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史記卷六十二 管晏列傳第二
062/2131
「管仲」「夷吾」者, 「潁上」人也. 少時常與「鮑叔牙」游, 「鮑叔」知其賢.
「管仲」貧困, 常欺「鮑叔」, 「鮑叔」終善遇之, 不以爲言.
已而「鮑叔」事「齊」「公子小白」, 「管仲」事「公子糾」. 及「小白」立爲「桓公」, 「公子糾」死, 「管仲」囚焉.
「鮑叔」遂進「管仲」. 「管仲」旣用, 任政於「齊」,
「齊」「桓公」以霸, 九合諸侯, 一匡天下, 「管仲」之謀也.
관중(管仲) 이오(夷吾)는 영상(潁上)①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관중과 같이 다녔던 포숙아(鮑叔牙)는 그가 슬기로운 사람이란 사실을 알았다.
관중의 집은 가난해서 항상 포숙을 속였으나 포숙은 끝까지 그를 좋게 대해주고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포숙은 공자 소백(小白)을 섬기고 관중은 공자 규(糾)를 섬기게 되었다.
이어서 소백이 제나라의 군주 자리에 올라 제환공(齊桓公)이 되니 공자규는 죽고 관중은 죄수가 되었다.
포숙이 관중을 천거하자 제환공이 관중을 재상으로 삼아 제나라의 정사를 맡겼다.
제환공이 패자가 되어 아홉 번에 걸쳐 제후들을 소집하여 회맹을 주재하고 천자를 한 번 추대할 수 있었던
일은 모두 관중의 지모 때문이었다.
「管仲」曰 : “吾始困時, 嘗與「鮑叔」賈, 分財利多自與,
「鮑叔」不以我爲貪, 知我貧也.
吾嘗爲「鮑叔」謀事而更窮困, 「鮑叔」不以我爲愚, 知時有利不利也.
吾嘗三仕三見逐於君, 「鮑叔」不以我爲不肖, 知我不遭時也. 吾嘗三戰三走,
「鮑叔」不以我爲怯, 知我有老母也,
「公子糾」敗, 「召忽」死之, 吾幽囚受辱, 「鮑叔」不以我爲無恥, 知我不羞小節而恥功名不顯于天下也.
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관중이 말했다.
「내가 처음에 가난 했을 때, 일찍이 포숙과 같이 장사를 했는데 내가 항상 그 이익금으로 재물을 더 많이 가져갔으나
포숙은 결코 나를 탐욕스럽다고 하지 않았다.
포숙아는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옛날 포숙아를 위해 사업을 도모했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다시 곤궁한 처지에 빠졌으나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장사를 하다보면 이익이 날 때도 있고 손해가 날 때도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내가 또한 여러 번 관리가 되었으나 그때마다 군주에게 쫓겨났으나 포숙은 나를 불초한 자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아직 때를 만나지 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찍이 여러 번 전장에 나가 그때 마다 달아났으나 포숙은 내가 겁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은 집에 봉양해야 할 늙으신 어머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공자 규(糾)가 군위 다툼에서 패하고 죽었을 때, 소홀(召忽)은 공자 규를 위해 같이 죽었으나,
나는 죽지 못하고 옥에 갇히어 욕된 몸이 되었는데도 포숙아는 나를 부끄러움을 모르는 염치없는 자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부끄러워하는 일은 작은 절의(節義)가 아니라 공명(功名)을 천하에 드러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라는 사실을
그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요,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②
062/2132
「鮑叔」旣進「管仲」, 以身下之. 子孫世祿於「齊」, 有封邑者十餘世, 常爲名大夫.
天下不多「管仲」之賢而多「鮑叔」能知人也.
「管仲」旣任政相「齊」, 以區區之「齊」在海濱, 通貨積財, 富國彊兵, 與俗同好惡.
故其稱曰 : “倉廩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上服度則六親固. 四維不張, 國乃滅亡.
下令如流水之原, 令順民心.” 故論卑而易行. 俗之所欲, 因而予之 ; 俗之所否, 因而去之.
관중을 제환공에게 천거한 포숙은 그 몸을 관중 아래에 두었다.
대대로 제나라의 녹봉과 봉읍(封邑)을 받은 포숙의 자손은 십여 대가 넘도록 항상 이름이 높은 대부 집안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관중의 현명함을 칭찬하기보다는 포숙의 사람을 알아보는 지혜를 더 칭찬하였다.
제나라의 재상이 되어 나라의 정치를 맡게 된 관중은 바닷가의 변변치 못한 제나라에 재화을 유통시키고
재물을 쌓아 부국강병(富國彊兵)을 이루고 백성들과 함께 즐거움과 슬픔을 같이 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백성들이란 창고가 가득차야 예절을 찾게 되고 의식이 풍족해야 영예로움과 욕됨을 알게 된다고 했다.
군주가 솔선하여 법도를 잘 지켜야 육친(六親)③이 비로소 굳게 단결하게 되나, 사유(四維) 즉 예의염치(禮義廉恥)가
널리 행해지지 않는다면 나라는 이내 망하게 된다.
령을 내리는 모습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아서, 백성들의 마음에 순응하게 되고 그 정서에 부합되어 추진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용이하게 행해지게 되었다.
백성들이 바라는 바는 베풀어 주고, 백성들이 반대하는 일은 제거해 주었다.
062/2133
其爲政也, 善因禍而爲福, 轉敗而爲功. 貴輕重, 愼權衡. 「桓公」實怒「少姬」, 南襲「蔡」,
「管仲」因而伐「楚」, 責包茅不入貢於「周」室. 「桓公」實北征山戎, 而「管仲」因而令「燕」修「召公」之政.
於「柯」之會, 「桓公」欲背「曹沫」之約, 「管仲」因而信之, 諸侯由是歸「齊」.
故曰 : “知與之爲取, 政之寶也.”
그가 정사를 돌보는 방법은 화(禍)가 되는 일도 복(福)으로 만드는 일에 능했으며,
실패할 일도 잘 처리하여 성공으로 이끌고 일의 경중과 완급을 잘 분별하고 이해득실을 잘 헤아려 신중하게 처신했다.
제환공이 행한 채나라에 대해 남정(南征)을 행한 이유는 사실은 소희(少姬)의 개가(改嫁)에 노했기 때문이었으나④,
관중은 초나라를 공격하는 구실로 삼아, 초나라가 주왕실에 청모(菁茅)⑤를 공물로 바치지 않은 행위에 대한
죄를 묻기 위해서였다고 했다.
또 실제로는 환공이 산융⑥을 정벌하기 위해 북정(北征)을 행하면서,
그 기회를 이용하여 연(燕)나라로 하여금 소공(召公)⑦의 선정(善政)을 행하도록 이끌었다.
또 가(柯)에서 모인 회맹⑧에서 환공은 노나라의 장수 조말(曹沫)에게 한 약속을 어기려고 했으나,
관중이 나서서 신의를 지키도록 함으로 해서 제후들이 모두 제나라를 따르게 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말한다. 「주는 것이 취하는 것임을 아는 것이 정치의 금과옥조다.」
062/2134
「管仲」富擬於公室, 有三歸·反坫, 「齊」人不以爲侈.
「管仲」卒, 「齊國」遵其政, 常彊於諸侯. 後百餘年而有「晏子」焉.
관중의 누린 부(富)는 공실의 것과 비슷하여 삼귀(三歸)⑨ 반점(反坫)⑩이 다 갖춰있었으나
제나라 사람들은 이것을 사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관중이 죽은 후에도 제나라는 관중의 정책을 준수하여 항상 다른 제후국들보다 강한 국력을 갖출 수 있었다.
관중이 죽고 100여 년 후에 안자(晏子)가 태어났다.
주석
1)영상(潁上) : 영수(潁水)의 강변이라는 뜻이다.
영수는 지금의 하남성 등봉현에서 발원하여 하남성을 동남으로 흐른 뒤 안휘성 수현(壽縣)의 정양관(正陽關)에서
회수(淮水)와 합류한다.
2) 生我者父母(생아자부모), 知我者鮑子也(지아자포자야) :
3) 육친(六親) :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왕필(王弼)의 부(父), 모(母). 형(兄), 제(弟). 처(妻), 자(子) 설을 따른다.
4) 소희(少姬)의 개가(改嫁) : 제환공의 후부인 소희는 채나라의 군주의 여동생으로 환공과 물놀이를 나갔다가
장난으로 배를 흔들자 제환공이 제지했으나 듣지 않고 계속했다.
제환공이 노하여 소희를 채나라에 돌려보내자 채후(蔡侯)도 역시 노하여 소희를 초나라로 개가시켰다.
이에 제환공이 채후에게 앙심을 품고 군사를 일으켜 채나라를 정벌하자 채후가 다시 초나라에 구원을 청했다.
이에 채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출동한 초군과 제환공이 이끌던 중원의 제후연합군과 소릉에서 대치하다가 평화협졍을
맺은 사건을 말한다.
5)포모(包茅) : 띠풀의 일종으로 청모(菁茅) 혹은 삼척모(三脊茅)라고도 한다.
고대에서 청모초(菁茅草)를 볏단으로 만들어 그 위에 부어 거른 술로 제사를 지냈다.
청모는 초나라의 특산물로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가 서자 주왕은 주왕실의 제사를 받들 때 사용하는 술을 거르기
위해 사용하기 위해 매년 마다 청모초를 공물로 바치게 했다.
후에 주왕실의 힘이 쇠약해지자 초나라는 청모를 바치지 않고 있었다.
6) 산융(山戎) : 고대 중국의 북방에 거주했던 이민족 이름으로 제환공이 정벌했던 산융은 지금의 하북성
창려시(昌黎市) 일대이다.
7) 소공(召公) : 연나라의 시조인 소공 석(奭)을 말한다. 주나라의 창업공신으로 주공(周公) 단(旦),
태공(太公) 여상(呂尙) 과 함께 삼공(三公)으로 불린다.
8) 가(柯)에서의 회맹(會盟) : 제환공 5년, 기원전 681년에 환공이 노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가 조말(曹沫)을 장수로
세웠으나 세 번 싸워 세 번 모두 패했다.
노장공이 노나라의 성읍을 바치며 강화를 청하자 환공이 허락하여 가(柯) 땅에서 회맹을 행했다.
가(柯)는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東阿縣) 서남이다. 이윽고 회맹의 날이 되자 비수를 가슴에 품은 조말이 단상에 올라
제환공을 위협하여 제나라가 탈취해 간 노나라의 땅을 돌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조말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약속한 제환공은 약속을 파기하고 조말을 살해하려고 했다.
그때 관중이 나서서 약속을 파기하고 조말을 죽이는 일은 일시적으로 통쾌한 일이지만 제후들로부터 신의를 잃어
천하를 잃는 큰일이라고 설득해서 조말에게 한 약속을 모두 지키도록 했다.
제후들이 듣고 제나라를 믿고 따랐다. (제태공세가와 자객열전)
9) 삼귀(三歸) : 화려하게 장식한 건축물 대(臺), 세 명의 정실부인, 세 개의 가정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0)반점(反坫) : 제후들이 회맹(會盟)할 때 헌수(獻酬)의 예를 행하고 나서 빈 잔을 엎어두는 받침대.
당시 봉건사회에서는 제후 이외의 일반인들은 가질 수 없는 물품이었다.
「晏平仲」「嬰」者, 「萊」之「夷維」人也. 事「齊」「靈公」·「莊公」·「景公」, 以節儉力行重於「齊」.
旣相「齊」, 食不重肉, 妾不衣帛. 其在朝, 君語及之, 卽危言 ; 語不及之, 卽危行. 國有道, 卽順命 ; 無道, 卽衡命. 以此三世顯名於諸侯.
안영(晏嬰)의 자는 평중(平仲)으로 래(萊)①의 이유(夷維)② 사람이다. 제나라의 영공(靈公)③, 장공(莊公)④, 경공(景公)⑤을
섬기며 절약과 검소함으로 제나라의 정치를 힘써 행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제나라의 제상이 되어서는 식사를 할 때에는 고기반찬을 두 가지 이상 먹지 않았고 아내에게는 비단옷을 입히지 않았으며,
조정에 있을 때는 군주의 묻는 말에는 곧고 바른 말로 대답하고, 묻지 않으면 곧은 행동으로 일을 행했다.
나라에 도가 있으면 군주의 명에 순응하고 도가 없으면 그 명이 옮고 그름을 가려 행했다. 이와 같이 함으로 해서
3세에 걸쳐 그의 이름이 제후들 사이에 빛나게 되었다.
062/2135
「越石父」賢, 在縲紲中. 「晏子」出, 遭之塗, 解左驂贖之, 載歸. 弗謝, 入閨. 久之, 「越石父」請絶.
「晏子」戄然, 攝衣冠謝曰 : “嬰雖不仁, 免子於戹, 何子求絶之速也?”
「石父」曰 : “不然. 吾聞君子詘於不知己而信於知己者. 方吾在縲紲中, 彼不知我也. 夫子旣已感寤而贖我,
是知己 ; 知己而無禮, 固不如在縲紲之中.”
「晏子」於是延入爲上客.
월석보(越石父)라는 제나라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죄수 속에 있었다.
안자가 외출했다가 길거리에서 그를 우연히 보고 그의 마차를 끌고 있던 왼쪽 말을 풀어 속죄금으로 내고 월석보를 꺼내
자기의 수레에 태워 집으로 데리고 갔다. 안자가 월석보에게 아무런 인사도 하지 않고 내실로 들어가더니 오랫동안 밖으로
나오지 않자 월석보가 안자에게 절교를 선언했다.
안자가 크게 놀라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 입은 다음 공손한 태도로 월석보에게 말했다.
「이 안영이 비록 어질지는 못해도 그대를 곤경에서 구해주었다고 할 수 있는데 어찌하여 그대는 이렇게 빠르게 절교를
하겠다고 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듣기로는, ‘군자는 자기를 몰라주는 사람에게는 몸을 굽히나,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존중을 받아야만 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조금 전에 죄수의 신분이었을 때 그들은 나를 알지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께서 이미 나를 위해 속죄금을 내고 풀어 준 이유는 곧 나를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나에게 예로써 대하지 않는다면 나는 차라리 죄수들 중에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서입니다.」
안자가 이에 월석보를 맞아들여 상객으로 삼았다.
「晏子」爲「齊」相, 出, 其御之妻從門閒而闚其夫. 其夫爲相御, 擁大蓋, 策駟馬, 意氣揚揚, 甚自得也.
旣而歸, 其妻請去. 夫問其故. 妻曰 :
“「晏子」長不滿六尺, 身相「齊國」, 名顯諸侯. 今者妾觀其出, 志念深矣, 常有以自下者. 今子長八尺,
乃爲人僕御, 然子之意自以爲足, 妾是以求去也.”
其後夫自抑損. 「晏子」怪而問之, 御以實對. 「晏子」薦以爲大夫.
안자가 제나라의 상국이 되어 외출을 할 때, 그의 수레를 모는 어자(御者)의 아내가 문틈으로 그의 남편을 엿보았다.
남편은 재상을 위해 수레 앞에 오르더니 햇볕가리개를 크게 펴고 사두마차를 끄는 말에게 채찍질을 하며 의기양양한
모습을 하며 스스로 매우 만족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남편이 돌아오자 그의 아내가 이혼을 청했다. 남편이 그 까닭을 묻자 아내가 말했다.
「안자(晏子)는 키가 6척도 채 안 되는 데, 그 몸은 제나라의 상국이고 이름은 제후들 사이에 높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첩이 외출하는 안자의 모습을 보니 뜻과 생각이 깊었고, 항상 스스로를 낮추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8척이나 되는 키에 다른 사람의 종복이 되어 그의 수레를 모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스스로 만족한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첩은 당신에게 이혼을 청하는 것입니다.」
그 후로 그 남편은 스스로의 마음을 자제했다. 마부의 태도가 예전과 달리 공손해 진 모습을 본 안자가 이상하게
여겨 묻자 마부가 사실대로 고했다. 안자는 마부를 천거해서 대부로 삼았다.
062/2136
「太史公」曰 : 吾讀「管氏」《牧民》·《山高》·《乘馬》·《輕重》·《九府》, 及《晏子春秋》, 詳哉其言之也. 旣見其著書,
欲觀其行事, 故次其傳. 至其書, 世多有之, 是以不論, 論其軼事.
「管仲」世所謂賢臣, 然「孔子」小之. 豈以爲「周」道衰微, 「桓公」旣賢, 而不勉之至王, 乃稱霸哉? 語曰“將順其美,
匡救其惡, 故上下能相親也”. 豈「管仲」之謂乎?
태사공이 말한다.
나는 《관자(管子)》⑥의 《목민(牧民)》, 《산고(山高)》, 《승마(乘馬)》, 《경중(輕重)》, 《구부(九府)》와 《안자춘추(晏子春秋)》⑦를
읽어보았는데 그 내용이 매우 상세했다.
그와 같은 저서들을 읽고서 나는 그들의 행적을 알고 싶어 그들의 전기를 정리했다.
관자나 안자춘추에 대해서는 세상에 많이 알려져 있음으로 여기서는 논하지 않고 그곳에서 빠져 있는 일만을 논했다.
관중은 세상에 소위 현신으로 알려져 있으나, 공자는 그를 소인으로 여겼다.
그 이유로써 주나라의 도는 이미 쇠미해진 상태에서 제환공은 어진 군주였음에도 그가 왕도를 이루도록 힘써 애쓰지 않고
단지 패자를 칭하게만 했기 때문이었다. 옛말에 군주의 장점은 북돋우고 결점은 바르게 고쳐 줌으로 해서 상하가 서로 능히
친숙해진다고 했는데, 그것이 어찌 관중을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061/2137
方「晏子」伏「莊公」尸哭之, 成禮然後去, 豈所謂“見義不爲無勇”者邪?
至其諫說, 犯君之顔, 此所謂“進思盡忠, 退思補過”者哉!
假令「晏子」而在, 余雖爲之執鞭, 所忻慕焉.
제장공(齊莊公)이 반역한 신하에게 죽음을 당했을 때 안자는 그 시체 앞에서 엎드려 곡하고 상례를 행한 후에
그 자리를 떠났으나 그것이 어찌 의를 보고 행하지 않는 용기 없는 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가 간언의 말을 올릴 때는 군주의 안색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이른 바 조정에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물러나서는 자신의 허물을 고치는 태도를 말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오늘날 만일 안자가 아직 살아있어 내가 그를 위해 말채찍을 잡고 그의 수레를 몰 수 있다면 나로써는 진실로 영광스러운
일이 되겠다.
주석
1) 래(萊) : 지금의 산동성 용구(龍口) 동남에 있었던 중국 고대의 제후국 이름이다. 제태공세가에 「태공이 봉지에 당도하자
래후(萊侯)가 쳐들어와 영구(營口)를 놓고 다투었다.」고 했다. 영구는 래국의 변읍이었다.
주영왕(周靈王) 5년 기원전 567년 제영공(齊靈公)에 의해 멸망하고 그 땅은 제나라 병탄되었다.
2)이유(夷維) : 지금의 산동성 고밀현(高密縣)이다.
3)제영공(齊靈公)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54년에 죽은 춘추 때 제나라의 군주다.
이름은 환(環)이고 경공(頃公)의 아들이다. 주간왕(周簡王) 5년 기원전 581년에 제후(齊侯)의 자리에 올랐다.
공자 광(光)을 태자로 삼아 후계로 삼았다. 주영왕 17년 기원전 555년 당진국이 중행헌자(中行獻子) 순언(荀偃)을 대장으로
삼아 제나라를 공격했다. 제군은 싸움에 패하여 임치(臨淄)로 들어가 굳게 지켰다. 당진군은 임치성 교외의 성곽을 불사르고
물러갔다. 다음 해에 죽었다.
4) 제장공(齊莊公) : 태어난 해는 알 수 없고 기원전 548년에 죽은 춘추 때 제나라 군주다. 이름은 광(光)이고
제영공(齊靈公)의 아들이다. 주영왕 19년 기원전 553년 최저(崔杼)의 추대를 받아 제나라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즉위후 최저의 처와 간통하다가 최저에 의해 재위 6년 만에 살해당했다.
5)제경공(齊景公) : 기원전 547년에 즉위하여 490년에 죽은 춘추말기 제나라 군주다.
이름은 저구(杵臼)고 제장공(齊莊公)의 이모제(異母弟)다. 재위 기간 중 안영(晏嬰)을 등용하여 요역을 줄이고
부세와 형벌을 가볍게 하여 백성들의 질고를 덜어줬다. 이윽고 제나라의 정치는 안정되어 제환공 이래 국세를 만회하여
당진(唐晉), 초(楚)와 함께 중원의 강국이 되었다.
6) 관자(管子) : 관중의 저서로 되어 있으나, 그 내용으로 보아 관중의 업적을 중심으로 하여 후대의 사람들이 저술한 책으로
저작 시기는 전국시대부터 한 대(漢代) 사이로 추정된다.
전한(前漢)의 학자 유향(劉向)의 머리말에는 86편이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 보존되어 있는 자료에는 10편과 1도(圖)가 빠져 있
다.
내용은 법가적(法家的) 색채가 농후하고, 때로는 도가적(道家的)인 요소가 섞여 있기 때문에 《한서(漢書)》에서는
도가(道家)에, 《수서(隋書)》에서는 법가(法家)에 넣고 있다. 정치의 요체(要諦)는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백성을 가르치며,
신명(神明)을 공경하도록 하는 세 가지 일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백성을 부유하게 하는 일이 으뜸이라고 하였다.
7)《안자춘추(晏子春秋)》 : 후세 사람들이 안영의 이름을 빌려 쓴 책으로 대체적으로 전국 중기 때 성립되어 계속해서
증보를 더했다. 《한서(漢書)·예문지(藝文志)·제자략(諸子略)》에는 유가류(儒家流)로 분류되어 있다. 1972년 산동성
임기시(臨沂市) 은작산(銀雀山)의 한묘(漢墓)에서 《안자(晏子)》의 일부 죽간이 발굴되었는데 그 내용은 대체적으로
기존의 문헌과 일치했다. 책의 내용은 묵가(墨家)들의 사상에 가까운 관점에서 쓰여져《묵자(墨子)》의 내용과 비슷하다.
그래서 당조의 유종원(柳宗元)은 《안자변(晏子辯)》이라는 저서에서 「제나라 사람이 묵자의 무리가 되었다.」라고 했다.
송대의 조공무(晁公武)의 《군재독서지(郡齋讀書志)》, 마단림(馬端臨)의 《문헌통고(文獻通考)》에서도 모두 안자를
묵가(墨家)로 분류했으나 그것은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안영의 활동연대는 묵자보다 훨씬 앞서기 때문이다.
앞서 거론한 저서들은 모두 안자의 일화나 행적을 제외하고 편찬한 책으로 대부분은 《좌전(左傳)》의 기록을 참고했고
편찬자들은 원서의 내용과는 다른 내용의 사료를 채용했다.
따라서 안자춘추는 사서라기보다는 창작의 범주에 들어가 정치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문학의 형식을 띤 소설에 가깝다.
중국 역사상 가장 빠른 단편소설집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