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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산 건축사협회
간사이 건축기행
2008.3.6~3.9
■.일본기행
일본은 초강대국이 죄었다. 고것은 공업생산력과 경제력의 높은 수준과 규모의 측면에서만 그런 것이아니고, 일본 디자인
의 독창성, 자질 그리고 영향력에서도 그렇다는 것이다. 일본이 서구와 무역을 시작한지 이제 겨우 150년 정도가 지나지 알았
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응용미술과 건축이 국제적으로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게 됨으로써 전 세계적으로 건축과 그래픽 디자
인 분야의 기술적이고 예술적 수준에서 버금가거나 능가할 나라는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건축
적. 문화적,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 문제에서도 그들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이것이 현대 일본의 가장 두드러지고 도전적인 측면
이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가 현재 극심한 갈등으로 해결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있는 혼란 - 근대화, 현대화로 이어지는 물질문
명의 이질과, 전통으로 분류되기도 하는 정신적 문화와의 갈등을 완전히 극복하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서구 현대건축이 80년대에 겪은 급격한 변화의 과정과 마찬가지로, 일본 역시 80년대네 다양하고 복합적인 변모의 과정을 거
치게 되었으며 그 특징 중의 하나는 다원적 절충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일본 현대 건축은 서양과 동양, 과거와 현재, 포스트 모던
과 레이트 모던이라는 건축의 인과요소를 절충시켜 독자적인 미적 가치관의 확립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현대건축
에 있어 과정을 살펴보면, 1960년대 신진대사라는 의미의 메타볼리즘(Metabolism)이라는 건축운동을 제안한 이래, 기술지향
적 낙관론으로 70년대를 맞이하였던 일본 현대 건축계는 1976년을 경계로 하여 절충적이었지만 독자적방법을 모색한 메타볼
리즘이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구인들에게는 일본 ‘현대건축 = 메타볼리즘’이라는 등식으로 비춰졌던 것이 사실이
며, 메타볼리즘의 주요 구성원이었던 구로카와기쇼, 마끼후미히꼬, 기꾸다께 기요노리, 오오다까 마사또와 간접적으로 관련되
었던 이소자끼 아라따, 후원자 단게 겐조 등이 현 일본 건축계의 거장으로 부상한 것은 암시하는 바가 많다고 할 수 있다.
1974-75년에 걸친 오일 쇼크 이후, 직관적 기술론에 기반을 두었던 메타볼리즘은 그 빛이 바랬고 메타볼리즘에 반기를 든 포
스트메타블리즘 세대의 대두를 맞이하게 되었으며 그 세대들이 안도 다다오,하세가와 이쯔꼬, 기지마 야스후미, 록가꾸 기
죠, 아이다 다께후미 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의 성향은 과학기술의 획일적 진행에 대한 반감과 기술에 대한 모순적 태도, 유
토피아적 도시상에 대한 실망과 현실사회예의 접근, 일본문화에 대한 중요성 인식이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면 메타
볼리즘의 세대들은 과연80년대 어떻게 변모하였을까? 1983년 쯔꾸바센터 빌딩으로 포스트 모던의 열풍을일본 건축계에 점화
시켰던 이소자끼는 1990년 기따꾸슈의 서일본 전시관 국제교류센터의 완공으로 또 다시 해체주의를 점화시키고 있는 것만으
로도 메타볼리즘 시대의 변화의 폭을 짐작케 하는 것 이다. 일본 주택건축의 공간과 전통을 추상화시켜 추구하던 시노하라 가
즈오는 도쿄 공업대학 백주년기념관(1988)으로 해체성이 강한 하이데크로 전환하였고, 비교적 근대건축을 충실히 계승하
고 있었던 마끼 역시 스파이럴(1986)에 해체적 하이테크에 입문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포스트 모던 논쟁을 와따나베 도요가
쯔와 벌였던 일본 건축계의 태두 단게는 포스트 모던의 냄새를 물씬 풍기는 도쿄도 신청사의 현상설계(1986)에 당선해 그 완
공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이 80년대 일본 건축계의 현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메타볼리즘과 포스트 메타볼리즘 이후 세대들
의 성장 역시 괄목할 만한 것으로 근대의 거장시대 이후 군웅할거의 시대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게 하였던 것이 또 하나의 80년
대 일본건축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 메타볼리즘 이후 세대들로는 기린플라자 오사카와 신택스(1990) 등에서 건축에 관능적 기계의 이미지를 표현했던 다
까마쯔 신, 일본적 해체주의의 선봉이며 라이즈 등을 선보였던 기따가와라 아쯔시, 함렛(1988)이나 로툰다(1987)같은 가설성
이 짙은 주택을 계속 발표하고 있는 야마모또 리껜, 아오야마 제도전문학교 1호관(1990)으로 기존 건축어휘에서의 탈피와 변
용을 시도하는 와따나베 마고또등의 다원적 양상을 표출하고 있는 일본 현대건축의 방향성에 새로운 자극제 역할을 하면서 독
자적 세계를 전개하고 있다.
1950년에서 1970년간의 일본건축
전후 일본건축은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에서도 없었으며, 몇 년 전까지도 유토피아적으로 생각되던 가능성들을 열어 범세계적
인 영향을 미쳤다.
1930년대의 전통은 준조 사카쿠라 Junzo Sakakura(1904-1969), 마마루 야마다 Mamaru Yamada(1894) 특히 자주 르꼬르뷔
지에의 영향을 받은 건물을 만들어내고 당시의 기술적 임무의 정복을 과시한 구니오 마예가와 (1905)같은 건축가들에 의하
여 계속되었다. 마예가와에 의한 도쿄와 교토(1960-1961)의 축제홀과 도교의 하루미 아파트들은 일본적 독립의 첫 번째 신호
이다. 꼬르뷔지에는 모두 파리에서의 이전 제자들인 마예가와 사카구라와 다카마사 요시자끼에 의하여 1959년에 건축된 도쿄
시 서양미술관을 설계하였다.
일본의 가장 중요한 건축가는 1950년과 1960년대 일본의 전후 건축의 노정을 가장 분명하게 반영하는 겐조당게 Kenap Tange(1913)이다.
원자탄으로 인한 파멸 이후 살아남고자 하는 결심의 상징인 히로시마 평화센터(1949-1956), 이
마바리(1957-1959), 다카마츠 (1955-1958)와 구라시키(1958-19600의 시청과 도쿄의 올림픽홀(1949-1964)과 성당 (1961-
1964)이 그것이다. 고푸의 통신센터는 건축과 도시계획 통합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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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오사카 세계박람회의 계획 및 실현은 당게로 하여금 아라타 이소자키, 기쇼 구로가와 기요노리 기쿠다케와 합작으
로 그 지점으로부터 다른 요소들이 배치된 주전시관의 중심적인 대형 구조물을 건축할 기회를 부여하였다. 그의 건물보
다 더 결정적인 것은 기술과 인간적 가치개념의 융화기능성을 보인 도시적 작품들이다 (1960년 도쿄시 계획, 1970년 도쿄 계
획1960-2000). 지진으로 파괴된 스코피에시를 위한 또 하나의 도시계획(1965)은 국제 현상공모에서 일등상을 받았으며, 유고
슬라비아 건축가들과 합작하여 수행되었다. ‘도시의 무’과 ‘도시의 벽’ 같은 개념의 새로운 도시계획의 유형들이 유고슬라비아
에서 도입되었다. 당게의 활동은 그 이후 여러나라들로 확대되었따. 블로냐시 도시계획(1970), 샌프란시스고의 예르바 부에
나 센터 대학(1975년 콘스탄틴, 1972년 오랑)과 알지에의 휴가촌 (1973년 앙달루와 마드락) 및 이란, 쿠웨이트, 네팔, 사우
디 아라비아와 미국에서늬 건물들이다. 또한 도쿄에서 이 기간동안 쿠웨이트(1966-1974)의 대사관 건물과 호텔 및 문화 건물
들이 개발되었다.
일련의 젊은 일본건축가들이 당게에 의해 시작된 이러한 발전을 더 앞으로 밀고 나아가서 광범위한도시화와 공업화의 새로
운 형태들을 추구하고 있다. 1960년대에는 기요노리 기쿠다케(1928). 후미히코마키(1928), 마사토 오다카와 노리아키 구로가
와(1934) 같은 건축가들이 메타볼리즘 선언과 함께 대중 앞에 등장하였다. 특히 노리야키(기쇼) 구로가와는 그의 광범위한 국
제적인 작품(1970-1972년 나카긴고층주거, 1975년 후쿠오카시의 후쿠오카 은행 (그림5))과 아프리카, 파리와 독일의 프로젝
트들을 통해 건축적 표현의 예외적인 광범위한 가능성을 성취하였다. 마키는 도쿄시에 리쇼 대학교 건물들(1967-1968)을 지
었다. 기쿠다께는 시청, 아파트와 종교건물들 뿐만 아니라, 오키나와시의 1975년 박람회를 위하여 수상도시 (그림4) 같은 기술
적 건축물들을 또한 건축하였다. 초대형 구조물들을 위한 환상적인 계획 이외에도 메타볼리스트 그룹의 소속원들은 그들의 기
술의 상상적인 힘이 현실로 증명된 교육건물들과 휴가마을을 실현하였다. 구로가와는 특히 조립생산된 세포 구조물들로 매혹
적인 결과를 얻었다.
아키라 시부야 (1939), 아키야마. 가와가미, 이소자키와 시라시같은 가장 젊은 세대의 일본건축가들은기본적으로 새로운 메티
볼리즘 생각을 가지고 유다코 무라다와 마모루 가와구찌는 상이한 유형의 건물들(오사카 세게박람회 전시관)을 가지고 실험하
고 있다.
1970년과 1990년간의 일본건축
1970년까지 일본건축은 구니오 마예가와, 게조당게, 준조사카쿠라, 가즈오 시노하라와 다음 세대 대표자들인 후미히코 마
키, 기쇼구로가와, 기요노리 기쿠다케와 아라타 이소자키 같은 굉장히 주목할 만한 건축가들의 작품으로 이미 독립을 성취하
였다. 초기 발저은 박력있게 가속된 나머지 국제적으로 특이 한 실험과 성취의 환경을 만들어 내었다. 오늘날 그 다른 어떤 나
라도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현대적 요구와 전통적 뿌리의 합일체를 달성할 수 없었다.
1970년대 오사카 세계박람회는 일본건축을 위한 의미심장한 사건이었다. 겐조당게에 의하여 구로가와, 기쿠다께와 이소자키
와 합작으로 박람회를 위하여 설계된 다양한 건물들은 고등 기술적 효율의 구조물들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일본 능력의 신호
였다. 대부분 일본 밖에서의 1970년대 이후의 당게의 개별적인 작품들은 그로 하여금 일본건축의 대가로 확립시켰다. 가나가
와의 도인학교, 요코하마 미술판(1983), 도코의 UN대학(1986), 도쿄시청사(1986)와 아카사카프린스 호텔(1983)같은 그의 건
물들의 다수가 그의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나이제리아, 알제리아, 사우디 아라비아, 이탈리아, 프랑스와 다른 나라들에서처
럼 지표가 되었다.
한때 메타볼리스트로 언급되던 마키, 기쿠다케, 구로가와와 오다카 같은 일본건축가들의 다음세대는 여러 가지 상이한 방향으
로 나아갔다. 마키는 도쿄의 성모마리아 국제학교(1972), 노바시 유치친과 오키나와의 수족관과 후이사와 시립중학교를 지었
다. 구로가와는 오사카의 소니타워(1973-1976), 도쿄의 나카긴 타워(1970-1972)사아의 현대미술관(1982)과 히로시마 현대
미술관(1988)같은 다수의 상업 및 문화건물을 짓고, 미국, 독일, 리비아, 불가리아와 타일랜드 같은 다른 나라에서 활약하였다.
기요노리 기쿠다케는 몇몇 시청과 종교건물들을 짓고, 주택분양를 개척하였다. 아라타 이소자키는 기타규슈에 풍부하고 종합
적인 문화건물체계를 개척하교, 1979-1983에 츠쿠바 센터에서 정보건물, 콘서트홀, 쇼핑센터와 미켈란젤로의 로마시 캄피돌
리오 광장에 암시적인 관계를 갖는 옥외광장을 포함하는 환상적인 도시센터를 창출하였다. 그의 가장 최근작품 중에는 몇 개
는 미국, 독일, 폴란드와 스페인을 포함하는 몇몇 외국에 잇는데- 기타규슈의 국제회의센터가 있다.
일본의 많은 건축가들이 다른 분양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건축적 결과들을 제안하고 있다. 가즈오 시노하라(1925)가 전통적 활
력의 새로운 감을 보이는 건물들을, 디카미cm 아주마 (1993)가 새로운 유형의 복합성과 이율 배반성의 건축을, 고이찌 나가시
마가 신기술을 이용한 대규모 건물을, 미노루 을 위한 건물을(1973년 훗카이도의 베벌리 톰과 1991년 도쿄항 국제 여객터미
널), 오사무 이시야마 (1944)가 1978-1979 마츠자키의 신조바치 미술관, 다케푸미 아이다가 1972-1973년 오사카시의 PL연구
소 유치원과 1978-1079 야마구치시의 도모의 치과병원, 토요 이토(1941,1976년의 도쿄의 백색 W-가옥) - 이들 모두가 일본
의 풍부한 건축적 장면에 이바지 하고 있다.
다다오 안도(1940)의 작품은 일본의 옛 양식과 우리시대 새로운 요구사항들이 고전적인 평온함속에 완벽하게 통합된 양질
의 수준에 도달하였다.(1981년 아시야의 고시노 저택, 쿄토의 ‘타임즈’, 오키타와쇼핑센터, 세빌리아의 엑스포 '92의 일본
관. 현재 일본 건축은 이츠코 하세가와(1941, 1989년 푸지사와시의 쇼난다이 문화센터(그림9)), 신 다카마츠 (1948), 아치시 기
타가와라 (1951, 1968년 도쿄의 ‘기상’)와 히로유키 와키바야 (1949, 1986년 쿄토의 생활) 및 구니히꼬 하야가와 (1941)와 히로
시 하라(1936, 1984-1987년 도쿄시 야마토 인터내셔날)의 주거계획 및 도시건물군 같은 건물들로 대표되고 있다. 오늘날의 일
본형편은 알도 도시 (1990년 후쿠오카 궁전호텔), 피터 아이젠만(1990년 코이즈미 조명 극장), 켐브이지 7(1990년 오사카시 템
포잔 항구도시). 라파엘 비놀리(1989-1995년 도쿄 국제포럼), 해리 위즈, 필립 스탁, 자하 하디드, 스티븐 홀, 렘 쿨하스, 크리
스티앙 드 포잠박, 마리오 벨리니, 리파드 로저스, 노먼 포스터 같은 외국 건축가들의 기여로서 보다 더 풍요롭게 되고 있다.
'20세기 건축의 경향들, 발언출판사, 1998년, 우도 쿨터만 저. 이선구 옮김
기 행 경 로
▲ 간사이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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