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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
曰 今人 言必稱宋駁元 宋之末在君在臣 皆皆暗徒 尙佛法虛文而 陸秀夫 張世桀 文天祥 幾個人 世傑之歎歌
왈 금인 언필칭송박원 송지말재군재신 개개암도 상불법허문이 육수부 장세걸 문천상 기개인 세걸지탄가
大水茫茫 隔煙霧 我期借劒斬 侫臣 黃金橫帶 爲何人 又歌曰 颶風起兮 海水飛 噫 文武盡兮 火德微 噫
대수망망 격연무 아기차검참 녕신 황금횡대 위하인 우가왈 구풍기혜 해수비 희 문무진혜 화덕미 희
鷹鸇相擊兮 靡所施 噫 鴻鵠欲擧兮 將安歸 噫 獨抱春秋兮 莫我知 噫 其所歎歌 皆評其朝廷之意顯矣.
응전상격혜 미소시 희 홍곡욕거혜 장안귀 희 독포춘추혜 막아지 희 기소탄가 개평기조정지의현의.
지금 사람들은 말을 할 때마다 반드시 송나라로써 원 나라를 어긋났다 하나 송나라의 끝 무렵은 임금이 있고 신하가 있었어도 암중모색을 하는 무리여서 오히려 불법(佛法)과 겉치레를 숭상하였다. 육수부(陸秀夫) 장세걸(張世傑) 문천상(文天祥) 몇 사람이며 장세걸이 탄식하여 노래하기를 '큰 물은 한없이 넓고 멀어 연기와 안개로 막힌 것 같고 나의 칼을 빌려 아첨하는 신하를 죽이려고 기약했는데 황금의 띠를 가로한 사람은 어떠한가?
또 노래하여 이르기를, 맹렬한 바람이 일어 바닷물이 날고 아아! 문무(文武)가 다하니 덕(德)이 화기가 희미하네. 아아! 매와 새매가 서로 격하게 싸우다 한쪽이 쏠리며 아아! 기러기와 고니가 날아오르려 하니 편안히 돌아갈 수 있으려나? 아아! 홀로 봄과 가을을 품었으나 나를 알지 못하겠다. 아아! 그 곳을 탄식하여 노래한다.’
모두 다 그 조정(朝廷)의 상황을 나타내어 평(評)하였다.
※ ① 육수부(陸秀夫)∶송(宋)나라 염성(鹽城) 사람. 자(字)는 군실(君實). 경정초(景定初)에 진사(進士). 성품(性稟)은 맘이 가라앉아 고요하였고 세상에 알려지기를 극(極)히 꺼림. 관(官)은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첨서추밀원사(僉書樞密院事).
※ ② 장세걸(張世傑)∶?∼1279 중국 남송(南宋) 말기의 무장(武將). 허베이성(河北省) 출신으로 일찍이 무관으로 출세하여 관직이 월국공(越國公)에 이르렀다. 재임중에 원(元)나라 군사가 쳐들어오자 양쯔강(揚子江) 유역의 여러 곳에서 적과 대항하여 싸웠다. 그 후 함순(咸淳) 10년(1274)에 원나라 장수 백안(伯安)이 다시 쳐들어오자 문천상(文天祥) 등과 뜻을 같이하여 싸우기를 주장하였으나 승상(丞相) 진의중(陳宜中)의 반대로 수포로 돌아갔다. 임안(臨安∶杭州)이 적에게 함락되자 푸저우(福州)로 피신하였으나 원나라 장수 장홍범(張弘範)이 계속 공격해 오므로 안난(安南)으로 가서 재기(再起)를 꾀하려고 배를 탓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전복되어 익사(溺死). 송(宋)나라의 멸망과 운명을 함께 하였다.
※ ③ 문천상(文天祥)∶1236∼1282 중국 남송(南宋) 말의 정치가. 장지성 지수이(江西省吉水) 출생. 20세에 진사시(進士試)에 장원급제했다. 1259년 몽고군이 쓰촨(四川)에 침입하여 천도설(遷都說)이 일어나자 일개 지방 관리에 지나지 않았던 그는 이를 크게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났다. 그후 복직 되었으나 가사도(賈似道)와 대립하여 사직했다.
1276년 원군(元軍)이 수도 임안(臨安)에 육박해 오자 의용군 1만을 거느리고 분전했으나 패하고 송(宋)은 원(元)에 항복했다. 강화(講和)를 위해 원의 승상 바얀과 회견하는 중에 말다툼을 하다가 구류(拘留)되었으나 탈출하여 푸저우(福州)에서 익왕(益王)을 모시고 송(宋)의 패잔병(敗殘兵)을 모아 싸웠다. 그러나 다시 원군에 잡혀 자살하기 위해 음독(飮毒)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도(大都∶北平)에 이송되었다.
원에 사관(仕官)하도록 권유받았으나 거부하고 옥중에 3년을 갇혀 있다가 ≪정기가(正氣歌)≫를 남기고 형사(刑死)했다.
(92)
曰 文天祥之一日存國 一日忠 二日存國 二日忠 其說近是 其在元國 獄中之歌(正氣歌) 天地有正氣
왈 문천상지일일존국 일일충 이일존국 이일충 기설근시 기재원국 옥중지가(정기가) 천지유정기
雜然賦流形 下則有河獄 上則有日星 於人曰浩然 沛乎塞蒼溟 皇路當淸夷 含和吐明庭
잡연부유형 하즉유하옥 상즉유일성 어인왈호연 패호색창명 황로당청이 함화토명정
時窮節乃見 一一垂丹靑云 其亦有義者也
시궁절내견 일일수단청운 기역유의자야
문천상이 하루를 나라에 있으면 하루의 충성이며 2일을 나라에 존재하니 이틀의 충성이다’ 그 설(說)이 가까우나 그는 원나라에 있었으며 감옥에 있을 때의 노래(정기가)에
天地有正氣 천지유정기 : 하늘 땅에 바른 숨 있어
雜然賦流形 잡연부유형 : 온 가지 흐르는 꼴 지어냈으니
下則爲河嶽 하즉위하악 : 아래선 가람이며 뫼가 되었고,
上則爲日星 상즉위일성 : 위에선 해요 별이 됐으며
於人曰浩然 어인왈호연 : 사람에서 허허라 부르는 것이
沛乎塞蒼冥 패호색창명 : 누리에 또한 가득 들어찼더라.
皇路當淸夷 황로당청이 : 한길 맑고 번듯할 때는
含和吐明廷 함화토명정 : 화기를 머금어 맑은 뜰에 뱉고
時窮節乃見 시궁절내현 : 때 막히면 굳게 잡은 것 드러나
一一垂丹靑 일일수단청 : 하나하나 역사에 드리웠더라. -중략-
이러한 것이 의(義)로운 사람이다.
(93)
曰 陸秀夫負君投江 亦一節可取也
왈 육수부부군투강 역일절가취야
육수부(陸秀夫)가 임금을 업고 강에 몸을 던진 것은 또한 하나의 절개이니 가히 취할 것이다.
(94)
曰 總論治國得國之道 宋元顯殊 宋朝則 全行奸權 不經之道 元朝則 親賢遠奸 任用忠良 而君不君 臣不臣者
왈 총론치국득국지도 송원현수 송조즉 전행간권 불경지도 원조즉 친현원간 임용충량 이군불군 신불신자
謂之中華 上下相孚 君臣無猜疑者 謂之夷狄 仕元者 爲後世嘲弄 此等書史與口法 皆出於支那 人手也
위지중화 상하상부 군신무시의자 위지이적 사원자 위후세조롱 차등서사여구법 개출어지나 인수야
難免其井蛙 所謂李朝稱儒者 不理數 如何排斥金人遼人 元朝自負夷狄 辱祖甚矣
난면기정와 소위이조칭유자 불리수 여하배척금인요인 원조자부이적 욕조심의
何能講究我檀君之道 後世必有王者 興辯其可否
하능강구아단군지도 후세필유왕자 흥변기가부
나라를 얻고 다스리는 길을 모두 논(論)하였으며 원나라는 송나라를 물리치고 나타났으며 송왕조는 완전히 간사한 권력이라 불경스런 도(道)이며 원나라 왕조(王朝)는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간사한 사람을 멀리하여 충성스럽고 선량한 사람을 임용하며 임금이 임금이 아니고 신하가 신하가 아닌 것이 중화(中華, 모두가 하나가 되는 것)라 일컫는다. 위와 아래가 서로 믿고 임금과 신하가 시기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는 것은 동이(東夷)와 북적(北狄)이다. 원나라에 벼슬한 사람을 후세에 깔보고 조롱하는 것은 이것들은 서사와 구법이 모두 지나(支那,중국)사람의 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그 것이 우물안에 개구리를 면하기 어렵다. 이른바 이씨 왕조의 선비라고 일컫는 사람들은 이런 이치와 수를 알지 못하고 사정이 어떠하던 금나라 사람과 요나라 사람을 배척하였으며 원 왕조는 동夷와 북적(狄)을 자부(自負)하였으니 조상(祖上)을 능욕함이 심했다. 우리 단군(檀君)의 道를 어찌 능히 강구(講究)하지 않으리오. 후세에는 반드시 임금이 나와 그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일이 크게 일어난다.
(95)
曰 未百年 壬人依神敎 先導矣 其時蒼生運厄 有知覺者 靜而修道 以待其時也
왈 미백년 임인의신교 선도의 기시창생운액 유지각자 정이수도 이대기시야
앞으로 몇 백년 후에 임인(壬人)의 神敎가 앞장서서 안내하리라. 그 때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액이 운행하니
깨닫고 아는 사람들은 맑게 道를 닦고 그 때를 기다려라.
(96)
曰 世運之變 換在黑白 相磨之時 天火地火 天久地師 人何能堪生 乾坤之定 只在也
왈 세운지변 환재흑백 상마지시 천화지화 천구지사 인하능감생 건곤지정 지재야
세상 운수(運數)의 변함은 흑백이 서로 때에 따라 바뀌어 돌아가는 것이며 하늘에 불이 있고 땅에 불이 있으며 하늘은 땅의 오랜 스승이며 사람이 살아가면서 어찌 능히 알 수 있겠는가? 다만 하늘과 땅에 정해진 것에 있음이다.
(97)
曰 後世人多邪唱邪說多矣 必有元世祖之焚雜道書 然後 道歸統一矣
왈 후세인다사창사설다의 필유원세조지분잡도서 연후 도귀통일의
후세 사람들은 삿된 것을 많이 주창하고 삿된 설(說)이 많으리라. 반드시 원나라 세조(世祖)의 잡된 도서(道書)를 불사른 다음에야 통일(統一)된 道로 돌아오리라.
(98)
曰 李朝世宗 有元祖之風 未能盡善而其後 不必論王道也.
왈 이조세종 유원조지풍 미능진선이기후 불필론왕도야.
이씨 왕조 세종은 원나라 세조의 기풍(氣風)이 있으며 능히 착함을 다했고 그 후에는 반드시 왕도(王道)를 논할 필요가 없도다.
※ 세종대왕(世宗大王)∶1397(태조 6)∼1450(세종 32) 조선 제4대 왕. 1418∼1450년. 휘는 도(祹) 자는 원정(元正) 시호는 장헌(莊憲). 태종의 셋째아들.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 소생 비는 청천부원군(靑川府院君) 심온(沈溫)의 딸 소헌왕후(昭憲王后). 1408년(태종 8)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지고 1413년 충녕대군에 진봉(進封)된 후 1418년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자 세자로 책봉되어 태종의 양위를 받아 즉위하였다. 왕은 즉위한 뒤 정음청(正音廳)을 두어 「훈민정음(訓民正音∶한글)」을 창제하고 집현전(集賢殿)을 설치 국내의 우수한 학자들을 총망라하여 학문을 강론케 하였고 활자를 개량하여 학자들을 지도해서 학문을 장려하고 서적편찬에 힘썼다.
세종 자신이 지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비롯하여 정인지‧권제(權 )의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 정초(鄭招)‧변계문(卞季文)의 「농사직설(農事直說)」 정인지‧김종서의 「고려사(高麗史)」 설순(楔循)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윤회(尹淮)‧신색(申穡)의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이석형(李石亨)의 「치평요람(治平要覽)」 수양대군의 「석보상절(釋譜詳節)」 김순의(金循義)‧최윤(崔潤) 등의 「의방유취(醫方類聚)」 등 각 분야의 서적을 편찬하였으며 관습도감(慣習都監)을 두어 박연(朴堧)으로 하여금 아악(雅樂)을 정리케 하였다. 이밖에 농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대간의(大簡儀)‧소간의(小簡儀)‧혼의(渾儀)‧혼상(渾象)‧일구(日咎)‧앙부일구(仰釜日咎)‧자격루(自擊漏)‧누호(漏壺)‧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 천문기계를 제작하게 했으며 고금의 천문도(天文圖)를 참작하여 새 천문도를 만들게 했다. 「칠정산내편(七政算內篇)」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 등 역서를 짓게 했고 세계 최초로 측우기(測雨器)를 제작하게 하여 우량(雨量)을 측정케 했다.
농잠(農簪)에 관한 서적의 간행 환곡법(還穀法)의 철저한 실시 조선통보(朝鮮通寶)의 주조 전제상정소(田制詳定所)를 설치하여 공정한 전세제도(田稅制度)의 확립 등으로 경제생활 향상에 전력했다. 사대사고(四大史庫)를 정비하고 「효행록(孝行錄)」 등을 간행하여 유교를 장려하는 한편 불교에 대해서 초년에는 억압정책을 썼으나 만년에는 내불당(內佛堂)을 지어 불교를 독신(篤信)하고 승과(僧科)를 설치하는 등 불교를 장려했다. 일본에 대해선 세견선(歲遣船)을 허락하는 등으로 회유책을 썼고 1419년 왜구가 침입하자 이종무(李從茂)를 시켜 그 소굴 쓰시마(對馬島)를 정벌케 했으나 다시 본래의 평화주의로 돌아가 쓰시마 사람들을 위해 삼포(三浦)를 개항했다. 한편 대외적으로는 명(明)에 대해 금‧은 세공을 말[馬]과 포(布)로 대신토록 외교에 성공하고 여진(女眞)과의 관계는 김종서(金宗瑞)와 이천(李蕆)으로 6진(鎭)과 4군(郡)을 설치하게 하였으며 능(陵)은 여주(驪州)의 영릉(英陵)이다.
※ 원세조(元世祖)∶1215∼1294. 이름 쿠빌라이(忽必烈). 칭기즈칸의 손자. 몽고제국 제5대 가한(可汗). 재위(在位) 1260∼1294년)1251년 형 몽케가 제4대 칸의 자리에 오르자 그는 중국 방면의 대총독에 임명되었다. 그는 고비사막 남쪽의 금연천(金淵川∶뒷날의 上都開平府)을 근거지로 삼고 지금의 중국 윈난성(雲南省)에 있던 대리국(大理國)을 멸망시켰으며 티베트와 베트남까지도 경략하였다. 그리고 형주분지(邢州分地∶河北)에 안무사(按撫司) 허난(河南)에 경략사(經略司) 경조분지(京兆分地∶陜西)에 선무사(宣撫司)를 두고 중국의 통치에 타고난 재질을 보였다. 1244년 유생(儒生) 왕악(王鄂 )을 고비사막 이북 지역(현재의 外蒙古)으로 초청하는 등 일찍부터 한(漢)나라 문화에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1253년 부터는 성리학자(性理學者) 왕순(王恂)에게 명하여 맏아들 친킴(眞金)의 교육을 맡겼다. 그리하여 그의 휘하에는 유병충(劉秉忠) 요추(姚樞) 허형(許衡) 등 특별히 성리학계의 중국 지식인들이 모이게 되었다. 1259년 남송(南宋)을 몸소 무찌르던 형 몽케칸이 쓰촨(四川)의 병영에서 병사하였다.
쿠빌라이는 국도(國都)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는 막내 아우 아리크부카의 야망에 선수를 써서 이듬해 이례적으로 중국의 카이핑부(開平府)에서 대칸(大汗)의 자리에 올랐으며 중국식으로 건원(建元)하여 중통(中統)이라 하였다. 그 뒤로 두 칸이 싸우기를 4년 마침내 아리크부카를 굴복시킨 쿠빌라이는 도읍을 연경(燕京∶北京)으로 옮겨 대도(大都)라 일컫고 이어 1271년 ≪역경(易經)≫에 입각하여 나라 이름을 원(元)이라 하였다.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키고 이민족으로서 최초의 중국 통일을 이룬 것은 1279년의 일이다.
그러나 아리크부카의 잔당인 하이두(오고타이의 손자)와 도와(차가타이의 고손자)의 반란을 계기로 몽골제국의 분열이 일어났다. 30여년에 걸친 동서 두 칸의 실력항쟁기(1268∼1303)를 통하여 원나라는 뱃길로 일한국(汗國∶이란)과 친교를 계속하는 일만으로써 세계 제국의 면목을 유지하였다. 세조는 35년간의 치세에서 안으로는 툴루이가(家) 분지(分地)의 실력가인 진정(眞定)의 사(史)씨와 고성(藁城)의 동(董)씨의 협력하에 끈질긴 한인(漢人)의 세습적 봉건제후제(封建諸侯制)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확립하였다. 또 금(金)나라와 당(唐)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관제(官制)를 정하고 세제(稅制)를 정비하였다. 밖으로는 미얀마‧참파‧자바‧일본 등을 쳐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대부분을 그 영역 안에 넣었다. 다만 외정(外政)의 강행으로 말미암은 재정난의 증대는 세조가 이재(理財)의 신하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아하마(이슬람교도) 노세영(盧世榮∶漢人)‧상가(위그루인) 마르코폴로 등 주로 색목인(色目人) 계통의 상인적 정치가의 활약을 허용하였다. 세조가 죽은 뒤 그의 뒤를 이은 성종(成宗)은 일찍 죽은 황태자 친킴의 아들이다.
(99)
曰 神誌氏九變之道 將有其理 大道之人 不屑屑言 不微微談 然 三朝鮮九壬之五 天下動 十壬平
왈 신지씨구변지도 장유기리 대도지인 불설설언 불미미담 연 삼조선구임지오 천하동 십임평
신지(神誌)의 구변(九變)의 道는 앞으로 그 이치가 大道의 인물에게 있게 되며, 이는 하찮게 여길 말이 아니며 자질구레한 말이 아니니 셋 조선(朝鮮)에 임(壬)이 아홉 번 변하고 다섯에 이르면 천하가 움직이고 열 번째 째 임(壬)에 평안하다
(100)
曰 天下合而分 分而合 亦理之常 知者先察其機而隨行焉.
왈 천하합이분 분이합 역리지상 지자선찰기기이수행언.
천하가 합쳐졌다가 나뉘어 지고, 나뉘어 졌다가 합쳐지는 것은 불변이 이치이니 이를 아는 사람은
먼저 그 틀을 살피고 행하여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