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종 76권, 28년(1533 계사 / 명 가정(嘉靖) 12년) 9월 12일(신해)
헌부에서 유자광의 녹권지급에 반대하다
헌부가 김형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자광이 폐주(廢主)16964) 를 속여 그르치고 사림(士林)을 해친 죄는 백세가 지나더라도 의논을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반정(反正) 초기에 폐주를 그르쳤던 방법으로 전하마저 그르치려고 했으니, 이는 반드시 새 임금의 마음을 시험해 볼 계책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자광으로 하여금 그 간술(奸術)을 펼 수 있게 했다면, 사림들의 피해는 논할 것도 없이 사직(社稷)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한(漢)나라 때 공신들을 열후(列侯)에 봉했어도 자손들이 죄를 저지른 경우에는 오히려 모두 봉국(封國)을 삭제했습니다. 더구나 자광은 그 자신이 범한 죄가 국가에 크게 관계되는 것이니, 익대 공신의 봉호는 돌려주어서는 안 됩니다.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고, 간원은 아뢰기를,
“지난번에 유자광 손자의 상언(上言) 때문에 정부의 의논을 모아 자광의 녹권을 다시 돌려주니, 이 사실을 들은 사람은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국가에서 공신을 대접할 때 산하(山河)의 맹세16965) 를 하기까지 하는 것은, 저 공신들에게 실로 사직을 호위한 공이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절개를 지켜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국가의 운을 힘입어 조그만 공을 기록했다 하더라도 나중에는 불여우 같은 독한 꾀를 내어 사림(士林)을 모함하고 조정을 어지럽혔다면, 이는 국가의 큰 도적이니 훈구(勳舊)의 공신으로 대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맹부(盟府)16966) 에서 이름을 삭제하는 것은 국가가 은혜에 인색한 것이 아닙니다. 자광이 무오년16967) 과 갑자년16968) 에 더욱 흉악을 부려 사림을 해침으로써 종묘사직을 전복시킬 뻔했습니다. 그런데 반정 뒤에 조정에서 소장(疏章)을 계속 올렸으나 성명(聖明)께서 밝게 조감하시어 단지 그의 공만 삭제하고 목숨은 보존시켰으니 국가가 그의 공에 대한 대접이 이미 두터웠습니다. 국가의 공론이 정해진 지 여러해가 지났는데, 이미 삭제한 공을 다시 추증하여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을 포상한다 하니,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이런 논의를 제기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지난번에 간인(姦人) 이종익(李宗翼)이 상소하여 ‘적개 공신(敵愾功臣)과 무령군(武靈君)16969) 의 칭호를 돌려주라.’고 하였는데, 이런 의논이 나온 데는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당시 사림들이 서로 돌아보며 실색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는데, 오늘날 조정의 의논이 다시 그의 잘못을 본받아 제기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빨리 내리신 명을 거두소서.”
하니, 양사(兩司)에 답하였다.
“자광의 죄는 나나 대신들이나 누가 그 전말을 모르겠으며, 사림들의 뜻을 어찌 헤아리지 못하겠는가. 그러나 자광이 익대(翊戴)한 공을 삭제한 것은 상하가 모두 온당치 않다고 여겨 온 지 오랜 것으로, 이는 갑자기 그 자손의 정소(呈訴)를 보고 이런 의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종익의 사특한 의논에는 구애될 것이 없다. 지난날 종익이 상소를 올리기 전에도 대신들은 자광의 녹권을 다시 회복시켜 줄 것을 건의했는데, 뒤에 비록 말이 있어 고치기는 했지만 그때에 자광이 죽은 지 오래지 않았기 때문에 고쳤던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공을 힘입고서도 도리어 그의 벼슬을 삭제했는데, 그에게 다스려야 할 죄가 있다면 고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상하가 그의 녹권을 돌려주려는 뜻에는 전혀 자광에게 사적인 뜻을 둔 것이 없다. 이는 또한 자광 한몸을 위해서가 아니요, 오로지 종묘사직을 편안케 한 공을 위해서인 것이다. 예로부터 난신(亂臣)이 없었던 시대는 없고 고변(告變)을 한 사람도 많았지만, 국가의 난으로는 남이(南怡)와 강순(康純)의 일같이 큰 일은 없었다. 그 위태롭고 의심스럽던 때를 당하여 모반을 꾀하던 무리가 거의 종사를 위태롭게 했는데, 그 불측한 화는 역사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고 또한 《무정보감(武定寶鑑)》에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남의 신하된 자로서 《무정보감》을 보면 소름이 끼칠 것이니, 어찌 자광의 녹권을 돌려주는 것을 아까와할 수 있겠는가. 후세 사람들은 자광의 죄만을 알고 그때의 일은 생각지도 않는다. 무오년의 난 때 자광의 죄야 죽음을 당해도 용서할 수 없는 것이지만, 공은 보답하고 죄는 처벌해야 하는 것이다. 공신의 죄를 다스리는 데 있어 기필코 그 공을 삭제할 필요가 뭐 있겠는가. 하물며 익대 공신인데 말해 뭐하겠는가. 다른 사람은 지엽적인 공까지도 기록되어 자손까지 은혜를 받고 있는데, 자광은 원공(元功)으로서 도리어 삭탈을 당했으니, 이것이 나라의 정사에 옳은 일이겠는가. 이것이 전일 대신들이 녹권을 돌려주자고 했던 뜻이요, 내 뜻 또한 이에 지나지 않는다.
[註 16964]폐주(廢主) : 연산군(燕山君). ☞
[註 16965]맹세 : 임금과 공신(功臣)이 기쁨과 슬픔을 영구히 함께 할 것을 맹세하는 것. 공신을 봉할 때 흰 말을 잡아 희생으로 쓰고, 태산이 닳아 숫돌처럼 작아지고 황하가 말라 띠처럼 될 때까지 영원히 국가와 운명을 같이할 것을 맹세하는 것. ☞
[註 16966]맹부(盟府) : 충훈부의 별칭. ☞
[註 16967]무오년 : 1498 연산군 4년. ☞
[註 16968]갑자년 : 1504 연산군 10년. ☞
[註 16969]무령군(武靈君) : 유자광의 봉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