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원짜리 지폐 속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지난 8월 13일부터 16일까지 3박 4일간,
경북 안동, 백암, 포항 일대에 아이들을 따라 다녀왔다.
안동호반자연휴양림 신나리동, 느티니무실에서 1박을 하고,
다음 날 도산서원과 퇴계의 생가에 갔다.
도산서원 전체가 보이는 이 사진을 어느 위치에서 찍어야할지 몰라
유물 전시관 안의 사진을 찍어 올려본다.
사적 제 170호 도산서원
퇴계 이황 선생은 연산군 7년(1501), 현재의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출생하여
선조 3년(1570)년에 돌아가셨다.
34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단양군수, 풍기군수,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찬성,
대제학을 지냈으며, 사후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70여회나 벼슬을 사양하고 학문연구, 인격도야, 후진양성에 힘써 이 나라 교육 및
사상의 큰 줄기를 이루었고 만대의 정신적 사표가 되었다.
선생은 명종 16년(1561)에 도산서당을 세웠고,
사후 4년만인 선조 7년(1574)에 문인과 유림이 서원을 세웠으며
선조 임금은 한석봉 친필인 도산서원(陶山書院)의 현판을 사액(賜額)하였다.
1970년에 정부에서는 서원을 보수, 정화하여 성역화하였다.
주요 저서로 계몽전의, 성학십도, 도산십이곡, 주자서절요,
심경후론, 예안향약, 자성록 등이 있다.
도산서원 입구의 안동호에 자리한 시사단(試士壇)
-지방 유형문화제 제33호-
조선 정조 16년(1792)에 정조임금이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지방 선비들의 사기를 높여 주기 위하여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를 보인 장소이다.
총 응시자가 7,228명이었고, 임금이 직접 11명을 선발하였다.
도산서원 앞 마당에 있는 400년 된 왕버드나무
세월을 느끼게하는 이 나무를 보존하기 위해서 가지를 쇠기둥으로 받쳐주고 있다.
밖의 불볕 더위에 지친 몸을 식실 겸 유물전시관의 투호 전시품 앞에서
불볕 더위의 바깥에 어떻게 나갈까하고 대문 그늘에서 잠깐 쉬며
손자가 찍은 사진 뒤로 서원의 내부가 보여 올려 본다.
큰 아들 - 두 손자(6, 4학년)와 손녀(1학년), 작은 아들 - 손녀(4살)
도산서원 구경을 마치고 앞의 안동호를 바라보며
도산서원에서 1Km 거리에 있는 퇴계종택(경상북도 기념물 42호)의 솟을 대문
가마가 드나들게 하기 위해서 대문의 문지방이 없고, 대문의 높이도 높다고
큰 손자가 설명을 한다.
퇴계 종택의 내부
퇴계선생 생전에 기거하던 종택은 1907년 일제가 불질러 다 타버리고
1926년 13세 후손이 다시 지은 것이며 현재 사람이 살고 있다.
날씨가 너무 불볕이라 조금만 밖에 있으면 지치고 땀이 비오듯하니
더 오래 볼 수도 없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들 차가운 물만 찾는데
그나마 차를 타면 에어컨이 있어 더위를 식힐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리는 안동에서 다음 행선지인 백암으로 가기 위해 135Km, 2시간 거리를
청량산을 구비구비 넘고 또 넘으며 그 멋진 절경을 구경하며 가는데
스맛폰을 검색하니 산 넘어에 맛집이 있다고 거기서 점심을 먹고 가자고
앞 차인 큰 아들 차에 탄 큰 며느리한테서 연락이 왔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또 한 30분쯤 달려
예약한 백암 한화리조트 로얄실에 여장을 풀고 우리는 잠깐 쉬기로 했다.
며느리 둘은 아이스박스의 음식을 냉장고에 정리하고,
손녀 둘은 목욕탕에 물 받고 물 속에 풍덩 들어가 물장난하며 놀고,
나는 작은 손자와 리조트 편의점에 가서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원한 아이스크림,
우유, 음료수 등을 사다가 시원하게 먹으니 이제야 좀 시원해진 기분이다.
잠깐 쉬고난 후, 동해안 바닷가 후포항에 가서 저녁에 먹을
생물 광어, 우럭으로 회를 뜨고 매운탕거리, 야채 등을 사고 숙소로 왔다.
13일 출발할 때 회사 일이 바빠 같이 못 온 작은 아들이 혼자
백암에 저녁 늦게 와서, 우리 식구는 '부라보'를 하며 즐거운 저녁 식사를 했다.
또 밤에는 노래방에 가서 식구들이 노래를 부르고
손주들의 노래자랑, 재롱과 숨은 끼를 마음껏 발휘하는 것을 보아 흠족했다.
딸네 가족은 중학생이 14일 학교 개학이라 같이 못와서 서운했는데,
앞으로 점점 아이들 학교 공부 때문에 함께 하기 어려울 것 같다.
다음 날, 큰 아들네는 영덕에 가서 물회를 먹고,
청송의 주산지에 가서 물 속에서 자라는 큰 나무들을 보고,
다시 안동호로 가서 낚시를 하고 밤 늦게 집으로 돌아간다고 전화가 왔고,
작은 아들네는 곧바로 동해안을 타고 올라가다가 강릉 앞바다에 가서
바다에 발을 적시며 놀다가 서울로 올라갔고,
나는 남편과 백암까지 내려왔으니, 포항에 내려와 식당을 하는
친구를 만나보기로 하고 남쪽 해안 도로를 타고
바다를 보며 달리다 강구에서 물회로 점심을 먹고,
포항가는 도중에 있는 보경사에 들렀다.
보경사
625년(신라 진평왕 7년)에 진나라에 가서 유학하고 돌아온
대덕 지명법사가 창건한 신라의 고찰이다.
고찰답게 사찰 들어가는 입구부터 오래되고 큰 소나무들이 유난히 많아
그림 소재로도 할겸 몇 장 찍어보았다.
마침 광복절 휴일이라서 그런지 무더운 날인데도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친구와 약속한 시간(4시 30분)이 되어가서 포항 친구집 식당으로 달려갔다.
그간 친구가 서울에 올라와서 만나기도 했지만,
오랫만에 포항에서 친구를 만나니 정말 너무 반가웠다.
이런저런 얘기로 회포를 풀다가 구룡포로 드라이브 겸 저녁을 먹으러 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에어컨 이상으로 시원했고,
바다의 비릿한 냄새가 정다움을 더해주며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구룡포 앞 바다 바위에 갈매기가 한가롭게 앉아
바닷바람을 쐬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적조를 걱정하는 바닷가 사람들에게 걱정거리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요즘은 회가 광어, 우럭이 제일 맛있다고 하여 어제도 먹었던 회를
바닷가에서 직접 먹으니 그 맛이 꿀맛이었다.
친구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청용 해군회관의 호텔식 멋진 찻집에서
시원한 빙수를 먹으며 젊은 시절 이 친구와 특별한 인연이었던
여러가지 지난 일을 회상하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이 친구 남편이 서울에서 대학을 마치고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여 잘 되었는데
IMF로 어려움을 격게되어, 고향인 포항에 내려와서
생전 해보지도 않았던 식당을 잘 운영하며 이젠 완전히 자리를 잡았고,
그 지역의 유지로 평소에 알고 있던 노하우인 컨설팅으로 지역 조합일을 잘 하며
매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어 정말 보기 좋았고,
현재 72세인데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 같아 매우 바람직함을 느꼈다.
다음 날, 오랫만에 만나 반가워 같이 갈 곳도, 할 일도 많다고
하루 더 묵고 가라는 친구의 만류에도 서울에서의 계획이 있어 점심만 먹고
서울로 아쉬운 발길을 돌려 오후 2시20분쯤 서울로 출발했는데
오히려 서울 시내에서 더 차가 밀려 오후 7시 30분쯤 집에 도착했다.
그래도 포항에서 서울까지 5시간 정도에 왔으니
고속도로가 예상 외로 밀리지 않아 정상적인 시간에 도착한 셈이다.
더운데 3박 4일 동안 다니며 너무 덥고, 운전하는 남편도 힘들고하여,
집에서 에어컨 약하게 조금 틀었다 껐다하며 시원한 수박이나 먹으며
쉬는 것이 최상의 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도 무사히, 아이들, 손주들 즐겁고,
오랫만에 친구도 만나고 하여 즐거운 나들이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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