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수성이란 한마디로, 소재로부터 흘러나오는 독특한 이미지를 수용하는 오관(五官)과 영적 능력이다. 다시 말하면 대상의 불변적인 물질성을 함유한 물질적 상상력이 분출되는 순간 그 에너지를 감각적인 이미지로 수용하는 힘이다. 소재 선택 차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예리한 감수성의 연마이다. 작품 창작과정에서 감수성은 소재(대상)에 대한 작가의 예술적인 인식과 수용 능력을 결정짓는 최초의 힘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은 만물이 들려주고 보여주는 이미지들과 언제든지 풍성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형상하는 예술성과 문학성의 질적 차이 또한 기본적으로 감수성의 세련 정도와 무관하지 않다. 수필을 쓰려는 사람 또한 감수성 훈련을 위해서는 詩를 부지런히 일을 필요가 있다. 좋은 시는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독특한 이미지를 통해 전달하므로 감수성 훈련에 안성맞춤이다. 시는 비유와 상징의 원리를 가장 풍성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핵심적인 의미를 간결하게 함축시킨 문장 조직 원리를 보여줌으로써 수필 문장 훈련법을 제공하기도 한다. 따라서 시를 읽으면서 소재의 이미지를 어떻게 활용하여 의미와 상징 및 비유를 만들어 내는가를 탐구한 뒤에 시인이 포착한 주제나 소재를 수필로 개작해 보는 것이 효과적이라 하겠다.
2) 유추적 소재 통찰의 방법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소재를 어떻게 통찰하는가의 문제는 감수성을 효과적으로 작동시키기 위한 전략과 관계된다. 같은 대상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혹은 어떤 분위기와 마음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통찰의 내용과 관찰의 밀도가 달라질 수 있다. 수필작가에게 소재는 주제를 이끌어 내는 글감인 동시에 주제를 형상화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창조 기법으로서 그 대표적인 것이 객관적 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이다. 객관적상관물의 도입은 독자의 감수성을 촉발시키고 문학적 상상력을 일깨우는 동기가 되어준다. 이것은 ‘특수한 정서의 공식이 되고 독자에게 동일한 정서를 환기하게 되는 일련의 사물, 정황, 사건’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대체로 작가나 시인이 작품 속에 적절하게 도입한 제재나 핵심 소재가 바로 주제를 만들어내는 객관적상관물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특히 문학으로서의 수필을 쓰려는 에세이스트에게는 필수적으로 필요한 개념이라 할 것이다. 작품의 형상화 과정에서 객관적상관물의 속성이나 상태가 작가가 보여주고자 하는 주제와 치밀한 호응 관계를 형성할 때 작품의 예술성은 극대화될 수 있다. 말하자면 원관념인 주제와 보조관념인 개관적 상관물이 유기성과 상관성을 지닐 때 문학성과 의미작용이 상승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제 이와 같은 원리에서 이루어자는 소재 통찰 과정을 살펴보자. 먼저 일정한 소재가 표층적 의미구조를 형상화하는 재료라고 한다면, 주제는 그를 활용하여 심층적 의미구조를 구축하는 핵심적 의미이다. 전자는 소재 자체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를 표층구조에 배열한다면, 후자는 그 소재를 활용하여 작가가 창조하고자 하는 문학적 의미 즉, 인간적 의미를 생성하게 한다. 전자가 겉으로 노출되는 특성을 보인다면, 후자는 속으로 은폐되는 특성을 갖는다. 그뿐만 아니라, 후자는 전자를 중개자로 하여 작가가 꿈꾸는 본질적인 의미를 창조하게 된다. 여기서 전자와 후자를 이어주는 의미의 연결고리를 떠올릴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비유와 상징 등을 성립시키는 유추의 원리이다. 흔히, 원관념tenor과 보조관념vehicle을 비유나 상징 형식으로 이어주는 의미의 연결 작용을 유추analogy하고 하는데, 유추작용은 기본적으로 의미의 유사성과 인접성, 동일성 등을 활용한다. 유추가 성립되지 않으면 비유나 상징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소재를 활용한 주제의 형상화와 의미 창조는 불가능하게 된다.
표층구조 : 1차 상징체계 (상식적 의미 노출-소재의 의미-객관적상관물) : 보조관념 ⇓ (의미 연결의 원리; 아날로지analogy) 심층구조 : 2차 상징체계 (문학적 의미 숨김-인간적 의미-주제) : 원관념
표층구조 : 1차 상징체계 (긴 상 같이 들기-소재의 의미-객관적상관물) : 보조관념 ⇓ (의미 연결의 원리; 아날로지analogy) 심층구조 : 2차 상징체계 (부부의 호흡 맞추기-인간적 의미-주제) : 원관념
이 도식이 시사하는 바는 작가가 궁극적으로 창조하고자 하는 것은 표층구조가 아니라 심층구조이며, 후자는 반드시 전자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통해서만 생성된다는 점이다. 작품의 실제 차원에서는 전자와 후자의 구별이 불가능한데도, 작품구조를 이중적으로 설명한 것은 논리적인 설명을 위한 불가피한 조치이다. 이러한 사실은 수필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글감이 없는 수필이 존재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리고 수필 역시 소재를 중개자로 하여 작가가 설정한 주제의식을 형상화한다는 점에서 위 도표는 정확하게 적용될 수 있다. 윤모촌이 「오음실 주인」이라는 수필작품에서 아내를 오동나무 잎에 비유하듯이, 반숙자가 「등나무집 형님」에서 시골에 사는 손위 동서의 인간적 덕성을 등나무에 비유하였듯이 소재는 주제와 비유적 의미 관계를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소재의 의미를 배열하는 표층구조는 보조관념vehicle의 기능을 수행하고, 주제를 형상화하는 심층구조는 원관념tenor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를테면, 보조관념인 소재의 세계를 중재자로 하여 그것과 유사성이나 인접성 혹은 동일성 등으로 연결 될 수 있는 원관념을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방식으로 의미를 창조한다. 앞의 예에서 윤모촌은 오동나무 잎을 보조관념으로 삼아서 오동나무 잎처럼 후덕한 아내의 미덕을 형상화 한다. 예컨대 여름엔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달밤엔 낭만적인 분위기로 이끄는 넓은 오동나무 잎의 후덕한 이미지와 아내의 아름다운 부덕을 등가화 하여 형상화한다.
지난 가을은 참다운 결실의 계절이었던가. 무언가 허전함 속에서 지나갔나 싶더니 무화과를 못 본 아쉬움이었다. 뽕나무과의 이 수목은 원래 따뜻한 지방에서 자라기에 청주에서는 볼 수가 없나 보다. 재작년 경북 동해안에서 거주했을 땐 앞뜰에 그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2월말 이사를 와보니 미끈한 회록색 가지들이 앙상하게 뻗어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뽕나무 같았다. 4월 중순이었다. 은사님께서 다녀가시며 생명력이 대단한 나무라고 귀뜸해 주셨다. 뿌리도 억세고 꺾꽂이도 잘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렇지만 옆의 살구꽃과 진달래꽃이 피었는데도 그것은 묵묵히 노란 겨울눈을 지닌 채 대단한 인내를 보이는 듯했다. 오히려 더디거나 실기(失期)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러더니 포도덩굴에도 잎이 뾰족이 나오고, 복사꽃을 한창을 지날 무렵에야 그것도 꽃이 아닌 작디작은 잎눈을 피우는 것이었다. 8월에는 잎도 뽕잎같이 넓고 푸르게 피어났다. 그 잎들 사이로 마치 풋목화(다래) 같은 녹색 과실이 달려 있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9월이 되자 누르스름하게 익기 시작했다. 10월엔 그 열매들이 본격적으로 전체가 암자색으로 변해갔다. 겉보기엔 그다지 좋은 색깔은 아니었다. 마침내 껍질에 하얀 금이 가는가 싶더니 연분홍 색실오리 뭉치 같은 속살꽃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 꽃이 없는 게 아니었던가. 그 때깔 없는 껍질 안은 자기실현의 진지한 터전이었다. 일찍이 암꽃과 수꽃이 사랑의 밀어를 엮어낸 은밀한 내면 공간이었다. 그 곳은 또한 단단한 뿌리로 대지를 단단히 헤집고 자기 완성의 울안으로 충실히 나아간 흔적이었다. 곧 그 꽃은 땅 속으로의 심화와 더불어 하늘로의 확대에 의한 소망의 결정(結晶)이었다고 할까. 모든 세속사를 안으로만 삭이면서 내실(內實)을 기하는 무화과의 자태는 놀랍도록 삶의 의미를 암시해 주고 있다. 그것은 졸부의 빛 좋은 책장 속에서 고독을 되씹고 있는 호화장정의 전집이 아니라, 지난해의 달력으로 표지를 입혔을망정 검은 줄, 파란 줄, 빨간 줄이 여러 겹으로 그어진, 손때가 묻어 더욱 친근한 한 권의 문고본의 이미지로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참으로 무화과는 생명의 내적 충실감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수수하면서도 건실한 생활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볼 수 없는 곳에서도 가슴에 담아둠직한가 보다. ----<<月刊 에세이, 1991. 6월호.>>
□ 詩 ‘부부’(함민복)
긴 상(床)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의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첫댓글 회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