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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지(梁誠之) | |||||
세종(世宗) 23년 (신유, 1441년), 식년시(式年試) 을과3(乙科3) | |||||
인적사항 | |||||
생년(生年) | 을미1415(乙未1415) | ||||
자(字) | 순부(純夫) | ||||
호(號) | 눌재(訥齋) | ||||
본관(本貫) | 남원(南原) | ||||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 ||||
諡號, 封號 | 문양,좌리공신/남원군(文襄,佐理功臣/南原君) | ||||
가족사항 | |||||
부(父) | 양구주(梁九疇) | ||||
조부(祖父) | 양석륭(梁碩隆) | ||||
증조부(曾祖父) | 양우(梁祐) | ||||
외조부(外祖父) | 권담(權湛) | ||||
처부(妻父) | 변상근(邊尙覲)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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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 및 기타사항 | |||||
소과(小科) | 1441(신유) 생원시 | ||||
다른문과합격 | 병술1466(丙戌1466) | ||||
전력(前歷) | 신방생원(新榜生員) | ||||
품계(品階) | 숭정대부(崇政大夫) | ||||
관직(官職) | 이조판서(吏曺判書) , 홍문관대제학 |
------------------------------------------------------------------ 엠파스 한국학 지식 중
양성지 梁誠之 1414(태종 14)~1482(성종 13)
조선초기 학자․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齎) 또는 송파(松坡 ). 증우찬성(贈右贊成) 구주(九疇)의 아들이다. 6세에 독서를 시작하여 9세에 글을 짓고, 1441년(세종 23)에 진사․생원 양시에 이어 식년 문과에 을과 3인 중 한 사람으로 급제하여 경창부승(慶昌府丞)과 성균주부에 급제하고, 이듬해 집현전에 들어가 부수찬․교리 등을 지내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고, 춘추관 기주관으로 고려사 수사관을 겸직하여 《고려사》의 개찬(改撰)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직제학에 승진, 이듬해 집현전이 폐지되자 좌보덕(左輔德)에 전임,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고 제학으로 취임하였으며, 이듬해는 구현시(求賢試)에 급제, 이조판서에 오르고, 대사헌에 재직 중 《오륜론 五倫論》을 찬진하였다. 1466년(세조 12)에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하였으며, 1469년(예종 1)에 지중추부사․홍문관제학․춘추관사를 겸직하여 《세종실록》과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공조판서를 거쳐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년 대사헌에 재임하다가 지춘추관사가 되었고, 1481년 홍문관대제학으로 승진하였으며, 이 해에 문신정시에 장원하였다. 세종조부터 성종조에 이르기까지 6조에 걸쳐 역임하는 동안에 문교상(文敎上)에 끼친 공로는 제외하고라도, 정치상의 의견과 언론이 어느 것이나 당시를 일깨우고 후세의 거울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세조는 그를 해동의 제갈량(諸葛亮)이라고까지 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역사의 현실을 착안하여 나라를 위하는 긴요한 도리를 꿋꿋이 주장함이 특색인바, 그 당시에 있어서 사리를 가장 똑바로 이해하던 경륜가였다.
중국 고대의 요순(堯舜)만을 유일한 이상적 군주로 떠받드는 시절에 단군을 국조로 모셔 받들기를 주장하였으며, 중국의 역사만을 일반 교과서로 사용하던 시절에 우리의 동국사(東國史)를 배울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으며, 온 세상이 중국의 풍속에 휩쓸리는 때에 나라의 고유한 풍속을 존중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뿐 아니라 문신이면서도 군비에 대한 관심이 또한 컸다. 우리나라에는 문묘는 있으나 무묘(武廟)는 없으니 마땅히 무묘를 세워 역대의 명장을 모시자고 주장하였다. 고구려 유속을 본받아 봄에는 3월 3일, 가을에는 9월 9일에 교외에서 사격대회를 열어 사기를 드높이고 무풍(武風)을 장려하자고 하였으니, 확실히 그 당시 사회로 보아 일대 경종이 아닐 수 없었다. 군정10책(軍政十策) 가운데서도 특히 군호(軍戶)의 중요함을 역설하여 말하기를 “신라의 풍속에는 전쟁에서 사망한 자는 벼슬을 한 등 올려주어 명예롭게 하고, 그 유가족들은 관록으로써 부양하여 우대하였으니 위국진충(爲國盡忠)의 용사들이 생겨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 전사자에게는 특별한 은전이 없고 마땅히 주는 부미(賻米)까지도 받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이러고서야 어찌 군졸들의 모험심을 고취시킬 수 있으랴.”라고 하였다. 이것은 당시 군정의 여러 가지 결함을 명석하게 지적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의견도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무인을 멸시하는 폐풍은 교정되지 못한 채로 500년간을 내려왔다. 징병주의(徵兵主義)를 주장하여 양보다 질에 더욱 치중하여 군사를 뽑는 데 있어서 반드시 시험을 치러 우수한 군사를 뽑도록 하였고, 또 병역의 토대가 되는 호적의 정확성을 기할 것, 독자의 군복무면제 등을 징병에 있어 3대 원칙으로 삼은 것은 그의 탁월한 의견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좋은 방안을 수렴하였는데, 그 중에서 비변10책(備邊十策) 같은 것은 국방에 관한 근본방침을 상술한 것이니, 이 또한 그의 대표적인 의견이라 할 수 있다. 세종의 명에 의하여 편찬한 《팔도지리지》와 《연변방수도 沿邊防戍圖》는 정확한 것으로 실제 측량한 지도가 없던 그 당시로서는 매우 위대한 공헌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또 농정에도 힘을 써서 국가에 건의하기를, 농사의 근본은 지력(地力)을 잘 이용하는 데 있는 것이므로 개간사업을 일으켜서 해변과 강․육지에도 방축을 세워 수전(水田)을 만들자고 주장하였으며, 직업이 없어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모아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밖에 여가가 있을 때는 무예를 익히게 하면 일거양득이 된다고 하였다. 이상의 여러 가지 일이 너무나 이상에 치우친듯 하더라도 전혀 현실을 외면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민생을 위하여 소극적으로는 민폐를 제거하고, 적극적으로는 백성들의 복리를 증진시킬 여러 가지 건의를 하였지만, 그 중에도 특히 각 도․군․현에 의료기관의 설치를 주장한 것은 참으로 감탄할만하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질병은 백성들이 가장 괴로워하는 바이니 서울에는 비록 의원들이 있어서 병을 진단하고 약을 주기도 하지만 지방에는 그렇지 못하여 촌의 백성들이 한번 질병에 걸리면 괴로워함은 차마 볼 수가 없으므로, 지방의 크기에 따라 의원수를 정하여 전의감에 와서 의술을 연구한 후 각 지방에 돌아가 병을 돌보게 하고, 감사로 하여금 그 성적을 조사하게 함으로써 상벌을 주면 이처럼 좋은 방법은 없겠다고 하였다. 사회정책에 대하여서도 한층 진보적인 의견을 가졌으니 예를 들면, 백정(白丁)이 양민 되는 길을 열어주자고 한 것과 노비에게만 노역을 치중하지 말고 균등하게 하자고 주장한 것 등이다. 그러나 한걸음 더 나아가 노비의 폐지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은 당시 시대로 보아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한 풍속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개혁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즉 혼례에 있어서 간단하게 하고 연찬(宴饌)에 있어서도 검소하게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당시의 과거시험에 대하여도 과목을 현실에 적합하도록 개정할 것을 여러 번 제의하였으며, 예술방면에도 특히 깊은 이해를 가져 아악을 잘 보호하자고 하였으며, 우리나라 악부(樂部)와 중국 악부 외에 또 번악부(藩樂部)란 것을 따로 설치하여 일본악과 여진악을 아울러 채용하자고 주장하였다. 또 그의 <서적12사상소문 書籍十二事上疏文>을 보면 현대적 의의를 함축한 주장으로서 도서의 보존 및 간행에 실효를 꾀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렇겠지만, 문화가 담겨있는 서적의 보존은 사회문화의 존속을 위한 중대사명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는 중국으로부터 들여온 서적은 비록 흩어져 없어진다 하여도 구할 수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문사(文士)는 한번 유실되면 다시는 얻을 수 없으니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책은 반드시 여러 권을 만들어 여러 사고(史庫)에 보관하여 두자고 말하였다. 사실 조선조 500년을 통하여 학자와 문인이 허다하였고 정략가(政略家)와 모신(謀臣)도 적지 아니하였으나 대개 는 정주(程朱)의 학설과 반마(班馬: 班固와 司馬遷)의 문장을 모방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대의명분을 구실삼아 강경외교를 부르짖거나 인의(仁義)만으로 국방의 근본을 삼으려는 무리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자국의 현실을 바로보고 백년대계는 세우지 못할망정 일국의 정치를 마음 굳게 먹고 잘 해가자는 실제적 경륜가는 매우 드물었다. 그는 조선왕조가 한창 번성할 때에 배출한 인물 중 하나의 현실적 경륜가로서 색다른 존재라 하겠다. 저서로는 《눌재집 訥齋集》이 있다.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참고자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권. 성남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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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 자료
양성지 (梁誠之 ; 1415~1482)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서 본관은 남원(南原)이며 자는 순부(純夫)이다. 그리고 호는 눌재(訥齋) ·송파(松坡)이며 시호는 문양(文襄)이다. 아버지는 증우찬성 구주(九疇)이다. 서거정(徐居正)·신숙주(申叔舟)·김수온(金守溫) 등과 두터운 교우관계를 맺었다. 그의 가문은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난 토성사족(土姓士族)이었으나 일찍부터 관직에 진출해 만년에는 대신의 반열에 올랐다.
1441년(세종 23) 진사와 생원에 합격하고,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뒤 경창부승 ·성균관주부를 거쳐, 이듬해 집현전(集賢殿)에 들어가 부수찬 ·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 겸 고려사수사관(高麗史修史官)으로 《고려사(高麗史)》 개찬(改撰)에 참여하였다. 이어 집현전직제학(直提學)에 승진, 1453년(단종 1) 왕명으로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하고, 이듬해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를 찬진(撰進)하였다. 1455년(세조 1)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를 편찬, 1463년 왕명으로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찬진하고 홍문관(弘文館) 설치를 건의하여 책을 보관하게 하였다. 1469년(예종 1) 중추부지사(知事) ·홍문관제학(提學) ·춘추관지사를 겸직하며 《세조실록》, 1470년(성종 1) 《예종실록》 등 편찬에 참여하고, 공조판서를 거쳐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해졌다. 1477년 대사헌에 재임되었고, 1481년 홍문관대제학(大提學)으로 《동국여지승람》 편찬에 관여하였다. 그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 1482년 서적의 인간(印刊) ·수장(收藏)에 관한 12조의 건의문을 올렸다.
한편, 그는 정주학자(程朱學者)이면서도 성리철학(性理哲學)만이 아니라 실용을 중요시하며, 국력배양과 민생안정을 중요시하는 학문태도를 가졌다. 26세에 관계에 투신하여 68세로 생애를 마칠 때까지 세종에서 성조에 이르는 6명의 국왕을 보필해 4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330여 조의 상주문(上奏文)을 올렸다. 이 상주문에서 그는 경학·사학·문학·병학·지리·의학·음악·농법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 사학(史學)은 그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인 분야였다. 단군 이래의 민족사 정립과 교육을 강조해 문과시험에 중국사와 더불어 《삼국사기》·《고려사》 등을 부과할 것과, 국왕의 경연(經筵)에서 국사를 강의할 것을 여러 번 진언했다. 그는 요수(遼水)의 동쪽이 우리 강역의 일부임을 주장하고 이를 수복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자주적인 국사인식은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와 관련된 주장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우리나라가 단군이라는 독자적인 민족시조를 가지고 있고, 단군 이래 역사적으로 정치적 자치를 유지해왔으며, 문화적으로도 기자(箕子) 이후 중국과 대등한 수준으로 발전되어 군자의 나라라는 명칭을 들었으며, 언어·의관·풍속 등도 중국과 다르다고 했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기는 하지만 천자의 직접통치를 받는 기내(畿內)의 제후가 아니라 정치적 자유와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가진 민족국가로서의 제후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중국에 대한 사대는 힘의 강약에서 오는 불가피한 현상이지만 그 방법과 자세는 엄격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사대는 국가의 자주성과 독립성을 지키고, 국리민복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실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대외교는 첫째, 사신 파견의 횟수를 종전의 1/3로 줄여서 국가의 경비를 절감하고 중국으로부터 천시받지 않도록 할 것, 둘째, 명사(明使)에 대한 지나친 우대를 반성하고 진상품의 액수를 줄이며 금·은·주옥 등 희귀품의 진헌을 거부할 것, 셋째, 국왕의 생신일을 천자와 마찬가지로 절일(節日)로 승격하며 역대의 선조에 존호를 가상하고, 천자가 행하는 제천례(祭天禮)를 행할 것을 주장했다. 나아가 중국과 마찬가지로 번부악(藩部樂)을 설치하여 우리의 번방(藩邦)에 해당하는 일본과 여진의 음악을 채용할 것을 주장했다. 《고려사》 편찬에서도 고려시대의 독자적인 연호나 묘호(廟號)를 참칭(讒稱)이라 해 바꿀 필요가 없으며 국가도서(國家圖書)에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하여 기재할 것 등을 주장했다. 요컨대 양성지의 사대론은 중국과 우리나라를 거의 동등한 위치에 정립시키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자주적인 사상은 부국강병을 위한 현실적인 대책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무묘(武廟)를 세워 무풍(武風)을 장려하고 무신을 문신과 똑같이 우대하며, 강병을 육성하는 여러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군정십책 (軍政十策)》·《비변십책(備邊十策)》 등을 통해 군호(軍戶)의 정확한 파악과 이를 위한 호적의 정비, 군병에 대한 우대, 정병주의(精兵主義) 원칙 등을 주장해 세조의 보법실시를 반대하기도 했다. 또 국부(國富)의 증진과 유민의 정착을 위해 개간을 장려하고 해변이나 강 등에 방축을 쌓아 수전(水田)을 확보해 이들을 모아 정착시키는 방안을 제시했다. 그밖에도 각 도·군·현에 의료기관을 설치해 병든 백성을 구제하고, 사창제(社倉制) 실시를 반대하고 의창(義倉)을 설치하자는 주장을 하는 등 민의 생활과 직접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주장들은 지나치게 이상에 치우친 것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전반적으로 조선 왕조의 지배체제를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한 부국강병책(富國强兵策)으로 제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학문과 문장이 뛰어났으며, 문집에 《눌재집》, 저서에 《유선서(諭善書)》 《시정기(時政記)》 《삼강사략(三綱事略)》 등이 있다.
<두산대백과사전>참고 /<브리태니커백과사전>참고
http://mtcha.com.ne.kr/koreaman/sosun/man89-yangsungji.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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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지에 관한 기사
1. '역사 알리기' 전도사
조선 세조때의 유학자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1415~1482) 선생을 알리는 전도사로 -중부신문
http://www.joongboo.com/html/news_view.asp?articlenum=14842800000000&div=49
2. 눌재 양성지와 중국의 ‘동북공정’
이미 500년전 동북공정 예견했다 - 미래신문
http://www.gimpo.com/news/read.php?idxno=130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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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지에 관한 연구논문 추가
* 신두환, 「조선전기 "민족예악"에 대한 일고찰 -눌재 양성지를 "중심"으로」, 동양예학회 동양예학, 2003
* 신두환, 「눌제 양성지의 교육사상에 관한 일 연구」, 우리한문학회 한문학보, 2003
* 신두환, 「눌재 (訥齋) 양성지 (梁誠之)의 "송(頌)" 에 대한 일 연구」, 한국시가학회 한국시가연구, 2001
* 신두환, 「눌지 양성지의 상소문에 나타난 현실대응논리 」, 우리한문학회 한문학보, 2000
* 전현정, 「양성지의 역사인식과 역사교육 강화론」, 역사교육학회 역사교육논집, 2003
* 김남이,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의 실용적 사유와 시문학 」, 한성대학교 한성어문학회 한성어문학, 2000
* 서인원, 「눌재 양성지 (梁誠之)의 역사지리인식 」, 무악실학회 실학사상연구, 2000
- 양성지에 관해 2000년 이후 나온 논문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주로 신두환 선생님께 많네요.
논문 제목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양성지는 예악이나 역사, 지리, 교육 등에서도 많은 연구를 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다방면에 걸쳐 지혜로웠던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첫댓글 ^^ 따끈따끈한 글 잘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신문기사가 재밌네요 ^^
조사하느라 진짜 수고가 많으셨네요.. ㅋ 힘내세요..
저도 기사부분이 더 재미있네요^^
관련기사까지 올리시다니...;; 수고하셨습니다;
양성지 관련 연구논문 목록도 소개되었으면 좋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