召 保 面 沿 革 본 면은 본래 軍威郡에 딸린 召召保部曲인데, 조선조에 召召本面 또는 召本面이라 하여 大興·籠岩·上韶·下韶·夫皇·虎岩·上兩·達川·於衣·毛老의 10개 동리를 관할 하였다. 그 뒤 1914년 郡面 폐합에 따라 召本面 또는 石乙本面의 西京· 鎌·平地·山法·花溪·上院·安嶺의 7개 동리와 花谷面의 渭城·沙村·大良·達目·浪城·白峴·寶村·福星·栗里·沙只·豆介·水鐵·의 12개 동리와 선산군 山東面의 新興·上介·五柳의 31개 동을 병합하여 召保面이라하고 西京·平湖·新溪·山法·松院·大興·鳳韶·鳳凰·來儀·渭城·寶峴·福星·沙里·達山의 14개 동으로 개편 관할하였다. 1973년 3월 12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선산군 山東面의 桃山洞을 편입하여 현재 15개동을 관할하고 있다. 위치는 軍威郡 서북부에 위치하여 동쪽은 군위읍과 의성군 봉양면, 남쪽은 선산군 장천면과 산동면,서쪽은 선산군 海平面과 桃開面, 북쪽은 의성군 비안면과 경계를 이룬다. 경지율은 14.5%로 낮은 편이나 경지면적은 153.3㎢로 군내에서 가장 넓다. 논밭의 비율은 66:34로 벼농사가 성하여 수확고 또한 군내 제 1위이다. 관광 명소로는 창건된지 1300여 년이나 되는 法住寺와 피부병에 좋다는 황산동 남서쪽의 까치리 약수터의 약수와 옛 성터인 浪城터·兩岩亭·獨亭·東岩亭· 三水亭·백련암·백운암 등이 있다 (白蓮蘭)
來 儀 洞 양바우·얌대·양암(兩岩)§내의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조선조 숙종 때 崔允佶이라는 학자가 이곳에 와서 보니 마을 앞에 바위가 둘 있다는 데서 불려졌으며 부락 앞산 두 절벽으로 된 바위에 수백 년 전 東岩·西岩이란 각석이 있어 윗 부락을 上兩, 아랫 부락을 下兩이라하며 전 부락명을 兩岩이라고도 한다. 덤 밑 소 위쪽에 南陽 洪氏의 兩岩亭이 있다.(崔周洛: 男 58 外 6名) 11
대포(大浦·大砲)§ 아랫 얌대 중 하류편에 있는 마을로 임진 왜란 때 長臺峰에 대포를 놓고 쏘았다 하여 대포라 한다. 그 마을 앞을 대포들이라 하며 이 곳에 옛 주막이 있었다고 한다. 15가구로 慶州 孫氏가 주성이다(崔大河 : 男53 外 4 名) 웃얌대·상양·상량(上兩)·상우동(上雨洞)§ 양바위가 있다고 하여 양암이라고 하며, 양암 위족에 있다는 뜻에서 上兩이라고 불려졌다 한다. 22가구 중 慶州 崔氏가 주성을 이룬다.(鄭錫和: 男 62 外 4 名) 아랫얌대·하양·하량(下兩)§ 兩岩 하류편에 있다 하여 下兩이라 한다. 1592년 임진 왜란시 비안에서 피란 온 정씨가 개척했다 한다 15가구 중 迎日 鄭氏가 주성을 이루며 과수원 농사를 많이 짓는다.(鄭太和: 男 59 外 4 名) 언실·어이동·어의동(於衣洞)§ 옛날 鳳凰이 날아들었다는 말이 傳해지고 있다.鳳凰來儀에서 나온 이름인데 來儀하는 거동이 옷이 펄렁이는 모습과 같다 하여 어실(於衣洞)이라 하였다 한다. 지금은 20여 가구 중 延安 李氏가 주성이다. 또 일설에는 부족국가로 豆毛國이 있었는데 이 동리의 黃氏 부인이 조복을 왕에게 진상하였다 하여 於衣洞이라 하였다. (洪永贊 : 男 61 外 4 名) 웃언실·상어(上於)·상어의(上於衣)·어의(魚儀)§ 언실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불리워진 명칭이다. 1620년에 眞氏 姓을 가진 사람이 정주 하였다. 그 당시 마을 앞에 강이 있고 숲이 있어 고기 집 형태와 같다 하여 魚儀라 하였다. 20餘 가구로 南陽 洪氏가 주성 이다.(洪永出 : 男 65 外 4 名) 아랫언실·하어(下於)·하어의(下於衣)§ 언실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데서 불리워진 명칭이다. 29가구로 延安 李氏와 南陽 洪氏가 주성을 이루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金浩基: 男72 外 4 名) 양지마·양촌(陽村)§ 웃언실 북편에 있어 동쪽의 음지 마을을 대하여 양지마라 칭한다. 10여 가구 중 洪氏가 주성을 이룬다.(柳大植: 男62 外 4名) 음지마·음촌(陰村)§ 웃언실 동편의 음지쪽에 있어 북쪽의 양지마을에 대하여 음지마라 칭한다. 10여 가구 중 안동댐 건설 당시 수몰 지구 이주민 3가구가 섞여 살고 있다.(洪家大: 男 60 外 4 名) 진재·장현(長峴)§ 길고 험한 골짜기 재 밑에 있으므로 유래된 곳으로 20여 가구로 각 서이 섞여 살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白克龍 : 男 72 外 4 名) 모르골·모로골·모로실·모로(毛老)·모로동(慕魯洞)§ 1570년 殷尙允이란 선비가 개척했다. 임진왜란 때 마을 뒤 골짜기 새빛이란 곳에서 피란하는 것을 모르고 지나갔다 하여 모로라 칭하였다. 일설에는 魯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인데 옛날 선비들이 묻혀 살았다. 28가구에 120여 명의 주민이 살고 있으며 辛州 殷氏가 주성을 이루고 있다(柳德聲)(殷文基: 남51 外 4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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達 山 洞 두렁(杜陵)·두란(杜蘭)·달목동(達目洞)§ 達山洞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로 뒷산에 望月所가 있는데 정월 대보름날 달을 보고 놀았다고 한다. 그 밑에 동네가 있었으므로 달산동이라 칭한다. 일설에 따르면 1200년 전 李氏와 金氏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고을 원이 승마하여 오는 것을 이 곳에서 下馬하게 하였다는 데서 유래 되었다는 설도 있다.(李炳一 : 男 65 外 4 名) 엄문(嚴門)§ 달산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寧越 嚴氏가 많이 살았다는 것에서 유래된 명칭이다. 지금은 嚴氏들이 살지 않고 20여 가구 중 南陽 洪氏가 주성을 이룬다.(李東三: 男 66 外 4 名) 법주거래·법주(法住)§엄문 서쪽에 있는 마을로 法住寺 입구에 형성된 부락이라 행서 명명된 것이다. 法住寺는 당초 선산군 桃李寺보다 큰 절이었다. 후에 寺氣를 잃고 쇠퇴되었다. 현재도 법당과 객실이 있고 탑도 있다. 또 일설에는 이 마을의 모양이 行舟形이라 하여 그 중 뱃머리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마을에서는 獨泉을 파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유는 배의 밑을 뚫는 것과 같아 파선되기 때문이다. 현재는 기와도 올 리고 샘도 판다.(崔千壽 : 男 55 外 4 名) 홈거리·명곡(椧谷)§ 法住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에 홈들이 있는데 수철에서 나는 물을 배다리로 통하게 하여 농업 용수에 이용 하였다하여 불려진 이름이다. 옛날에는 慶州 孫氏가 태반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이 마을에는 孫氏가 많이 살았는데 성지도사가 이 곳을 지나가니 홀대를 했다. 성지도사가 보복하기 위하여 이 지형이 나비혈인데 날개에 돌탑을 쌓으면 부흥한다라고 하였다. 그후 돌탑을 쌓으니 나비가 죽고 孫氏가 망했다고 한다. 현재도 탑 쌓던 돌이 있었으나 하천 공사로 많이 없어졌다.홀대의 내용은 성지도사의 귀를 쇠고리로 꿰어 나무에 매달았다고 한다.(崔昌東: 남72外4名) 새점·쇠점·수철(水鐵)·수철동(水鐵洞)§ 홈거리 남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에 쇠가 나는 곳이 있고 부락의 맞은편 조산이라는 산기슭에 냉정수가 항시 흐른다고 하여 水鐵이라 이른다. 현재도 광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쇠가 난다고 한다. 일설에는 무쇠점이 있었다 하여 쇠점이라고 불려졌다.(南正男 : 男46外 4名) 두 개실(豆介室)·두개곡(豆介谷)·두개동(豆介洞)§ 엄문 남쪽에 있는 마을로 魯氏들이 20여 가구가 살았으며 南陽 洪氏의 재실이 있었으나 현재는 재실만 남아 있고 민가는 모두 타처로 이사가고 없다.(朴鍾禹)(洪永斗: 男45 外 4名)
桃 山 洞 중간마을·우무실(憂無室)·도원(桃原)§ 도산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6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걱정없이 잘사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우무실이라 칭한다. 日善 金氏가 주성으로 살고 있다.(金夏龍 : 남51外 4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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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마·원말·개산(介山)§ 도산동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때에 원집이 있었다. 지금부터 10년전 선산군 山東面 桃山洞으로 있었으나 주민들의 진정으로 召保面에 속했다. 약 4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주성은 一善 金氏와 金海 金氏이다.(崔字相 :男 49 外 4名) 냄일·새마을·고부실(故甫室)·남일(藍一)§ 이 마을은 七峯의 남방 1.5㎞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서, 냄일이란 이름은 이 마을 서쪽 海平으로 넘어가는 험한 고개에 옛날에는 산적이 나타나므로 밤에는 넘기 어려워서 어둡기전에 넘어야 되겠다는 뜻에서 내머리재가 내밀재로 그 가까이 있는 마을을 냄일이라 불리워졌다. 또 새로 생긴 마을이라 하여 새마을이라고도 했으며 그 근처에는 故甫고개가 있어 故甫室이라고도 불리워졌다 한다.1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江華 魯氏가 주성을 이룬다.(魯律石:男64外4名) 새터§ 우무실 남쪽에 있는 마을로 우무실에서 떨어져 나간 마을이다. 새로 형성 된 마을이라 하여 새터라 칭한다. 10 가구가 살고 있으며 一善 金氏가 주성이다. (朴鍾德:男57 外 4名) 칠풍(七風)·칠봉(七峯)§ 원마 서쪽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뒷산의 일곱 봉우리가 병풍처럼 둘려 있다 하여 七峯이라 칭하였다. 현재 江華 魯氏만 2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임진왜란 때 피란 와서 정착 거주 하였다고 한다. 마을 어귀에 수령 300년이 넘는 느티나무가 마을을 지키고 있으며 1974년 행정구역 변경시 善山郡 山東面에서 軍威郡 召保面으로 편입되었다.(文有相)(魯應九:男76 外4名)
寶 峴 洞 보촌·보촌동(寶村洞)§ 보현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뒷산에 鐵鑛이 있다 하여 보촌이라 한다. 40여 가구 중 함창 金氏가 주성이다. 보촌동 서쪽에 시팡이(쇠팽이)곡이 있는데 일정 때 쇠를 팠다고 한다. 지금도 굴이 3개가 남아 있다.(金成吉: 男64外외4名) 힌티·백현(白峴)·백현동(白峴洞)§ 흰재 목재 밑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나무가 없을 때 산의 흙이 희게 보였다는 데서 붙여진 명칭이다. 흰재 목재는 白峴洞에서 의성군 구천면 조성리 신촌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다.(金厚坤:男 65 外 4 名) 점동네(店村)§ 寶峴 2동 중 작은 동네이다. 옛날에 이 곳에서 옹기를 구웠다고 하여 점동네가 되었으며, 그 자취로서 지금도 사기 그릇 조각이 남아 있다. 金海 金氏 조상의 孝子閣이 있는데 金海 金氏 조상이 시장에 갔다가 오는 길에 강변 얼음에서 솟아나온 잉어를 조모 병환에 드리니 나았으므로 이 각을 세웠다고 한다.(尹炳株)(金成吉: 男64外 4名)
福 星 洞 집리( 里)·복성(福星)·복성동(福星洞)·복천(福泉)§ 본래 軍威郡 花谷面의 지역으로서 복샘이 있었으므로 福泉, 또는 福星· 里라 하였다. 옛날에는 14
밀양 孫氏가 주성이었으나 지금은 金海 金氏가 주성으로 10여 가구가 되는 큰 마을이다. 福泉에 따른 전설을 보면 福星洞은 물이 귀한데 이 곳을 지나던 한 대사가 물을 청한즉 물을 주지 못하였다. 이에 대사가 샘터를 마을 중턱에 있는 고목 옆을 가리켜 주었다. 부락민은 그 날부터 고목을 베고 샘을 팠다. 마침 큰 바위를 들어내니 기이하게도 학 두 마리가 날아가 버렸다. 이로부터 동리가 차차 쇠하여졌고, 이에 노한 동민들은 대사를 다시 찾아 죽였다고 하며, 대사를 묻은 자리를 중구덩이라고 한다.그 곳에는 황물이 나고 있다. 학이 날아간 자리가 지금도 남아 있는데 그 바위를 용가메라고 부른다.(南炳植: 男 72 外 4 名) 독정(獨亭)§ 福星 남쪽 강 건너에 있는 마을로 마을 옆에 정자가 하나 있다 하여 獨亭이라 이른다. 15가구 중 李氏, 朴氏가 주성을 이룬다.(金正夏:男52外4名) 거래치기·황산동(荒山洞)§ 福星 동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부락 전후의 사닝 거칠다 하여 荒山이라고도 하며 부락 뒷골에 황물터가 있었다고 하여 불려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15가구 중 金海 金氏가 주성이다.(金元基: 男 78 外 4 名) 큰마아·큰마을·대촌(大村)§ 里 일부로서 제일 큰 마을이란 뜻에서 붙여진 명칭이다. 옛날에는 고을 원이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慶州 崔氏가 주성이고 약20여 가구가 살고 있다. (金三岩 : 男 73 外 4 名) 굴티·구리팅§ 里中 일부로서 福星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이다. 구부러진 비탈에 비스듬히 자리잡고 있으며 마을 앞에 강이 있다. 10여 가구 중 一善 金氏가 주성이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金正夏 :男52外 4名) 은접문·음지편·은저문§ 里 中 일부로서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중산에서 里로 넘어 오는 언덕 밑에 있다.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응달쪽의 마을이기 때문에 음지편이라고도 불려진다 6가구가 살고 있다(金泰云 男61 外1 名) 들가운지·야중(野中)§ 福星 남서쪽 들 가운데 있는 마을로 각성의 4가구가 살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들 가운데 형성된 마을이란 데서 붙여진 명칭이라고 한다.(金泰云: 男61 外 4 名) 거리말§ 荒山洞 내의 남쪽 강가에 있는 마을로 거리가 떨어져 있다 하여 불려진 명칭이다. 12가구 중 남씨가 주성이다. (南炳植 : 男64 外 4 名) 중산(中山)§ 福星洞 서쪽에 있는 마을로 복성동과 사리동 사이 산기슭에 위치하여 있으므로 중산이라 한다.中山은 가구수가 모두 10여 가구인데 6가구는 福星洞에 속해 있고 나머지 5가구는 沙里洞에 속해 있다. 그리하여 마을 한가운데가 사리동과 복성동의 경계이다. 여러 성씨가 모여 살며 주로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柳得動)(金正夏 :男 52 外 4 名)
鳳 韶 洞 두모뜰·두못들·두모(斗毛)§ 下韶 서쪽, 내 건너에 있는 부락으로 고려 시대 斗毛國이 이 곳에 개국하여 선정하던 자리로 지금도 드들머리산의 기슭을 파보면 15
토기류등 옛 유물이 나타나고 있다. 이로보아 斗毛國의 옛이름이 두모뜰로 변하여 지금까지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興陽 李氏 1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들 가운데 鳳儀國民學校가 있다가 폐교되었다.(李錫奎: 男 64 外 4 名) 상소(上韶)·상소동(上韶洞)§ 鳳韶洞 위쪽에 있는 마을로 예로부터 퉁소를 불면 鳳凰이 비래한다는 뜻으로 召召本面 즉 召保面의 본명으로 전해진다. 전해오는 이야기로 옛날 徐氏 일가가 처음 들어와서 번창하다가 聖池라는 못을 판 후 쇠잔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현재 20여 가구 중 金寧 金氏가 주성을 이루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金大奎: 男 76 外 4 名) 하소(下韶)·하소동(下韶洞)§鳳韶洞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上韶와는 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력곡이라는 골이 깊어 천수답 시절에도 비할 바 없이 수리가 좋았다는 곳이다.30여 가구 중 興陽 李氏가 살고 있다. (表河一) (李永萬: 男 76 外 4名)
鳳 凰 洞 범바우·범바위·부황골·부황동(夫皇洞)·봉황동(鳳凰洞)·호암(虎岩)§동네 뒤의 바위가 범이 앉은 것 같은 형상이라 범바우라 한다. 지금은 없어 졌지마는 옛날 근처에 昭昭洞과 九皇洞이 있었고 가까이에 내의동이 있으므로 고서에 昭昭九皇鳳凰來儀라 하였다. 金寧 金氏와 密障 朴氏가 주성으로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高明秀: 男 64 外 4 名) 달천(達川)·달천동(達川洞)·월천(月川)§鳳凰洞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주위로 渭川이 흐르고 있는데 그 渭川의 모양이 마치 달같이 둥글게 흐르고 있음에 의한 명칭이며 질매재에 대하여 말안장의 마을이라는 전설이 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의하여 鳳凰洞이 되었다. (李性熙: 남 64 外 4名) 부헝이·부엉이·연곡(蓮谷)§鳳凰洞 중앙에 있는 마을로 마을 뒤에 연뱅이골이 있는데 매우 긴 골짜기 이며 골안 연못에 연꽃이 많이 피어 蓮谷이라 한다. 부헝이(부엉이)라는 전설은 옛날 斗毛國의 왕이 적국 장사에게 쫓기어 환심고개에서 붙잡혔는데 장사의 날세고 용맹스런 모습을 짐승에 비하여 부엉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50여 가구 중에 永川 李氏가 주성을 이룬다. (表河一) (李華榮: 男 61 外 4名)
沙 里 洞 가는뱀이·율리(栗里)·율리동(栗里洞)·사리(沙里)§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渭川을 끼고 부락이 이루어 졌다. 이에 따라 넓은 갯편에 밤나무가 성하여 栗里이라 칭한다. 또 마을 앞내에 모래가 많았으므로 沙里라고도 한다. 60여 가구중 延安 李氏가 주성을 이룬다. (李榮永: 男 59 外 5名) 새기터·사기터·사지동(沙只洞)§沙里 북서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사기를 구웠던 곳이라는 뜻에서 沙只라고 한다. 현재 30여 가구중 大興 李氏가 주성이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尹炳銖) (李永植: 男 65 外 4名) 16
山 法 洞 산법골·산허리·산법(山法)·산법리(山法里)·산법동(山法洞)·산월리(山月里)§마을이 사방 산으로 둘러 싸였고 산의 형세가 반월과 같이 생겼다 해서 산월리 라 불리워졌다. 일설에 신라 시대부터 산사가 있었다 하여 山法이라 칭하였다. 한다. 1913년에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山法洞이라 하였다. 동리 가까운 곳에 옛날의 절터가 남아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져 버리고 풀밭 가운데 흔적만 남아있다. n(南泰基: 男 70 外 4名) 아래뜸§ 山法里 북쪽에 있던 마을로 1959년 전에는 16가구가 살았으나 저수지 설치로 중뜸에 4 가구,새동네(거사꼴)에 3가구가 옮기고 그 외는 타처로 이사하여 지금은 없어진 마을이다.(尹相基:男65 外 4名) 위뜸§ 山法里 남쪽에 있는 마을로 중뜸에서 약 700m 위쪽에 있는 마을이다. 12가구가 살고 있으며 朴氏가 주성이다.(朴億相 : 男48 外 4名) 중뜸§ 山法洞의 중앙에 있는 마을로 山法洞에서 중심동이다. 21가구로 南氏.洪氏가 많이 살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朴聖雄)(洪潤鳳: 男74 外 4名)
西 京 洞 돌밑(石下).서경(西京).서경동(西京洞)석영(석영)§ 본래 軍威郡 石本面의 지역으로서 차돌이 있는 산밑이 되므로 돌 밑 또는 石英이라 불려지다가 변하여 西京이라한다. 삼국시대에 尙州國과 西京國이 대치하고 있을 때 西京國의 수도였다고 하는 설도 있다. 현재 8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一善 金氏가 주성을 이룬다.大陵. 蜂陵.胎峯이 있으며 風嶺에는 석불이 남아 있다.(金相鎬 : 男 74 外 4 名) 어미골·용수골·용수(龍水)·용수곡(龍水谷)·용소(龍沼)§ 서경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마을앞에 용수지라는 못이 있었는데 이 못에서 용이 등천 하였다고 용소 라고 불려졌다. 일설에 의하면 永川 李氏가 조상의 광중을 파다가 풍수가 풍령에서 백마를 탄 사람이 오기 전에 매장하라고 했다. 광중을 파던 중 석함이 나와 상쟁하는데 그 사람이 나타나 석함을 깨니 잉어가 광중에서 나와 사라졌다. 그후 자손들이 잉어가 잘살라는 뜻에서 못을 팠다. 그리하여 이 못을 어(魚)못·어미골· 또는 용소라 불려졌다 한다.(金福洛 : 男 65外 5名)
松 院 洞 대송(大松)·오류동(五柳洞)§ 질매재 서쪽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의 형성은 1500년에 嚴氏가 개척했다. 당시 마을 앞에 큰소나무가 많았다고 하여 대송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현재 소나무는 자취도 없고 면소재지로서 소보면 사무소와 松院 國民 學校가 세워져 있다.35가구 중 慶州 崔氏가 주성을 이루며 1914년 행정구역의 개편으로 松院洞에 속한다.(司空錫: 男 53 外 4名) 17
돌정자·석정(石亭)§ 질매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 북편 큰 바위에 정자나무가 서 있어 돌정자로 불리워졌다. 25가구 중 永川 李氏와 坡坪 尹氏가 주성이다(尹炳大: 男 64外 4名) 질매재·안령(鞍嶺)·안령동(安嶺洞)§ 송원동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로, 마을의 형성은 1514년 홍 나호라는 선비가 개척하여 鞍嶺이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松院洞이라 개칭되었다. 안령이란 명칭은 부락 동편의 고개가 말지르매(질매)같이 생겼다 하여 불리워진 별칭이다. 56가구중 驪州 閔氏가 主姓이다. 召保에서 軍威로 통하는 길에 고개가 있는데 모양이 말길마(말안장)같다 하여 질매재 고개라 칭한다. 그 옆에 말바위듬이 있고 건너에 당래(다랭이)라는 동네를 현재 달천(鳳凰洞)이라 한다. (閔泳述 :男 68外 4名) 장터·시장(市場)§ 1958년 召保市場을 개설 하였다. 장터가 있는 마을이라 장터라 칭하고 2.7일에 자이 선다. 면행정의 중심지로 농협.우체국.정류소 등이 있다. (鄭奎煥: 男54 外4名)
新 溪 洞 화일(花日·華日)§ 옛날 방천에 복숭아꽃이 많아서 花日이라 불렀고 현 양조장을 중심으로 花日 장터가 있었다. 옛 주막이 있었으며, 농기구. 농산물 등이 팔리던 곳인데 64년 전에 없어졌다고 한다.(具外一 :男74 外 4名) 웃말·신계(新溪)§ 신계동의 본동으로 60가구가 살고 있으며 具氏.孫氏가 주성을 이루며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李順金: 女74外 4名) 상골§ 파일 서쪽에 있는 마을로 동네의 위쪽에 있다고 상골이라 하였다. 약 10가구가 살고 있으며 朴氏가 주성이다.(全暎淑)(具在一:男 73 外 4名)
渭 城 洞 낭자(浪子)·낭성(浪城)·낭성동(浪城洞)·위성(渭城)·위성동(渭城洞)§ 낭재가 낭자로 된듯도 하며 옛날에 이곳에 성이 있었다. 부락 뒷산에 옛 성터가 지금도 남아 있어 유래된 부락명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큰 강이 마을 주위를 굽이쳐 흘러가는 모습이 마치 성을 쌓아 놓은 것과 같다 하여 浪城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약 30여 가구가 살고 있으며 殷氏.朴氏가 주성이다.(殷鍾秀: 男50外 5名) 대링이·대량(大良)·대량동(大良洞)§ 낭자 서쪽에 있는 큰 마을로 어진 사람이 많이 나도록 하기 위하여 大良이라 불렀다하고 혹은 장사가 많이 났다는 뜻에서 이름 지워졌다는 설도 있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삼면이 강으로 싸였고 일면이 背山臨水이니 강 뒤에 山의 형세가 용 모양이다. 이를 龍穴이라 한다. 북쪽이 龍頭 남쪽이 龍尾처럼 생겨 꼬리와 머리 쪽에 두 고목이 심겨져 동신으로 뫼시어 모든 행운을 비는 제단으로 되어 있다.또 이마을은 각성으로 구성되어 있어 각 문중이 성하지 못하여 행세도 못한다. 兄弟만 나야지 3兄弟가되면 한집이 망하니 떠나야 한다는 속설이 있다. 18 (朴 憲 :男42 外 5名) 사촌(沙村)§ 渭城 서쪽에 있는 마을로 조선 초기 약 450년 전 부락에 사기점이 있었다고 하여 沙村이라고 불려지고 있다. 이 곳에 절터가 있고 여기에서 기왓장이 나온다. 특히 자기도 출토 된다. 옛날 청화산의 홍꼴산 중턱에서 판(소반)을 만들고 생활했음에 의하여 반자의 집터라고도 칭한다. 여러 성씨가 어울려 살며 전에는 30여 가구가 살다가 이농으로 지금은 20여 가구가 살고 있다.(黃炳俊: 男49外 4名) 화실(花實)·화곡(花谷)§渭城洞에 있는 가장 큰 마을로 부락의 뒷산이 매화처럼 전개되었다는 뜻에서 화실이라 불려졌다. 풍수지리설에 따라 서편이 막히면 인물이 많이 난다하여 인위적인 뚝을 쌓고 소나무를 심어, 그 때 노송이 지금도 남아 있다. 마을 뒷산은 높고 길며 渭水가 돌아서 흐르고 渭城朝雨 輕廛 客舍靑靑柳色新이라 하여 이 晋州人 柳氏가 渭城이라 했다. 渭城에는 三臺가 있었다고 한다. 三臺石·三臺木·三臺佛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옛날의 면명은 花谷이다. 60여 가구의 큰 마을로 殷氏· 李氏들이 많이 살고 있다.(柳海運 : 남 52 外 5 名) 황골·황곡(荒谷)·한읍(韓邑)§ 花倉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 고을이 있었다 하여 韓邑이라 하다가 뒤에 황골이 되었다. 지금도 묵은 기와 조각이 밭에 흩어져 있는 것을 흔히 발견 할 수 있다. 6가구 정도의 마을로 殷氏.李氏가 주성이다.(李鉉玖 : 男 64外 4名) 화창(花倉)§ 고려 시대 창고가 있었다는 뜻에서 일명 華倉이라고도 하였으나, 지금은 花倉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고려 成宗朝에 義倉을 설치 하였을 시대에 창고가 있었던 곳이라 한다. 옛날에 이곳에 화창장이 있었으며, 서울에서 오는 봇짐 장사가 대구. 포항으로 가는 길에 여기서 장을 보고 쉬는 곳인데 주막이 있었다. 본래 여기가 召保面所在地였으나 지금은 松院으로 옮겨 졌다.(朴鍾禹)(李炳文 : 男 68 外 4 名)
平 湖 洞 평지마을·평지(平地)·평지동(平地洞)§ 평호동에서 으뜸이 되는 마을로 앞 들이 넓다하여 평지마을·平地洞이라 불렀으나 일정 때 平湖洞으로 고쳐졌다. 전형적인 농촌이며 30가구로 각성이 모여 살고 있다.(尹相園: 男 47 外 4名) 낫거리·낙꺼리·개겸·괘겸(掛鎌)§ 평지동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부락지세가 낫 모양으로 생겼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마을 앞 산에 龍泉골이란 동굴이 있는데 약 80명 가량 수용할 수 있는 석굴로 옛날 피란처였다. 석굴 속에 샘이 있다. 30 가구 중 金氏가 주성이다. (徐德伊 : 男 64 外 5名) 우복동(牛伏洞)§ 平地마을의 일부로 善山郡 山東面과의 경계 지점에 있다. 平湖洞에서 넘어 가는 고개가 마치 소가 앉아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어 牛伏洞이라 칭한다. 일설에는 이 마을 주민 생활이 인근 주민들보다 풍부하게 생활하였다 하여 복이 많은 동리란 뜻에서 불려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10여 가구 중 鄭氏가 주성을 이룬다. (朴殷洛)(鄭海龍: 男 64 外 4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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