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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이윤택 시집 『숲으로 간다』(현대서정사)
본향의 ‘숲’으로 귀항歸航하는 ‘실존’과 생명의 시
송용구 (문학평론가. 고려대 연구교수)
‘문화 게릴라’로 널리 알려진 시인 이윤택. 그는 한국 연극계의 대부이자 산파로서 ‘연극’을 통하여 문화의 네트워크를 확장해왔다. 그에게 ‘게릴라’라는 별칭이 안성맞춤인 까닭은 자명하다. 극작(劇作), 희곡론, 연출, 시, 시극(詩劇), 평론 등의 서로 다른 영역들을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장르 간의 통섭과 상호의존의 길을 열어나가는 능력이 천부적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 “만물은 서로 돕는다”라는 상호부조론을 제시하였지만 그 상호부조의 원리를 이윤택의 예술세계로 옮겨서 말한다면 예술 장르 간의 ‘차이’는 하나의 장르와 다른 장르 간의 ‘상호부조’를 강화시키는 조건으로 작용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이윤택의 시는 희곡을 ‘언어예술의 집’으로 건축하는 벽돌이었다. 이윤택의 평론은 시를 ‘사회적 테마의 의복(衣服)’으로 직조하는 옷감이었다. 이윤택의 희곡론은 연극의 ‘예술성’과 ‘사회성’을 유기적으로 융합시키는 문화 미디어였다. 이윤택의 시극은 현실의 혈액이 흘러가는 언어의 뼈대 위에 사상의 살을 입힌 ‘예술의 몸’이었다. 그런데 이윤택의 예술세계에서 발견되는 장르 간의 ‘상호부조’ 현상은 그의 ‘시’를 움직이는 심장과 같은 원리이기도 하다. 그의 시는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이 생명선(生命線)으로 이어져서 역할의 연대를 이루며 협력하는 ‘유기체적 네트워크’다. 그러나 이 ‘유기체적 그물망’을 구성하는 생명의 그물코가 끊어지고 ‘상호부조’의 원리가 교란되는 현실을 비평의 메스로 차갑게 해부하는 외과의사가 시인 이윤택이다. 시는 생명의식과 사회비평의 변주곡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하는 표제작 「숲으로 간다」를 만나보자.
1.
조씨부부趙氏夫婦는 첫 애를 낳은 지 한 해도 채 지나기 전 젊은 아내의 왼쪽 가슴을 잘라내고
숲으로 간다
우리는 지금 너무 많은 빛을 받고 살아서 습지濕地를 확보하지 못한 젖이 마르고 그래서 더욱 각박한 느낌으로 도드라진 가슴 안쪽부터 쪼그라들면서 암세포는 자랐다
그래도 아이들은 태어나고 태어난 아이들은 어디로 가지를 뻗어야 하는지 모른 채 그냥 던져져서 국적불명으로 자란다 그래서 세상은 길을 잃고 현대는 잃어버린 아비 찾기다
이것이 실존이다! 외치던 철학자는 결국 멀리 존재하는 숲을 보지 못한 채 자동차에 치여 죽었고 도시를 비켜 선 외곽에서 닭을 키우던 시인은 난생卵生의 시를 남겼다
2.
숲은 어디에 있나?
숲은 그냥 우리가 숲이라고 불러주는 그곳에 아파트 근처 야산 키 작은 나무 몇 그루로 둘러싸인 구렁에 아니라면, 베란다에 화분 몇 개 놓든지 사진작가 육명심陸明心이 찍은 소나무 사진을 걸어두고 실내조명을 조금 어둡게 조절하면 자신의 숲을 확보할 수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스스로 숲이 되는 일
어떻게 사람이 숲이 될 수 있는가 ......책 속의 길을 찾아 떠날 일
책 속에서 숲을 찾는 매력은 책을 읽다 문득 이마박이 화끈!
밤하늘 높이 치솟아 오르는 숲의 광채를 목격하는 일이다.
동방박사들이 그 빛을 좇아 따르고 석가가 빈 하늘 손가락으로 찌르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치고 시인 폴 발레리가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 노래할 때
숲은 밤하늘에 광채를 쏘아 올린다
그 빛은 사실 스스로 숲이 된 자의 몸에서 솟구쳐 오르는......
- 「숲으로 간다」전문
“첫 애를 낳은 지 한 해도 채 지나기 전 젊은 아내의 왼쪽 가슴을 잘라냈다.” 이 발언은 유방암과 ‘유방절개수술’이라는 평범한 사실을 진술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사건이 ‘생태위기’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미를 포착함으로써 이 시는 진부한 의미의 틀을 벗어나고 있다. 인간의 암(癌)을 유발하는 병인(病因)들이 자연의 병에서 자라난다는 생태적 인식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과 자연 간의 생태적 연결고리가 끊어지고 있는 것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시인의 눈은 시행이 전개될수록 날선 검(劍)처럼 변해간다. “우리가 받고 사는 너무 많은 빛”은 자연의 싱싱한 햇살이 아닌 인공의 빛이다. 그것은 물질만능주의의 메커니즘이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계화의 빛이요, 상품화의 빛이다. ‘소유’라는 목적을 위해 인간의 정신을 도구로 이용하고 인간의 몸을 수단으로 남용하는 맘몬의 빛이다. 우리가 그 “빛”을 일용할 양식처럼 먹고 살다보니 “더욱 각박한 느낌으로 도드라진 가슴 안쪽부터 쪼그라들면서 암세포는 자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인은 ‘단절’이라는 한계상황을 직시한다. 야스퍼스(Karl Jaspers)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시인은 “한계상황”으로 인하여 겪게 되는 절망의 “난파”를 딛고 일어선다. ‘한계’의 파고(波高)를 ‘넘어서기’ 위하여 그는 ‘이성’의 닻을 끌어 올리고 ‘의지’의 돛을 펼쳐 올린다. 그는 고향의 흙가슴이 살아있는 “숲”의 해안으로 귀항(歸航)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책 속에서 동방방박사들이” 쫓아가던 숲의 “빛”이 아닌, “석가”의 해탈을 도와주었지만 지금은 “책 속에서”만 죽은 문자(文字)로 누워 있는 숲의 “빛”이 아닌, 생명의 “빛”이 충만하게 출렁이는 숲의 해안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시인에게 발견된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실존’의 여정은 이미 시작되었고 중도에 포기할 수도 없는 항해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려 표현한다면 “한계”의 격랑을 뚫고 나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 속으로 시인은 자신의 온 생명을 “내던진다”. 가능성의 산정을 향해 시지프스처럼 생명의 돌을 굴려 올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숲을 잃어버린 현실의 황무지 한 복판에 ‘내던져진’ 시인 이윤택. 그는 원초적 “빛”의 물결이 속살거리는 근원의 바닷가에서 “아비”처럼 넉넉한 가슴을 열고 그를 맞이해줄 “숲“을 향하여 그의 존재 전부를 내던진다. 이윤택이 돌아가고자 하는 “숲”은 모든 대립적 세계가 하나로 통일되는 본향의 세계다. 그의 「시론」에서 고백한 것처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나와 세계”, 주체와 객체, 자아와 대상, “자연과 인간”이 한 몸으로 융합되는 전일(全一)의 ‘열린 세계’가 “숲”이다. 잃어버린 “숲”을 찾아가는 시인의 길은 물질문명과 기술문명의 바다 한 복판에 ‘내던져진’ 오디세우스가 고향인 이타카의 해안으로 돌아가는 머나먼 항해의 여정과 같다. 그 여정은 「새벽에 시를 품다」에서 시인이 쓰고 싶어하던 “긴 항해기”로 기록될 것이다. 물신(物神)이 인간을 돈의 노예로 길들이고 테크노신이 인간을 기계의 부품으로 고정시키는 그로테스크한 문명세계의 ‘사이렌’을 뚫고 나아가야만 하는 기약 없는 항로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시밭의 한송이」에서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머나먼 알류샨 열도쯤에서 태평양을 횡단해 오는 연어 떼”의 귀향길과 같이 아득하고 지난(至難)한 길이다. 시인 이윤택이 돌아가서 안기고자 하는 아비의 품 속처럼 넓은 “숲”. 그가 「불의 기쁨 밥의 평화」에서 갈망하였듯이 인간의 근원적 자유를 제약하는 “공동체와 민족과 국가”와 같은 개념과 제도와 체제가 존재하지 않는 완전한 자연상태의 세계를 의미하는 “숲”. 시인이 “청산”이라고 부르는 이 “숲”은 사라져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의식”을 초월하는 현실 저 너머의 세계에 “숲”이 살아 있음을 그는 스스로 확신하고 있다. 이 확신만큼은 “의식의 혼수상태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까닭에 시인은 오딧세우스처럼 이타카의 “숲”을 향하는 항해를 포기하지 않는다. 연어가 “알류샨 열도”에서 고향인 남대천을 향하는 역류의 길을 망각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오딧세우스의 귀환」의 항해에 동승(同乘)해보자.
1986년 1월 4일 신문사에 사직서를 제출하고 내가 썼던 시 몇 편과 짧은 논평論評들을 잡지사에 보내고 배를 탔다 어디로 가야할지 그 목적지와 경계가 불투명했었지만 몇 명의 광대를 모을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항해했다 풍랑의 율격律格에 몸을 싣고 가무음극歌舞吟劇으로 난세亂世를 가로질렀으니 이제 세상을 마감했어야 할 노릇
무사 귀환한 유목민들이 비밀스런 양지密陽에 극장을 세우고 인터넷을 연결시켰는데 접속되지 않는다 늙은이가 다 된 친구들은 이제 좀 조용히 살자고 들 하는데
왜 우느냐 내 녹슨 儉아
(중략)
그래, 그렇구나! 바로 저 무의미!
‘의미 없음’이 적이구나 그래서 적이 보이지 않았구나 ‘의미 없음’ 이야 말로 낡은 역사의 순환논리循環論理 아니더냐
(중략)
의미 없는 이 세상이 우리가 가로질러 온 백년을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으로 처박고 이야기꾼 시인들 인문학자들을 불명예제대 시키겠다는거냐 지금?!
그래, 그렇구나! 바로 이 무의미!
‘의미 없음’이 적이구나 그렇다면, 망령난 노인들아 저 마다의 망령을 높이 처들고 저 무의미의 세상 속으로 입성하라 추종할 신념도 선생도 사라져 버린 지금 우리는 조직도 전선도 없다 망령든 분노가 유일한 폭약일 뿐 세상 곳곳에 망령을 심고 분노를 터뜨리며 자폭하라 늙은 이야기꾼들아
- 「오딧세우스의 귀환」중에서
“비밀스런 양지:密陽”의 한 가운데 앉아 있는 본향의 “숲”이여! 아비의 품 속을 닮은 정신의 모태여! 인간다운 무한의 자유가 넘치는 본향의 세계여! ‘이타카’를 닮은 이 막힘 없는 세계로 귀환하는 늙은 이야기꾼 오딧세우스가 시인 이윤택이다. 그는 “저 무의미의 세상”이 강요하는 모든 “의미 없음”의 비인간적 폭력과 격렬하게 맞서 싸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가 가로질러 온 백년을 거대한 쓰레기 하치장으로 처박고 이야기꾼 시인들 인문학자들을 불명예제대 시키려는” 세상. 오딧세우스는 이 “무의미”의 세상이 배척하는 인간성의 망령에 다시 한 번 사로잡혀 인간적 “분노”를 “유일한 폭약”으로 폭발시킨다. 그리하여 “의미 없음”의 군단이 장악하고 있는 “저 무의미”의 성을 함락시킨다. 인간의 냄새가 나지 않는 무의미의 “세상 곳곳에” 유의미한 인간적 “망령”의 지뢰를 심는다. 마침내 인간다운 절대적 자유의 환호성을 뇌우(雷雨)처럼 내지르며 자유와 정열의 화약이 혼합된 인간적 “분노”의 “폭약”을 거침없이 “터뜨리는” 오딧세우스와 늙은 이야기꾼들의 진군(進軍)을 보라! 그 진군은 인간을 비인간적 “무의미”의 소용돌이 속으로 수장시키려는 자본화, 기계화, 물질화, 이데올로기화의 모든 격랑의 몸을 절대적 자유의 “폭약”으로 분쇄해버리고 진정한 휴머니즘의 방향타에 의지하여 본향의 해안으로 나아가는 ‘실존’의 “항해”이기도 하다. 이 항해의 중간 기착지 “도요”에 정박해보자.
나는 강을 건너지 않고 삼랑진IC에서 내려와 낮은 지붕들로 채워진 시가지를 관통한 후 콰이강의 다리를 건너 무척산자락을 굽이굽이 타고 돌았다 마을 초입 좁은 일차선 도로를 휘영청 너머 항아리 모양 움푹 패어진 분지에 내려앉은, 그래서 지상을 관측하는 각도로서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 무척산을 등지고 돌아 앉아 버린 낙동강 물안개로 시야를 지워 버린, 여기서는 도대체 현실감이 없어 누가 대낮에 빈 공판장 확성기를 틀어 놓았는지 흘러간 옛 노래가 귀가 찢어질 듯 터져 나오고 파자마 바람으로 지나는 늙은이에게 말을 걸어도 대답이 없다 아마 저 옷차림새로 노동과 외출을 겸하는 듯 그 모양새 또한 넉넉하게 보여서 웃어 주었더니 감자 몇 알을 주고 간다
모래땅이라 감자 고구마 밖에 나지 않는다는데 그나마 빈집이 많아 좀체 농사꾼을 만날 수 없다 빈 집은 살만큼 살다가 죽은 사람 집이라는데 자식들이 강 건너 저편에 살고 있으니 목숨이 다하면 그대로 집을 비워 버린단다 가재도구를 챙기지도 않고 집을 그대로 비워 두는 것은 강 저편에서 살기 힘들 때 돌아오기 위해서란다 돌아오면 뭐하는데? 하고 마을 이장에게 물었더니 죽어야지, 한다.
나는 죽기 위해 여기 당도한 것인가
술에 취하지 않았고 강을 건너지도 않아서 나는 물에 빠져 죽지는 않았지만 강 저편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이편으로 돌아 앉아 버렸으니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런 마음이 드니 또 울적하여 잠을 못 이루고 야밤에 찬 서리 밟으며 마을로 나간다 구두를 신고 있어도 풍파 많은 밑창이 닳아서 발바닥이 시리다 밤공기가 공허해서 어이 홀로 이렇게 외로운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드는데
아이쿠, 저 웬 별이야아!
강 저편 오래 전에 사라졌던 별들이 모두 이편으로 건너왔는지 숱한 별 찬란하여 빛발을 쏟는구나 밤하늘 별들은 원래 신이 된 인간들이라는데 밤 하늘 별들이 소리를 내면 하늘과 땅이 갈라지고 다음 세상이 열린다는데 그래서 세 명의 동방박사가 별 따라 길을 떠났고 바리데기 처녀는 물에 비친 별을 떠와 병든 아비에게 먹였다는데 아, 그렇지, 시인 윤동주는 죽어서 별이 되었다는데 그렇다면, 백수광부는 물에 빠져 죽은 게 아니지 육신이 굳은 물질로 강물에 떠내려 갈 때 술병에 떨어진 별은 백발성성한 영혼을 공중부양 시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지금 저기 별이 되었을지도......
늙어가면서 밤을 견디는 일은 슬프다 내가 나를 아름답게 잠재워야 하기 때문
그래서 강 건너 이편 여름 하늘 밝은 별 아래 춤추는 도깨비가 되고 싶구나
- 「도요마을에 와서」 중에서
“움푹 패어진 항아리 모양”이 알려주듯 둥그런 곡선처럼 여유로운 팔을 벌려 만물을 품어주는 곳이 “도요”다. 소유하려는 집착에 사로잡혀 움켜쥐기 위한 대상이 있는 곳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는 광속의 쇠바퀴도 마멸시키는 ‘느림’의 선율이 느릿느릿 강물처럼 흘러가는 곳이 “도요”다. “지상을 관측하는 각도로서는 결코 포착되지 않는다”는 시인의 말처럼 기술문명의 척도로는 결코 장점을 발견할 수 없고 ‘자본주의’의 평가기준으로는 결코 가치를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현실감이 없는” 세계가 “도요”다. “죽기 위해 여기 당도한 것인가”라는 시인의 자문(自問)이 암시하듯이 이곳의 땅 위에 살다가 땅의 심장으로 돌아가 한 줌의 흙이 되어 이곳에서 또 다른 자연의 몸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표식을 “빈 집”으로 남겨두는 곳이 “도요”다.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의 “가치” 개념을 빌려 말한다면 “바리데기 처녀가 물에 비친 별을 아비에게 먹였듯이” 강물 위에 쏟아지는 “별”의 “빛발”을 마시면서 자연과 물아일체를 이루는 삶 그 자체를 인생의 “궁극적 가치”로 추구하는 곳이 “도요”다. 만물의 생명과 조응하고 소통하고 연합하기 위해 자본과 기술을 “도구적 가치”로 사용하는 생명윤리가 “별”처럼 깨끗한 가치를 빛내고 있는 세계가 “도요”다. 앞에서 평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시인 이윤택은 아비의 품 속처럼 넉넉한 근원적 숲의 세계로 돌아가는 귀로에 서 있다. 이타카의 해안에 “별의 빛발”처럼 “찬란히” 피어 있고 페넬로페의 순수한 머릿결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본향의 “숲”을 찾아 귀항(歸港)하는 항로에 서 있다. 본향으로 귀의하는 길 위에 서 있는 시인에게 도요는 또 어떤 ‘실존’의 의미를 자리매김하는 세계인가? 시 「아누이족」에서 “저 너머 숲은 더 이상 경이로운 대상이 아니다 언젠가 우리가 돌아가야 할 곳”이라고 확언한 것처럼 이곳 “도요”야말로 물질만능주의와 기술만능주의라는 그로테스크한 문명의 격랑을 뛰어넘어 본향의 숲에 합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는 객관적 상관물이 아니겠는가?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는 원초적 자유를 누릴 수 있고 나눌 수 있으며 가장 인간다운 인간성의 숨결을 마실 수 있고 흠도 티도 없는 자연의 생명력으로 소통할 수 있는 본향의 “숲”. 그 “숲”의 심장 속으로 돌아가서 녹색의 혈하(血河) 속에 합류할 수 있다는 ‘가능성’ 속으로 시인의 현존재 전부를 ‘내던지게’ 만드는 ‘실존’의 멘토르(Mentor)가 “도요”임을 평자는 확신한다. 횔덜린(F. Hoederlin)은 「빵과 포도주」에서 “궁핍한 시대에 시인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고 동시대의 시인들에게 질문하며 “밤에도 깨어 있기”를 갈망하였다. 릴케(R. M. Rilke)는 「두이노의 비가」에서 “드넓은 모태에서 비좁은 세상으로 나온 것”을 슬퍼하며 모태와 같은 근원적 세계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꺽지 않았다. 시인 이윤택도 모든 인간에게 막힘 없는 자유와 충만한 생명력을 베풀어주었던 숲의 “드넓은 모태” 속으로 귀의하려는 언어의 항해를 돌이키지 않는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하이데거의 말은 이윤택의 시를 대변하는 듯하다. 그의 ‘언어’는 ‘궁핍한 시대’의 장벽을 넘어 자연의 원초적 생명력과 인간의 본원적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밤에도 깨어 있는’ 실존의 집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