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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명정사
 
 
 
카페 게시글
선- 개론,심층고찰 스크랩 禪佛敎 공부 3
원명 원적 추천 0 조회 54 18.09.30 14: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禪佛敎 공부 3


지구일척안只具一隻眼 네 놈은 애꾸눈이다.

 

어느 날 臨濟院을 찾아온 보화화상에게 臨濟義玄禪師가 특별히 상을 차려 供養대접을 했다. 보화는 밥은 안 먹고 채소 반찬만 다 먹어 치웠다

臨濟無意識중에 한마디 했다

꼭 당나귀 같군!” 


普和는 곧바로 상에서 물러나 땅에 두 손을 짚고 애해앵하며 당나귀 울음을 울어댔다

臨濟는 말문이 막힌 채 우두커니 쳐다만 봤다

마침내 普和一喝했다.

 

임제소시아臨濟小廝兒 지구일척안只具一隻眼

네놈은 아직 젓 비린내도 가시지 않은 애꾸눈의 어린애구나"


普和밝음이 와도 쳐부수고 어둠이 와도 쳐 부순다고 외치면서 거리를 누비고 다녔다.

臨濟의 上佐는 普和한테 가서 물었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것은 어떻게 합니까?

 

普和가 답했다.

來日은 대비원臨濟院에서 供養이 있다.”

 

내일 臨濟院供養이 있다普和對答人間에게 오직 確實한 것은 지금, 여기에 살고 있다는 實存밖에 없음을 뜻한다. 사람은 어디서 태어나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자신 있게 對答할 수 없다. 오직 여기 現在實存만이 分明할 뿐이다.

 

普和臨濟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에서 애해앵하며 당나귀 흉내를 냈다

이에 대해 禪師다운 面貌對應해야 할 臨濟가 멍하니 쳐다보며 無反應이다

여기서 普和는 한 대 먹인다.

너는 아직 젖 냄새가 나는 어린애다

나를 당나귀로 본 것은 一隻眼(事物本體를 꿰뚫는 제3의 눈, 法眼, 智慧眼)을 겨우 갖춘 程度일 뿐이다. 그러니 臨濟, 너는 아직 당나귀나 돌보는 머슴아이 水準밖에 안 된다.

 

普和임제소시아臨濟小廝兒 지구일척안只具一隻眼속에는 臨濟’, 너는 本分으로 완전히 돌아간 당나귀가 되려면 풀을 더 뜯어 먹고 커야 한다는 질타叱咤內包되어 있다

臨濟普和가 당나귀 흉내를 낼 때 飛虎같이 달려들어 엉덩이를 짓밟았어야 했다.

 

에서 외눈박이(일척안一隻眼)世俗的不具의 애꾸눈이 아니다

人間의 깊숙한 內面을 보기 위해서는 두 개의 눈이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內面을 볼 수 있는 눈은 법안法眼 하나, 의 눈, 3의 눈 하나일 뿐이다

흔히 심안心眼이라 일컫는 智慧眼을 뜻한다.


또 당나귀는 에서는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本來面目, 또는 智慧象徵한다

는 시중드는 어린아이, 곧 몸종이다.

 

어쨌든 普和風光으로 臨濟꼭 당나귀 같다攻擊을 받아 넘겼다

아니 슬쩍 피해 갔다

普和에게는 오늘의 供養이 내일, 또는 어제의 食事比較되는 單純觀念이 아니다

당나귀(智慧)는 그런 分別을 하지 않는다.

 

오직 지금 배가 고프기 때문에 生存이라는 實存을 지탱支撐하기 위해 풀을 먹을 뿐이다.

정말 迫進感 넘치는 드라마요, 한 소식이다

人間에게 라는 實存은 이처럼 긴박緊縛하고 切實한 것이다

배고픈 당나귀가 풀을 먹어 치우듯이 속진俗塵煩惱를 없애지 않고는 眞情實存이란 있을 수 없다.

 

普和臨濟가 한 信徒집의 供養 招待에 갔다

밥상을 마주한 臨濟가 입을 열었다.

 

: 한 가닥의 머리털이 큰 바다를 삼키고 한 알의 겨자씨에 수미산을 집어넣는 게 神通인가아니면 眞如本體인가?

: (普和는 느닷없이 眞髓盛饌이 차려진 밥상을 발길로 차 엎는다.)


: 너무 거칠지 않소?

: 여기가 어디라고 거칠다느니 세밀하다느니 떠드는 것이냐?

 

佛法眞理는 그따위 觀念的겨자씨 이야기거칠고 細密區別에 있는 게 아니다. 佛法은 오직 지금 여기 施主者가 차려준 食卓위에서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이는 四方 일장인 유마의 방이 대소, 추세趨勢差別超越無限絶對空間 이었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이다.


다음날 普和臨濟가 함께 臨濟院에서 再供養을 했다.


임제 : 오늘 供養은 어제와 比較해 어떻소?

보화 : (전날과 똑같이 밥상을 뒤집어 엎어버린다.)


임제 : 좋긴 하오 마는 너무 거칠군요!

보화 : 이 눈먼 놈아. 불법에 무슨 거칠고 세밀함이 있다고 떠드는 것이냐?


임제 : (급기야 혀를 절래 절래 내두른다.)

 

보화의 言行平常人意表를 날카롭게 찌른다. 平生 거칠기로 有名했던 臨濟도 어디에서건 간에 ‘추세趨勢區分하는 2분법적인 思考容納될수 없다는 普和의 단호함에는 를 못 펴고 말았다.


그는 旣成의 노후老朽價値2분법을 깨부수는 데 佛法本質이 있고 追求하는 根源的 自由란 것도 바로 이같은 파괴성破壞性이라는 소식을 전해 준다

사람들이 솔깃하는 神通이나 奇蹟普和에게는 한낱 웃기는 잠꼬대에 불과할 뿐이다.

 

풍전風顚과 괴팍함은 多樣性. 創造性源泉이다.

英國의 에딘버러 大學의 위크스 敎授10년간 1천명의 괴짜를 硏究結果는 아주 興味롭다.

 

괴짜들은 勇氣있게 自己個性을 내세우고 開放的이고 率直하고 樂觀的이다

그들은 틀에 얽매이기를 拒否하고 創造的이고 好奇心이 많고 理想主義的이다.”

 

禪師들이 보여준 風光과 치둔癡鈍(어리석은 체 함)은 그 속에 모두 이같은 괴짜들의 特性을 담고 있다. 괴짜가 없는 社會劃一化 되고 만다.

 

社會創造的 活力多樣性으로부터 나온다

多樣性이란 곧 自由

風光을 통해 追求하는 自由도 바로 이같은 多樣性이다.


禪師들의 風光을 절대로 誤解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결코 精神 異常者가 아니다.

오직 旣存의 낡은 틀을 깨부수려는 말썽꾸러기일 뿐이다.


황벽불법무다자黃檗佛法無多字 황벽의 불법은 간단명료하구나


: 黃檗禪師로부터 어떤 가르침을 받았는가?

: 佛法根源을 세 번이나 물었는데 그때마다 몽둥이로 얻어맞는 경책警責을 받았습니다제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 지금까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것은 네가 모든 執着煩惱에서 벋어나도록 도와주려 애쓴 스승으로서의 懇曲老婆心이요가르침 이었는데 그런 스승의 親切한 가르침을 모르고 자신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물으러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 (臨濟는 이 말에 홀연히 깨닫고) !, 

스승 黃檗和尙佛法이 이처럼 簡單明瞭할 줄이야

 

臨濟義玄禪師(? - 866)東亞細亞 禪佛敎의 우뚝한 봉우리다

11世紀 이후 ..3국의 禪佛敎는 사실상 臨濟義玄開山祖臨濟宗 天下統一되었다. 禪林은 흔히 이같은 臨濟禪天下 制覇臨濟宗 天下 曹洞宗 한구석(臨天下洞一隅)이라는 表現으로 要約된다.

 

臨濟宗馬祖道一大師(709-788)때부터 本格化祖師禪의 가장 强力하고 充實後繼者라 할 수 있다.

臨濟宗家風特徵으로는 革新性, 人間尊嚴性强調, 電光石火, 痛快, 激烈함 등을 손꼽는다.


臨濟의 괭이라는 話頭는 이제까지의 이야기를 總整理하는 압축판壓縮板이다.

 

어느 날 黃檗方丈 以下 온 대중이 밭갈이 普請에 나섰다

黃檗이 뒤를 돌아보니 다른 사람은 모두 괭이를 들었는데 臨濟만이 빈손이었다.

 

: 자네는 괭이를 어디에다 두었는가?

: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갔습니다.


: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 일을 너와 한번 상량商量해 봐야겠다.

: (臨濟黃檗 옆으로 다가갔다.)


: (黃檗이 괭이를 세우더니) 이 괭이는 혼자섰다

     天下 누구도 이 괭이를 들어 올릴 수 없다.

: (臨濟黃檗이 손에 쥐고 있는 괭이를 빼앗아 세우고는)

     어째서 지금은 괭이가 제 손안에 있습니까?

 

얼핏 보기에는 어린애들 장난 같다

그러나 이 禪問答人間主體性强調하는 엄청난 아포리즘(깊은 체험적 진리를 간결하고 압축된 형식으로 나타낸 짧은글)內包하고 있다


괭이는 사람마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佛性(自性. 眞如)象徵 한다

다른 사람이 가지고 갔다에서의 다른 사람은 臨濟後日 거듭 力說臨濟禪核心思想인 참사람(眞人), 즉 깨달음 이라는 關門通過主體的 自我를 말한다

臨濟의 저 有名無爲眞人은 그 基本的 發想이 여기에서부터 나왔다.

 

君子는 주인의 許諾을 받지 않고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대지 않는다

그러나 小人은 그렇지 않다

자물통이 채워진 倉庫物件도 수를 窮理해서 훔쳐내 자기의 손에 넣고 만다.


君子가 중히 여기는 것은 이고 小人이 중히 여기는 것은 智慧

을 중히 여기면 自我制限하게 된다

智慧를 중히 여기는 小人은 자신의 必要充足시키는데 온 힘을 쏟는다


潙山이 말하는 小人君子道德的 意味用語가 아니다

단지 小人智慧 中心的思考行動이 모든 束縛一擧에 걷어버릴 수 있다는 心靈상의 自由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黃檗이 괭이를 세웠을 때 見性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그 行動 속에 무슨 深奧道理가 있으리라 여긴다. 또 온갖 思慮動員해 그 行爲속의 意味를 찾으려고 애쓰기 십상이다.

 

그러나 깨달은 사람은 黃檗禪師天下에 아무도 이것(괭이, 불성)을 들 사람이 없다고 한 말이 바로 問題核心이자 解答이라는 것을 간파看破한다. 따라서 군더더기에 不過한 모든 생각을 버리고 단숨에 그 괭이를 움켜쥔다. 이것이 곧 黃檗이 내놓은 問題에 대한 簡單明瞭對答이며 問題解決 方法이다.

 

은 이같이 知見(知識을 앞세워 事物觀察)과 사려思慮를 통해 問題를 바라보는 行爲徹底排擊한다. 바꾸어 말해 問題를 간단히 그리고 直接的으로 解決하는 簡素化單純性을 드러내 보이는 行爲. 에서는 事物本質無視하고 그 外形的理解만을 追求하는 方式禁忌視 한다. 事物本質直接 맞닥뜨릴 것을 要求한다.

 

完璧道德的 行爲俗世에서는 높은 價値일 수도 있다

그러나 道德은 어디까지나 慾望에 대한 制限裝置不過할 뿐이다.

 

사람이 絶壁위에서 떨어지면서 아무리 自身墜落을 늦추려고 해봐도 결국 無爲에 그치고 만다. 이는 道德慾望 節制가 아무 效力이 없음을 比喩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道德을 따르고 그 準則을 위하여 천 번 만 번 思慮를 거듭하는 君子眞正意味에서 智慧貧困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道德根本的으로 人類에게 自由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이런 意味에서 禪佛敎는 전혀 새로운 角度에서 人間自由接近하는 一種신사회학新社會學이라고 할 수 있다.


禪佛敎가 지니고 있는 非道德主義的 特徵慾望本質徹底히 깨닫고 慾望으로부터 自由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事物直接 對面하고 眞情解放自由境地로 나가게 한다.


臨濟는 스승 黃檗의 괭이를 빼앗으므로 이같은 人間解放絶大 自由를 소리 높여 외친 것이다.

 

다음은 나라 때의 한 比丘尼가 지은 것으로 禪宗史에서 높은 平價를 받고 있는 禪詩이다. 학림옥로學林玉露라는 宋代 佛書收錄되어 있는 이 大禪智識들의 開悟詩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有名한 오도송悟道頌이다. 作家身元未詳으로 모니某尼라고만 되어있다.

 

진일심춘불견춘盡日尋春不見春 하루 종일 봄을 찾아 헤매었으나 봄을 보지 못했네

망해답파농두운芒鞋踏破隴頭韻 

    짚신이 다 닳도록 구름 덮인 농두산 꼭대기까지 헤매었지만

귀래소접매화후歸來笑拈梅花嗅 돌아와 뒤뜰의 활짝 핀 매화꽃 향기를 맡으니

춘재지두이십분春在枝頭已十分 봄은 이미 매화나무 가지 위에 십분 무르익어 있더라.


부처를 밖에서 구하지 말라이 누누이 强調하는 말이다

衆生이 곧 부처고, 내가 곧 부처이니 자신의 內面省察해 내면자증內面自證하라는 게 說破하는 佛法見性의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經典上으로는 華嚴經의 선재동자善財童子 이야기가 이같은 內面自證代表한다

모든 佛法出發點歸結點은 자신의 內面省察로 모아진다.

 

장황한 華嚴經敎說禪學의 갖가지 說破를 단 287言節句로 쉽게 壓縮해 드러내 보인게 이 比丘尼偈頌이다는 사람의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을 平凡日常 속의 예(매화꽃)로 머리에 쏙 들어오게 읊조렸다.

 

禪師와 비구니의 問答 하나를 더 살펴보자.

 

: 네 이름이 뭐냐?

: 현기玄機라고 합니다.


: 그 베틀에서는 하루에 베를 얼마나 짜느냐?

: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았습니다.


: (比丘尼가 절을 올린 후 물러나 세 발짝쯤 걸어갔을 때) 袈裟가 땅에 떨어졌구나!

: (比丘尼가 고개를 돌려 自己袈裟자락을 본다)


: 그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라더니 그 꼴이 참 좋구나.

 

玄機라는 比丘尼雪峰義存禪師(822-908)讖文禪問答이다

話頭로는 촌사불괘寸絲不掛라 하고 실오라기 하나도 몸에 걸치지 아니하였다는 뜻으로, 조금도 마음에 걸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이다


玄機8세기 초(710-711) 대일산으로 出家

得道한후 영가진각선사의 弟子가 되어 절강성 온주에 主席比丘尼 禪師이다.

 

雪峰남설봉南雪峰 북조주北趙州라는 평을 받으면서 唐末 江南 禪佛敎를 주름잡은 禪杖이다. 복건성 雪峰山 숭선선사에 主席雪峰禪師와 하북성 趙州 관음원(현 백림선사)趙州禪師黃金時代9世紀 禪林代表하는 巨木이었다.

 

禪師들이 흔히 묻는 이름이나 어디서 왔느냐는 出發地本來自己面目

父母한테서 태어나기도 전의 存在根源象徵한다

단순한 世俗的 이름이나 法名, 地名, 절 이름이 아니다. 學人慘聞할 때 흔히 걸려드는 첫 번째 關門이 바로 이같은 象徵性을 갖는 이름出發地

 

현기玄機란 이름은 글자 그대로 神奇한 베틀이라는 뜻이다

대단한 織造機라는 비구니의 이름 玄機에는 한 소식 했다는 自負心禪者의 가르침을 消化할 기봉機鋒을 갖추고 있다는 능력과시能力誇示를 함축含蓄하고 있다.

 

雪峰은 그렇다면 그 神技한 베틀은 하루에 얼마나 되는 양의 베를 짜느냐, 煩惱 妄想의 반연攀緣(對象에 이끌리는 마음의 作用)을 얼마나 짜내고 있느냐고 묻는다.

 

比丘尼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는 베틀이라고 뻐긴다

一體煩惱妄想을 벗어난 解脫의 베틀이요, ‘無心道人이라는 自慢이다

모든 반연攀緣을 끊어버린 알몸의 玄機라고 으시대는 比丘尼雪峰의 단 한 마디에 들통이 난다. 比丘尼가사가 벗겨져 땅에 떨어졌다니까 고개를 돌려 이를 確認한다


眞情으로 無心의 알몸이라면 옷이 벗겨져 裸體가 되었다는 指摘神經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실오라기가 아니고 무엇인가. 자기 스스로가 裸體라고 宣言해 놓고 옷이 벗겨졌다니까 裸體인지 아닌지를 確認하려 하고 알몸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矛盾을 보였다. 眞情 알몸이라면 가사袈裟가 벗겨졌든 속옷이 벗겨졌든 무슨 相關이겠는가. 원래 裸體였고 입은 게 없다는데 말이다.

 

比丘尼袈裟 長衫에 속옷까지 덕지덕지 입은 妄想투성이로 와서는 觀念的이지만 스스로를 알몸이라고 내세웠던 것이다. 結局에 단 세 발자국도 못 가서 밑천이 드러나고 말았다. 이것이 雪峰一喝內用이다.

 

그래 꼴 좋구나

걸친 袈裟를 찾고 있는 그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란 말이냐

진짜 알몸이라면 陰部가 드러났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마음을 비워 自身의 모든 것을 宇宙라는 絶對自由空間에 내던진 衲僧의 낙처落處인 것이다.

 

雪峰은 내심 타이른다

땅바닥에 떨어진 袈裟를 찾는 정도의 알몸이라면 큰 방에 들어가 參究나 더 하라

그 따위 觀念的 解脫自己 欺滿이고 詐欺에 불과 하다고

眞情으로 한 티끌의 속진俗塵도 묻지않은 心身 解脫의 알몸은 네 옷이 벗겨졌다해도 裸體를 부끄러워하는 世俗的 感情이 있을 수 없다.

 

臨濟 역시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마음의 본바탕인 淸淨性絶對自由性을 잃지 말아야 함을 强調한다. 마음은 눈에 보이진 않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는 人間 存在의 바탕이다.


臨濟는 마조의 充實後繼者로서 祖師禪發展시켜온 심지법문心地法門을 한층 더 赤裸裸하게 說破했다.

 

佛家傳統的으로 가장 理想的인 마음의 씀씀이를 에 비유해 形象化 시켰다

臨濟도 소를 예를 들어 無心境地라는게 어떤 것인가를 說破 한다

다음의 소에 比喩禪問答을 보자


露地白牛 빈터의 흰 소

 

: 여하시로지백우如何是露地白牛 어떤 것이 빈터의 흰 소인가?

: ~ , ~


: 자네 벙어리인가?

: 자네는 어떠한가?


: 이 짐승아!

 

臨濟義玄이 묻고 행산감홍杏山鑒洪이 답한 禪問答이다.

語錄에 나오는 白牛, 또는 수고우水牯牛 등의 소는 본바탕의 마음(心地)象徵한다

빈터(露地)生死火宅을 벗어난 解脫, 白牛는 불도佛道象徵한다.

그러나 에서는 心地淸淨한 진인眞人. 심우心牛意味를 갖는다.

 

원래 은 마음을 動物遺産으로 본다

思量分別心과 오만 생각을 일으키는 그 마음을 넘어서지 못하면 眞情人間이 아니다.


馬祖즉심즉불卽心卽佛 마음이 곧 부처라고 했다가 완전히 깨우친 사람은 깨우쳤다는 생각까지도 버리는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한 것이 바로 마음을 버리는, 마음을 비우는 無心境地를 두고 한 말이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非心非佛境界라야 動物과 다른 깨우친 사람인 것이다.

 

無心이 되어야만 過去 動物遺産超越하고 宇宙를 향해 가슴을 활짝 열어 놓은 마음을 비운 사람이 된다.


臨濟가 행산에게 이 짐승아!’라고 한 것은 非難이라기보다는 소 울음소리를 낸 건 動物의 마음을 쓰고 있는데 不過하다는 指摘이다.

 

格式이나 慣習, 慣行과 같은 社會的 制約에 얽매이지 않는다

에는 판에 박힌 形式, 만트라(주문)도 없다.

은 희생犧牲强要하지도 않고 반드시 遵守해야 할 巨創原則을 내세우지도 않는다.

오직 스스로 길을 發見하는데 도움이 될 方便提供할 뿐이다

말하자면 1백퍼센트 自由를 보장하는 셈이다.

 

그런데도 다른 어느 宗敎보다도 깨우친 사람을 많이 排出했다

逆說的으로 成功秘訣完全自由를 보장, 괴짜적인 創造性開發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스로의 自我發見核心이다.

 

過去動物的 遺産淸算하고 眞情人間이 되는 것은 進化論的 發展이라기보다는 하나의 創造이다.

 

禪家에서는 한 잔의 차()無我을 구족具足하고 향 한 개비 타는 속에다 全宇宙를 불사른다. 그리고 世上에서 가장 작은 씨앗이라는 겨자씨 한 알에다 크나큰 수미산을 집어넣는다. 神奇하거나 異常妖術을 부리는 것이 아니다.

마음 한 자락을 어떻게 펼치느냐에 따라 차 한 잔, 향 한 개비, 겨자씨 한 알의 役割이 달라진다.

 

趙州 禪師露地白牛를 보자

 

: 빈 터의 흰 소 란 무엇입니까?

: 달빛 아래서는 흰색도 필요 없다.


: 흰 소는 무엇을 먹습니까?

: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무것도 씹을 수가 없다.


: 제발 좀 가르쳐 주십시오.

: 늙은 중인 나도 바로 그대로일 뿐이다.

 

質問을 한 學人趙州露地白牛달빛(月光)’比喩했는데도 理解하질 못한다

달빛 아래서는 흰 것이 아니더라도 희게 보인다. 정말로 마음을 비운 무사無事道人의 

至極境界에서는 佛性이니 깨우침이니 하는 것도 다 쓸데없는 無用之物이다.

 

달빛은 깨우침을 통해 證得般若智慧象徵한다

희고 흰 달빛 같은 마음은 아무리 검은 칠을 해놓은 데 비쳐도 本來性品대로 흰색이다.

 

趙州'露地白牛라는 佛性, 眞如, 自性, 般若, 眞人正體아무것도 먹지 않는다는 한마디로 具體化 시켜 가르쳐준다. 眞如는 어떠한 것에도 물들지 않는다.

 

마지막 對答 나도 바로 그렇다露地白牛를 더 이상 말로 說明할 수 없으니 너를 잘 살펴보라는 이야기다. 이 말은 나 趙州露地白牛境界를 이룬 사람이니 말을 통한 說明이 아니라 마음으로 살펴 알아차리라는 고불古佛로서의 親切을 베푼 것이다.

 

禪學的으로 露地白牛涅槃證得했다 해도 그 涅槃에 조차 執着하거나 머물지 않고 卽刻 버리는 마음을 비운 공世界를 말한다.

이를 부주열반不住涅槃, 또는 무여열반無余涅槃이라 한다.

 

百丈과 대안의 露地白牛問答趙州臨濟보다 時間上으로 한 발 앞선 것이다.

 

: 부처란 어떤 것인지를 알고 싶은데 좀 가르쳐 주십시오

: 흡사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격이구나.


: 안 뒤에는 어떠합니까?

: 소를 타고 집에 돌아간 것 같다.


: 처음과 마지막에 어떻게 補任해야 합니까?

: 소 먹이는 사람이 채찍을 들고 지켜보며 남의 穀食밭에 들어가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스승 百丈弟子인 대안에게 마음가짐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준 簡明禪問答이다. 부처란 자기 자신인데 부처를 客觀的으로 對象化해 놓고 찾는 일은 소 위에 타고 있으면서 소를 다른데서 찾으려는 것과 같다는 이야기다

百丈眞情한 마음의 本體를 깨우치는 일을 牧牛에 비유하고 있다.

 

禪家는 흔히 見性過程牧牛圖나 심우도尋牛圖를 그려 比喩한다

나라 때 곽암廓菴선사가 禪家의 마음 깨우침을 牧牛比喩해 그린 십우도十牛圖가 그 原流. 그러나 十牛圖는 마음이 곧 부처인 즉심시불卽心是佛頓悟的 境地 自體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境地에 이르는 不斷努力을 뜻하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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