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하 6:1-15, 대상 13:1-14>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다, 새 수레의 편안함 경계, 베레스 웃사가 되지 않는 교회, 어깨에 메는 헌신
1. 말씀 배경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제사법으로 정결한 짐승을 드려야 하는데 그들은 그것을 번거럽게 여기고 정결한 짐승 대신에 훔친 것, 저는 것, 병든 것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말라기 1:13]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거로운고 하며 코웃음치고 훔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봉헌물을 가져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이는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바른 제사법이 귀찮은 것입니다. 그래서 시원찮은 것, 훔친 것으로 제물을 가져와 드렸던 것입니다.
이런 변질된 제사의 모습 하나만 보더라도 당시 그들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오시기까지 약 400년의 암흑기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들은 제사를 드리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오늘날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도 신앙생활에 있어서 말씀대로 사는 것을 번거럽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법궤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레위인들에 의해 어깨에 메고 다윗성으로 옮겨어야 하는데, 새 수레에 싣고 운반함에 따라 웃사가 죽는 사고가 발생합니다.
법궤를 어깨에 메지 않고 새 수레에 실어서 온 것입니다. 새 수레에 법궤를 싣고 오기 위해서는 수레를 만들거나 사거나 했을 것입니다. 돈이 들어갔습니다. 새 수레를 드렸기 때문에 그들은 분명히 잘한다고 한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들이 어깨에 메야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들은 돈을 들여 새 수레를 만들어서 해결한 것입니다.
돈을 통하여 새 수레의 편안함으로 하는 믿음 생활을 경계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이 말씀을 가지고 이런 내용으로 한 번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2. 왜, 하나님의 진노로 웃사가 죽는 사고가 발생했을까요?
하나님의 궤를 레위인들이 어깨에 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웃사의 잘못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더 본질적인 문제는 궤를 어깨에 메지 않은 것입니다.
궤를 메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소들을 뛰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웃사의 잘못도 있습니다. 그의 인간적인 생각과 판단으로 흔들리는 궤를 붙잡아 하나님의 거룩함이 훼손된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궤를 채에 궤어 레위인 (고핫자손)을 통하여 어깨에 메고 운반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출애굽기 37:5] 그 채를 궤양쪽 고리에 꿰어 궤를 메게 하였으며
[신명기 10:8] 그 때에 여호와께서 레위 지파를 구별하여 여호와의 언약 궤를 메게 하며 여호와 앞에 서서 그를 섬기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셨으니 그 일은 오늘까지 이르느니라
그래서 광야 사십년 동안 법궤를 수레로 이동하지 않고 어깨에 메고 이동했던 것입니다. 수레에 싣고 다녔으면 편하고 좋을텐데 말입니다. 이스라엘 지휘관들이 덮개 있는 수레 여섯 대와 소 열두 마리를 헌물했을 때에도 법궤를 포함하여 성물을 어깨에 메어야 하는 고핫자손에게는 그것을 나누어 주지 않았습니다 (민 7:1-9)
[민 7:9] 고핫자손에게는 주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의 성소의 직임은 그 어깨로 메는 일을 하는 까닭이었더라
그런데 다윗 시대에 와서 말씀을 어기고 법궤를 옮기면서 새 수레에 싣고 다윗성으로 옮기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왜, 법궤를 새 수레에 싣고 이동하고자 했을까요? 왜, 그랬을까요?
① 블레셋 사람들이 했던 관례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사울왕 시대에 법궤를 아벡 전투에서 블레셋에게 빼앗긴 적이 있었습니다.
[삼상 4:17] 소식을 전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블레셋사람들 앞에서 도망하였고 백성 중에는 큰 살륙이 있었고 당신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도 죽임을 당하였고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나이다
법궤가 블레셋으로 들어간 이후로 하나님께서는 법궤가 머무는 블레셋 도시마다 독종을 발하게 하여 블레셋 도시 아스돗, 가드, 에글론을 거쳐 다시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이때에 블레셋 사람들은 새 수레를 만들어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나는 소에 메우고 법궤를 싣고 이스라엘 땅 벧세메스로 보냅니다.
[사무엘상 6:7] 그러므로 새 수레를 하나 만들고 멍에를 메어 보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를 끌어다가 소에 수레를 메우고 그 송아지들은 떼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여기서 블레셋 사람들도 새 수레를 사용하여 법궤를 이동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들도 하나님 말씀보다도 블레셋 사람들이 한 전례를 따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보다도 전례, 관습을 따르는 경우가 있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게 했으니까. 아무일도 없었는데~~
잘못된 관습, 전례는 말씀을 잃어버리게 하고 변질된 신앙을 가지게 합니다.
그렇다면, 법궤의 운반 말고도 다른 부분에 있어서도 오랜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이 하나님 말씀을 따르지 않고 변질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은 분명히 초대교회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시대가 문화가 다르므로 달라져야 하는 부분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은 변질되지 않아야 합니다. 말씀이 문화를 지배해야지 문화가 말씀을 지배하여 변질시켜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기준, 잣대는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캐논”이라 합니다. 우리들의 삶의 척도,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빼앗긴 아벡전투가 있었던 때부터 다윗의 예루살렘 통치시기까지는 약 8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사무엘시대 32년, 사울시대 40년, 다윗의 헤브론 통치 시대 7.5년).
오랜 세월이 흘러서 말씀이 흐려져 법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경 말씀을 따르지 않고 블레셋의 전례를 따랐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 악기를 치면서 돈을 들여 만든 새 수레에 싣고 와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에게는 말씀이 없기 때문에 가능할지 모르지만 말씀이 주어진 이스라엘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수레가 새 수레이니까 좋은 것 드렸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찬송을 하면서 운반하니까 하나님 기뻐하실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말씀보다도 찬양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씀보다도 새로운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법궤를 어깨에 메지 않은 다른 원인을 무엇일까요?
② 어깨에 메는 수고가 싫은 것입니다.
서두에 번거롭게 여겼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무거운 법궤를 메고 다윗성으로 오는 것이 번거럽고, 수고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무거운 것을 왜 굳이 먼 곳에서 어깨에 메고 옵니까? 새 수레에 싣고 오면 편안한데~~ (예루살렘까지 약 14km 정도일 것으로 추정됨)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신앙생활에 있어서 말씀대로 살자니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부분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코로나 시대를 마쳐가는 지금은 꼭 교회까지 가서 예배를 드려야해?, 영상으로 예배드리면 되는데! 매주 주일성수를 해야해? 십일조도 해야해? 술도 못 먹게 하고~ 등등
현실적으로 말씀대로 이런 것들을 지키면서 사회생활을 하자니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들어서 안 하려고 합니다. 극단적으로는 이것들을 하지 않아도 되는 다른 종교로 갑니다.
▶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어께에 메어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헌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어의 뜻 그대로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려야 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것이 싫어서 새 수레로 대체를 합니다. 돈으로 해결하자는 것입니다.
말씀과 상관이 없다면 돈으로 새 수레를 사서 드릴 수 있는 부분도 있지만, 말씀을 지키고자 직접 메어야 하는 부분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돈으로 새 수레로 떼울 수 없는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평안한 신앙생활은 필요하지만, 편안한 신앙생활을 경계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의무를 지지 않고 더구나 교회의 온갖 화려함과 좋은 것에 갇혀 있다면 경건함보다도 편리함으로 가득찬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 교회는 십자가가 넘쳐야 합니다.
성막 뜰에는 피가 넘쳤습니다. 결코 편안한 자리가 아니였습니다. 앉아서 커피 마시고 노닥거리는 장소가 아닙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도 대부분 가정교회도 결코 편안할 리가 없습니다. 더구나 핍박을 피해서 숨어서 예배를 드리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4C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교회는 황제가 예배에 참여하는 교회가 됨에 따라 형식과 화려함으로 채워져서 영적인 힘을 잃고 말았습니다.
예배 집례자의 권위가 앞세워지고, 그 권위를 나타내는 화려한 복장, 황제가 참여하기 때문에 예배의 형식과 절차만 강조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화려한 교회로 몰려들지만 많은 사람들이 헌신보다는 새 수레만 끌고 오게 되었습니다.
”주님 이 새 수레에 타십시오“ 제가 이번에 새 수레를 헌금했습니다!
예배를 누군가가 대신하여 드리지 않고 직접 드려야 하듯이 헌신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데 자꾸만 무언가로 대체를 하고자 합니다.
새 수레를 모는 소가 뛰고, 그래서 법궤가 흔들리고, 소를 모는 웃사가 거룩한 법궤를 붙잡으므로 즉사했듯이 오늘날 교회가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베레스웃사가 되면 안됩니다.
과거에 우리 어릴 적에 마당에 멍석깔고 모깃불 피우고 둘러 앉아 예배를 드렸을 때가 훨씬 더 간절했고 은혜가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을 직접 드리는 헌신이 아닌 새 수레를 경계해야 합니다. 많은 물질을 드려 꾸며진 화려함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제는 자신의 어깨에 법궤를 메어야 하는 부분을 놓치지 마세요.
네 명이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은 오늘날 성령이 임한 교회의 모델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이 진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서로 발 맞추며 균형을 잡고 자신들의 힘이 아닌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나아가는 모습 말입니다.
▶ 법궤를 어깨에 멘다는 것의 또 다른 의미가 있습니다.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법궤를 메고 가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는 모습입니다.
소가 뛰고 수레가 뒤집어지는 것은 성령이 임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들 위에 성령이 임하면 뛰고 뒤집어지니까요.
그렇지는 않겠지만 하나님의 임재가 새 수레나 소들에게 임할 수는 없습니다.
사람에게 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싶으면 새 수레가 자신을 대신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법궤를 메는 헌신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법궤를 어깨에 메는 일이며, 성령이 임하는 길입니다.
3. 뒤 늦게 깨닫고 말씀대로 레위인이 어깨에 메고 법궤를 다윗성으로 옮깁니다.
웃사 사건을 계기로 다윗은 법궤를 다윗성으로 메어오지 못하고 오벧에돔의 집으로 가져 갑니다.
다윗은 석달만에 그의 온 집이 복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다윗성에 내리기를 바랐던 복이 오벧에돔의 집에 내렸다는 것입니다.
어깨에 법궤를 메지 않은 열매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복을 받고 싶어서 다시 법궤를 다윗성으로 메어 올리고자 합니다.
역대상 13장, 15장 말씀과 함께 본다면, 규례대로 여호와의 말씀에 따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성결하게 하고 그들로 법궤를 채에 꿰어서 어깨에 메고 옮깁니다.
[대상 15:13]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14이에 제사장들과 레위사람들이 이스라엘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고 올라가려 하여 몸을 성결하게 하고 15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령한 대로 레위자손이 채에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
법궤를 옮길 때 그들은 춤을 추며, 악기로 찬송을 하고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렸습니다.
말씀대로 하는 예배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 기뻐하는 참 예배를 드려진 것입니다.
이제 법궤가 다윗성에 설치된 장막에 모셔졌습니다.
법궤가 있는 곳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열왕기상 8:6]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그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성전의 내소인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열왕기상 8:7] 그룹들이 그 궤 처소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열왕기상 8:13] 내가 참으로 주를 위하여 계실 성전을 건축하였사오니 주께서 영원히 계실 처소로소이다 하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요, 다스리시는 장소요 가장 거룩한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이 이후에 다윗은 새로운 차원의 복을 받게 됩니다.
▶ 삼하 6장에서 법궤가 다윗성으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삼하 7장에 서는 하나님께서 다윗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시고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왕권을 약속하십니다 (삼하 7:12-16).
그리고 8장에서부터 다윗이 가는 곳마다 승리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니 하나님의 임재가 있고 그러니 다윗이 엄청난 복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가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들도 말씀대로 헌신하면 다윗과 같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오늘날 교회와 가정이 베레스웃사가 되면 복을 받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말씀대로 살 것입니까? 전례대로 살 것입니까?
자신을 직접 어깨에 메는 헌신하며 살 것입니까? 아니면 신앙생활을 돈을 드려 새 수레를 사용하여 편안하게 사시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잘 묵상하셔서 한국교회와 가정이 베레스웃사가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