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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 휘 관 심묘사적 (文肅公 諱 瓘 尋墓事蹟) |
여지승람에 파주 분수원 북쪽에 윤모공의 묘소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한 옛 족보에 파주 분수원 북쪽에 문숙공 묘소가 있으며 문강공 묘도 동원에 있다고 하였다. 공의 묘 앞에 교자총이 있고 청룡밖에 전마총이 있다고 씌여 있다. 그런데 이조에 내려와서 연산조때 양주, 파주, 고양 등 세 고을이 왕이 사냥하는 유행소로 정해지고 일반 민간인의 출입을 금하여 봉쇄지구로 만들어졌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종파가 한때 미약하여 수호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병화가 겹쳐서 후손들도 돌볼 기회가 적었다. 이러한 틈을 타서 정승 심지원이 그의 할아버지 묘를 써 놓고 그 후 이어서 수개의 묘를 썼지만 자손들이 선조의 묘소가 어찌 되었는지 모르고 수세(數世)를 지내왔다. 영조23년 정묘(1747년)에 후손 동규(東奎)가 그 아들 광노(光魯)와 함께 혼사로 장단(長湍)땅에 가다가 마침 그 지역을 지나는 길에 분수원에 이르러 선조의 유영을 잃고 있음을 느끼고 산위에서 방황할 때 홀연히 본 즉 심정승 묘의 청룡위에 다시 사초를 한 위 아래 묘가 있음을 발견하였다. 모두 짧은 비를 세웠으되 위에는 선략장군 이호문묘(宣略將軍李好文墓)라 씌여 있고 아래는 집의덕수 이모묘(執義德水李某墓)라고 되어 있으며 심정승의 큰 무덤에는 전부터 비석이 없는 모양이었다. 몇 해 후에 다시 산위로 올라가 본즉 심정승묘 아래 큰 무덤이 있으되 분묘의 형상이 깎여져 있고 옛 비석이 하나 서 있는데 본 즉 이호문의 비석이었다. 그런데 그 곳 지방 사람들이 말하기를 심점승의 묘 아래 큰 무덤인즉 윤시중의 묘이고 옛날에는 묘 앞에 돌사람과 비가 있었고 굽은 담장으로 된 묘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심가가 여기에 투장을 해놓은 후에 비석 같은 일체의 흔적을 없애 버렸으니 자손들이 찾을려야 찾을 도리가 없고 또한 그 백년을 그대로 내려 왔은즉 충분한 증거조차 없어 공의 묘소를 잃어버리고야 말 처지에 있어 자손들도 어떻게 확실한 증거를 찾아내야 할지 고심하던 처지에 있던 때였다. 이에 그 부자가 곧 산에서 내려와서 여러 종친들과 의논하여 유영을 찾을 방도를 연구케 하였다. 우선 이호문의 손자 형진(亨鎭)을 붙잡아다가 힐문한 즉 심가가 이가를 매수하여 위의 이호문묘라는 것은 허광이요 아래편이 진광으로 심가의 변형총으로써 공의 묘소 삼광을 덥쳐 침범한 것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의 묘비를 없애 버려 흔적을 소멸시키려는 묘계로서 이호문의 후손들에게 제토를 주어 제사케 하였던 것이다. 교자총이라 함은 문숙공께서 북정하실 때 타시던 교자를 이에 묻은 것을 말함이다. 후손 좌윤공 면교(左尹公 勉敎)가 제종(諸宗)의 선두에 서서 왕께 이 연유로써 상소를 하였고 계속해서 좌상공 동도(左相公 東度)께서 왕께 아뢰니 영조대왕께서도 그 간사한 형편을 살피시다 다만 확증될 만한 비문이 없고 또한 오랜 세월을 경과하였기 때문에 이가의 비를 빼어버리는 것만을 명하시고 양가에서 각기 수호하라는 명령이 계시었으니 자손 된 사람으로서 원통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 후 자손들의 정성으로 다행히 부러진 비석을 고총좌편 열 발자국 밖에 작은 개천 속에서 발견하였으니 이는 곧 그 근처 80노인이 묻은 곳을 가르쳐 준 곳이다. 이 비석으로서 공의 벼슬 성 시호가 완연하여 가히 분별하기에 어렵지 않았으니 제1행에 주국문경(柱國文敬) 제2행에 대부추충좌리평(大夫推忠佐理平) 제3행에 숙공윤만지묘(肅公尹漫之墓) 제4행에 일년삼월일개(一年三月日改)라 하였으되 위아래가 모두 분질러진 것이다. 듣는 자로 하여금 어찌 신기하게 여기지 않으랴. 「윤만」은 공의 처음 諱인 것이다. 좌윤공이 다시 상소를 올리고 또다시 문강공의 묘소를 찾고자 하였다. 왕도 또한 기이하게 여기사 이에 비답(批答)하여 가로되 『하늘의 밝고 밝음을 가히 알 수가 있고 경들의 지성으로 천년의 옛 비를 이미 얻었도다』 하시고 본군에 명을 내리시어 역군을 도와 묘를 보수하라 하시고 심정승의 묘를 수영(修塋)하라는 하교를 내리지 않았다. 『후에 고상(故相)의 영이 있다면 그 뜻을 알 것이다. 자손 된 자의 도리로서야 어찌 선조의 영을 모른다고 하겠는가.』고 역시 본도에 영을 내려 묘 만드는데 돕게 하였다. 『심의 후손인 정최(廷最)가 이 뜻을 쫒지 않고 경 等도 싸움을 벌리면 마땅히 엄벌하겠다』는 분부였다. 갑신년(1764년) 5월13일 석강(夕講)때에 승지 김화진(承旨金華鎭)이 윤면교 等의 상소를 읽어 내려감을 마친 즉 왕이 가로되 『참으로 이상하다. 당초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나도 과연 믿지 않았는데 마침내 비석을 얻었으니 역시 성의의 소치라고 본다.』고 말하였다. 영상 홍봉한(領相洪鳳漢)이 가로되『신의 생각에도 이상히 여기는 바로소이다. 백여년간이나 잃었던 분묘를 지금에 와서 찾는다는 것은 어찌 희귀한 일이 아니겠아오리까』고 말하자 김화진이 아뢰되『신은 윤면교의 집안과는 인척관계이므로 들었사온데 과연 여러 달을 두고 확증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여 구갈(舊碣)을 얻었으니 그 정성과 함께 신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왕이 기로되『과연 그렇다』 홍봉한이 여쭈어 가로되 『제신이 어찌 외손 된 자가 없을 수 있겠으며 전하 역시 그 외손이 아니옵니까. 특별히 돌보아 주어야 할 줄로 아옵니다』고 아뢰었다. 영조대왕께서도 그 윗대의 왕비가 우리 윤씨가 많았으니 외손뻘이 되는 것이다. 왕이 가로되『백성을 다스리기가 극히 어렵다. 본 고을에서 조묘(造墓)케 하라』고 하교하신 후 『예관을 보내어 치제케 하라』하시었다. 당초의 왕께서도 심정승의 혼령에 미안하다 하시고 동산소(同山所)로 수묘를 하라고 하시었으나 심정최도 왕명을 어기고 자기의 조상에게만 좋도록 하려고 하였고 우리 종중에서도 심가의 소행에 원한을 품고 있는 터이라 그 후에도 분규를 수없이 거듭하여 상소가 연달아 올라갔다. 왕명이 비록 엄하였지만 양쪽의 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최후에는 심정최와 첨지공 희복(僉知公熙復-문숙공 장파인 남원파)을 왕이 친히 불러서 심정최로부터 비석을 파묻은 것과 옮겨 세운 것을 자복케 하시고 희복公에게는 公이 지나치게 왕에게 대들었다고 하여 죄를 다스렸으니 이는 즉 희복公이 왕에게 『대왕은 문숙공의 외손이 아니십니까』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왕은 심가의 묘에 계단을 없애고 공의 묘소를 성분(成墳)케하고 다시는 유영찾는 일을 벌이지 말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자손으로써 원한을 풀지 못하고 유한을 천추에 남기게 하였으며 이로써 문강공의 묘소는 영원히 찾지 못한 것이다. 왕명을 어길 수 없어 후손들이 유한을 억제치 못하고 영조40년 갑신(1764년)에는 팔도의 제종 약 8백여명이 묘소 아래 모여 심가네 비석을 파 옮기고 문숙공의 신도비 감춘 곳을 찾고자 하다가 심가측과 충돌되어 편싸움이 벌어진 일도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장(門長)인 도사 벼슬을 지낸 희복公께서는 마침내 왕에게 대들어 죄를 다스림 받아 그 장독(杖毒)으로 원통히 돌아가시었으니 우리 종중의 원한이 어떠하랴. 그해 영조는 어제의 제문으로 『조선국왕은 도승지 윤동섬(尹東暹)을 보내어 고려 윤문숙공의 묘에 제사한다』고 하여 조분(造墳)과 동시에 치제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심가와의 통분으로 인연을 맺은 후손들은 그 분함을 억제치 못하여 종종 원안을 풀고자 하는 사단이 일어났다. 철종11년(1860년) 10월 향사 때에 자산(慈山)종인 면갑(勉甲)이 심가의 비석을 쪼아내고 후손 희배(羲培)는 향유사로써 경향을 3파(파평, 남원, 함안) 여러 종중에 통문을 보내어 심가의 비석을 파묻자고 하였던바 심가들이 원한을 품고 와서 교자(轎子) 두 글자를 공의 비에서 벗겨 버렸는데 다음 해에 효헌공 교성(斅憲公 敎成)이 교자총비를 개수립하였고 음기는 효문공 정현(孝文公 定鉉)이 썼다. 8.15광복 후에 심묘를 상당한 보상을 주어 이장토록 하고자 후손들과 심씨 사이에 논의가 있었으나 여의치 못하다가 심총을 파내어 버리자는 의논이 일부에서 일어나서 양주 종인 병순(炳淳)이 인부 십여명을 데리고 밤을 타서 심총을 굴총하였으나 워낙 계획적으로 견고하게 회를 사용하여 파묻은 탓으로 날이 밝도록 목적을 달성치 못하였으니 원래 그들이 후일에 어떠한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먼 일을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이 발각되어 병순(炳淳)은 개성형무소에서 수개월간 옥중 생활을 하였다. 백암안응창십유록(栢巖安應昌拾遺錄)에 『고려명상(高麗名相) 윤모의 의관과 신발을 좌수 분수원에 매장하였으되 다만 고찰할만한 각석(刻石)이 없어 후손들이 그 묘처를 잃었다. 근세에 와서 심상지원(沈相之源)이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장지를 정하였으니 이곳이 윤상(尹相)의 장산(葬山)이다. 흙을 팔 때 그 묘지(墓誌)를 얻었지만 수습하여 쓰지 않고 묘지를 없앴으므로 윤씨가 그 분영을 찾지 못하여 전부가 심씨 문중으로 귀속되었다』고 씌여 있다. 심지원의 조부 종침(宗忱)의 장사날이 광해군6년이니 그때 안응창의 나이가 12세였고 그 아버지 심설(沈偰)의 장사날이 선조3년이요 지원의 장사가 현종3년으로써 처음에 장사지낼 때에도 청룡 밖 이가산(李家山) 근처였는데 그 후에 이장하여 문숙공 산소의 상광(上壙)을 눌러 쓴 것이다. 이와 같이 심가들이 장사지낸 후 영조 정묘년(1747년)에 발간되었다면 우리 후손으로서는 근 백년만에 비로소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할 것이니 선조의 묘소에 대해서 너무 등한시 하였고 후손들로서 성실치 못한 부끄러움을 면치 못할 것이다. 그 후 서기1950년 6.25사변 이후에도 문숙공의 묘소에 대해서 심가 측과 끊임없는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가 1969년 심총과의 사이에 곡장(曲墻)을 쌓았다. 공의 묘소에는 묘표음기(墓表陰記)가 있고 묘지(墓誌)가 있으며 또한 신도비가 있는데 묘표음기에는 공의 묘소를 실전한 것으로부터 되찾은 경위를 기록하였는데 21대손 정헌대부(正憲大夫) 전 공조판서 겸 세자시강원찬선봉구공이 지으셨고 22대손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춘추관사 동섬(東暹)公은 전면에 큰 글자로 고려수태보문하시중영평백문숙공윤관지묘(高麗守太保門下侍中鈴平伯文肅公尹瓘之墓)라고 쓰고 22대손 통정대부사간원대사간지제교 방(坊)公은 음기를 쓰셨다. 그리고 묘지(墓誌)는 공의 행적을 그대로 기록한 것인바 26대손 숭정대부이조판서 겸 예문관제학 자승(滋承)公이 쓴 것이다. 또한 신도비는 서기1966년에 서울에 사는 후손 경수(敬秀)가 단독으로 성재를 내어 세운 것이다. 그 후 당연한 귀결이지만, 파평윤씨대종회의 윤정원 대종회장과 청송심씨의 심명구대종회장간에 드디어 대의와 정의의 결단으로 심가 측의 분묘를 이장하기로 결정하고, 2008년도에 파평윤씨 윤철병 대종회장 임기 중에 심묘의 이장을 완료함으로써 윤,심간의 400여년간의 길고 긴 싸움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고 문숙공 윤관 대원수님의 편안함을 도모하게 되었다.
참으로 후손으로써 천추의 한이요, 그동안의 무수한 선조님들께서 목숨과 피와 땀으로 헝클어진 역사를, 이제라도 그 한을 풀어 낸 것은 또한 조상님들의 은덕과 보살핌이 있어서 일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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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당시 어려운 결정을 한 청송심씨의 고 심명구대종회장님은 이장 결정 후 이장 작업을 보지 못하고 별세함) 이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고 심명구님의 명복을 빕니다...
감사함니다 여러 어르신 들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후손에 한사람으로써 여러 종친께 머리숙여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저는 33세손 구용 이라함니다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 드립니다~~~~
참으로 긴~세월이었습니다. 문숙공 묘터는 명당자리거든요. 왜인지 알지요? 행길건너 앞산에 뵈이는 노적봉 3개나 있어~요~~! 노적봉은 쌀을 쌓아논 형태로써 곧 富를 일컫는거든요. 그래서 우리 윤문은 아직까지 크게 배를 골지않고 조상의 덕으로 지금까지 자존심으로 물마시고 이쑤시게로 품위를 지키는 절개로 버티워 졌기때문에 파평윤씨는 뼈대가 있다? 다시말해서 자존심으로 비굴하지 않으려는 애씀이 있어 타 문중(성씨가 다름)이 부러워하고있습니다 그려. 특히 뼈대가 있는 타 문중이 파평 윤씨 女식을 데려 갈때 하늘에 감사한다 하지않습니까? 그러니 청송심씨 심온은 세력이 당당할때 얼마나 문숙공 묘터가 부러웠겠습니까?
공간이 부족해서 못다한 이야기 마져할께여~ 정정공(15世 尹 璠(윤번)의 여식 <수양대군을 세조로 왕위을 이어받게 한 정희왕후입니다>3대를 왕위를 수렴청청하여 정치를하셨던 분은 한국사에는 볼수가 없지요. 거기다가 5대후손 之任(지임)여식인 문정왕후가 또 왕비로 간택이 되었는데 앞서 가길 좋아했던 윤지임님의 5째아들 윤원형과 정난정의 객기로 그때부터 파평윤씨는 벼슬도 하지말고 납작 엎드려 지내며 목숨이라도 버텨 후손을 관리하라는 윤지임의 유언으로 비석에 비문마져 쓰지 못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다행이 저희가문인 윤지임님의 3째 아들인 원필님의 3째아들(천안공파 尹繪) 윤회님의 증손자(다음으로)
인천 남동구 도림동 (묘역)24세 윤 상전님 의 고증손인 東奎(동규)의 아들 光魯(광노)의 혼인으로 문숙공의 묘역을 되찾게된 동기 였음을 윤문의 후손들은 기뻐해야 할것 같습니다. 역사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습니다. ^*^ 너무 많은 토를 달아 미안합니다.
큰별님, 은행나무님 안녕하세요..... 우리의 것을 지키고 발전시키고 또 후손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이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항상 즐겁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