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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풀 산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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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추억들 스크랩 후삼국시대 때의 인물..견훤, 궁예..그리고 왕건..
들풀 추천 0 조회 42 09.09.17 11:3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견 훤 (甄 萱)  ■ 867∼935 ■ 후백제의 건국자
■ 재위 892∼935
지렁이의 정기를 받은 탄생 / 후백제 건국 / 고려 왕건과의 세력 다툼 / 아들들의 배반과 왕건에의 의탁 / 정치가로서의 자질과 한계

▶지렁이의 정기를 받은 탄생

본래 성은 이(李)씨이었으나, 뒤에 견씨라 하였다.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임. 

 

 아버지 아자개(阿慈介)는 상주 가은현(加恩縣: 지금의 문경)의 농민 출신으로 뒤에 장군이 되었다. 《이비가기 李碑家記》에서는 진흥왕의 후손인 원선(元善)이 아자개라 하였는데 확인하기 어렵다. 어머니의 성씨는 확실하지 않다.

 

두 부인을 두었는데, 상원부인(上院夫人)과 남원부인(南院夫人)으로 전해질 뿐이다. 견훤은 장자이며, 동생으로 능애(能哀), 용개(龍蓋), 보개(寶蓋), 소개(小蓋)와 누이 대주도금(大主刀金)이 있었다.

그런데 《고기 古記》에는, 광주(光州)의 북촌에 한 부자가 살았는데, 그 딸이 지렁이와 교혼(交婚)하여 그를 낳았다고 한다. 이것은 어머니의 가문이 광주지역의 호족이었을 것으로 추측하게 한다.


▶ 후백제 건국

 

자랄수록 체모가 남달리 뛰어났다. 뜻을 세우고 종군하여 경주로 갔다가, 서남해안의 변방비장(邊方裨將)이 되었다. 이때의 신라왕실은 그 권위가 땅에 떨어져 있었고, 지방의 호족들은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특히, 진성여왕이 즉위하면서 왕의 총애를 받은 몇몇 권신들의 횡포로 정치 기강이 크게 문란해진 데다, 기근마저 심하여 백성들은 유랑생활을 하거나 초적(草賊)으로 봉기하기가 일쑤였다.

이런 상황에서 견훤이 경주의 서남 주현(州縣)을 공격하니 이르는 곳마다 많은 사람들이 호응하였다.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에 무진주(武珍州: 지금의 전라도 광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그후 스스로를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 全武公等州軍事 行全州刺史 兼 御史中丞上柱國 漢南郡開國公 食邑二千戶)라고 칭하고....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적수 양길(梁吉)에게 비장이라는 벼슬을 내리는 등 세력을 확장을 도모하였다.
900년(효공왕 4)에는 완산주(完山州: 지금의 전주)에 순행하여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후백제왕이라 칭하였으며, 모든 관서와 관직을 정비하여 나라의 기틀을 잡아갔다.

 

▶ 고려 왕건과의 세력 다툼

이듬해에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합천)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10년(효공왕 14)에 왕건(王建)이 나주를 정벌하려 하자, 보병과 기병 3,000을 거느리고 이를 포위, 공격하였지만 이기지 못하였다. 그뒤, 왕건이 궁예(弓裔)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자, 견훤은 일길찬(一吉飡) 민극(閔)을 파견하여 왕건의 즉위를 축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실 이때의 고리(려)와 후백제는 잦은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920년(경명왕 4)에 견훤은 보병과 기병 1만인으로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고, 군사를 진례성(進禮城: 지금의 청도)으로 옮겼다.

 

이에 신라 경명왕은 김율(金律)을 고리(려)에 파견하여 도움을 청하였다. 924년(경애왕 1)에 견훤은 아들 수미강(須彌强)을 파견하여 조물성(曹物城: 지금의 안동, 혹은 상주 부근)을 공격하였으나, 성 안의 병사들이 굳게 지키므로 이기지 못하였다.

이듬해 왕건과 화친하고 서로 인질을 교환하여 화해를 맺었다. 그러나 볼모로 간 진호(眞虎)가 925년에 고리(려)에서 병으로 죽자, 왕건이 보낸 볼모 왕신(王信)을 죽이고 군사를 내어 고리(려)를 공격함으로써 일시적인 화해는 곧 깨졌다.

 

견훤의 세력이 날로 강성하여지자 신라는 왕건과 연합하여 대항하고자 하였다. 이에 927년 근품성(近品城: 지금의 상주)을 공격하고,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영천)를 습격하였다. 이어서 경주로 진격하여 포석정에서 경애왕을 살해하고, 왕의 족제인 김부(金傅)를 왕으로 세웠다. 이 소식을 듣고 왕건이 달려왔으나, 왕건마저도 공산(公山)싸움에서 크게 무찔렀다. 이듬해 강주(康州: 지금의 진주)를 공격하여 300여인을 죽이고, 또 부곡성(缶谷城: 지금의 군위)을 공격하여 1,000여명을 참살하였다. ▲

▶ 아들의 배반과 왕건에의 의탁

 

막강하였던 견훤의 세력은, 929년(경순왕 3)의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 전투에서 8,0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패전으로 점차 열세를 면하지 못하게 되었다. 또한 932년에는 충실한 신하였던 공직(直)이 고리(려)에 투항하는 불행까지 겹쳤다.

 

이 무렵에도 예성강(禮成江) 어구에 침입하여, 100여척의 전함을 불태우고 3백여필의 말을 잡아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었고, 934년 운주(運州)를 공격해 오히려 크게 패하였다.

견훤은 많은 아내를 두어 10여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 중에서 넷째 아들인 금강(金剛)을 특별히 사랑하여, 왕위를 그에게 물려주려고 하였다. 이에, 금강의 형인 신검(神劍), 양검(良劍), 용검(龍劍) 등은 이를 알고 근심하며 지내다가, 양검을 강주(康州: 지금의 晉州) 도독으로, 용검을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 도독으로 삼고, 신검을 홀로 그의 곁에 두자, 이에 신검은 이찬(伊飡) 능환(能奐)으로 하여금 사람을 강주, 무주 등으로 보내어 음모를 꾸몄다.

 

그리하여 935년 3월에 견훤의 넷째 아들 금강은 신검에게 죽임을 당하고 견훤은 금산사에 유폐당하였다.

금산사에 석달 동안 있다가 그해 6월에 막내아들 능예(能乂), 딸 쇠복(衰福), 첩 고비(姑比) 등과 함께 나주로 도망하여, 고리(려)에 사람을 보내어 의탁하기를 청하였다. 이에 왕건은 유금필(庾黔弼)을 보내어 맞이한 뒤, 백관(百官)의 벼슬보다 높은 상부(尙父)의 지위와 양주를 식읍으로 주었다.

그뒤 후백제는 점차 내분이 생겨 왕건에 의하여 멸망하였다. 이어 신검, 양검, 용검 등은 한때 목숨을 부지하였으나, 얼마 뒤에 모두 살해되었다. 견훤 또한 우울한 번민에 쌓인 생활을 하다가 드디어는 창질이 나서, 연산(連山) 불사(佛舍)에서 죽었다.▲

 

▶ 정치가로서의 자질과 한계

정치가로서의 특징은 일찍부터 외교면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상당히 긴 직함도 외교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고, 또 925년에는 후당(後唐)에 들어가 번병으로 칭함으로써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내었다.

 

그 이듬해에는 중국의 오월(吳越)과 교류하였으며, 927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마돌 등 35인이 당도하자 견훤은 이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장군 최견(崔堅)을 보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 죽었다.

 

그러나 거란(契丹)과의 연결은 고리(려)를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었다. 또 922년과 929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견훤은 이처럼 국제관계의 변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것은 서남해안의 비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경험에 의한 것이다. 또, 이 지역은 이미 장보고에 의하여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성행하였고, 또 당시 지방호족들이 중국과 사무역(私貿易)을 빈번하게 행하던 곳이었다.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왕건에게 패한 것은 쇠망하여 가는 신라의 관리로서 출발한 세력기반을 가졌기 때문이다. 지방에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고, 군인으로서 변방에 파견되어 이미 해이해진 신라의 군사조직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흡수했다. 기성사회에서 권력을 잡고 난 뒤에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신라와 똑같은 방식의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지방호족이 중심이 되어 신라의 국가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후백제 건국 뒤에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역행하고 있어 후삼국의 통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궁예(弓裔)  ■ ?∼918 ■ 후고구려의 건국자·왕 ■ 재위 901∼918
■ 성은 김씨 혹은 궁씨(장보고의 아들이란 설도 있음, 장보고의 아명이 궁복임을 염두에둬서 그런 이야기가 있음)

애꾸눈이 된 사연 / 초기의 세력기반 / 가사 장삼에 왕관을 얹다 / '태봉'과 함께 사라진 미륵불

 

▶ 애꾸눈이 된 사연

아버지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이고, 어머니는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궁녀이다. 제48대 경문왕 응렴(膺廉)의 아들이라 하기도 한다.

 

그의 탄생설화에 의하면 5월 5일에 외가에서 출생하였는데, 일관(日官:길일을 가리는 일을 맡아보는 벼슬)이 말하기를 단오날 태어났으며, 나면서부터 이가 나고 또한 이상한 빛까지 나타나므로, 그는 국가에 해로울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믿고 죽일 것을 명하자, 사자가 그 집에 가서 강보에 싸인 아이를 빼앗아 다락 밑으로 던졌다. 이때 유모가 다락 밑에 숨어 아이를 받았으나, 잘못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건드려 애꾸눈이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신라왕족이었으나 왕실의 내분으로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 뒤 궁예는 유모에 의하여 키워졌으며, 세달사(世達寺)에서 출가하여 선종(善宗) 이라 하였다.▲

▶ 초기의 세력기반

 

당시 신라왕실은 극도로 쇠약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지방에서는 호족들이 들고일어났으며, 흉년까지 겹쳐 국고는 바닥이 나고야 말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놓이자 889년(진성여왕 3)에는 바닥난 국고를 메우기 위한 방편으로 백성들에게 과도한 세금을 물게 하였다. 가난으로 찌든 극한의 백성들은 과도한 세금을 감당할 수 없게되자, 떠돌아 다녀야 했으며 남의 농작물을 훔치는 좀도둑(草賊:초적)으로 변하였다.

그들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로는 기훤(箕萱)과 양길(梁吉)이 있었다. 궁예는 891년 기훤에게 몸을 의탁하여 뜻을 꾀하고자 하였으나 기훤이 대우해주지 않자, 이듬해 다시 양길의 부하로 들어갔다.

 

양길의 부하로 들어간 궁예는 양길의 군사를 나누어 받아 원주 치악산 석남사(石南寺)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하여, 주천(酒泉:지금의 예천)·내성(奈城:지금의 영월)·울오(鬱烏: 지금의 평창)· 어진(御珍:지금의 울진) 등 여러 현과 성을 정복하고 894년에는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는데, 그 무리가 3,500명이나 되었다.

궁예는 이들을 14대로 편성하여 자기 세력기반으로 삼았고, 이들에 의하여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저족(猪足:지금의 인제)·생주(지금의 화천)·부약(夫若:지금의 금화)·금성(金城)·철원(鐵圓) 등을 점령하자, 군세가 매우 강성해져 패서지역(浿西地域)의 무리들이 항복하여 왔다. 이에 양길과 결별하고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었다.

 

896년경 임진강 연안을 공략하여 개성에 있던 왕건(王建)부자의 투항을 받고, 승령(僧嶺:지금의 장단 북쪽, 토산 남쪽)·임강(臨江:지금의 장단)·인물(仁物:지금의 기풍군 풍덕) 등 여러 현을 점령하였다. 이듬해에는 공암(孔巖:지금의 양평)· 금포(黔浦:지금의 김포)·혈구(穴口:지금의 강화) 등을 복속하였다. 이때 궁예의 세력권 남쪽인 국원(國原:지금의 충주) 등 30여성을 취한 양길이 궁예를 공격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오히려 패망하고 말았다. ▲

▶ 가사 장삼에 왕관을 얹다.

 

899년(효공왕 3)에는 송악궁을 수리(修理)하고 왕건을 보내어 양주·견주(見州)를 복속하고, 그 다음해에도 광주·춘주(春州)·당성(塘城: 지금의 화성군 남양)·청주(靑州)·괴양(槐壤:지금의 괴산) 등을 평정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한강유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으며, 그 공으로 왕건에게 아찬(阿飡)의 벼슬을 주었다.

 

901년에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고구리(려)의 계승자임을 자처하였으며,

 

 <왕건의 건의로 지금의 나주-羅州(錦城) 상륙작전으로 후백제를 공략 후백제의 바닷길 진출을 원천 봉쇄하였다. 그는 금성을 신라를 자기의 한 주(州)로 삼겠다는 일렴으로 금성을 신라주-新羅州의 준말 나주-羅州로 개명하였다. 왕건을 도와준 금성태수 종례는 나주 나씨(羅州 羅)의 성을 내려주었고, 호족인 오다린에게는 나주 오씨(羅州 吳)라는 성을 내려주었다. 오다린의 따님이 바로 왕건의 두번째 부인인 장화왕후이다.> 

 

 904년에는 국호를 ‘마진(摩震)’, 연호를 ‘무태(武泰)’라 하였다. 그해 7월 청주인 1천호를 철원으로 옮겨 그곳에 서울을 정하고 상주(尙州) 등 30여현을 얻으니, 공주장군 홍기(弘寄)가 투항하여왔다.

905년 수도를 송악에서 철원으로 옮긴 궁예는 연호인 무태를 ‘성책(聖冊)’으로 고치고 패서의 13진(鎭)을 평정하였으며, 평양성주 금용(黔用)이 투항하여왔다. 그 뒤 궁예는 신라를 병합하려는 뜻을 품고 신라를 ‘멸도(滅都)’라 부르게 할만큼 세력이 강성하여졌다.

 

911년에 연호를 다시 ‘수덕만세(水德萬歲)’라 고치고, 국호를 ‘태봉(泰封)’이라 하였다. 이해에 왕건으로 하여금 해로로 금성(錦城)을 점령하도록 하고, 이를 나주라 이름하였다. 왕건이 거느린 해상세력에 의하여 나주정벌이 이루어져 궁예가 해상권을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고, 견훤을 배후에서 위협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913년에는 연호를 다시 ‘정개(政開)’라 고쳤다.▲

▶'태봉'과 함께 사라진 미륵불

 

궁예는 자신의 세력이 커지자 호화 사치를 일삼았다. 그리고 점점 교만해져서 거칠고 잔인한 본성을 드러내게 된다. 이에 그를 따르던 많은 신하와 백성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때의 세력가였던 궁예는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知謙) 등에 의하여 918년 왕위에서 쫓겨났으며, 변복차림으로 도망하다가 부양(斧壤:지금의 평강) 에서 백성에게 피살당하는 불운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태조 [太祖, 877~943]

고려 제1대 왕(재위 918∼943).

본관 개성(開城), 별칭 자 약천(若天), 시호 신성(神聖)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정계(政誡)》,《계백요서(誡百寮書)》

 

본관 개성(開城). 자 약천(若天). 성 왕(王). 휘 건(建). 시호 신성(神聖).신라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追尊) 한씨(韓氏)이다.

 

895년(진성여왕 9)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리(려)’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이듬해 수도를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북진정책·숭불정책을 건국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35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이듬해에는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료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943년 후세의 왕들이 치국의 귀감으로 삼도록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유훈으로 남겼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능은 현릉(顯陵: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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