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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辛未洋擾)라 불리는
1871년 초여름의 한미전쟁
1. 전쟁명칭에 대하여
(1) 조선측
- 신미양요 : “신미년(辛未年, 1871년)에 서양오랑캐(미국)가 난동(亂動)과
소요(騷擾)를 일으킨 사건“이란 뜻.
(2) 미국측
- 1871년 한국원정탐사(Korean Expedition in 1871) : 미국해병대역사 자료관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Marine Corps: Reference) 에서는 신미양요를
‘19세기 기타항목’(The Rest of the 19th century)에 포함시키고 있으며, 그 전쟁의
명칭을 원정(Expedition)으로 표기하고 있다.
- 주말전쟁(Weekend War) : 미군이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한 날(1871.6.10)이
토요일이었고, 덕진진 점령을 거쳐 ‘최후의 요새’ 인 광성보를 함락한 날이
다음날 일요일(6.11)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別名)이다.
2. 전쟁의 시작과 끝
(1) 원인
- 직접원인
전쟁이 발발하게 된 직접 발단은 1866년 8월 조선과 통상을 요구하며
평양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간 무장민간상선 제너럴셔먼호 선원 35명(추정)이
대동강에서 좌초하자 격분한 평양시민과 관군이 선박을 방화, 미국인 선원 5명을
포함해 전원을 학살한 사건이 발생함. 이후 미국은 제너럴셔먼호 사건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정부차원에서 2차례에 걸쳐 조사단을 조선에 파견했으나,
조선정부의 비협조로 명확한 진상파악에 실패. 그러자 무력으로 조선을 응징하기 위해
1871년 5월16일 일본 나가사키항에 주둔하던 아시아함대에 1,200여명의
원정군을 싣고 한국출정에 나서게 됨.
* 자세한 내용은 카페의 ‘1871년 강화도 한미(韓美)전쟁 - 발단(1), (2)편을 참조바람.
- 간접원인
1871년(고종임금8) 당시 미국은 5년간이나 계속된 내전 남북전쟁(1861-1865)을
끝내고, 당시 유럽의 열강들이 경쟁하듯 나섰던 아시아지역 함포외교와 통상수교에
뒤지지않게 서둘러 합류하게 됐다. 미국은 1866년 프랑스의 침공(병인양요)을 받았지만
끝내 쇄국정책을 버리지않는 조선정부에 관심을 갖고 문호개방을 적극 검토하게 됨.
미국의 이런 자신감은 1853년, 페리제독을 앞세운 미국전함이 함포시위로 일본을 무혈(無血)
문호개방 시킨 사례에서 학습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이후 두 차례 진상조사단 파견 및 탐문 항행을 실시하면서 조선침공 계획의
밑그림이 구체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미국의 조선침공은 아시아함대에 조선과 통상조약을 맺을
청나라주재 전권공사 F.F.로우를 승선시킨 것만 보아도, 제너럴셔먼호 사건 응징이라는 대외적
명분 말고도 이 기회를 이용해 미국과 ‘통상수교’를 맺어 조선을 문호 개방시키는 첫 서구열강
국가로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려는 목적이 다분했음을 보여준다.
사진 오른쪽 끝에 서있는 사람이 청나라주재 미국공사(조선과의 통상수교시
전권공사 임무를 받음) F.F 로(Low).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 서양인은
비서관 드류(Drew), 나머지 두 사람은 중국인 통역관.
(2) 조선의 전쟁준비
<방어계획>
- 5월19일 조선의 남양만 부근에 미국함대가 진입하면서 상황보고가 속속 조정에 올라갔다.
5월23일 인천앞바다에서 미군함대가 정박할 기미를 보이자 조정은 긴급히 어재연장군을
진무중군(鎭撫中軍; 난동을 평정하는 중앙파견군 지휘관)으로 임명하고 이창희를 강화판관으로 임명,
강화도에 급파함.
또 평안도의 노련한 화승총 포수를 중심으로 300여명을 차출하고 중앙 5군영 소속의
경군(京軍; 중앙파견군)을 꾸려 강화도 광성보를 중심으로 집중 배치함. 강화포대의
화력증강을 위해 홍이포, 불랑기를 추가배치하고 늘어난 군사들을 위한 군량미도 추가공급.
- 조선조정의 광성보중심 방어계획은 5년전 병인양요(1866년) 때 프랑스군이 작약도를 함대기지 삼아
강화해협을 진입, 한강까지 침공(1차)하고 강화갑곶리(2차침공)에 상륙하여 강화도를 점령한 전례를
참고한 것으로 여겨진다. 결국 "광성보를 최후의 보루삼아 미군을 막겠다"는 배수진이었다.
광성보는 아군에게 비교적 유리한 해변 고지(高地)이기 때문에 정찰이나 화포공격에서도 유리했다.
조선조정은 "허락없이 미함대가 광성보까지 올라올 경우 일제 포격한다"는 내부지침을 확정했다.
<병력배치 및 무력증강>
- 5월31일 : 중앙 5군영에서 약 950명의 지원군을 긴급차출, 강화도배치 시작.
증강되는 병력에 따른 화승총, 대포, 석궁 등도 추가배치 추진.
훈련도감(訓鍊都監); 보군(步軍) 2초(二哨; 250명), 화약 1,000근(斤), 쇠뇌(手弩弓; 철제 석궁) 10장(張)과
화살 300지(枝), 별파진(別破陣; 화약무기 전담부대) 300명(名)을 긴급파견.
금위영(禁衛營); 보병1초(125명), 화약 1,000근, 쇠뇌 10장과 거기에 딸린 화살 300지, 별파진 10명.
어영청(御營廳); 보병1초, 화약 1천근, 쇠뇌 10장과 화살 300개, 별파진 10명.
총융청(總戎廳); 아병(牙兵; 본영의 대장을 수행하는 병사) 1초, 불랑기(佛狠機; 16세기식 후장식 대포) 30문과
탄환 2,000개(箇), 대포 3좌(坐), 화약 1,000근을 추가지원.
4개 영(營)의 보병 각각 1초는 새로 임명된 중군이 지휘하고
훈련도감 보군 1초는 신임판관이 인솔하여 적의 도발에 임기응변.
전투식량확보; 군량미 1,000석(石)을 호조(戶曹)창고에서 획송(劃送; 기획운송).
주교사(舟橋司; 한강에 배다리를 만드는 부대)에서 선박으로 추진.
- 6월3일 : 강화도방어 조선군사령관 중군(中軍) 어재연(魚在淵)장군이
위경군(衛京軍; 수도방위군)을 인솔, 광성보(廣城堡)에 도착.
손돌목돈대에 지휘부 설치.
- 6월11일 : 광성보 함락당일, 별초군(別抄軍; 인근에서 특별선발한 군사) 250명 급파.
(3) 미국의 전쟁전 준비
- 미국은 5년전인 1866년 9월에 조선원정(병인양요)을 다녀온 프랑스에게
“서구인들을 학살하는 조선을 서양세력 연합으로 응징하자”며 공동출정을
제안했으나 거부당함.
- 그러나 미국은 병인양요당시 한강과 강화해협 수로(水路)를 정밀측정한
프랑스 해군측의 기록문서를 모두 제공받아 작전에 많은 도움을 받음.
나중에 미군측은 “프랑스의 측량자료는 놀라우리만큼 정확했다”고 밝힘.
(4) 양국간 무력 개요
- 조선측
* 강화도수비 조선군 총 사령관 : 진무중군 어재연장군.
▲ 1871년 한미전쟁 당시 조선군의 강화도
'수비대장'이었던 어재연장군 초상.
* 강화도진지 배치병력 : 약 1,000명수준이었을 것으로 추정.
조선측 기록을 종함해 볼 때, 6월초 어재연장군과 함께 평안도지역
산포대(山砲隊; 산악지역 화포부대) 소속 화포병 300명을 우선 차출해 강화도
포대에 긴급배치. 이후 중앙 오군영소속 경군(京軍; 지방파견 중앙군) 300명을
추가 파견, 실전배치했을 것으로 여겨짐.
어재연장군은 광성보를 '최후의 보루' 삼아 병력의 대부분을 배치했으나,
강화도는 섬 전체에 5진7보와 8포대 및 50여 돈대가 있어 광성보를 제외한
나머지 진지에도 최소한의 병력배치는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됨. 여기에는
강화유수부 별장(別將)이 지휘하는 향토 둔전병(屯田兵; 반농반군 병사)이
배치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측 기록에는 "광성보에 1천여명의 조선군이 배치됐고, 침공미군 숫자가
1천명을 넘었다"는 등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근거가 없고 실제보다 과장이
심한 것으로 여겨져 실제 조선방어군 숫자는 짐작할 방법이 없다.
미국측 기록과 강화도내 진지의 평상시 병력배치와 증원군(京軍) 파견 등을
감안해 종합해보면, 당시 강화도내 조선군 병력배치는 강화해협 해안요충지인
광성보를 중심으로 초지진, 덕진진에 약 500-600명의 정예군이 배치됐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머지 강화도내 진보돈(鎭堡墩)에는 약 300-500명의 둔전병이
"최소한의 경비정찰" 임무를 수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개인화기 : 화승총(임진왜란 당시 일본 뎃포와 동일한 형태)
보조무기로 재래식 활, 창, 칼.
▲ 조선군 주력무기였던 강화 화승총. 1901년 강화도 무기고에 보관됐다는 기록이 적힌 유일한
유물 사진이다. 임진왜란때 일본 화승총을 모방생산한 불심지점화(matchlock)방식의
활강소총으로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 화포 : 징겔(Jingal; 대구경 화승총으로 2인1조로 사격), 홍이포, 불랑기(후장식), 천자총통 등
조선전기에 개발됐던 총통류 화포와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에서 전래된 전장식 화포가
주류를 이루었다.
- 미국측
* 원정대 총사령관 : 아시아함대 사령관 해군소장 존 로저스(Rear Adm. John Rodgers)
▲ 미국 아시아함대 존 로저스 제독.
* 조선원정 아시아함대 5척의 Line-up
구 분 |
함정명 |
진수 |
함 장 |
배수톤수 |
승조원 |
함포 |
기 함 (Frigate) |
콜로라도 (USS Colorado) |
1856년 |
해병(USMC) 대령 쿠퍼(G.H. Cooper) |
3,425 t |
646명 |
45문 |
순양함 (Frigate) |
알래스카 (USS Alaska) |
1868년 |
해군(USN) 중령 블레이크(H.C.Blake) |
2,394 t |
273명 |
8문 |
베네시아 (USS Benecia) |
1868년 |
해군중령 킴벌리 (L.A. Kimberly) |
2,439 t |
291명 |
12문 | |
포(砲)함 (Gunboat) |
모노캐시 (USS Monocacy) |
1864년 |
해군중령 맥크리 (E.P. McCrea) |
1,370 t |
159명 |
6문 |
패로스 (USS Palos) |
1866년 |
해군대위 라크웰 (C.H. Rockwell) |
420 t |
- |
곡사포 6문 |
* 원정군 규모 : 함선운용 장병 및 상륙군 연인원 1,400명 이상.
(일부기록에는 약 1,230명으로 표기됨)
상륙군 구성
- 해군수병(sailors) 9개 중대 542명
- 해병대(marines) 1개 중대 109명
(미해군 연차보고서에는 "500명이상의 해군,
100명이상의 해병"으로 기록됨)
▲ 1871년 6월에 촬영한 전함 모노캐시(U.S.S. Monocacy)선상의 승선장교와 병사들.
* 미군 개인화기(미해군 1871년 연차보고서 기록)
▲ 레밍턴 롤링블록 50캐리버 해군소총(Remington Rolling block Navy carbine, 50 caliber)
사진의 카빈은 1868년에 제조된 실물이다. * 출처; http://www.icollector.com 바로가기
▲ 스프링필드 머스켓(Springfield muskets). 미국 남북전쟁당시 맹위를 떨쳤던 전장식 소총.
* 출처; http://www.army.mil/ 바로가기
▲ 네이비 플리머스(Navy Plymouths). 1861년 개발된 육군용 전장식 플리머스 머스캣을
대폭 개량해 만든 해군용 소총이다. 사진은 1863년에 제조된 네이비 플리머스로 뇌관충격식
(percussion) 전장식 라이플이다. * 출처; http://relicman.com/weapons/ 바로가기
* 상륙군견인 야포 : 12파운드(5.4kg 포탄발사) 암스트롱포 6문.
▲ 사정거리 1,300m 내외의 작렬포탄을 발사한 라이플 야포.
미군의 광성보 공략직전 함포와 함께 위력적인 지원사격을 했다.
* 함선별 장착함포 규격
- 콜로라도함 : 10인치(포구경 254mm) 2문
9인치(포구경 229mm) 28문
8인치(포구경 203mm) 12문
- 알래스카함 : 60파운드(포탄중량 28.2kg) 함포 1문
11인치(포구경 279mm) 함포 1문
9인치(포구경 229mm) 10문
- 베니시아함 : 60파운드(포탄중량 28.2kg) 함포 1문
11인치(포구경 279mm) 함포 1문
9인치(포구경 229mm) 10문
- 모노캐시함 : 60파운드(포탄중량 28.2kg) 함포 2문
8인치(포구경 203mm) 4문
- 패로스함 : 24파운드(10.9kg 포탄발사) 곡사포(howitzers) 4문
24파운드 강선포(rifled howitzers) 2문
* 당시 미군 야포 및 함포의 포탄은, 쇠구슬을 발사했던 조선군 화포와는 달리
포탄에 내장된 화약이 신관장치에 의해 목표물도달시 터지는 '작렬탄'이었음.
(4) 전쟁기간
- 넓은 의미에서의 전쟁수행기간 : 46일
1871년 5월19일 로저스제독이 이끄는 미국 아시아함대가 한반도 남양만에
도착하면서부터 7월3일 함대정박지이던 작약도를 떠나 일부는 일본 나가사키,
일부는 함대주둔지인 중국 치푸(Cheefoo; 현재의 요동반도 옌타이)로 철수하기
까지의 기간.
- 1,2차 강화도침공을 기준으로한 전쟁수행기간 : 12일
1871년 6월1일 강화해협을 무단 진입했던 미국함대가 조선군의 발포로
미군 2명이 부상(1차 강화도침공)을 입었고, 6월10일(2차 강화도침공)
강화도에 상륙한 미군이 다음날 광성보를 함락하고 6월12일 작약도로
철수하기까지의 전쟁수행기간.
- 좁은 의미에서의 전쟁수행기간 : 3일
6월10일 강화도에 상륙한 미군이 초지진-덕진잔-광성보을 차례로 함락하면서
조선군과 전투를 벌였던 기간. 미군은 광성보 함락 다음날인 6월12일 인천 앞바다
작약도의 미국함대 정박지로 철수했다.
(5) 전쟁의 결과(인적물적 피해)
- 조선측 피해
조선측 공사(公私)기록에는 당시 미군과 교전 중 전사한 조선군 및 부상자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일부 군관급 무관 전상자 기록을 제외하면,
조선군 전사자 대부분은 '무명용사'로 남은 실정이다.
* 전상자 : 조선측의 전상자집계(기록)는 80명 안쪽이며 그것도 기록마다 차이가 있다.
그에 비해 미군은 광성보를 함락한 뒤 조선군 전사자 사체를 일일이 확인, 243구의 사체를
확인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또 약 100명 내외의 조선군이 강화해협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미군측은 추정하고 있다.
이런 정황을 종합해 볼 때, 제2차 강화침공시 조선군 전사자는 350 - 400여명,
부상자는 20 - 50명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측 전상자 기록)
1차 강화도침공 시 : 조선군 전사 1명 <덕포(德浦; 강화해협 김포반도쪽 포대) 소속 포군(砲軍)
오삼록(吳三祿)>이 미군함포 피격으로 전사. 수명의 부상자 발생.
2차 강화도침공 시 : 대부분 광성보에서 사망했는데, 어재연장군 지휘소가 있던 손돌목돈대에서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천총비장 김현종(金鉉琮),
초관 유풍노, 겸종(傔從) 임지팽(林之彭), 군관 이현학 등이 전투도중 전사했고
별장(別將) 박치성(朴致誠)이 자결(추정) 투신하여 바다에서 발견되는 등 53명이 순국.
일부 조선측 기록에는 어재연 장군이 전투 막바지에 자결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미국측은 해병대원이 백병전에서 사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조선왕조실록에는 강화도전투의 전사자 53명, 부상자는 도령장(都領將)
유례준(劉禮俊) 등 24명 뿐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음. 당시 조선측 병사기록은
군관급 이하 군졸(병사)들에 대해서는 명단조차 파악하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지며
그로인해 전체 조선군 전상자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전무한 실정이다.
* 미군측이 집계한 조선군 전상자
전사자 약 350명, 부상병 포로 20여명(미국전함에 후송, 치료)
* 미군에 의한 파괴, 멸실 : (미국기록에 의거)
5개 조선군 포대의 군장비를 모두 바다에 던져버림.
광성보전투에서 조선군 진지에 방열됐던 36파운드
대형화포(홍이포로 추정)에서 구식 징겔(대형 화승총)까지
모두 481점을 파괴함.
(영문기록)
"Five batteries in all had fallen, and 481 pieces of artillery
--ranging from 32-pounders to superannuated gingalls--
were destroyed."
- 미국측 피해
* 전사자 : 4명(1명은 항해중 질병으로 사망)
* 부상자 : 10여명
- 미국이 노획한 조선군 무구(武具)
* 어재연장군 수(帥)자기, 다수의 조선군 깃발, 장군모(將軍帽)
화승총, 총통, 동제(銅製) 불랑기 등 무기류 다수.
<신미양요 당시 미군이 노획한 조선군 화기와 휴대용 화약통>
▲ 강화 화승총 - 지금 한국에는 단 한자루(국립중앙박물관) 남아있다.
▲ 징겔(Jingall) ; 개머리판이 없고 총열만 있다. 미군측이 '징겔'로
분류하고 있으나, 이 총렬은 조선중기에 제작한
천보총(千步銃) 총신일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 불랑기(佛狼機) ; 16세기 유럽에서 만들어진 후장식 화포.
중국이 모방생산했는데, 임진왜란 전후에 조선에 전래됐다.
▲ 화승총 사격병이 흑색화약을 담았던 약통.
거북을 닮아 '귀약통'(龜藥筒)이라 불렀다.
(당시 미군들은 조선군으로부터 노획한 물품 가운데 상당수를
'개인소장용'으로 휴대, 본국에 가져갔다. 당시 노획물가운데
많은 수가 지금도 미국정부가 아닌 미국시민 개인소장품으로
보관되거나 혹은 골동품시장에 나와있는 실정이다)
1871년 강화도 한미전쟁(韓美戰爭) - 개요. 끝
* 본문내용은 강화화승총 동호인회의 소중한 지적재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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