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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양산중15회동기회 원문보기 글쓴이: 남운
율곡의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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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도 |
나이 |
중 요 사 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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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중종 31년) |
1세 |
음력 12월 26일에 강릉 북평촌(현 죽헌동) 외가인 오죽헌 몽룡실에서 태어나다.(선생의 원래 고향은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율곡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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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8년(중종 33년) |
3세 |
말과 글을 배우다. 하루는 외할머니 이씨의 물음에 "석류는 껍질 속에 부서러진 붉은 구슬을 싸고 있네(石榴皮과碎紅珠)"라고 옛 시귀절을 읊다. | |
1540년(중종 35년) |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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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1년(중종 36년) |
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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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2년(중종 37년) |
7세 |
〈진복창전(陳復昌傳)〉을 짓다. | |
1543년(중종 38년) |
8세 |
본가인 파주 율곡리의 화석정(花石亭)에 올라 시를 짓다. | |
1544년(중종 39년) |
9세 |
《이륜행실록》을 보다가 옛날 장공예(張公藝)의 이야기를 읽고 그를 사모하여 형제들이 부모를 받들고 함께 사는 그림을 그려놓고 바라보다. | |
1545년(중종 40년) |
10세 |
강릉 외가에서 〈경포대부〉를 짓다. | |
1546년(명종 1년) |
1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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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8년(명종 3년) |
13세 |
진사 초시에 장원 급제하다. | |
1551년(명종 6년) |
16세 |
이 해에 〈어머니의 행장(先비行狀)〉을 짓다. | |
1553년(명종 8년) |
1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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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4년(명종 9년) |
19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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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5년(명종 10년) |
20세 |
강릉외가로 돌아가 〈자경문(自警文)〉을 짓고 성학에 전심하다. | |
1556년(명종 11년) |
2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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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7년(명종 12년) |
22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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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58년(명종 13년) |
23세 |
봄에 예안(안동) 도산에 가서 퇴계를 만나 도를 묻다. 이 해 겨울 별시해(別試解)에 〈천도책(天道策)〉으로 장원급제하다. | |
1560년(명종 15년) |
25세 |
이 해에 한 장흥서(韓長興) 끝에 발문을 쓰고 지야서회(至夜書懷)라는 시(詩)를 짓다. | |
1561년(명종 16년) |
2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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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4년(명종 19년) |
29세 |
7월에 생원, 진사에 급제하다. 8월에 명경과(明經科)에 〈역수책(易數策)〉으로 장원 급제, 호조좌랑(戶曹佐郞)에 임명되어 첫 벼슬길에 나아가다. | |
1565년(명종 20년) |
30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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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명종 21년) |
31세 |
5월에 동료와 함께〈시국의 급선무 세 가지(時務三事)〉를 상소하다. | |
1567년(명종 22년) |
32세 |
6월에 명종이 승하하자 퇴계선생에게 글을 올려 국장을 의논하고 〈명종대왕의 만사(輓詞)〉를 짓다. 10월에 기대승의 편지를 받고 답하다. | |
1568년(선조 원년) |
33세 |
2월에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 직강이 되다. 5월에 우계선생과 지선(至善)·중(中) 및 안자(顔子)의 격치성정(格致誠正)에 대한 설을 논하다. 가을에 명나라로 가는 천추사 서장관(千秋使書狀官)이 되어 명나라 수도를 다녀오다. 겨울에 돌아와 홍문관 부교리(弘文館副敎理)에 제수받고 지제교(知製敎)겸 경연 시독관 춘추관 기주관(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이 되어 《명종실록》편찬에 참여하다. | |
1569년(선조 2년) |
34세 |
6월에 다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어 7월에 조정에 돌아오다. 9월에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지어올리고 동료와 함께 〈시무구사(時務九事)〉를 상소하다. | |
1570년(선조 3년) |
3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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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1년(선조 4년) |
36세 |
정월에 해주에서 파주 율곡리로 돌아가 이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아니하다. 여름에 다시 교리에 임명되어 불려 올라와 홍문관 부응교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弘文館 副應敎 知製敎 兼 經筵侍讀官)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 官)으로 옮겼으나 모두 사퇴하고 해주로 돌아가다. 이때 학자들과 해주 고산(高山) 석담구곡(石潭九曲)을 구경하고 은거할 계획을 세우다. 6월에 청주목사(淸州牧使)에 임명되어 손수 〈서원향약(西原鄕約)〉을 지어 고을 백성을 인솔하다. | |
1572년(선조 5년) |
37세 |
여름에 부응교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고 율곡리로 돌아가다. 이때 우계선생과 이기(理氣), 사단칠정(四端七情),인심도심(人心道心)을 논하다. 8월에 원접사 종사관(遠接使 從事官), 9월에 사간원 사간(司諫院 司諫), 12월에 홍문관 응교(弘文館 應敎), 홍문관 전한(弘文館 典翰)에 각각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다. | |
1573년(선조 6년) |
38세 |
7월에 홍문관 직제학에 임명되어 병으로 사퇴코자 했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여 부득이 올라와 세 번 상소하여 허락을 받아 8월에 율곡리로 돌아가다. 거기서 〈감군은(感君恩)〉을 짓다. 겨울에 동료들과 〈옥당 진계 차(玉堂陳戒箚)〉를 올려 재앙 없앨 방법을 논하다. 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 동부승지 지제교 겸 경연 참찬관(承政院 同副承旨 知製敎 兼 經筵參贊官) 춘추관 수찬관(春秋館 修撰官)에 임명되다. | |
1574년(선조 7년) |
39세 |
정월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승진되어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지어 올리다. 3월에 병조참지(兵曹參知), 사간원 대사간(司諫院 大司諫)에 임명되다. 10월에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어 황해도의 민폐를 개혁할 것을 상소하다. | |
1575년(선조 8년) |
40세 |
3월에 병으로 사직하고 율곡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홍문관 부제학(弘文館 副提學)에 임명되다. 9월에 〈성학집요(聖學輯要)〉를 지어 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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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6년(선조 9년) |
4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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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7년(선조 10년) |
42세 |
정월에 해주 석담(石潭)에서 가족들을 모아 놓고 〈같이 살며 서로 경계하는 글(同居戒辭)〉를 지어 읽히다. 12월에 〈격몽요결(擊蒙要訣)〉을 완성하고, 〈해주 향약(海州鄕約)〉과〈사창(社倉)〉을 의논하여 세우다. | |
1578년(선조 11년) |
43세 |
해주 석담(石潭)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짓고 주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짓다. 3월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어 올라왔다가 사퇴하고 4월에 율곡리로 돌아가다. 5월에 다시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로 사퇴하고 만언소(萬言疏)인 〈응지논사 소(應旨論事疏)〉를 지어 올리다. | |
1579년(선조 12년) |
44세 |
3월에 〈도봉서원기(道峯書院記)〉를 짓고 〈소학집주(小學集註)〉를 완성하다. 5월에 대사간에 임명되었으나 상소로 사퇴하고, 동서 붕당의 폐해를 깨끗이 하고 화합하여 오직 어진 사람을 등용할 것을 간청하다. 7월에 〈구용첩(九容帖)의 발문(跋文)〉을 짓다. | |
1580년(선조 13년) |
45세 |
5월에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짓다. | |
1581년(선조 14년) |
46세 |
정월에 상소를 올려 정사(政事)를 닦아 천재(天)를 방지하기를 간청하다. 4월에 임금에게 청하여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책(救民之策)을 회의하게 하다. 6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사헌부 대사헌(司憲府 大司憲) 겸 예문관제학으로 승진되고 동지중추부사를 맡다. 10월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호조판서(戶曹判書)로 승진되고 조광조, 이황을 문묘에 종사(從祀)할 것을 건의하다. 또 폐정(弊政)을 개혁하기 위한 임시기구로 경제사(經濟司)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다. 11월에 홍문관(弘文館)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에 임명되다. 이 해에 〈경연일기(經筵日記)〉를 완성하다. | |
1582년(선조 15년) |
47세 |
7월에 어명으로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 〈김시습전(金時習傳)〉과 〈학교모범(學校模範)〉및 사목(事目)을 지어 올리다. 9월에 숭정대부(崇政大夫)로 특진하고 의정부 우찬성(議政府 右贊成)에 임명되어 세 번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아 또다시 만언소(萬言疏)인 〈진 시폐소(陳時弊疏)〉를 지어 올리다. 10월에 명(明)나라 사신을 영접하는 원접사(遠接使)가 되어 〈극기복례설〉을 지으니 사신들이 거듭 경탄하였다. 12월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임명되어 서도(西道)의 민폐(民弊)를 진달하다. | |
1583년(선조 16년) |
48세 |
2월에 〈시급한 정책 여섯가지(時務六條)〉를 계진하다. 4월에 시국 구제에 관한 상소인 〈진 시사 소(陳時事疏)〉를 올리다(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이 되는 공납(貢納)제도를 개혁할 것. 특히 서자들을 등용하고 또 노비들도 곡식을 바치면 양민으로 허락해 줄 것을 주장). 또 4월에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하여 십만 양병설을 주장했으나, 유성룡 등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가다. 6월에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사임하고 율곡리로 돌아갔다가 7월에 다시 해주 석담으로 가다. | |
1584년(선조 17년) |
49세 |
정월 14일에 북방을 순무(巡撫)하러 가는 서익에게 〈마땅히 해야 할 여섯가지 방략(六條方略)〉을 최후로 진술하다. | |
1623년(인조 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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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4년(인조 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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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文成)은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안민입정(安民立政)을 성(成)이라 함 : '도덕과 사물을 널리 들어 통했고, 백성의 안위를 살펴 정사의 근본을 세웠다.'라는 의미) | |
1681년(숙종 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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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차는 문순공(文純公) 이 황(李滉) 다음에 놓임. |
만언 봉사(萬言封事)
《만언 봉사(萬言封事)》는 '만언에 이르는 장편의 글로 임금에게 아뢰는 소'라는 뜻으로 율곡 선생이 39세 때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재임 중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의 하나이다.
봉사(封事)란 옛날 중국 한대(漢代)에 신하가 임금에게 상주할 때 글을 검은 천 주머니 속에 넣어 봉하여 올림으로써, 그 내용이 사전에 밖으로 누설되는 것을 방지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따라서 '만언소(萬言疏)'라고도 흔히 불린다.
이 내용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를 인용하였습니다.
선조 7년 1월 초에 지진이 일어나는 등 재이(災異)가 심하여 선조는 조정 대관(大官)에서부터 초야(草野)의 선비에 이르기까지 넓은 범위의 인재들에게 국난 극복을 위한 직언(直言)을 구하였다.
이때 우부승지에 있었던 율곡은 재이의 극복을 위한 선정(善政)의 요체(要諦)에 관하여 장문의 상소문을 선조에게 올리게 되었다.
그 내용의 체계는 앞부분에서 선조가 여러 선비들에게 직언을 구하는 취지를 간략하게 정리한 후 본문에서 선조의 취지에 따라 선정(善政)의 진수(眞髓)를 매우 논리적인 체계와 실제의 일에 입각하여 진언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는 제도 개혁을 이루어 때에 맞는 변법을 하자는 것이고,
둘째는 일곱 가지 무실(無實)을 없애고 실사(實事)에 힘쓰자는 것이고,
셋째는 백성이 편안히 살 수 있는 방책을 말하고 있다.
선조의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하답)에,
"상소의 사연을 살펴보니 임금과 백성을 요순시대처럼 만들겠다는 뜻을 짐작할 수 있다. 훌륭하다. 논술함이여... 옛 사람도 여기에 더할 수 없겠도다. 이런 신하가 있는데 어찌 나라가 다스려지지 않음을 걱정하겠느냐"
하였으니, 그 내용이 어떠한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진 시사 소(陳時事疏)
율곡이 48세 되던 해인 1583년(선조 16) 계미(癸未) 4월에 올린 시사(時事)를 아뢰는 소이다.
시폐(時弊)에 대해 극력 진달하고, 다시 전에 청했던 공안(貢案:공물의 내역을 적은 문서) 개정, 군적(軍籍) 개정, 주현(州縣) 병합, 감사(監司:각 도의 관찰사)를 구임(久任:임기를 오래하는 것)시키는 등에 관한 일을 피력하고, 또 서얼(庶孼:서자와 그 자손)의 허통(許通:관직에 나가는 것), 공·사천(公私賤:공,사노비)중에 무재(武才)가 있는 자의 속량(贖良:몸값을 받고 종의 신분을 풀어주어 양민이 되게 하는 일) 등에 대해 건의하고 있다. 이 소는 계미봉사(癸未封事)라고도 한다.
삼가 아룁니다. 흥망(興亡)은 조짐이 있고 치란(治亂)은 기미가 있는 것입니다. 일이 있기 전에 말하면 흔히 신용을 받지 못하고, 일이 닥친 뒤에 말하면 구제하려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신이 예전 역사를 읽다가 매양 장구령(張九齡)83)·성 충(成忠)84)의 말에 이르러서는 미상불 책을 덮고 깊이 탄식하면서 마음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 백제(百濟) 의자왕(義慈王)의 혼용(昏庸 : 어둡고 용렬함)은 본디 말할 거리도 못되거니와, 당 현종(唐玄宗)의 명지(明智)로도 선견(先見)에는 어두웠으니, 의자왕이 성충의 말을 쓰지 않은 것을 후회한 것이나, 당 현종이 곡강공(曲江公 : 장구령(張九齡)의 별칭)에게 제사한 것이 난망(亂亡)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예로부터 난망(亂亡)의 나라는 혹은 음란하고 잔학(殘虐)함으로써 천명(天命)을 함부로 끊어버리고 혹은 장기간 쇠퇴함으로써 시들어져 떨치지 못하였으니, 장·곡(臧穀)이 비록 다르나 그 양을 잃어버린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85) 그러나 음란하고 잔학한 병은 일시에 갑자기 나타났으므로 만약 현군(賢君)이 그를 대신하면 옛것을 상고할 수 있어서 다시 일으키기가 쉽거니와, 장기간 쇠퇴한 증세는 여러 대를 두고 빚어졌으므로 비록 철왕(哲王)이 그를 이어받아 그 공을 갑절 더 쓰더라도 떨쳐 일어나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나라는 인덕(仁德)이 오래 쌓여 근본이 깊으나, 1백여 년 이래로 준걸들이 그 재능을 쓰지 못하고 폐정(弊政)이 날로 백성에게 가해지고 있습니다. 연산군(燕山君)이 전형(典刑)을 전복한 뒤로부터 그것을 고쳐 바로잡은 사람이 없어서, 조정과 백성이 서로 잊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근심에 젖은 백성들이 항상 도탄에서 허덕이면서 호소해도 위에 들려지지 않으니, 외적의 침입이 없다 하더라도 진실로 위태로운 상황인데, 하물며 지금 북방의 호족(胡族)이 우리와 틈이 벌어져 병화(兵禍)가 연결 되었음에리까.86) 구원하자니 나라에 병사가 적고 군량을 공급하자니 창고에 묵은 저축이 없으며, 느슨히 하면 해이하여 이루어지지 않고, 급히 서두르면 무너져 흩어져서 도적이 됩니다. 이와 같이 난망의 현상이 환히 목전에 있으니 이는 '일이 있기 전에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곧 '구제하려 해도 소용이 없는 것'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위태하고도 위태하옵니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다고 돌려버리고 아무 대책 없이 망하기를 기다려서야 되겠습니까.
그으기 생각하옵건대, 천하의 일은 근본적인 것도 있고 말단적인 것도 있습니다. 먼저 그 근본적인 것을 다스리는 것은 오활(迂활)한 듯 하나 이루어짐이 있고, 그 말단적인 것만 일삼는 것은 절실한 듯 하나 도리어 해롭습니다. 오늘날의 일로써 말하면, 조정을 화합시키고 폐정(弊政)을 혁신하는 것은 근본적인 것이고, 군사와 양식을 조도(調度)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은 말단적인 것입니다. 말단적인 것도 본디 거행되어야 하지만, 근본적인 것을 마땅히 더욱 먼저 행해야 합니다. 옛날 추(鄒)나라와 노(魯)나라의 싸움에 추나라 백성이 그 관원[長上]이 죽는 것을 흘겨보고 구원하지 않았는데 추목공(鄒穆公)이 맹자(孟子)에게 물으니까, 맹자는 군령(軍令)을 엄숙히 하라고 고하지 않고 곧 인정(仁政)을 행하라고 권하였습니다.87)
대체로, 인정(仁政)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양쪽 군진(軍陳)이 서로 대치하여 시석(矢石)이 바야흐로 오가고 있으니, 비록 인정(仁政)을 행하고 싶으나 사세가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상정(常情)으로 말하면 누가 오원(迂遠)하다고 웃지 않겠습니까. 오늘날의 사세가 실로 이와 같으니, 전하께서 그 또한 왕도의 근본에 돌아가서88) 생각하시겠습니까.
이른바 '조정을 화합시키고 폐정을 혁신 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로부터 정치를 잘하는 임금은 반드시 먼저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정을 바르게 합니다. 조정이 이미 발라지고 사류(士類)가 화협(和協)한 뒤에, 용모도 화평하고 기운도 화평하여 천지의 화평이 응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조정이 화합하지 못하고 재변이 거듭 이른 것에 대해 누가 그 책임을 지겠습니까. 전하께서 정심·성의(正心誠意)의 학문이 지극하지 못한 바가 있으시고 용사·거조(用舍擧錯 : 인재를 쓰고 버림)의 명령이 합당하게 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하옵건대 자신에 돌이켜 살피시어, 가깝고 작은 일에 구애되지 마시고 반드시 성왕(聖王)을 따르는 것을 목표로 삼으소서. 이것은 성명(聖明)께서 학문에 종사하고 힘써 행하는 것이 어떠하냐에 달려 있으니, 지금 감히 수다스럽게 거듭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오늘날 조정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어떠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동·서(東西)가 당류(黨類)를 나눈 이후로 형색(形色)이 세워져서, 왕왕 당이 같으냐 다르냐에 따라서 좋아하고 미워하게 됨을 면치 못하여, 말을 만들어내고 일을 지어내는 자가 서로 구함(構陷)하여 마지않습니다.
벼슬아치로서 의논을 주장하는 사람은 대부분 동인으로서, 보는 바가 편벽됨이 없지 못하고, 그 유폐(流弊)가 혹 어질고 어리석음과 재주가 있고 없음을 따지지 않고 오직 동인이냐 서인이냐를 분변하는 것만 힘쓰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동인이 아닌 사람은 억제하고 서인을 배척하는 사람은 찬양하여, 이로써 시론(時論)으로 정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처음 진출한 경예(輕銳)한 사람은 출세하는 길이 서인을 공격하는 데에 달려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므로 다투어 일어나 부회(附會)하여 인재를 중상하고 사습(士習)을 허물어뜨리되 그것을 금제하지 못합니다.
아! '동서(東西)' 두 글자는 본디 민간의 속된 말에서 나온 것이므로 신이 일찍이 믿을 수 없다고 웃어버렸더니, 오늘날에 와서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줄이야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사람을 관찰하는 도리는 오직 사정(邪正)만 분간할 뿐이옵지, 어찌 동인이냐 소인이냐를 분별할 것이겠습니까. 신으로 말하더라도, 당초에 사류(士類)에게 죄를 얻은 것이 아니라, 다만 양쪽을 조제(調劑)하여 국사를 함께 하려 한 것뿐인데, 사류로서 그 의도를 모르는 사람이 잘못 서인을 부호(扶護)하고 동인을 억누른다고 지목하여, 한 번 흠을 지적당하자 점차 의심하게 되어 온갖 비방이 따라 일어나고, 마침내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의 유생들도 혹 업신여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신의 분의를 헤아려보면 진실로 사퇴를 청하여 문을 닫아걸고 허물을 반성해야 마땅한데, 은총을 탐내어 아직까지 결단성 있게 떠나지 못합니다.
또 생각하옵건대, 사류는 본디 잘못되었으나, 대부분 식견의 착오에서 나온 것이옵지, 반드시 사정(私情)을 두어 일을 그르친 것은 아닙니다. 하루아침에 깨달으면 그 중에는 진실로 쓸 만한 인재가 있으며, 그 중에 한두 사람은 신의 본심을 알고 있으므로 애써 머뭇거리면서 반드시 그들과 함께 같이 삼가고 서로 공경하는[同寅協恭] 경지에 나아가려 한 것입니다. 아! 새나 짐승과는 무리 지어 함께 살수 없으니, 신의 사류(士類)를 버리고 장차 주구와 더불어 일을 이루어 나가겠습니까. 신의 마음 씀이 매우 어렵고 정리(情理)도 슬퍼함직 합니다.
신이 지금 있는 말을 다하는 것이 진실로 시론(時論)에 더욱 거스르는 것임을 알고 있으나, 이와 같이 마음에 있는 대로 다 말씀드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전하께서 영상(影像:외형으로 나타나는 것.)만 대강 보시고 실상(實狀)은 구명하지 않으시어, 근일 의견을 말씀드리는 자가 혹 조정벼슬아치를 두고 편당(偏黨:한 당파에 치우침.)한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있을 경우에, 전하께서 그를 통촉하지 못하시고 마침내 신하를 의심하여 다 붕당(朋黨)으로 여기시면, 아마도 사림(士林)의 무궁한 누가 될 듯하다, 반드시 명백히 사람이 편안해지고 공론이 행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소인이 진실로 붕당이 있는 것입니다만, 군자도 같은 유끼리 협심합니다. 만약 사정(邪正)을 따지지 않고 당(黨)만을 미워하면 마음이 같으며 덕이 있는 선비도 조정에 용납되지 못하지나 않겠습니까. 이르므로 예로부터 붕당의 폐해는 다만 벼슬아치의 흠이 되었을 뿐인데, 붕당을 미워하여 그를 제거하려는 자는 남의 나라를 망치는 데에 이르게 하지 않은 자가 없습니다. 동경(東京)의 당고(黨錮)의 변89)과 백마역(白馬驛)의 청류(淸流)의 화90)는 깊이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오늘날의 벼슬아치들 중에 어찌 한두 명이 당에 치우치는 풍습이 없겠습니까만, 이로 인하여 여러 신하들을 모두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 위아래가 서로 믿지 않으면 벼슬아치가 화목하지 못하고,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않으면 뜬 의논이 마구 퍼집니다. 이러한 데도 난을 진정시키고 치안을 바라려는 것은 예전에 듣지 못한 바입니다. 성명(聖明)이 위에 계시니 사림의 화는 없겠지만, 후일 불측한 변고가 실로 오늘날에 싹틀 줄 어찌 알겠습니까. 남곤(南袞)·심정(沈貞)91)같은 소인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습니까. 지금 사류가 하는 대로 일체 내버려두어도 진실로 불가하며, 만일 사류가 그르다 하여 그를 공격하면 더욱더 불가합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 대신·대시(臺侍)들을 널리 불러 탑전(榻前)에서 사대(賜對:임금이 신하를 면대함.)하여 성지(聖旨)를 밝히 이르시어 동인·서인을 가르는 풍습을 고치고, 선인을 등용하고 악인을 벌하여 일체 공도(公道)를 따르며, 의혹과 당파를 말끔히 씻어버리고 진정조화(鎭定調和)하도록 하소서. 그렇게 한 뒤에도 만약 고집을 부리고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재재하여 억누르고, 사정을 품고 굳이 변명하는 자가 있으면, 배척하여 멀리함으로써 반드시 인심이 다같이 인정하는 공시(公是)와 공비(公非)로 하여금 일시의 공론(公論)이 되도록 하면 사림이 감히 다행이겠습니다.
신이 이 말을 하는 것이 어찌 감히 스스로 옳다고 한 것이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마음에 결단하고 묘당(廟堂:의정부의 별칭)에 자문하시어 신의 말이 옳으면 곧 명하여 시행하고, 만약 그르다고 하면 곧 내치어서 국시(國是)가 귀일(歸一)되고 시비가 모호해지는 잘못이 없도록 하시면 그 행복이 더욱 크겠습니다. 이렇게 하고서 성의를 미루어 아랫사람을 접하고 간언(諫言)을 쫒아 허물을 고치며, 성상의 마음이 이미 바르고 조정이 이미 화목해지면, 쓸모 있는 사람을 얻어서 폐단을 혁신하는 일을 의논할 수 있습니다.
대체로, 사람을 얻는 일에 관한 말은 진실로 노유(老儒)가 상례로 하는 말이지만, 실제로 일로써 헤아려 보면 다시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공자(孔子)가 이른바 "정치를 행함은 사람에 달려있다."한 것이 어찌 거짓말이겠습니까. 그렇지만, 인재는 다른 시대에 빌려주지 않는 것이니 임용이 어떠하느냐 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을 적에 우(虞)나라가 망하였고, 자사(子思)가 노(魯)나라에 있을 적에 노나라가 침탈(侵奪)당하였습니다. 현인이 있어도 쓰지 않으면 현인이 없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오늘날 의논하는 이들은 사람을 얻기가 어려움을 핑계하여 매양 변통에 관한 논의를 막습니다. 만약 반드시 옛날 성현(聖賢)처럼 사람을 얻은 뒤에야 나라를 보전할 수 있고, 성현을 얻지 못하면 차라리 위망(危亡)하도록 내버려둔다고 한다면, 사람을 얻는 일에 관한 말은 도리어 고질병이 되므로 천하에 그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는 이가 거의 드물 것입니다.
한고조(漢高祖)의 소하(蕭何)와 당태종(唐太宗)의 위징(魏徵)95)과 송태조(宋太祖)의 조보(趙普)가 어찌 이윤(李尹)· 부열(傅說)· 여상(呂尙)· 제갈양(諸葛亮)의 무리이겠습니까. 그 일시의 특출한 이를 취한 데에 불과합니다. 가령 이 세 황제(皇帝)가 이 세 사람을 버리고 쓰지 않고서 반드시 이윤· 부열· 여상· 제갈양같은 이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나라를 도모하려 하였다면, 이윤· 부열· 여상· 제갈양같은 이는 끝내 얻지 못하고 4백 년의 왕업(王業)과 정관(貞觀)의 치세(治世)102)와 천하의 평정을 함께 창건할 사람이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물은 한· 당에 비하여도 오히려 훨씬 못한데, 하물며 삼대(三代:夏·殷·周)때의 인재를 구하겠습니까. 만약 일시의 특출한 자를 취하려 한다면 어느 시대인들 사람이 없겠습니까, 전하께서 위임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우리 세종대왕(世宗大王)은 동방의 성주(聖主)이십니다. 사람을 쓰되 자기 몸과 같이하고 법을 정립(定立)하여 치세를 도모하며, 후손에게 넉넉함을 남겨주어 영원히 큰 터전을 마련하셨으나, 그 사람을 쓰는 규모는 현인과 재능 있는 이를 쓰고 그 부류는 따지지 않았으며, 임용을 오롯이 하여 참소와 이간질이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남지(南智)는 문음(門蔭)으로부터 진출하였으나, 젊은 나이로 삼공에 임용하였으며, 김종서(金宗瑞)는 드러나게 물론(勿論:여론)을 받았으나 혼자의 의견으로 육진(六鎭)을 개척하였습니다. 하루도 안 되어 초천(超遷:정규의 등급을 뛰어오림 하는 사람은 마땅히 경상(卿相)의 지위에 이를 것이라 생각하나, 지위가 그 재능에 상당하면 종신토록 바꾸지 않았고, 여러 해 동안 구임(久任)하는 사람은 벼슬이 여기에 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하루아침에 승탁(昇擢)하면 계급에 구애되고 능한 이를 부린 한 법규이옵지 어찌 세종께서만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조종(祖宗)께서 성헌(成憲:선왕이 정해놓은 법)을 따라서 과거를 설행(設行)하였으나, 과거로 말미암지 않은 이로 경상(卿相)에 이른 이가 많았으되, 당시에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고 후세에도 아름다운 이로 일컬었지, 문음출신을 금고(禁錮:벼슬길을 막음)하여 관직을 한정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문음출신도 오히려 금고할 수 없는데, 하물며 과거에 합격한 선비보다 소홀히 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에 전하께서 조종조(祖宗朝)에서 사람 쓰던 법을 복구하도록 명하시어, 과거출신이 아닌 자로 하여금 헌관(憲官:사헌부의 관원)이 될 수 있도록 하셨으며, 그 선발에는 반드시 당시의 인망 있는 이를 취하였으므로 풍채(風采)가 볼 만한 사람이 만이 있었기에 청의(淸議)는 매우 흡족하였으나 세속의 견해는 그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뜻밖에도 도리어 세속을 따르라는 명을 내리시어, 조종의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이 이미 행해지다가 도리어 폐해지게 하시니 전하께서 어찌하여 조종의 좋은 법을 가벼이 고치시고 도리어 유속(流俗)의 견해를 따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류(士類)가 실망하고 인재가 진동되지 않는 것이 이로부터 비롯될 것이니, 이것을 말함에 어찌 크게 탄식만 나올 뿐이겠습니까.
근일 기대정(奇大鼎)의 설이 성상의 마음을 시름겹게 해서 그러하시는 것입니까. 대체로 정신이 일찍이 신덕왕후(神德王后)를 태조의 묘(廟)에 합부(合 )해야 한다는 설로105) 전하께 아뢴지가 오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결코 성상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헤아리고 나서, 제각(祭閣)을 세우고 제관(祭官)을 두자는 설로 바꾼 것은 사세가 부득이한 데에서 나온 것이옵지 본심은 아닙니다. 조정 의논이 이미 그러하다면 어찌 한 사람의 말 때문에 곧 전의 설을 고칠 수 있겠습니까.
기대정(奇大鼎)이 만약 자기의 의견으로 대중의 논의를 돌이킬 수 없고 또 대중의 의견 때문에 자기의 의사를 굽히고 싶지 않다면, 당초에 마땅히 병을 구실로 하고 나오지 않아서 분우(紛擾)한 폐단이 없도록 해야 하거늘, 감히 앞장서서 독단하여 온 조정이 자기를 따르게 하고자 하니, 그 또한 자신을 헤아리지 못한 것뿐입니다. 함께 나간 뒤에 독계(獨啓)를 허락하지 않고 또 다시 도모할 수 없게 되어서는 병으로 사퇴하는 길 이외에 다른 계책이 없으니, 이는 사세로 보아 당연한 것입니다. 그를 억세고 고집스럽다고 한다면 가하거니와, 만약 궤휼(詭譎:교묘하고 간사한 속담)하다고 한다면 실로 본정이 아닙니다.
옥당(玉堂)의 분소(分疎:조목조목 나누어 설명함)도 명백하지 못한 듯하나, 전하의 지나친 의심도 또한 깊이 통촉하지 못하신 것입니다. 어찌 한 가지 일로 인하여 문득 버리고 쓰지 않아서야 되겠으며, 또한 이 한사람으로 인하여 일시의 인재를 다 폐기해서야 되겠습니까. 목구멍 메인 것으로 인하여 먹는 것을 그만두고, 발꿈치 자르는 것을 보고 신발을 그만두는 것은 고금의 공통된 경계인데 전하께서 그것을 생각하지 못하셨습니까.
아! 세속에 뇌동하여 진출을 도모하고 재능을 자랑하여 쓰이기를 구하여, 득실(得失:벼슬을 얻고 읽어 버리는 일)을 한사람(一夫:시관을 말함)의 눈에서 결정함으로써 녹봉을 구하는 자료로 삼는 자는 전하께서 귀히 여기는 바이며 염정(恬靜:편안하고 고요함)을 스스로 지키고 재능을 감추어 두고 값을 기다려서, 작록(爵祿)을 영화로 여기지 않고 반드시 그 의리를 잃지 않으려 하는 자는 전하께서 천하게 여기시는 바입니다. 만약 이윤· 부열· 여상· 제갈양같은 이가 오늘날 다시 태어난다면 모르겠습니다. 만, 앞에 일컬은 사람들에게서 나오겠습니까. 죽은 말도 사들이자 천리마(千里馬)를 얻었고, 곽 외(郭외)를 스승으로 삼자 국사가 모여들게 되었으니 선을 좋아하는 효과가 그림자나 메아리보다 더 빠릅니다.
방금 국세가 판탕(板蕩)하여 기상이 수참(愁慘)하니, 비록 세상에 보기 드문 현재(賢才)를 얻더라도 부지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전하께서 곧 상례(常例)를 편히 여기고 옛 관습을 지키는 신하들과 함께 관례에 따라 강론하여, 한 가지 폐단도 혁신하지 못하고 한 가지 기계(奇計)도 내지 못하면서도 일시의 선비를 가벼이 보아서 그들이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가 버리게 하니, 이와 같은데도 변경의 근심을 진압하고 생민을 안정시키기 바라고자 한들, 뒷걸음치면서 전진하기를 바라는 것에 가까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어서 전의 견해를 돌리시고 다시 옛날 법을 따르시어, 일식이나 월식과 같은 일시의 과오가 곧 회복됨을 우러러보게 하소서). 그래서 자리를 비워놓고 어진 이를 구하며, 정성과 예를 다하되, 이르지 않는 이는 반드시 이르게 하기를 목표로 하고, 이미 이른 이는 반드시 쓰기를 목표로 하시면 국가가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오늘날 위아래가 모두 경원을 근심으로 삼아서, 반드시 적합한 사람을 얻고자하여 재삼 가리니, 그 계책이 지극합니다. 그런데 일국의 위태로움이 경원과 다름이 없는데 대하여는 깊이 생각하고 원대히 염려함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정의 대관 및 대시(臺侍: 대간으로서 시종하는 신하)의 직책은 신중하게 여기지 않고, 정원이나 채우고 궐원(闕員)이나 보충하며 아침에 제수하고 저녁에 다시 임명하여 자리가 따뜻할 겨를이 없이 바뀌며, 안락과 재물을 탐하며, 세월만 보내어 온갖 법도가 모두 해이해졌으니, 어째 경원의 일국보다 더 중하겠으며, 변장(邊將)이 육경(六卿)·대시(臺侍)보다 더 중하겠습니까. 어찌 경원을 근심하는 것으로 국가를 근심하지 않으십니까.
순임금이 제왕 노릇을 할 적에 구관(九官)을 명하는 데에 불과하였을 뿐이고, 진도공(晉悼公)이 패왕 노릇할 적에 육경(六卿)108)을 뽑는 데에 불과하였을 뿐이니, 만약 구관이 자주 바뀌고 육경이 자주 바뀌었다면 순임금 같은 성제와 진도공 같은 현군으로도 끝내 그들과 함께 공을 이룩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대신과 더불어 대간을 구임시키는 대책을 강구 하소서 그리고 사람에게 관직을 임명할 때에도 반드시 일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널리 물어서 사람과 관직이 서로 적합하게 하고, 위임하여 성공을 책임 지우며, 의심도 말고 틈도 주지 말아서 공을 이루도록 목표하시면, 이것이 더욱 큰 다행이겠습니다.
만약 폐정을 혁신하실진대, 우신이 전부터 간청하는 바는 공안을 개정하는 것, 군적을 고치는 것, 주현을 병합하는 것, 감사를 구임시키는 이 4조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군적을 고치는 일은 비록 윤허를 받았으나 신이 감히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입니다. 신의 당초 생각으로는, 군졸의 설치는 본디 방어를 위한 것이라 여겼으므로 군졸을 감소하고, 공물을 진상하는 일은 전결(田結)로 옮겨서 한가로이 살면서 힘을 기르고 훈련에 전심하여 완급에 대비하게 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공안(貢案)을 고치지 말도록 명하시게 되어서는 , 비록 군적을 고치더라도 양병하는 계책은 반드시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말에 "이익이 10배가 되지 않으면 옛것을 고치지 않는다,"하였습니다. 만약 경장(更張)하는 허명만 있고 변통하는 실리를 얻지 못한다면 차라리 옛날대로 둘 뿐입니다.
아! 공안을 고치지 않으면 민력(民力)이 끝내 펴일 수 업고 국용이 끝내 넉넉해질 수 없습니다. 지금 변경의 우환이 점차 위급해져서 편히 쉴 기약이 없으니, 시급한 것은 군사이고 궁핍한 것은 양식입니다. 부세를 더 징수하면 백성의 곤궁이 더욱 심해지고, 더 징수하지 않으면 국고의 저축이 반드시 고갈될 것입니다. 더구나, 군기를 별도로 만들고 금군을 가설하는 등의 일은 모두 부득이한데서 나온 것이지만 , 경비이외에 조도(調度)가 매우 넓으니, 모르겠습니다만, 어떠한 묘책을 내서 경용(經用)을 보충할 수 있겠습니까.
주현을 병합하는 일에 이르러서는 본디 성상의 의사에서 나왔으나, 시행이 어렵지 않고 이해가 분명합니다. 전하께서 매양 개혁을 중대한 일로 삼으십니다만, 옛날의 개혁은 반드시 대단한 변통이 아니오라 나누기도 하고 합하기도 하여 시대마다 책에 끊이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중난한 일이겠습니까
소읍의 쇠잔한 백성이 번다한 역에 시달리고 있으니 하루 아침에 몇 고을을 어울려서 하나로 한다면 백성들의 기뻐함은 거꾸로 매달린 것을 풀어주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지금 한가지 예로 그 징험을 볼 수 있습니다. 황주판관(黃州判官)이 혁파되자 이민이 뛰고 춤추며 서로 경하하였으니 두 고을을 하나로 병합하는 것도 판관을 혁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이 조금 편안해질 수 있는데 전하께서 어찌 한 번 혜택을 베풀지 않으십니까.
감사를 구임시키는 일로 말하면, 신이 전일에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그러나 더욱 급급히 해야 할 것은 병영을 큰 고을에 설치하여 병사(兵使)로 하여금 겸입하도록 하는 일로서 이것이 오늘날 군졸을 되살리는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먼저 감사를 구입시킨 뒤에야 비로소 병사(兵使)로 하여금 식구를 데리고 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간절한 소망이 여기에 있을 뿐이옵지. 어찌 우신 일신을 위한 계책이겠습니까.
오늘날의 계책은 비변(備邊:변경의 방어에 대비함.)에 중점을 두므로 오늘 열읍(列邑)의 간리(姦吏)를 적발하고 이튿날 이도(二道)의 승군(僧軍)을 조발(調發)하되, 호족(豪族)을 초록(抄錄)하게 하고 금군(禁軍)을 모집하여 증가하여 무사(武士)를 널리 취하도록 하니, 이는 모두 지엽적인 계책이고 근본적인 계책은 아닙니다.
아! 재해가 아울러 이르고 날로 일어나매, 인심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상황인데, 조정의 시행 조처하는 바에는 하늘의 견책(譴責)에 답하고 화의 싹을 사라지게 하고, 민심을 위열(慰悅)하고, 나라의 근본을 공고히 할 만을 것은 한 가지 일도 없고, 한갓 중외(中外)가 시끄럽고 거짓말이 사방에서 일어나게만 합니다. 신이 비록 성의를 다하여 이뢰젓이 한두 번이 아니었건만, 전하께서 경장(更張)하는 것을 어렵게 여기시어 여태까지 의심하고 미루어옴으로써, 점차 민력(民力)이 더욱 쇠진하고 국계가 더욱 고갈되고 변방 불화가 더욱 깊어지게 되며, 따라서 도탄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는 백성이 일어나서 도적이 죄어 온 경내에 두루 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비록 왕좌지재(王佐之才:왕을 보좌할 훌륭한 인재.)가 있다 하더라도 널리 구제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의 시세(時勢)는 비유컨데, 오랫동안 병중에 있는 사람이 원기(元氣)가 다 없어져서 걸핏하면 병이 나는 것과 같습니다. 냉을 다스리면 열이 일어나고 열을 다스리면 냉이 발하니, 비록 외부의 사기(邪氣)는 막을 수 있다하더라도 먼저 원기를 보양해야 합니다. 그래서 원기가 회복되고 근본이 튼튼해진 뒤에 사기(邪氣)를 다스리는 약이 유효할 것입니다. 만약 원기를 돌보지 않고 공격하는 약제(藥劑)만 먹으면 오래 못 가서 목숨이 다할 것입니다. 지금 신이 반드시 변통하기를 청하는 것은 곧 원기를 보양하는 약제이고, 군사의 조련과 양곡의 운반을 청하면서 변통을 돌보지 않는 것은 곧 공격만 일삼는 약제입니다.
의논하는 사람은 혹 소요(騷擾)를 근심하여 변통하려 하지 않습니다만, 이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貢案)을 고치고, 군적을 고지며, 주현을 병합하는 등의 일은 모두 조정에서 헤아리고 마감 확정할 뿐이오니, 백성에게는 한 되의 쌀이나 한자의 베의 비용도 들지 않으니, 백성에게 무순 상관이기에 소요할 근심이 있겠습니까.
양전(量田:전지를 측량함.)으로 말하면, 백성에게 약간 동요가 없을 수 없으므로 반드시 풍년이 든 뒤라야 거행할 수 있습니다. '공안(貢案)의 개정을 반드시 양전(量田)보다 뒤에 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이것 또한 그렇지 않습니다. 공안은 진실로 전결(田結)의 다과(多寡)로써 고르게 정해야 하지만, 양전한 뒤에 전결(田結)의 증감이 어찌 아주 달라지는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먼저 공안을 고치고 뒤따라서 양전한들 또한 무슨 해로울 것이 있겠습니까. 전결(田結)의 다과에 따지지 않고 멋대로 잘못 정한 것이야 있겠습니까.
대체로, 세속의 인정은 인순(因循)하기를 좋아하고 개작(改作)하기를 꺼려합니다. 스스로 의사도 지혜도 없는 것을 가지고 남도 다 그러한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위망(危亡)의 조짐을 보더라도 부지할 방책을 생각지 않고, 도리어 유위한 것을 소요(騷擾)로 삼고 무모(無謀)한 것을 진정(鎭靜)으로 삼아서 마치 남에게 약 먹는 것을 금지하여 병을 지닌 채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는 진실로 구신(具臣:관원의 수효만 채우고 유위함이 없는 신하.)의 상태(常態)라 깊이 책할 거리도 못되거니와, 다만 전하의 성명(聖明)으로 분발을 어렵게 여기고 앉아서 반드시 망할 것을 보시면서 계책을 변경하지 않으시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만약 전하께서 신의 계책을 다 써서 이를 변경하지 않고 굳게 지키어 시행한지 3년이 된 뒤에도 민생이 불안하고 국용(國用)이 부족하며 양병(養兵)이 여의치 않으면 비록 신에게 형벌을 가하더라도 신은 실로 마음에 달게 여기겠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사람이 변변찮다고 하여 그 말까지 폐기하지 말고 다시 깊이 생각해 주소서.
이른바 '군사와 양식을 조도(調度)하여 방비를 튼튼히 한다' 는 것은 비록 일을 함에 있어서 말단적인 것입니다만, 또한 느슨히 하고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백성을 조발(調發)하여 군사로 삼고 둔전(屯田)으로 곡식을 축적하는 것은 묘당(廟堂)의 계책이 이미 시행되었으니 그 일로 성패와 이해는 미리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령, 경원(慶源)의 소추(小醜:하찮은 무리, 즉 오랑캐를 가리킴.)가 끝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다른 진영(鎭營)의 호족(胡族)들이 때를 타서 난을 선동한다면, 함경도의 힘이 결코 지탱해내지 못합니다. 지금 원병(援兵)을 보내자니 교련하지 않은 백성을 사세로 보아 몰아서 다그칠 수 없고 양곡을 실어 보내자니 2천리의 길에 형세로 보아 양식을 모으기 어렵습니다. 이런 때에 상례의 규정에 얽매이면 일을 그르치는 것은 잠깐 사이에 달려 있습니다.
신의 우계(愚計)는 전자에 이미 발표하였다가 다시 중지하였는데, 지금에 와서는 더욱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만약 신의 말을 쓴다면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서얼(庶孼) 및 공· 사. 천 중에 무재(武才)가 있는 자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각자 양식을 준비하여 남·북도에 들어가 방수(防戍)하도록 하되, 북도는 1년을 기한으로 삼고 남도는 20개월을 기한으로 삼아서, 응모자가 많도록 하고, 병조(兵曹)에서 재능을 시험하여 보내소서. 그런데, 서얼은 사로(仕路)를 허통(許通)하고, 천예(賤隸)는 면천(免賤)하여 양인(良人)이 되게 하며, 사천(私賤)은 반드시 본주(本主)가 병조(兵曹)에 단자(單子)를 올린 뒤에 시재(試才)를 허락하여, 주인을 배반하는 종이 없도록 하고, 그 대가는 자원에 따라 골라주도록 하소서. 만약 무재가 없는 자일 경우에는 남·북도에 곡식을 바치도록 하되, 원근(遠近)으로써 다과(多寡)의 수량을 정하고, 사로(仕路)의 허통(許通)과 종량(從良)109)하는 것도 무사(武士)의 예와 같이 하소서, 그렇게 하면 군사와 양식이 조금은 방어에 대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옛날 이시애(李施愛)난110)에 천인으로서 군기를 운반한 자는 모두 종양(從良)하게 하였고, 서얼로서 종군(從軍)한 자는 과거에 응시하게 하였으니, 이는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 권도(權道)로 이미 시행하신 규례입니다.
신은 진실로 이 계책이 반드시 시의(時議)에 합하지 않을 것임을 압니다만, 이 이외에 다시 좋은 계책이 없으므로 부득불 다시 아뢰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생각하고 익히 계획하시어 단행(斷行)하소서.
아! 비도(匪徒)의 난리는 방비가 없는 데에서 일어나서 승패와 안위(安危)가 호흡 사이에 결정되는 데, 의논하는 이는 오히려 조용히 담소(談笑)하고 서서히 예전 규계를 상고하려 하며, 게다가 중론(衆論)이 분분히 일어나서 절충될 기약이 없으니, 만약 조정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리면 변성(邊城)이 이미 격파당해 버릴 것입니다. '모의하는 사람이 심히 많으므로 일이 성취되지 않는다[謨夫孔多 是用不集]111)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입니다.
아! 변변찮은 우신(愚臣)이 성명(聖明)을 만나서 은총을 믿고 조금도 숨김없이 광망(狂妄)한 말로 전후에 여러 차례 진달 하였는데도, 엉성한 논의, 잘못된 계책은 여러 차례 하나도 시행되지 않고 외로운 신세로 쓸쓸하게 서성거립니다. 임금이 근심하면 신하는 욕을 당하여야 하는 지라 밤낮으로 슬퍼하고 탄식히며, 머리털이 허옇게 새고 마음이 문드러지도록 애써도 수고롭지만 했지 유익함이 없습니다. '능력을 다하여도 직무를 다할 수 없으면 그만둔다.112)하였으니 의리상 마땅히 삼가 물러나서 신의 분수를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심혈(心血)을 다하여 지금까지 슬피 부르짖으며 스스로 그칠 줄 모르는 것은 진실로 국가의 후한 은혜를 받아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다 갚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나뭇가지가 불타는 것을 환히 보고서 감히 자신을 돌보는 생각을 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이 다시 말하지 않으면 신에게 그 허물이 있는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성명이 어여삐여겨 살피시어 받아들이소서.
< 주 >
83) 당 현종(唐玄宗) 때 재상. 자는 자수(子壽). 세상에서 곡강공(曲江公)이라 불렀다. 시호는 문헌(文獻). 벼슬은 상서우승상(尙書右丞相)에 이르렀다. 간신 이임보(李林甫)를 억제하다가 도리어 파직되었다. 문학(文學)이 일시에 으뜸이었다. 저서에 「곡강집(曲江集)이 있다. 장구령이 평소에 직도(直道)로 임금을 섬겼는데, 특히 안 록산(安祿山)은 역적 할 상이라 하여 죽이기를 강력히 건의하였으나, 현종은 듣지 않았다. 그가 죽은 뒤에 현종이 안록산의 난리로 촉(蜀) 땅에 몽진(蒙塵)하여 있으면서 그의 충성을 생각하여 사자를 보내어 제사지내고 그의 집에 많은 비단을 내려주었다. 《新唐書 卷一百二十六 張九齡傳》
84) 백제 의자왕(義慈王) 때의 충신. 좌평(佐平)으로 왕이 주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음을 막으려다가 투옥되었다. 656년(의자왕 16)옥중에서 임종 때에 왕에게 글을 올려 외적의 침략이 있을 것을 예언하고, 육로는 탄현(炭峴 : 沈峴)을 막고 수군은 기벌포(技伐浦 : 白江)을 막으라고 간하고 죽었으나, 왕은 듣지 않다가 백제의 멸망을 초래하였다. 의자왕은 661년(의자왕 20) 당병(唐兵)의 침략으로 성이 함락되자 "성 충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고 후회하였다. 《三國史記 卷二十八 百濟本紀 義慈王 十六年·二十年條》
85) 음란하고 잔학한 정치로 나라가 망한 것이나 장기간 쇠퇴로 인해 나라가 망한 것이나 원인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다는 뜻이다. 이 말은 「장자(莊子)」변무(騈拇)에서 인용한 말이다. 장(臧)과 곡(穀)은 하인을 말한다. 두 사람이 양을 먹이다가 함께 양을 잃어버렸다. 그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장은 책을 읽다가 양을 잃어버렸고, 곡은 도박을 하다가 양을 잃어버렸던 것인데, 그 원인은 다르나 양을 잃어버린 것은 같았다는 고사.
86) 이탕개(李湯介)가 경원(慶源) 등지에 침략해 온 것을 말한다.
87) 이 말은「맹자(孟子)」양혜왕 하(梁惠王下)에서 인용한 것이다.
88) 「맹자(孟子)」양혜왕 상(梁惠王上)에 있는 말로서, 인정(仁政)을 행함을 말한다
89) 동한(東漢)말엽에 환관(宦官)이 전권하였는데 환제때에 진번(陳番)·이응(李膺)등이 이를 미워하고 공박하니, 환관들이 도리어 당인(唐人)이라 지목하여 종신금고(終身禁錮)하였다. 이를 당고의 화(禍)라고 한다. 또 영제(靈帝)때에 두무(竇武)· 진번 등이 모의하여 환관을 죽이려 하였으나 누설되어 일백 여명이 죽음을 당하고 관련자들이 금고 된 일이 있다. 서울 장안(長安)에서 동쪽에 위치하였으므로 동한(東漢)의 별칭으로 쓰인다.《後漢書 卷六十七 黨錮列傳》
90) 당 애제(唐哀帝) 2년(905)에 당(唐)의 권신이었던 주전충(朱全忠:後梁太祖)이 배추(裵樞)등 조사(朝士) 30여 인을 백마역(白馬驛)에 모아다가 하루 저녁에 다 죽이고 그 시체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은 사건. 당초 주전충(朱全忠:後梁太祖)의 좌리(佐理)였던 이진(李振)이 진사시에 누차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므로 朝士들을 매우 미워하여 주전충에게 "이 무리들[朝士]이 늘 스스로 청류(淸流) 하니 황하(黃河)에 던져 넣어서 영원히 탁류(濁流)가 되게 하시오."하자, 주전충이 웃으며 그 말을 따랐다. 청류는 덕행이 고결한 선비다 황하는 흐리다고 한다.《後漢書 卷二白四十 裵樞傳, 痛鑑節要 卷四十八 唐紀 昭宣帝》
91) 조선 중종 14년(1519)기묘(己卯)에 홍경주(洪景舟)와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킨 장본인들. 이때 조광조(趙光祖)등 신진사류(新進士類)를 사사(賜死)또는 유배(流配)하였다.
92) 백리해(百里奚)는 진 목공(秦穆公)의 현신(賢臣). 처음에 우(虞)나라의 대부로 있었는데, 진(晋)나라가 우(虞)나라의 길을 빌어서 괵( )을 치려할 때에 궁지기(宮之奇)는 길을 빌려줄 수 없다고 간하였으나, 백리해는 간해 봐도 소용이 없을 줄 알고 간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나라가 진나라에 멸망되자, 진목공의 초빙을 받아가서 그를 도와 패왕(覇王)이 되게 하였다.《史記 卷五, 孟子 萬章 上》
93) 자사(子思)는 공자(孔子)의 손자. 이름은 급(伋), 자(字)가 자사(子思)다. 증자(曾子)의 제자로 동자의 학통을 이었다. 후세에 술성(述聖)이라 한다. "노목공(魯穆公)때 공의자(公儀子)가 정치를 하고 자류(子柳)·자사(子思)가 신하가 되었으되 노나라의 침탈을 당하자 더욱 심하였으니 현자(賢者)가 이처럼 국가에 도움이 없단 말이오."라고 묻자, 맹자는 "우(虞)나라가 백리해(百里奚)를 쓰지 않아서 망하였고 진 목공(晋穆公)은 그를 써서 패왕이 되었으니, 현자를 쓰지 않으면 망하는 것이니, 침탈만 당할 뿐이랴."하였다.《孟子 萬章 上》
94) 한(漢)의 개국공신(開國功臣). 한고조(漢高祖)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승상이 되었다. 한(漢)나라의 전제(典制)와 율령(律令)은 대부분 그의 손에서 이루어졌다.《宋史 卷三十 九》
95) 당 태종(唐太宗)때의 재상. 직간(直諫)잘하기로 유명하였다. 자는 현성(玄成). 당태종의 신임을 받아 자기 포부를 다 말하고, 특히 십점(十漸)에 대한 진계소(進戒疏)등 전후 2백 여회의 소를 올려 태평정치를 이룩하였다. 《唐書 卷九十七 魏徵傳》
96) 송태조(宋太祖)때의 개국공신(開國功臣). 자는 칙평(則平). 송태조를 도와 천하를 평정하고 추밀사(樞密使)에 임명되었고, 태종 때에 다시 정승이 되었다. 《宋史 卷二百五十六》
97) 은(殷)의 시조 탕왕(湯王)을 도와 하(夏)의 걸왕(桀王)을 치고 왕이 되게 한 명재상.
98) 은고종(殷高宗) 때의 현재상.
99) 주무왕(周武王)을 도와 은(殷)의 주왕(紂王)을 멸망하고 천하를 평정하였다. 본성은 강(姜), 별칭은 강태공(姜太公).
100) 삼국(三國) 촉한(蜀漢)때의 명상. 자는 공명(孔明), 시호는 충무(忠武).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를 도와 촉한(蜀漢)을 세워 위(魏)·오(吳)와 정립(鼎立)하였고, 유비가 죽은 뒤에 후주(後主)를 도왔다. 위의 4인은 역사상 현상(賢相)으로 꼽힌다.
101)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창건한 한(漢)나라가 전·후한(前後漢)과 촉한(蜀漢)을 합쳐서 450년간 향국(享國)하였다.
102) 당태종(唐太宗)의 치세(治世)를 말한다. 당태종은 영걸한 임금으로서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등 현상(賢相)과 위징(魏徵)·이정(李靖)등 명장을 임용하여 태평세대를 이룩하였으므로 그의 연호 정관(貞觀)을 따서 정관지치(貞觀之治)라 한다.
103) 송태조가 조보(趙普)의 도움으로 천하를 평정하였다.
104) 자는 지숙(智叔) 본관은 의령(宜寧). 영의정 재(在)의 손자. 17세 때 음보(蔭補)로 감찰(監察)이 되었고, 세종31년(1449)에 우의정을 거쳐 문종1년(1451)에 좌의정이 되었다.
105) 신덕왕후(神德王后)는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康氏). 방번(芳蕃)·방석(芳碩)두왕자를 낳았다. 태종이 즉위한 이후 태조(太祖)의 묘(廟)에 배향되지 못하였다. 선조(선조(宣祖))때에 신덕왕후는 태조의 정비라 하여 삼사(三司)에서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는 일로 몇 년 두고 논계(論啓)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자, 봉식(封殖:무덤을 높이 모으고 도리나무를 심는 것.)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다. 기대정(奇大鼎)이 선조 16년(1583) 계미(癸未)에 장령(掌令)이 되어 양사(兩司)가 부묘를 청해야 하는데, 다만 각(閣)을 세우고 제사지내기만[(健脚致祭)] 청한 것이 잘못임을 논하였다. 그래서 양사(兩司)는 피혐(避嫌)하고, 홍문관(弘文館)은 기대정(奇大鼎)의 주장에 찬동하여 양사를 체직하고 기대정을 출사하도록 청하였다. 그래서 양사관원이 새로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각(閣)을 세우고 치제(致祭)를 건의한 사람들이므로 기대정과 의논이 합하지 않아 모두 사피하니, 기대정 역시 그대로 재직하지 못하고 정병사직(呈病辭職)하고 말았다.《宣祖實錄 卷十七 癸未三月 丁未》
106) 전국(戰國)때 연소왕(燕昭王)이 난리후 피폐한 정치를 회복하기 위하여 곽외(郭 )에게 현인을 추천하라고 부탁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어떤 임금이 천금으로 사자(使者)를 보내어 천리마(千里馬)를 사오게 하였는데, 그 천리마가 죽었으므로 사자가 5백금을 주고 그 죽은 말의 뼈를 사서 돌아왔더니, 임금이 노하자 그 사자는 '죽은 말도 사는데 하물며 산말이겠습니까. 천리마가 곧 오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과연 1년이 못되어 천리마가 세 마리나 이르렀습니다. 지금 왕께서 반드시 현사(賢士)를 이르게 하고자 할 진대, 이 곽외로부터 먼저 시작하소서. 그러면 곽외보다 나은 이가 어찌 천리를 멀다 하겠습니까."이에 연소왕이 곽외를 위해 궁대를 개축하고 스승으로 섬겼더니, 천사의 현사가 앞을 다투어 연나라에 모여들어서 악의(樂毅)등을 얻어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通鑑節要 卷一週紀, 事記 卷三十四 燕世家》
107)「논어(論語)」자장에"군자의 허물은 일식· 월식하는 것과 같으므로 허물이 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그것을 보게 되고, 고칠 적에 사람이 모두 우러러 본다" 하였다.
108) 춘추 때 진(晉)의 육경(六卿) 즉 조(趙)·범(范)·지(智)·중항(中行)·위(魏)·한(韓)의 육씨, 육족《史記 卷三十二 齊太公世家 卷三十九 晉世家》
109) 종이나 천민으로서 양민(良民)이 됨.
110) 조선 세조(世祖) 13년(1467)에 회령부사(會寧府使)를 역임한 길주(吉洲)사람 이시애(李施愛)가 조정의 시책에 불평을 품고 아우 이시합(李施合)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사건 단천(端川)· 북청(北靑)· 홍원(洪原)을 공략하고 함흥(咸興)을 검거하였으나, 뒤에 조정에서 파견된 귀성군 준(龜城君 浚)과 남이(南怡)가 거느린 3만 관군과 대치하다가 허유례(許惟禮)의 계교로 그의 부하인 이주(怡珠)등에 의해 체포되어 참형(斬刑)되었다.
111) 이 말은 「시경(詩經)」소아(小雅) 소민(小旻)에 나온다.
112) 이 말은 고대 유명한 사관(史官) 주임(周任)의 말로 孔子가 그의 제자 염구(염求)에게 그 말을 끌어서 그의 실책을 나무랐다.《論語 李氏》
(이 글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를 인용하였습니다.)
경포대부(鏡浦臺賦)
이 부(賦)는 율곡이 나이 겨우 10세인 1545년(명종 즉위)에 지은 것인데, 워낙 재질이 탁월하였던 그는 이때 벌써 학문이 성숙되어 이 장편의 부를 짓기에 이른 것이다.
경포대는 관동 팔경(關東八景)의 하나이며 고려 충숙왕 13년(1326)에 강원도 안렴사(安廉使) 박 숙정(朴淑貞)이 현 방해정(放海亭) 뒤 인월사 옛터에 창건하였던 것을 조선 중종 3년(1508)에 강릉부사 한 급(韓汲)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 새로 지은 후, 고종10년(1873) 부사 이직현이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기운(一氣)의 유통하는 조화가 맺히기도 하고 녹기도 해서, 그 신비함을 해외(海外)1)에 벌여 놓아, 청숙(淸淑)함을 산동(山東)2)에 모았도다.
맑은 물결은 천지(天池)3)에서 나뉘어 한 개의 차가운 거울처럼 맑고, 왼편 다리를 봉도(蓬島)4)에 잃어버려 두어 점의 푸른 봉우리가 나열했네.
여기에 한 누각이 호수에 임하여, 마치 발돋움 자세로 날을 듯하다. 비단 창문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아침 햇빛은 푸른 하늘에서 비춰주네.
아래로는 땅이 아득해 성곽(城郭)을 보고서야 겨우 분별하게 되고, 위로는 하늘에 솟아 있어 별을 잡아 어루만질 성싶다.
경계는 속세 바깥이요, 땅은 호중(壺中)5)에 들어 있어라. 물결엔 두루미 등위의 달이 잠겨 있고, 난간은 뱃머리의 바람을 받아들이네.
길가는 사람들이 다리를 건너면 긴 무지개가 물 속에 박힌 것처럼 보이고, 신선 궁궐이 구름결에 솟으니 흡사 신기루(蜃氣樓)가 허공에 뜬 것 같구나.
그 봄철에는 동군(東君: 봄을 맡은 신(神))이 조화를 부리어 화창한 기운이 유행하면, 동쪽 서쪽에서는 꽃과 풀이 빼어남을 경쟁하고, 위와 아래는 무로가 하늘이 똑같이 맑아라.
유안(柳岸)의 실버들에는 연기가 노래하는 꾀꼬리 집을 봉쇄(封鎖)하고, 도원(桃源)의 꽃에는 이슬이 나는 나비 날개를 적시네.
아른거리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먼 봉우리가 아득한가 하면, 향기로운 비가 어부(漁父) 집에 뿌리고 비단 물결이 모래톱에 일렁인다.
이에 거문고를 뜯으며 옷을 벗으면 기수(沂水)에서 목욕한 증 점(曾點)의 즐거움6)을 방불케 하고, 바람에 임하여 술잔을 들면 세상을 근심한 범 희문(范希文)의 심정7)을 상상하게 하네.
그 여름철에는 축융(祝融: 여름을 맡은 신(神))이 권세를 맡아 만물을 길러내면, 갖가지 초목들은 제대로 발육되고, 불같은 무더위는 극도로 치열해라.
찌는 듯한, 불볕더위는 조 맹(趙孟)의 위엄8)에 견줄 만하고, 겹겹이 일어나는 기이한 봉우리의 구름은 연명(淵明)의 글귀9)에 들어가기도… .
오랜 비가 막 개이고, 뭇 냇물이 앞을 다투어 흐르는가 하면, 산에서는 모락모락 안개가 일고, 물은 도도히 흘러 파도가 넓어진다.
이에 난대(蘭臺)에서 시를 읊으니 초양왕(楚襄王)의 바람이 상쾌하고,10) 전각(殿角)에 서늘함이 생기니 당(唐) 나라 문종(文宗)의 긴 여름날이 사랑스럽네.11)
그 가을철에는 금신(金神: 가을을 맡은 신(神))이 위세를 떨쳐 온 땅이 처량해지면, 기러기가 엉성한 전자(篆字)처럼 줄지어 날고, 맑은 서리가 나뭇잎을 붉게 물들였어라.
붉은 여귀 언덕 가에는 백로가 출몰(出沒)하는 물고기를 노리고, 흰 마름 섬 곁에는 백구가 오가는 낚싯배에 놀래기도… .
창문엔 어적(漁笛) 소리가 들려오고, 바람은 뿌연 먼지를 쓸어버리는가 하면, 드높은 하늘은 더욱 아득하고 흰 달은 더욱 휘영청하게 밝네.
이에 장한(張翰)을 따라 오주(吳州:장한의 고향)까지 가서 옥 생선과 은 미나리의 맛에 배부르고,12) 소선(蘇仙:소동파)의 적벽(赤壁)을 상상하며 명월(明月)의 노래와 요조(窈窕)의 시를 외우네.13)
그 겨울철에는 마지막 음기가 폐색되고 뿌연 물결이 얼어붙으면, 시들어진 온갖 풀은 이미 낙엽 졌는데, 외로운 소나무는 몇 길[丈]이나 빼어나네.
서릿바람이 땅을 휩쓸어 만 마리 말의 칼부림 소리를 내고, 눈송이가 허공에 나부껴 천 겹의 옥가루를 흩뿌리기도… .
우주가 텅 비고 산천이 삭막한가 하면 먼 포구엔 오가는 돛단배가 끊어지고, 겹겹의 산봉우리엔 앙상한 돌이 드러나누나.
이에 달을 띠고 벗을 찾음은 왕 자유(王子猷)의 흥이 산음(山陰)에 다하지 않음이고,14) 앙상한 매화에 다시 꽃이 피는 것은 임 처사(林處士)의 뼈가 호상(湖上)에서 사라지지 않음일세.15)
어떤 나그네가 강산을 좋아하는 버릇이 있고 시조(市朝)에는 마음이 맞지 않아, 빈 누각에서 오만한 웃음을 웃고 이끼 낀 물가에서 맑은 여울을 구경하네.
황학루(黃鶴樓) 앞에는 꽃다운 풀이 개인 냇물과 함께 아른거리고,16) 등왕각(王閣) 위에는 조각 노을이 외따오기와 나란히 나는구나.17)
이에 안목은 천하에 높고 정신은 우주에 노닐어, 번뇌스런 마음은 물 난간[水軒]에 고요해지고, 세상의 정은 바람 탑[風榻]에 흩어지네.
금계(金鷄:천상의 닭)가 울어 새벽을 알리면 부상(扶桑) 만경의 붉은 물결을 잡을 듯하고, 옥토(玉兎:달의 별칭)가 어둠 속에 솟아오르면 용궁(龍宮) 천 층의 흰 탑을 엿보기도.
상쾌하게 사방을 두루 바라보니, 황홀하게도 신선이 된 것 같구나.
뿌연 모래를 밟으며 산보하기도 하고, 백조를 벗 삼아 졸기도 하네.
고래 같은 파도가 눈앞에 보이고 붕새는 9만리를 나는데, 자라 산18)은 어디에 있는고?
약수(弱水:우리국토)는 아득히 3천리요, 이미 한 바퀴 유람을 마쳤도다.
한숨 쉬며 탄식하여 말하기를,
"옛 현인들은 가버렸고 지나간 일도 까마득하지만, 죽계(竹鷄:안축(安軸)의 호)의 웅장한 글씨를 관람도 하고, 석간(石澗:조운흘(趙云흘)의 호)의 맑은 글을 읊기도 했네.
화재 뒤의 건축이라 전일의 화려한 건물을 잃어버림이 애석하지만, 물 가운데의 난계(蘭桂:난장(蘭奬) 계도(桂櫂))는 누가 옛날대로 고운 미인을 실었는고?
아! 명예의 굴레가 사람을 얽어매고, 이욕(利欲)의 그물이 세상을 덮어씌우는데, 그 누가 속세를 초월하여 한가로움을 즐길 건가?
모두들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스스로 지치도다.
벼슬 취미는 계륵(鷄肋)19)과 같아 세간의 영화를 믿기 어렵고, 명승 지역은 토구20)와 다름없어 은거할 계획을 이룩할 만하네."
"이미 이 지역이 있기에 바로 이 대(臺)를 쌓았다오. 영웅들의 남긴 감상이 상상되고, 은사(隱士)들의 배회한 것이 그리워지네.
이 경포대에 올라 마음껏 노닌 것이 정취(情趣)가 비록 한 때의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 모두가 아득하게 자취가 없어 천고(千古)를 지난 오늘날 재가 되어 버렸네.
만약 몸에 덕을 쌓아 남들이 그 혜택을 입게 되어, 군민(君民)에게 충혜(忠惠)를 바치고 덕업(德業)을 역사[竹帛]에 남기었다면, 용을 부여잡고 봉에 붙어서 죽은 뒤의 명예를 이룩했을 거네. 뜻을 게을리 하고 자신을 잊어가며 눈앞의 즐거움일랑 따르지 마시기를"
나그네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행장(行藏)21)은 운수에 달렸고 화복(禍福)은 시기가 있는 법, 구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버려도 버릴 수 없나니. 그만두자 마침내 인력(人力)으로 취할 수 없으니, 명(命)이라 마땅히 조화의 하는 대로 따를 뿐이네.
하물며 형상은 만 가지로 나눠지지만 ,이치의 합하는 것은 하나임에랴.
죽고 사는 것도 분별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오래고 빠른 것을 논하겠는가?
장 주(莊周)는 내가 아니고 나비는 실물이 아니니, 생각건대 꿈도 없고 진실도 없으며, 보통 사람이라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성인(聖人)이라 해서 있는 것도 아니거늘 마침내 누가 득(得)이고 누가 실(失)이겠는가?
그러므로 마음을 텅 비워 사물에 응하고 일에 부딪치는 대로 합당하게 하면, 정신이 이지러지지 않아 안(內)이 지켜질 터인데, 뜻이 어찌 흔들려 밖으로 달리겠는가?
달(達)하여도 기뻐하지 않고, 궁(窮)하여도 슬퍼하지 않아야 출세와 은거의 도를 완전히 할 수 있으며, 위로도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도 부끄럽지 않아야 하늘과 사람의 꾸지람을 면할 수 있다네.
또한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 정(情)이고 넘치기 쉬운 것이 기(氣)이기에, 그 조양(操養)에 있어서 기미(機微)를 잃어버린다면, 반드시 떠돌아다니거나 제멋대로 놀아나서 뜻을 일기 마련일세.
명예를 구하거나 이익을 구하는 것은 정말 성정(性情)을 해치지만,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것은 나름대로 인지(仁智)를 대단히 사모한다오.
그러나 선비가 세상에 태어나서 그 자신을 사사로이 하지 않고, 혹시 풍운(風雲)의 기회를 만난다면 마땅히 사직(社稷)의 신하가 되어야 하리.
융중(隆中)의 와룡(臥龍)22)이 비록 문달(聞達)을 구한 선비가 아니었으며, 위천(渭川)의 어부(漁父)23)가 어찌 세상을 잊어버린 사람이었겠는가?
아! 인생은 바람 앞 등불처럼 짧은 백년이고, 신체는 넓은 바다의 한 좁쌀이라네.
여름 벌레가 얼음을 의심하는 것24)이 가소롭고, 달인(達人)도 고독(孤獨)을 당할 때가 있음을 생각하네.
풍경(風景)을 찾아서 천지를 집으로 삼을 것이지, 하필이면 중선(仲宣)25)이 부질없이 고국 그리워함을 본받으랴?"
〈 주 〉
1) 바다 밖에 있는 나라. 곧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2) 여기서는 강원도(江原道)를 가리킨다.
3) 바다. 「장자(莊子)」의 소요유(逍遙遊)편에 "남명(南溟)은 바다이다. [南溟者 天池也]"라고 하였다.
4) 신선(神仙)이 산다는 섬을 가리킨다.
5) 호중천(壺中天)의 준말로 선경(仙境)을 말한다.
6) 천지자연을 즐겨한다는 뜻으로, 증 점(曾點)이 그의 스승 공자의 물음에, "모춘에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자(관자) 몇 사람, 동자 몇 사람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舞雩)에서 소풍하면서 읊고 돌아오고 싶습니다." 하였다.《論語 先進》
7) 강호에서 나라를 걱정한다는 뜻으로, 송(宋) 나라 명신 범 희문(范希文)이 악양루(岳陽樓)기문(記文)에서 "총욕(寵辱)을 다 잊고 술잔 잡고서 바람에 임하면 그 즐거움이 양양(洋洋)하다." 하였다.
8) 춘추시대 진(晋) 나라 대부(大夫) 조 맹(趙孟)이 군사 및 외교에 있어 그 위엄을 제후(諸侯)들에 떨친 것을 말한다. 《左傳 襄公 二十七年條》
9) 진(晋) 나라 도 연명(陶淵明:이름은 잠(潛))의 사시시(四時詩)에 "여름 구름은 기이한 봉우리가 많다. [夏雲多奇峯]"고 한 것을 뜻한다.
10) 조 양왕(楚襄王)이 난대(蘭臺)의 궁전에서 노닐다가 불어오는 바람에 옷깃을 헤치면서 말하기를, "상쾌하다. 이 바람이여! 나는 이 바람을 서민과 함께 즐기고 싶구나." 하였다.《宋玉, 風賦》
11) 유 공권(柳公權)이 당(唐) 나라 문종(文宗)과 더불어 지은 하일장(夏日長)이란 연구(聯句)에 "훈훈한 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에 서늘함이 생기누나. [薰風自南來 殿角生微凉]" 하였다.
12) 진(晋)의 장 한(張翰)이 동조연(東曹)의 벼슬을 지내다가 가을바람이 이는 것을 보고 자기 고향 오주(吳州)의 진미인 미나리나물과 농어회를 그리워하여 끝내 벼슬을 사직했다는 고사가 있다. 《晋書 文苑 張翰傳》
13) 소선(蘇仙)은 곧 소 동파(蘇東坡)를 가리키는 말로, 그의 적벽부(赤壁賦)에, "명월의 시를 외우고 요조의 장(章)을 노래한다[誦明月之詩 歌窈窕之章]"고 하였다.
14) 왕 자유(王子猷)는 진(晋) 나라 왕 휘지(王徽之)의 자이다. 그가 산음(山陰)에 있을 때 설야(雪夜)의 흥에 못이겨 친구인 대 규(戴逵)의 집에 찾아갔다는 고사가 있다.《晋書 王徽之傳》
15) 임 처사(林處士)는 송(宋) 나라 임 포(林逋)를 가리키는 말로, 그는 서호(西湖) 고산(孫山)에 은거하며 매화를 아내로, 학(鶴)을 자식으로 삼아 살았다고 한다. 《宋史》
16) 황학루(黃鶴樓)는 중국 호북성(湖北省)에 위치한 누각(樓閣)의 이름으로, 당(唐) 나라 최호(崔顥)의 등황학루시(登黃鶴樓詩)에, "개인 냇물은 한양의 나무에 아른거리고, 꽃다운 풀은 앵무의 물가에 쓸쓸하다. [晴川歷歷漢陽樹 芳草凄凄鸚鵡州]"고 하였다.
17) 등왕각(王閣)은 역시 호북성에 위치한 누각의 이름으로, 당 나라 왕 발(王勃)의 등왕각서(王閣序)에, "저녁노을은 외따오기와 함께 나네. [落霞與孤鶩齊飛]" 하였다.
18) 신선(神仙)이 산다는 산을 가리킨다.
19) 닭의 갈비뼈. 이것은 먹을 만한 고기는 없지만 그냥 버리기는 아깝다는 뜻으로, 무엇을 취해 봐야 별 이익이 없으면서 버리기는 아까움을 비유한 말이다.《後漢書 楊修傳》
20) 은거(隱居)하는 곳을 가리켜 하는 말로, 이는 노(魯)나라 은공(隱公)이 은거하던 곳이다. 《左傳 隱公十一年條》
21) 세상에 나가서 도(道)를 행하는 것과 물러나와서 은거하는 것을 말한 것으로, 「논어(論語)」술이편(述而篇)에, "용지즉행 사지즉장(用之則行 舍之則藏)"이라고 하였다.
22) 융중(隆中)은 중국 호북성(胡北省)에 위치한 땅으로 제갈 양(諸葛亮)이 은거하던 곳이며, 와룡(臥龍)은 곧 제갈 양을 가리켜 하는 말이다.《讀史方與紀要》
23) 주(周)의 여상(呂尙). 곧 태공 망(太公望)을 가리킨다. 그가 위수(渭水)의 물가에서 낚시하고 있을 때 문왕(文王)이 만나보고서 등용시켰다. 《史記 齊世家》
24) 조그마한 지혜로는 대도(大道)를 알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문선(文選)」의 손작유천태산부(孫綽遊天台山賦)에, "여름 벌레가 얼음을 의심하는 것이 가소롭다. [夏蟲之疑氷]"고 하였는데, 그 주(注)에, "여름벌레가 겨울에 한빙(寒氷)이 있는 줄을 모르는 것이, 조그마한 지혜로는 높은 도(道)를 모르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25) 삼국(三國)시대 위(魏)나라 왕찬(王粲)의 자(字). 그가 형주(刑州)에 피난해 있으면서 고국을 그리워하여 등루부(登樓賦)를 지은 일이 있다.
(이 글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나온 '율곡전서'를 인용하였습니다.)
16. 天王峰(천왕봉) 曺植(조식)
請看千石鐘 천간천석종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두드릴 扣)
萬古天王峰 만고천왕봉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오히려 猶)
옛날 이름 있는 종은
큰 종 채로 치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저 천왕봉은
하늘이 쳐도 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면 옛날의 큰 종의 전하여 오는 역사를 들으면 큰 종 채로 치지 않으면 그 웅장한 소리가 나지 않을 뿐 아니라 보통 종소리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저 수 만년을 변함없이 우뚝 솟아 있는 천왕봉은 하늘이 울려 보려고 쳐도 오히려 그대로 서 있을 뿐 조금도 울리지 않고 있으니 누가 이 천왕봉을 울리게 할 수 있는 재주가 있단 말인가. 하늘도 울리지 못했으니 우리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저 천왕봉을 울리지 못할 것이다.
이 詩는 對가 안 되었다. 오언절구는 對가 없어도 缺格이 아님)
韻字 - 聲. 鳴(平聲)
天王峰(천왕봉) - 산봉우리 이름
大扣(대구) - 큰 종채로 치는 것.
天鳴(천명) - 하늘이 천둥을 치는 것을 말하는데 곧 하늘이 치는 것.
偶吟(우음) 曺植(조식)
人之愛正士 인지애정사
好虎皮相似 호호피상사
生前欲殺之 생전욕살지
死後方稱美 사후방칭미
사람이 선비를 사랑하는 것은
범의 그 가죽을 좋아하는 마음이네
생전에 죽이고 싶어 하지만
사후에는 칭찬을 하는 것이네
대체 사람들이 바른 선비를 사랑하는 것은 별다른 것이 아니라 범이 죽으면 그 가죽을 사랑한ㄴ 것과 같이 선비가 죽으면 그 이름이 남기 때문이다. 전에는 선비의 굳고 바른 행동을 헐뜯었지만 그 사람이 죽은 뒤에는 그 사람이 바르고 굳은 지조가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는 것이 이 세상사라 할 수 있다.
이 詩는 轉. 結句가 對로 구성되었다.
韻字는 似. 美(平聲)
註
好虎皮(호호피) - 범의 가죽을 좋아함. 虎死留皮(호사유피)를 인용한 것.
조식 [曺植, 1501~1572]
조선 중기 학자.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으며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김우옹(金宇顒) ·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짖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도 힘썼다. 1548~1559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단성현감 사직 때 올린 상소는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국왕 명종과 대비(大妃) 문정왕후(文貞王后)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렇게 모든 벼슬을 거절하고 오로지 처사(處士)로 자처하며 학문에만 전념하자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1551년 오건(吳健)에 이어 정인홍(鄭仁弘) ·하항(河沆) ·김우옹· 최영경(崔永慶) ·정구(鄭逑)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
1561년 지리산 기슭 진주 덕천동[德山洞: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으로 이거하여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講學)에 힘썼다. 1566년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을 제수 받고 왕을 만나 학문의 방법과 정치의 도리에 대해 논하고 돌아왔다. 1567년 즉위한 선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568년에는 올바른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봉사(戊辰封事)〉를 올렸는데, 여기에서 논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사후인 1576년 그의 제자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덕천서원을 건립한 데 이어 그의 고향 삼가현에 회현서원(晦峴書院:뒤에 龍巖書院)을, 1578년에는 김해에 신산서원(新山書院)을 세웠다. 광해군대에 대북(大北) 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이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여 세 서원들이 모두 사액되었고 조식에게는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그가 살았던 시기는 사화기(士禍期)로 일컬어질 만큼 사화가 자주 일어난 시기로서 훈척(勳戚)정치의 폐해가 극심했던 때였다. 그는 성년기에 두 차례의 사화를 경험하면서 훈척정치의 폐해를 직접 목격한 탓에 출사를 포기하고 평생을 산림처사(山林處士)로 자처하며 오로지 학문과 제자들 교육에만 힘썼다.
그의 사상은 노장적(老莊的) 요소도 다분히 엿보이지만 기본적으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성리학적 토대 위에서 실천궁행을 강조했으며, 실천적 의미를 더욱 부여하기 위해 경(敬)과 아울러 의(義)를 강조하였다. 즉 경의협지(敬義夾持)를 표방하여 경으로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서 외부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신념을 바탕으로 그는 일상생활에서는 철저한 절제로 일관하여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당시의 사회현실과 정치적 모순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비판의 자세를 견지하였다. 학문방법론에 있어서도 초학자에게 《심경(心經)》 《태극도설》 등 성리학의 본원과 심성(心性)에 관한 내용을 먼저 가르치는 이황(李滉)의 교육방법을 비판하고 《소학》 《대학》 등 성리학적 수양에 있어서 기초적인 내용을 우선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이황과 기대승(奇大升)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기심성(理氣心性)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시각에서 이를 ‘하학인사(下學人事)’를 거치지 않은 ‘상달천리(上達天理)’로 규정하고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의 단계적이고 실천적인 학문방법을 주장하였다.
그는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평생을 처사로 지냈지만 결코 현실을 외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남겨놓은 기록 곳곳에서 당시 폐정(弊政)에 시달리는 백성에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으며, 현실정치의 폐단에 대해서도 비판과 함께 대응책을 제시하는 등 민생의 곤궁과 폐정개혁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참여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상은 그의 제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져 경상우도의 특징적인 학풍을 이루었다. 이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진주 ·합천 등지에 모여 살면서 유학을 진흥시키고,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등 국가의 위기 앞에 투철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한 이황의 경상좌도 학맥과 더불어 영남 유학의 두 봉우리를 이루었다. 그러나 선조 대에 양쪽 문인들이 정치적으로 북인과 남인의 정파로 대립되고 정인홍 등 남명의 문인들이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정치적으로 몰락한 뒤 남명에 대한 폄하(貶下)는 물론, 그 문인들도 크게 위축되어 남명학(南冥學)은 그 후 제대로 계승되지 못하였다. 저서에 문집 《남명집》과 그가 독서 중 차기(箚記) 형식으로 남긴 《학기유편(學記類編)》이 있고, 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勸善指路歌)》 등이 있다.
南冥과 土亭의 學風과 現實觀
16세기의 조선사회는 士禍와 함께 시작되었다. 16세기 중반까지 4번에 걸쳐 진행된 사화는 士林사회에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다. 사화라는 정치현실에 큰 불만을 느낀 사림학자들은 出仕 보다는 은거의 삶을 선택하고 지방사회를 중심으로 학문을 닦으면서 새로운 사상적 모색을 꾀하게 되었다.
士禍라는 정치적 환경은 한편으로 많은 학자들을 山林에 끌어냄으로써 이들이 학문에 전념하면서 향촌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들 학자들은 결코 현실의 방관자는 아니었다. 이들은 오히려 자유롭고 비판자적인 위치에 있는 처사적 삶을 통하여 다양한 학문과 사상을 수용하고, 자신의 근거지를 중심으로 문인들을 양성하면서 현실의 모순을 극복하는 한편 새로운 시대를 비하면서 학문적 축적을 이루어 나갔다.
남명 조식(1501-1572)은 16세기의 시작과 함께 출생했으며, 사화라는 시대적 조건은 그의 삶의 궤적에 큰 영향을 미치면서 處士의 삶을 선택하게 했다. 남명은 出仕 보다는 객관적이고 비판자적인 위치에 있는 처사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당시에는 남명과 같이 처사의 삶을 선택한 학자들이 다수 존재했으며, 이들의 삶과 사상은 조선사회에 새로운 변화와 모색을 가져다주는 활력소가 되었다. 이제까지 『토정비결』의 저자로 알려지면서 전형적인 奇人으로 평가받고 있는 토정 이지함(1517-1578)의 삶과 사상도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토정의 학풍과 사상은 남명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글에서는 주로 남명 조식과 토정 이지함의 학문적, 정치적 인연을 중심으로 하여 이들의 학풍과 현실관이 가지는 시대적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남명과 토정은 우선 기질이 비슷했다. 직선적이고 타협을 몰랐던 남명의 기질에 대해서는 ‘壁立萬(벽립만)이나, 秋霜志氣(추상지기) 등의 용어로 대변되었는데, 이지함의 조카인 이산해가 이지함의 제문을 쓰면서 ‘千 壁立’이라 한 것에서1) 양인이 기질 면에서 서로 비슷했음을 단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남명과 토정은 과거를 기피하고2), 저술을 즐기지 않았다는3) 공통점도 있다.
조식과 이지함이 서로 교유하면서 남긴 일화는 『土亭遺稿』의 「遺事」를 비롯하여, 각종 野史類(야사류)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지함은 南方을 유람할 때 은거 중이던 조식을 찾았으며4), 특히 조식이 멀리서 온 이지함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네의 風骨을 어찌 모르겠는가?’라고 한 표현에서 서로 존숭하는 사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지함은 觀象者(관상자)가 찾아왔을 때는 조식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한다.6)천문, 지리, 의약, 복서, 병법 등 다양한 학문에 널리 해박하였던 조식처럼, 이지함 또한 천문, 지리, 의학, 觀形察色, 神方秘訣에 이르기까지 두루 능통하였다는7) 평가를 받은 것을 볼 때 양인은 학풍에서도 공통점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16세기 초· 중엽에는 士禍의 여파로 각 지역에 학문과 실력을 겸비했지만 出仕를 단념한 처사형 학자들이 다수 존재했다.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開城의 徐敬德이나 淸道의 金大有, 朴河淡, 晋州의 曺植 등을 들 수 있는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주자성리학 이외에 노장사상이나, 불교, 무예 등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관심을 가진 점이 흥미롭다. 김대유, 조식 등 尙武경향이 강했던 학자들의 학풍이 진작된 경상우도에서 임진왜란 때 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것 또한 학문과 사상의 전파라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지함 또한 ‘豪傑’의 풍모가 있다는 평을 받았으며, 武를 상당히 중시하였다. 이지함은 포천현감으로 있을 때 문무를 겸비하는 인재의 양성을 주장했으며8), 그의 대표적인 문인인 조헌과 庶子인 이산겸이 의병장으로 활약한 것에서 그의 이지함과 ‘武’와의 연결고리를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이지함의 서자인 이산겸은 尙武정신의 영향력을 엿볼 수 있다. 이산겸이 충청도 韓山에서 조헌의 남은 군사를 거두어 왜적을 토벌할 때에 ‘이 지역이 이지함의 고향이라서 따르는 자가 많았다’는 史官의 평가는9) 이 지역에서 이지함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암시해 주고 있다.
조식과 이지함은 그 학문이 노장학에 가깝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조식에게 노장적 경향이 있다는 것은 그의 호를 『莊子』에 나오는 용어인 ‘南冥’이라 한 것 등에서 볼 수 있으며, 이지함의 경우에도 그의 논설인 「大人說」이 ‘귀한 것은 관작을 얻지 않는 것 보다 귀함이 없고, 부유함은 욕심을 내지 않는 것 보다 부유함이 없다’는 논리를 제시한 것으로,『노자』나 『장자』에 나오는 역설과 반어법을 주로 사용했다는 지적이 있다10). 이외에 李珥가 이지함에게 『莊子』와 맞먹을만한 책을 써 보라고 권유한 사례11)에서도 이지함이 노장서에 상당히 경도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조식, 이지함은 당대에 영향력 있는 학자이면서도 주자성리학에만 경도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이들이 현실세계를 떠난 학자임을 보여주는 징표로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들의 학문과 사상이 그만큼 다양하고 개방적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이들이 당시 비판자적인 위치에 서서 자유롭게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했으며, 문인들의 양성을 통하여 광범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선의 조정에서도 또한 이들의 학문적 능력을 수용했다는 점을 볼 때 이들의 학문과 사상이 결코 현실과 유리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조식의 「단성현감사직소」나 이지함의 「포천현감사직소」가 당시 현실의 문제점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그 대안을 철저히 제시한 것에서도 이들의 처세와 정세관이 철저히 현실에 기반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조식과 이지함은 또한 중국의 성리학자 중에서도 북송대 성리학자들의 풍모와 유사한 입장을 보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조식의 학문은 북송대 성리학자인 주돈이나 소강절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鄭澔는 『토정유고』의 서문에서 소옹의 기인적인 측면을 이지함과 대비시켰다. 소옹은 이전까지 시대를 풍미했던 도교사상의 요소를 자신의 학문에 적극 흡수하고, 易學이나 象數學에 능통했던 학자로서, 서경덕의 역학이나 상수학도 소옹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많다. 주돈이, 장횡거, 소옹 같은 북송대 성리학자들은 그의 사상이나 행적에서 道家的 측면이 많는 평가를 받는다. 16세기의 성리학자 중에서도 서경덕, 조식, 이지함 등은 이러한 학자들의 학문경향과 유사한 측면이 많다. 결국 조선시대 사상계에서도 주자성리학이 정착되는 과정에서 북송대 성리학에 대한 주목이 있었으며, 서경덕, 조식, 이지함 등은 이러한 분위기를 대표하는 학자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북송대 성리학에 대한 관심은 당시 사상계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지표인 반면, 아직까지 주자성리학이 조선사회에서 완전히 정착되지 못한 상황을 보여준다. 결국 이황이나 이이의 등장은 성리학에 대한 연구가 깊어지고 그 이해가 심화되면서 북송대 성리학은 조선사회 내에서 비판, 극복되고 주자성리학 중심으로 사상계가 정리되는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조식과 이지함 양인은 해안지역이라는 지역적 기반에서도 유사성이 발견된다. 조식은 처가인 김해에서 18년간 생활했으며, 이지함의 주된 근거지는 해안 지역인 보령이었다. 이것은 조헌이 상소문에서
오직 사화가 혹심하였기 때문에 기미를 아는 선비들은 모두 출처에 근신하였습니다. … 曺植, 李恒이 바닷가에 숨어서 살았던 것은 모두 을사년의 사화가 격분시킨 것입니다. … 李之裏?安名世의 처형을 보고 海島를 週遊하면서 미치광이로 세상을 피했습니다. …(『宣祖修正實錄』, 선조 19년 10월 임술)
라고 하여 士禍의 여파로 지식인들이 은거의 삶을 택한 정황을 언급하면서, 조식과 이지함의 은둔처를 해안으로 표현한 것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조식의 김해에서의 생활은 왜구의 만행을 직접 목격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강력한 대외적 토벌론 으로 이어졌다. 조식의 문하애서 의병장이 다수 배출된 것에는 이러한 조식의 현실관이 큰 영향을 미쳤음은 물론이다. 이지함은 자신을 ‘海上에 사는 狂珉’으로 표현했으며12), 그의 사회경제사상에서도 漁鹽 등 해상의 경제활동에 대한 대책을 제시한 사례가 많다.
이지함에서 보이는 해안적인 기반은 후대에 이들의 학풍을 계승한 이산해, 정인홍, 유몽인 등 북인 학자들에게도 계승되었다고 여겨지는데, 광해군대의 북인정권하에서는 농업경제 이외에 상공업적인 측면이 매우 중시 된 되는 이러한 사상적인 기반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고 보여 진다.
조식과 이지함의 학풍 형성에는 사화라는 시대적 배경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나 명종대 후반 이후 정국은 사림파들이 점진적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반을 가져다 주었다. 그런데, 16세기이후 사화라는 정치현실에 회의를 느끼고 은거를 결심한 학자들의 현실관은 이러한 정치참여의 시기를 맞으면서 크게 정치참여를 주장하는 부류와 여전히 은거를 고집하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뉘게 되었다.
文定王后의 垂簾聽政이 끝나고 尹元衡 一派가 제거되는 명종대 후반 이후의 정국을 낙관적으로 이해하여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부류가 생겨나는 반면, 현실정치를 여전히 모순과 비리에 가득 찬 것으로 파악하여 계속해서 은거를 고집하는 부류가 생겨난다. 선조대에 사림정치가 어느 정도 정착되었을 때, 당시의 정치현실을 낙관적으로 보고 자신은 물론 문인들도 대거 정계에 포진시키면서 정치를 담당할 수 있는 시기라고 파악한 이황의 입장과, 당시의 정치현실을 여전히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救急’이라는 표현으로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지적한 조식의 인식은13) 서로 다른 현실관과 이에 따른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보인 대표적인 사례로 볼 수 있다.
이지함의 경우도 조식의 현실관과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이지함은 선조대에 李珥를 찾아갔다가 여러 학자들과 모여서 담소하는 기회를 가졌을 때 ‘지금의 勢道는 元氣가 이미 없어져서 손을 쓰거나 藥으로 구제할 길이 없다’고 하여14) 당시가 위급한 시기임을 지적하였다. 그가 적극적인 사회경제책의 실천을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현실인식이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이후 이들의 학풍과 현실관은 시대의 흐름에 주류적인 위치를 차지하지는 못하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안정적으로 이해하면서 학문에 대한 깊은 천착이 요구하는 흐름이 대세를 이루어가고 학자도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면서 학파를 중심으로 정파가 형성되는 조짐이 뚜렷이 나타나게 된다. 즉 성리학에 대한 천착과 이론논쟁이 학문의 주류적 흐름이 되고 다수의 학자들이 붕당을 형성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나가면서 처사형 학자들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졌다고 할 수 있다. 조식과 이지함의 현실관이 중앙의 정치현실에서는 그다지 호응을 받지 못한 원인도 이러한 시대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3 조식과 이지함의 학풍은 주로 北人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政派로서 북인의 학문적 연원은 대개 자유로운 처사적 삶을 지향하면서 학문을 연마한 서경덕, 조식에게 두고 있으며, 대체로 북인은 학파로서의 결집성이 다른 당색에 비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는다. 북인이 학파로서의 결집성이 약했던 주된 이유는 그 주축이 되었던 인물들이 당시대에 다른 학자들에 비해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한 학풍과 기질의 소유자로서, 이들의 학풍을 계승한 문인들 또한 多岐한 양상을 보였기 때문이었다.
조식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정치에 참여하여 과단하게 정국을 이끌어간 정인홍,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지면서 성리학의 이론이나 예학에도 충실했던 정구, 의병장으로 활약한 후에 道家에 깊이 심취했던 곽재우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 문인들이 서로 다른 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서경덕 문인에게서도 다기성이 발견되는데, 박순, 허엽과 같이 관료로 진출하는 부류, 민순과 같이 산림학자의 전형을 보이는 부류, 박지화, 이지함, 서기와 같이 方外人的인 경향을 보이는 부류 등이 대표적인 유형으로서, 이들 문인들의 행적을 통하여 조식이나, 서경덕의 학풍을 추론할 수 있다.
이지함은 조식의 문인들과도 친분을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573년(선조 6) 이지함은 鄭仁弘, 崔永慶 등 조식의 문인들과 함께 천거를 받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서, 특히 기축옥사의 핵심인물로 연루되어 처형을 당한 최영경과는 기질 상으로도 잘 통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최영경은 조식의 기질을 꼭 빼닮았던 문인으로 『燃藜室記述』에서는 그의 기상을 ‘壁立千 ’으로 표현하고 있다.15)
이지함은 충청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적 기반으로 말미암아 서인계 인물과도 폭넓게 교유했지만 그의 학풍과 행적은 오히려 북인계 학자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 이것은 그가 북인 학통의 원류가 되는 조식, 서경덕과의 교유관계를 돈독히 한 것이나, 개방적이고 다양한 학풍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잘 드러나 있으며, 이발, 최영경, 이산해 등 후대에 북인의 중심이 되었던 인물들과도 학문적 인연이 깊었던 점 또한 그가 북인학풍의 또 다른 연원임을 보여주고 있다.
조식과 서경덕의 문인들은 후대에 北人의 중심세력이 되고 사상적으로도 다른 당색에 비해 주자성리학에 덜 구속적이고 다양했다는 지적을 받는데, 이지함의 학풍에서도 이들과 유사성이 나타나는 점은 주목된다. 특히 이지함이 서경덕을 직접 찾아가 학문을 배운 것이나 지역을 초월하여 조식과 교유한 것에서 이들 간에는 학문적, 사상적으로 상통하는 측면이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정치가인 李觀命(1661-1733)이 이지함의 諡狀을 쓰면서 ‘선생의 뜻은 花潭의 造詣高明과 南冥의 立志牢資?가히 伯仲이라 이를만하다’고16) 부분은 서경덕, 조식, 이지함의 긴밀한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조식과 이지함은 16세기를 대표하는 처사형 학자로서, 이들의 학풍과 현실관을 통해서 우리는 당시의 조선사회가 다양한 학자들이 공존하던 역동적인 사회였음을 엿볼 수 있다.
17. 湖堂朝起(호당조기) 姜克誠(강극성)
江日晩未生 강일만미생
蒼茫十里霧 창망십리무(아득할 茫)
但聞柔櫓聲 단문유노성
不見舟行處 불견주행처
해가 아직도 뜨지 않으니
강 위에는 안개가 자욱하다.
다만 노 젓는 소리만 들리고 배가는 곳은 안 보인다.
호숫가에 있는 집에서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보니 강 위에 해는 아직도 보이지 않고 침침한데 강 위에 끝없이 덮여 있는 안개가 해를 가리고 있어 마침 해가 저물어 가는 느낌이 든다. 그런데 어디서 노를 한가하게 저어 가는 소리가 들려 와서 바라보니 배가 가는 곳은 보이지 않고 있지 않는가. 안개가 끼어 있는 이 호수의 아침 정경은 글자 그대로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답게 느껴질 뿐이다.
이 詩는 轉. 結句가 對로 구성 되었다.
韻字 - 霧. 處(上聲)
湖當(호당) - 호숫가에 있는 정자.
柔櫓聲(유노성) - 한가하게 노를 젓는 소리.
강극성 [姜克誠, 1526~1576]
조선 중기의 문신. 지평, 장령, 사간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지냈다. 사가독서할 때 지은 시로 명종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본관은 진주. 자 백실(伯實). 호 취죽(醉竹). 강희맹(姜希孟)의 4대손이다. 1546년(명종 1) 진사가 되고, 155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정자에 올랐다. 1555년 이량(李樑) 등과 함께 사가독서하였다. 1556년 중시에 을과로 급제, 부수찬에 올랐다. 이어 문학 ·지평 ·부교리 ·교리 ·부응교 ·장령 ·사간 등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1563년 군자감정에 올랐다. 1564년 그의 정치적 배경인물로 꼽혀온 권신(權臣) 이량이 축출되자,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4년(선조 7) 과거급제자인 점이 고려되어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재기용되고 이어 장단도호부사를 지냈다. 사가독서 때 지어 바친 시로 명종으로부터 찬탄과 함께 말 한 필을 하사받았다.
사가독서 [賜暇讀書]란?
조선시대에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젊은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한 제도.
세종대에 학자를 양성하고 유교를 통치 이데올로기로 만들기 위한 정책을 추진하여, 1424년(세종 6) 집현전 학사 중에서 젊고 재주가 있는 자를 골라 관청의 공무에 종사하는 대신 집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세종 말엽에 신숙주(申叔舟)·성삼문(成三問) 등 6인에게 휴가를 주어, 절에서 글을 읽게 하는 등 여러 차례 시행되다가, 1456년(세조 2) 집현전의 혁파와 함께 폐지되었다.
1476년(성종 7) 채수(蔡壽) 등 6인에게 다시 독서를 위한 휴가를 주었고, 1483년에는 용산의 빈 사찰을 수리하여 국왕이 독서당(讀書堂)이라는 편액을 내려 사가독서하는 장소로 쓰도록 하였다. 이곳을 남호당(南湖堂) 또는 용호당(龍湖堂)이라고 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 이 제도와 함께 독서당도 폐지되었다. 중종이 즉위한 뒤 사가독서에 관한 절목을 마련하도록 지시하면서 다시 시행되었다. 1517년(중종 12) 두모포(豆毛浦:옥수동)에 다시 독서당을 지었는데, 이곳을 동호당(東湖堂)이라 하였다.
선발된 학자는 집현전이나 홍문관 관원 못지않게 국왕의 총애를 받아, 국왕이 직접 술잔을 내려주며 술 마시는 것을 경계하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명맥만 이어오다가 1709년(숙종 35) 이후 폐쇄되었다. 동호당이 있던 지금의 옥수동 일원을 얼마 전까지도 독서당 마을이란 뜻으로 '한림말'이라 불렀고, 약수동에서 옥수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독서당고개', 그 길을 지금도 '독서당길'이라 부른다. 이 제도는 오늘의 석좌제도(碩座制度)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즈음으로 말 하면
(대학교수의 연구 활동이나 대학의 연구기능을 촉진하고 특정분야의 연구 성과를 올리기 위하여 실시한다.
석좌제도가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는 나라는 영국과 미국으로, 하버드대학교에는 200개 이상의 석좌가 있다. 미국과 영국이 현대학문의 첨단을 걷고 있는 것도 이러한 석좌제도에 힘입은 바가 크며, 이 제도의 혜택을 받은 수많은 석학들은 노벨상을 수상하는 등 현대사를 이끈 학문적 업적을 이룩하였다.
이 제도가 한국에 도입된 것은 1985년으로, 한국과학기술원이 엘지통신과 코오롱으로부터 받은 기부금으로 화상공학(畵像工學)과 화학공학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과학자를 선정하여 '석좌연구원' 또는 '석좌교수'로 추대, 지원하고 있다.
한편, 대외적으로 한국학의 명맥을 잇고 한국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외국의 대학에 국내 기업이나 재단이 출자하여 한국학 석좌교수직을 설치하기도 하였는데, 하버드대학교와 조지타운대학교 등에 설치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사가독서(賜暇讀書)제도도 일종의 석좌제도라 할 수 있다)
18. 南溪暮泛(남계모범) 宋翼弼
迷花歸棹晩 미화귀도만
待月下灘遲 대월하탄지
醉裏猶垂釣 취리유수조
舟移夢不移 주이몽불이
꽃구경 하느라고 뱃길이 저물었네.
달구경 하느라고 여울을 건너다 늦었네.
술에 취하여 낚싯줄을 드리우니
배는 떠가는데 꿈은 그 자리에 맴도네.
꽃이 피어 있는 언덕을 돌아 나오다가 꽃을 구경하는데 눈이 팔려서 노를 짓는 것도 잊고 늦어졌다. 뿐만 아니라 달이 떠올라오는 것을 보느라고 이렇게 강을 내려오는 것이 늦어졌다. 뱃속에서 술이 만취되어 낚싯대를 물에 던지고 고기를 낚는다고 하지만 고기를 낚는 데에 정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경치를 구경하는 데 정신이 빠져 있기 때문에 고기가 낚아질 리가 없다. 그러기에 배는 물결 따라 떠가지만 그것도 모르고 꿈을 꾸듯 풍경에만 취하여 뱃놀이를 하게 된 것이다.
이 詩는 起. 承句를 對로 구성되었다.
韻字 - 遲. 移(平聲)
暮泛(모범) - 저물어서 배를 띄움
下灘(하탄) - 여울을 건너 내려옴.
송익필 [宋翼弼, 1534~1599]
성리학과 예학에 통하였던 조선 중기 학자. ‘8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후진양성에 힘써 문하에서 김장생 ·김집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었는데, 그 중 김장생은 예학의 대가가 되었다. 문집에 《구봉집》이 있다.
본관 여산(礪山). 자 운장(雲長). 호 구봉(龜峰) ·현승(玄繩).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