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괄량이 합집합①
"얘들아, 영어 책들 빨리빨리 내놓아!"
임시반장인 기원 이가 아이들을 빙-둘러보며 지시를 했다,
"드디어 오신다!"
현희가 엉덩방아를 찧으며 일어섰다 앉았다하더니 마침내 출입문 쪽에서 인기척이 나자 드르륵! 하고 문이 활짝 열어 젖혔다,
"어머나, 핸섬 보이!"
아이들이 입을 쫘악 벌리며 감탄사를 연발할 때 영어 선생님은 벌써 칠판에다 이름 석 자를 써놓았다. 아니, 두 자 뿐이었다.
"한철"
"선생님 가운데 자가 빠졌어요."
"그건 우리 아버님이 처음부터 빼놓고 지으셨으니까-."
말꼬리를 흐리며 얼굴이 붉어지는 영어 선생님, 성우보다도 더 멋진 목소리에 눈웃음까지 치는 총각 선생님이 친애하는 5반 교실에 오실 줄이야, 아이들은 서로에게 눈을 찡긋거리며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생님, 결혼하셨어요?"
그냥 보기에도 소년 같은 선생님에게 주책없는 수원 이가 한마디했다.
선생님은 빙그레 웃으며 영어 책을 펴들고 첫 단원명을 적으려고 뒤돌아 섰다.
"메뚜기도 한철이 라죠?"
누구의 입에선지 장난말이 튀어나오자 노래 잘하는 호숙이가 가만히 있질 못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철이라-."
콧소리를 섞어가며 흥얼대자 교실 안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다.
"자, 앞으로 많은 시간이 있을 테니 농담은 뒤로 미루고-."
"선생님 '앞으로 뒤로'를 합친 숙어는 뭐에요?
정숙이의 말에 아이들은 책상을 두들기며 웃어대자 영어 선생님은 잠시 아무 말도 안하고 서있더니 교탁 위에다 영어 책을 놓았다 들었다 안절부절 어찌할 줄 몰라했다.
"얘들아, 좀 조용히 해!"
나래가 일어서서 아이들을 조용히 시켰을 때는 이미 영어 선생님은 교실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우리들이 좀 심했나?"
"우하하하!"
뭐가 그렇게도 재미있고 신나는지 아이들은 계속 재잘거리며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임시 반장, 가서 선생님 모셔와!"
나래가 기원이 에게 말하자 기원이 짝인 다은이가 말대답하고 나섰다.
"잘난 체 하지마! 나래양, 기원인 어디까지나 임시 반장이야.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판다고 네가 가서 모셔오지 그래?"
"정다은! 너야말로 얌전하게 굴어. 학생회장이면 다야? 아무한테나 큰 소리 쳐도 되는 줄 알아?"
나래는 가만히 있는데 정숙이가 벌떡 일어서서 야무지게 따지는 것이었다.
말괄량이 합집합②
"얘, 빗좀 빌려줘."
"내 머리 모양 괜찮니?"
"그래, 최진실 같다. 아주 예뻐!"
"그럼, 나가자!"
"잠깐만, 체육복이 작아져서 잘 안 들어가."
진희와 소연이가 거울 앞에서 모양을 내고 막 나가려 할 때 경아가 볼멘 소리를 내서 따라 나선다.
"히야, 대단한 아이야!"
소연이가 경아을 앞세워놓고 까르르 웃자 진희도 뒤로 한 걸음 물러선다.
"잠도 적게 자고 음식량도 줄이고 수영도 좀 해보지 그러니? 아니면 에어로빅이라도-."
남산만한 엉덩이를 뒤뚱거리며 걷고 있는 경아의 모습은 별명 그대로 '백돼지'였다.
"너희들 이리 와, 한쪽에 서 있어!"
2학년 때에도 체육을 가르쳐 주셨고 제일 믿음직 스런 선생님으로 인기투표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운해하실 우리들의 호프 이동호 선생님, 일명 호동왕자시다.
"집합하는데 무려 20분 걸렸어. 이래가지고 어디 체력장에서 좋은 점수를 받겠나?"
체격이 좋고 미남이신 호동 왕자님이 벽력같은 소리로 아이들의 기를 죽인다.
"열차! 열차!"
'열중 쉬어!'자세와 '차려!'자세를 합쳐서 한꺼번에 부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정신이 없었다.
발을 떼었다 붙었다. 손은 등뒤로 올렸다 내렸다. 그런 중에서도 말괄량이들의 잡담 소리는 끊임이 없다.
"뒤로 돌아 갓!"
"구령 맞춰 갓!"
"지금부터 운동장 열 바퀴 돈다. 자, 출발!"
호루라기를 휙! 불어 놓고 아이들이 줄을 맞춰 뛰고 있을 때, 호동 왕자님은 세사람의 앞으로 다가왔다.
"너희들은 저쪽 계단을 뛰어서 오르내리는 거다. 스무 번이야. 시작!"
"응, 선생님!"
애교쟁이 소연이가 몸을 비틀며 호동 왕자님의 팔을 감아 잡았다.
"이 녀석아, 그런 애교로는 안 통해!"
"선생님, 저기 3학년 9반하고 우리 합반 수업해요!"
진희가 운동장 동편에서 농구 연습을 하고 있는 남학생들을 가리키며 말을 하자 경아도 그 육중한 체격으로 펄쩍펄쩍 뛰며 호동왕자에게 매달렸다.
"그래요, 선생님, 난 9반 남학생들이 어쩐지 좋더라."
"뭐라고? 이놈들이 정말 안되겠네."
체육선생님이 계단 위에 잘 모셔둔 몽둥이를 집자마자 아이들 셋은 정신없이 뛰어서 반 아이들이 뛰고 있는 대열의 맨 뒤로 달려갔다.
"질서!"
"훈련!"
왼쪽 두줄이 질서! 하면 오른쪽 두줄이 훈련! 하면서 아이들은 힘껏 뛰었다.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힌 채로-.
말괄량이 합집합③
아무리 화를 내도 멋지게만 보이는 호동왕자님과의 즐거운 체육 시간, 일주일에 세 번 가지고는 양이 안 찬다.
"난 체육 선생님이 제임스 딘 같애."
"아니야, 유덕화를 꼭 빼 닮았지 않니?"
"유부남 이래도 좋아 체육 선생님만 보고 있으면 마나 황홀해 지거든!"
"참, 너희들도 병이다, 병!"
진희와 소연 이가 화장실에서 손을 씻으며 이야기를 나눌 때 은주가 사이에 끼여들며 말했다.
"아니, 너, 미진이 언제 왔니?"
"체육 시간에…."
"너 그러다 보안경 아줌마한테 혼나면 어떻게 할래?"
"염려마, 너희들 걱정이나 하라구."
미진은 책가방 안에서 검정 구두를 꺼내어 신으며 휘파람까지 불어 대는 것이었다
"빨리 들어가자. 수학 시간이지?"
은주가 소연이와 진희의 등을 밀다시피 하여 교실로 들어갈 때 미진은 1반 교실 쪽으로 서서히 걸어가고 있었다.
"일룡이 아줌마?"
"아닐걸, 투투나 윤가이버 아닐까?"
아이들이 들어오실 선생님에 대해 점을 치면서 수학 선생님들의 별명을 하나하나 대고 있을 때였다.
"내말이 맞지?"
"우-."
파마 머리를 제멋대로 흩날리게 내버려두고 다니는 노처녀 선생님이 교실 문을 살짝 열고 들어오자 아이들은 별로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인사를 했다.
"작년에 나한테 배운 사람 손들어 봐요."
이쪽 저쪽에서 마지못해 손을 드는 아이들이 열 명쯤 되었다.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테니 내가 날 소개하죠. 이름은 이기자. 나이는 서른 일곱. 노처녀 에요. 또 작년에 이 학교에 와서 얻은 별명은 일룡이엄마구요. 내 목소리가 좀 떨리게 나와서 그러나 본데 괜찮아요. 또 궁금한 것 있으면 물어 보세요."
아이들은 기가 탁 막혀서 할말을 잊고 앉아 있자, 수학 선생님은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나서는 말을 이었다.
"내 정신 나이는 여러분과 똑같아요. 이팔 청춘이죠. 꿈과 낭만이 있는-."
그리고는 운동장 쪽에 있는 창문 가로 가서 운동장을 내다보며 또 계속했다.
"이성을 보면 설레고 열려 있는 새장 속에 갇혀 있는 새처럼 가슴 두근거리며 나가 볼까 말까, 나가면 저 푸른 창공을 나를 수가 있을까 아니면 금세 목덜미를 잡혀 다시 갇히지는 않을까.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 학창시절이죠. 선생님은 학생부에서 교내 생활 계를 맡고 있으니 되도록 내 앞에 불려 오지 않도록 주의하는 게 좋겠지요."
"으악! 그 담배 사건!"
누구의 입에선가 외마디 소리가 나자 아이들은 모두 소리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말괄량이 합집합④
말을 한 아이는 분명히 수원일 게다. 하지만 수원인 시치미를 뚝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려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담배사건으로 말하자면 아는 아이들은 알고 모르는 아이들은 모르겠지만 지난해에 화장실에서 연기를 뿜어내던 십여명의 남학생들이 수학선생님한테 결려들었던 이야기다.
그 남학생들, 그러니까 얼마 전에 졸업을 한 상급생들 중에서 소위 지하 조직 파로 명성이 높던 날라리들(?)이 복도에 나란히 서서 한입에 담배 열 개비씩을 물고 계속 열심히 빨아 때야만 했었다.
"앞으로 열번 피울 담배를 지금 한꺼번에 피우란 말이다."
수학선생님은 담뱃불을 꺼뜨리거나 떨어뜨린 아이의 입에다 계속 불을 붙여주고 떨어진 담배를 주워서 친절하게 입에 놓아주는 등 감독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 바람에 2층 전체 복도가 담배연기로 가득 차서 아이들이 통과하기도 힘들었을 뿐이니라 가까운 교실에서 수업을 하던 선생님들이 나와서 그만 해두라고 말리는 등 벌을 받는 아이들의 얼굴은 완전히 누런 색으로 변하여 질식되어 있었고 숨이 막혀 캑캑거리자 수학선생님의 장풍(손바닥으로 가슴을 툭 밀어붙인다 하여 붙어진 또하나의 별명)에 의해서 저만큼 밀려나 휘청 휘청거렸다.
결국 교감 선생님이 직접 등장해서 사건은 마무리되었지만 그 아이들은 한달 이상 수학 선생님을 피해 다니느라 진땀을 뺐었다.
그 밖에도 실내화를 신고 밖으로 뛰어나간다는 가 반대로 실외화를 신고 실내로 들어오다가 수학 선생님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상상을 초월한 기발한 벌을 준다는 것은 전교생의 대부분이 알고 있는 터였다.
"그래도 그 사내 녀석들이 졸업을 하게 된 것은 순전히 내덕분이라나? 의리 있는 녀석들 졸업식날 고맙다는 선물까지 나에게 주고 갔지 뭐야."
"무슨 선물 이였어요?"
아이들은 어느새 긴장을 풀고 수학선생님에게 질문을 했다.
"예쁜 바구니에 담긴 선물, 마네킹으로 된 시체 손이었지만 그 아이들은 그걸 준비하느라 얼마나 마음 고생을 했었겠니, 아마 고등학교에 가선 잘 들 해낼 거야."
"와아-. 대단한 선배들이야!"
수학선생님은 아예 한시간을 잡담을 하며 보내려고 마음먹고 들어온 것 같았다.
"선생님, 공부하지요."
아니나 다를까 청개구리 심보를 닮은 여학생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진정으로 공부를 하고 싶단 말이지?, 난 그 말이 나오길 기다렸어요. 그럼 모두 책을 펴도록!"
노처녀 선생님의 유도 작전에 넘어간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책을 펼쳐야만 했다.
말괄량이 합집합⑤
종례 시간이다.
아이들은 일곱 시간 동안 일으켰던 회오리바람을 잠재우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 아주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새 침을 떨고 앉아 있다.
"좋아요. 각 조의 조장들은 오늘의 생활 카드를 가지고 나오세요."
그러자 맨 뒷줄의 키큰 여자 애들이 재빨리 달려나와 교탁 위에 노란 카드를 한 장씩 올려놓고 들어갔다.
"아니 뭐에요? 오늘 하루동안 한번도 수업시간에 걸린 사람이 없단 말이지요? 교실 바닥에 떨어진 휴지 한 장도 없었고? 응, 맨 끝조인 8조만 제대로 적었군. 1조의 두 번째 줄 책상 밑에서 연습 종이 한 장 발견, 그리고 장미진은 수학 시간에 자리를 비웠음."
담임선생님은 얌전하게 앉아 있는 미진이를 슬쩍 넘겨보고는 출석부를 펼쳤다.
"응, 결과 표시가 되어 있군. 오늘 청소 당번은 1조가 되겠어요. 그렇지만 8조의 허소라를 빼놓고는 다른 조장들은 믿을 수가 없는 걸."
"맞아요. 갈아치워요. 모두가 거짓말 쟁이어요. 아휴, 8조는 얼마나 떠들었는데요."
"조용히들 하세요. 어쨌든 다음주 월요일에는 임원선거가 있을 예정이니까, 그 때까지만 맨 뒷사람들이 조장으로 활동하면 되겠어요."
선생님이 그 커다란 눈을 부릅뜨면서 아이들을 빙-둘러보자 금세 교실은 잠잠해 졌다.
"긴 이야긴 안 하겠지만 각 과목 시간마다 정신차려서 수업에 임하도록, 도대체 여학생들의 모임이 왜 그 모양이죠? 영어 시간엔 얼마나 장난을 쳤길래 한 선생님의 얼굴이 빨개져 가지고 교무실로 내려오셨을까? 끝종도 치기 전에-."
"우린 장난치지 않았어요. 그져 질문을 했을 뿐인데-."
"선생님, 우리들의 E.T가 너무나 순진한 것 같아요."
"뭐라고? E.T ? 너 일어서!"
드디어 삐삐 지선 이가 불려졌다.
"오해 마세요, 선생님. E.T란 English Teacher의 약자일 뿐인 걸요. 선생님 학교 다니실 때는 그런 말이 없었어요? 이건 유행어도 아니고 비어나 속어는 더더욱 아니잖아요."
지선 이가 몸을 비비꼬며 혀꼬부라진 소리로 애교를 떨자 선생님은 못이기는 척 손짓으로 지선일 앉게 했다.
"모두가 여러분들을 위해서 하는 이야기니까 흘려듣지 말아요. 지난 기간에도 말했지만 시간표대로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고 수업시간에 잘만 들으면 학원이나 과외공부 같은 게 전혀 필요치 않아요. 더 길어지면 잔소리가 될 테니 이만 끝내겠어요. 장미진은 집에 가기 전에 교무실에서 나를 만나고 가도록!"
선생님이 나가자 1조 아이들이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비와 걸레를 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