌어 갔으며 우리나라의 것은 마치 뒤떨어진 시대의 산물인 것처럼 도외시되었다. 업적 위주, 결과 위주의 풍조가 거의 전사회를 지배하게 된 우리나라는 가정에 있어서도 점점 서구화되어 가정의 위기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가정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경시되고 있으며 점점 그 중요성을 잃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가장 원초적이고 축복된 공동체이다. 아무리 사회가 복잡해지고 악해진다 하더라도 가정은 올바로 지켜지고. 파괴된 가정은 회복되어야만 한다. 약 150여 년 전의 신학자 호레이스 부쉬넬은 가정이 가져야 하는 교육의 권리가 지켜져야 할 이유를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첫째, 가정은 하나님의 언약의 공동체이기에,
 둘째, 기독교 교육적 기능과 보장은 그 부모들의 신앙 교육에 대한 책임을 전제로 한 유아 세례에 있기 때문에,
 셋째, 가정은 그 본질에 있어서 유기적이기 때문에,
 넷째, 부모와 자녀가 공동으로 참여함으로써 이룩하는 신앙과 삶의 장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아브라함이 선택받음은 하나님이 가정을 통해 복을 주시리라는 언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정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로서 중요하며, 유아 세례를 통한 신앙 교육의 책임이 가정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교육의 책임자로 중요하며, 가정을 통한 연대감 속에서 자녀가 성장하기 때문에 가정은 교육장으로 중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육의 막중한 책임을 떠맡고 있는 가정은 파괴되어 가는 현실 속에서도 그 힘을 다하여야 한다. 가정에서 삶의 의미에 대한 질문들이 오가고 그 해답을 '말씀' 속에서 찾을 때에 참가정이 실현되는 것이며 가정의 교육사역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Ⅵ. 주일학교 운동과 기독교 교육

 주일학교 운동은 기독교 교육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였다. 영국에서 처음 태동한 주일학교 운동은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도 기독교 교육의 가장 핵심을 이루고 발전하고 있다. 당시의 근대사회는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그들의 생산양식이 달라지고 그에 따라서 그들의 생활 구조가 달라지고 조건을 바꾸어 놓았다. 산업사회의 발달로 말미암아 숙련공이 물러나고 단순한 기계조직만 할 수 잇는 저임금자들이 대거 취업하게 되었다. 따라서 가장은 집안에서 살림을 해야하고 부녀자들이 가정을 떠나 공장에서 일을 해야 하는 사회구조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아버지들은 날마다 할 일이 없어서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고, 아이들은 버려진 채 방치된 상태로 있게 되었다. 실업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아이들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로버트 레익스(Robert Raikes)는 거리에 버려진 아이들을 모아 돕고, 그들을 교육하기 위해 1780년 글로우체스터의 세인트 카타린트 거리에 최초로 주일학교를 세우게 되었다. 이 최초의 주일학교는 모두 남자 어린이들을 위한 학교였으며, 1년 후에야 여자  아이들도 받아들이는 학교가 새로 개설되었다. 초기의 주일학교에서는 6세부터 14세까지의 어린이들이 모였으며 교육 과정은 읽는 법, 쓰는 법, 예배, 성서 연구, 소요리 문답 등이었다. 오전에는 10시부터 12시까지, 오후에는 1시에서 5시 30분까지 수업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노동 소년들은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영국의 도시 곳곳마다 주일학교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1785년에는 윌리암 폭스(William Fox)를 중심으로 '주일학교 협회'가 결성되어 초교파적인 성격을 띠고 발전하였다. 이렇게 시작된 주일학교 운동은 대부분 평신도에 의한 것이었고 교회 밖의 세속적인 사상에 그 뿌리를 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당신의 부흥 운동과 대조적으로 발전하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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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08.10.14 16:41

    첫댓글 기독교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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