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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속에 말씀하시는 분 곧 너희 아버지의 성령이시니라.(마태복음 10장 20절)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디모데후서 3장 16,~17절)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한복음 1장 1절)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고린도전서 3장 11절)
드리는 글
이 글은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느끼고 생각했던 것과, 제가 읽은 여러 ‘성경의 권위에 관한 기독교 서적’에서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을 발췌해 짜깁기한 글입니다. 이 글이 여러분 신앙생활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권위는 구원을 위해 믿고 주장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여러분께 “현대에서는 성경에 입각한 모든 것은 불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하나님의 교회를 떠났던 사람으로서 하나님과 여러분께 참회하며 여러분께 이 책을 드립니다. 그러므로 연약한 저를 보시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 글을 읽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과 함께하시길 기도 드립니다. 아멘.
1980년 6월 4일, 박채동 드림.
참고한 주요 기독서적
* 캘빈 낙스 커밍스 {세례교인 입문서} 최낙재 역.
* 마틴 로이드 존스 {권위} 김성수 역.
*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 {영한대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 나용화 역.
* 김의환 {도전 받는 보수신학}
개혁주의 신앙이란?
개혁주의 신앙에 관해 간략하게 적습니다.
감리교는 ‘죄인의 구원’에, 침례교는 ‘중생의 신비’에, 루터교는 ‘이신득구以信得求’에, 모라비안교는 ‘그리스도의 상처’에 희랍정교는 ‘성령님의 신비’에, 로마교(천주교)는 ‘교회의 보편성’에 각각 치중함과 같이 개혁주의 신앙 최고 사상은 ‘하나님 주권 사상’으로, 이 신앙은 바울, 어거스틴, 칼빈을 통해 전수 받은 ‘역사적 신앙’입니다.
이 역사적 신앙을 이어받은 개혁주의 신학은 성경이 가라는 데까지 가고, 멈추라는 데서 멈추고, 돌아서라는 데서 돌아서는 신학입니다. 다시 적자면, 개혁주의 신학은 철저히 성경에 토대해 생명을 주는 신학으로서, 성경에 의존한 긍정적인 사색이 낳는 적극적인 신학입니다. 즉, 사람의 영광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생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신학입니다.
이런 개혁주의 신학은 ‘인간의 완전 무능력’을 깨달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성 삼위 성령 하나님의 역사’만을 높이는 생동력 있는 신학으로서, 타협 없이 진리를 증거하려는 역사적 보편성, 세계성을 띤 신학(신앙)이자, 닫힌 신학(신앙)이 아니라 열린 신학(신앙)입니다. 그러므로 타협 없이 진리를 증거하려는 개혁주의는 ‘신앙과 신학의 분리’를 배격합니다.
개혁주의 신앙의 주류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도 개혁주의 교회에 속합니다.
성경의 권위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 말을 어떤 의미로 이해합니까? 개혁주의 신자들은 “성경은 영감 됐고, 그러므로 성경은 무오하다.”고 고백합니다.
‘영감 됐다.’는 원의는 ‘하나님으로부터 불러내신 바 됐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개혁주의자)가 “성경은 영감 됐다.”는 것을 고백할 때는, ‘하나님께서 성경 저자들 속에 하나님의 생각을 불어 넣으시사 성경 저자들이 자기들 생각과 마음에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오직 하나님의 생각만을 계시하시는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 감동된 성경 저자들이, 성령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대로 성경을 기록했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성경은 무오하다.”고 고백할 때는 ‘히브리어(구약성경)와 헬라어(신약성경)로 기록된 원 저작들이 아주 오류가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즉,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불완전하고 오류가 있지만, 성경을 기록하는 그들의 과정을 하나님께서 지배(감동)하셨기 때문에 그 기록들이 오류가 없다.’는 뜻합니다.
그런데 현대 많은 개혁주의 신자가 이런 ‘성경의 권위ㅡ성경의 영감과 무오성ㅡ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생활양식이 성경이 기록된 시대와는 다른 점이 많다.”고 말하면서 “성경이 오늘날 생활양식에 맞지 않는 말도 많이 있다. 그러므로 성경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말하는 ‘시간’을 갖고 계시지 않는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이 인간 언어로 기록됐으나, 성경은 완전 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무한하신 하나님 그분 말씀이 유한한 인간 언어로 기록됐으나, 성경은 완전 무오한 진리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세세토록 모든 시대에 걸쳐 진리로 존재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께서는 항상 동일하신 분이심으로, 오직 성경 안에 오류 없이 계시된 그분 원리와 법칙은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성경 전체는 하나님께서 영감하신 하나님 말씀이다.”는 ‘성경의 권위’를 믿을 수가 있을까요? ㅡ지면 관계로 자세한 것은 적지 못함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ㅡ 우리가 성경의 권위를 믿어야 하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해나 의지보다 성경 자체가 그러한 권위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자신이 저자이심을 주장하십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여호와께서 명령하시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는 말씀이 3,800여 회나 사용됐습니다. 구약성경 저자들은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말을 기록함으로써 자신들 기록이 결코 자기 자신들 생각을 적고 있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경에서 성경 자체의 영감과 무오성에 관한 가장 의미 깊은 증거’는 참 하나님이시자 참 인간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계시의 주인이셨던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에 구약성경을 두고 “기록됐으되”라는 말씀을 얼마나 자주 하고 계십니까? “기록됐으되”라는 말씀을 하신 주님께서는 ‘성경의 최종 권위’를 ‘자신의 권위’로 우리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러신 주님께서는 사탄의 공격에 맞서 구약성경에 적힌 하나님 말씀으로 사탄을 이기셨습니다. ㅡ마태복음 4장 3절~10절과 마가복음 12장 26, 27절을 읽어 보시고 그 의미를 신중히 생각해 보십시오.ㅡ 요한복음 10장 34~35절을 보면, 주님께서는 구약성경을 최종이요 복종을 요하는 권위 있는 말씀으로 여기셨기 때문에 그 권위에 호소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 54절을 보면, 이 구절은 ‘주님께서 구약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서 권위를 인정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면 신약성경은 어떻습니까? 주님께서는 구약성경 저자들을 감동하신, 바로 그 성령님께서 신약성경 저자들을 감동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복음 16장 13절. 참고; 마태복음 16장 19절) 그렇다면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 권위를 의지해 하나님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 삼위 성령 하나님 감동하심’(요한복음 16장 13절)과 ‘하나님의 권위’(마태복음 16장 19절)라는 약속을 받은 우리 주님의 사도들은(요한복음 16장 13절. 에베소서 2장 20절) 신구약성경에 관한 가장 명백한 선언(베드로후서 1장 21절. 디모데후서 3장 16절.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 갈라디아서 1장 8절. 베드로후서 3장 15, 16절)을 남겼습니다. 사도들은 보통 평범한 자격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 곧 주님의 사도라는 자격으로 하나님 말씀(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증거는 성경의 내증內證이 또한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실 뿐만 아니라 성경 안에서 그 주장을 실증하셨습니다. 개혁주의 교회 신조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보면 “······ 성경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의 신령함, 교훈의 효과, 문체의 장엄함, 모든 부분의 내용 일치성, 내용 전체가 빠짐없는 완전성, 내용 전체의 목표가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는 것, 인간의 구원을 위해 유일한 길을 밝혀 주는 충분한 내용 전개, 비할 데 없는 여러 가지 우수성들은 신구약성경이 하나님 말씀임을 충분히 자증하는 논증이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기록의 놀라운 ‘조화’와 저변의 ‘통일’을 보십시오. 성경은 36여 명 상이한 저자들이 다른 장소와 다른 시간에 1600여 년에 걸쳐 쓴 66 권의 연합물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관된 ‘조화’만이 있고 혼돈이나 모순이 없습니다. ‘다양성’ 중에도 그 저변에 흐르는 ‘통일’이 있습니다. 구약성경은 ‘오실 구주’를 가르치고 있고, 신약성경은 ‘오신 구주’를 소개합니다. 곧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이러한 논증으로 봐 하나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구약성경은 ‘예언’이요, 신약성경은 ‘성취’입니다. 바꿔 말씀드리자면,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 잠재해 있고, 구약성경은 신약성경에 드러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놀라운 통일성을 놓고서는 오직 한 가지 합리적인 설명이 가능할 뿐입니다. 그것은 ‘고안한 한 마음, 성경을 기록한 한 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나시기 800 년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나실 것과, 그분이 어떻게 어디에서 나시고, 어떤 인물로서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구약성경 이사야 7장 14절, 9장 6절, 53장 5~6절, 미가 5장 2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예언이 완전히 성취된 것을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참고; 요한복음 19:30)
또한 성경 기본(중심) 메시지를 통해 ‘성경 저자들은 자기 생각이 아닌, 하나님의 생각을 기록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우리에게 제공해 줍니다. 성경 중심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성경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위엄과 주권과, 완전히 부패한 인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인간은 완전 부패로 자기 영혼을 관리할 수 없으며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으로만 인간은 구원 받을 수 있다.’는 메시지입니다. 이 중심 메시지는 우리 인간의 생각과 상반됩니다. 그러므로 성경 저자들이 이 중심 메시지를 가르친 것은, 그들 스스로가 가르친 것이 아니요, ‘성 삼위 성령 하나님으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내증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했다.’는 사실에 관한 이런 성경 자체 내증 외에도 성경의 진실됨을 확증하는 고고학 같은 역사의 외증이 있습니다. 외증 몇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성경은 서기관들 복사 오류誤謬와 현대 인쇄술 오탈자誤脫字에도 ‘그 내용만큼은 정확하게 전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 생명력 있는 가르침을 바꾸지 못하도록 초자연의 능력으로 보호하셨음을 증거해 줍니다.그리고 성경이 모든 세기를 통해 없어지지 않고 보존된 것을 볼 때, ㅡ주후 300년 경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안 “모든 성경을 불태워 없애버리라.”는 명령에도 성경을 없애지는 못했습니다.ㅡ 또한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려 성경을 인간의 단순한 작품으로 격하하려는 자유주의 신학자들 교활한 시도가 줄기차게 있었음에도, 오늘날 수많은 사람이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음을 볼 때, 그리고 성경을 통해 죄인 마음을 움직이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을 볼 때,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아니다.”고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 외에도 많은 논증(내증과 외증)이 있습니다만, 생략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사실, 성경의 권위는 그저 단순하게 설명될 수 없는 것이며, 긍극적으로 성경의 권위 문제는 신앙(믿음)의 문제이며 논증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논증에 관한 이 모든 것보다도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고 우리가 충분하게 납득하고 확신하게 되는 것은, 우리 심령 속에서 성경을 가지고 증거하시는 ‘성 삼위 성령 하나님의 내적 사역’에 따른 일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2장 9절~12절)
그런데 어떤 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믿고, 어떤 이들은 성경의 권위를 믿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 때문일까요? 이러한 차이는 성령을 받지 아니해 그 거룩한 글의 광채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소경이며 편견에 사로잡혀 있어서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어 있어서 성경 각 구절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 신자로 하여금 성경에서 하나님의 손을 볼 수 있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참된 하나님 백성은 성경의 권위를 완전히 믿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그분 뜻에 순종합니다.
어떤 자유주의 교회 교인이 “나는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더라도 우리 개혁주의 교회 신자는 전혀 놀랄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특히 개혁주의 교회 목사님들 경우에는 그들이 성경을 믿으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성경의 진리를 부인할 때에는 참된 하나님 백성은 경악을 금치 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백성, 즉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성경의 권위를 믿을 수 없고, 또한 그런 사람에게 성경의 권위를 믿을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 신자로 하여금 성경 자체의 어디서든지 소유했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의 권위를 자유롭게 승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으로, 우리에게는 이제껏 제시해 온 까닭 때문에 사실상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한 쪽에서는 인간의 능력과 이해를 의지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유동적이어서 변할 뿐만 아니라, 불확실하고 불안정해 언제나 무너질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쪽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성경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 있을 뿐 아니라, 세상의 빛이시며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우리 주님,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백성이라면 성경의 권위를 마땅히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우리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법칙’으로서 ‘ 성경의 권위’를 믿을 뿐만이 아니라 ‘성경의 권위’를 지키며 변호하고 주장해야만 합니다.
성경과 로마 천주교
로마 천주교는 많은 오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 예를 나열하자면, ‘마리아 무죄설과 마리아에게 신적 권위 부여’, ‘교황 무오(무죄)함과 신적 권위 부여: 교황의 말이 곧 하나님 말씀이다.’, ‘신구약 성경 66 권의 정경 외에 외경을 더함’, ‘연옥설 주장’, ‘영세를 받은 사람은 모두 구원받음’, 현재는 많이 철회됐지만, ‘성경은 오직 신부 같은 성직자만 읽어야 함’, ‘그리스도 대신에 신부에게 중보 사역 부여’, ‘천주교가 성경을 만듦’, ‘교회ㅡ단 로마 천주교만ㅡ는 무오함’ 같은 주장(교리)입니다. 물론, 이런 로마 천주교 교리들은 성경에 비춰 볼 때 전혀 근거가 없는 교리들입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성경의 권위’ 를 믿지 않습니다. 로마 천주교 교인이 성경에 관해 올바른 인식을 하고 로마 천주교 교리를 살펴보면, ‘로마 천주교에서 가르치는 이런 교리들이 성경에 위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의 권위’에 관심을 갖는 까닭은 복음 전파의 모든 문제가 ‘성경의 권위’와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의 구원과 엵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떠나서 우리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 수 없습니다. 또한 그분 뜻을 알 수 없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려면,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야 하고 그분 뜻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그분 뜻이 계시된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께서 그분 교회에 주신 사명으로서 복음 전파의 일을 바르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성경과 교회
오직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 성경을 조명하셔야만이 하나님 말씀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하셔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바로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그 깨달음이 우리 행위로 열매를 맺지 못할 때는 우리가 깨달은 하나님 말씀은 하나의 글짜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는 개혁주의 교회에서 성경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르치는 것을 들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 기록돼 있는 책이다.” 그런데 이 가르침은 신자들에게 “성경은 하나님 말씀과 인간 말이 뒤섞여 기록된 책이다.”는 자유주의 신학 성경관을 심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는 가르침입니다. 엄격히 말씀드리자면, 이 가르침은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와는 의미가 다른 가르침입니다.ㅡ물론, 성경에는 인간의 말 뿐만 아니라 사탄의 말까지도 기록돼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는, 하와를 시험하는 말로서 사탄의 물음과 이 물음에 대답하는 하와의 말입니다. 그런데 사탄의 물음과 하와의 대답은 진리가 아닌 거짓말입니다. 성경은 ‘사탄의 물음과 하와의 대답이 거짓말이었다.’는 진리, 즉 진리로서 하나님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ㅡ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현재 일부 우리나라 개혁주의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며 세상과 타협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통 보수(개혁)주의 신학을 자랑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도 그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흐름은 잠시뿐일 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보면,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예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써 하나하나씩 철회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경의 권위’를 의심하는 교회는 각성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참 진리는 죽지 않았고, 죽지 않으며 다만 하나님 섭리 가운데 보호돼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뿌리를 떠나서 오래 지탱할 생명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떠나는 순간, 우리 모든 것은 끝나고 맙니다. 참된 교회는 모퉁잇돌이신 예수님을 떠날 수도 없지만, 교회의 터가 되는 신구약성경을 떠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에베소서 2장 20절)
화려한 예배당을 지어 놓고, 많은 사람이 모여서, 다수 의견을 좇아서 평화롭게 교회를 운영해 나간다고 해서 참된 교회가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 뜻이 계시된 ‘성경 중심’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사 마음대로, 장로들 마음대로, 집사들 마음대로, 평신도들 마음대로 하는 곳이 아닙니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으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참된 교회는 오직 하나님 뜻만이 살아 움직이는 교회입니다. 참된 교회는 하나님 뜻이 계시된 성경을 터로 삼아 하나님 뜻을 성취해 나가는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교회에는 ‘나’도 없으며 ‘너’도 없습니다.
교회 발전이나 교회 힘은 결코 교회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한 교회 발전이나 힘은 결코 교인들 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으로 단련이 돼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교회가 아무리 전도를 열심히 하고, 아무리 수가 천 명, 만 명, 백만 명이 될지라도 그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단련돼 있지 않을 때, 하나님 말씀으로 바로 서지 않을 때, 그 교회는 모래 위에 세워진 교회입니다.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런 교회에 거하길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그 교회는 세상과 싸움에서 패배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을 사모하고 하나님 말씀으로 단련된 교회는 비록 수가 적을지라도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에 거하길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결국은 그 교회는 세상과 싸움에서 이기는 부흥(사도행전 2장 47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0절~15절을 보면, 성경은 교회의 활동을 비유해 건축자가 건축하는 일로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장 11절에서 주님의 사도는 ‘이 건축자가 건축물을 세울 터는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다른 터가 없다.’고 우리를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터로 삼지 않는 교회의 활동은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바꿔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철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터 위에서 믿음의 모든 역사를 이루며 나아가기를 힘써야 합니다. 마치 설계도에 의지해서 짓지 않은 건축물이 준공 검사를 받을 수가 없는 것과 같이 성경을 떠난 모든 믿음의 역사는 하나님께 용납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는 많은 생각과 의견을 발표하고 노력합니다. 참 좋은 현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한다는 교회의 사업, 활동이 참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합니다. 무엇에 잘못이 있었을까요? 하나님 영광을 위한 우리들 의견과 노력이 하나님보다 앞섰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그 의견과 노력이 하나님 뜻이 아닌 바로 우리 인간 이성과 의지에서 나왔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면서 기도하며 하나님 뜻을 살피는 하나님 백성’을 ‘하나님 영광이라는 참된 열매’를 맺는 종으로 쓰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일을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 말씀을 기초로, 깨달은 하나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께 아뢰는 기도보다 우리 생각과 행동이 앞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영광을 위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을 상고하며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께서 모든 행사를 주장하시기를 바라며 일을 할 때 참 열매를 못 맺을 까닭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 위에 바로 서야 합니다. 우리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우리가 하나님 뜻을 깨닫도록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 조명해 주시기를 구하며 하나님 말씀을 상고합시다. 성경을 상고합시다. 우리는 우리 모든 행사를, 하나님의 모든 사업을, 자기 자신을 하나님 말씀으로 진단해야만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이 우리 이성과 행사를 지배하고 조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그분께서는 우리 자신의 이성이나 의지로 하나님 영광을 위해 애쓰는 사람을 그분 그릇으로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으로 단련된 사람을 그분 그릇으로 쓰십니다.
지금 많은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와 주 하나님의 관계에서 성경과 위배되는 모든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 이성이나 의지를 하나님 말씀, 성경보다 우위에 두는 세상과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된 하나님 자녀들이라면,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짓밟는 세상의 위협에 저항해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를 지키려고 애씁니다. 참된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 말씀을 불신하는 세상 사조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일에 애쓰면서 성경의 굳건한 반석 위에 그들 신앙을 세운 사람들입니다. 비록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교회에 수많은 사람을 모이게 하거나 화려한 예배당을 짓거나 하는 일 같은 큰 열매를 맺었다고 하더라도, 그 열매가 하나님 말씀의 나무에서 맺힌 열매가 아닐 때, 그 열매는 참 열매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열매는 사탄의 기쁨(비웃음)의 식탁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보잘 것 없는 열매라고 하더라도 그 열매가 하나님 말씀의 나무에서 맺힌 열매일 때, 그 열매는 당연히 하나님 기쁨의 식탁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열매가 사탄 비웃음의 식탁이 아닌 하나님 기쁨의 식탁에 놓이기를 바란다면, 마땅히 하나님 말씀 안에서 열매를 맺어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교회는 하나님 말씀으로 교회를 단련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에 관한 무지는 하나님 심판(징계)을 자초하는 큰 죄입니다. 알면서도 저지른 죄는 그 행함에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나 무지 때문에 저지른 죄는 그 무지라는 죄로 심판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교회 회의
교회 회의는 교회에 관한 것 이외는 다뤄서는 안 됩니다. 즉, 교회 회의는 하나님 영광을 위한 회의가 돼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에 앞서 ‘어떤 일이 하나님 말씀에 합당한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교회의 모든 일이 하나님 뜻에 부합하는지?’ 하나님 말씀으로 신중히 진단해야 합니다. 이로써 어떤 의견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할 때는 그 의견이 우리 이성에 맞지 않다고 해도, 우리는 그 의견이 하나님 말씀을 근거로 하는 까닭 때문에 그 의견을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결정권은 목사가 아니, 장로가 아닌, 전도사가 아닌, 교인들이 아닌, 하나님 말씀인 성경이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자기 이익을 위해 그리스도와 성경을 저버린다면, 이 무슨 꼴입니까? 왜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자기 이익을 위해, 자기 명예를 위해 세상 비웃음의 식탁에 올려놓습니까? 우리나라 교회나 교단 정기총회 때 임원 선거로 교인들 사이나 목사님들 사이에 분열, 불화가 있습니다. ㅡ물론, 지난해 가을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정기총회에서 보여준바 우리 교단도 예외는 아닙니다.ㅡ 어디에 문제가 있습니까? 분열 그 자체의 문제를 말하기 전, 분열하지 않는 방법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자기 이익이나 자기 명예를 하나님 말씀 위에 두는 악습을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갑시다’ !
우리나라 대다수 교회가 ‘교회 문제를 해결하는 권위로서 성경’에 호소하지 않고 ‘성경의 권위’를 저 버리고 있습니다. 즉, 교인 대다수 의견에 호소합니다. 교인 대다수 의견이 교회 문제를 해결하는 권위가 돼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다.”(이사야 55장 8절)
‘우리 생각과 길’이 ‘’하나님 생각과 길’처럼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성경의 권위’에 호소하며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회의 원칙은, 다수결로 결정된 문제라고 하더라도 그 결정이 하나님 말씀에 위배될 때에는 의장은 그 결정에 유효 선언을 할 수 없습니다. 만약 유효 선언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 결정은 교회에서 아무 권위도 없습니다. 즉, 성경에 근거한 어떤 의견이 우리 인간의 논리, 이성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의견을 버리고 우리 인간이 고안한 논리에 맞는 의견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서, 신앙의 양심으로 그 결정을 마땅히 저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사람 마음대로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교회는 어떤 교인이 어떤 의견을 냈을 때 그 의견이 하나님 말씀에 근거한 의견, 정당한 의견이라면 반드시 들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의견이 하나님 말씀에서 떠났을 때는 이를 하나님 영광을 가리는 의견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견을 낸 사람을 권징하는 일까지도 각오하고 그 의견을 당연히 저버려야 합니다. 교회는 진리 문제에서 피해를 보는 일이 있더라도 한 걸음도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됩니다. 성경보다 인간 이성을 우위에 두는 세상과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종종 세상의 방법을 쓰곤 합니다. “시대에 뒤떨어진 방법으로는 전도가 안 되니까, 새로운 전도 방법을 궁리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한다는 점에서는 세상의 방법도 좋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천국의 일을 하시면서 세상의 방법을 쓰신 사실이 있었습니까?
전도에서 우리는 한 영혼이라도 우리 힘으로 하나님 품에 인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이 생각은 아주 잘못된 생각, 성경에 위배된 생각입니다. 물론, 그 까닭은 우리 힘으로는 한 영혼도 감동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기 한 영혼도 관리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로마서 6장 23절. 요한복음 6장 44절. 에베소서 2장 2, 5절. 디도서 3장 3, 5절) 한 영혼을 감동케 하는 일은 오직 성 삼위 성령 하나님께서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절대 무능력입니다.
교회는 인간의 의견이나 지식이 아닌 하나님 말씀으로만 운영되는 순결한 곳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순결성을 지키려는 참된 교회는 여러 가지 의견을 하나님 뜻, 하나님 말씀에 기준해서만 결정하는 교회입니다. 올바른 교회 회의가 이뤄지려면, 우리는 우리 지식이나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생명의 길로, 주님의 좁은 문으로 인도하는 성경, 그 성경을 깨닫게 하시는 그분의 영, 성 삼위 성령 하나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머리이신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합니다.
성경과 교회 연합
한국기독교장로회나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은 ‘성경의 권위’를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은 우리 신앙의 선조 개혁주의자들이 고백해 온 신앙고백, ‘성경의 권위’를 드높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 같은 개혁주의 교회의 공公 고백, ‘하나님 말씀 위에 선 순수한 신앙’의 ‘공公 고백’을 뒤따름으로써 우리 신앙의 순결을 보전해야 합니다. 이로써 비 진리와 이단(사탄)의 미혹에서 우리 신앙을 지켜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나라 교회가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에 의거한 일치(에베소서 4장 13절)가 아닌 겉 모양만의 일치는 회칠한 무덤과 똑같습니다. 오직 참 하나님이시자 참 사람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교회 연합의 모퉁잇돌이 되시며 신구약성경이라는 하나님 말씀만이 교회 연합의 터가 돼야 참된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영광을 위해 우리나라 교회 연합을 바란다면, 우리 신앙의 선조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부르짖으며 제자리에 올려놓은 ‘성경의 권위’를 지켜내야만 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지켜냄으로써 “주님께서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는 고백이 모든 교회 고백이 돼야만 합니다. 이 참된 고백의 터 위에서 교회의 참된 연합이 있을 뿐입니다.
글을 맺으며
저는 입으로는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 실생활에서는 무신론자처럼 행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사실, 저는 이 글을 여러분께 드릴 수도 없고, ‘성경의 권위’를 주장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어찌보면, 비록 짜깁기 글일지라도 저 같은 자가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글을 쓰는 자체가 교만입니다. 실생활에서는 무신론자처럼 행하면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저는 그 누구보다도 교만한 사람입니다. 그러함에도 이 글을 여러분께 드리는 교만을 저지르는 것은 이 글은 한마디로 ‘저를 하나님께 고소하는 고소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하면 그대로 따라가고 자기에게 유리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무시해 버려도 좋을만한 충고 정도로, 성경을 이 세상 도덕 책 정도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권위 때문에 성경은 우리 삶에서 우리가 충실히 머리를 숙여야만 하는 절대의 책, 유일한 책입니다. 우리가 우리 삶에서 성경을 이 세상 도덕 책 정도로 여긴다면, 우리에게서 성경은 ‘죽은 글짜’를 기록한 책에 지나지 않습니다.
글을 맺으면서 덧붙이고 싶은 말들이 있습니다. 그 말 하나는, ‘우리는 하나님의 사자이신, 하나님 뜻을 가장 잘 아시는 목자에게 말씀 안에서 순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목자를 따르는 양떼의 의무입니다.(베드로전서 5장 5절~6절) 그리고 양떼는 목자 연약성을 비판해서는 안 됩니다.(참고; 로마서 14장 4절). 물론, 목자는 목자장이신 주님 말씀이 풍족한 푸른 초장으로, 바른 길로 양떼를 인도해야 합니다.(베드로전서 5장 1절~4절) 또한 우리는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는 정통 개혁(보수)주의 교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에 속한 목포 시온교회 교인인 것을 하나님께 감사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참 열매는 참 나무에서만 맺히기 때문입니다.
글을 맺으렵니다. 하나님의 많은 자녀들이 타락한 세상을 거스르지 못하고 하나님 말씀과 반대되는 길을 가고 있는 이 참담한 현실 속에서 우리 목포 시온교회는, 우리나라 모든 교회는 하나님 말씀에 비춰 봐도, 하나님께서 보셔도 참된 교회로 인정받기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랍니다. 즉, 하나님 말씀을 사모해 주야로 상고하며 전파하는,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서 서는 성도가, 목포 시온교회가, 우리나라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의 반석 위에 굳건히 선 이런 성도만이, 이런 교회만이 거룩한 새 하늘과 새 땅 시온성의 영광스런 잔치에 ‘부끄럼 없이’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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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쓰게 된 배경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 이 글은 내가 목포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1980년 5월, 이른바 “광주사태” 때 있었던 2 주라는 휴강 기간 때 쓴 글이다. 나는 그때 무교회주의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1979년 부활절에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모母 교회, 목포 시온교회를 떠나 있었다. 1979년 가을에 있었던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제64회 총회에서 합동이 분열하고, 그 여파로 터진 목포 시온교회 분란을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목사님과 장로, 집사님들 고성과 욕설이 오가는 이 분란을 목격한 나머지 충격을 받은 나는, 내 부패성보다도 교회의 부패성을 절감한 나머지 ‘다시는 그 어떤 교회도 다니지 않고 혼자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무교회주의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고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나처럼 목포 시온교회를 떠나신 분도 계셨고, 로마 천주교로 개종하신 내 친구 어머니도 계셨다.
그런데 잘못된 마음을 고치게 된 계기가 있었다. ㅡ그 계기는 신비체험과 관련된 것임으로 생략한다. 물론, 생략하는 까닭은 우리의 삶에서 유일한 권위는 성경이기 때문이다. 즉, 모세와 선지자에게 듣지 아니하면, 성경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아니하면, 우리 삶에서 그 어떤 기적도, 신비체험도 무용지물이기 때문(누가복음 16장 31절)이다.ㅡ 이 계기로, 개혁 교회의 ‘(보편)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 ‘어머니 품으로서 교회론’을 생각하며 나는 광주항쟁 휴강 기간 동안 이 글을 썼다. 그리고 이 글을 100 부 복사해 목포 시온교회 고등부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다시 목포 시온교회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게 됐다.
1980년 6월 4일에 복사했던 10 쪽으로 된 글로서, 많은 부분 내가 읽은 기독교 서적에서 발췌해 짜깁기한 글이었지만,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다.]는 내 첫 책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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