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부산 기독 신학교 학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푸른소나무
이 작품은 성당 벽에 모자이크로 제작된 성화들 가운데 한 점이다. 옥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은 빵의 기적을 베푸신 후, 사람들에게 일상의 빵이 아니라 생명의 빵에 대해 가르치신다.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 남은 빵 부스러기가 12광주리에 가득 담겨 있어서 풍요로움을 더해 준다. 뒷면의 황금색 배경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천상의 진리, 영원한 생명의 빵에 관한 고귀한 것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회당에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만났다. 환자는 신뢰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병든 손을 내밀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손을 펴라"고 하시자 그의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예수님은 왼손에 하느님의 말씀이 적힌 두루마리를 쥐고 있으며 하느님의 권능을 상징하는 오른손을 들어 병자를 치유해주고 있다.
코라성당 (CHORA CHURCH)
이 자리에 우스티니안 수도원이 있었으나 558년의 대지진에 완전히 파괴된 직후 같은 자리에 이 성당이 세워졌다. 당시에는 궁성밖에 위치해 있어서 "코라 (CHORA )" 즉 "교외의 성당" 이라고 불리웠다. 이 성당은 내부의 천정과 벽이 성서를 내용으로 하는 모자이크 및 프레스코 벽화로 장식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예루살렘의 구시가(Old City)를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성벽과 성문은 오스만 터어키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가 예루살렘을 견고한 요새로 만들기 위해 1537년에서 1542년에 걸쳐 완성하였다. 북쪽 성벽이 먼저 완성되었고 뒤이어 동쪽과 서쪽, 남쪽벽이 쌓아졌다. 성벽 둘레의 길이는 약 4,018km이다. 성벽을 따라 8개의 성문과 성위에 34개의 탑과 24개의 망루가 있다. 성문중 욥바문, 다메섹문, 시온문은 원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 성문들은 적의 침입시 방어하기 좋도록 하기 위해서 ‘나’자 형으로 만들어졌다
욥바문(Jaffa Gate), 다윗의문, 아브라함의문, 헤브론문
욥바문은 성 서쪽에 있는 유일한 문이다. 이 성문은 십자군 문이 있던 자리에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서 세워졌다. 욥바문이라는 이름은 지중해 연안에 있는 욥바항구에 이르는 길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붙여졌다. 비잔틴과 십자군 시대에는 옆에 다윗 망대가 있었기 때문에 다윗문이라고도 불리웠다. 아랍어로는 ‘바브 엘 카릴’(헤브론 문)이라고 하는데 ‘엘 카릴’은 ‘하나님의 친구’란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친구인 아브라함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문’이라고도 한다. 문 정면에는 ‘슐레이만 대제가 1538년 이 문을 세웠다’라고 아랍어로 쓰여 있고 그 밑에 최근의 문구로서 1970년에 보수를 마치고 나서 “예루살렘성이 보수됨”(느4:7)이라고 히브리어와 아랍어로 쓰여 있다. 1898년까지는 욥바문과 다윗망대 사이에는 성벽이 있었으나 독일 카이자르 빌헬름 2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마차가 들어오기 위해 이를 헐어내어 길을 만들어 현재의 도로가 생겼다. 1917년 영국 알렌비 장군이 영국군의 선두에 서서 이 욥바문을 통해 걸어서 들어왔다. 이 욥바문은 1948년에 봉쇄되고 이 옆에 방어벽이 세워졌었다. 1967년 6일 전쟁 때 회복되어 다시 사용되고 있다.
시온문(Zion Gate), 예언자 다윗의문
시온문은 성의 남쪽 성벽 서쪽에 있다. 시온산으로 통하기 때문에 ‘시온문’이라 부르고 시온산에 있는 다윗왕의 무덤을 갈 때 이 문을 통해서 가기 때문에 아랍어로 ‘예언자 다윗의 문’이라고도 한다. 문의 바깥쪽에서 보면 많은 총알 자국이 있다. 이는 1948년 독립전쟁 동안 아랍인과 싸울 때 아랍군인이 쏜 총탄 흔적이다. 시온문은 1968년 6일 전쟁 후 회복되어 보수되었다. 입구 위쪽에 이 문을 세운 슐레이만 대제를 기념하는 터어키 문구가 있다.
오물성문(Dung Gate)
오물성문은 남쪽 성벽 동쪽에 있으며 예루살렘 성벽에 있는 문들 중에서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예루살렘 성내에 있는 오물들을 이 문을 통해 키드론 계곡이나 티로포에온 계곡에 버렸다하여 ‘오물문’이라 한다. 오물성문 맞은편에는 다윗이 초기 예루살렘에 정착했던 다윗성이 있다. 오물성문을 나와 계속해서 곧장 내려가면 실로암 연못에 다다른다. 1948년 욥바문이 봉쇄되었을 때 이 문이 확장되어 사용되었다. 이 문을 통해 서쪽벽과 유대인 지역을 갈 수 있어 유대인들과 관광객이 많이 이용하는 성문이다.
황금문(Golden Gate), 회개의문, 자비의문
황금문은 성벽과 성전의 동쪽에 있는 유일한 문으로 지금은 굳게 막혀 있다. 황금문이란 이름은 이 문이 호화롭게 꾸며져서 붙여졌다. 황금문은 두개의 문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자비의 문’이라 하고 다른 하나는 ‘회개의 문’이라 한다. 이 황금문은 많은 전설이 있다. 유대인들은 에스겔 44장 1-3절의 언급과 같이 메시야가 올 때에 이 문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 또한 회교인들도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는 이 황금문 가까이에 있는 무덤부터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 부활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가 황금문 근처에 묻히기를 원한다. 현재 황금문 근처는 물론 건너편 감람산 기슭까지 묘지로 가득 차 있다.
스테반문(Stephen‘s Gate), 양문, 여호사밧문
이 성문은 감람산을 마주보며 동쪽 성벽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슐레이만 대제에 의해서 성문 양쪽에 한쌍씩의 사자가 조각 되었다고 한다. 어느날 슐레이만 대제의 꿈에 4마리의사자가 나타나서 대제를 삼켜버리려 했다. 꿈을 해몽한 사람에 의하면 슐레이만 대제가 거룩한 성을 허술하고 퇴락한 채로 남겨두면 이 사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했다. 그래서 곧 성벽을 건축하고 이를 기념하여 꿈에 나타났던 사자들을 문 양쪽에 한쌍씩을 조각해 놓았다. 히브리어로는 ‘사자성문’이라고도 부른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초대 교회의 스테반 집사가 이 근처에서 돌에 맞아 순교했다고 하여 ‘스테반 문’이라고 부른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값을 치르기 위해 이 문을 지나갔다. 이 문을 나와 남쪽 기드론 골짜기에 희랍 정교회 소속의 스테반교회가 있다. 이 문의 또 다른 명칭은 여호사밧 계곡으로 통한다고 해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여호사밧 문’ 이라 부르고, 마리아의 무덤이 이 근처 어딘가에 있다고 해서 아랍인들은 ‘마리아 성문’이라고도 부른다. 또한 매주 금요일에 이 문 근처에서 양(羊) 시장이 열려 오래 전부터 ‘양문’이라고도 한다. 이 문을 통해 감람산, 베다니, 여리고 그리고 요단강으로 간다. 1920년 영국군이 차량이 통행할 수 있게 입구를 확장했고, 1967년 6일 전쟁 때 이스라엘군은 이 문을 통해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다메섹문(Damascus Gate), 세겜문,
이 문은 동쪽으로 헤롯문과 서쪽으로 새문 중앙에 있다. 성벽에 있는 문들 중에서 가장 크고 인상적인 문이다. 다메섹문이란 이름은 세겜을 거쳐 다메섹도시로 가는 길이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고 히브리어로는 세겜문. 아랍어로는 ‘바브 엘 아무드(원주기둥성문)’라고 부른다. 로마시대에 이 다메섹문을 중심으로 두개의 길이 뻗어 나갔는데 그 하나가 성전 서쪽벽 앞으로 지나갔고 다른 하나는 시온문이 서쪽으로 좀 옮겨졌지만 시온문으로 통했다. 이 문은 적의 갑작스런 공격을 방지하기 위해서 이중각을 이루고 있고 원래는 쇠가 덮여있는 나무로 된 삼중의 문이었으나 현재는 한 쌍의 문만 남아있다. 문을 지키던 군인들의 방 두개는 가게로 사용된다. 문 위에는 1536년에서 1538년 사이에 이 문을 세운 슐레이만 대제를 기념하는 문구가 아랍어로 쓰여져 있다. 다메섹문 밑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서쪽으로는 십자군 시대의 교회를 볼 수 있고 동쪽으로는 성안으로 통하던 옛 문이 있고, 들어가 볼 수도 있다.
예루살렘
주전 6세기초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바빌로니아 제국의 군대는 예루살렘을 침공했다.1년반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예루살렘은 함락되었고 정복자들은 불을 질러 예루살렘을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이렇게 해서 400년동안 계속되었던 유다왕국은 막을 내렸다(주전 587년께). 이렇게 유다왕국이 몰락하는 와중에 예루살렘은 초토화되는 비운을 맞았다.그러나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예루살렘의 기나긴 수난의 역사의 시작일 뿐이었다.예루살렘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던 제국들과 군왕들의 각축장이 되었고 그곳을 지나는 수많은 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히게 되었다.바빌로니아 페르시아 희랍 로마 비잔틴 이슬람 십자군 마멜루크 오스만튀르크 영국 등 세계를 주름잡던 세력들은 예루살렘에 군림하는 지배자가 되었고 그들의 족적은 지금도 예루살렘 도처에 남아 있다. 예루살렘이 역사적으로 복잡한 과거를 지나온 것처럼 지리적으로도 그리 단순한 곳이 아니다.우선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크게 동쪽과 서쪽지역으로 나누어진다. 즉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이다.면적으로는 동예루살렘이 약 70㎢이며 서예루살렘은 이보다 작은 45㎢ 정도이다.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과 함께 일어났던 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동예루살렘은 아랍 사람들이,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관할하는 구역이 되었다.정치적으로 동예루살렘은 소위 ‘요단강 서안지역’(West Bank)의 일부가 되었고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국토에 속하게 된 것이다.이렇게 예루살렘은 동서로 확연히 분할되고 서로 왕래조차 금지된 상태가 1967년까지 계속되었다. 동과 서로 구분된 예루살렘에는 제3의 구역이 되는 ‘구 예루살렘’(Old Jerusalem)이 있다.구 예루살렘이야말로 예루살렘 전체에서 그 핵심이 되는 부분으로 오랜 역사의 묵은 때가 겹겹이 쌓여 있는 곳이다.구 예루살렘은 높이가 14m에 달하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도(古都) 예루살렘의 풍모를 엿보게 하고 있다.그러나 이 성벽은 30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예루살렘으로서는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지금으로부터 약 460년전이 되는 1540년 오스만튀르크의 술레이만 황제 때 축성된 것으로 성의 총 길이는 4㎞ 정도이다.성벽으로 둘러싸인 구 예루살렘의 면적은 1㎢밖에 되지 않아 오늘날 예루살렘 전체 면적의 1%도 채 되지 않는다.그러나 이곳이 바로 구약시대 다윗 왕이 이스라엘 왕국의 수도로 정했던 역사적 예루살렘으로 그후 파란만장한 역사가 펼쳐졌던 역사의 무대이다.20개월전 지금은 이스라엘 총리가 된 샤론의 방문으로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성전산도 구 예루살렘에 위치하고 있다.그런데 구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동 예루살렘에 속해 있어 오늘날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이러한 예루살렘의 지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왜 예루살렘이 오늘날 중동문제 태풍의 핵이 되는지를 살펴보겠다.1948년 이스라엘이 독립하고 1차 중동전쟁이 끝난 후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했다.그러나 당시 예루살렘은 동과 서로 분리되어 있어 이스라엘의 주권은 서예루살렘 지역에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따라서 이스라엘의 염원은 동서 예루살렘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수 키로미터 언덕위에 성서의 땅 베들레헴이 있다. 베들레헴이라는 이름에는 2개의 의미가 있고, 헤브라이어로 [빵집],아라비아어로는 [고기집]을 의미한다. 광대한 들판에는 수수한 검은 옷을 입은 목자들이 신앙과 양무리를 방목하고 있다. 천사가 예수 탄생을 알리는 들판은 [목자의 들판]이라 불리고 있다. 유대인에 의해 최초의 위대한 왕 다윗이 이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것은 예수의 탄생보다도 천년전의 일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 땅은 유대인에게도 그리스도 교도에게도 성지인 것이다. <그때,전세계의 인구조사를 실시 하려는 칙령이 황제 아우구스에게서 나왔다> 로마국의 기반이 된 징세를 정확히 실행하기 위해 국제조사라 행해졌다. 각 개인이 소유하는 토지를 신고할 것이 의무화되어, 이 때문에 요셉도 나사렛에서 자산이 있는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귀향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미 임신한 처 마리아와 함께>이곳에 채제하고 있는 중에 <마리아는 달이 차서, 첫아들을 낳고, 천으로 싸서,구유 위에 뉘었다. 각 방에는 그들이 있을 공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를 바꾸게된 일을 누가의 복음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탄생의 날짜에 대해서는 논의가 되고 있지만,로마 카톨릭 교회에는 A.D.5(또는 4)년의 12월 24일밤,그리이스 정교회에서는 1월 6일,아르메니아 교회는 1월 18일로 보고 있다.
교회의 길이 52m, 넓이 24m의 모양을 하고 있다. 다섯 개의 복도가 있으며 이스라엘의 빨간 돌로 만든 네 줄의 기둥이 있다. 1936년에 4세기 때 모자이크의 한 부분이 발견되었다. 나무 바닥 아래 깔려 있었다. 교회의 윗부분에는 십자가 모양의 벽이 있고 모자이크의 일부분이 남아 있는데 십자군 시대의 유일한 유물이다. 예수탄생 장소 위에 있는 희랍정교회의 성가대석은 레바논의 백향목을 손으로 깍아서 만든 것 이다. 10.7m와 3m 되는 사각형 모양의 동굴로 내려가는 두 개의 입구가 있다. 라틴어와 hic de Maria Virgine jesus Christus Natus est (여기에 예수께서 나셨다)라고 새긴 은으로 만든 별이 예수의 탄생 장소를 표시한다. 구유는 그 옆에 오른쪽으로 있다. 구유 위에는 촛불대에 그을려 까맣게 된 돌을 볼 수 있다. 4세기에 원래의 동굴 천정은 석조공에 의해 교체되었다. 동굴 벽은 1874년 프랑스의 대통령인 막마혼이 화재 사고를 대비해 아스베스토스를 기증하여 덮이었다. 동굴 안에 중앙 제단 아래에는 은별 장식이 예수의 탄생을 기념한다. 마태복음의 별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동방 박사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 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녹 2:8-11). 성경에 목자들이 있었던 정확한 장소의 언급은 없으나 기독교 전승은 베들레헴의 동쪽으로 약 3km 지점을 말하고 있다.
바실리카의 작은 입구는 [사랑의 문]이라 불리고 있다. 하들리아누스 황제는 135년에 그리이스 이교를 이 땅에 들여와 아드니스에게 숲과 동굴을 바쳤다. 332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 숲을 개간하여 바실리카를 세울 것을 명하고,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자신이 그 공사를 감독했다. 각각 11개의 원기둥 열에 의해, 나눠진 5신랑식이 바실리카는 오늘날 기초부가 남아있고, 바닥면에는 오늘날에도 조그만한 모자이크가 보인다. 2세기후에 파괴된 바실리카는 그후 복구되어, 후진과 [탄생의 암실]로 통하는 옆계단이 더 있고,안뜰이 배랑으로 바뀌었다. 614년의 페르시아군의 점령시에 바실리카는 기적적으로 파괴를 피했다. 이것은 파풍을 장식하고 있던 모자이크 속에 3박사들이 페르시아 의상을 입고 있는 것에 침략자들의 시선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그후 긴 쇠퇴의 시대가 계속되고, 1646년에는 트루코군이 포환을 만들기 위해 지붕의 납을 녹였다. 동시기, 그리스도교 사람들은 바실리카 입구를 매우 좁게 [불경의 족]이 말로 바실리카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한 것으로 합의했다. 이 문은 겨우 1m 20cm 높이로 [사람의 문]이라 불리고, 허리를 굽히고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마치 실제로 동굴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을 받는다. 내부에는 크린트식의 기둥머리를 한 아름다운 홍석 회암의 우아한 원기둥이 있고, 그 위에는 지금도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이름이 쓰여진 성인들의 프레스코화의 흔적이 보인다. 중앙 신랑에는 이땅, 1169년에 형성된 금의 땅 모자이크의 흔적도 남아 있다. 모자이크는 그리스도 조부와 최초의 7회 공회의를 나타내고 있지만, 후자중에 완전히 남아 있는 것은 최초의 콘스탄티노플리 만으로 나케아 에페소스 등은 단편이 남아있을 뿐이다. 제8번째와9번째의 창 사이에는 바질리우스 픽틀이라는 작자의 생명이 있다. 탄생의 암실은, 그리이스 정교회의 관할하에 있는 작은 공간으로, 벽은 대리석으로 덮여 있다.
작은 예배당 안의 [그리스도 탄생의 제단]에는 그리스도교 각 종파가 소유하는 11개의 은제 램프가 있고, 또 은제 별모양이 예수가 탄생한 장소를 표시하고 있다. 별 위에는 라틴어로 <여기에서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났다.-1717>라고 새겨져 있다. 암실의 측면에느니 2개의 제단이 있다.하나는 막 태어난 갓난아이가 놓여진 [구유통의 제단]으로 성 헬레나가 발견한 점토의 구유 대신에 은제로 된 것이 놓여졌다. 그 측면에 있는 또 하나의 제단은 갓난아이를 경배하로온 [동방의 3박사 제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