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가면서 처음이란 의미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신세대들로 부터 더욱 각광을 얻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를 들자면 첫만남, 첫키스, 첫경험 등등 또 한 100일이니 천일이니 하면서 나름대로 의미를 두는 기록들을 소중하게 다루고 있다.
내가 수석에 입문한 것도 벌써 강산이 두번 변했다. 1987년 여름이었으니 20년이 훌쩍 지났다. 공사현장 돌무더기를 뒤지다가 시작하는 게기가 되었다. 당시 나이가 20대 초반이었다. 수석계에도 스포츠처럼 기록이 있다면 최연소라는 수식어가 많이 붙었을 지도 모르겠다.
20대 초반에 수석에 입문하고, 수석회도 가입하고, 전시회 출품도하고, 한국수석회 가입도 20대였는데 저말고 또 20대가 있었는지 무척 궁금하다??
그때 첫아이 낳고 100일도 안된 것을 전야제 때 안고 간 기억이 나는데 그놈이 벌써 15살이다.ㅎㅎ
예쁘다고 귀여워 해주시든 사모님들 늘 감사하고 지금도 잘들 계시지요..!!
그러든 중 사랑하는 어머니와 작별하고 결혼을 약속한(이듬해 봄 결혼 약속) 또 사랑하는 여인과 작별을 하며 개인적으로 젊은 나이에 많이 방황하든 시기였다. 당시는 차도 없고 멋진 오토바이로 출퇴근을 하든 때였는데 틈만나면 잊을려고 무작정 오토바이를 앞세워 달렸는데 어느날 가까운 문경 가은을 지나는데 길옆에 수석이란 글짜가 눈에 들어 오길래 들어가서 수석에 대해서 물어보니 나이 지긋한 어른께서 "여기는 전국에서 수석산지로 유명한 구랑리가 있고 수석은 어떤 석질이 좋고 어떤형태가 좋다"고 귀뜸해 주시길래 귀담아 듣고 돌을 찾아 나선 것이다.
인터넷이 발달한 때가 아니어서 서점을 헤메어도 수석지가 없어 주인에게 구해달라고 사정해서 구해놓고 다 찢어질 때까지 수백번은 읽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수석책에 나오는 돌을 주려고 하니 그 넓른 돌밭을 다 뒤져도 맘에 더는돌 한 점 못 구하고 나만의 돌을 주워오는 실정이었다.
지금은 다 되돌려 주었지만....
그래도 수석한다고 직원 동료들에게 전파를하여 한동안 모두들 미치도록 만든 장본인 이기도 하다.
산지도 몰라서 죽자사자 구랑리만 헤메고 왔다갔다 했다.
너무 큰돌을 오토바이에 실어서 오다가 빵구(펑크)가 나서 고생고생한 적도 여러번 있었다.
어느날 토요일 오후 (당시에는 토요일은 오전근무를 하였음) 혼자 자취를 하는 집에 직원 두분이 찾아와 지금 구랑리 돌주러 가잔다.
시간도 늦었고 할일도 있고 해서 내일 가자고 버텼지만 이미 미쳐있는 이분들을 만류할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오토바이를 한대씩 끌고 나섰다.
상주에서 약 50km 정도 되며 오토바이로 가면 1시간 반이상은 달려야 도착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비포장 도로였다.
갈때마다 들려서 음료수라도 사먹고 가는 구랑리 가은집 아저씨와 아주머니께 "안녕하세요, 돌주러왔습니다". 라고 큰 소리치면 반가운 모습으로 "어서와 오늘은 여기하고 저쪽으로 가봐" 하시면서 나름 포인트를 일러 주신다.
(사실은 그때 아주머니께서 저를 잘 봐주셔서 질녀를 소개해 주었는데 잘 풀리지는 않았고, 아저씨는 수년전에 작고하셨다. 아저씨는 구랑리 오석 소품을 깊숙히 넣어 두었던 것을 저에게 선물로 주시기도 하였는데..)
인사를하고 오토바이를 식당 옆에 세워놓고 탐석을 시작하며, 아저씨가 가보라고 일러주신 곳으로 건너가는 중에 얕은 물속이고 물이 깨끗하여 돌의 변화가 보일 정도인데 이상한 것이 있어 귀찮아서 손이 아니고 발로(당시에는 슬리퍼를 신고 다녔음)돌을 만지니 발가락 쪽이 쏙 들어 간다. 혹시나 하고 손으로 잡으니 손가락 느낌이 뭔가 달라서 들어 올리니 요즘 말로 푹 썪었다. 이런건 가져 가야겠지? 하며 일단 배낭에 집어 넣고 일어 설려니 이번엔 더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 온다. 사람 눈을 닮은 돌인데 이건 무조건 가져 가야지 하며 역시 배낭으로 직행..
벌써 탐석도 하기 전에 한 가방이다. 그 무거운 가방을 메고 늦게까지 탐석을 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미쳤지..
한참을 탐석하고 시간이 되어 "그만 갑시다" 라고 소리치며 탐석물을 같이 선별 하는데 동료 두분도 이거 괜찮을것 같다고 하며 식당에 가서 한번 물어 보자고 한다.
낑낑대며 보따리를 풀어 놓고 봐달라고 부탁을 하니 아주머니께서 " 어머..좋은돌 하셨네" 하시면서 3만원 줄테니 팔으라고 하신다..
"에이, 이걸 어떻게 팔아요" 라고 대꾸하니 동료들이 눈을 깜빡꺼린다. 빨리 팔어란 눈치였다.
당시에 제 월급이 14만원 이었으니 3만원이면 일당도 더되니 팔아야 하지 않겠냐는 뜻이었단다.
"아니에요. 기념으로 집에 가져 가겠다"고하니 아주머니 다시 불러 세워 팔의향이 있으면 300만원을 줄테니 다른 사람에게 팔지말고 꼭 네게 팔으시란다. 순간 눈이 휘둥그래 졌을 것은 당연지사고 이돌이 그렇게 좋은가? 의아해하며 감사함을 전하고 귀향을 재촉하였다.
당시에도 장원주란 예기는 들어서 저녁도 먹을겸 오든 길목 가은의 어느 식당에서(지금도 영업중인것 같다)쇠고기를 당시 7만원 어치를 먹었다.
식당 주인도 돌줏고 오는걸 눈치체시고 "좋은돌 하셨습니까?" 인사치레로 물어 보시는데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예, 한점했습니다" 하고 보따리를 풀어 보였다. 그랬더니 자기는 돌을 잘모르는데 옆집 친구가 돌을 한지가 한 30년 됐다고 한번 불러 와야 겠다며 나가신다.
한참을 먹고 있는데 두분이서 들어 오시면서 돌을 보시고 "요세도 이런돌이 나옵니까?" 하시면서 좋은 돌이라고 축하한단다. 그때서야 좋은 돌이란 것이 감이 왔다. 그 소리를 듣고 옆에 있든 동료가 "어느집에서 300만원을 줄려고 하는데 안팔았다"고 하자 뭐 이게 300만원까지야 할려고? 하니 또 한분은 300만원도 더 간다고 하신다. 그러다 두분이서 가격을 놓고 자기들끼리 말싸움이 벌어져서 멍했던 기억도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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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랑리. 그 돌이 바로 이넘인데 이돌 때문에 본격적으로 돌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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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랑리. 같은 자리에서 탐석한 돌인데 눈이 요상하게 생긴 돌이며 눈알이 박혀있는 것이 특이하다.
처녀출전
이글을 쓰기 위해서 위에 수식을 붙인 것인데 좀 길어져서 주객이 전도된 분위기다.
이듬해인가? 상주문화회관에서 상주수석회 전시회가 열였는데 관심이 있어서 관람을 했는데 사실 놀랬다. 돌이 아니라 수석을 하는 모임이 있다는 것과 전시회를 열기도 한다는 것에..
관람을 마치고 용기를 내어 연세가 지긋한 분에게 "저~ 수석회 가입을 해도 되겠습니까? 저도 수석을 배워보고 싶은데.."
라고 말씀 드리니 아주 반가이 맞아 주시면서 주소와 연락처를 남겨주면 월례회때 엽서를 보낼테니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그때 그분이 농산물통계사무소 소장을 하시는데 총무를 맡고 계신다고 하신다.
그래서 그 다음달부터 상주수석회 일원으로서 첫월례회를 참석하게 되었는데, 참 난감한 일이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총무를 맡고 계시는 농산물통계사무소소장님이 연세가 50대 중반인데 그 바로 아래가 저인셈이다. 그리고 나머지 분들은 당시 모두 60대였던 것이다.
어디 감히 말 한마디 붙일 곳이 없고 지역에서는 모두 내노라하시는 분들만 죽 앉아 계시는데 20대 초반의 젊은 사람이 같은 모임에 자리를 하고 있으니 정말 가시방석 이었다.
한달에 한번씩 돌아가면서 집으로 초청을하여 월례회를 하는데 아주 젊은 사람이 앉아 있으니 가족들도 의아하게 생각을 하시는것 같기도하고...
그러다가 어느날 하계탐석을 가게 되었는데 회원 10여명 조금 넘었는데 45인석 관광버스를 타고 가신단다.
젊은 혈기에 수석도 제대로 배우고 돌도 많이 주워올려고 큰 맘먹고 따라 나섰다, 1박2일의 코스로 어느어느 돌밭으로 간다고 하기에 맘이 설례었는데 가면서 자꾸 코스가 이상해지는 것 같기도 한데 처음이라 따라만 다녔다.
-후에 느꼈지만 그 어러신들은 대부분 동년배로서 취미뿐만 아니고 친목계로서의 의미가 상당히 이었던게 사실이다. 그리고 행선지를 정해놓고 가다가 아무분이나 우리 어디로 한번 가보지? 하시면 행선지가 터무니없이 바뀌고 하던 시절이었다-
첫째날 오후 단양 영춘이라는 곳에 차를 세워놓고 돌을 줍는데 구랑리만 보다가 다른 돌밭을 보니 도대체 주워올 돌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뒤만 따라다니며 어떤돌을 주워야 하냐고 물으니 여기는 문양석을 탐석하면 된다고 하신다.
아무리 찾아봐도 돌같은 돌은 없다. 하지만 어르신들은 큰 돌을 한참 주워 날으시느라 분주하다. 누구는 좋은돌을 주웠다니, 누가 장원이라니, 하시면서 이제 출발을 해야 한다고 하신다.
하는 수 없이 빈 가방으로 돌아오는데 "이주사 돌 못주웠어," 하시길래 "네," 라고 하니 여기까지 와서 기념석이라도 주워 가야지 하신다.
욕심은 있지만 무엇을 주워 가야 할지도 모르는데 허무하기도 하고 해서 에이 아무거나 주워가자고 옆을 두리번 거리니 마치 두리뭉실한 돌이 있길래 모르겠다 하고 버스위에 실어 놓았다.
그런데 출발할려고 차에 올라오시면서 돌을 보시고 모두 한마디씩 하신다. "어, 이거 누구돌인가? 이뿌네.. 좋타..장원이 따로있네.. "
그 참 기분 묘합니다... 왜? 이돌을 보고 좋다고 하는지??
그래서 물으니 일단 모암이 둥글어서 좋다고 하시면서 여기 물을 뿌려 보라고 하신다.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예쁜 문양이 나타난다. 이야 그림도 좋고 모암도 좋고 됐다 됐어,를 연발 하신다.
그때 또 한가지 배운것이 모암이었다.
훗날 그 산지를 수도없이 다녔지만 이만큼 맘에드는 돌을 만나지 못했다.
좌대를 어디서 파는지 몰라 공예사에 맏겼다가 맘에 안들어서 몇번을 갈아 입히고서야 지금의 옷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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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춘 22*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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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시절의 돌이지만 지금에 아무리 헤메여도 이만한 돌 만나지 못했다.
인연이란 이런것인가? 일부러 만날려해도 안돼고..
우연히 그것도 아주 우연히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인연 그렇게 생각하며 인연을 맺기 위해 평생을 헤메일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