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샘추위
김용매
올해도 어김없이 꽃샘추위가 찾아왔습니다. 오늘은 대체로 흐리고 가끔 비 또는 눈이 오겠습니다. 돌풍과 벼락이 칠 예정이니 옷차림에 유의하셔야겠습니다.
진경은 텔레비전 일기예보에 실눈을 떴다. 텔레비전 빛의 파장으로 어두컴컴한 방안이 미묘하게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이 빛의 밝기를 쥐락펴락하는 것 같았다. 간밤에도 텔레비전을 켜둔 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진경은 아들이 깰까 봐 볼륨을 줄였다. 창밖의 새벽바람 소리가 화살촉 날리는 것처럼 날카로웠다. 전깃줄도 끊임없이 울었다. 몸을 옹송그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머릿속이 쓰다 버린 철 수세미처럼 엉켜있었다. 저녁마다 텔레비전을 켜둔 채 잠자리에 누웠다. 화면을 보다가 부지불식간에 잠이 들어서 시름을 잠시나마 털어낼 수 있었다. 죽은 남편이 말없이 바라만 보는 꿈을 꾸는 날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그 일’만 생각하면 몸을 쥐어짜는 고통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잠옷을 벗어 방바닥에 패대기쳤다. 속지 말았어야 했다는 자책에 괴로웠다. 오늘은 특히 옷차림에 신경 써야 한다는 김 선생 말이 갑자기 생각났다.
어제, 휴대폰 벨이 울렸다. 모르는 전화번호가 화면에 떴다. 평소에는 휴대폰에 저장하지 않은 번호를 무시했지만, 이번에는 몸이 먼저 반응했다. 기다리는 전화가 있었다. 탄성력을 받은 용수철처럼 소스라치게 놀라며 전화기 폴더를 열었다.
“검찰청입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김 선생과 눈이 마주쳤다. 화장실을 손가락질했다. 그곳으로 뛰다시피 들어간 후 통화를 했다. 내일 14시까지 7호 검사실로 나오라는 출석요구였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보충할 서류가 있으면 갖고 오라는 남자의 말은 매우 간단명료했다. 또한 건조했다. 네, 네, 단 두 음절의 대답으로 전화는 끝났다. 마치 진경과 아들의 관계 같았다.
한기가 온몸으로 파고들었다. 조립식 패널로 지은 집은 바람과 눈비만 막아줬다. 집을 지어야 할 텐데 요원하게 느껴졌다. 형광등을 켜자 방 안이 밝아졌다. 잦은 이사로 생채기가 덕지덕지한 낡아 빠진 장롱과 서랍장, 텔레비전 장식장이 보였다. ‘우리 집에서 제일 신제품은 나야’라고 했던 아들의 말이 생각났다. 장롱문을 열고 한참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철 지난 잡지 같은 복고풍 옷들로 채워졌다. 때와 장소에 맞춤한 옷을 찾는 것 자체가 의미 없어 보였다. 점퍼를 입고 거울을 봤다.
점퍼처럼 낡은 여자가 보인다. 옴팡한 두 눈에 얼굴 뼈에 얇은 밀전병을 덮은 형상이다. 핏기 없는 누르께한 피부에 몸피는 홀쭉했다. 이마 머리칼과 살쩍은 은빛이다.
밥맛이 없다. 무엇을 입에 넣었는지 맛을 모르겠다. 소가 되새김질하듯 습관적으로 우물거렸다. 목구멍을 주먹만 한 돌로 막아놓은 것처럼 음식이 넘어가지 않았다. 밥 대신 한 움큼의 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송금 꼭 부탁해요.”
아들 목소리에 잠이 매달려 있다. 수정이와 잘 풀렸다면 삼 대가 함께 살았을 것이다. 아들까지 부양할 줄 몰랐다. 이럴 때는 딩크족인 김 선생이 부럽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하늘이 흐릿하다. 시야가 잿빛이다. 지난가을에 심은 양파와 마늘이 초록빛을 뽐냈지만, 바람에 흔들리는 에어 풍선이 됐다. 봉곳하게 부풀어 오르던 복숭아 꽃망울들이 나뭇가지에 간당간당 매달려있다.
경차 페달을 밟았다. 빗방울이 자동차 전면 유리창에 사선을 그렸다. 한두 방울 떨어지다가 점점 굵어졌다. 가로수 가지들이 휘청거렸다.
“선생님 안녕.”
초등학교 병설 유치원 아이들이 배꼽 인사를 하며 반겼다. 진경은 한 명 한 명 보듬어줬다. 씁쓸함에 마음이 처연하다. 언제쯤 손주를 안아볼 수 있을까. 아들 생일날 두리반 앞에 손주들과 빙 둘러앉아 식구들이 좋아했던 민어를 먹는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만으로도 처연한 마음이 옅어졌다.
진경은 구연동화 담당이다. 오늘은 ‘토끼전’을 하는 날이다. 토끼 귀를 손으로 움직일 수 있는 모자를 준비했다. 칠판에는 해초와 물고기가 헤엄치는 바닷속 전경 사진을 걸어 놨다. 손뼉을 쳤다. 아이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닷속에 용왕님이 살고 있었어요, 그런데 용왕님에게 걱정이 있었어요. 공주님이 동화책에서 본 토끼가 너무 예쁘다며 구해달라고 떼를 썼어요. 밥도 먹지 않아서 아팠어요. 할 수 없이 용왕님은 육지와 바다를 다닐 수 있는 자라를 육지로 보냈어요. 자라가 진주목걸이를 한 토끼를 발견했어요. 아가씨가 육지에서 가장 예쁜 토끼라고 하던데, 맞나요? 토끼는 당근을 먹으며 어깨를 우쭐거렸어요. 지금 용궁에서 멋진 왕자님이 아가씨를 기다리고 있어요. 왜? 결혼하려고요. 왕자님과 결혼하면 육지보다 넓은 바다가 아가씨 것이 되지요. 먹을 것도 많고 용궁의 돌은 모두 진주에요. 얼른 가시죠. 자라가 등을 내밀었어요. 토끼는 냉큼 올라탔어요. 용궁에 도착한 토끼는 공주님 장난감이 되어 조그마한 어항에서 살게 되었어요. 토끼는 너무 힘들었어요. 공주님, 토끼가 저 혼자라서 재미없죠. 제가 육지에 가서 토끼들 많이 데려올게요. 공주님은 토끼를 자라 등에 태워서 육지로 보냈어요. 자라, 네 놈이 나를 속여. 나는 자유가 좋아. 너나 맛있는 것 실컷 먹고 어항 속에서 평생 살아라. 토끼는 육지에 내리자마자 자라에게 약 올리고 쌩하니 가버렸어요.”
진경은 ‘토끼’가 나올 때마다 양손에 힘을 줬다. 귀가 팔랑거렸다. 아이들이 또르르, 이슬 굴러가는 투명한 웃음소리를 쏟아냈다.
“오늘 재미있었나요. 친구들끼리 느꼈던 것을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세요.”
“자라한테 토끼가 속았어요.” “남의 말을 함부로 믿으면 안 돼요.” “토끼가 욕심을 부렸어요.”
진경은 미소 지으며 아이들을 지켜봤다. 그러나 머릿속은 검찰에서 할 말을 정리하느라 분주하다. 그 일을 생각하면 할수록 짙은 밤안개 속이다. 왜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왜 그렇게 바보 같은 짓을 했을까 심한 자책으로 괴로웠다.
김 선생에게 문자가 왔다.
‘샘, 오늘 검찰청 갈 거죠. 새로운 경험 부럽네요.’
문자를 곱씹었다. 김 선생에게 이 일을 끝까지 숨기고 싶었는데 그만 들키고 말아서 기분이 찜찜하다. 그녀 얼굴은 화난 복어였다. 보톡스 약발 효과다. 약발이 떨어져 얼굴 피부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지면 안면거상술을 하겠다고 노래를 불렀다. 하지만 며칠 지나면 화난 복어로 원상 복귀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얼굴을 까뒤집든 쪼개든 본인 마음이다. 서민 아파트에서 사람 사는 것이 희한하게 보인다고 쫑알댈 때면 달나라로 보내고 싶다. 그녀에게 아파트가 수십 채라거나, 애인이 팔도에 있다는 소문도 자자했다. 진경이가 말이 없으면 정년 때문에 우울하냐고 은근히 비아냥댔다. 정년이 2년 남았다. 김 선생 손이 안경으로 향하면, 진경은 파브르의 ‘조건 반사’를 일으켜 눈 돌릴 곳을 찾았다. 보지 않아도 김 선생 그다음 동작이 스크린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왜 이렇게 눈이 침침하지, 하면서 안경을 벗는다. 명품 ‘까르띠에 다이아몬드 장식 안경’이다. 전면부 프레임과 렌즈를 감싸고 있는 림은 금이다. 프레임과 템플을 잇는 힌지는 좁쌀 크기의 군청색 사파이어와 다이아몬드로 만든 작은 구슬 모양이다. 좁쌀 다이아몬드로 몸을 뒤덮은 표범이 금방이라도 도약할 것처럼 웅크린 자세로 자리 잡고 있다. 비취색 에메랄드 눈은 새벽하늘 금성처럼 반짝거렸다. 안경테에서 금이 아닌 부분은 다이아몬드와 에메랄드로 장식되었다. 가격이 천만 원에 육박한다고 자랑했다. 사람이 안경에 묻혔다. 그런데도 김 선생은 눈이 침침하다며 걸핏하면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면서 시선 몰이를 즐겼다. 토끼몰이하는 표범 같았다. 도수 없는 안경을 코에 걸친 김 선생은 알량한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훅, 날려 보낸 것이 분명하다. 진경은 십여 년이나 쓰고 있는 뿔테 안경 브릿지를 위로 올렸다.
김 선생은 브랜드가 훈장처럼 달린 ‘막스마라’를 사시사철 입었다. 그녀가 차 마시자고 불러낼 때가 많았다.
“내가 입은 옷 가격 알면 우 선생은 뒤로 자빠질걸.”
진경이 ‘신상’을 못 알아봤을 때 하는 소리였다. 그럴 때면 그 입을 스테이플러로 꾹꾹 박아주고 싶었다. 김 선생에게 명품은 코끼리 발에 다이아몬드가 박힌 인조 발톱 스티커를 붙인 것처럼 어울리지 않았다. 그녀가 적금을 깨서 명품 옷 사 입는다는 것을 진경은 알고 있었다.
교정의 목련 나뭇가지가 비바람에 한곳으로 휩쓸린다. 마치 성난 표범에 쫓기는 것처럼. 미루나무 우듬지의 까치집이 눈에 들어온다. 위태롭다. 파열음을 내며 산산조각이 날 것 같다. 하지만 용케 버티고 있다. 그렇게 버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걸음을 재촉한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우산을 깊이 눌러썼다.
검찰청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14시가 되려면 여유가 있다. 차 안에서, 검찰에 제출할 서류들을 뒤적거렸다. 청미래 덩굴손처럼 머릿속에 생각의 가지들이 이리저리 뻗었다. 안개 속이다. 둔탁한 소리가 차를 때렸다. 고개를 들었다. 잿빛 하늘에서 우박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그 우박들은 파편이 되어 사방으로 튀었다. 차창 너머의 여린 나뭇가지들이 속절없이 부러졌다.
검찰청 출입문을 열었다. 서류 가방을 보안 검색대에 올려놓았다. 진경은 또 다른 검색대로 통과해서 가방을 받았다. 바깥에서는 우박이 내려도 건물 내부는 진공 상태가 된 공간처럼 고요하다. 산소 농도가 부족한 어항 속 금붕어처럼 숨이 막혔다. 자신도 모르게 입이 헤벌쭉해졌다.
7호 검사실 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 들숨과 날숨을 조절하며 긴장된 마음을 추슬렀다. 그래도 팔다리의 떨림을 안정시키기 힘들었다. 불안한 눈동자를 좌우로 굴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창을 등지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수갑을 풀었습니다.”
심장에서 쇠공이 낙하하는 것처럼 쿵, 소리가 났다. 경비원이 인터폰에 대고 한 말이다. 진경은 걸음을 멈추고, 미로에 갇힌 아이처럼 주춤거렸다. 진경의 이름을 불렀다.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옆 책상에는 황토색 죄수복을 입은 남자와 양복을 입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검찰 수사관이라며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다가와서 서류를 내밀었다. 손이 이유 없이 떨렸다. 이름을 적고 지장을 찍었다. 도장에 묻은 인주를 화장지로 닦을 때도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긴장된 마음을 진정시킬 겸 죄수복 입은 남자를 곁눈으로 흘긋 보았다. 남자의 안경이 눈에 비수처럼 꽂혔다. 표범이 템플에 웅크리고 있었다. 김 선생이 썼던 명품 ‘까르띠에 다이아몬드 장식 안경’이다.
진경과 수사관은 영상 녹화실로 자리를 옮겼다. 캐비닛과 책상, 의자 두 개로 방이 꽉 찼다. 정면 천장 모퉁이에 시시티브이가 눈을 부릅뜨고 노려봤다. 한쪽 벽 절반을 가린 유리창이 보였고, 밖에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다.
수사관은 시디를 꺼냈다. 라벨을 붙이고 기계를 조작했다. 영상녹화가 한 시간 내외 진행된다고 알려줬다. 고소인 진술은 본인 확인부터 시작했다.
진경의 이마에서 배어 나온 땀이 기름처럼 느껴졌다. 심장박동 소리가 경운기 소리였다. 생수를 병째 들고 마셨다.
“나환금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딜러를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피의자 얼굴 본 적이 있습니까?”
“네, 신문과 방송에서 봤어요.”
수사관의 고개가 옆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눈에 날카로운 칼을 세웠다. ‘그놈’ 본 적이 있냐며 진경의 눈에 다시 칼을 들이댔다. 진경은 종이컵에 물을 따르며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어떻게 사기를 당했습니까?”
“고수익을 보장한다며 비상장주식에 투자하게 했어요.”
“우진경 씨가 최종 판단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놈 이름을 건 주식방송이 있었어요. 신문, 방송에서 성공 신화와 봉사단체에 거액을 기부한다고 도배도 했고요. 2년 후 투자금이 두 배, 세 배 뻥튀기처럼 불어난다는데 안 속는 사람이 이상한 거지요.”
“홈쇼핑에서 물건 잘못 구매했다고 사기라고 합니까?”
“아니, 지금 그놈 편드는 거예요! 그럼 제 잘못인가요! 그놈 개망나니짓에 작두춤 춘 언론은 잘못이 없나요. 항공사 취항식 날, 지역 국회의원들과 경제계 높은 인간들이 총출동했다고요. 그렇게까지 능력 있는 놈이 사기 칠 줄 몰랐죠. 이참에 그놈하고 같이 사진 찍은 인간들한테도 책임 물어야죠. 사회지도층이라는 것들이 돈 냄새에 똥파리처럼 들러붙어서 서민들 피해 보게 했잖아요. 검찰도 4천억 사기 칠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죠. 일찍 그놈을 잡았으면 피해를 줄였을 거잖아요!”
“흥분 가라앉히세요. 제 말은 투자자의 최종 판단은 본인 책임이라는 거죠. 고소인은 다른 사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습니까?”
수사관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눈에 또다시 칼이 섰다. 진경은 두 손으로 책상을 때리며 일어났다. 생수병이 옆으로 누웠다. 물이 쏟아졌다.
“이봐요, 내가 잘못했다는 소리로 들리네요. 아니면, 내 귓구멍에 오류가 생겼을까. 오호라, 그놈이 여기까지 똥물 뿌렸나요! 하여튼 이러니까 대한민국이 사기 공화국이라는 소리를 듣지. 얼마나 받아서 쳐드셨을까 궁금하네.”
“우진경 씨, 영상녹화 중입니다. 말 가려서 하고 자리에 앉으십시오.”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그놈은 돈 없다고 황제 노역 이삼 년 살고 나오면 끝이잖아요. 사기꾼들은 혀를 자른 후, 입에 칼 물고 뒤지게 해야 하는데. 에이, 더러운 세상. 젠장.”
진경은 더 쏟아지려는 욕을 어금니 앙다물며 간신히 참았다. 수사관이 잠깐 쉬었다 가자며 제동을 걸었다. 진경은 시시티브이를 망연히 바라보았다.
아들의 나이 삼십 대에 들어섰다. 아직 장가를 못 갔다. 아들은 못 간 것이 아니라 안 간다고 짜증을 냈다. 아들의 미래를 생각해서 아파트를 사 주려고 했다. 남편의 목숨과 맞바꾼 돈과 은행 대출을 끼면 못 할 것도 없었다. 아들에게 허름한 가난의 냄새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아들에게 아파트를 넌지시 물어봤다. 집은 필요 없으니 사업자금을 달라고 했다. 그것이 통하지 않자 돈을 빌려달라고 성화를 부렸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들은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교수의 추천으로 대기업 지방 지사에 취업했다. 숙소는 후배들과 같이 월세를 얻었다. 취업이라는 ‘인생 입시’를 통과한 아들이 자랑스러웠다. 장차 ‘결혼 입시’만 해결하면 아들의 앞길은 탄탄대로가 될 터였다.
2년이 지났을 무렵, 아들은 짐을 싸서 집으로 왔다. 낙하산이라며 직원들에게 왕따를 당했다고 했다. 중요한 일을 부모에게 의논 한 번 하지 않았다고 지청구를 퍼부었다. 설득을 병행했지만, 아들의 마음은 석실처럼 견고했다. 얼음장 같은 냉기가 집안에 돌았다. 아들이 할 말 있다며, 대화의 멍석을 깔았다. 선배가 하던 대학 매점을 저렴한 가격에 인수하기로 했다며 마음을 털어놨다. 권리금 조금 있지만, 연봉 4천은 된다고 큰소리쳤다. 방학이 길어서 ‘투잡’까지 할 수 있다고 장대한 꿈을 벌써 펼치고 있었다. 꿈의 직장이라고 확신을 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좋은 자리를 왜 널 주겠냐. 그런 자리라면 절대 네 차지가 되지 않는다고, 아들을 설득했다. 경우의 수를 생각해봐야 한다고. 아들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달라고 했다. 집을 담보로 해서 부족한 돈을 마련해줬다. 대학가 주변에 원룸도 얻어줬다. 그 일도 잠시, 원금을 회수하기도 전에 그만뒀다. 아니, 쫓겨났다. 표면적으로는 수의계약에서 공개 입찰로 바뀌어서 그랬다고 했지만, 실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매출이 상승곡선을 그리자 대기업이 눈독을 들였다. 권리금은커녕 비품들을 고물상에 헐값으로 처리하는 바람에 빚만 왕창 짊어졌다. 그 후, 아들은 빚을 갚겠다고 중소기업에 다녔다. 몇 달 되지도 않아 직장을 그만뒀다.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들고 손톱에 끼는 시커먼 기름때가 끔찍하다며.
‘썩을, 그까짓 것이 힘드냐.’
진경은 아들이 남편을 닮은 것 같아 먼저 배수진을 쳤다. 냉랭한 관계가 한동안 유지되었다. 며칠 전, 아들의 면담 신청이 들어왔다. 친구와 사업을 하겠다고 결연한 의지를 뿜어냈다. 건전 마사지업소로 직장인들이 주요 타깃이라며 완전 대박 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아침잠 부족한 직장인들 반응이 좋을 것이라며 꿈에 부풀어 있었다. 임대보증금은 친구가 해결했다며 권리금을 빌려 달라고 했다. 아들에게 계산법이 이상하다며 조곤조곤 물어봤다. 결론은, 아들이 일하고 친구는 돈만 챙겨가는 구조였다.
‘결혼해서 며느리와 같이 일하면 좋을 텐데.’
세상이 아무리 바뀌었다고 해도, 진경은 결혼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응급수술을 할 때 가족의 동의가 없으면 수술을 할 수 없었다. 고독사 뉴스를 접할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아들은 제 아비의 복사판이었다.
남편은 한 번도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 전생에 노비로 살았는지 남의 밑에서는 하루도 견디지 못했다. 사업에 매달렸지만, 낯간지러운 구멍가게 수준이었다. 남편은 ‘한 방’을 기다리며, 평생을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암에 걸려서 허덕거리는 삶을 살았다.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었던 사건, 혹시 그게 곧 입버릇처럼 말했던 ‘한 방’이었는지 모르겠다. 사망 보험금을 남겼으니까. 아무튼, 남편은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집이 개천 축대 위에 자리를 잡았다. 폭우에는 물이 넘칠까 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집을 헐고 지대를 높게 해서 신축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집터는 개천 부지로 편입되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이장의 역할이 컸다. 군청에서 공사 승인 각서를 받아 갔었다. 진경은 남편 사망 보험금과 토지보상금으로 집을 지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지만, 쉽게 결정하고 착수할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비만 내리면 진경의 마음은 청개구리가 되었다.
2년 전, 휴일이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이장이 커피 마시러 오라고 했다. 진경은 머리를 손빗으로 대충 빗고 집을 나섰다.
우리 수정이가 드디어 정규직이 됐다네.
이장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진경은 축하 인사를 건네고 거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묻었다. 이장은 다탁에 커피잔을 내려놓고 옆에 앉았다. 거실에는 커피 향이 안개처럼 깔렸다. 못 보던 전신 거울이 눈에 띄었다. 수정의 취직 기념으로 이장이 사 온 것이라고 했다. 진경은 거울을 보며 마른세수로 얼굴을 매만졌다.
수정이가 외출해서 돌아왔다. 얼굴에는 복사꽃이 폈고 어깨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 진경은 수정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청년 실업자가 백만 명을 넘어선 지 오래되었고, 파트타임 종사자도 갈수록 늘었다. 취업이 인생의 목표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렇게 어려울 때 수정이가 정규직이 되었다니 가슴이 뿌듯했다. 수정이는 엄마를 닮았다. 몸이 동글동글하고 얼굴과 눈도 동그래서 오뚝이 인형을 닮았다. 마을 주민을 만날 때마다 살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 아이가 인사를 하고 제방으로 들어갔다.
축하의 의미로 두 가족이 식사하자며, 이장이 한쪽 눈을 찡끗거렸다. 두 가족이라야 혁이와 수정이를 포함해 네 명이다. 이장과 진경은 남편이 없다는 교집합으로 묶여있었다. 이장은 진경에게 피붙이보다 더 막역한 존재였다. 그녀는 진경이 어려울 때마다 구세주 역할을 했다. 이 마을에 살게 된 것도 그녀의 힘이 컸다. 시골에서는 가로등 고치는 것조차 이장이 개입하면 시간이 단축되었다. 군청이나 면사무소에서는 무조건 이장을 통하라고 했다. 진경의 집을 짓는 것에도 이장의 입김이 필요했다.
수정이 다니는 회사가 ‘리치에셋’이라고 했다.
‘혹시 보험회사인가.’
진경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장은 잘 모르지만, 주식을 파는 회사라고 알려줬다. 사장이 방송에 자주 나온다며, 그 자랑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비상장주식을 파는 회사에요.
수정이 방에서 나와 궁금증을 풀어줬다. 진경은 그런 비슷한 주식에 대해 이미 들은 적이 있었다. 김 선생이 3년간 보유하고 있다가 상장돼서 외제 차로 변신하는 마술을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 차는 진경의 ‘설마 경차’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진경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본 유치원 아이가, 선생님이 ‘설마 경차’ 타냐고 했던 말이 아직도 귀에 쟁쟁했다.
우리 회사는 이 년 후에 상장될 우량주식만 취급해요.
수정은 그동안 교육을 받아서 딜러가 되었다. 풍성한 웨이브 스타일의 긴 머리가 여유 있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상큼한 풀 냄새가 났다. 얼굴도 동글 갸름해졌다. 조곤조곤한 말투가 신뢰감을 주었다.
이장은 두 집안에 좋은 일만 앞으로 생길 것이라고 재잘댔다. 진경에게, 돈을 놀리고 있느니 투자를 하라고 은근슬쩍 수정이 회사를 홍보했다.
“음, 네가 알아봐서 확실한 주식이 있으면 추천해 줘.”
진경은 ‘2년 후’라는 말에 콕, 박혔다. 진경이 퇴직하는 해였다. 이장의 말도 마음을 흔들었다. 이장은 이번에도 진경의 구세주가 될 것 같았다. 진경과 이장의 교집합이 또 하나 있었다. 혼기를 놓친 자식들이다. 노총각, 노처녀란 단어가 사라진 지 오래됐다. 결혼을 필수가 아니고 선택이라니 환장할 노릇이다. 사글셋방에서 신혼살림을 했다는 것은 ‘전설 따라 삼천리’의 이야기가 되었다. 남자는 집이 있어야 장가갈 확률이 높았다. 둘은 상대방 애들을 만날 때마다 사위하자, 시집와라, 하면서 물밑 작업을 했었다. 수정이가 정규직이 됐다니 다른 곳으로 날아갈까 봐 진경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금전적으로 피해 본 것을 자세히 말씀해보십시오.”
진경은 무연한 눈길로 고소장을 봤다. 그놈 이름에 눈길이 머물렀다. 몸이 떨렸다. 살의가 치솟았다. 그 돈이 어떤 돈이던가. 남편의 목숨값과 애들의 코 묻은 돈까지 구메구메 모았는데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고소장과 똑같아요. 항공사 주식과 상장이 유력한 바이오와 5G 회사라고 속였어요. …원금을 얼마라도 찾을 수 있을까요.”
“나환금 사기가 먼저 입증되어야 합니다. 유죄가 확정돼도 남은 자산이 있어야 합니다. 피해자 구제를 위해 추징 보전 등 범죄 수익 찾는 일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혹시 찾아낸 돈이 있나요?”
“찾긴 찾았지만 얼마 안 됩니다. 나환금이 전관 변호사 삼십여 명 이름을 올려놔서 지출이 더 늘어날 겁니다.”
“그놈은 지금 피해자들 돈을 쓰고 있는 거잖아요. 저는 고소장도 인터넷 뒤져가며 작성했네요. 사십 만원이 아까워서. 지금 그놈 어디 있나요? 제가 그동안 마음고생 한 것을 생각하면 그놈을 그냥….”
진경의 온몸에 있는 열기가 비등점을 향해 달렸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뒤로 넘어갔다. 문을 열었다. 블라인드 앞으로 다가갔다. 블라인드 줄을 힘껏 잡아당겼다. 쫘르륵, 그놈 마지막 날숨소리 같았다. 만나기만 하면 그놈 목을 물어뜯고 싶었다.
“우진경 씨, 자리 이탈하지 마세요. 나환금은 아까 보았잖아요.”
“예! 뭐라고요!”
진경은 얼음처럼 몸이 굳었다. 누군가 손가락으로 살짝 밀기만 해도 바닥에 나뒹굴며 산산이 조각날 것 같았다.
검사실에서 지문 찍을 때 옆에 있었습니다.
까르띠에 다이아몬드 장식 안경이 퍼뜩 생각났다. 사기꾼을 눈앞에 두고도 몰라봤다. 얼굴도 모르는 놈에게 뭘 믿고 투자를 했을까. 자신이 얼마나 바보였는지 발등을 찧고 싶었다.
“긴장해서 못 알아봤어요. 어제 잠도 못 잤고요.”
“위험 부담에 대해서 안내받았습니까?”
“전혀 없었어요. 성장 가능성이 큰 우량주라고만 했어요.”
“딜러는 고소 안 합니까?”
“진경은 ‘딜러, 수정’이를 떠올렸다. 상처를 소금으로 문지르는 것처럼 쓰라렸다.”
“고민하는 중이에요. 딜러가 사고 며칠 전에 그런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딜러가 같은 마을에 살아서 그 집 사정 잘 아는데, 자신도 피해자래요.”
진경이 시시티브이를 괜히 노려보며 말을 이어갔다. 종이컵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우그러뜨렸다. 분을 참지 못해 갈기갈기 찢었다. 심장에 바늘이 뭉텅이로 꽂히는 것 같았다.
작년 겨울, 하늘은 종일 잿빛이었다. 저녁 무렵부터 눈이 내렸다. 아들과 밥을 먹고 있었다. 입맛이 없어 제사상에 올리려고 갈무리해둔 민어 수치를 상에 올렸다. 추억으로 음식을 먹는다는 말이 있지만, 그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입에 착착 감기던 민어 수치가 소태맛이었다. 나환금이 전파를 탔다. 이전 분위기와는 영 딴판이었다. 수저를 든 손에 힘이 빠졌다. 수저가 식탁 아래로 툭, 떨어졌다. 검찰에서 나환금을 사기 혐의로 내사하다가 수사로 전환했다는 보도였다. 진경의 동공이 커졌다.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왜 그래요?”
아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가슴이 탁 막혀 숨통이 터질 것 같았다. 주먹으로 앙가슴을 쳤다. 이장에게 전화했다. 수정이가 집에 있었다. 할 말이 있다며, 집으로 간다고 했다. 무슨 일 있냐며, 아들이 식탁에서 일어났다. 대답해줄 낯짝이 없어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진경은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휘청거리는 발이지만 바삐 놀렸다. 마침내, 길에 눈이 쌓였건 말건 달음박질했다. 저 멀리 칠흑 같은 벌판에서 바람이 불었다. 바람은 뾰족한 가시가 되어 온몸을 찔렀다. 코끝에 연신 달라붙는 냉기가 가슴을 난도질하기까지 했다. 그런 것 때문에 달음박질을 멈출 상황이 아니었다.
진경은 신발을 신은 채 이장네 집안으로 돌진했다. 매서운 바람이 뒤따라 들어왔다.
“설마… 내 돈, 아니겠지?”
진경이 목소리가 제대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수정의 입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기다리는 시간이 뫼비우스 띠만큼이나 길게 느껴졌다.
“죄송해요. 저도 며칠 전에 알았어요.”
수정이 소파에서 일어나서 입을 우물거렸다. 얼굴에는 귀찮다는 표정이 게딱지처럼 덮여있었다. 모녀는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다탁 유리판 위에 홍시와 커피잔이 놓여있었다. 진경의 두 다리에 힘이 빠지면서 휘청거렸다. 두 손으로 다탁을 잡고 간신히 균형을 유지했다. 머릿속이 어찔했다. 눈앞이 깜깜했다. 기름 같은 땀이 쏟아졌다. 급기야 헛웃음까지 나왔다.
“어떻게 해, 내가 미쳤지. 그게 어떤 돈인데 무슨 떼돈을 벌겠다고 지랄을 떨었을까. 천벌 받은 거야. 난, 이제 어떻게 해!”
진경은 고장 난 녹음기처럼 ‘어떻게 해’를 수없이 부르짖었다. 수정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장은 커피를 홀짝이기만 했다. 무거운 커피 향이 거실을 휘감았다. 수정이는 회사에서 연락해 오면 바로 정보를 주겠다며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사장의 오해가 풀리면 회사가 금방 정상화된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너도 항공 주 샀니?”
“아뇨. 저는 엄마 말 듣고 주식 한 주도 안 샀어요.”
수정은 서름한 표정을 지었다. 저가 항공 주는 수정이 마지막으로 판매했다. 매수자 경쟁이 심하다고 설레발쳤다. 진경은 남은 돈으로 ‘몰빵 투자’를 했다. 그놈이 검찰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수정이가 주식을 권유할 때마다 이야기를 길게 나눴지만, 위험에 대한 어떤 언질도 받지 못했다. 그 자리에 이장도 함께 있었다. 가짜 기업검토서만 수북이 내놓았다.
진경은 거울을 향해 커피잔을 던졌다. 거울 깨지는 소리와 비명이 거실을 꽉 채웠다. 파편이 튀었다. 깨진 거울 틈 사이로 검은 피눈물이 흘렀다. 수정의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동생, 진정하시게.”
이장이 진경이 옆으로 왔다. 진경의 눈에서 불이 뿜어졌다. 가슴속에 응어리진 분노가 마그마처럼 솟구쳤다.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진경은 벽을 향해 홍시를 힘껏 던졌다. 붉은 폭탄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다탁을 들어 수정이 있는 곳으로 냅다 뒤집어 엎었다. 유리조각과 홍시가 뒤섞였다. 싱크대 수납장을 열었다. 이장이 아끼던 사기그릇과 머그잔이 대오를 갖추고 있었다. 그것들을 꺼내 무당 칼춤 추듯이 사방으로 던졌다. 수정이가 털썩 주저앉아 큰 소리로 울었다. 진경은 수정이를 홍시처럼 짓이기고 싶었다. 이장을 섭산적처럼 갈가리 찢어발겨서 시궁창에 처넣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수정에게 진경은 다른 피해자들과 똑같은 ‘밥’이었다. 아니 더 쉬운 ‘호구’로 보였을 것이다. 미래의 시어머니가 아니었다. 문득 남편의 ‘한 방’이 생각났다. 그는 차에 탄 채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혹시 그게 그의 ‘한 방’이었을까. 재해로 사망하면 보험금이 두 배로 지급됐다. 진경은 천 길 낭떠러지 위에서 끊어질 듯한 거미줄에 매달린 나비처럼 될 거라는 느낌을 받자 눈앞이 캄캄해졌다. 얼음장 같은 얼굴로 분연히 돌아섰다. 거실문이 부서지라 밀치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소리 없이 쌓이고 있었다. 그 가벼운 눈송이가 박달나무 몽둥이로 변해 몸뚱이를 때렸다. 한참 동안 매를 맞고 서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무슨 일 있는 거죠?”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진경은 입을 다문 채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들이 따라 들어왔다. 둘 사이는 아직도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다. 아들에게 아빠처럼 살지 말라고 했다. 노력 없이 얻어지는 것은 없다고 얼마나 닦달을 했던가. 아들이 사업자금 달라고 할 때 왜 주지 않았는지. 남편이 근심스러운 얼굴로 현몽한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다니, 한탄이 절로 새어 나왔다.
“수정이한테 돈 날렸지! 내가 그놈의 집구석 당장 불 싸지를 거야!”
진경은 뛰쳐나가려는 아들을 결사적으로 붙잡았다. 아들이 놓으라고 소리쳤다. 눈앞의 사물들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정신이 혼미했지만, 끝까지 아들을 놓지 않았다. 돈 잃고, 방화범 아들까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 하십시오.”
“서민이 가난하게 사는 이유가 게을러서 그런다고 입바른 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지문이 없어지고 뼈가 닳고 닳을 때까지 일해서 돈 몇 푼 모아놓으면, 나환금 같은 가진 놈들이 사기 쳐서 빼앗아 가기 때문에 돈을 모으지 못하는 거예요. 돈 없는 사람들이 돈을 안 벌거나 못 버는 게 아니라고요. 그래도 악한 끝은 꼭 있더라고요. 그놈을 감옥에서 평생 썩게 해주세요. 딜러도 남의 피눈물을 삼켰으니 응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겠죠. 가진 놈들에게 빌붙어서 어려운 사람 등치는 벼락 맞을 인간들 때문에 없는 사람들이 더 무시당한다니까요. 아 참, 또 하나 있어요. 해외여행 한 번 가보고 싶네요. 남편의 한 방 때문에 비행기가 벼락 맞을까 봐 겁나서 못 갔는데 이제는 그까짓 거 하나도 무섭지도 않네요. 어느 벼랑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알 수 없는 내일이 더 무섭고 징글징글하네요. 이런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내가 비록 비정규직이었지만 그런대로 행복했지요. 아들 결혼시키고, 퇴직하면 손주 돌볼 생각에 신바람 났었죠. 지금은 우울증이 와서 병원에 다니고 있는 처지에요.”
“결과는 우편으로 갈 겁니다.”
“원금 회수 어려울까요?”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비상장주식이 상장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빠를 겁니다. 인제 그만 가시죠.”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으로 검찰에 왔는데 이런 사건의 결말이 늘 그렇고 그렇죠. 있는 놈들은 휠체어 타고 전 국민 사기극을 벌이다가 잠잠해지면 병보석으로 슬그머니 나오겠죠. 서민들의 생계형 경범죄에는 자로 재고 현미경을 들이대더라고요. 법은 서민용인가 봐요. 저는 오늘부터 사기꾼들 염통에 옴이 나기를 축원해야겠네요.”
진경은 수사관과 함께 영상 녹화실을 나왔다. 수사관은 검사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열린 문틈으로 나환금의 뒷모습이 힐끗 보였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면 멱살을 움켜쥘 수 있을 터였다. 분노 게이지가 올라갔다. 그놈의 목을 물어뜯고 싶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마음먹은 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한숨만 내리 쉬었다.
검찰청 밖은 방울토마토만 한 우박과 돌풍이 몰아쳐서 따발총 소리가 요란을 떨고 있었다. 주차장까지 가는 동안에 우산이 여러 번 뒤집혀 간신히 붙들었다. 부러진 나뭇가지들과 임자 잃은 우산이 뒤섞인 채 바람에 나뒹굴고 있었다. 펼침막들이 찢어져 미친 여자의 머리칼처럼 사방으로 날리고 있었다. 진경의 ‘설마 경차’는 곰보빵이 되어버렸다. 길거리는 거대한 주차장으로 변해있었다. 인도에는 사람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진경은 겨울보다 더 앙칼진 꽃샘추위 속에서 그만 방향을 잃고 말았다. 어디로 가야 할까. 도대체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인가.
첫댓글 [전남여류문학] 2022년 연간집에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