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第 1 編 海兵隊 略史 槪要 한국 해병대는 1949년 4월 15일에 신현준 중령을 초대 사령관으로 하여 해군에서 편입한 장교 26명과 하사관 54명 그리고 병 300명(해군 13기 가운데서 특별 모집한 해병대 병 1기생)으로 2개 소총중대(270명)와 본부(15명), 근무중대(70명), 방첩대(10명), 경리대(15명)로서 편성되어, 진해시 덕산비행장에서 380명의 적은 병력과 보잘 것 없는 장비를 가지고 창설되었다. 창설배경을 보면, 1948년 10월 여수·순천 반란 사건의 진압에 참가한 해군 임시함대의 함장인 신현준 중령이 "상륙군이 없어 반란군을 완전 진압하지 못하였다"는 전투상보를 보고하자,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은 김성삼 대령에게 해병대 창설을 지시하게 되었다. 그 때 해군은 함정 세력으로 국내 정세의 혼란을 평정하는 데 크게 이바지할 수 없는 실정이었으므로, 삼면이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나라의 자연 조건에 따라 수륙 양면 작전의 필요성이 증대되어 상륙 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해병대를 창설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새로 태어난 대한민국의 무궁한 앞날을 보전하기에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해병대는 탄생과 더불어 진주와 제주의 공주 토벌 작전에 출전하여 갖은 어려움 속에서도 맡은 임무를 다하였으며, 민심 수습, 선무 활동 및 치안 확보로 진주시민과 제주도민에게 크나큰 신뢰를 안겨 주었다. 한국 동란이 일어나자 해병대는 어린 나이인데도 1950년 7월 16일에 장항·군산·이리 지구에서 첫 전투를 치루었으며, 그 뒤 함양· 진주지구 전투에서 적을 막고 쳐부수면서 효과있는 지연전을 벌였다. 한국동란 이후 후퇴를 거듭해 온 아군은 50년 8월 1일경부터 낙동강 교두보선을 확보하고 반격작전에 대비하고 있던 중, 해병대 김성은 부대(1개 대대)는 경남 진동리 서방 고사리지역에서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북괴군 제6사단의 예봉을 꺽고 침공을 저지시켰으며, 한국전쟁 발발이후 대대 규모가 최초로 대승한 전과를 세움으로써 대통령으로부터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획득하였다. 그 이후, 킨(KEAN) 특수임무부대의 대규모 반격작전에 참가한 해병대는 진동리지구 전투에서 적을 격퇴하고 마산 - 진동리로 통하는 도로를 확보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더욱 튼튼히 구축하는데 기여하였다. 동년 8월 17일 통영지구 전투에서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해군함정의 지원 엄호하에 장평리 해안에 한국군 최초 단독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적 7사단 1개대대를 격멸함으로써 전략 요충지 마산, 진해로의 적 해상 봉쇄기도를 좌절시켰던 바 당시 외신기자들은 한국해병대의 용맹성을 "귀신잡는 해병대"라고 격찬하였다. 낙동강전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1950년 9월 15일,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해병대를 선두로 하여 세계 전사에 찬연히 빛날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전개하였다. 제7합동상륙기동부대는 261척의 대함대를 동원하여 동년 13일부터 15일까지 48시간 동안 항공모함 함재기 200대의 공중폭격과 함포사격을 실시한 후, 9월 15일 06 : 30분 미 해병대 제5연대 3대대가 20척의 상륙주정으로 월미도 녹색해안에 상륙하였으며, 동일 17 : 30시부터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한국 해병대는 400여 척의 상륙주정에 분승하여 적색해안과 청색해안에 상륙하여 인천시가지 소탕전을 전개, 해안두보를 확보함으로써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켰다.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한·미 해병대는 9월 18일 경인국도를 따라 부평으로 진격, 행주나루터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행주산성을 탈환하였으며, 한국 해병대는 미 해병대 제1사단과 함께 서울탈환을 위한 선봉부대로서 서울 서측방에서 수도 중심부로 공격을 게시하였다. 한편, 미 육군 7사단과 한국 육군 제17연대는 서울 남측방과 동측방에서 우회 포위기동으로 적의 퇴로를 차단하는 작전을 전개하였다. 서울 서측방 돌파작전시 한국 해병대 제1대대는 미해병대 제5연대와 함께 수색방향으로 진격하여 북괴군의 서울 사수 방어선인 연희동 104고지 일대에서 2차에 걸친 치열한 쟁탈전 끝에 적을 격퇴시킴으로써 수도 탈환의 발판을 마련하였으며 북괴군은 최후 방어선인 연희고지군 전체를 탈취당함으로써 전투의지는 저하되었고 급기야 서울을 포기하고 의정부 방면으로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9월 25일부터 실시된 시가지 전투에서 한 해병대 제2대대는 마포, 원효로를 거쳐 용산경찰서를 점령하였으며 삼각지 - 남영동 - 서울역 일대의 잔적을 소탕한 후 서울시청에 돌입하여 적을 완전소탕하고 광화문을 경유하여 9월 27일 06 : 10 분에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였다. 한편, 김성은 부대는 9월 25일 후속제대로 인천에 상륙하여 해병대 제5대대로 개칭하고 북악산 일대에서 시가지 소탕전을 전개하였으며, 한 해병대 제3대대는 단독작전으로 김포비행장을 공격하려던 적 2개대대를 격퇴시킨 후, 김포반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이로써 9월 28일 저녁을 기하여 서울시는 아군에 의하여 완전히 탈환되었고, 9월 29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하여 맥아더 원수, 국회의원 및 정부요인들이 서울로 입성함으로써 전 국민이 열망하는 역사적인 수도 환도식을 중앙청 광장에서 성대히 거행하였다. 동년 10월부터 국군과 유엔군이 승승장구 북진을 개시하였으며 해병대도 묵호 및 원산에 상륙하여 함흥까지 진격하였으나, 중공군의 불법개입으로 원산과 함흥에서 철수하여 진해로 집결하였다. 진해에 집결한 해병대는 동년 12월 20일 해병대 제1연대와 독립 제5대대로 재편성하고 영덕 및 안동지구로 출동하여 북괴군의 남침진로를 차단하던 중 51년에 접어들면서 다시 북진작전을 재개하여 독립 제5대대는 서울재탈환 작전을 위해 인천에 상륙, 김포지구작전을 전개하여 김포반도를 장악하였으며, 해병대 제1연대는 중동부전선에 투입 영월, 홍천, 화천지구 전투를 수행하였다. 51년 6월 초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격퇴한 후, 캔사스(KANSAS)선으로 진격하고 있을 때 북괴군 12사단 정예부대가 중동부 산악지역 태백산맥 중 가장 험준한 전략적 요충지 도솔산(1,148고지)을 난공불락의 진지로 구축하고 고수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 세계 최강의 미 해병대 제1사단 5연대가 공격작전을 감행하였으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실패하고 한국 해병대 제1연대가 투입되어 피와 땀의 혈전 17일간의 끈질긴 공격 끝에 24개 목표를 점령함으로써 불과 1개연대 규모로 적 사단병력을 무찌른 기록적인 도솔산의 전승기록을 낳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교착상태에 빠진 우군전선의 활로를 개척하였으며 이 대통령께서는 아 해병대를 방문하여 "무적 해병대"이라고 칭하면서 부대 표창과 휘호를 하달하였다. 51년 8월 31일 한국전쟁이 교착단계에 접어든 직후 대규모 작전인 펀치볼지구 전투에 참가한 한국해병대는 양구 북방 만대리 분지(POUNCH BOWL) 북단 능선 일대 고지군인 924, 1,026고지(일명 김일성, 모택동 고지)전투에서 북괴군 제1사단 3연대를 치열한 공방전 끝에 격멸하고 4일 만에 고지를 완전 점령하여 만대리 분지(POUNCH BOWL)를 장악함으로써 한국해병대의 위용을 국내외에 크게 과시하였다. 한편, 동·서해안 봉쇄를 위하여 1951년 2월부터 휴전시까지 해병대는 1개연대 규모의 병력을 서해안(백령도, 교동도, 연평도, 석모도, 초도)과 동해안(여도, 양도)에 상륙시켜 주요 전략도서를 확보하였으며 특히 함경북도 명천에서 3.6km 떨어진 양도작전에서 독립 제43중대는 적 상륙부대 1개대대를 완전 섬멸하는 전공을 세웠다. 52년 3월 17일 판문점, 휴전회담을 둘러싸고 한치의 땅도 더 확보키 위한 피아간의 공방이 치열한 가운데 수륙양면 방어의 중책과 수도서울 방어에 역점을 둔 MIX MASTER 계획에 따라 해병대 제1연대는 동부전선에서 서부전선 장단지구로 이동하여 해병대 제1전투단으로 증편하였으며, 약1년 4개월간 임진강을 배수진한 장단(사천강) 및 연천 지구에 투입하여 군사분계선을 아측에 유리하게 확정짓도록 하였으며,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개성 - 문산축선을 지키다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조인을 맞아 통한의 휴전선을 남긴 채 정전을 맞이하였다. 해병대는 한국전쟁 발발이후 휴전시까지 만 3년간 20여 개의 전선을 전전하여 「常勝不敗 의 神話」를 남긴 전통을 수립하면서 적사살 2,398명을 비롯하여 귀순, 포로 등 39,419명의 인적손실과 전차와 야포를 비롯한 장비 및 대·소화기 등 무려 34,340점의 물적손실을 적에게 입히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는 한편, 5회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비롯하여 1회 미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휴전이후에도 해병대는 계속 서부전선에서 수도 방위 및 서해 5개도서 방어중책을 수행하고 있으며 55년 1월에는 대망의 상륙사단을 창설하였다. 이렇듯 싸우면서 자라 온 해병대는 계속 국가의 전략 기동 예비대로서 부과된 사명을 다하였다. 1965년에 접어들면서 자유우방인 월남이 공산측의 사주를 받아 광분하는 「베트공」에 의해 유린당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는 국민의 정의감과 단호한 결이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공산세력을 분쇄하여 영원한 자유와 정의를 위하겠다는 세계사적 사명과 의의를 지니고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파병을 단행하게됨에 따라 해병대는 1965. 1. 5일 제1독립공병중대를 편성하여 3월 10일 파월한 후 1965. 9. 20일 해병대 제1사단 제2연대를 기간으로 새로운 전투여단인 제2여단(청룡부대)을 창설하여 최초의 전투부대로 10월 3일 파월하였다. 건군사상 처음으로 해외원정하는 전투부대의 선진으로 파월한 청룡부대는 1965. 10. 9일 월남 「캄란」만에 상륙하였다. 1965. 12. 23일까지 「캄란」,「판랑」,「나트랑」방어전을 수행하다가 「투이호아」로 이동하여 「청룡1호」작전(여단급)을 전개하여 공산군의 해상보급추진 요람지인 봉로만 일대에서 준동하던 월맹정규군 약 1,500명을 완전 소탕함으로써 월남 대동맥인 1번 도로를 개척하고 월남 3대 곡창의 하나인 「투이호아」평야를 평정하였다. 특히, 「해풍」작전에서 고 이인호 소령은 적이 던진 수류탄을 안고 장렬히 전사함으로써 부하들을 위한 그의 초인적인 희생정신은 해병대 뿐아니라 60만 국군의 귀감이 되었다. 66년 8월 17일에는 「북극성」작전을 전개하면서 추라이지역으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황금」,「비봉」,「용안」작전을 전개하여 적정이 험한 추라이지역내 전술책임지역을 확보하였으며, 특히 짜빈동작전에서 청룡부대 3대대 11중대는 월맹정규군 2개 연대 병력의 인해전술 및 파상적인 야간 기습공격을 받고도 중대전술 기지를 사수한다는 일념으로 육박전 및 역습을 실시하여 4시간의 사투 끝에 그들을 격퇴, 적사살 243명의 대전과를 올림으로써 월남전 사상 최대의 전승을 기록하였다. 당시 짜빈동대첩을 직접 취재하거나 전해 들은 사이공의 3백여 외신기자들은 「신화를 남긴 해병대」이라는 표제하에 대서특필로 보도하였으며, 이 전공으로 중대원 전원 1계급 특진과 한·미 대통령 부대표창을 수상받았다. 67년 12월 12일에는 호이안지구로 이동한 청룡부대는 「괴룡」,「용진」,「서룡」,「황룡」작전을 전개하여 지역내 적을 98% 소탕하고 호이안지역을 평정하였다. 이 지역 작전에서 다낭 서남방 25km 지점인 「쿠엠쿠」 강가에서 적의 식량창고를 발견하여 월남전 사상 최대의 식량(275톤)을 노획한 승룡 7 - 21호 작전, 난공불락이었던 월맹정규군 36연대의 요새지인 「고노이」섬을 점령 확보한 승룡 15 - 1호 작전, 인천상륙 작전 이래 처음으로 한·미 해병대가 전개한 월남전 사상 최대의 여단급 상륙작전(한 해병대 RLT, 미 해병대 BLT)인 「베리아」반도 상륙작전 등은 해병대사에 길이 빛날 기록들이다. 작전과 민사심리전에 걸친 청룡의 활약으로 파월 6년 5개월간 여단급 작전 55회와 대대급 작전 113회를 비롯한 151,437회의 소부대활동을 통하여 9,619명의 적을 사살하고 포로 687명, 귀순 569명, 용의자체포 2,981명, 개인화기 4,000정, 공용화기 284문 등을 노획하는 대전과를 올리는 한편 8,810톤의 구호활동, 968,296명의 대민진료, 403,729명에 대한 교육지원, 1,593동의 건설지원, 450,064명에 대한 친선활동 등 대민봉사활동을 활발히 전개함으로써 3회의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그 후 해병대는 창설 24년 6개월 만인 1973년 10월에 국방부 훈령 제157호에 의거 해병대 사령부가 해체되는 역경을 맞았으나 국가와 민족에게 충성된 군대가 되기 위해 노력한 결과 1977년 1월 1일 도서방어부대를 모체로 한 제6여단과 양성 교육을 담당하는 제2훈련단을 창설하게 되었다. 청룡부대로 월남에 파병되었다가 개선 귀국한 뒤 서부전선의 김포반도에 다시 배치된 제2여단을 모체로 하여, 1981년 4월 16일에 제2사단을 창설하였다. 한편 해체된 지 14년 만인 1987년 11월 1일에 해병대 사령부가 다시 창설되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1990년 10월 1일에 국군조 직법이 통합 이전과 비슷하게 제정·공포됨으로써 해병대사령부가 해병대 부대를 지휘할 수 있는 이름 그대로의 법률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 뒤 1992년 12월 1일에 모든 해병대 부대를 상륙작전 위주로 운영하고, 모든 예하부대를 지휘하여 연합사 전략에 비부대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연합해병대사령부(CMFC)가 창설되었다. 해병대 창설 뒤 처음으로 제1사단과 제6여단의 작전권을 포함하여 연합해병대사령부로서 해병대사령부가 완전한 부대 지휘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해병대사령부는 해병대 부대의 작전, 교육 훈련, 행정 등 부대 지휘의 구심점 역할을 할 목적으로, 1988년 4월 15일에 국방부의 '재경부대 교외 이전 계획'에 따라 새 사령부를 경기도 발안 지역으로 결정하여, 1992년 4월 1일에 사령부를 착공, 1996년 4월 6일에 이전함으로써 새로운 해병대 역사의 요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어서 1994년 4월 15일에 해병대 지휘 기능을 보강하기 위하여 해병대사령부가 증편되었으며, 1994년 10월 15일에는 제1사단 해안지원단을 해체하고 '상륙지원단'을 창설하여, 해병대 부대에 대한 군수 지원을 전담하는 부대로서 토대를 쌓아 올렸다. 최근에는 해병대에 알맞은 부대 구조로 개선하기 위하여 1996년 11월 1일에 제2사단은 155미리 자주포, K-3 경기관총과 K-4 고속유탄기관총 등을 도입하였으며, 부대별 기능별로 균형있는 전투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정비대대와 수송대대를 창설하였고, 기간으로 균형에 맞지 않게 편성되어 있던 3개 연대와 포병대대를 표준으로 편성하여 증편하였다. 제6여단은 개전 초 즉응 전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현지 동원 가용 자원으로 도서 지역 안에서 전시 편성이 완료되는 조직의 개념으로 개편하고, 정비중대를 창설하여 자체의 전투근무 지원 능력을 보강하였으며, 제6여단 예속의 연평부대를 실질적인 지휘가 가능하도록 사령부 예속의 직할부대화 하였다. 또한, 해병대의 유일한 교육 부대로서 해병대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2훈련단의 교육 부대에 알맞도록 '해병대 교육단'으로 개편하였으며, 교육 부대에 알맞도록 '일반형 참모' 형태에서 '부장형 참모' 형태로 직제를 개편하였다. 상륙지원단은 명실상부한 해병대의 전투근무지원 전담부대로 육성되도록 첫 단계로 전시 편성 병력을 갖춘 부대로 기능 보강을 하였다. 1998년 3월 1일 해병대 교육훈련단은 사관후보생 54기 이후 25년간 중단되었던 해병대 사관후보생 양성과정을 해군사관학교로부터 인수하고 장교교육대를 장교 교육대대로 개편하여 예하에 장교기초반 중대와 사관 후보생 중대를 편성하였다. 정통성있는 해병대 장교 양성교육을 해병대 주관으로 실시함으로써, 병·하사관·장교를 양성하는 최강부대의 해병대 교육훈련체제가 확립된 실질적인 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한 시대의 역사가 미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듯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창설된 해병대의 발자취는 온갖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불타는 용기와 끈질긴 인내로써 이를 극복하면서 6·25와 월남전에서 구국의 선봉장이 되어 「무적 해병대」,「귀신잡는 해병대」,「신화를 남긴 해병대」라는 영예로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우리 선배 해병대원들의 땀과 피와 그리고 목숨바쳐 쌓은 찬란한 금자탑이었으며, 오늘에 사는 우리 해병대원들은 위대한 선배 해병대원의 혼이 담긴 역사와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나아가야 하며 고단했던 한 때의 역사를 교훈삼아 현 시대가 요구하는, 국민에게 믿음과 사랑을 받는 최강 해병대로 승화시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막강한 해병대의 「常勝不敗」의 전통은 영원히 살아 빛날 것이다. 第 2 編 海兵隊 歷史
제 1 장 해병대 창설
1. 배경 및 동기 가. 국가이익과 군사전략 수행상 상륙전 전담부대의 필요성 나. 삼면이 바다인 한반도의 입지적 조건 다. 여·순 반란사건 후 수륙양면 작전의 필요성 절박 라. 한반도 대·소 도서 확보를 위한 상륙전 부대 필요 마. 해군 육상기지의 경비부대 필요
2. 창설(1949. 4. 15) 가. 장소 : 진해 덕산 비행장 나. 병력 : 380명 다. 기구
중 령 : 신 현 준 중 령 : 김 성 은
(15명) (16명) (70명) (10명) (270명) ※ 창설 근거 : 대통령령 제88호 (1949. 5. 5 해병대령 공포) 3. 창설경위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와 순천 지구에서는 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육군 14연대 내에 공산 좌익 침투 세력이 조직되어 있던 김지회(중위), 지창수(상사), 홍순석(중위) 등 3명의 주모자와 40여명의 남로당 프락치들이 주도한 반란·폭동사건이 발생하여 그 두 지역에서 군·경을 비롯한 약 2000여명의 관민이 살해당하는 끔찍한 비극이 초래된 바 있었다. 그런데 그 사건은 해방 후 정치적 사회적인 혼란을 반증하는 불행한 사건이긴 했지마는 다른 한편으로는 그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창설을 보게 된 것이 곧 대한민국의 해병대였다. 사건이 발생하자 육군에서는 그 당시 광주 지구에 주둔하고 있던 제2여단과 제5여단을 통합한 전투사령부를 설치하여 폭동진압작전을 전개한 끝에 22일에는 순천을 탈환하고 27일에는 여수를 탈환하는 데 성공했으나, 22일 육군의 진압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편성했던 해군진압부대(임시함대)는 해상봉쇄 임무를 띠고 신현준 중령이 지휘하는 함정을 여수 앞바다에 출전시켰으나, 제반 여건과 능력의 한계성 때문에 해상으로 도주하는 소수의 반란군을 분쇄했을 뿐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리하여 손원일 참모총장을 위시한 해군 수뇌부에서는 그 작전의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는 과정에서 대두된 다음과 같은 가정적인 판단 즉 "만약에 우리 해군에 육전대나 해병대와 같은 특수한 전투부대가 있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가정적인 판단과 그러한 판단에 따라 제시된 일부 지휘관 및 참모들의 건설적이고 애군적인 의견과 건의가 그러한 특수부대를 갖는 것이 삼면환해의 조국강토를 지켜 나갈 우리 해군의 필연적인 당위성으로 인식되고, 또 해군의 현실과 미래를 위해 그 필요성이 절감됨에 따라 마침내 그 창군기의 해군 수뇌부에서는 결코 용이할 리 만무한 시대 여건을 무릅쓰고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 그 역사적인 사건을 계기로 끈덕지게 박차를 가한 끝에 드디어 그 어려운 일을 성사시키고야 말았다. 이것을 계기로 해군 수뇌자들이 해병대 창설 계획을 적극 추진하였으며, 당시 국방부장관 이범석씨도 이의 필요성을 인정하여 마침내 승인을 보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1949년 2월 1일 당시 해군통제부 참모장 신현준 중령이 해병대사령관에 임명되고, 통제부 교육부장이던 김성은 중령이 해병대 참모장에 각각 임명되어 창설 준비에 분망한 결과, 드디어 동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에서 병력 380명(해군으로부터 편입한 장교 및 하사관 80명과 해군 신병 제13기 중에서 선발한 해병대 병 제1기 300명)으로 해병대 창설식을 거행하였으나, 이 날은 한국 해병대의 발전을 기약한 역사적인 날로 영구히 기념될 해병대 창설일인 것이다. 창설 당시 해병대는 다 떨어진 격납고 천장 위로 밤 하늘의 별을 헤고, 보잘 것 없는 시설과 악조건에서도 해병대 가족은 한 덩어리가 되어 대한민국 해병대를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에 불탔다. 이것이 장차 6·25 전쟁 시 전략적 가치의 비중이 큰 상륙부대로서 중책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해병대의 굳건한 초석이 되었던 것이니, 이 때 벌써 해병대의 정신적 기초 내지는 해병대 정신인 '가족적 단결정신' '애민정신' '인내의 정신' '임전무퇴의 정신'이 뚜렷한 구현을 보아 해병대 전통의 효시가 되었던 것이다. 한편 해병대는 1949년 5월 5일 대통령령 제88호에 의하여 해병대령이 공포되어 법적으로 승인을 얻게 되었다.
4. 창설기 전투 상황 가. 진주지구 공비토벌작전('49.8.29 - 12.26) (1) 개 요 1949년 8월 29일 진주에 출동한 해병대는 여·순 반란사건 이후 지리산을 근거로 하여 출현하는 공비를 토벌하면서 진주 일대의 치안을 유지하던 중, 10월 27일 300여명의 공비로부터 야간기습을 받았으나 적으로부터 기선을 제압당한 불리한 여건에서도 선전 분투하여 이들을 격멸함으로써 처음으로 국민에게 알려졌다. (2) 주둔 부대 : 1개 대대(부대장 중령 김성은) (3) 주요 활동 : 공비 토벌 및 경계, 민심 수습, 선무 공작, 자체 훈련 (4) 진주 주둔부대 편성표 1949. 8. 29 (병력 : 550명)
중 령 : 김 성 은
( 65명) (120명) (118명) (200명) 대위 고 길 훈 대위 김 재 수 중위 안 창 관 중위 김 용 국 (5) 진주 주둔 여·순 반란사건 이래 잔여 공비들이 지리산에 몰려들어 이 곳을 근거로 하여 진주를 위시한 주변 일대의 도시와 촌락에 출몰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1949년 8월 26이러에 대구에서 해병대사령관 신현준 대령과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준장과의 협의에 의하여 해병대는 진주에 주둔하여 공비소탕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해병대는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는 1개 대대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8월 29일에 진주로 이동하여 진주시, 창녕군, 함안군 일대를 경비 담당지구로 하여 공비 소탕에 임하였다. 해병대는 진주에 주둔하면서 공비 토벌을 하는 한편, 자체의 정신훈련과 아울러 전투훈련, 민심을 수습하는 선무공작에도 무척 애를 썼다. 진주 주둔기의 해병대 표어는 "백성 없이는 전투도 없다"는 것으로서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온갖 방도를 강구하였으며, 수차에 걸친 공비 내습을 완전히 분쇄한 해병대의 분투를 찬양하는 서한이 주한 미군 고문단장 "로버트" 준장으로부터 신 사령관에게 보내졌고,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계 인사들이 해병대를 위문하였다. 이와같이 해병대가 진주에서 만 4개월 동안 주둔하면서 민심 수습, 선무공작, 공비 소탕에 많은 성과를 거둔 후, 12월 26일 진주 시민과 석별하고 진주를 출발, 제주도로 이동하게 되었다. 나. 제주 공비토벌 작전('49.12.28 - '51.3.31) (1) 주둔경위 1948년 초 제주도 내 공비 병력은 약 1,500명으로 남로당 제주도지구 군사부 총책 김달삼 일당이 주동이 되어 4·3 폭동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의 정국은 유엔 안보회의 결의와 유엔 한국위원단의 결정으로 남한 단독선거가 5월 10일에 실시하기로 확정되자, 남로당을 비롯한 좌익 계열은 남한 단독선거를 방해하는 실력 투쟁을 벌여, 남한의 제주도만이라도 무력으로 교란하여 5·10 선거를 무너뜨리고자 한 것이었으니, 제주도 주군 육군 제9연대에 군내 세포책이 잠입하여 남로당인 김달삼과 호응하여 1948년 4월 3일을 기하여 제주도 전역에 방화와 파괴를 일삼고, 우익인사를 학살하며, 양민으로 하여금 5·10선거를 기피하는 방향으로 공포심과 불안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 사건은 결국 육군(11연대, 9연대, 2연대)과 경찰의 격멸 작전(1948.5.15 - 1949.2.28)으로 진압되기는 하였으나, 잔여 공비는 약 100여명이 한라산을 근거지로 세력 부식에 급급하고 있던 때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9년 12월 28일 해병대는 진주에서 제주도로 이동하여 육군 독립 제1대대와 교대하고 사령부와 2개 대대로 증편하는 한편, 한라산을 근거지로 출몰하는 공비 소탕 작전에 임하였다. 해병대의 제주도 주둔은 육군 부대의 제주도 경비 임무 수행상 군용물자의 보급과 수송 문제로 많은 불편을 겪어 왔으므로, 육군 측은 해군 측과 협의를 통하여 해병대가 제주지역 경비 임무를 맡게 되었다. (2) 해병대 작전 (가) 해병대 임무 1) 해병대 자체의 정신적, 육체적 훈련 2) 4·3사건 이래 물심양면으로 피폐한 30만 도민의 재기의 힘을 주는 한편, 그들을 생활 안정의 길로 인도하는 것 3) 한라산을 근거지로 한 공비를 토벌하는 것 (나) 해병대 편성표 (*** 표가 깨져 있어 생략함!!!) (다) 부대배치 ○ 제주읍 부대 : 사령부 본부, 제주읍 부대 ○ 모슬포 부대 : 제1대대(북제주군), 제2대대(남제주군) (라) 작전경과 1) 민심수습 작전 ○ 공비토벌작전에 앞서 도민의 민심수습 작전으로 주민 계몽운동을 실시, 엄정한 군기 확립 노력 ○ 도내에 산재한 무의촌에 해병대 의무대 파견, 순회 진료 실시 ○ 시설 복구 공사 : 도로, 하수도 보수 ○ 농번기 대민 지원 실시 ○ 주민 계몽 강연 실시 * 제주도민 신뢰회복, 4·3사태 이후 품고 있던 군에 대한 원한과 공포심 해소 2) 공비 소탕 작전 가) 제1기 작전('50년 2월 - 6월) ○ 제1대대(923부대)는 정보참모 고길훈 소령의 지휘 하에 정보대로서 그 예하 부분대로 구성된 유격대를 편성, 한라산 서쪽 지역 오백장군과 1394고지 부근에서 토벌작전 전개 ○ 전과 - 제1대대 : 사살16명, 포로8명, 기타문서 노획 - 제2대대 : 사살3명, 장비 노획 - 제3소대 : 사살5명 나) 제2기 작전('51년 1월 - 3월) ○ 해병대사령부는 1950년 12월 15일 함흥에서 진해로 철수하여 부대 정비 기간 중 국방부에서 제주도 공비에 의한 피해가 증가하므로, 6·25 직전 제주도에서 공비 토벌 작전을 담당했던 해병대 부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해병대사령부는 1951년 1월 14일 1개 중대 규모(제주 해병대 부대장: 권석기 중위)의 해병대 부대를 제주도에 파견하였다. ○ 제주 해병대 부대는 제주 경찰 공비 토벌 1개 소대를 지원받아 4개 소대로 혼합 편성, 제주도 군·경·민 합동 전투지휘소를 설치한 후 공비토벌 작전을 1951년 1월 17일 실시하였다. 지휘소는 한라산 서쪽 서귀포 부근에 위치하고,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1소대는 서쪽, 제2소대는 동쪽, 제3소대는 남쪽에 각각 배치하고 소대 단위의 수색작전을 전개하였다 ○ 전과 - 제1소대 : 사살 3명, 장비노획 - 제2소대 : 사살 38명 - 제3소대 : 사살 5명 (3) 제주도 공비 토벌 일정 1948. 4. 3 : 제주도 폭동사건으로 남로당 좌익세력 분자들이 주요 관공서 일부 장악, 제주도는 법과 질서가 혼란한 사태 발생 1948. 4. 4 : 제주 경찰과 제주지구 경비대 육군 제9연대가 폭동 진압 전개, 성과 미흡 1948. 5. 15 : 육군 제11연대(본부와 1개 대대)는 폭동진압부대로서 제주도 이동 1948. 7. 10 : 대구 주둔 육군 제6연대(1개대대) 제주도 증원 후 제9연대 재편성 공비토벌작전 전개 * 작전기간 : 1948. 7. 23 - 12. 29 1948. 7. 24 : 육군 제11연대 수원으로 복귀 1948. 12. 29 : 제9연대는 대전주둔 제2연대와 임무교대하고 대전으로 이동 육군 제2연대 공비토벌작전 수행하였으나 공비 준동 장기화 조짐 * 작전기간 : 1948. 12. 29 - 49. 2. 28 1949. 3. 2 : 육군 제2연대 주축으로 제주도 지구 전투 사령부 설치후 국군중 최초로 육·해·공군과 경찰로 증강된 합동 작전 전개하므로 새로운 작전형태와 공비토벌 작전으로 대단한 성과를 거둠. * 작전기간 : 1949. 3. 2 - 49. 5. 1 1949. 5. 15 : 제주도 지구 전투사령부 해체 1949. 8. 13 : 육군 제2연대는 독립 제1대대에 임무를 인계, 인천 철수 1949. 12. 28 : 육군 독립 제1대대는 해병대사령부에 임무를 인계 해병대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공비토벌, 민심수습, 치안확보에 매진 도내 안정을 유지시켰음. * 작전기간 : 1949. 12. 28 - 50. 7. 2 1950. 1. 1 : 제주읍부대와 모슬포부대 개편 1950. 6. 25 : 해병대가 제주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임한지 6개월만에 북괴의 전면 남침을 맞아 사령관 신현준 대령은 제주지구 계엄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도내 치안과 해안 경비임무 수행 1950. 7. 13 : 모슬포부대의 제1대대를 기간으로 고길훈 부대 신편 1950. 7월 중순 : 제주도에서 신병 3,000명을 모집하여 보병대대로 증편 훈련시킴 1950. 9. 1 : 사령부와 3개 보병대대 제주도 출항, 진해를 경유하여 9. 6일 부산에 도착 1950. 9. 12 : 해병대 인천상륙작전 참가위해 부산 출항 9. 15일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 참가 1950. 9. 14 : 제주도에 제2차 공비토벌작전으로 공비 무력 격멸 재기불능 상태 도달, 50여 명의 공비 사살 해병대 1개 중대(권석기 중위)는 군·경·민 합동 전투지휘소를 설치 * 작전기간 : 1951. 1. 14 - 3. 31 해병대사령부는 '50. 12. 15 함흥, 원산 지구 전투를 마치고 진해로 철수, 부대 정비 중, 국방부에서 제주도 한라산을 거점으로 공비 준동이 심해지므로 6. 25 직전 제주도 공비 토벌 작전을 담당했던 해병대 부대를 파견 결정하였음. 1951. 1. 22 : 한국전쟁을 돌발이후 육군 제1훈련소가 제주도 모슬포로 이동 1951. 9. 25 : 해군 제주경비부 설치 1953. 2. 3 : 육군 무지개부대 제주도 공비토벌작전 실시 * 작전기간 : 1953. 2. 3 - 5. 1 육군 무지개부대는 대유격전 특수훈련을 받은 부대로서 공작대와 기습대의 2개 주요부대로 편성되어 공비토벌작전을 약 3개월 간 실시하였다. *제주도 공비토벌작전은 5년 2개월 간 실시하였음 1965. 10. 15 : 제주 통합사령부 개편 1967. 12. 25 : 제주군 지역사령부로 개칭 1974. 1. 28 : 해군 제6해역사령부로 증·개편 1986. 2. 1 : 제주방어사령부로 개칭 * 참고사항 : 일제시대 제주도 일본 주둔군은 제5군으로 본토 결전에 대비하여 '나가쓰루 사비시게' 중장이 지휘하는 3개 사단과 하나의 혼성사단으로 구성된 병력 6만 여명의 대군이 주둔함. 제5군의 작전 방침은 한라산을 복곽진지로 하여 장기간 주둔함으로써 제주, 모슬포, 서귀포 등 비행장의 사용을 저지 방해하는 데 주둔 목적이 있었음.
제2장 한국전쟁기 1. 장항·군산·이리지구 전투('50. 7. 17 - 7. 21) 가. 개요 적의 주력은 서울, 인천 등지를 경유하여 7월 6일에는 금강을 향하여 쇄도하여 왔다. 당시 제주도에서 훈련과 공비토벌에 여념이 없던 해병대는 처음으로 출동하여 본격적인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7월 15일 고길훈 소령이 지휘하는 약 1개 대대가 해본 작명 갑 제58호로 제주도를 출항하여 전선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이 전투야말로 해병대가 얼마나 한 공훈을 세울 것인가 하는 시금석이 되는 전투였다. 출동하는 용사에게 신현준 사령관은 다음과 같은 간곡한 훈시를 하였다. ○ 대한민국의 새역사를 창건하는 우리 해병대는 민심을 수습하여야 한다. ○ 선발대인 여러 장병들은 해병대의 전통을 세워야 한다. ○ 백전백승의 굳은 신념을 가져야 한다. * 고길훈 부대 편성표 1949. 7. 13
소 령 고 길 훈
중위 한혜택 중위 김광식 중위 이봉출 중위 김종식 (151 화기중대) (152 중대) (153중대)
(나) 작전경과 한국 해병대는 제주도에서 준동하는 공비토벌과 민심 수습 작전을 수행함과 아울러 진정한 호국충정의 길을 가기 위해 불철주야 맹훈련을 하던 중 6·25 동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수도 서울을 함락한 후 대전을 거쳐 호남방향으로 물밀 듯이 남하하는 북괴군 제6사단 13연대로 추정되는 적의 예봉을 저지, 금강산을 방어키 위해 한국 해병대는 1개 대대 규모의 고길훈 부대를 처녀출전시켜 7월 16일 군산에 상륙, 금강을 도하하여 장항 북방 7KM 지점에서 남하하는 적에 대해 기습적인 공격을 감행, 7여 시간을 교전하였으나, 장비의 열세로 군산으로 철수하였으나 적에게 타격을 안겨 주었으며, 그 이후 고길훈 부대는 7월 20일까지 금강을 방패삼아 군산시를 방어, 해군 군산 경비부 육전대와 함께 LST-810 함에 정부미 1만 3천가마와 중요한 정부물자를 탑재 반출한 후 명에 의거 해상으로 철수, 7월 21일 목포에 도착하였으며, 이리 방면에서 지연전을 수행하던 해병대 제3중대는 육군, 경찰과 더불어 밀려드는 적에 대한 결사적인 항전으로 적의 남하를 효과적으로 지연하였다. 해병대 고길훈 부대는 7월 21일 18:00 새로운 작전을 위하여 출발하여 7월 22일 08:00 에 여수항에 입항한 후 M1 소총 및 박격포 등 신장비를 지급 받고 신장비 조작법 교육에 매진하였다. (다) 전투결과 이 최초 전투를 계기로 필승의 신념과 자신감을 얻은 해병대는 적사살 62명, 사상 311명, 포로 5명의 대전과를 획득하였으며, 전사36명, 부상 31명, 행방불명 8명의 손실을 입었다. 3. 해병대 주요 전투 요약 가. 6·25 전쟁
나. 월남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