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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우리집 대사
1.혁진이 결혼
2.혁범이 해외출장
3.장모님 사망
4. 해외여행 5회
5. 장조카 광희, 장희 부부 귀국.
2006년 우리집 대사
1. 혁진이 결혼. ; 결혼을 앞둔 부모의 심정. 결혼식장의 감흥
결혼식을 주례사가 있고 밥 먹고 하는 기본 틀을 깨고, 주례식단에는 양가 부모가 앉고 주례는 전체흐름만 잡고 양가에서 마이크를 주고받으며 신랑 신부의 자라온 에피소드나 살아가야할 격려사를 하며 하례객의 묻는 말에 대답도 하며 식사를 진행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 했는데 양가의 의견을 조율하기엔 너머 시간이 촉박하여 함구하였다.
결혼을 앞둔 부모의 심정
집 정원의 흐드러지게 피였던 살구꽃은 지고 살구는 매실만큼 커져있고, 늦은 봄에 다른 종류보다 늦게 피는 우리 집의 자색 목련도 이제는 꽃이 다 지어 신록의 5월 중순을 가리키고 있으니 우리 부부가 카나다를 다녀 온 지도 벌써 3개월이 가까워 온다.
2월 중순에 카나다를 가자니 집사람이 4월이면 혁진이가 들어온다는데 돈 버리고 뭣 하러 가느냐고 하여도 이번이 찬스인 것 같아 카나다여행 겸 혁진이 일하는 모습도 보고 여자 친구 소영이 부모도 상면할 겸 집사람과 여행을 감행하였다.
10일 여행에 3일간 현지 체류약속을 하고 카나다 동부 단체여행을 떠났다. 벤쿠버에서는 집사람의 간이 빽을 도둑맞고, 캘거리 가이드한테는 카나다에 유학 와서 토론토대학에 입학한 사람은 보았어도 졸업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을 듣기도 하고, 나이아가라 갈 때는 새로 산 800만 화소 카메라가 말썽을 부려 찍어보지도 못하는 곡절 끝에 단체여행 일정을 마치고 토론토에서 혁진이와 소영이를 만나게 되었다.
소영이 부모를 가게 앞에서 잠시 만나 일차상봉을 하며 금년이 쌍춘년이란 이야기를 하였는데 이 의미를 밤에 무척 심도 있게 생각한 모양이다. 우리는 혁진이와 소영이가 가까운 사이란 것은 알지만 혁진이 일하고 있는 것에 더 신경을 세워 그 이상의 문제는 사실상 미뤄둔 상태였다.
잠시 만난 소영이 부모와 헤어져 소영이가 운전을 하고 혁진이가 있는 윈져로 가는데 4시간 정도 평야를 달리니 윈져 옆의 조그만 도시인 디쿰시에 도착하여 집을 보니 아담하고 살만한 예뿐 주택이라 제법 괜찮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집에 들어가 보니 사무실이란 느낌은 안나고, 여러 명이 프로그램 개발하느라고 정신없는 줄 알았더니 도환이란 젊은 친구와 혁진이, 달랑 둘이 앉아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카나다에 온 목적이 아니고 실패작이로구나 하고 바로 느껴졌다. 식사를 보니 기본식에다 궁자가 끼여 젊은 아희들이 불쌍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다. 이것도 소영이가 편의점에서 카운터하며 시간당 아르바이트로 먹여 살리는 판이다.
여지껏 도와주던 스폰서는 떨어져 나가고 다른 변호사 스폰서를 잡을 예정이라는데 께임 개발을 집어 치우고 포털 싸이트를 개발 중이란다. 지금까지 완성된 작품은 하나도 없는 꼴이다. 스폰서니 개발이니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데 실효성이 하나도 없으니, 믿기는 자식을 믿어야 하는데 내 마음은 공허하기만 하다.
서울에서 혁진이 전화 받을 때 혁진이의 목소리에 활기가 느껴지지 않아 은근히 불안이 왔는데 사실로 확인하는 순간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서울에서 카나다를 온다고 하니 훔쳐 먹다 들킨 놈 같이 혁진이 마음이 뜨끔했을 거다. 이제는 이 상황을 현명하게 처리하여 지속하던지 어떻게 정리하느냐만 남은 꼴이다.
끼니도 걱정을 하는 젊은 아희들이 매월 3백여만원을 주택 리스 렌탈료로 은행에 지불해야 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은 설정이다. 신용사회인 선진국에서 연체를 하여 신용불량자가 되면 어떻게 사회에서 전락하는지 실감으로 체험해 보지 않은 젊음에서 나온 졸속 판단이다.
윈져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밤 10시에 토론토의 중국식당에서 소영이 부모를 다시 만났다. 소영이 부모와 소영이 우리 부부와 혁진이 모두 여섯 명이 식사를 하며 대화는 아희들 문제에 집중될 수박에 없었다.
내가 윈져에 가보니 멀쩡한 젊은 놈 둘이 프로그램 개발한답시고 스폰서도 못 잡고 소영이 아르바이트하는 돈으로 끼니를 때우며 소일하는데 이것은 잘못 진행 되여 가는구나 하고 직감하였다. 결정하기를 혁진이를 한국으로 귀국시키던지 여기의 일을 실효 있게 진행시키던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소영이 문제도 여기에 결부하여 해결하고 싶다고 이야기하였다.
소영이 아버지가 둘을 결혼시키자고 먼저 제의를 했다. 우리는 좋다고 즉석 응답을 하고, 두 당사자는 좋기는 한데 부모들의 진행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촉각을 세우고 듣고 있다. 현재 두 아희들이 경제적으로 고전 하드라도 일단 결혼 시키고 결혼은 금년 아무 때라도 좋다고 하여 우리도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하였다.
3월에 소영이 오빠가 결혼하는데 거기에 신경 쓰지 말라고 하였다. 금년에 소영이 집은 혼사를 두 번 치르게 되는 쌍춘년에 겹경사가 벌어지게 됐다. 나는 혁진이가 만나는 그룹에서 돋보이고 다독을 하여 다방면으로 실력이 있으나 신경이 예민한 것이 근심인데, 소영이의 진중함이 이점을 카바 할 수 있을 것 같아 무척 기쁘다고 하였다. 소영이 아버지는 소영이가 토론토대학에서 복수전공을 하였고 이민 와서 카나다의 모든 살림의 문제는 혼자서 다 해결하는 자기 집의 보배라고 하였다.
양가 부모들의 대화는 서로 품위를 잃지 않으며 화기에 찬 분위기로 진행 되였으며 두 시간 동안 상호 의견을 충분히 전달하였다. 3년 후에나 결혼 할 계획으로 있던 두 당사자는 잘 됐다는 듯 반론이 하나도 없다.
혁진이는 일단 카나다에서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진행은 시키되, 싸이트 오픈 하는 것으로 자기의 실력을 인정받는 것으로 하고, 전문학교 형태의 학원 강사로 시작하기로 하였다. 윈져의 집은 상황이 허락 되는대로 정리하고 최소 2년 후에는 토론토로 자리를 이동하는 것으로 이야기하였다.
혁진이는 소영이 오빠와의 업무 문제도 있고, 현재 하고 있는 일도 소영이 아버지가 탐탁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소영이 아버지와 은근히 거리가 있는데 혁진이의 실력이라면 쉽사리 풀고 장인과 사위의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 부부는 만족할만한 며느리를 얻는다는 기쁨에 피로도 싹 가시고 온 마음이 흔쾌해진 기분으로 호텔로 돌아왔다. 이제 두 아희의 침체된 마음에 생기를 넣어주고 기를 살려주는 것이 양가 부모들의 첫걸음이다.
호텔 방에서 우리 부부와 혁진이가 모처럼 한방에서 잤다. 새벽 6시에 소영이가 호텔로 와서 아침식사를 꼭두새벽에 호텔에서 같이 하였다. 우리부부를 공항에 배양하기 위하여 소영이가 운전하는데, 우리는 비행기 타고 졸면 되지만, 소영이는 새벽 1시 이후에 집에 도착하여 모처럼 만난 자기 어머니와 우리문제로 정답게 이야기하다 잠도 못 잤을 거다. 새벽에 우리를 픽업하여 공항에서 우리 부부와 헤어지면 소영이는 윈져까지 4시간 이상 달려가야 하는데 잠도 못 자 피곤해서 사고라도 내면 어쩌나 하고 근심스러워 죽겠다.
귀국하니 결혼일자가 10월, 9월, 하다 6월 24일로 확정 되였다. 9월이 카나다의 신학기가 시작 되여 조절하다 보니 소영이 오빠 결혼식과 3개월 차이밖에 안 나게 되여 사돈 될 사람한테 미안한 감이 든다.
소영이 오빠가 3월 25일 남서울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하여 3월 16일 혁진이도 소영이 식구와 같이 귀국하였다. 인터넷으로 데이트를 하여 급속히 결혼을 진행하느라고 소영이 어머니는 며느릿감 얼굴도 못보고 귀국하는 것이란다. 소영이 아버지는 이 결혼이 없었으면 소영이 먼저 금년 봄에 보내도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소영이네 결혼식 날 우리 부부도 참석 하였는데 집사람은 소영이 친척들의 써치라이트를 받았다. 소영이 시어머니가 될 사람이 나타났으니 얼마나 요모조모 따져 관상을 봤는지 뻔한 일 아니겠는가. 카나다에서 혁진이와 같이 일하는 도환이 엄마와 같이 앉아 있으며 뭍사람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집사람은 태연자약하게 앉아 여유를 부렸다.
혁진이가 긴급 사회까지 보며 우리 앞에 소영이 까지 왔다 갔다 하는데, 소영이가 정장을 하니 전에 보다 더 예뻐 보인다.
소영이 오빠 결혼식이 끝나고 월요일에 이번에는 내가 호스트가 되어 소영이 부모를 반포 한식집에서 점심을 같이하게 되었다. 카나다에서와 같이 여섯 명이 앉아 이야기 하는데 대화의 질이 더 진취적이고 현실적이며 상대의 약점을 캐거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서로 양보하려하니 분위기가 더 고조되고 즐거운 자리가 더 상승작용을 하였다.
소영이 어머니는 카나다에서 볼 때보다 더 세련되게 보였다. 한국에서 소영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계속 반장을 하였으며 남자를 우습게 알아 결혼하기 힘들겠구나. 했는데 혁진이가 나타나더니 고분고분해진 것을 보고 인연이로구나. 생각했단다. 카나다에 혁진이가 갔을 때 소영이 어머니 보다는 아버지가 이들의 관계를 먼저 눈치를 챈 모양이다.
소영이를 데리고 우리 네 사람이 강남에 있는 찜질방 겸 온천을 가니 소영이 어머니가 자기는 여태껏 시어머니와 목욕탕에 가본 적이 없는데 너는 시집도 가기 전에 어떻게 시어머니 될 사람과 목욕탕에 갈 생각을 했느냐고 희한한 눈길로 본 모양이다.
집사람이 온천에 갔을 때 소영이보고 양가 식구가 모일 때 너의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귀띔하니, 소영이는 윈져의 집이 5만 불이 악성 부채인데 3월 말이 1차 기한이라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해 주겠다고 하니, 소영이가 이 문제로 얼마나 고민하였으면 감격스러워서 격한 눈물을 흘리니, 혁진이가 옆에서 눈에 고춧가루가 들어가 그렇다고 분위기를 수습한다. 혁진이나 소영이나 부모에게 손 내밀지 않고 자기들이 헤쳐 나가려고 하는 마음이 가상하고 대견스럽다.
귀국하여 시차 적응도 되지 않았는데 저녁에 우리 집에서 게 파티를 하고 다음날 혁범이가 로마 출장 가기 전에 자기가 쏜다고 혁진이와 제 형수 될 사람하고 자기여자친구하고 그랜져를 몰고 자연농원에 가서 하루 종일 혁범이의 본전 뽑기 식으로 놀아 혁진이와 소영이가 두 손을 든 모양이다. 이런 놀이 공원에 가서 놀아보지 못한 혁진이나 소영이는 대단한 경험을 한 모양이다.
나는 스키장 가자고 3월에 폐장하지 않은 용평으로 데리고 갔으니 왕초보인 소영이가 얼마나 당황했겠나. 스키를 조금 탄다고 하여 그런 줄 알았지. 그래도 나중에는 혁진이와 집사람이 도와줘 리프트를 더 타는 것을 보고 위안이 되었다.
혁진이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모한테 끌려 다니며 스키를 타고 스키장에서는 갖이고 간 밥이나 간식으로 식사를 벤치에서 하여 절약하는 레저를 즐겼다고 소영이에게 장황하게 설명하였는데 우리 집 스타일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스키장 식당은 폐장일이 가까워 거의 다 문을 닫는 바람에 만들어간 음식으로 식사를 하게 되였다.
스키장 가는 덕분에 박정희 대통령 딸인 한나라당 대표 박근혜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만나 악수하는 기회도 생겼다. 소영이 부모는 우리보고 놀러 다니는데 미친 사람들 아냐, 하고 경이의 눈으로 볼 것 같다.
혁진이와 소영이가 귀국하고부터 계속 붙어 다니며 소영이는 우리 집에 왔다 먼 거리인 김포 양촌의 작은 아버지 집을 오가느라고 상당히 피곤할거다. 어쨌건 소영이는 우리 쫓아 다니느라고 피곤이 극도에 달할 뗀데 시부모 될 사람한테 불평도 못하고 또 자기 좋으라고 한다고 느끼니 욕할 수도 없고 피곤만 누적 되여 갈 테지만 젊음으로 극복할거다. 혁진이는 소영이를 집에서부터 김포까지 바라다 주느라고 초보운전이 많이 능숙해졌을 테니 좋은 점도 있다.
카나다에서는 집에서 같이 붙어만 있었지 제대로 데이트 한번 못해본 주제 같은데 이번에 귀국하여 서울에서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며 같이 보내는 데이트가 이들에겐 처음일 것 같다. 결혼하고 신혼 차리면 많이 돌아다닐 것 같지만 막상 닥치면 생활 꾸려나가느라 즐길 시간이 그렇게 만만히 생기는 게 아니다. 생활의 여유와 시간이 허락하려면 많은 시간이 흘러야 되는 거란다.
예단 값으로 신부 집에서 천만원이 왔다. 이 천만원을 반인 오백을 신부 집 예단 값으로 돌려주는 것이 일반화된 관행인 모양이다. 내가 집사람과 상의하며, 신부 부모는 이번 아들 결혼식에 해 입은 옷 그대로면 되고 우리는 우리가 그냥 해 입으면 되고 신부 패물은 우리가 알아서 해주면 되지 천만원 받아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모양새도 그러니 다 돌려주자고 하였다. 소영이 보고 소영이 부모한테 우리의 뜻을 잘 말해 오해 없도록 하라고 하고 천만원을 돌려주니 다음날 소영이 아버님이 다시 3백을 갖고 왔다. 또 돌려준다면 의사가 잘못 전달될 것 같아 집사람보고 받으라고 하였다. 소영이네도 다시 돌려주며 여러모로 고심했을 것 같아 오히려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는 은행에서 5만불을 해결하고 혁진이 줄 돈도 환전하여 아희들 출국하는데 홀가분한 마음으로 보내려고 만전을 기했다. 집사람은 아희들 카나다의 생활을 보아서 그런지 약식을 하여 덩어리 덩어리 만들고 고등어 아지를 말려 반찬으로 준비하고 혁진이는 족욕기까지 챙겨 출국 짐을 소영이 것과 같이 하루 종일 쌌다.
3월 29일 귀국한지 2주만에 혁진이 소영이는 눈코 뜰 새 없이 뛰여 다니다 출국하게 되었다. 비행기 타고나서부터 한숨 돌리고 제 정신으로 돌아 올 거다. 카나다에서 목표한대로 잘 진행 되여 결혼하고 직장문제가 잘 풀렸으면 좋겠다.
아희들이 출국하고 나서부터 집사람은 아희들 결혼식 준비로 더 뛰어다니는 것 같다. 한복을 맞추느라고 헤매고 패물을 고르느라고 헤집고 다니니 바쁘고 다리도 아파 죽겠다고 한다. 돼지이모고 막냇누이고 다 동원하고 친구에게는 물어보느라고 연신 전화다. 어떻게 된 게 시집보내는 어미 같다. 그래도 준비하느라 마냥 즐겁기만 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며느리라면 반대현상이 일어났을 거다. 집사람 마음에 들기가 쉽지 않은데 심지가 깊고 큰 그릇으로 보아 그런지 소영이에게는 아주 호혜적이다. 집안에 여자가 잘 들어오면 흥하고 잘못 들어오면 집안 분란만 일으키고 패가를 하니 좋은 며느리를 들인다는 것이 얼마나 중차대한가, 그 집안의 복록이다.
집사람은 자기의 정성이 들어가야 한다고 옷이나 비단 이불도 직접 만드느라고 이리저리 구상을 많이 한다. 지금 우리 부부는 결혼을 앞두고 두 아희들의 이야기로 대화를 삼으며 마냥 즐거움에 빠져 하루하루가 결혼을 앞둔 아희들 보다 더 즐거운 것 같이 지내고 있다. 결혼을 앞둔 부모의 심정이 이렇게 기쁠 줄은 미처 몰랐다.
강남의 엄마들 결혼준비 이야기를 들으면 다이야는 1캐럿 냉장고는 무슨 상표하며 흥정을 하며 양가집에서 기 싸움을 하고 집에서 머리 쓰고 누워 있지를 않나, 거짓말로 치장을 하여 분란이 끝이지 않는데 우리는 이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 않으니 양가 모두 얼마나 행복한가.
금년 어버이날엔 두 아들이 꽃아 주는 카네이션도 없어 집사람과 케익 하나놓고 샴페인 터트리며 자축을 하며 보드카에 카카오로 칵테일을 만들어 알 달달하게 취기가 오는데 로마에서 혁범이가 전화로 카나다에서 혁진이가 전화로 축하해 주니 기분이 상승한다. 소영이가 전화를 바꿔 내가 샴페인 터트리며 우리 부부 둘이 자축하고 있다니 희한하고 재미있어 죽겠는 모양이다.
청첩장도 혁진이가 쓴 문구로 인쇄도 끝났으니 이번 달 내로 발송하고 소영이 아버지는 19일날 만나서 청첩장 전해주며 식사할거다.
청첩장 문구
아름다운 두 사람이 사랑으로 모여 한 울타리를 만듭니다.
여러분의 소중한 발걸음이 함께 해주신다면,
사랑의 햇살을 받으며 희망을 품고 힘차게 살아갈
저희들의 새로운 시작에 큰 기쁨이 되겠습니다.
신혼 여행지는 푸켓으로 정했다고 하여 여행사의 하니문코스로 가라고 하니 경비 줄인다고 자기들이 직접 호텔을 예약하고 비행기표를 티켓팅 한단다. 내가 갈 때는 직행을 타지만 가능하면 올 때는 방콕을 들려보라고 하였다. 또다시 여행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 동남아 여행의 엑기스인 방콕을 관광하라는 뜻이다.
4월 28일 혁진이와 소영이가 토론토에서 카나다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소영이 여자친구도 여럿이 온 모양인데 양가 부모 없는 결혼식이 어째 찜찜하나 카나다에서 합법적인 부부가 된 것이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릴 때까지 둘이는 각방을 쓰는 모양이다. 아직까지 순진하긴 하다.
우리부부는 혁진이 카나다 결혼식 날 저녁에 자축파티를 둘이서 했다. 혁진이가 카나다에서 사온 아이스 와인으로 한잔 쭈욱.
신혼부부인양 기분을 만끽하며, 서울에서 축하를 보낸다.
결혼식장의 감흥
‘결혼을 앞둔 부모의 심정’을 쓸 때는 결혼식 전이라 생생하게 기억하며 느낌을 쓸 수 있었는데, 혁진이 결혼식 때의 일을 쓸려니, 벌써 결혼식이 끝난 지도 1년이 다 되어, 당시의 기억이나 감흥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군대 동기생들이 5월 초에 일본 벳부에 온천여행을 간다고 하여 부부가 신청을 하였는데, 일정이 연기가 되여 5/31-6/3일까지 3박 4일로 확정이 되였다. 6/3일 혁진이가 소영이 하고 카나다에서 귀국을 한다고 하여 집사람이 남고, 나만 동기생과 오사카 교토 뱃부여행을 마치고 3일날 혁진이와 소영이를 맞이하게 되였다.
첫선.
6월 4일이 막냇누이 생일이라 식구들이 모이는데 혁진이가 소영이를 데리고 와서 식구들에게 선을 보였다. 시댁 식구들을 처음보기 위하여 왔는데 옷을 신경 써서 차려 입지도 않고 화장도 요란하게 하지 않고 평상시에 있는 그대로의 얼굴 에 옷도 평소 자기가 입고 다니던 옷을 입고 나타났다. 카나다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에게는 당연한 모습이나 우리나라에서는 옷과 화장에 무척 신경을 쓰는데 아예 그런 것에는 조금도 염두에 두고 있지 않고 당당하다. 새색시 차림이라고 보이지는 않으나 식구들은 외국에 있다가 온 애니까 옷은 얼마든지 신식으로 빼어 입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옷에 대하여는 예민하게 보는 사람도 없다. 새 색시에게 신상에 대해 물으니 막힘없이 대답하니 옛날 노인들이라 색시 똑똑하다고 하고, 발랑까진 젊은애들 같지 않고 풍신해서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칭찬을 한다. 누이들에게 후한 인상을 주어 나도 기분이 좋아지며 자식 덕에 으쓱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다.
혼수.
집사람이 매우 바빠지기 시작했다. 패물을 하기 위하여 보석점에 들려 다이아나 진주 등을 살피고 옷가게에 가서 한복이나 밍크까지 섭렵하려면 똑같은 것을 여기저기서 보고 가격을 비교하고 아희들 취향에 맞나 맞춰봐야 하는 일이니,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여 경비 절감하고 효과적인 고품질의 물건을 구입한다는 것이 생각과 같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돈이 많아 탁 탁 탁 마음 내키는 대로 살수도 없는 일이고, 발품도 팔아야 하기 때문에 몇 번 쫓아갔더니 짜증스러워 돈을 좀더 주고라도 얼른 얼른 사버렸으면 좋겠구먼, 집사람이 이모저모 따지는 게 여간 아니다. 여기에 백화점에서 구입하는 것과 동급으로 시장에서 구입해야 하는데, 문제는 우리만의 생각이 아니고 소영이 집에서 혼수품을 시장에서 싸구려로 구입하는 인상을 주어서는 아예 하지 않느니만 못한 것이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소영이도 집사람에게 끌려 동대문 시장에 갔는데 옷가게 앞에서 혁진이 보고 눈물을 찔끔거린 모양이다. 집사람이 ‘너는 울보야’ 하고 쏘아 부친모양인데 아무래도 양가의 입장을 흡족 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집사람이 시장 다니기를 좋아하여 요령껏 혼수장만을 할 수 있는 것이지, 시장은 쌀 거라고 멋도 모르고 시장을 쫓아다니다가는 바가지 쓰는 것은 둘째 치고 어데서 어떤 물건을 사야할지 정말로 어리벙벙하다. 집사람 덕분에 시장 골목을 며칠동안 쳇바퀴 돌 듯 돌아다니며 혼수 장만을 하니 마지막에는 소영이도 만족하는 것 같다.
보석함에는 다이야 진주에 색깔 있는 보석을 추가하여 육안으로도 보기에 구색을 맞추고, 옷은 궁중 한복에 밍크 자켓까지 하여 나름대로 신경을 썼다. 집사람이 이렇게 며칠동안 시장으로 백화점으로 뛰어다니며 열심히 성의껏 준비한 것은 우리 집에 들어올 새 색시 조소영이가 너머나 마음에 들어서다.
집사람 성격에 색시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물건 구입하는데 신경도 안 썼을 뿐더러 준비하는 다른 사람의 훼방꾼 노릇을 하여, 여러 사람 피곤하게 했을 터인데 소영이가 너머나 마음에 들어 그 뾰족한 성질이 쏙 들어가고, 시집보내는 색시 어머니 같이 열심히 신경 써서 혼숫감 잘 장만 했다. 혼수품 장만하는데 양가에서 불협화음이 안나오니 천만 다행이다. 서로 조금씩 참고 양보하면 좋은 결실을 맺으련만 사람들은 그걸 못 참고 좋은날에 상처를 내는 사람이 많다.
소영이는 김포 양촌 작은 아버지 댁에서 우리 집까지 매일 왔다 갔다 하다가, 구로동 이모 집으로 이동하여 우리 집을 오는데, 거리가 여간 먼 곳이 아니라 왔다 갔다 하는데 거리에서 시간 다 보내고 무척 피곤할 것이지만 예식 전에 우리 집에서 자라고 할 수도 없고 보기에 안쓰럽다. 예식 날짜를 받아 놓은 젊은 애들이라 그런지 잘들 쫓아다닌다.
요즈음 아희들은 결혼 비용도 자기가 준비 하고 혼수 용품도 자기들이 장만하느라고 매우 분주하고 경제적으로 지우가 지는데 우리 아희들은 부모가 다 해주니 행복하고 고마운 줄 알아야 한다.
식장.
결혼식장은 신사동 네거리에 있는 강남웨딩문화원이라 우리 집에서 가깝고 신부화장이나 웨딩드레스, 사진촬영까지 일괄처리하게 만들어 예식날 부산함을 덜게 했다. 사진 앨범 만든다고 이백만원씩 뜯어가는 것은 못마땅했으나 아희들은 좋아 하는데 어쩌랴.
셋트 촬영한다고 스튜디오에서 여러 번 배우같이 포즈를 취하고 탈렌트인양 자기들이 도취해 있다. 소영이는 서구체격이라 웨딩드레스가 맞지 않을까봐 매우 신경을 곤두세우던데, 예식장 언니가 신부님 같은 그런 정도의 품이 넓은 드레스는 얼마든지 있다고 안심시키더니, 드레스를 가봉해서 입고는 신부의 불안한 마음이 가시고 만족한 모양이라 다행이다.
카나다에서 귀국하기 전에 미리 한복은 해야 한다고 치수를 재고 색상을 고르느냐고 메일로 왔다 갔다 하더니, 소례복인 당의에 아얌까지 겯드려 처음 입어보는 한복에 소영이도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함진 애비.
결혼식 전에 신부 댁에 납폐로 함을 보내는데 함진 애비 없이 친구들도 없이 신랑인 혁진이 혼자 함을 지고 간단다. 함을 파는데 신랑친구들이 동네를 시끄럽게 하여 민원도 발생하지만 신랑혼자 간다고 하는 대는 아연해 질 수밖에 없다. 신부 측의 사주를 받았는지는 모르나 신랑이 직접 가지고 간다는 게 영 불만족 한데, 연준이도 그렇게 한 전례가 있다고 부득불 우기는데 아쉽긴 하지만 못 이기는 체하며 넘어갔다.
혼서지에 두툼한 물목을 집사람이 정성을 드려 두 보퉁이 쌓았으니 소영이도 서운하진 않았을 거다. 함에 사주가 안 들어갔다고 하여 혁진이가 당황한 모양이다. 사주단자는 납채라고 택일하기 전에 이미 신부 댁에 보내는 것인데 현대식으로 생략하다보니 사주단자를 함에 혼서지와 함께 넣을 수도 있으나, 혼서지만 함에 넣는 것이 예의다.
연길이라고 신부 측에서 택일한 단자를 신랑 측에 보내는 것도 생략했는데 대례가 중요한 것이지 이런 지엽적인 문제는 신경 쓸 바가 아니다. 이런 문제가 발생하여 불편하게 하지 않기 위하여 함진 애비는 예의와 예절을 잘 아는 사람이 동행하여 양가의 의구심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함진 애비다.
내가 장가갈 때 함진 얘기 좀 해 볼가.
당시 나는 김포공항 가기 전 강서구청 근처에 있는 중소기업 경리과장으로 판교에서 회사까지 버스로 장시간 출퇴근하는 상황이었고, 집사람은 성모병원에서 잠시 나와 광운대 부속 사립초등학교 양호교사 시절 이였다.
양쪽 집 모두 결혼에 대하여 도와주는 이 없고 두 사람 다 시간도 없고 피곤한 시절이었다. 서로 함 에 대하여 상의하며, 우리는 현대 사람이니 옛날 예의범절에 구애받지 말고 함은 형식적으로 갔다는 시늉만 하면 되니 너머 함에 대하여 신경 쓰지 말자고 하였다.
그런 결과로 함속에는 혼수품을 넣지 않고 신부가 신혼집에서 입을 치마저고리와 미처 전해주지 못한 팔찌만 함속에 넣고 갔다. 함을 열어본 할머니들의 인상이 얼마나 일그러졌겠나. 상상하기도 어렵다.
함을 지고 간 친구들에게 할머니들의 핍박이 즉시 가해져 왔다. 친구들은 함 사라고 큰소리로 부천 동네에다 떠들어서 그러는 줄 알고, 할머니들에게 장가갈 때의 추억을 남기려고 그런 거라고 변명을 하고 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준 시계나 반지도 회수하여 함속에 넣고 갔으면 덜 했으련만 이미 때는 늦은 것이다. 팔찌도 디자인을 다시 해 달라고 하여 늦게 가지고 와서 함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빈 함을 가지고 갈 뻔한 것이다. 혼숫감을 담는 함도 실용적으로 신혼여행 빽을 사서 넣기로 하고 친구가 하는 가방가게에서 구입하였다.
집사람보고 가방가게에 가서 치마저고리를 넣고 가라고 하고, 함가는 날 가방 가게에서 집사람이 넣고 간 빽을 그냥 들고 간 것이다. 진짜 엉터리다.
함을 지고 가는 친구들을 처음에는 초등학교 고등학교 군대 동기들을 몇 명씩 섞어서 데리고 갈 계획이었다. 초등학교 친구들이 그런 게 어데 있느냐고 자기들이 가지고 가야 한다고 강력하게 밀어붙인다. 여러 팀이 같이 가면 싸움이 일어난다고 절대 섞어서 가는 것은 아니란다. 이런 해프닝이 있고나선 우리 아들에겐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혼자 함을 들고 갔다.
옆으로 샌 김에 결혼 절차에 대해 짚어보자.
1. 의혼 ; 혼사에 대한 양가의 의사타진인데 우리는 카나다에 가서 양가 부모가 전격적으로 합의하였다.
2. 납채 ; 신랑의 사주단자를 보내는데 연애를 하고 익히 알고 있고 지금은 이 절차가 사라졌다.
3. 연길 ; 신부 측에서 결혼 일자를 정하는데 택일 또는 날받이 라고 한다.
4. 납폐 ; 신부 집에 함을 보내는데 함에 혼서지와 함에 넣은 물목을 넣는다. 이때에 사주단자를 넣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때까지 양가에서 서신만 왔다 갔다 하며 신랑 신부는 상면도 못한 것이다.
5. 대례 ; 만천하에 결혼한다고 공포하는 예식이다.
6. 우귀 ; 신랑 신부의 신행이다
7. 폐백 ; 신부가 시댁식구들에게 처음으로 올리는 인사다. 지금은 이 폐백을 예식장에서 식후에 바로 해버린다.
결혼식 날.
2006년 6월 24일 12시. 드디어 결혼식 날이 왔다.
나로서는 개혼이라 하례객이 얼마나 올지 궁금하다. 신부 댁은 카나다 이민 9년차인데다가 3개월 전에 장남 결혼식을 치른 상태이니 식장을 채울 하례객은 우리 측에서 채워야하는데 하례객이 적으면 체면도 말이 아니다.
식장에 도착하니 신랑 신부는 예복을 차려입고 대기실에 있는데 훤하다. 신부는 드레스를 입고 화장을 하니 다른 사람 같이 아름답다. 하객을 맞이하기 위하여 우리부부와 신랑인 혁진이가 같이 서 있는데 내가 봐도 신랑이 잘 생겼다. 예복을 입고 서 있는 폼이 내 아들이 이렇게 잘 생겼구나 하고 다시 보게 된다.
내 친구들이 신랑을 보고 '얘가 네 아들이야?' 하며 '씨가 틀린 것 아니야' 하며 농을 한다. 신부 댁도 갓 결혼한 장남 부부와 부모가 같이 서서 하객을 받는데 화기에 차고 보기에 좋다. 양가 모두가 조그만 불만도 보이지 않고 즐겁고 화기에 찬 모습이 행복한 결혼식이라는 것을 입증해 준다. 시간이 되니 하객이 몰려드는데 즐거운 비명이 난다.
주례는 동기생이고 동대 부총장인 최박사가 봤는데, 신랑 아버지와 나는 월남에서 생사를... 신랑은 동대 서울 부총장의 수제자로.. 신부는 토론토 대학에서 우리나라에는 없는 경찰심리학과를 졸업한 유망한 인재……. 라며 보태서 자기대로의 능력을 과시한다. 아희들이 최총장 아파트에 아이스 와인 갖고 찾아간 것이 효과를 발휘하는 걸가.
기본 예식이 끝나고 케익 커팅을 하는데 신랑 신부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났는데 이렇게 멋있는 한 쌍이 나타날 줄은 몰랐다. 하객에게 돌아가며 인사를 하는데 멋있는 한 쌍이라고 여기저기서 탄성이 나온다. 이렇게 멋있는 애들이 여태껏 왜 후줄근하게 차려입고 다녔을 가.
예식이 진행하는 동안 신랑 신부가 계속 벙긋 벙긋 웃는다. 소영이 어머니가 딸에게 신부가 너머 웃는다고 핀잔을 주어도 즐거운 듯 계속 웃으니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다.
사회는 혁범이 친구가 보고, 식이 끝나고 멘트를 하는데, 자리가 없어 서 계신 하례객은 아래층에 식사를 준비했으니 이용해 달라고 한다. 뒤를 보니 하객이 자리가 없어 서있는 사람이 여럿이다.
계약한 3백석에 여유 이백 석을 다 채우고 모자라는 거다. 식장과 식당을 각기 정하면 하객들은 식장에는 안 들어가고 바로 식당으로 직행을 하여 식장이 썰렁한 것을 여러 번 보아 나는 호텔같이 테이블에 앉는 예식 홀을 택하여 하객이 식장에서 나가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식사를 하도록 테이블을 선택한 것이, 같은 손님이라도 많게, 더 성황리에 보이도록 한 점이 성공을 하였다. 식장이 꽉 차 하객이 많은 것이 기분이 좋다. 비좁은 좌석 구석에서 아는 척을 하고 손짓을 하는데 좌석이 협소하여 하객에게 미안한 감이 든다.
혁범이의 눈부신 행동이 나타난다. 예식이 시작할 즈음 하객이 별안간 모이니 접수를 받는 노서방이 어리벙벙해 있을 때 추가 방명록을 갖다 주고 해결하며, 식사 때도 친구들을 동원하여 밥그릇 숫자세고 음료수 첵크하고 예식장의 전체적인 관리를 하는데, 잔소리 할 것도 없이 일사철리로 잘해 나간다. 내 그랜져로 꽃을 달고 공항까지 신혼부부 드라이브 까지 하며 형 부부의 허니문 배웅을 하였다. 나중에 과속 딱지가 날라 왔지만 문제 될게 없다.
결혼식은 만족할만하게 잘 치렀다. 식장 비용은 우리만 혼자 부담한다면 사돈의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 참여의 의미로 백만 원만 부담하라고 하고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하니 마음도 홀가분하다.
신혼부부의 허니문 여행은 자기들이 푸켓으로 정하고 여행사를 끼지 않고 독자적으로 갔다. 자기들은 즐겁게 잘 갔다 왔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론 호텔에서 뒹굴다 4발이 오토바이 하나 타고 왔으면서도 재미있고 좋았단다. 자기들이 좋다고 하니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이 나도 좋게만 느껴진다.
3박4일 허니문 여행을 끝내고 귀국하여 2층에서 쉬게 했다. 아침에는 시부모에게 인사하는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시집와서 처음으로 시부모 식사 만들어 준다고 소영이 혼자 부엌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하는 것을 집사람이 안쓰러워 하면서도 의식적으로 지켜보고 새색시가 혼자 만든 식사를 얻어먹었다. 일년간은 집에서 품에 안고 싶으나 3일만에 카나다에서 둥지를 틀기 위하여 신혼부부가 출국하였다.
어려운 고비도 많이 있겠지만 참고 열심히 일생동안 잘 살아라. 우리 시부모는 너희들 결혼이 너무도 좋단다.
2. 혁범이 최초 해외 출장.
혁범이가 삼성에 입사하여 수원으로 열심히 출근하더니 자기는 유럽쪽 핸드폰의 영상 통신업무라 유럽을 출장가야 하는데 출장가서 고생하니까 될 수 있는 대로 안 가려고 버틴단다. 결국은 금년 유럽으로 출장을 가게 되여 정말로 고생을 실컷하겠구나하고 자식걱정이 앞선다.
혁진 이와 소영이가 카나다에서 소영이 오빠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귀국한 둘을 데리고 에버랜드에 놀러갔다 와서는 바로 로마행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갔다. 집사람은 혁범이 출장가서 매일 밤새며 고생만 한다고 무척 근심스러워 간장약을 챙기고 부산을 떨었다.
로마에 두 달 이상 출장 갔다 오더니 자신감이 붙었는지 이제 가능하면 출장을 가겠단다. 출장 갔다 오니 출장비도 제법 세이브도 되고 괜찮았던 모양이다. 로마도 제대로 구경을 못한 것을 보면 시간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나 업무에 충분한 자신과 더불어 부외로 출장비 계산이 제법 두둑이 떨어지니 맛이 솔깃한 모양이다. 우리 부부는 출장 갔다 오면 얼굴이 반쪽이 될 거라던 우려가 가시고 나름대로 귀국할 때 사 가지고온 선물에 시선을 쏟는다.
형수 결혼선물이라고 이태리에서 사온 명품 페레가모 핸드빽도 내논다. 이제 사회인이 되였다고 한몫하는구나 하고 생각되니 대견하기도 하다.
가을에 이태리 북부 토리노로 또 출장을 간단다. 이젠 집사람이나 나나 출장을 가서 고생을 하여 얼굴이 반쪽이 된다는 생각은 아예 없어지고 저 약삭빠른 놈이 또 출장비 챙기려고 안간힘을 쓰겠구나하고 미소 짖는다.
자식이 잘나가는 삼성전자에서 그것도 핸드폰 영상통신 유럽 쪽을 맞고 있으면서 자기 업무를 어렵지 않게 원만히 잘 해결해 나가니 부모로서 친구들에게 자랑할만하고, 뿌듯한 마음이 너머나 기쁘다.
3. 장모님 LA에서 사망. ; LA의 호상. LA의 장례와 길상사 49재
콩가루 같던 집안이 장모님이 돌아가시며 명령이라도 한 듯 장례기간동안 엉킨 실타래가 한번에 풀리듯 말끔히 풀려 각 형제의 가정이 정상으로 돌아오니 돌아가신 분의 홍복이다.
LA의 호상
2006. 11월 16일 목요일 밤 11시 30분.
전화벨이 울리며 LA에 있는 처제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전화 받는 집사람도 흐느끼며 눈물을 글썽이면서 ‘차분하게 말해봐’하는 소리가 매우 급박하게 들린다. LA는 새벽 6시인데 일어나 엄마를 보니 숨을 안 쉬고 입에 거품이 있다고 하며, 울기만 한다. 구급차로 병원에 가는데 구급차에 보호자를 태우지 않아 그 시간에 전화를 거는 거다.
장모님이 혈압이 높아 뇌일혈로 쓰러진 것 갈다. 일단은 서울에 비상이 걸렸다. 형제들 간에 연락을 취하는데 문제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모든 것은 장남이 시작해야 하는데, 현재 상황은 장남인 해명이를 빼놓고 다 자유롭게 연락을 취한다.
해경이와 금전문제로 연락을 끊은 게 발단이 되여 몇 년간 형제 발걸음 없이 해명이 혼자서 차례와 제사를 지내는 상황이니 각자의 마음은 아주 굳어져 있는 상태다. 별것도 아니고 큰돈도 아니며 금전은 장모 돈으로 해결 됐는데도 그 잘하는 전화도 안하고 왕래도 끊기니 형제들 간에 냉담한 관계가 지속되어 콩가루 집안이 되여 가고 있었다. 내가 해명이와 술 한 잔하고 풀어 갈려고 전화를 해도 내전화도 안 받는 것을 보면 집사람이 해경이와 한통속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모양이다.
11월 17일 금요일 아침.
미국 병원에선 응급실에서 산소 호흡기로 약간의 호흡은 소생한 모양이나 이미 뇌에 출혈이 있다는 연락이다. 해정이는 ‘언니 빨리 미국에 와’ 하며 울지, 여기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우왕좌왕하고 여기저기 전화만 건다. 미국에 바로 출국하려하니 공교롭게도 미국비자가 열흘 전에 만기가 되여 다시 신청해야 하는데 요즈음 미국 비자 받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비자가 언제나 나올지 도저히 가늠할 수 없으니 더욱 애가 탈 뿐이다.
삼성이주공사를 하는 동기생 은희목에게 비자관계를 문의하니 호적등본 주민등록등본, 초본 10년간 출입국 사실증명을 떼어서 3시까지 오란다. 미국에서 팩스로 온 병원 진단서를 들고 집사람과 같이 여권을 갖고 종로구청 앞의 은사장을 찾아가니, 이 친구 비자 서류 만드는 게 어찌나 굼뜬지 몇 십 년을 이 직업을 어떻게 끌어왔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미대사관이 문을 닫은 오후 4시에 에멀전시라며 닫은 문을 열고 미국 영사 앞에까지 가서 인터뷰하고 컴퓨터에 지문날인까지 했는데 미 본토의 컴퓨터가 닫혀 도저히 해주고 싶어도 안 된단다. 내일, 모래는 토, 일요일이니 미국 대사관의 휴무라 월요일 아침에 오란다. 내일 비행기로 미국 가려던 계획은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다.
은사장을 원망하며 집에 오니 미국의 해정이 처제는 산소 호흡기를 떼는데 자기가 어머니를 죽이는 것 같다고 통곡을 한다. 이미 식물인간이 되여 병원에서도 더 이상 손쓸 이유가 없다고 선고를 하고 산소 호흡기를 떼어도 괜찮으냐고 처제에게 물으니 딸의 입장에서 산소 호흡기를 떼라고 이야기할 때 얼마나 가슴이 쓰라렸겠는가. 이런 때에 언니가 와서 상의하고 결정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에서 막내가 혼자 중책을 지고 일을 하는 것이 안쓰럽기만 하다.
집사람은 산소호흡기 떼는 것은 잘 한일이라고 위안을 하니, 서로 흐느끼는 울음소리만 수화기에서 오간다. 막내 처제가 험한 말이 오고 간 큰오빠 해명이도 전화로 불러 귀에 대주고 해룡이 목소리도 들려주고, 산소 호흡기를 뺀 30분후에 저 세상 사람이 되였다. 향년 77세. 이 세상 살만큼은 산 나이다.
주운선 결혼식
맏상주인 해명이 큰딸 운선이는 내일 토요일 1시에 광주에서 결혼식을 올리니 해명이 마음은 어땠을 고. 며칠 먼저 돌아가시면 운선이 결혼식도 연기할 뻔 했다. 해명 이에겐 운선이나 신랑 집 식구에게 어머니 돌아가신 일을 비밀로 붙이게 하고 결혼식을 진행시키라고 하니 슬픔과 행복을 마음속에 감춰두고 행동해야하는 운선이 부모의 심정은 오죽하겠나. 부모는 아희들이 없는 곳에서 미여지게 우는 수밖에 없다.
11월 18일 토요일.
집사람은 비자가 안나온 덕분에 오늘 운선이 결혼식에 참석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해명 이는 식구들한테 청첩장도 안 돌리고 연락도 안하고, 해명이의 행동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지만 당하는 우리의 마음은 참으로 형용하기 어려운 만감이 교차된다.
해룡이가 형에게 전화하니 너도 안와도 된다, 고 하니 어떻게 하느냐고 집사람에게 물으니 네가 어린애니, 마음이 불편해서 그렇게 이야기한 거니 너는 가야지. 해경이는 말할 것도 없고 큰 동서도, 자기에게도 연락을 안 한다며 서운해 하면서도 부주나 한다고 어제 정릉 해명이네를 다녀왔다.
분위기도 그렇고 하여 나는 안가고 집사람에게 50만원을 축의금으로 주며 그래도 장자니 결혼식 끝나고 어떻게 장례를 치를 것인지 상의하고 오라고 집사람을 새벽에 광주에 가는 결혼식 대절뻐스가 있는 강남 역까지 바라다 주었다.
집 사람이 결혼식에 참석하는 바람에 해명이와 대화를 잘 풀을수 있는 기폭제가 되였다.
결혼식장의 친척은 집사람과 해룡이 부부, 처음 보는 운선이 이모들이 모두다. 광주에서 했으니 망정이지 서울에서 했으면 신부 집 하객이 얼마나 초라했겠나.
화순이 고향인 신랑은 얼굴이 아주 티 없이 맑고 신랑 부모도 조촐하여 운선이가 시집을 잘 간 것 같다고 집사람이 전한다. 운선이 얼굴도 치장하니 아주 예쁘고 식장도 올케 잘 치렀단다. 두 젊은이 들이 일생동안 아기자기하게 잘 살기를 기원한다.
11월 19일 일요일.
아침에 로스앤젤레스의 백서방과 통화를 하였다. ‘막내사위가 이번 대사에 맏사위와 맏상제 노릇까지 다 하느라고 고생이 많다’고 하니 고생은 무슨 고생이냐고 당연히 해야 할일을 하는 것이라며 시원히 대답한다. 미국에서 어머니 친구들 모시고 장례도 치를 거란다. 실상 여기서는 장례를 어떻게 할지 결정도 안 났을 때다.
해룡이가 해명이에게 장례문제 상의하러 간다고 하는데 큰어머니가 끼어들어 집사람보고 가보란다. 집사람이 뛰어 다닐 수 있는 형제들 중 제일 연장자고 언제나 집의 문제 해결에 중심에 있었으니 모든 문제를 푸는데 관여할 수밖에 없는 형상이다.
운선이가 전화를 해 ‘고모는 너희아빠 만나러 정릉가고 있는 중’이라고 이야기하니 운선이는 할머니 장례 문제로 복잡한 사연 풀러가는 줄은 모르고 자기 결혼식 후에 자기 집 축하 방문인줄 알겠지. 목소리는 또랑또랑하게 맑고 활기차다. 필리핀 보라카이로 5박6일 오늘 오후에 신혼여행을 떠난단다. 행복하게 잘 갔다 와라.
집사람과 해명이 부부와 해룡이 넷이서 앉아 형제들 간의 반목을 어머님 돌아가신 이 기회에 모두 다 풀자고, 마음을 열어놓고 해결하자고 하여, 서로 이야기하며, 원통하여 울기도하고 감격하여 울기도 하며 모두다 원은을 풀고 마음을 열기로 하였다. 누구나 자기가 잘못하였다고 하면 일은 금세 풀리는 법이다. 결과는 집사람이 흡족할만한 답을 듣고 안심이 되는 모양이다.
집사람 왈 ; 어머니가 귀국하여 장자인 너희 집에 가려고 하여도 너희 부부가 냉랭하여 있을 수 없고 딸네 집 전전하는 것도 볼상 사나웠다. 어머니 돈으로 너와 해경이 문제를 해결하였는데 너희들은 여태껏 반목하고 사느냐. 맏상제인 네가 어머니 장례를 치러야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해명이 답 ; 어머니가 귀국하면 내가 모시려 했다. 해경이는 아직껏 우리 집 가등기를 풀지 않았다. 장례는 미국에서 치르고 화장하여 유골이 귀국하면 그때부터 내가 주도하여 49제를 지내고 제사도 봉양하겠다.
집사람이 가등기 문제는 그 당시 네가 큰 부채를 졌다고 들어 너희 집을 친척이 가등기하여 네 재산을 보호할 목적으로 내가 해경이보고 가등기 하라고 협조한 것이지 너를 애먹이려고 한 짓이 아니다. 라고 설명하였다.
집사람이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풀고 해명이네 집에서 개운하게 나오는데 운선 어미가 ’이제 어머니도 돌아 가셨으니 형님을 어머니 같이 생각하겠다.’고 했단다. 이 말에 집사람은 마지막으로 감동한 모양이다.
집사람이 집에 와서 해경이에게 가등기 문제를 꺼내니 해경이는 이미 풀어준 것으로 알고 있다. 노서방에게 물어 아직 안 풀어 주었다고 하니, 금세 제 남편에게 이 새끼 저 새끼하며 산다 안산다 야단이다. 어제까지 해명이 말만해도 게거품을 품으며 나쁜 놈 다시 안본다고 하더니 지금은 노서방에게 ‘내가 오빠하고 싸움한다고 말리지는 못할망정 여태 가등기를 안 풀어줘’, 하며 길길이 뛴다.
저녁에 노서방이 우리 집에 오겠다며 장모님 시신이라도 있을 때에 모든 문제를 풀겠다고 온단다. 해룡이가 노서방과 같이 와서는 문제를 푸는 방법으로 우리 집에 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해명이네 가서 서로 화해하겠다는 것이다.
노서방은 우리 집에 와서 두서없이 실수하면 안 된다고 메모한 용지를 들고 와 이야기 하는데 집사람은 연신 ‘고마워’ 라고 말한다. 노서방은 아까 해경이 한태 그런 불벼락이 떨어지면 칼부림 날 텐데 잘 참고 우리 집에 왔을 때는 얼굴에 오히려 화기가 돌아 어느 때보다도 얼굴이 환하다.
해룡이와 노서방이 해명이네로 떠나는데 유성이 아빠가 해명이네 집에 가고 있단다. 해명이와 노서방 가운데서 유성이 아빠는 그 특유의 언술로 양쪽을 다 어우릴수 있는 사람이니 분위기 좋게 화해의 장이 될 거다. 밤 10시경에 잘 됐다며 지금 넷이서 맥주한잔하고 있는 중이란다. 자정이 다 되어서 잘 끝난 모양이다.
해룡이는 차를 몰고 어제 광주 결혼식 갔다 평촌 해경이네 들려 우리 집에 오고 오늘은 인천 계양의 자기 집에서 평촌 해경이 집에 들려 노서방 데리고 우리 집 거처 정릉 해명이네서 화해하는 것 보고 평촌 거처 계양까지, 끝에서 끝으로 차를 몰고 다니느라고 고생깨나 했지만, 마음은 홀가분 할거다.
11월 20일. 월요일.
아침 새벽부터 집사람은 미국 갈 짐 싸랴 전화하랴 부산이다. 아침 9시 반에 미국 대사관에 가서 비자를 찾으러 집사람이 들어갔는데 비자 받아 바로 나온다던 집사람이 한 시간 반이 되도록 안나온다. 짜증을 내며 승용차에서 기다리던 나는 늦게나온 집사람이 자기 이름을 잘못 기재하여 다시 만드느냐고 시간이 걸렸다고 은사장을 원망한다. 은사장 사무실을 들르니 은사장이 금요일 날 준 수수료 10만원을 다시 돌려주어 실랑이를 하다 그냥 받아 나왔다.
처음엔 같이 미국 가려고 집사람과 둘이 비자신청 했는데 긴급 비자는 유효기간이 1개월 밖에 않되 집사람만 가니 억울하게 비자 피만 날렸구나. 라고 생각 했는데, 내 여권에 찍힌 날짜를 보니 5년이라 다행이다. 빨리 집에 가자는 것을 해룡이가 해명이와 같이 대사관 앞에 있다고 만나고 가자고 차를 돌려 대사관 앞에 가니 해경이 까지 있다.
여권이 없는 해경이와 해룡이의 긴급여권을 사망진단서를 첨부하여 종로구청에서 만들고 비상 미국 비자를 신청하러 해명이가 데리고 온 것이다. 여권관계는 해명이의 주특기다. 해경이는 외무부 국장을 통해 만든다더니 생각지도 않게 해명이와 같이 서있다.
해명이와 해경이가 같이 있는 것을 보고 둘이 금세 화해를 했나 의아하다. 집사람은 핏줄인데 서로보고 통하면 금세 화해가 되는 게 아니냐고 한다. 서로 길길이 뛰던 두 사람이 해명이는 어젯밤에 노서방하고 술 한 잔하고 아침에 느닷없이 해경이와 둘이 붙어 있으니, 화해할 시간도 없었는데 핏줄이라 한번에 격한 마음이 녹아내린 모양이다.
세 사람을 태우고 식사하러가다 해룡이 비자가 나오는데 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해명이가 잔고 증명이 필요하다고 하여, 집사람이 지금 가서 바로 잔고증명하라고 은행에 입금시켜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식사는 자기들 끼리 하라고 하고 비자피 내라고 신한은행에 셋을 내려놓고, 우리는 집으로 와서 해룡이 잔고에 입금 시키느라고 왔다 갔다 했다.
은행에서 오자마자 마지막 짐정리를 하고 해경이가 보관해온 영정과 수의 한 셋트를 한 빽에, 입을 옷을 한 빽에 들고 승용차에 오르니 오후 4시 반 아시아나 LA직행 202편에 탈 수 있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다. 공항에서 집사람 손을 꼭 잡아주고 출국장으로 들여보냈다.
해경이와 해룡이는 내일 밤 8시 LA직행으로 간단다.
아침에 막내누이에게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집사람이 오늘 미국 간다고 하니, ‘어쩜 고생하지 않고 그렇게 돌아가셨어, 자식들 고생 안 시키려고 행복하게 돌아가셨어’ 라고 한다. 장사 지내기전에 자식들의 얽히고 설킨 문제도 다 해결하고 참 편안히 잘 가실 거다.
머피의 법칙이 생각난다. 우리 비자 내려고 은사장을 찾아갔는데 서류가 늦게 되는 바람에 다음날 출국 못하여 운선이 결혼식을 보게 되고, 월요일 비자 찾으러 갔다 은사장이 집사람 이름을 잘못 기재하여 늦게 나오는 바람에 해룡이 잔고증명을 하게 되고, 비행시간을 맞추어 가니 LA에 아침에 도착하면 미국은 월요일이라 검시관이 나와 검시를 한다니 은사장이 잘못해 준 것이 오히려 우리에게는 모든 일을 순조롭게 풀어가는 가교 역할을 해준 셈이다. 나쁜 것을 꼭 나쁘다고만 할 일이 아니다.
11월 21일 화요일.
아침에 집사람이 LA에 도착했다고 연락이오고 해룡이 해경이는 밤 8시비행기 타려고 출국장를 빠져 나갔다.
이제 처갓집에 걸린 감정의 문제는 풀어지고 지금은 태풍이 지나가고 조용한 어떻게 보면 불안한 시간이다. 태풍 전야 태풍 후야가 한번에 닥치는 꼴이다.
11월 22일 수요일
아침에 LA에서 전화로 지금 해룡이와 해경이를 공항에서 픽업하여 수의 갖고 검시관 만나러 가는 중이란다. 어제가 LA.는 월요일인데 미국은 추수감사절 연휴가 끼여 검시관까지 휴무란다. 집사람은 이 휴무가 해룡이와 세 딸이 같이 검시에서 장례까지 치르라고 보살핀 거란다. 집사람이 금요일 비자가 나와 미국을 갔더라도 지금까지 아무 일도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미국은 검시관이 검시를 하기 전 까지는 시신을 건드릴 수 없단다.
장례는 11월 23일, 미국시간 11월 22일 6시에 장례 치르기로 했단다.
LA의 장례와 길상사 49제
2006년 11월 23일. 목요일.
장모님 장례식
11월 23일, 미국시간으로는 11월 22일 저녁 6시에 장모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장례식에 미국에 있는 해정이 막내처제 부부는 나름대로 부모의 영결식을 멋있게 치르고 싶었던 모양이다. 자기들 생각에는 장례식에 미국의 친지들이 많이 올 것으로 예상하고 꽃다발도 여러 개 해 놓고 관도 좋은 것으로 하려는 심정이다.
장모님은 여행비자로 출국하여 미국의 막내딸 해정이네 집에서 기거하며 딸의 가게와 집을 오가며 뒷바라지를 해 주었지만, 주위에 장례식에 올만한 친구들을 새기고 생활한 것은 아니다. 딸의 입장에선 미국에 있는 시부모나 자기들 친구가 왔을 때 보란 듯이 장례를 치르고 싶었겠지만 화장하여 한국에서 제를 지내는데 과분할 필요는 없었다. 진정한 목표가 어머니를 위한 진정한 마음으로 성의껏 멋있게 장례를 치르려는 마음과, 자기들의 체면을 앞세워 번듯하게 장례를 치르려는 마음과는 차이가 있다. 장례비용을 도맡아서 한다면 문제는 다르다. 우리의 마음은 미국에서는 간략하게 치르고 한국에서 모든 예식을 갖추어도 두 번씩 치르는 장례니 고인에 대해 조금도 결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현지의 상황은 실용적인 장례를 치르겠다는 집사람을 다른 형제들이 견제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꽃다발도 형제의 이름으로 6개를 세워 놓겠다고 하여 집사람과 2개로 낙착을 본 모양이다. 한국에서는 상제의 이름으로 꽃다발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일이다. 화장할 관도 고급으로 하여 미국식의 장례로 관 옆의 꽃도 빨강 꽃으로 장식하여 흰 꽃으로 장식하는 한국과는 달리 호화롭게 치장을 하여 식장을 번듯하게 차려놓고 장례식을 2시간여 동안 치른 모양이다.
한국같이 장례식장에 시신을 놓고 조석으로 상식도 지내지 않고, 22일 미국에 가서 달랑 2시간 동안 시신 앞에서 장례를 지내고 24일 저녁 화장한 유골을 인수할 때까지 상제들은 상식한번 안 올리고 집에만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이후도 시신이 귀국하여 길상사에 올 때까지 상식은 한번도 안 올리고 미국식으로 했으니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장례식장 조문객은 집사람 미국에 있는 대학 친구 두 명에 백서방 친구 두어 명과 해정이 미국 시집식구 합하여 열댓 명이 고작인 것을 보면 식장 차릴 때의 예상 인원과는 너머나 빗나갔던 것이다.
장모님 병원관계는 해정이 시동생이 한의사라 매우 보탬이 되 모양이고, 해정이 시부모는 파격적으로 협조를 한 것으로 보면, 우리가 생각하고 해정이가 우리에게 이야기 한 것과는 매우 상이 하여, 매사는 양쪽을 다 봐야지 한쪽말만 들으면 오판하기 십상이다.
미국시간 11월 24일. 한국은 23일.
화장한 유골을 갖고 와 목사만 즐비한 LA에서 스님을 모셔와 염불을 하였단다. 스님에게 백서방이 300불 팁을 준 것이 발단이 되여, 지금까지 해정이가 집사람에게 품어왔던 불만이 폭팔한 것이다. 스님에게 줄 돈을 늦게 준다고 하니 스님 인상이 일그러졌다고 해정이가 집사람을 큰소리로 공격을 하고 동생들은 해정이를 옹호하고 집사람이 고립되어 참느라고 밤새워 울면서 양주 한 병을 혼자 다 마셨단다.
그 성질에 큰일을 앞에 놓고 대사를 그르치지 않으려고 참고 있었으니, 조금도 못 참는 성질의 집사람 심정이 오죽했겠는가. 마음의 상처가 너머나 깊어 귀국하여 집에 있으면서도 기력을 며칠동안 찾지 못한다.
11월 28일
장모님 유골 귀국
저녁 6시 인천공항에 장모님 유골을 갖고 집사람과 해정이 까지 4남매가 귀국한단다. 공항에 가니 해명이와 노서방 수진이 까지 와서 기다렸다. 저녁6시에 온다는 비행기가 연착하여 8시 10분에 도착한 유골을 갖고 길상사에 함께 가서 보관하였다. 유골을 영정을 앞세워 나오는 줄 알았더니 짐 보따리같이 들고 나온다. 공항에서 ‘저년이’ 하며 집사람이 해정이를 가리키는데 분을 삭이지 못해 치를 떠는 모습이 전해온다.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에서 예식이 끝나고 저녁에 식당에서 내가 해룡이 보고 네가 형 대신 미국에 가서 장사를 지내고 왔으니, 형에게 장사는 이러이러하게 지냈고 경비는 이러이러하게 썼다고 간략히 이야기 하면, 그 다음 부터는 모든 일을 장자인 해명이가 맡아서 진행하라고 말해줬다.
미국 경비이야기 하는 중에 해경이와 해정이의 표정과 반응이 별로 좋은 기색이 아니다. 귀국한 집사람에게 대략 이야기를 듣고 처제들의 행동을 보니 나도 마음이 개운하지가 않고 본격적으로 나서서 처가일 을 대들어 할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
11월 24일. 첫제.
장모님이 돌아가신지 일주일이 됐다고 미국에서 유골은 오지도 않았는데 길상사에서 49제중 첫제를 올린다고 한다.
절에 열심히 다니던 장모님에게는 절에서 49제를 올리는 것은 잘한 노릇이다.
옛날에 고급 요정 집으로 유명한 대원각을 여자 주인이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법정 스님에게 통째로 시주하여 이름을 길상사로 하고 불교 조계종의 말사로 등록을 한 절인데, 성북동 도심 속의 고급주택가 안의 조그마하지만 운치 있는 멋있는 절로 변모해 있었다. 아침10시에 첫제를 지낸다고 하여 갔더니 고3 수능시험 합격 기원하는 사람도 법당에 들어와 같이 지내는데, 같이 제를 지내주니 감사하기도 하고 멋쩍기 도하다.
해명이 부부와 해룡이 댁 형진이 아빠가 참여하고 노서방은 집에서 자다가 못 왔다. 제를 지내는 상제가 적은데 합격 기원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얼마나 쓸쓸했을 가.
12월 1일. 2제.
길상사에서 고인의 유골이 미국에서 귀국한 상태에서 10시에서 부터 정오까지 2시간 동안 2제를 올렸다. 모처럼만에 온 집안 식구가 모였다. 뿔뿔이 흩어져 험담과 싸움만하더니 고인의 복으로 모든 식구가 모여 우리가 언제 싸우고 다퉜냐는 듯 적의가 하나도 없이 평온한 상태로 식구들이 대화를 나눴다. 처갓집 식구가 화기에 찬 모습으로 모이기는 정말로 몇 년 만인지 기억도 잘 안 난다. 큰집 식구는 하나도 안 왔으니 빼고. 2제가 끝나고 절에서 점심 후에 모두 해명이 집으로 가서 차 한 잔씩 했다.
큰어머니가 해정이도 미국에서 왔으니 내일 저녁을 산다고 해명이 형제자매만 오란다. 돈이 아까워 사위는 빠졌다. 7순때도 사위 빼고 또 그런짖 한다고 불쾌한 내색을 하였다. 큰집으로서의 행세나 나이 값도 못하는 것 같다.
12월 8일. 3제.
절에서 제를 지낼 때 49제 하루만 지내기도 하나 장모님은 49제를 7번 다 절에서 지내기로 하고 비용은 5백을 해명이가 혼자 지불 하였다. 식구들의 불화의 중심이었고 장남으로서 모든 잘못과 미안함을, 혼자 비용을 지불하여 속죄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불한 것 같다. 식구들의 응집이 안 되어 그런지 부의금을 형제자매가 자기가 받으면 장남에게 귀속하여 장례비용으로 쓰지 않고 자기 주머니에 들어가는 것 같다. 공식적인 부의금도 상주에게 안간다. 미국과 한국에서 치루고 전통적인 유교방식도 아니고 불교식으로 하였다고 하여도 형제자매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다.
미국 여비는 간사람 각자가 해결하기로 하고, 경비는 만 불 갖고 간 중에 2천불은 갖이고 오고 2천불은 시동생이 고생했으니 알아서 쓰라고 해정이 주고 6천불은 미국에서 장례비용으로 썼단다. 어머니 주머니로 남겨둔 천3백 5십 중에서 남은 3백 5십은 해룡이 결혼식 비용으로 충당 할 거란다.
미국에서 들어온 조의금은 모두 미국의 해정이에게 주고 2천불을 추가로 지급하였으니 해정이는 장례식때 한푼도 손해 본 것이 없다.
나는 식구들에게 이제 삼칠일도 지났으니 고인에 대하여 너머 집착하거나 슬퍼하지도 말고 자기들의 생업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라고 하였다.
12월 15일. 4제.
길상사에서도 이렇게 7제를 다 지내는 집은 별로 보기 힘들을 거다. 4제에는 나는 참석 안 하고 집사람만 참석 했다. 전 주일에 집사람이 보기도 싫다던 해정이가 미국을 들어갔다. 보기 싫다고 하면서도 해정이 한국에 머무는 기간동안 쫓아다니며 이것저것 보살피고 공항까지 바양을 나갔다. 막말을 나눴던 해명이는 아예 에스코트하며 안양으로 남해 관광까지 자기 차로 상관같이 모시고 다닌 모양이다. 나는 집사람보고 불편하면 해정이에게 과잉친절은 하지 말라고 하였으나, 해정이가 미국에 들어가면 언제 볼지도 모른다고 억한 감정을 있는 대로 참으며 자매로서 할 도리를 다하려고 애쓰는 것을 보면 안쓰럽기 까지 하다.
12월 22일. 5제.
49제 모시는 집안이 있어 같이 5제를 지내게 되였다. 여기는 기제 지내는 사람이 있어도 같이 지내 개인별로 따로 따로 지내는 줄 알고 오면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나 손님도 별로 없는데 같이 지내면 오히려 사람이 많아 더 좋은 느낌이 온다. 오늘은 동짓날이라 동지제 지내려고 일반 신도들이 많이 와서 같이 참배해주니 참으로 기분이 좋다.
2006년 12월 29일. 6제.
눈도 내려 스키장에 가려고 했더니 6제가 걸려 집사람과 길상사로 향했다. 이번 제때마다 해명이 댁이 무척 고생하고 생색도 못내는 것 같아 미안하고 안쓰럽다. 이번에 매 제를 지내며 해명이가 본 모습을 찾으며 자기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 같다. 길상사 공양식당은 참 깨끗하고 일반 음식점보다 못지않다. 식사도 가난한 절 같지 않고 반찬도 정갈하게나와 점심식사 하는데 손색이 없다. 전체적인 신도들의 교양이나 경제력도 상당히 있게 보이며 자원 봉사하는 보살들도 상당한 상식이 있어 보인다.
제가 끝나고 여느 때와 같이 식사하고 해명이네 집에 가서 차 한 잔하고 나는 어제 내시경 검사한 결과를 보러 한강성심병원 소화기내과를 찾아갔다. 한강성심병원이 우리 아희들 초등학교시절 집사람이 간호과장(부장)하던 병원이다.
2007년 1월 5일. 7제. 49제.
장모님이 돌아가신지 벌서 7제인 49제가 돌아왔다. 49제는 9시부터 정오까지 한다. 혁범이 까지 우리 세식구가 길상사에 도착하니 조금 시간이 있어 법당 뒤쪽을 거닐어 보니 도심 속에 이런 정취를 느낀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느낌이다. 옛날 요정 했을 때의 별채와 방갈로가 있는데 계곡속의 정자같이 과연 유명한 요정 이였었구나 하고 감탄해 마지않는다. 옛날에 고급술을 먹으며 기생들과 놀던 장소가 지금은 이 별채들이 스님이 도를 닦는 참선도장이 되여 조용하니 참으로 인생 역전되는 것 같이 감회가 새롭다.
길상사의 정문에는 길상사(吉祥寺)라는 표지 외에 ‘(사)맑고 향기롭게’ 라는 사단법인 표지가 있어 어리둥절하게 한다. 조계종 산하의 절로 되였지만 이 절 안의 모든 일은 맑고 향기롭게 라는 사단법인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운영하는 것이 아니까? 이름도 좋고 느낌도 좋다.
49제를 지내는데 모든 식구가 다 왔다. 이제 갈갈이 찢어졌던 식구가 봉합이 된 것 같다. 49제를 지내고 길상사에서 마지막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고인의 유골을 모시고 양평의 무궁화 공원묘원으로 가서 남편인 장인의 묘에다 유골을 뿌렸다.
부모의 흔적을 없애자는 자식
고인의 유골이 귀국한 후에 해경이네 집에서 이후의 장례절차를 상의 하였다. 해경이 해정이 해룡이 삼남매는 고인인 어머니의 화장한 유골을 산에다 뿌리고 아버님 묘소도 파헤쳐 유골을 화장하여 산에다 뿌려 버리자고 강력히 주장한다. 잘 있는 아버님 묘소도 파헤쳐 화장하여 흔적도 없애자는 주장에 나는 어안이 벙벙했고 처갓집 일에 앞에 나설 것은 아니지만 최악의 사태는 막아야 갰다는 결심을 하였다.
맞상제인 해명이가 아직 식구간의 갈등에서 못 벗어난 시기라 감정을 억누르며 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을 보고 다행이라고 느꼈다. 이후의 모든 일은 해명이가 할 것인데 자식이란 명분으로 차례한번 안 지내며 조상의 흔적을 모두 지워 없애자는 것은 몰이해에서 나온 소치다. 수목장, 산이나 바다에 뿌리기등 잡다한 의견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는 아버님 산소에 유골을 뿌리고 아버님 산소는 원래대로 보존하기로 결론을 지었다. 그나마 다행이다.
화장한 유골을 아버님 묘소에 합장해도 좋으련만 왜 그렇게 아버님까지 흩트려 없애려고 애쓰는지 이해가 안 간다.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님이 아버지와 같이 화장하여 없애버리라고 하였다고 하나, 이는 자식들이 서로 분쟁을 하고 이목을 하여 부모님 봉양하기는 싹수가 노랗다고 보아, 아예 자식들의 신세를 사후에도 지지 않겠다는 부모의 의지지, 자식들이 사후에도 잘 공양하고 사이좋게 산다면 애초에 그런 말이 나왔겠나. 자식들이 생전에 자기가 한 행동은 생각 안하고, 부모의 본 뜻도 모르고 왈가왈부하는 것이 보기 안 좋다.
행복하게 돌아가신 장모님
돌아가신 장모님은 참 행복하게 돌아가고 49제까지 날씨도 좋아 복 받은 분이다. 미국에서 돌아가실 때 는 잠자듯 자고 일어나니 돌아가시고, 장례는 미국에서 빨간 꽃으로 화려한 것을 좋아하는 분이 호화롭게 치르고, 한국에서는 자식들 간의 분쟁을 순식간에 불식 시키고, 귀국하여 절에서 제를 지낼 때마다 수능기원이다 기제사다 49제다 동지 제다 하며 불제자가 각 제에 많이 참석하여 쓸쓸하지도 않고, 정작 49제날은 춥고 눈도 많이 온다고 하여 근심 하였는데, 날씨도 포근하고 눈도 오지 않아 참으로 마지막 까지 복 받은 사람이다.
전통 유교식은 돌아가시고 3년상을 치르다가, 시대가 급속히 발전함에 따라 1년상으로 변했는데 지금은 1년도 못 참아 3.5제 지내고 불교의 49제를 도입하여 49제인날 훌훌 털고 만다. 보통은 3.5제 까지 아침저녁 상식을 올리고 장례를 치른 후에는 초하루 보름으로 상식을 지내고 1년 탈상을 해야 상제가 훌훌 털고 일어나는데 현대에는 부모 공양이라는 의미가 희석 되여 상식에 신경 쓰는 집이 많지 않다.
불교는 유교의식을 존중하여 상호 보완해 나가는데 기독교는 신위가 귀신이라고 절도 안하고 기도만 하여 주위를 불편하게 한다. 기독교의 방식은 포용력이 없는 서구의식으로 동양에서는 거부감이 느껴진다.
2007년 1월 6일.
장인제사
어제 장모님의 49제를 끝내고 나니 폭설이 쏟아져 서울 시내가 온통 하얗다.
오늘이 장인 제사란다. 해명이네 집에 모처럼 만에 온 식구가 모여 제사 참례를 하였다. 장모님은 어제 49제를 치르고 오늘 장인인 남편 곁에서 바로 제사를 받으시니 얼마나 행복하실까.
제일 홀가분하고 기분 좋은 것은 해명이일 것이다. 형제들 간의 반목도 다 해소되고, 장례의 큰일도 끝나고, 장자로서의 위치도 찾고, 딸도 시집 보내고, 내일서부터는 새로운 인생을 사는 기분일 거다.
하나 서운한 것은, 큰집 식구들이 하나도 비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4. 해외여행 5회.
금년에는 본의든 아니든 해외여행이 제일 많았다.
카나다 ; 봄 가을로 카나다 여행을 두 번이나 가게 되여 동서부를 다 구경하게 되였고 봄에는 아들 결혼을 성사 짖고 가을에는 아들 부부의 피로연에 참석하여 카나다 여행은 우리 부부가 보람찬 일정을 보냈다.
일본 ; 군 동기생 40주년 임관행사중 하나로 일본 오사카 교토 벳부 온천여행을 신청하였는데, 공교롭게도 혁진이 소영이가 카나다에서 귀국하는 날에 귀국일자가 맞추어져, 집사람은 아희들 마중하기로 하고, 나 혼자 여행에 참석하게 되였다.
필리핀 ; 여름 휴가를 멋들어지게 필리핀 휴양지인 세부로가, 초특급 휴양지인 프랜테이션 베이에 여장을 풀고, 여유 있는 휴가를 즐겼다. 쫓겨 다니는 해외여행만 하다가 휴양지에서 수영을 하며 즐기니 휴가 맛이 난다. 이제는 부모를 쫓아다니지 않는다던 작은놈도 회사에 휴가를 내고 우리와 동행한 것을 보면 이번 여행이 값진 것 같다.
월남 ; 동기생 주관으로 월남 전적지방문을 하게 되였다. 방문 일정이 변경되는 바람에 최초에 신청했던 동기생이 많이 불참하게 되였고, 우리 집사람도 가지 않겠다고 하여 혼자 월남을 갔다. 남부 호치민에서부터 중부 호이안 후에 다낭 북부 하노이 하롱베이까지 9일간 뜻있게 잘 갔다 왔다.
1968년 중위로 파병 되여 일년여 동안 있다 대위로 귀국한 월남은 옛날에 우리가 있었던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세계로 변하고 있다. 하노이는 우리나라 박정희때 개발붐을 이루듯 발전 속도가 무섭게 진행되고 있다.
5. 장조카 광희, 장희 부부 귀국.
우리 형제자매 중에서 제일 위인 권오식 큰누이, 기미독립선언해에 출생하여 여러 형제들 중 제일먼저 암으로 세상을 하직한 차분하고 얌전한 우리 큰 누님, 동네사람들이 얼굴이 달덩이 같이 예쁘다고 칭찬하였다. 낙생면장을 지낸 낭군인 임제빈도 누이를 쫓아서 몇 년 후 세상을 하직하였다.
이들이 4남에 막내로 고명딸을 두었는데 첫째가 광희 장희 경희 승희 명희다. 임씨 형제들이 머리가 유별나게 뛰어나고 주량이 쎄다. 광희 장희는 나보다 먼저 세상에 나왔고 우리 어머니는 딸보다 늦게 막둥이인 나를 갖인 것을 창피하게 여겼던 모양이다. 쉰둥이인 나를 생각하면 이해할만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나를 끌어올린 것도 장족하인 광희다. 당시 광희가 동성고 시절이니 나는 서울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한다는 것이 오직 큰 누이 덕분이다.
나와 동갑인 말띠 장희는 생일이 빨라 먼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바람에 28회인 나보다 1년 선배다. 초등학교에서 장희가 낙생초등학교 생긴 이래 최고의 점수를 기록하여 그 천재성을 인정받았다. 서울중 고교에 서울공대 기계과에 입학하여 자기의 천재성과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를 보인 얌전한 모범생이다. 충비에 들어갔다 미국 MIT 공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따고, 다국적 기업인 다우케미칼에서 황색 인종이 공장장에다 이사까지 하고 정년퇴직하여, 지금은 텍사스대학 교수이며 삼선전자 고문으로도 있다.
경희는 초등학교시절부터 문제아다. 당시는 중학교도 경쟁시험 입학이라 초등학교 6학년 가방은 한보따리인데 경희는 노트한권에 연필 한 자루 들고 등교한 문제아다. 막상 입학시험이 닥치니 장희가 잡아놓고 3개월 동안 집중 교육시켜 선린을 합격하는 수준이니 꼴통은 잘 돌아가는 거다. 제버릇 못 고친다고 중고등 학교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학교는 뒷전이고 뒷골목에서 술 담배 하는 불량학생이 되여 종로5가 깜씨라고 유명한 똘마니가 되였다. 똘마니 생활이 해병대 갔다 와서도 계속되어 결혼하고 아희들을 낳아도 번듯한 직장이 없으니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가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세상이 변하려니 뒤늦게 마흔이 넘어 도서관을 다녀 주택관리사 자격증을 따서 지금은 아파트 단지의 관리소장이다. 너머 나도 오랫동안 책을 잡지 않아 머리가 녹이 쓸었을 터인데 원체 머리가 좋은 집안인자라 쉽지 않은 주택관리사가 된 것을 보면 존경심이 우러난다.
이 집안에서 머리가 제일 좋은 놈은 셋째 승희다. 초등학교 들어가기도 전에 주소를 한문으로 척척 써 내려갔다 하면 놀랄만한 사건이다. 누구나 머리가 너머나 좋아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라고 예상을 하였다. 머리만 믿고 사대부중을 들어가고 부터는 가로가기 시작하였다. 고등학교도 독학을 하고 대학도 서울대 아니면 안 된다 하며 계속 낙방을 하는데 우물 안 개구리로 제가 공부 안한 것은 모르고 설치고 날뛰니 될 리가 없다. 집안이 유복하지 못하여 뒷바라지 못하고 천재성을 썩히는 결과를 낳았다.
고명딸인 명희는 사내들 틈에서 자라 웬만큼 메어 던져도 울지를 않는다. 사랑을 받는 건지 얻어터지는 건지 헷갈리지만 학교 다닐 때 실력은 영 아니다. 실력은 명희 2세에게 서나 바라야겠다. 결혼하고 잘 살더니 자기의 행복을 찾아야겠다고 날아가 버렸다.
장손인 광희가 입학은 연대 상대를 하고 잘못되어 건대를 졸업하더니 미국에 가서 박사를 받은 모양이다. 알라스카 주지사 경제고문도 했다하나 내가 보기엔 성공케이스가 못된다. 그래도 자식은 웨스트포인트를 마치고 소령 제대하여 잘살고 있다니 다행이다. 금년에 처음으로 부부 동반하여 귀국하였다. 귀국한 김에 고모들을 보고 싶다고 하여 누이들을 다 불러 한식집으로 초대하니 경희 승희 부부도 아희들 데리고 왔다. 몇 십 년만 에온 장조카 댁은 옛날에 봤을 때의 안하무인격은 좀 사라졌다. 우리 늙은 누이들의 행색을 보고는 오히려 기가 죽은듯하다. 누이들이 오히려 장조카 댁에게 교통비하라고 봉투를 쥐여준다. 식사 후에 카운터에 가는 사람이 없으니 본의 아니게 내가 호스트가 되고 말았다. 집사람은 나를 가자미 같은 눈을 뜨고 바라보고 있다.
둘째 장희 부부가 미국에서 광희부부보다 먼저 귀국하였다. 장희는 세미나 연사로 가끔 귀국을 하여 띄엄띄엄 만나보는 상황이다. 어쩐 일인지 고모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하여 내가 연락을 하여 고급 한정식집인 한우리에서 만났다. 우리 누이들이 이제 연로하여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이 되여 만나고 싶은 모양이다. 형제들 중 제일 기복이 없이 계속 잘나가고 현재도 한국에 있는 형제들을 생각해주는 사람은 장희뿐이다.
형제들 중 광희 장희가 미국에 뿌리를 박고 사는데 한국의 경희 승희는 경제적 기반이 좀 떨어진다. 한사람이 미국을 이민가면 10년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100명은 간다는데 이 형제들은 그런 쪽에는 아예 관심도 없다. 형제들 데리고 가서 더 좋은 삶의 방법을 찾는데 소홀히 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