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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조경사
한국의 조경사 <비교> 중국 : 은, 주, 진, 한, 남북조, 위․촉․오, 진, 수 당 의 시대
일본 : 대화시대, 비조시대, 나량시대, 평안시대전기 의 시대
Ⅰ. 고대의 조경문화
1. 고구려 (37 B.C ~ 668 A.D)
가. 시대배경
․송화강 유역에서 생활→서력기원전 2세기 경에 남하하여 압 록강 유역의 산악지대에서 수렵생활
․수림왕 때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인정
․374년에 동진의 승려 아도가 귀화하여 순도와 함께 고구려 에서의 불교전파와 불교문화의 발달에 크게 기여
․소수림왕 2년에는 중국의 무술과 고저을 가르치는 태학이 생김
․평원왕 8년(552 A.D.)에는 장안성과 안학궁이 축조
․영류왕 7년(624 A.D.)에 당으로부터 신선사상과 도교 전래
․영류왕 8년(625 A.D.)에 일본으로 건너간 혜관은 일본 삼론 종의 개조가 됨
․연개소문이 죽은 뒤 신라와 당의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국을 세움
․발해의 안정기에는 경원에도 관심을 두었을 것으로 짐작됨 → 「발해국지 장편십칠 식대지」의 기록
나. 경원각론
(1) 동명왕릉의 진주지
․평안남도 중회군에 있는 동명왕릉 서쪽 400미터 되는 거리 의 낮은 지대에 만들어진 못의 이름
․크기는 약 동거로 100m, 남북으로 70m
※ 남쪽의 둑 길이 : 115m 북쪽의 둑 길이 : 90m
동쪽의 둑 길이 : 75m 서쪽의 둑 길이 ; 70m
․못 바닥에는 자갈이 깔려 있음. 연화씨 발견
․고구려의 붉은 기와 조각 발견 - 정자가 있었음을 추측
․못 안에는 4개의 섬이 있는데 보통은 봉래, 영주, 방장의 3 개가 있는 것이 원칙이나 중국의 한 나라 때 태액지 원에는 호량섬을 더한 4개의 섬이 있었고 거북이의 상이 배치. 평 양이 한 나라가 낙랑군을 설치했던 지역임을 감안할 때 고구 려의 조경문화는 한 나라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2) 안학궁의 경원
․평안남도의 평양지방에 발달해 있는 대동강 상류의 대성산성의 남쪽에 위치
․남궁, 중궁, 북궁으로 구분
․남궁 서쪽에 곁들여 있는 정원은 못과 축산으로 이루어짐.
못 : 자연곡선으로 윤곽처리. 4개의 섬
축산 : 자연스러운 형태. 정자터(→ 경석이 다수 발견)
․안학궁의 지원은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자연풍경묘사의 경원양식인 듯 하다.(한 나라의 상림원과 유사함)
․「삼국사기」에 의하면 양원왕 8년에 장안성과 안학궁을 축조하고 평원왕 13년(571 A.D)에 궁실 증수 기록.
→경원도 이 무렵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측
2. 백제 (18 B.C ~ 660 A.D)
가. 시대배경
․동진을 비롯하여 송, 량, 진 등과도 외교관계를 맺어 자주 내왕하고 문화를 받아들임
․침류왕 원년(384)에는 동진에서 마라난타가 불교를 처음으로 전해 주었음
․진사왕 7년(391) 궁실을 증수하고 천지조산하여 여러 가지 화초를 심고 가금을 길렀다.
․동성왕 22년(500) 궁 동쪽에 15M에 이르는 임류각을 세우 고 못을 팠으며 원유를 두고 가금을 길렀다.
․성왕 16년(538)에는 '음양오행사상'도 들어오게 됨
․무왕 35년(634)에는 궁 남쪽에 못을 파고 방장선도를 만들 었으며 못의 서안에 버드나무를 심었음.
․의자왕 대에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항복
나. 경원각론
(1) 진사왕 7년(391 A.D) : 궁실을 증수하는 한편 못을 파고 그 흙으로 인공산을 만들고 진기한 새와 갖가지 화초 를 길 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음.
(2) 동성왕 22년(500 A.D): 우리나라 정원 중 문헌상 최초의 정원
․임류각 - 물가에 세워져 강의 수경과 산야의 경관을 바라다 보면서 즐기는 유락의 기능
․못을 파고 금수를 우리안에서 길렀다고 함 → 「삼국사기」,「동국통감」
․이 못을 금강쪽 언덕에는 영조시대에 창건되고 1984년에 중 건한 '만하루'가 세워져 있음.
(3) 무왕 35년(634년) :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사비성시대에 방상지의 네지안에 버드나무를 심었다고 함 →고대 중국의 한 이나 남북조 시대와 마찬가지로 신성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지원이 백제에도 만들어졌다는 증거
(4) 궁남지
․백제 무왕시대에 조성
․부여읍의 남쪽 왕포리에 있는 마래방죽
․「동사강목」: 무왕 35년 궁성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 리에서 물을 이끌어 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못속에 섬을 만들어 방장선산 을 모방하였다.
․팔각지붕형 정자(포용정)을 지었음
․섬과 남안사이는 나무다리로 연결
→중도상의 정자나 목교는 고증이 될 수 없는 시설물
․망해루나 망해정 같은 건축물이 궁남지의 못가에 세워졌던 것이 아닌가 추측
․「동국통감」에서 추측해 볼 때 주유의 기능도 갖고 있는 것 으로 볼 수 있음
․ 궁남지의 섬은 중국 한나라 태액지 속에서 삼신산을 만들어 불로장생을 기원하던 신선사상에서 영향을 받았다
(5) 석연기 ; 의자왕
3. 신라 (57 B.C ~ 938 A.D)
가. 시대배경
․B.C 57년경 경주지방에서 일어난 6개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체에 의하여 국기를 다진데서 출발
․4세기 중엽에 이르러 주변의 여러 작은 나라를 차례로 통합 하여 중앙집권의 정치체제를 발전시킴.
․중국의 전진과 통교하고 있었으나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중 국문화의 도입과 발전은 크지 못했다.
․한학은 고구려와 백제를 통해 4세기경 간접적으로 도입
․6세기 경에는 한자의 사용이 급격히 발전
․이차돈의 순교사건을 계기로 법흥왕 14년에 불교 공인.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된 '홍륜사'에는 금당, 탑, 좌경루, 좌우회랑, 남문, 남지가 있었음
․선덕영왕 14년에 백제의 아비지에 의해 황룡사의 9층탑이 설계 완성
․문무왕 14년(674) 궁 안에 못 파고 동산 만들어 화초를 심 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는데 이것이 임해전 지원
․751년 불국사와 분황사가 세워짐
․800년대 포석정(왕희지의 '난정고사'를 본딴 왕과 측근들의 유락공간)을 세웠다.
나. 경원각론
- 지리적인 조건 탓에 조경문화는 고구려․백제에 비해 늦게 싹텄지만 경원의 종류가 비교적 다양하고 우수하다.
(1) 임해전지원 (= 안압지, 월지, 안하지)
․문무왕 14년 궁내에 못 파고 산 만들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 새 길렀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전해짐.
․임해전은 안압지에 결부된 건축물이라 볼 수 있다.
․지원은 담에 의해 둘러싸여 있으며 여기에는 임해문과 인화 문등 몇 개인가의 문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됨.
․안압지의 명칭 : 삼국사기나 동국통감에는 나타나지 않음
조선시대의 동국여지승람 - 안압지
김시습의 매월당사유록 - 안하지
․월지 - 최근 경주박물관장에 의하면 안압지의 원명은 '월지' 이며 월지를 관장하는 기관은 내성(궁내부에 소속 된 동궁 (태자궁))의 월지악전이라고 주장
․지원의 크기는 동서 190m, 남북 220m에 이르며 전체면적은 약 40,000㎡평이고 지면적은 약 17,000㎡이다. 못 안에는 3 개의 섬이 남동에서 북서방향으로 한 줄로 배치. 북쪽의 섬은 거북이의 모양을 띠고 있는데 장수 영물로서 거북이를 불로장생의 신선사상과 결부시킨 것은 아닌지 생각됨.
․못의 밑바닥은 강회로 다지고 작은 천석을 깔아 물이 새어나 가는 것을 막고 맑은 물이 유지토록 함.
․목침 모양의 도로 호안석축을 하고 그 안쪽의 둑은 응결력이 강한 찰흙을 1m~1.5m 너비로 쌓아 다져 놓음으로써 호안 보전에 큰 힘을 주고 있다.
․입수구 : 동남쪽 구석에 위치. 수로는 약 40m이고 수로의 외부와 연결되는 부분은 자연석으로 둘렀다.
․밑바닥 : 네모에 가까운 돌로 수직을 이루도록 쌓아 굳혀 놓 았다.
․도수조 : 유입부 가까운 곳에 위치. 너비 1.6m크기의 암석 의 중앙부분을 깊이 32㎝가량 파서 만든 수조를 20㎝ 차를 두어 배치하고 흘러 들어오는 물 속의 토사나 잡물을 여과시 키는 역할
․수조에 흘러 들어온 물은 굴곡 있는 자연석깔이의 수로를 지 나 큰 못속으로 낙하 → 반석을 깔아 바닥이 패이는 것을 방 지
․못의 북안과 동안에는 경사가 가파르지 않은 자연스러운 인 공축산이 형성
※ 임해전의 기능
1) 왕과 신하간의 정적인 유락공간, 연회의 장
2) 호수에서는 배를 띄워 노는 주유공간으로서의 기능
→결론 : 임해전 지원은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해안퐁 경묘사의 경원이며 그 기능은 정적인 연유와 관 상, 그리고 동적인 주유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수백의 경석이 적절히 배치
(2) 포석정의 곡수거
․사적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는 곳(정자는 없어지고 느티나무 아래에 가공석재로 조립된 곡수거만 남아 있다.)
․계무부의 '원야'에서 곡수의 구성 : '옛날에는 모두 석조를 파서 흐르게 하고 여기 에 술잔을 띄운다.' → 포석정의 곡수 거도 마찬가지 방법
․유배를 위한 물 도랑은 안쪽은 112개, 외곽부는 24개의 가 공석조로 짝맞추어져 있으며 유입부는 6개, 배출부의 꼬리부 분은 4개로 합계 46개에 이른다.
※ 포석정의 곡수거에서 유속 : 시점에서 종점까지 술잔이 이동하는 시간
- Kutter 공식에 의하면 1분 0.8초
- Manning 공식에 의하면 44초
․곡수거의 크기 : 안쪽의 타원부는 단경 4.4m, 장경 5.5m이 며 곡수거의 나비는 약 30m, 깊이는 20㎝ 내외이고 길이는 약 22m 시발점에 있는 움푹 패여있는 수수부의 지름은 60㎝
4. 삼국시대의 조경식물고
: 이 시대의 조경식물에 관하여 직접 다른 문헌의 없으나 삼 국사기와 삼국유사 그리고 동국통감의 기록에서 간접 적으로 찾아보기로 한다.
① 복숭아
② 자두
③ 매화
④ 회화나무 : 궁궐이나 관아 또는 요소에 심어짐
⑤ 배나무
⑥ 목단 : 고구려시대에 자주 쓰이던 나무
⑦ 살구나무
⑧ 버드나무 : 「삼국사기」 백제 무왕 35년 - 인공지안에 버드나무를 심었다는 우리나라 최초의 기록
⑨ 측백나무
⑩ 소나무
⑪ 대나무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
⑫ 산수유
※ 신라 진평왕 때 당나라로부터 처음으로 모란씨가 도입
※ 사절유택 : 신라시대의 풍습으로 귀족들이 철따라 자리를 바꿔가면서 별장을 놀이장소로 삼던 것
: 별서정원(別墅庭苑)의 효시
⑬ 치자나무 : 치자나무가 조경식물로 심어졌다는 기록은 없지만 만불산이라고 일컫는 목조의 만다라 세계 속에 등장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당시의 관상용으로 심어졌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 이 중에 중국 원산종 : 복숭아나무, 자두나무, 배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목단, 치자나무
원산지를 잘 알 수 없는 나무 : 측백나무와 산수유
Ⅱ. 중세의 조경문화
1. 고려시대 (918 ~ 1392 A.D)
가. 시대배경
․송악에서 궁예가 일어나 후 고구려의 왕이라 자칭
․원산에서 견휜이 일어나 후 백제를 세움.
․918년에 궁예축출 → 왕건이 왕에 추대
․왕건은 국호를 고려라 하고 왕도를 송도로 옮김.
․신라와 후백제의 유민을 포섭, 융화시키기 위해 정략결혼 시 행
․귀족들을 예우하며 회유
․숭불정책을 펴서 불교를 국교로 삼아 사원을 짓고 승려 우대
․신라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여서 교학․사상․민간신앙을 적극장 려
․북진정책 추진 - 옛 고구려 땅인 서북면을 개척하고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임.
․힉문적인 면에서는 사라센계통의 천문, 수학, 의학, 역법, 예 술 등이 원을 통하여 들어오게 됨.
․종교는 불교우세에서 차차 유교의 득세로 변모 → 도덕적 합 리주의에 입각한 중앙집권적 귀족정치를 실현하는데 유교가 보다 적절
․조경적인 면에서는 북송과 원으로부터 갖가지 애완동물과 화초가 도입됨.
나. 경원각론
(1) 금원 : 경원을 구성하는 첨경요소 또는 주요시설물에 중 점 두어 화원, 지원, 석가산, 정자, 격구자로 구분
① 화원
․화초나 화목을 중심으로 하는 경원
․예종 8년 궁의 남과 서에 두 화원을 설치
→'대'와 '사'를 만들고 높은 담장으로 둘렀으면 민가에서 화초를 옮겨 심거나 송 나라의 상들을 통해 구득
․의종 10년 왕이 어원의 화훼를 돌아보고 층허각에서 곡연을 베풀었음 → 양성정 뜰에는 괴석이 배치되고 명화가 심겨짐
․궁궐안에 많이 꾸며져 있는 화원이나 화초나 화목들은 중국 (송, 원)으로부터 들어온 것이 대부분
② 귀령각지원(동지)
백제의 궁남지와 망해루, 신라의 월지(안압지)와 임해전 등 의 기능과 비슷하며 형태면으로 볼 때 조선시대의 경복궁 경 회루지원과도 연결시켜 볼 만하다.
․기능 : 선발시험의 장소이며 검열 & 사열의 장소이고 유락 의 장소, 물놀이(뱃놀이)의 장소
③석가산
․괴석을 조경시설물로 도입하고 있는 것은 고려시대 경원의 특징
․「동국여지승람」- 김인존의 청연각연기에 둘을 쌓아 산을 올렸다. (첩석성산)는 기록이 있다.
․의종 6년 (1152 A.D) : 수창궁 북원에 괴석을 쌓아 가산을 만듬. 만수정 축조
․의종 10년 (1156 A.D) : 민가 50여구를 헐어내고 태평양경 원을 만들었음. 옥석을 갈아서 쌓아올린 환희와 미성의 두 " 대"가 있고 괴석을 쌓아 만든 선산이 있었다고 함 → 경석이나 괴석을 이용하여 석가산을 만든 것을 보면 수려한 자연의 기암절벽이나 불로장생이 있는 신선제를 울타리 안에 상징적으로 도입한 것이 아닌가 한다.
④정 자 : 고려시대 조겨문화의 중추적 요소들 중의 하나
․여름철의 휴식, 피서 그리고 산수의 경관을 관상하면서 즐기기 위해 원내나 산수속에 세운 소건축물을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벽이 없는 것이 특징.
․경원안에 정자를 도입 (예 :수창궁의 만수정, 양성정, 태평정 정원의 태평정, 관람정, 양이정, 양화정)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에 정자를 도입
(예 : 문종 10년의 장원정, 동왕 31년의 안흥정, 의종 1160 년대에 청령제의 남쪽에 중미정, 모정, 의종 때 판적천 주변 에 모정과 초루를 7개나 짓게 하였는데 그 중에서 액이 있는 것은 영덕정, 수어당, 선벽제, 육간정)
"격구장의 조경적인 측면"
․이들 격구장이 북원이나 후정 또는 '루', '정'등에 마련.
․동적인 기능을 갖는 경원의 일종.
⑤격구장 : 격구는 젊은 무과 상류층 청년의 무예 일종, 신라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들어와 고려시대 크게 성행.
(2) 객관원 - 순천관경원
: 순천관은 원래 문종이 창건한 대명군의 별궁 → 송나라의 사신이 왔을 때 '순천관'이라 이름하고 영빈관 으로 이용.
: 순천관의 기록 : 송나라의 문신 서경이 약 1개월간 머무르 면서 견문을 적은「고려도경」에 상세히 기록.
①건물 : 외문, 중문, 정청을 중심으로 하여 각 부속건물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 → 조선시대의 객관(객사)의 경 우와 흡사
②조경 : 본관의 뒷편에 따로 세운 낙빈정의 화원과 산허리 에 꾸며진 향림정의 원림 그리고 관의 동편에 있는 도할과 제할을 위한 공관의 상, 하지 → 순천과에는 이용하는 사람들이 피로를 풀며 즐길 수 있도록 정 자가 세워졌고 주변에 조경 처리가 되어 있다.
(3)사원경원 : 사원은 대체로 산수경개가 수려한 자연 속에 터를 잡고 있는 관계로 적극적인 조경행위보다는 수경 적인 입장에서 못을 파고 화초를 심음.
①대흥사 : 목련, 단풍을 식재.
②안화사 : 안화선원에서 안화사로 개칭. 괴석을 배치하기도 함.
③관란사 : 김부식이 창건. 기이화초와 수목식재. 괴석으로 대를 쌓았으면 단 위에는 어실을 짓고 금벽으로 장
④숭교사 : 연지가 있고 '누'가 있음.
⑤화엄사 : 못가에는 창포. 섬돌 앞에는 목단, 작약.
⑥수다사 : 네모의 못(방지)에 연이 심어져 있음.
⑦문수원의 남지
․강원도 춘천지방에 있는 문수원의 입구 계류가에 있는 사다리꼴의 장방형지 (=영지)
․상하 2단으로 되어있는 사다리꼴의 못.
상지 - 동서 12m, 남북 4m 크기의 장방형지
하지 - 윗편 나비 10m, 아래편 나비 7.5m, 남북의 길이 14m인 직선형의 못
․가장장리는 자연석으로 축조
결론 : 조경식물은 목련, 황목단, 작약, 연 등의 외래식물과 기화이초 등 꽃을 관상대상으로 하는 식물과,
소나무․대나무․삼나무․측백나무․전나무 등 상록침엽수 사용. 괴석을 배치하고, 직선적인 못 또는 연지.
․연못안에는 크고 작은 암석이 산재
(4) 민간경원
① 김치양의 경원 : 한재렴의 「고려고도짐」에 김치양이 300여칸 저택을 짓고 대사와 원지를 만들었다는 기록有
② 이공승의 경원 : 말년에 원중에 모우를 짓고 못을 파서 동산을 만들어 화훼를 심었다고 함.
③ 최충헌의 경원 :「동국통감」남산리제에 모정을 세우고 제택과 쌍송을 심었다고 기록.
이규보의「진강후모정기」연담과 압소가 있고 기이화초와 조류가 있다고 함.
④ 기홍수의 퇴식제경원 : 이규보의 「기상서 퇴식제입영」
․건축물로는 퇴식제., 녹약헌, 척서정 등이 있고 자연물로는 영천동, 소정원으로는 독락원 시설물로는 연이 심겨져 있는 연의지. 재료로는 태호석 조경식물로는 연, 소나무, 버드나 무, 배나무, 오얏나무, 대나무, 목단, 창포가 있으며 애완동물 로는 홍의와 비단옷을 갖춘 새
⑤「이소원기」(1194) - 상 하원에는 소지(작은 연못)가 있 고 지지헌이 있으며 장미, 복사꽃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능금나무, 대나무, 목단, 오이, 해바라기, 봉선화 등이 나타나 있다.
「사륜정기」(1201) - 그가 설계한 사륜정 기록. 그늘진 곳을 따라 옮기면서 정자 안에서 글 읽고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둘 수 있도록 고안된 이동식 정자.
다. 고려시대의 조경식물(51종) → 이를 전문적으로 다룬 문 헌이 없으므로 사록이나 시, 문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유추할 수밖에 없다.
․8대 조경식물 : 소나무, 버드나무, 매화나무, 향나무, 은행나무, 자두나무, 배나무, 복숭아나무
․낙엽활엽수가 많이 쓰임.
․무궁화, 대나무 - 울타리로 많이 쓰임.
․고려시대의 조경식물을 원산지중심으로 살펴볼 때 한국야생 종이라 할 수 있는 건 소나무, 전나무 등 17종 불과
․외래식물은 30종에 이름 : 대부분이 원산지가 중국이거나 중국을 통해 들어옴.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에도 반영되어 있음 → 고려시대의 조경문화가 당시에 송 또는 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Ⅲ. 근세전기의 조경문화
1. 조선시대 전기(1392~1622)
가. 시대배경
- 왕으로 즉위한 이태조(이성계)는 정치적으로 명을 종주국으 로 하는 사대정책, 문화적으로는 숭유배불정책, 경제적 으로는 농본 민생주의정책등 3대 정책을 표방하여 이를 건국개념으로 삼았음
- 풍수지리설에 따라 도읍을 한양으로 결정.
- 이성계(건국)에서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날 때까지 230년.
- 약 100년간은 정치․문화면에서 발전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으나, 후반에 이르러서는 대체로 심한 당쟁과 외세의 침입으로 나라의 질서가 흐트러지고 불안한 상태.
- 대표적인 경원: 경복궁의 경회루 지원, 전라남도의 양산포의 소쇄원, 전라북도 남원의 광한루지원을 들 수 있다.
- 조경식물과 첨경물에 관한 저술: 강희안의 「양화소록」(1474)
- 조선조시대에 궁궐정원을 관장했던 관서: 상림원과 장원서
* 고려시대에 궁궐정원을 관장했던 관서 : 내원서
나. 경원각론
(1) 금원
A. 경복궁 경회루 지원
- 이 루 건물은 임지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지고 고종 2년 대원군(1867년)에 의해 재건.
- 하륜의 「기문」에 의하면 태조 때 창건한 소루가 있었는데 오래되어 기울어질 염려가 있어 서쪽으로 옮겨 보다 큰 못을 팠다고 함.
-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당시의 지중에 2개의 섬이 있었고 연이 심겨져 있었다고 함.
- 이 루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지고 고종 2년 대원군에 의해(1865) 재건.
- 경회루의 지원은 130×110m 크기의 방지와 2개의 방도로 이뤄짐.
- 못의 동쪽에 있는 섬에는 팔각지붕의 누 건물이 세워져 있 다.
- 누마루를 바치고 있는 외주 24개는 방형이며, 내주 24개는 원형…바깥쪽 네모의 기둥은 땅 음을 안쪽의 둥근 기둥은 양 을 상징.
- 경회루가 세워져 있는 큰 섬은 지안과는 3개의 아름다운 석교(石橋)로 연결.
- 루가 있는 네모의 섬은 가장자리를 화강암의 장대석에 의해 처리
- 섬의 서쪽 가장자리 중앙에 자수위까지 석계가 만들어 짐 → 선착장인 듯함(뱃놀이를 즐겼음)
- 가상적인 동서의 축을 중심으로 장방형의 소도가 좌우대칭 으로 배치.
- 못 속의 두 섬에는 소나무가 심겨져 있고 서쪽과 북쪽의 못 호안가에는 느티나무, 회화나무가 있다.
※ 경회루의 기능 : 외국사신의 영접과 아울러 왕이 조정의 군신에게 베풀었던 연회의 장소로서의 기 능. 왕이 유생들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는 장소. 활쏘기와 무예의 관람장소.
※ 연산군은 경회루지 서편에 만세산을 만들고 산위에 오궁을 건설 → 만세궁, 봉래궁, 일궁(日宮), 월궁(月宮), 벽운 궁 (壁雲宮)등 상징적 모형궁을 만들어 배치, 지중에 산호수를 만들어 세움.
- 결론
① 경회루 지원은 왕이 홀로 또는 측근자나 군신 그리고 외국의 사신들과 함께 누상에서 지중의 연을 관상하거나 주위 의 자연경관을 조망하면서 즐기거나 지당(연못)에서 선유하기 위하여 꾸며 놓은 유락목적의 공간
② 직선적인 방지의 중앙에 동서축을 가상할 때 경회루와 서쪽의 2개의 섬을 양분하여 좌우대칭을 이룬 기하학적 경원이라 할 수 있다.
B. 왕실에 관련된 정원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왕이나 왕족들이 교외의 산수경관이 수려한 곳에 이궁이나 정자를 짓고 수경을 즐기는 일이 많았음.
※ 이조시대에 이룩된 3대 이궁 … 풍양군, 낙천정, 연회궁
① 풍양이궁
태조 때부터 이궁이 있었으며, 태종 때에는 이궁 서쪽에 못 을 파고 지중에 정자를 지은바 있고, 세종 때에는 못을 더 확장하고 정자 대신에 보다 규모가 큰 수각을 짓고 즐긴 듯 함.
② 낙천정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동교 높은 곳에 이궁을 세우고 정자를 지어 '낙천정'이라 함.
③ 제천정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곳
낙천정의 북강에 (세종) 정자를 세움 --- 「동국여지승람」
④ 화양정
낙천정 북쪽 언덕위에 있음. 유사눌의 기문이 있음.
⑤ 칠덕정
한강 아래 백사장 물가에 위치.
⑥ 망원정(희우정)
효녕대군의 '희우정'이 있었던 곳에 (성종 15년) 월산대군 정 이 이를 다시 세우고 '망원정'이라 함.
⑦ 영복정
양녕대군의 별서
⑧ 풍월정 → 서거정의 시에서 주변경관 짐작
월산대군이 자신이 거처하는 집의 서원속에 지음
⑨ 황화정
연산군이 놀이하는 곳으로 하고자 지은 것
⑩ 세검정
인조반정 때 군사가 창의문으로 들어왔다고 해서 세검정.
창의문 밖 탕춘대 앞에 있으며 암석이 있고, 폭포수가 흘러 내림.
⑪ 남별궁
임진왜란 뒤에 서울이 회복되고 중국 명나라 군이 입성하게 되어 제독 이여송이 숙소로 쓰게 된 이후 객관으로 용도변경 이 이루어짐.
⑫ 한성의 지원
한성에는 서지와 남지 그리고 동지가 있었다 ⇒ 결론…못은 풍수지리설에 따라 패보목적으로 만들었지만 지안에 정자를 지어 관상과 연유 목적도 겸한다.
(2) 민간경원 (입지조건과 기능에 따라 주택정원, 별서경원, 산수경원으로 나뉜다.)
※ 정원(庭園) : 가족들이 일상 함께 생활하고 있는 주거역에 꾸며진 경원
경원(景苑) : 자연속의 한가한 곳에 조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울타리가 거의 없으며 조망을 가리지 않는다.
1) 주택정원
a. 청암정(구암정)지원
- 권발이 주거의 서북쪽 암반상에 정자를 짓고 지원을 꾸 민 것.
- 청암정 : 커다란 암반위에 지어 놓은 것(신선사상의 영 향)
: 암반과 그 주위의 지당도 난형(거북)임.
: 팔각지붕의 정자와 맛배지붕의 정자가 'T'형으 로 연결된 건축물.
- 중도에는 단풍나무, 왕버들, 회화나무 식재
- 집안에는 향나무, 왕버들, 굴참나무, 느티나무, 단풍나 무들의 향토수종과 은행나무, 회화나무, 앵도나무 등의 중국 원산종이 식재.
- 나무를 잡다하게 심어 정자로부터 수경을 감상하기 어 려움.
- 조선시대 대부분의 연못은 방지형인데 청암정은 곡지형 태.
b. 서하당과 식영정
- 서하당: 김성원이 지어놓은 것인데 지금은 자취조차 없고 식영정만 남아있다.
- 1574년 고경명의 「유서석록」에 서하당지역과 건너편 에 세워진 환벽당에 관해 자세히 묘사. (후원은 돌로 쌓아 계단식 화계를 만들고, 여기에 작약, 목단 월계화, 일본철쭉 등을 심었음.)
- 정철의 「서하당잡영」: 연지, 석지와 함께 가산도 설 명
- 식영정 : 서하당의 서쪽 송림위에 세워진 정자. 옛날에 는 그 주변에 배롱나무가 많이 심어진 듯함.
c. 환벽당
- 원래 환벽당은 김윤제가 1500년대에 조영한 주거의 후 원. 윗편에 지어놓은 별당의 이름이나 편의상 주택, 후 원, 별당, 정자 등 주거지역 전체를 통칭하는 것으로 함.
- 소산의 남동쪽 기슭에 터를 잡아 낮은 곳은 주택지로 뒷편은 후원.
- 후원은 15~18˚경사를 이용하여 동편은 인공적인 방지 와 화계를 조성하였고, 서편은 느티나무 2그루와 배롱나무 1그루를 배치.
- 방지의 윗편에는 화계가 있고, 못의 동안에는 축단이 있음.
- 후원의 정상부분에 축대를 조성하고 여기에 환벽당을 지음…창덕궁의 석복헌 후원의 정상에 한정당(閑靜堂)이 세워져 있는 것과 비슷한 양식.
- 현재의 환벽당역은 방지와 화계, 대상의 환벽당 건축물 만 남아있고, 황폐된 빈터이다.
2) 별서정원
※ 나타난 배경: 조선시대의 정치혼란에서 벗어나고자 함. 자기수양, 도가사상의 영향
a. 도산서당
- 퇴계 이황 선생이 자연속에 묻혀 살기 위해 이곳에 토지를 확보하고 도산서당과 농운정사등 당사 2채를 지음.
- 농운정사: 강의실
시습제 - 공부하는 방
지숙료 - 잠자는 방
관란헌 - 공부하다가 경관을 바라보며 심성을 기 르는 방
- 도산서당: 가운데 1칸은 완락제-주자의 구절에서 따온 곳,
-'환성하고 즐기니 내 일생 을 여기에서 만족하며 살더 라도 싫지 않겠다'는 뜻)
동쪽의 칸은 암서헌이라고 부름.
-「도산잡영」: "마당의 동쪽 한 구석에 조그마한 못을 파고 연을 심어 '정우당'이라 하였으며 동쪽에 몽천이라는 조그마 한 샘을 만듬. 그 동쪽의 산기슭을 깎아 추녀와 맞대고 평평 하게 쌓아 단을 만들고 여기에 다 매화, 대나무, 소나무, 국 화(매, 죽, 송, 국)를 심어 '절우사'라 하였다."
- 식재: 일제시대 이전부터 심어졌던 것으로 생각되는 은행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산수유나무, 단풍나무 등의 노거수가 자라고 있다.
b.양산포의 소쇄원
※ 이 경원은 조선조의 중종 때에 양산포가 조영한 것으로서, 주거지역에서 볼 때는 후원에 해당하지만, 벼슬에의 꿈이 사라지게 되자 일생을 자연과 벗하며 조용히 살고자 했으므로 별서정원의 범주에 넣을 수도 있다.
- 소쇄원은 일시에 완성된 것이 아니라, 비탈면을 깎아 건축 부지를 다듬고, 자연석으로 단과 담을 쌓으며 추정과 초려를 짓고 나무를 심는 등 많은 세월에 걸쳐 이루어짐.
- 소쇄원은 북동쪽에서 남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좁다란 계류를 중심으로 꾸며진 것: 비탈면을 깎아 판판한 단 또는 몇 개의 계단을 만들어 각종 첨경물을 배치하고 조경식물을 심 었다.
- 공간분활: 대봉대역, 매대역, 광풍각역
① 대봉대역
․계류의 오른편은 길이 약 55m, 너비 약 10m의 크기를 갖춘 기다란 구역으로 소쇄원에 들어오는 접근로 지역이다.
․대봉대에서 곧바로 시야에 들어오는 1칸 짜리 정자: 소쇄정
․당초 대봉대 곁에는 오동과 대나무가 식재되어 있었다.
․2.8m×2.8m크기의 방지: '상지'(상지와 하지(입구쪽의 방지) 의 중간 계안에 건너편에 있는 광풍각에서 관상하 기 위한 수거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입구 도로와 계류사이의 좁다란 구역에는 적송과 단풍나무, 배롱나무가 있었다.
② 매대역
․소쇄원 안쪽 계류의 위 비탈면을 3~4계단으로 쌓아올린 계 단식 정원
․오곡문과 제월덩 사이에 2계장으로 된 매대가 있음.
․길이 약 18m, 나비 3.5m
․말라죽은 측백나무가 한 그루 있을 뿐인데, 소쇄원도에는 3그루의 매화가 심겨진 것으로 되어있다.
③ 광풍각역
․계류의 서쪽에 단둁르 쌓고 광풍각을 세움
․광풍각은 산수 속의 정자이며, 하나의 별당 또는 사랑방의 역 할
- 하지(下池): 5.5m×4.0m의 크기
옛날에는 순채가 심어졌으나 지금은 물만 흘러 들어옴
- 애양단: 오곡문 곁에 마련되어 있는 마당
- 오도: 광풍각의 뒷편언덕에 위치. 무릉도원을 상징한 것 같 음.
- 21종의 식물이 사용→ 외래식물이 14종에 이르며 일본철쭉도 포함.
⇒결론: 소쇄원은 죽림이 앞을 가리워 답답한 느낌은 있으나, 계류를 중심으로 하여 비탈면을 계단상으로 처리하고 애양단과 봉화대, 매대, 오도 등의 각기 다른 공간으로 구획하여 여기에 각종 수목을 심고 직선적인 상․하 지와 수거, 석가산 등의 첨경시설을 도입하여 각기 다른 기능을 부여한다.
소쇄원의 화목으로는 대,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은행나무, 버드나무, 오동나무, 복숭아나무, 목백일홍, 치자, 월계화, 동백나무, 측백나무, 창포, 순채, 국화, 연꽃, 파초, 지초, 난 그리고 이끼 등이 있다.
소쇄원의 아름다움을 말한다면 하늘이 빚은 경승의 암반계곡에 푸른 구슬같이 맑은 계류가 흐르고 더러운 속기가 침범하지 아니한 선경으로 늙은 돌에는 푸른 이끼가 덮이고 비개인 계곡에는 신비한 구름이 자욱한 곳이다. 생황을 연주하는 것 같은 대숲의 바람소리와 청아한 선비의 거문고 소리 들리던 곳. 꽃은 피어 무릉도원을 연상하고 흐르는 물가에 한잔술을 권하며, 삼복에 훌훌 벗고 폭포수에서 목욕을 하고 하면 세상의 모든 티끌이 정결히 씻어지던 원림이다.
어지러운 세상을 등진 곧은 선비의 맑은 정신이 곳곳에 깃들어 있고 격조 높은 문사의 시상 속에서 세상 물정을 잊어버리고 문아한 마음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한국의 별서명원이다.
3) 산수경원
: 산수의 경관이 좋은 자연속에 주로 여름천의 더위를 피하기 위해 지어놓은 정자를 중심으로 하는 수경공간
a. 독수정 원림
- 무등산맥이 북쪽으로 뻗어내려가다 약 6㎞되는 지점에서 춘 조그마한 구릉의 수림속에 위치
- 이 지방(전라남도)최초의 조선시대 원림: 전라남도 기념물 제 61호
- 독수정: 공민왕때의 전신민이 이성계 왕조가 들어서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굳히고 은거생활을 하면서 지어놓은 정자.
- 「서은실기」의하면 독수정 후원에 소나무를 심고 앞쪽 화계에 대나무 옮겨 심었다고 함.(송․죽→수절의 상징)
- 느티나무, 회화나무, 살구나무, 배롱나무, 소나무, 귀롱나무 등이 경관 보완 ⇒ 서은 자신이 숨어살기 위해 세운 것이지만 무등산 주변에 정자문화를 탄생시키는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b. 광한루지원
- 전라북도 남원에 위치하며 그 전신은 황희가 세운 '광통루'이다.
- 황수신의 「광한루기」(1453 A.D)에 의하면 황희가 벗들과 어울려 산수를 관상하며 놀고 즐기기 위해 '관통루'라고 하는 조그마한 누정을 세웠던 것이 처음.
- 「용성지의 관안」에 의하면 장의국이 광한루를 개축하고 오작교를 축조.
- 「동지」의 누정편에 정철이 누 앞을 흐르고 있던 좁다란 수류를 넓다랗게 확장하여 평호로 하고 호중에 3개의 섬을 만들어 하나에는 백일홍을 또 하나의 섬에는 연정을 만들고 연을 심었다 함.
- 1964년에 관광개발 목적으로 오작교 옆의 담을 헐어내고 밖으로 이축. 면적도 남쪽으로 크게 확장하고, 여기에다 완월정과 그 앞의 방지, 월매의 집, 그네터, 넓다란 공원 등을 첨가.
- 광한루는 2층 건물의 팔각지붕 양식
- 동서 100m, 남북 50m의 장방형의 연못. 연못에 3개의 섬이 동에서 서로 배치됨.(동쪽에 있는 섬은 서쪽의 2개의 섬과는 축을 달리하여 약간 남쪽으로 편재→ 같은 시기에 축조되었는지 의심)
-「용성지」에 의하면, "못의 중심도는 '봉래도'로 녹죽이 심겨져 있고, 동쪽의 섬은 '방장도'로 백일홍이 심겨져 있으며, 호북의 섬은 '영주도'로 여기에는 연정이 있고 부교로 연결되어 있다고 기록" → 이에 따르면 현재 오작교 옆의 방장정이 세워지고 있는 섬은 영주도이고, 그 반대편 동쪽에 있는 섬은 방장 도이다.
- 방태근의 「동영주각」이나 이우회가 읊은 시에서 볼 때, 오작교 옆의 섬에는 영주각이 세워져야 하는 것인데 현 재는 오작교 옆의 섬에는 방장정이 서 있고 동쪽의 섬에는 영주각이 세워짐: 영주각은 1795년 중수할 때 동쪽섬 을 더 확장하고 여기에 새로 지었던 것으로 추측.
- 오작교: 네 개의 구멍이 뚫린 석축의 다리로 원래는 길이 약 25m, 나비 약 2.6m의 크기였으나 지금은 44m. 노면 포장도 예전 것은 대소방형의 판석을 율동감 있게 깔고 있어 시각적으로 쾌감을 주었었음.
- 식재: 노령의 수종 (누 앞에 2그루의 느티나무, 중앙 봉대섬의 2그루의 팽나무, 2그루의 왕버들, 남쪽지안의 1그루의 왕버들, 그러나 배롱나무가 1그루도 없다.)
⇒ 결론: 3개의 섬에 구체적으로 3신산의 이름이 붙어져 있다거나 누 앞에 자라(거북대용)의 석조상이 배치되고 오작교가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조선시대 경원 중 신선사상을 가장 구체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곳.
(3) 조경식물에 관한 문헌
a.「양화소록」-강희안
- 중국의 문헌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양화에 관한 소록. 이 분야에 관한 한 우리나라 최초의 문헌
- 인제가 양화하는 목적은 단순한 흥미충족이 아니라 화목에서 뜻을 찾고 수심양성 하려는데 있음.
- 양화소록은 인제의 아우되는 경순이 엮은 진상세고 제 4권에 수록.
17종의 조경식물과 괴석, 종분내 화수법, 최화법, 백화기의 취화훼법, 양화법, 매화분법, 수장법, 양화해 등.
※ 양화소록에 언급된 수종
… 적송, 만년송, 오반죽(오죽의 변종), 국화, 매화, 혜란, 서향화, 연화, 석류화, 치자화, 사계화와 월계화, 산다화(동백), 자장화(백일홍), 일본척촉화(일본철쭉), 유자, 석창포
※ 괴석…중국에서는 호중속에 나오는 것이 많은데, 그와는 달리 우리나라에도 완성할 만한 여러 종류가 있으되 모두 산에서 캐낸 것이며, 송도 남쪽 20여리 밖에 있는 경천사의 북쪽 40리 되는 곳에서 괴석이 많이 난다고 적혀 있음.
※ 양화소록에는 총 52종을 9품으로 나누어 놓은 '화목구품'이 있다.
b. 지봉유설
- 고서, 고문증에서 뽑아엮은 기사일문집.
- 모두 20권 25부문으로 되어있는데, 조경과 관련이 있는 훼목부는 제20권에 금훼부와 함께 수록.
- 지봉유설의 제 20권 훼목부는 화․죽․목으로 이루어져 있음.
- "화"에는 매화, 납매, 만생모단, 장미, 연꽃, 동백, 치자, 영산홍, 백모단, 봉선화 등이 수록
- "초"부에는 창포 외에 특이할 만한 것은 없음.
- "죽"부에는 왕죽, 면죽, 오죽 등이 기록.
- "목"부에는 소나무, 압각수, 유살, 무환목, 천금목, 합화목, 소철 등 설명.
Ⅳ. 근세후기의 조경문화
1. 조선조 후기(1623~1896)
가. 시대배경
- 제 16대 인조부터 제 26대 고종까지 274년간에 걸친 시대.
- 명경에 사신으로 가 있던 정두원은 천문, 역산, 지리 등에 관한 한역서와 망원경, 시계, 홍이도(양포) 등의 문물도입.
- 소현세자는 천문과 역산 그리고 천주교서 드의 한역서와 청주상을 도입
- 인조: 창덕궁 후원에 태극정, 소요정, 창의정 등의 정자를 세우고 지당과 곡수거, 인공폭포를 만들어 옥류천 유원 이룩.
- 서적출간:「동국문헌비교」,「대전통편」,「무예도보통지」,「전운옥편」
- 과거제도에 따른 사장을 주도하는 학문이나 사변적인 성리학을 배격하고 현실적으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학 문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 등장.
- 홍만선의「산림경제」…중국의 문헌을 많이 이용하고 자신의 체험바탕으로 농가생활에 필요한 하나의 백과전 서.
- 이가환과 이재위의「물모」… 37종의 식물이름이 한명과 한글로 표기.
- 유희의「물보」… 조수, 초목, 흙, 돌, 금, 불, 물 등의 명록으로 한글과 일본어의 주가 달린 것이 특징.
-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임원 십육지라고도 함. 화훼류의 특성과 재배법이 기술.
- 조경면에서는 창덕궁 후원에 옥류천원과 반월지원이 꾸며진 것을 비롯하여 전국에 많은 민간정원이 생김 ⇒ 조선시대 후기는 한국적인 조경문화가 성립되는 시기.
나. 경원각론
(1) 금원
1) 경복궁
a. 교태전 후원(아미산원):시각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첨경물이 많다 …동정전의 북쪽 강녕전 뒷편이며, 경회루의 동쪽에 인접하여 왕비의 침전으로 지어놓은 교태전(뒷편에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계단식 후원)
- 50m×30m의 장방형 부지에다 장대석에 의해 앞쪽 5계단, 동쪽 3계단, 서쪽 5계단, 뒷면은 3m의 수지벽으로 쌓아올리고, 정상에 32m×15m의 평지를 조성해 놓은 것.→ 아미산원은 각 방향의 계단수가 다르고, 계단 높이나 나비가 다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균형을 이루지 못함.
- 제 1단에는 괴석 2기와 연화문과 용문이 양각된 석지(석연지)가 2개 배치
- 제 2단에는 용도를 알 수 없는 방형의 괴석 2개와 석지 2개가 배치.
- 제 3단에는 붉은 벽돌로 쌓은 6각형의 굴뚝이 4대 배치
․굴뚝의 지붕에는 각각 4개의 연가가 만들어져 있다.
․굴뚝에 불가사리와 해지모양의 벽사장식 - 화마를 제압하는 능력의 벽사장식
․벽면의 맨 윗편에는 가느다란 당초무늬.
․중앙부에는 송․죽․매․국․모단이 새겨진 전(벽돌).
․정북의 벽면에는 식물 대신 「희(囍)」자가 새겨진 전(벽돌).
- 식재면에서 살펴볼 때 전통적으로 송․죽․매․앵도․목단․작약등이 심어져야 할텐데 쉬나무, 말채나무, 산돌배 나무, 산뽕나무등 잡목이 많이 심어져 있음 → 아미산을 축조할 때 심은 것 같지는 않음.
※ 석물
- 석탑(석상): 평평한 돌을 깔아서 앉아서 정치감상, 개울가, 정자의 앞
- 석연지(쇄심석): 물을 끌어 들여 물에 비친 경관 감상.
- 돌활: 많은 무늬가 새겨져 있어 감상용.
- 석함(괴석치): 괴석을 앉히기 위한 돌.
※ 담장
- 서민층: 경계, 높이 저
- 상류층: 경관의 대상-침입방지, 높이 고
b. 향원정 지원
…향원정은 고종 10년에 건청궁을 지으면서 그 북쪽에 있는 향원정을 다시 축조하고 6각의 향원정을 건립하였다.
- 향원지는 76m×74m의 크기를 갖는 방상지로서 모가 둥글게 처리
- 중앙에 둥근섬 있고 여기에 정육각형 2층 건물 향원정이 위치→향원정과 중도사이에 취향교(翠香橋)가 있었음.
- 못의 형태는 둥글며 기능은 주유에 있음.
c. 자경전의 화문장
…조경적인 측면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서쪽 담 밖의 벽면에 수 놓아진 화문장과 뒷편 담 안쪽 벽에서 볼 수 있는 십장생무늬
- 외벽의 환문장은 아랫부분을 네 단의 사괴석으로 쌓아올리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아 벽체를 형성
․벽면에는 매화, 대나무, 복숭아, 석류, 모란, 국화등이 부조 길상문자가 수놓아짐, 상․하에 고리무늬 장식, 주황색의 벽돌로 만수의 문자를 새김, 기하하적인 장식무늬
- 후장(뒷담)의 외벽에는 십장생 굴뚝이 있음.
․십장생 굴뚝은 넓다란 입방체, 흙벽돌로 축조, 윗편 머리부분에는 상자모양의 조그마한 굴뚝10개가 한 줄로 나란히 배치, 해태의 머리부분이 부조, 백학의 부조, 그 아래 벽면에(네모바탕)십장생과 대나무, 국화, 연, 포도 등의 식물과 토끼가 새겨짐
2) 창덕궁 후원
…청독궁은 태조3년에 창건된 경복궁의 별궁기능. 일명 동궐이라고 함.
a. 창덕궁원
… 이 곳은 왕가의 휴식과 유락을 위해 수경해놓은 원림으로 일반적으로 '비원'으로 통용된다.
※ 창덕궁 후원에 대한 명칭
후원(後園)-「태종실록」
후원(後苑)-「세종실록」,「동국여지승람」,「애연정기」
북원(北園)-「세종실록」
원 -「영조실록」
비원 -「순종실록」
① 부용정 역
- 후원 입구에서 사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경원
- 조선시대 유교의 우주관에 의해 조성된 연못
- 둥근 섬이 있는 방지를 중심으로 해서 연못의 남안에 부용정, 동쪽에 영화당, 서쪽에 사정비각, 북쪽에 주합루 등이 있음.
- 영화당: 주변의 꽃을 감상하며 즐기거나 왕이 참석한 가운데 시험을 치르는 곳.
- 부용정: 단층 다각기와 지붕으로 2개의 석주가 기둥에 세워짐- 방지원도형
- 부용지는 네 건축믈(영화당, 부용정, 사정비각, 주합루)에 의해 둘러싸여 있고 지안은 장대석으로 축조, 중도는 자연석으로 둥글게 축조하고 소나무 배식.
② 애연정 역
- 불로문 바로 곁에 있는 방지가 애연지: 단칸짜리 정자(애연정)
- 어수다: 광해비가 피신했던 곳, 애연지보다 앞서 축조.
- 연경당: 어수당이나 애연정보다 200여년 후에 축조.
진장각의 옛터에다 민가를 모방한 99칸짜리 건물
단청을 하지 않음.
동쪽에 향선제가 위치
※ 향선제 뒷편에는 ?자형의 계단식 경원
: 직선적이면서도 선에 변화를 주었기 때문에 단조로움을 피함.
: 5계단으로 구성
: 사괴석을 쌓아 기단의 유곽을 이루고 소나무 무늬의 돌난 간.
: 정상부에는 ?자형의 좁다란 평지-농수정(정자)위치.
: 화계에는 철쭉류, 소나무, 단풍나무가 식재
③ 반월지역 → 지형이나 정자가 한국의 정통경원에서 찾기 어려운 독특한 형태.
- 한반도 모양의 자연 곡수지를 중심으로 하는 정원
- 반월지원은 존덕정이 있는 상지와 판담 이 있는 하지로 구성.
(처마아래에 잇대어 지붕을 올려 마치 이중지붕의 정자로 오인하게 된다)
- 못의 형태는 원래 바누얼형지와 방지를 일지선상의 통로를 중심으로 하여 양편에 배치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양자를 합하여 하나의 못으로 만들었는데, 전통경원에서는 볼 수 없는 것.
- 일영대: 시각을 재는곳.
- 관람정: 반도형의 하지 북안에 위치한 부채꼴의 정자. 수사(水?)형태로 세워져 있음.
④ 옥류천역
- 옥류천을 중심으로하여 소요정, 청암정, 용산정, 취한정, 어정으로 구성되어 있는 유락공간.
- 소요정 앞의 곡수거와 인공폭포… 거암(바위)의 평면에 「c」 자형으로 도랑을 파서 유배(잔을 흐르게 함)목적의 도랑 만듬. 옥류천에서 흘려 들어온 물은 이 곡수도랑을 거쳐 약1.6m의 수직벽에서 폭포로 되어 낙하.
- 청암정: 초가지붕을 갖는 폭포로 되어 낙하.
방지(낚시질을 즐길 수 있도록 물고기가 길러짐)안의 3.8m×3.6m크기의 방도 위에 세워짐.
궁궐의 삼림속에 지어진 유일한 모정(띠모양의 정자).
기능은 자연속에서의 휴식과 유락.
⇒ 결론… 어정, 곡수도랑, 수직폭포, 5개의 정자등이 모두 인공적인 시설이지만 형태의 다양함과 비기학적인 배치, 자연림에 의한 둘러싸임등이 조건 때문에 시각상의 거부반응을 주지않음. 반자연적인 공간.
⑤ 청심정 역
- 반월지의 북쪽 언덕위의 수림속에 있는 삿갓지붕의 정자.
- 남쪽 못가에 못 안으로 기어들어오는 모양의 돌 거북이가 배치.
- 유랑보다는 피서 및 휴식목적으로 지어짐.
b. 낙선제 후원
- 낙선제는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로서 창덕궁의 연침으로 세워짐.
- 낙선제와 석복헌 그리고 수강제의 뒷편에는 모두 직선상의 계단식 후원이 마련.
(모두가 화강암의 장대석에 의해 4~5계단으로 축조한 식재용의 대상지가 마련. 그 정상부에 높이 1.5m~2.0m의 화문장에 의하여 아랫편의 화계와 격리된 동산이 있고 여기에는 정자 또는 당이 세워짐.)
※ 수강제의 후원에 세워진 취운정은 명칭은 정이지만 구조에서 볼 때 당이 더욱 어울림.
- 화계에는 영산홍, 일본철쭉, 옥향나무 등 일본적인 분위기.
- 전통적 요소…괴석배치, 굴뚝
낙선제 뒷뜰의 앞에 놓인 괴석대에는 '소영주'라 음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괴석이 삼신산을 상징하고 있음을 강조.
- 선의 흐름, 계단의 너비, 정상부의 공간으로 연락하는 직선적인 접근로 등에 적당한 변화를 주어 직선에 의한 단 조로움과 지루함을 덜어줌.
c. 창덕궁 후원의 조경식물
- 창덕궁 후원의 자연식생으로는 갈참나무 등 참나무류가 우점종으로 나타나고 느티나무, 산버나무, 밤나무, 단풍나무, 음나무 등이 국지적으로 우세종으로 나타남.
- 소나무는 자연도태
- 하층식재로는 때죽나무, 싸리나무, 진달래, 철쭉.
- 문헌 : 창덕궁 사무소의 「창덕궁 거목지정 목록」
d. 맺음말
- 창덕궁의 후원은 변화있는 자연지형을 가급적이면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적절히 이용.(예 : 낮은 곳-연못, 높은 곳-정자)
- 정적인 관상이나 유락에만 그치지 않고 자연의 숲 사이로 산책하면서 즐길 수 있도록 동적인 공간기능 부여.
- 자연지형을 계단으로 처리하고 정상부에 정․당을 축조→수쇄원이나 환벽당의 후원양식과 비슷.
3)창경궁의 통명전원
- 계단식 후원이나 장방형지의 축조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음.
- 통명전 후원은 계단상 처리→현재는 터만 있음.
- 통명전 서쪽의 장방형지
… 가공석재에 의해 조림된 석교가 축조
가장자리는 화강암 석재로 만든 난간을 두름.
직선적인 방지상에 다리가 걸려 있는 사례는 찾기 어려움.
(2) 민간경원
1) 주택정원
: 조경처리가 되어있는 공간은 주로 사랑채의 마당과 내당 뒤 후원.
… 운조루(유이유의 저택) →경원은 건축물에 비래 규모도 작고 질적인 면에서 높은 면이 못된다.
- 1776년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
- 사랑정원: 외사랑과(운조루) 내사랑(귀래정)행랑채와 서쪽의 담장에 의하여 둘러 싸여진 네모의 구획 안에 있음.
- 현황에서 볼 때 운조루 앞의 지대와 서쪽 담장곁에 조경식재가 이루어 졌으나
'오미동가도'에 의하면 대문 안쪽 마당에 정심수로서 소나무가 심어져 있고 지대에는 괴석과 화문이 교대로 배치.
- 당시로서는 희귀식물이던 위성류가 식재.(1그루)
- 대문밖의 외원은 장방형지를 중심으로 하고 있으며 수구를 만들어 놓았음.
⇒ 결론 : 경원은 평범한 것이지만 특징을 찾는다면 대문 앞에 지원이 만들어져 있었으며, 사랑뜰에는 정심수가, 헛간 앞에는 희귀식물인 위성류가 심어졌다는 것.
2) 별당정원
…별당은 몸채와거리를 두고 따로 지어놓은 건축물로서 조용히 독서하며 지내거나 손님을 접대하는 기능을 지닌다.
a. 화설당
- 유운이 조영한 별당
- 당 앞에는 10m×7m의 직선적인 못. 못 안에 1개의 섬이 남쪽으로 편재→섬에는 배롱나무, 못에는 연을 심었음.
- 섬의 양편지안에는 못 안쪽으로 불룩하게 나온 석축의 반월형식수대가 있으며 여기에 동백나무를 심었음.
- 당의 뒷편 후원…8m×4m 크기의 화오를 마련하고 여기에 괴석 3기를 배치하고 매화, 동백, 석류나무를 심었음. →편재해 있는 중도와 지안에 축조한 식수대의 위치는 화석당의 마루와의 관계를 고려한 것.
b. 경정서석지원
…'정영방'이 병자호란후에 은거할 목적으로 꾸민 것.
이 지원은 '주일제'를 중심으로하여 만든 것이나 못의 서안에는 지원의 주건물이라 할 수 있는 '경정'이 축조.
⇒ 결론(특징)…중도가 없는 방지
지저(연못 바닥)에 깔려 있는 석영맥의 가각에 아칭을 붙임.
'사우단'을 만들어 '매․송․국․죽'을 심고 연못에 연을 심음→경원이 수심양성의 장으로서의 기능.
c. 하환정 국담원(=무기연당)
- '주재성'이 만년에 지당을 만들고 못가에 하환정을 세우며 송․죽․국․화류를 심어 소요 자적.
- 32m×20m의 넓이를 갖는 장방형의 부지와 14m×8m의 보다 작은 장방형의 부지(풍욕루역)로 구성
- 하환정 앞의 방지
…서안에는 지면보다 0.4m낮게 단차 두어 나비 0.6m의 좁은 단을 만듬→지안에 걸터앉아 국담의 경관감상, 낚시
- 연못의 중심에 방도(당주)를 만들고 여기에 많은 괴석을 세워 석가산을 이룸.
- 탁영석…지수면으로 내려가는 석계를 칭함.
- 풍욕루 오른편에 괴석을 세우고 귀주석(거북머리)이라 하고, 지중의 방도를 당주로 부름.
⇒ 하환정 국담원의 특징은 마당 가득히 방지로 채워지고 있으며, 중도인 방도는 괴석에 의해 석가산이 이루어짐.
d. 백화정원
- 백화정은 읍향제라고도 불리우며 '정휴동'이 독서하며 조용히 지내기 위해 제를 짓고 주변에 화계와 지당을 만들어 하나의 경원을 이룬 곳.
- 앞쪽의 화계는 4계단으로 되어 있음.
- 화계의 나비는 단마다 달라서 2.2m에서 5.5m에 이름.
- 백화정의 서쪽에 방지가 축조되었으며 지심에는 지름이 약 8m되는 둥근 섬이 있음.
- 마을과는 다소 떨어진 수림 속에 자리잡고 있지만 건축물과 주변 경원의 특징에서 볼 때 정자보다 별당의 기능
- 경원의 특징: 당 앞에 화계를 만들고, 지안에 개서어나무와 왕버들, 배롱나무를 식재.
e. 다산초당원
- 방지를 만들고 지심에 자연석으로 쌓은 둥근 섬을 두고 있다.
- 괴석으로 석가산 축조
- 3봉 "석가산"(봉래․영주․방장)을 만듬.
- 동백나무 2그루와 배롱나무가 지당의 안쪽 언덕에 식재
- 언덕 윗편에 있는 용천에서 물을 끌어다 비폭(폭포)으로 못 안에 떨어뜨림.
- 당의 좌우 비탈면을 6개단으로 처리하여 서쪽에는 채포를 지당 윗편에는 명화가훼를 심음.
(3) 별서․별업․별장의 경원
※ 별장… 경제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이 경관이 수려한 교외나 산수속에 제 2의 저택으로 지은 것.
별서… 사회의 부귀와 영화를 등지고 농경하면서 자연과 벗하며 살기 위해 벽지에 터를 세워놓은 소박한 주거.
별업… 선영하에 관리를 목적으로 지어놓은 제2의 주가
a. 윤선도의 부용동 원림
…조경적인 측면에서 낙선제 및 곡수당경원역, 동천석실역, 세연정경원역으로 구분.
① 낙선제 및 곡수당 경원역
곡수당 - 고산의 아들 학관이 지은 1칸짜리 초당.
- 중간에는 화초와 과목을 심음.
- 담의 서쪽 끝에는 물이 흐르고 있는데 지형에 따 라 3층으로 섬돌을 축조
- 정자 아래에 곡수가 있음 ; 일삼교를 걸었음.
- 유의교 아래에 곡수를 이루고 당 앞에 이르러서 는 평지가 되었다가 그 아래에 월하탄(여울)을 만듬.
- 언덕위에는 연지가 있고, 못 동쪽에는 소대를 쌓 고, 그 위에 석정을 축조.
- 후면에 두어 층의 화계
- 동남쪽에 방대를 높이 쌓고 대 위에 암석을 쌓아 석가산 축조 → 이 가산의 허리부분에 구멍을 하 나 뚫고 그 가운데 석통을 끼워놓고 뒤에는 온통 으로 물을 끌어들여 구멍을 통하여 못으로 쏟아지 게 하고 「비래폭」이라 불렀다.
- 직선적인 지당터, 장방형의 못이 축조
② 동천석실역
- 한 칸 집을 석함속에 짓고 동천석실이라 명함.
- 부등변 3각형의 연못
- 방지 축조: 미완성, 저수는 불가능(인공적)
- 지하석실에 이르기 위한 10개의 돌계단
③ 세원정 경원역
- 8m×8m넓이를 갖는 방형의 대를 중심으로 해서 계담과 인공방지가 축조
- 계담안에는 매끄러운 암석 10여개 산재
- 방지안에는 방도가 축조: 「방지 속의 방도」… 특이한 수법
- 5개 유입구 통해 물이 방지안으로 들어오고, 계담의 석제높이와 수위가 같아지면 방지의 도랑을 통해 넘쳐나감.
- 여러 개울물이 웅덩이레 거북모양의 돌: 이곳에 다리(비홍교)를 놓음.
- 비홍교 남쪽에는 칠암이 있음.
- 난석을 모아 섬을 이루고 여기에 송․죽을 심음.
- 못의 동쪽 좌․우에 각각 3층의 방대 축조
※ 부용동 원림의 특징 ⇒․건축물은 낙선제(3칸)을 제외하고 단칸 - '퇴'를 달아 앉을 수 있음.
․원림지역마다 지당을 만들었는데 모두 직선적인 방지이며 쌍지이다.
․아민당지원에는 화계를 만들고 각종 화훼를 이식하고 기암괴석을 그 사이에 배치. 정하에 화가(선반)을 설치
․석가산을 만들고 그 허리에 석통을 꽂아 비래폭을 만듬.
b. 남윤정사
…송시열이 말년에 지냈던 별서.
남윤정사의 경원은 정사앞의 지원이 주가되지만 뒷편 언덕위에 세워진 영당(남윤사)중심의 후원도 있다.
- 정사앞의 못은 둥근섬이 있는 곡지형인데 동쪽에 넓다란 오두암이 있어 부정형지를 이룸.
- 폭포를 이루기 위해 자연석에 의하여 약 1.7m축조
- 조경수목: 곰말채, 왕버들, 소나무
- 정사의 마루방 아래로 물을 흐르게 한다거나 계류의 유입구쪽에 조그마한 폭포를 만들었다는 것도 특징.
- 후원…약 30˚경사의 비탈면에 이루어지고 정상에는 사당.
사당에 이르는 통로로서의 석계
솜대나무 숲 조성
(우리나라 전통적인 후원과는 달리 계단상으로 처리하지 않고 비탈면을 그대로 이용)
c. 윤개보의 조석루원(별업원)
…윤개보가 영모제를 짓고 그 앞쪽에 조석루와 한옥관을 지었으며 금고지를 만들고 지안에 척영정이라는 '사'를 세워 별업원을 이룬 것.⇒ 지금은 영모제와 금고지 그리고 녹음정만 있다.
- 금고지…이색적인 다각형지이며, 장방형지의 서편에 3각형지를 잇대어 놓은 형태. 잉어를 기름
- 녹음정…3개의 섬이 3각형 배치. 당시에는 배롱나무가 많이 식재
d. 김조순의 옥호정원(별장원)
…당대에 권세가 당당했던 김조순이 조영했던 별장
삼청동계곡의 동향비탈면에 ?자형의 주거를 중심으로 계단식 후원 사랑정원, 채포, 과원 등을 곁들어 놓은 것
- 정심수로서 회화나무
- 사랑채 마당의 앞쪽 가장자리에 물이 흘러내리는 도랑
- 안채의 후원으로는 '석계'에 의해 오르게 되어 있음
- 후원 왼편 담장 밖에도 '정'과 '담'을 중심으로 하는 동산 마련
- 인공축산과 괴석 배치
⇒ 직선적인 공간처리와 직선적인 화계에서 전통적인 조경수법을 볼 수 있다.
(4) 산수경원
…산수경관의 수려한 자연속에 터를 잡고 주로 여름 한철을 지내기 위하여 세운 정자를 중심으로 하는 경원
※ 정(亭)…벽이 없는 건축물을 말하며 주로 여름철을 지내기 위해 자연속에 세운다.
a. 오죽헌원
- 헌의 앞쪽 낮은 곳에는 사다리꼴의 연못이 있으며, 지심에는 조그마한 둥근섬이 있었다.
- 헌의 뒷편 방지에는 노두암을 이용하여 섬을 만들었음.
- 오죽헌원은 마을의 후산너머 산 기슭에 건축한 정자와 그 전․후에 마련한 지원으로 구성.
- 직선적인 지당 안에 둥근섬 만들고 지안에 중국원산종인 배롱나무를 심는 남도지방의 전통적인 조경수법 사용
※ 오죽헌원에 사용된 수목(평면도에 의한 수종-소나무, 측백나무, 배롱나무, 느티나무, 푸조나무)
b. 활래정 지원
- 활래정…선교장에 이르는 입구에 60m의 거리를 두고 위치
외관상으로는 호두(범의 머리)각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안에 세워진 건축물과 여기에 직각으로 연결하여 지중에 주초기둥을 두고 있는 정자
- 별당과 같은 기능을 가지기도 하지만 벽이 없으므로 정자의 범주
- 지당은 직선적인 방지이며 지심에는 방도가 축조되고 적송이 심겨져 있음
- 지안에는 배롱나무가 지내에는 연꽃이 식재
- 특징: 방지 속의 방도(예: 부용동의 세연정지원과 하환정 국담원)
c. 임대정원
- 정자중심의 '대상원'과 지당중심의 '대하원'으로 구성
- 노반 남언기가 초려를 짓고 원을 꾸며 '노반원'이라 하고 300여년 우헤 민주현씨에 의해 재창원한 것
- 대상원은 임대정을 중심으로 하여 그 주변과 도떸?의 수원 으로 구성
: 정심수-적송
: 자연석면에 「사애선생장구지소」라 음각된 표석
- 「세심」이라는 표석을 세워둔 방지
- 대하원…2개의 못으로 구성
남쪽의 못: 칼모양, 2개의 섬(각각 1그루 배롱나 무, 1기의 괴석배치)
서쪽의 못: 방형지, 지심에는 1개의 둥근 섬-배롱 나무, 괴석배치
d. 탐진강의 부춘정과 용호정원
- 부춘정…목조건물로서 1칸 짜리 방 2개와 마루로 구성
노송-정심수 역할
- 용호정…'최규문'이 세운 것. u자형의 대지가 있음-'사모대'
- 경호정
- 영귀정…대지는 비탈면을 깎아서 이룬 것
…왼편 언덕은 앞쪽을 자연석으로 쌓아 호안처리를 하고 '풍호대'라 함
→풍호대는 영귀정이 수림속에 세워져 있어 전경을 조망할 수 없는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전망대 역할
…지안에서 수십m안으로 들어간 수림속에 있어, 정자에서 탐진강을 볼 수 없으며, 접근을 위한 다리가 없 다.
⇒ 탐진강 유역에 조성되고 있는 정자는 시야를 가리우지 않도록 조경식재를 함에 있어 제한이 많았다.
다. 조경식물에 관련된 문헌
(1) 산림경제
: 홍만선
: 전 4권 중 조경식물에 관계가 있는 부분은 1권의 '복거'와 2권의 '양화'임 예)1권의 「복거」중
- 동쪽에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 남쪽에 매화, 대추나무, 서쪽에 치자나무와 느릅나무
북쪽에 능금나무와 살구나무를 심는다면 청룡․백호․주작․현무를 대신할 수 있다.
중정에 나무를 심는 것은 좋지 못하다.
(2) 순원화훼잡설 : 신경준의 유고를 정리하여 엮은 '여암전서 제 10권'에 수록
(3) 화암수록
: 「양화소록」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관상식물에 관한 수록
: 내용은 화목9등품제, 인제의 화목9품, 화품평론, 28우총목, 화개월령, 화암9곡, 매농곡, 촌구, 화암만어,화암기매설, 서한, 제문, 오언 및 칠언의 절구와 율시
: 언급된 것은 총 59종
(4) 물보
: 이가환과 이재위 부자에 의해 완성된 1권 1책의 사본
초․목․화훼․충․어․금․조․복식․제탁․주거․인륜 등에 대한 명록이다.
(5) 물명고
: 5권 1책으로 구성. 저자…유희
조류․초목․토․석․금 등의 명록
특징-한자명에 우리말은 물론 간혹 일본어로 곁들어 적혀 있어 한자로 된 중국의 사물에 대한 호칭을 바로 아 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6) 임원십육지(임원경제지)
: 저자-서유구
일종의 농가백과사전. 조경분야와 관계가 있는 것은 "예원지"와 "상택지"
․예원지- 제 18권~제 22권. 주로 화목류
․상택지- 제 107권~제 108권. '정기총론'과 '8역명기'로 구성
Ⅴ. 혼란기(20세기 전기)의 조경문화
가. 시대배경
- 명성황후살해, 단발령, '개화'라는 이름아래 일본화 촉진, 을사늑약. 즉, 20세기의 전반기는 일본군국주의 자들의 동남아 침략으로 인해, 피침략국가에 있어서는 그들의 문화가 단절, 말살되는 시기였으며 문화사에 있어 혼란기에 처한 시대였다.
나. 경원각론
(1) 금원
a. 덕수궁의 석조전 정원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고종이 순종에게 왕위를 주어 개명
1909년 우리나라 최초의 양식건물인 이오니아식 석조전 축조.
정관헌 - 지붕과 난간은 한국적, 기둥과 내부구조는 서양식
-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는 함녕전과 정관헌 사이의 계단식 화계와 능명전과 즉조당의 후원은 한국적 분위기,
석조전 앞의 정원은 서양식
침상원(sunken garden) - 석조전 앞의 좌우 대칭적인 기하하식 정원
평지보가 낮은 위치에 만들어짐
방형과 반원형을 조합한 모양의 못
지심에 분수대 - 동, 서, 남, 북에 청동제 물개 배치
청동제의 해시계
등나무 시렁(pargola)이 남북축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적으로 배치
b. 창경궁
일제가 황제의 마음을 돌리고 궁궐의 권위를 격하시킬 목적으로 창경궁안에 동물원과 식물원, 유락목적의 못과 수각을 만들어 궁궐의 기능에 변화를 주었음.
춘당지 - 못의 윤곽은 자연곡선으로 처리
이체의 상반신상과 같은 모습으로 형성 - 목부분에 다리
일본식 8각형 수각 - 1966년 개조 - 한국식 6각형 누정
식물원 - 대온실 1동, 소온실 1동, 입체온실 2동, 재배온실 1동
동물원 - 보루각을 헐어 내고 그 일대에 만들어짐
맹수사 - 낙화사 - 와조사 - 사자사 - 원숭이사를 건립
(2) 공원
1) 서울의 공원
a. 탑골공원(탑동공원 or 파고다공원)
우리나라 최초의 공원
13층의 석탑, 원각사비, 앙부일귀의 대석, 8각정
영국인 brown이 설계, 건설
b. 장충단 공원
1919년 6월 창설
장충단은 나라를 위해 전사한 충신열사를 모시고 조의를 표하며 제사를 지내던 곳
운동공원의 기능-현재
c. 사직공원
태조 3년에 건립한 '국사단'과 '국직단'을 합쳐 3층의 돌층계로 되어있음
d. 효창공원
'문효세자'의 묘원(효창원)을 중심으로 조성
현재 김구선생의 묘와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등 세의사의 묘가 있고 축구경기장이 있다.
e. 삼청공원
자연공원의 일종
중종시대의 별장이었음
3청-도교의 대청, 상청, 옥청을 말함
옛날에 도쿄의 도장이 있었다고 함
f.남산공원
8각정, 남산타워, 국립도서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 시립도서관 김구, 방정환의 동상
1910년에 '한양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
1930년대 이후에 '남산공원'이라 부름
2) 지방의 공원
*소록도 중앙공원
일본인 주방정이가 3년4개월에 걸쳐 만듬
설계, 시공-일본인 '송이'라는 조경가.
중앙공원은 남과 북을 연결하는 축으로서의 중앙원로를 중심으로하여 상지, 하지, 마리아원으로 구성
주요시설 : 개원 40주년 기념비, 화정원장창덕비,
외국인 공간적 5.16 민족상 수상기념비, 적송림대 한하운의 '보리 피리' 자연석 시비
중앙공원 수목목록에서 보면 75종이라는 많은 식물이 심어져 있는데 일본원산종인 침엽수가 많다는 것이 특징
낙엽활엽수가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낮고 소나무, 공작편백, 황금편백, 가이즈까향나무 등 침엽수가 주 수종
3) 민간정원
이훈동의 유달동 정원
- 일정시대인 1930년 대에 일본인 내용만평이 서원양식의 저택을 짓고 정원을 꾸민 것
- 난대성 상록수가 많이 심겨짐
- '춘일형' '원주형' '직부형' '설견형'등 일본식 석등의 형 태
- 일본식 5층탑과 7층탑, 곡선지, 반교, 쓰꾸바이 등이 보존
- 전원 : 현관에 이르는 원로의 양편에 상록수를 밀식
현관으로 꺾이는 부분에 축산조성-자연석으로
- 내원 : 정심수 역할의 후박나무
- 서쪽의 임천원 : 일본원사종의 상록수 밀식
- 일본식 세류형의 지천을 만들고 반교를 만듬
- 후원 : 급한 비탈면을 깎아 몇 개의 단을 만들고 중앙 부위에 넓은 잔디마당 조성
- 수종 : 총 117종인데 상록수가 59%를 차지하는데 점 유면적에 있어서는 90% 다다름
Ⅵ. 일본의 20세기 전기
명치유신으로 생활문화를 비롯하여 건축과 조경면에도 양풍이 크게 불어 왔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양식정원은
신숙어원 : 프랑스식 + 영국식정원
적판리궁원 :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형성
1903년-일본최초의 서양식 도시공원인 '하비야 공원'개원
신숙어원-원래는 강호시대의 내등가의 소유였으나 1870년 대 초에 내무성으로 넘어와 농사시험장으로 이용
1879년에 궁내성으로 이관함과 동시에 신숙어원 이라 불렀다.
앙리.마르티네에게 설계의뢰(복우 일인 이라는 사 람)
1902년에 착공하고 1906년에 완성
프랑스식과 영국식 그리고 일본의 지천회유식으로 구성
-동남쪽의 정문근처에 르 .노트르 식을 도입한 프 랑스식 정원
중앙에는 넓다란 잔디마당 중심의 목장풍의 영국 식 정원
서쪽에는 일본의 지천회유식 정원
특히 프랑스식 정원에서 볼수 있는 원로 양편의 식수대는 플라타너스를 원뿔모양으로 잘라다듬었 고, 그 안쪽에 직선적이면서도 들락날락 변화있게 심어놓은 저목성 상록수가 신숙어원에 통일감을 부여함.
비교 : 중국 - 송․남송 시대, 원 시대 일본 - 평안시대 후 기, 겸창막부시대
Ⅶ. 한국조경에 영향을 끼친 사상
1.은일사상
우리나라 전통사회의 자연관 내지 인생관에 구체적으로 반영된 사상중의 하나가 도가적 은일사상이다. 은둔사상이 참여를 거부하는 완전한 현실도피를 의미하는 데 반해 도가적 은일사상은 초탈과 덕행고사의 초세를 뜻한다. 이와 같은 도가적 은일사상은 노장사상의 핵심인 도와 무위의 개념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노장사상에서의 도는 주로 궁극적인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결국 자연이라는 모든 존재의 모태 속으로 돌아감으로써 인간의 우환이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있다는 자연에의 귀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무위란 자연대로 살아가는 일을 가리키며 『도법자연』을 인정할 때 무위는 도를 파악하는 행위이며 도를 따라 살아가는 행위로 보고 있다.
은일사상은 현세에 대한 관심이나 명리에 연연한 욕망을 벗어나 스스로의 고답을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러 한 도가적 은일사상은 은일적 자연관으로 발전되어 전통사회 특히 조선시대의 시조 등의 문학에서부터 조경문화에 까지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은일사상에 의해 특히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는 조경작품들로는 조선시대에 주로 이 루어졌던 별서정원을 들 수 있다. 이들 별서정원들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유배생활중에 이루어졌다.
민간정원들로서 현재까지 유적이 남아 있는 것들만을 살펴본다면 정영방이 병자호란 후의 은거생활중에 조성한 경정지원, 정약용이 순조때의 신유교란에 연루되어 유배생활중에 조성한 다사초당원림들이다.
2.신선사상
고대중국의 선술 신선사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와 일본에 두루 보급되었던 도교적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세계적인 문화유산 ‘종묘’
- 강한 유교 정신이 표현된 절제된 공간
- 향대청, 공신당, 칠사당 등의 부속건물이 있다.
- 제향공간이므로 연못의 섬에는 소나무 대신 향나무를 심음
中國의 조경사
Ⅰ. 고대의 조경문화
1. 은․주 시대의 임원
(1) 은
․언덕 위에 원시적인 도시가 형성
․사냥을 위해 먼 삼림지대까지 나가야만 했음
․수렵원과 같은 것은 만들어지지 않은 듯함.
(2) 주(B.C 11C - 250B.C)
․조경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나타남.
「시편」의 대아편에 소개: 영대, 영유, 영소(문왕대)
․영대 - 주의 중기시대 이전의 정원
낮에는 조망을 하고 밤에는 은성명월을 즐기기 위한 높은 자리 필요함.
연못을 파고 그 흙을 쌓아올려 높은 영대를 만듬.
※ 후한시대의 「설문해자」
․원(園)…과수를 심는 곳
․포(圃)…채소를 심는 곳
․유(?)…금수를 키우는 곳이라고 풀이
중국정원의 기원,
여러 문헌과 기록을 종합해서 정의 내리자면 왕후의 놀이터로서 숲과 못이 갖춰진 동물을 사육하는 광대한 임원
→성격상 후세의 이궁에 해당
․문황이 경영했던 원유의 규모는 사방 70리 → 맹자의 「양혜왕장구」의 기록에 나타남.
2. 진․한시대의 원정
(1) 진(249C - 207B.C)
․진의 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여 함양을 수도로 삼으면서 궁궐의 조영을 비롯하여 광대한 토목공사를 벌임.
예) 아방궁
(2) 한(206B.C - 220A.D)
․진의 영토와 문물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은 통일국가
․수도였던 장안과 낙양에서는 화려한 궁전과 궁원이 아름다움을 과시
․신선사상이 담겨진 정원이 최초로 꾸며진 시대
1) 금원
※ 상림원 …장안의 서쪽 위수의 남쪽에 위치
진의 구원이었던 것을 다시 꾸민 것
70개소의 이궁
원내에는 각지로부터 헌납한 꽃나무 3000여종
백수를 사육 → 사냥터로도 쓰임
곤명호를 비롯한 6개의 대호수를 만듬.
예장대 : 호반에서 경관을 감상하는 건물, 배를 띄워 감상하기도 함
※ 태액지 …장안의 건장국 내의 곡지 중 하나 태액지, 당중 지
궁궐에 가까운 금원
영주, 방장, 봉래의 세 섬을 축조하고 조수와 용 어의 조각배치 → 신선사상을 반영한 수법
․한시대 건축의 특색 …토단을 작은 산모양으로 쌓아올려 그 위에 건물을 지어놓는다는 점 (이보다 더 높이 지어진 건물을 「대」라고 함)
※ 관(觀) …높은 곳으로부터 경관을 바라보기 위한 건물
※ 거상 원광한(人) - 북산 밑에 큰 정원을 만듬.
- 격류를 만들고 암석을 쌓아 만들고 진 조기수를 사육
- 기수이초를 심었고 실(室)과 각(閣)을 즐비하게 건립
…한나라 때에는 이미 자연의 경관을 본떠 정원을 꾸미고자 하는 사상이 일반화 되어가고 있었다.
3. 삼국(위․촉․오)시대(221 - 280A.D)
삼국 중 위와 오는 화림원이라는 같은 이름의 금원을 조영, 둘 다 못을 중심으로 하는 간단한 경원
․위의 화림원(낙양성 내): 여러 개의 대를 축조
․오의 화림원: 낙양성의 화림원을 모방
4. 남북조와 수․당 시대의 조경(421 - 907A.D)
(1) 제왕조의 궁원
․각 왕조의 교체는 어지러웠으나 일단 제왕의 자리에 오르기면 권력을 과시하고 생활면에 있어서 환락을 구하기 때문에 예외없이 궁월과 궁원이 호화롭게 경영되였다.
1) 남북조(421 - 581A.D)
■남조
․화림원 … 왕조는 바뀌어도 궁원이 계승
․자연조건 … 강남땅은 강북과는 달리 평원의 원망(遠望)은 없어도 산수의 경관이 풍부... 때문에 인력을 별로 투입하지 않아도 수림과 호수의 자연경관을 살린 정원을 쉽게 꾸밀 수 있었다.
■ 북조
․같은 이름을 가진 화림원이 경영되었다. 지금은 토루만 남아있을 뿐 옛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 화림원(북위): 낙양성에 있던 것을 복원하여 유지함. 양현지의 낙양가람기에 그 모습이 묘사됨. 화림원에 봉래산, 선인관, 조태전, 홍예가 등이 있는데 이것이 불로장생을 희구하는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한 듯 하다.
2) 수(581 - 618A.D)
․양제 - 낙양에 성을 축조하여 수만호를 이주시켜 수도를 번 성하게 함
- 즉위하면서 현인궁을 조영하여 궁원을 꾸밈.
- 남북을 연결하는 운하 개착
3) 당(618 - 907A.D)
※ 경원의 특징 : 자연 그 자체보다 인위적 정원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중국 정원의 기본적인 양식이 확 립 되는 시기.
: 불교의 영향을 받아 온건, 고상하면서도 유 정한 분위기를 준다.
․금원 … 장안성의 경원
대명궁원: 장안성의 북쪽에 위치. 봉래지를 중심으로 한 경 원
장안의 3원: 서내원, 동내원, 대흥원
․이궁
① 온천궁 - 대표적인 이궁, 태종
- 온천을 이용
- 장생전을 비롯한 전각과 누각이 줄줄이 세워짐 →산의 모습도 바뀔 정도
- 후일 현종에 의해 「화천궁」으로 삼음.
② 취미궁 - 온천궁을 창건했던 태종이 태화궁의 유적에 취 미궁을 지어 그 전체를 궁원으로 삼음.
③ 구성궁 - 수시대에 경영되었던 인수궁의 터
- 태종이 피서를 위해 이 곳을 찾았을 때 샘이 솟아난 것을 기념하여 비(비석)를 세운 것에서 비롯
- 산구를 의지하여 궁전을 세워 대지(큰 연못)를 파서 물가에 정수를 자리잡게 하였으며 고각이 서로 이어져 사방으로 뻗어나간 형태
- 산악지대의 이궁으로서 산이 아홉으로 겹쳐 보 인다고 해서(구성궁)이라는 이름
④ 대명궁 - 금원의 동남에 위치
- 함원전, 선정전, 자신전을 비롯한 여러 누각이 있음
- 태액지를 중심으로 화려한 정원 조성
⑤ 홍경궁 - 현종황제의 어린시절 저택을 확장하여 조성
용지: 큰 연못으로 호반에는 용당과 침향목으로 지어진 침향정이 세워짐.
「화악사휘루」와「근정무본루」라는 누각
․민간인의 경원
① 이덕유의 평천산장
- 강변의 극담록 →무산 12봉과 동정호의 9파로 온 듯 하다.
- 업몽득의 평천초목기발 →천하의 기화이초와 진송괴석이 즐비하게 배치되어 선부를 보는 듯하다.
② 백거이의 원림생활 - 일평생 조원 생활과는 떨어져 살 수 없었던 애원가
- 최초의 조원가-「장한가」,「지상편 서문」,「동파종화」같은 시에 당시 정원을 묘사
(2) 문인의 청유
- 왕자는 권력과 재력으로 대관을 지어 못을 파서 유락의 자 리로 삼았으나 자연미를 사랑하고 아끼는 문인들은 이것을 산악에서 찾고 강호에 놀아 인생을 즐김
․진(晋)의 왕희지 난정기
- 회계산의 난정에 벗을 모아 연석을 베풀어 스스로 그 광경 을 문장으로 지음 → 후세의 정원조영에 영향을 미쳐 원정 에 곡수를 돌리는 수법은 근세에 이르기까지 계승(유상곡수 연, 곡수수법)
- 신라 포석정과 같은 기능 (유상곡수)
⇒ 이상과 같이 자연을 탐미하는 사상은 한․삼국․진․남북조 로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시나 문장으로 말미암아 차츰 일반화되어 역대 제왕이나 귀족이 궁원이나 가절한 곳을 골라 지방영주나 부호들이 공비나 기부금으로 누정을 지 어 민중과 함께 즐기는 풍습이 생겨남. (예: 왕희지의 난 정)
(3) 당나라 시인의 취미
․백거양(백락천) - 당나라 중기의 사람. 「비파행」,「장한 가」등 유명한 시
-「백무단」이나「동파종화」- 당의 정원을 가장 잘 묘사
- 스스로 감독하여 정원을 꾸밈 - 정원 축 조에 흥미
- 정원석으로 쓸 진기한 돌을 먼 고장으로부 터 손수 가지고 와서 배치
- 중국조경의 개조
※ 왕유 … 장안의 망주에 거처를 정하고 산수 사이를 소요 하면서 별장생활을 즐김 → 정원에 대한 사고방 식이 자연 자체에서 인위적인 정원을 중요시하는 쪽으로 옮겨감을 알 수 있다.
․물의 흐름을 이끌어 원지를 만들 수 있었고 또한 운하를 이 용하여 강남의 명석을 실어들일 수 있었다 → 중국정원의 기 본양식이 이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
․이 시절에는 정원뿐만 아니라 건물사이에 자리잡은 공간(원자)에도 화훼류를 가꾸었으며 벽돌(전)을 깔아 놓음.
․구획지어 꽃나무 따위를 가꿈
Ⅱ. 중세의 조경문화
1. 북송시대의 조경(960 - 1279)
(1) 시대배경
․문학 : 구양수, 소식, 왕안석 등의 문장가
․유학 : 불교나 도교의 영향을 받아 정신이나 우주와 인서에 관한 연구
․남송 : 태호, 심양호, 동정호 같은 큰 호수주변에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 많았다.
: 수려한 산수경관을 찾아 별장, 저택을 짓고 부지 안에 지산을 만들고 괴석을 도입.
: 모방보다는 수경에 더 비중을 둠. → 주밀의 「오흥원 림기」
․북송: 남송과는 자연조건이 달라 명산․호수를 모방하는 조경 수법 사용
(2) 금원
․4원(園) - 경림원, 금명지, 의춘원, 옥진원(폐지되어 경림원 과 금명지만이 경영)
․경림원 - 금명지와 마주보고 위치
- 운로가에는 노송, 고백이 우거지고 석류원․앵도원 등의 화원
- 정사가 지어져 유람객을 위해 술집이 영업됨.
- 양춘이월에 일반에게 공개되고 3월상사에 황제가 람행한 다음 폐쇄
․화취망 - 원의 동남우에 만들어진 구릉
- 거암을 앉혀 「부석신운만세봉」,「옥경독수태평 암」이라 명령
- 백석으로 만들어진 계도는 곡절하면 산을 오름
- 연못주위에 석난간을 돌림
․만세산 - 휘종이 세자를 얻기 위해서 봉황산을 닮은 가산을 쌓아올림 → 후에 간산으로 개칭(이 곳에 쓰인 돌 은 태호석임)
※ 태호석 … 전대미문의 대석가산을 이룬 암석 가운데 가장 큰 바위를 이르는 것, 운하를 이용하여 운반(화석 강이라 부름)
(3) 경원에 관련된 문헌
․이격비의 「낙양명원기」
- 낙양은 당이 멸하고 북송이 건국한 뒤에도 여전히 하나의 도읍으로서 번영
- 오랜 전통을 이어 받고 있기 때문에 저택이나 정원은 옛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
- 이격비는 낙양지방의 명원 20곳을 소개하였다.
(참고: 관료나 부호의 소유물로서 화비를 일삼는 왕후의 그것과는 달리 소위 아취를 중히 여기는 사대부의 정원)
․구양수의 「취옹정기」… 시골에서의 산수생활을 표현한 것
․사마광의 「독락정기」… 낙양에 600여평 정도의 규모에 독락원을 꾸미고 유유자적하였음.
․주돈이의 「애련설」
- 주돈이가 연꽃을 군자에 비유, 예찬한 글
- 애련설에서 국화「은일자」, 모란「부귀자」, 연꽃「군 자」라함
- 애련설은 유학자, 선비들에 영향을 줌, 경원의 주요한 사 상적 배경
2. 남송 시대의 조경(1127 - 1279A.D)
(1) 남송의 정원
- 옛 시절과 같은 궁전을 조영할만한 힘은 없었으나 자연미 와 기후가 이상적인 고장이었다.
- 강남의 땅은 인공을 가하지 않아도 자연 그대로의 산수가 매우 아름다움
- 조경의 주안점을 태호석과 같은 기암을 알맞게 배치하는데 두었음.
․고종 : 어원인 덕수궁 속에 큰 못을 파고 물을 끌어 서호처럼 만들어 놓음
: 한편 석가산을 쌓아올려 정상부를 비래봉과 흡사하게 만들어 놓음.
: 작은 정원이라 할지라도 한 두개의 태호석에 의해 이 루어진 석가산을 주로 하는 정원이 많다.
․오흥과 소주의 정원 - 물이 풍부한 도실로서 태호가 가깝기 때문에 태호석에 의해 이루어진 석가 산이 주
(2) 경원에 관련된 문헌
․주밀의 「오흥원림기」: 오흥은 태호의 남쪽에 있는 도시로서 많은 명원이 있었다.
: 오흥지방의 명원은 태호가 가까이에 있어서 정원재료로 많이 이용되었다.
: 원림기에는 명원 33개소를 소개하고 있다.
3. 금 시대의 조경(1115 - 1234A.D)
․금원 …여진족이 금원 창시하여 태액지를 만들어 경화도를 쌓아 원․명․청 3대 왕조의 궁원 구실 정원을 축조. (→「북해공원」이라고 하는 이름으로 현재 일반에게 공개)
4. 원 시대의 조경(1206 - 1367A.D)
․시대배경: 수도를 북경으로 옮김. 동서 사이의 도로가 개통되고 외국문화수입
․금원 : 원 시대의 금원은 송대 이후 계속되어온 석가산 수법 으로 도처에 석가산이나 동굴을 만듬.
: 금 시대에 만든 태액지 내의 경화도의 중앙에 자리잡 은 산을 만수산이라 부르고
: 정상에는 테베트식인 백색의 라마 탑을 세움.
: 태액지의 남서 안에 「홍성궁」과「융복궁」을 세움.
․민간경원 - 북경의 「만류당」: 수백그루의 버드나무가 있다.
- 소주의 「사자림」: 불교의 사자자리에서 딴 이 름. (사자림의 선자정은 창덕궁 후원의 관람정과 유사한 형태를 가짐)
- 조경가 예찬과 화가, 시인인 주덕윤이 공동 설계
- 석가산이 아주 유명함.
Ⅲ. 근세 전기의 조경문화
1. 명 시대의 조경(1368 - 1644)
…수려한 풍토미를 갖춘 곳이기 때문에 호화로운 건축은 필요 없고 쉽게 경관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서경정원․서참정원․왕원미의 소지원․졸정원 등 우수한 정원이 많았다.
(1) 금원
․어화원: 자금성 근처에 축조. 어화원의 특징은 건축물이 모두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고 정원도 마찬가지였다.
․경산: 자금성 밖 정북쪽에 위치. 원시대에는 「청산」, 명시대에는 「만세산」이라고 부름.
풍수설에 따라 5개 의 봉우리를 만들고자 정상에 정자를 세움.
이 산에 이르면 자금성은 물론 태액지와 북경성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2) 민간경원
․작원: 미만종이 북경에 조영.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작원은 물을 교묘히 이용하여 큰 못을 만들고, 물가에 버드나무를 심고 물 속에 백련을 심는다.
곳곳에 다리와 정자를 가설하여 여러 곳으로부터 경관을 조망하도록 함.(태호석을 이용한 가산 축조)
․정방 …대안과의 사이에 걸어놓은 다리를 수사로 삼은 건물
풍경을 관상하면서 대안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되어있다.
․위지량 …작해당으로 향하는 여섯 번 굽은 다리
․작해당 …작원의 주건물. 태호석이 세워져 있다.
․송풍수월 …갈대로 지붕을 이은 정자의 이름
․졸정원 : 소주에 위치
: 징은 반 이상이 물인 그 수경에 있다.(3개의 섬과 그 것을 연결하는 곡교)
: 정원건물(원향당, 하풍사면정, 방안정)
「원향당」: 주돈이의 애련설에 나오는 「향원익청 정정정 직」에서 유래한 이름
: 주요 건축물로 「십팔만다라화관 십육원앙관」이 있다.
(3) 명대에 발간된 정원관계서적
1) 문진형의 「장물지」12권
…자는 계미. 계무부와 같은 시대. 같은 소주 지방 1권~3권까지에 화목수석 등 정원에 관한 기사
2) 원야
…일명 탈찬공(奪天工)이라고 함. 저자는 계성
중국 정원을 전문적인 면으로 다루어 놓은 유일한 책자
① 제 1권 : 흥조론
․설계자가 시공자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
․원내의 배치나 차경에 대해 총괄적으로 설명
․원설(原說): 모름지기 임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촌곽의 구별없이 토지는 편비한 곳이 탁월하다. (‘응시이차’ 에 관해 언급 - 계절에 따른 경관을 경물로 차용하는 수법)
․상지(토지의 외모), 기반(건물의 기초), 옥물, 장절(조작․건패)의 네 분야로 나누어 설명
․중국정원은 대사 각 따위를 주첨경물로 삼고 있기 때문
정원 내의 가옥 구조는 자연과 합치된 것이라야 된다하여 여러 방법으로 건축방법을 해설하고 있다.
② 제 2권: 난간에 대한 100여가지 방식
③ 제 3권: 문창, 차경, 장원, 선석, 포지, 철산의 6부분에 대한 설명
※ 차경에 대한 부분
…외부의 풍경을 이용하여 이것을 정원의 일부로 삼는 차경수법은 매우 중요
→주거로 삼을 자리와 자연경관이 좋은 곳과의 관계를 4가지로 서술.
원차-원경을 이용
인차-인접부분의 경관을 빌어쓰는 것
앙차-높은 산악의 경치를 빌어쓰는 것
부차-낮은 곳에 전개되는 경치를 빌어쓰는 것
Ⅳ. 근세 후기의 조경문화
(1) 청 시대의 조경(1616 - 1911A.D)
1) 시대배경
․불교 쇠약, 도교가 하층 민중에 확산, 라마교, 회교, 기독교 등이 퍼짐.
․마테릿리치: 선교활동, 천문, 역법 등의 서양 학술과 기술 전파
2) 금원
․건륭화원(자금성 내): 괴석을 이루어진 입체공간이며 전체적으로 리듬감을 준다.
5개의 계단으로 이루어진 계단식 화원
년수궁의 한 구획으로 고화원․수초당․췌상루․부망각․군근제의 5부분의 나누어짐.
① 고화원: 석가산에 의해 이루어진 정원이고 5개의 누각이 있다.
② 수초당: 평면적인 안뜰 구조로서 회랑 속에 꽃나무를 배식
③ 췌상루: 연취루를 세우고 동쪽에 삼자현을 앉히는 한편 이 중간에 대석가산을 만들어 구각의 용수정을 건립
④ 부망각: 원형의 벽라정을 곁들인 이층누각. 수옥헌과 양화정사의 건물이 있다.
⑤ 권근제: 평정구조로서 석가산 위에 죽향관이 위치
→건축과 석가산의 묘미는 최고로 발휘되었으나 자연미를 찾아볼 수 없다.
․경산: 풍수설에 따라 쌓아올린 인조산, 황성의 병풍구실
․서원: 화궁의 외원
금․명․원․청 이래 4대에 걸쳐 조영된 것으로 북해, 중해, 남해로 이루어진다.
※ 북해: 현재 남아 있는 경원 중 가장 오래됨. 봉래도를 상징한 경화도와 티벳식 라마 백탑이 있다.
중해: 근정전 등의 궁전이 있다.
남해: 방장도가 있고 섬 주변에는 태호석의 석가산이 있다.
3) 이궁
․청조의 이궁은 강희, 건륭시대에 많이 축조.
건륭시대에 만든 「만수산 정의원(이화원)」,「옥천산 정명원」,「향산 정의원」,「원명원」,「장춘원」
「3산 5원」이라 함. 현재 남아있는 것은 이화원과 피서산장이다.
․이화원(청의원): 전체의 4분의 3이 수면이며 원의 중심은 만수산이며,
전체의 경원궁정구, 호경구, 전산구, 후 호구 4개의 구역으로 나눔.
특징은 강남의 명승을 재현 신선사상을 배경, 상천기법을 쓴 점.
청대 왕궁 경원의 예술적 성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열하피서산장(열하이궁) : 승덕에 있는 황제의 여름별장.
특징으로는 남방의 명승, 건축을 모방. 소나무의 정연한 식재, 산 장 안의 다수의 사묘 등
※․강희 황제가 이궁을 지을 것을 명함.
․「담박경성전」(=남목전) …녹나무로서 기둥을 단청칠을 하지 않은 소박한 건물. 궁전건물로는 특이한 존재.
․황와홍주의 궁전식 누각이 많이 있다.
․청음각이라는 극장
․강희제의 장춘원: 독서를 위한 서제를 짓고, 호화라기보다는 소박한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원명원 이궁 (강희 48년): 북경에 조성, 수십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경영되어온 곳인만큼 노목이나 수림에 부족한 것이 없음.
※․만방안화: 형태의 흥미로운 건물
․수목명슬: 유수를 이용하여 선풍기를 돌리는 건물
․해기취와 해안당: 이탈리아와 프랑스 선교사에 의해 조영된 서양건물
․대분천을 중심으로 한 프랑스식 정원 … 동양에 있어서 서양식 정원의 시초(Le Notre의 영향)
․만수산 이궁: 건륭 15년에 황제가 황태후의 환력 축하 위해
명나라「원정사」유지에「대보은연수사」짓고「옹산」을「만수산」으로 고침.
못 손질하여 「곤명호」라 명명.
※․「청의원」이라 했다가 지금은 「어화원」으로 불리고 있다.
․처음 목적이 사원을 세우는 것이었으므로 궁전 누각은 부수적이며 대가람인 「불광각」중심으로 한 수원이다.
․덕화전: 3층 건물의 대극장
․보운각: 구리철로 만든 건물. 이러한 건물은 속칭 「동전」이라고 함
․지혜해: 일명 「무량전」이라 불림. 목재는 일절 쓰지않고 전돌(벽돌)로만 지어놓음.
․도금한 와우(臥牛)상: 호수의 수호신 상징(한 시대의 전통에 의한 것)
․해취원: 건륭제가 가장 애호하던 순강남식 정원
만수산 이궁 내에서 가장 미적
명원 「기장원」을 본따서 조영
4) 양주와 소주의 명원
-양주의 명원
…호화로운 별장이 자연의 풍경을 잘 이용해서 세워지는 한편 조경기술과 건축기술이 극치를 이룰 정도임
→이두의 「양주화방록」18권에 저술
-소주의 명원
․당․송 이래 많은 명원이 경영
․4대명원 … 졸정원․사자림․유원․창랑정
․환경요건 … 태혹가 가까이에 위치하여 크고 작은 암석으로 정원을 꾸미기가 수월
․호장한 것보다는 아취있고 유현한 느낌이 감도는 정원이 많음
※ 양주와 정원과의 차이
…소주의 정원은 성내의 제한된 한 구획 속에 축조
전면은 도로와 접하고 후면은 내로 경계되어지며 양쪽은 인가와 인접해야 하는 입지조건하에 조성되어야만 했다.
→건축적 배려와 조경적 기교 요구
․대조의 미 …흰 벽과 푸른나무, 담장의 직선과 지붕의 곡선
․담장의 벽 안 쪽에 반지붕을 덧붙여 회랑으로 삼아 우중에도 정원의 경관을 감상하면서 거닐 수 있게 함.
Ⅴ. 중국 정원의 성격
․사대부의 성격이 정원에 반영되어 호장한 것보다는 아취가 넘치는 것을 중요하게 여김
․조경양식은 명․청 시대에 이르러 완벽
․역대의 조경가 : 당 … 염립덕, 백거이(백락천), 왕유
송 … 주면
원 … 예운림
명 … 이만종, 문진항, 계성
청 … 석도, 이어
․석가산 축조 … 청나라의 과유량: 석가산 축조에 관해 기술
명나라의 장련: 석가산을 쌓아올리는데 능숙
■ 중국 정원의 성격
1. 자연경관 즐기기 위해 관직자가 수려한 경관을 가진 곳에 누각이나 정자 지어 원시적인 공원과 같은 성격
2.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의 일부에 인위적인 암석을 배치하고 수목을 심어 심산유곡과 같은 느낌을 조성
맑은 물을 이끌어 못을 만들어 정원으로 조성한다. (자연과 인공의 미를 겸비한 정원)
3. 성내의 제한된 구역 저택에 부수되는 정원으로 주로 주거용으로 쓰이는 건물의 뒤나 좌우의 공지에 축조된다.
4. 주택 건물 사이에 만들어지는 중정
(→전돌에 의해 포장되어 있으며 연석이나 옥석으로 덮히는 수도 있다.)
※포지: 한 나라 때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수법
5. 경관의 조화보다는 대비에 중점을 두었다.
6. 자연과의 비율은 하나의 정원 속에 여러 비율 존재
(영국의 풍경식 정원 = 1 : 1, 일본의 정원 = 1 : 10, 1 : 100)
■ 중국 정원의 세부적 특징
1. 포지: 구석수법, 한나라 때부터 부채꼴 모양포장 등 다양
2. 누창: 바람이 자유스럽게 통과, 화창의 일종, 우리가 없다.
3. 화창: 목재의 장식, 유리 설치주택에서 방의 장식용으로 이용
실내에서 바깥을 보기 위해 중앙에 무늬없이 유리를 끼워 확보함.
4. 동문: 정원 담장에 설치, 여러 형태가짐. 주기능은 통과역할, 혈문이라고 함, 원형일 때 특별히 원문이라야 함.
5. 회랑: 정원에서 건물간을 연결 정원구분 위해 사용, 직선적인 것은 거의 없다.
복락형, 벽이 없는 것, 복도식, 이층형 등 여러 가지 형태
6. 태호석: 태호라는 만들어진 돌, 출입구나 소규모 정원에 이용, 일반적으로 둥글며 마마자국이 있는 것이 좋다. 대나무 사이에 많이 이용되었고 태호석의 사용과도 관련이 있다.
■ 중국 원림의 연혁
중국의 조경예술은 유구한 역사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시경(詩經)」의 기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일찍이 주문왕 시대에 이르러 이미 궁원을 가꾸는 활동이 있어 왔다. 진나라가 六國을 멸망시킨 후 다시 위수(渭水)의 남쪽에 상림원을 세웠는데 그 규모가 수백리에 이르는 정도로 매우 광대하다. 상림원 속에는 이궁과 별궁이 들어서 있을 뿐 아니라 갖가지 금수를 많이 사육하였다. 서한 시대에 이르러 아시진의 상림원을 기초로 해서 규모를 더욱 확대시킴으로써 장안 남쪽의 광대한 지역이 모두 한무제의 원유에 귀속되게 되었다. 자연의 산수를 주축으로 다듬은 상림원 이외에 대궐 안에도 인공적인 방법으로 만든 원림이 있었다. 건장궁이 그 규모를 자랑했다. 한무제는 비록 유가만을 존숭하였지만 그는 또 한편 방사들의 신선설을 믿었다. 그래서 궁궐 안에 태액지를 준설하고 그 속에 봉래, 방장, 영주 등의 가을 조성하여 동해의 신산을 상징하였다. 건장궁 조경공사는 후일 역대 제왕들이 궁원을 건축하는 하나의 표본이 되었을 뿐 아니라 자연의 산수를 모방하는 기초 위에서 상징과 상상의 요소를 가미시켰다. 동한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원림의 규모는 서한에 미치지 못했으나 정교함은 오히려 서한을 능가했다.
서한 시대부터 일반 송가의 원림도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재상 조참, 대장군 곽광 등과 같은 일부 귀족과 관료들이 장안과 낙양 두 곳에 원림을 세웠다.
위, 진, 남북조 시대는 통치계급의 쟁탈전이 격렬하여 중국은 분열상태에 처해졌고 잇단 전란으로 사회가 극도로 불안했다. 더욱이 도교와 불교의 유행과 영향으로 일종의 현학(玄學)이 당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사대부 계급은 대부분 현실을 도피하고 청담(淸談)을 숭상하여 사상은 비록 활달한 모습을 띠었으나, 그들의 행위는 오히려 방탕하고 얽매임이 없었다. 이 시대의 선비들은 철저히 향락을 탐닉하였고, 그렇지 않으면 은거생활을 하면서 화를 멀리하고 몸만을 돌보든가 명산대천을 유람하면서 산수에 그들의 뜻을 의탁하였다. 이 같은 사조와 분위기의 영향으로 문학과 예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예를 들어 자연의 정취를 표현하는 것을 그 주제로 삼는 전원시와 산수화가 바로 이 시기에 흥기하였으며 또한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던 것이다. 만일 이 시기를 기준으로 한다면,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이 이 이전에는 자발적 또는 자위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 시기 이후에는 자학적인 단계에 돌입했다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연에 대한 심미관이 이 시기에 이미 초보적으로 확립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들은 모두 원림예술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당시에는 원림 축조의 풍조가 극성하여 일반 사유 원림이 우후죽순처럼 세워져 장족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밖에 「낙양가람기」에는 대사농 장륜 및 택원을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유 원림은 그 웅장함에 있어 비록 동작대나 화림원을 대표로 하는 황실 원림에 뒤지는 것은 사실이나 문헌기록에 따르면 이들 사유 원림의 자연풍경과 산수의 아름다움은 황실 원림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능가하고 있다.
이 시기에는 사원(寺院) 원림도 많이 나타났다. 불교가 중국에 전례된 이후 동한․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점차 발전하여 위․진시대에 이르러서는 현학과 결합되면서 사족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사원 건립의 풍조가 일어나 남쪽의 건강과 북쪽의 낙양이 당시 중국의 2대 불교 중심지가 되었다. 남방 불교 중심지의 사원의 수에 대해 당대의 시인은 "남조 도읍지의 480개의 사원, 그 많은 전각과 누각 안개 비속에 묻혀 있다."라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낙양 일대의 사원은 건강보다도 훨씬 많았다. 낙양가람기에 언급된 60여개의 사원 가운데 원림이 없는 사원이 거의 없었다.
300여년의 혼란을 거쳐 수(隨)․당(唐) 시대에 이르러 중국은 다시 통일되었다. 경제의 신속한 회복으로 말미암아 도시 및 궁원 건축이 다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수문제는 대흥성에 대흥원을 조성하였고, 뒤이어 수양제는 다시 동부인 낙양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대흥원의 황실 원림은 규모가 방대했을 뿐 아니라 내용 또한 복잡하고 다양하다. 설계 수법은 부분적으로 한대의 구제를 이어받았으나 발전된 일면도 있었다. 건축군으로 대원을 여러개의 소원으로 나눈 수법이 그 예로서 이것이 바로 원림 속에 또 원림이 있는 원중원(園中園)이다. 이 같은 수법은 전례가 없었던 것이다.
수대 말엽, 농인 폭동이 사방에서 일어났다. 이때 이영이 군사를 일으켜 당왕조를 수립하였다. 당나라 때에는 빠른 속도로 봉건질서를 회복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생산이 크게 발전하여 역사상 유례가 없는 번영 창성기를 맞았다.
당대의 장안성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성의 정북방은 "서내"라고 불리는 태극궁이 위치하고 있다. 태극궁의 주요 건축물은 태극전이고 태극전 뒤편에 바로 황제와 여비들이 기거하는 처소이다. 그리고 대명궁의 북쪽에는 원림이 자리잡고 있는데 태액지라 불리는 비교적 넓은 연못이 있다. 또한 황성 동쪽에 흥경궁을 건축하였다. 흥경궁에는 정사를 논의하는 궁전 외에도 황제가 기거하고 유람하도록 「용지」라 이름하는 타원형의 큰 연못을 준설하였다. 용지 주위에는 정자와 누각을 세우고 갖가지 화훼와 관상수를 심었다.
당대에는 송가원림의 건축도 매우 성행하였다. 많은 귀족과 관리들이 장안에 원림을 건축하였으며 대부분 동남쪽 곡강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장안성의 동쪽 및 남쪽 외곽 지대에도 일반 사가원림이 많았다. 동부 쪽의 낙양 역시 수도였던 만큼 귀족과 고관 대작들이 다투어 원림을 축조한 곳이 되었다. 백거양의 택원도 바로 이곳에 위치했다.
장안이나 낙양 외에도 일반 문인들은 산촌에 원림을 건축하기도 했다. 백거양은 청산에 초당을 지었고 왕유는 망천별장을 세웠다.
이 같은 산수나 별장은 대부분 자연의 산수를 주축으로 약간의 손질을 가했기 때문에 도시나 도시 근교의 택원보다 자연의 정취가 한층 더했다.
송은 비록 오대십국의 할거한 국면을 수습하였지만 농촌경제는 여전히 피폐된 상태에 놓여 있었다. 더군다나 북쪽의 영토는 계속 북방민족의 침략위협을 받아왔으므로 국력이 날로 쇄약해져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림 건축은 통치계급이 사치와 향락을 즐겼기 때문에 감소하기보다는 증가일로에 있었다.
송대는 중국 역사에 있어서 결코 강국은 아니었으나, 시조와 회화 등 예술방면에서는 눈부신 발전이 있었다. 송대에는 녹봉으로 화가를 초빙하였기 때문에, 회화예술이 크게 발전하였다. 서원외에서도 문인화파가 출현하였으며, 그들은 형체에 구애받지 않고 내포된 의미와 신권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여 회화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 넣어 주었다. 이밖에 곽희와 이성재는 각각 그들의 화론인 「임천고지」와 「산수결」에서 매우 깊게 산수화의 입의와 구도의 요령과 원칙들을 논술하였다. 이러한 배경들은 모두 필연적으로 원림 건축예술의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북송 시대의 원림은 대부분 동경인 변량과 서경인 낙양 두 곳에 집중되어 있다. 변량은 북소의 도성으로서 황실 원유가 보도 이곳에 집중되어 있다. 비교적 유명한 원림으로 금명지가 있는데 변량성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금명지는 설계가 정연하고 명확한 중거록이 있다. 정전은 금명지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수전이라 불렀다. 수면위에는 구름다리가 놓여 있어 황제가 자주 이 정전에서 야경을 감상하였다. 금명지 남쪽에는 임원이 있는데 역시 연못을 갖고 있고 화훼와 관상수가 더욱 울창하다. 변량성의 동북쪽에는 또 양악이 있다. 인공으로 다듬은 산수원인 양악은 설계가 매우 정교하여 물과 산이 서로 어우러지게 했을 뿐 아니라, 산형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도 주종관계가 매우 돋보이고 외부윤곽선의 기복과 변화도 훌륭하다. 기록에 의하면, 양악을 축조할 때 막대한 인력과 재력을 들여 강남 일대에서 많은 양의 명화와 괴석을 옮겨 놓았다. 변량에는 이와 유사한 황실 원유가 모두 9군에 있었으며, 귀족이나 관리들이 소유하는 사원은 더욱 많았다.
북송 시대의 서경 낙양의 원림은 수적으로 양악에는 미치지 못하나 역시 상당한 수의 볼만한 원림만도 24개에 이른다. 이들 원림은 대부분 당대에 있었던 옛 원림의 기초 위에 중건한 것이나, 설계의 중점이 이미 가산에서 이수와 화목의 재배로 옮겨졌다. 따라서 원림의 이름들도 당대의 "산지"에서 "원유"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당시 낙양은 화초재배가 매우 성행하여 "화성"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남송 시대에 이르러, 정치의 중심지가 강남으로 이전됨에 따라, 귀족과 고관대작들이 대부분 臨安(임안)(항주), 오흥, 평강 일대에 모여 살았다. 임안은 남송의 도읍지이며 서호와 그 부근 일대에 수많은 원림이 세워졌다. 그 가운데 황실 원림이 적어도 10여군데 이르렀고, 나머지는 사원의 원림과 귀족, 관리들의 사원이었다. 오흥은 당시 벼슬에서 물러난 관리들이 많이 살았던 곳을 원림 건축이 성행하였다.
「오흥원림기」에는 모두 34개의 원림이 기록되어 있다. 평강은 비록 임안으로부터 약간 멀리 떨어져 있으나, 당시의 경제 및 군사 요충지였고, 자연지리 조건 또한 훌륭해 적지 않은 원림이 조성되었다.
원나라가 남송을 멸망시킨 후 중국은 이민족의 통치하에 놓여졌으며, 민족의 갈등과 계급의 모순이 극히 심각해끨. 원조는 사람을 4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그 가운데 한인, 특히, 남인(강남으로 피나갔던 남송 사람 : 역사주)의 지위가 가장 낮았다. 경제가 정체국면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원림 건축활동도 부진하였다. 원은 다만 북방에 있던 금의 대덕군을 태액지와 만수산으로 개조하여, 황궁의 금원으로 삼았을 뿐이다. 원의 대부(북경)를 비롯해 기타 지역에 약간의 사원이 있었지만 많은 것은 아니었다.
명대 초기는 남경에 도읍하였고, 성조때에 북경으로 천도하였다. 명은 원의 대부를 기초로 북경성을 중건하고 또 태액지를 남쪽으로 확장시켜 북해, 중해, 남해 등 삼해를 조성하여 이 곳을 남원이라 칭하고 주요한 원림으로 삼았다. 명대 중엽에 이르러 농업, 수공업이 크게 발전하자 원림 건축 풍조가 다시 일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의 원림 건축활동은 주로 북경, 남경, 소주 일대에 집중되었다. 북경은 수도이기 때문에 귀족과 관리들이 이곳에 모여 살았고, 그들의 택원은 대부분 ---나 동남쪽 ---일대에 분포되어 있었다. 북경 근교에는 작원, 이원(청대원), 양원등이 있었다. 남경은 당시 부도였으므로 역시 사원이 많이 세워졌다. 당시의 소주는 비록 평범한 도시였으나, 농업과 수공업이 극히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고장이었기 때문에, 많은 관리와 지주들이 이곳에 사가택원을 건축하기 시작하여 한때 원림 조성의 풍조가 일어났다. 졸정원, 유원, 예포등 현존하는 많은 원림이 최초에는 모두 이 시기에 세워진 것이다. 이 시기에는 소주는 물론이고, 그 부근의 광활한 지역, 심지어 강북의 양주까지 원림 건축이 성행하였고, 많은 문인과 화가들이 직접 원림 건축에 참여했다. 그 가운데 가장 걸출한 대표적 인물로서 명말의 계성을 들 수 있는데, 그는 풍부한 원림 건축 경험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문학과 회화에도 조예가 상당히 높았다.
그의 저서 「원야」는 체계성있게 당시의 원림 건축 경험을 총괄시켜 중국 고대의 유일한 원림 건축 전문서적이 되었다.
명대에 이어 청대에도 원림 건축이 크게 발전하였으며, 특히 강희, 건륭 2대에 최고조에 달했다. 북경에 조성된 청의 황실 원림은 10여 군데에 달하였다. 북경성의 내부에는 주로 명의 서원의 기초 위에서 그것을 보수, 개조하는 한편, 건축물들을 많이 증건하여 더욱 완벽하게 만들었다. 성 밖 서북 근교에는 청의원, 청명원, 원명원, 장춘원, 청관원 등 5개 황실 원림이 차례로 건축되었다. 이밖에 승덕에는 또 피서산장을 세웠다. 청대의 황실 원유는 수량과 규모에 있어서 모두 명대를 훨씬 능가해 실로 원림 건축사상 가장 활발하고 발달한 시기였다.
청대는 건륭 시기에 이르러 경제와 정치가 전례없이 번영하였다. 건륭은 전후 6차례 강남에 행차하였던 바, 원림에 큰 관심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 자신이 또한 높은 문화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강남을 순시할 때마다 그는 그 곳 원림의 뛰어난 점을 본받아 모방하도록 하여, 중국 북방의 황실 원림에 강남 사원의 처리수법을 많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청대 원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전국 가지의 유명한 원림의 귀경을 한 군데에 모아 놓는 데 있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 모음식 설계방식을 채택해 한 원림을 여러 풍경구로 나누고 이와 더불어 여러 개의 풍경 거점을 설치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승덕의 벽서산장은 강희 36경과 건륭 36경이 있었고, 원명원은 40경이 있었다. 이같은 처리수법은 아마도 서호 18경을 본딴 것으로 짐작된다. 풍경 거점마다 각각 독특한 주제와 의경 그리고 정취를 갖고 있다. 일부 풍경 거점, 즉 건축군을 떼어서 볼 때 강남 원림의 영향을 받은 것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 예로서 승덕의 피서산장의 금산성과 연우누는 각각 진강의 금산사와 가흥의 연우누를 모방한 것이고, 문원의 사자림은 소주의 사자림을 본딴 것이다.
명청 시대의 사원은 북경을 제외하고 대부분 양주, 소주, 오흥, 항주등 주요 도시와 주강 삼각주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북경에 집중되어 있는 것은 주로 귀족과, 권문세도들의 택원이고 지주나 부상들의 원림은 대부분 강남과 영령 두 곳에 분포되어 있었다. 건륭이 강남을 순시할 때 양주를 거쳤는데, 다시 양주의 서호 호반에서부터 평산당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 관리들의 원림이 가득했다고 한다. 더욱이 양주의 원리는 명산기법이 매우 뛰어나 "양주는 원림으로 아름답고, 원림은 명석으로 빼어나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소주 역시 이 시기에 많은 원림을 새로 조성하고 중건하였다. 해방 초기(중국공산당 정권 수립 초기: 역자주)의 통계에 따르면, 소주에는 크고 작은 원림 100여개가 남아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보존상태가 양호한 원림들이 거의 전부 만청시대의 작품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강 삼각주 지역은 영남에 위치하고 있어 기후가 고온 다습하고 토양이 비옥하여 원림 건축에 필요한 우수한 자연조건을 구비하고 잇다.
五代十國시대, 이 곳은 남한의 영토였는데, 그 당시 이미 원림 건축 활동이 시작됐다. 명․청시대에 이르러 주강 삼각주 지역은 대외무역 창구로 바뀌어 경제가 발달하였기 때문에 원림 건축도 비교적 성행했다. 그렇지만 외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 영남의 원림은 독특한 풍격을 띠고 있다.
이상의 간략한 소개에서 엿볼 수 있듯이, 중국의 원림 건축예술은 기나긴 발전과정을 거쳐왔다. 이 과정에는 물론 기복과 굴곡이 많았지만, 개괄적으로 한다면, 그것은 조열에서 정교로, 미숙에서 성숙으로 발전한 과정이었다. 이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 발전과정의 특색에 따라 다음 몇가지 단게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주에서 한까지 : 이 시기는 원림의 맹아기에 속한다. 원림은 주로 황실의 원유였고 규모는 비록 크지만 기본적으로 산수가 좋은 곳을 지정하고 권지의 성격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진․한 시대에는 물론 인공적인 방법으로 연못을 준설하고 가산을 쌓는 방법이 도입되었지만 원림을 건축하는 주지와 의지는 여전히 희박한 상태였다.
위, 진, 남북조 : 이 시기는 원림예술의 형성기로 볼 수 있다. 초보적으로 자연의 산수를 재현하는 기본원칙을 확립하는 한편 원림의 생산적 기능을 점차 감소시키고 원림을 주로 관람예술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는 황실 원림 외에도 송가원림과 사원의 원림이 출현하였다.
수, 당, 오대 : 이 시기는 중국 원림의 성숙기에 해당한다. 수량이 많고 규모가 크고 유형이 다양할 뿐 아니라 예술적 측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지평을 열었던 시기이다. 그것은 문인들이 직접 원림 건축에 참여함으로써 원림예술을 시와 회화에 연결시켜 원림에 시정과 서음을 불어 넣었기 때문이다.
송 : 이 시기는 성숙기를 거친 고조기이다. 원림 건축이 유례없이 활발했을 뿐 아니라 문학, 시구 특히 시화예술의 발전에따라 자연미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심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산수화 이론서적이 많이 출현하여 원림 건축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원 : 이 시기는 원림 건축의 정체기이다. 원림 건축활동이 침체되고, 이론과 실제에 있어서 특별한 성과가 없었다.
명, 청 : 송에 이은 두 번째 고조기이다. 원림 건축활동이 활발하여 수량, 규모, 유형에 있어 모두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하였다. 원림 건축의 예술 및 기법이 날로 정교하고 완벽해졌고, 문인과 화가들도 적극적으로 원림건축에 참여하였다. 원림 전문가가 이 시기에 많이 출연하였다. 인재들이 많이 출현할 뿐만 아니라 원림 건축에 관한 이론서적과 전문서적도 많이 간행되었다.
청대 말엽에서 민국시대에 이르는 동안 중국은 반봉건, 반식민지 사회로 전락하였다 원림 예술이 의지하여 존재하는 사회적 기초가 무너졌기 때문에 유구한 역사전통을 지닌 원림건축의 연속성이 이 시기에 중단되었다.
일본의 조경사
□개요
․일본의 정원 -정:궁궐에서 조정의식을 행하는 네모난 마당을 의미
원:중국의 유, 포와 같은 의 미의 공간
-자연발생적, 실용적 가치를 지닌 위요된 공간
-도랑, 연못, 식재, 둔덕, 돌담 등의 인위적인 행위 有 →인간의 조경적 의도
․상고시대 : 문화의 태동기
국가의 형태를 갖춘 부족국가가 탄생
불교와 유교가 전래, 조경문화가 싹트기 시작
․고대 : 3개의 부족국가가 형성되는 과정
538년 백제로부터 불교를 전래, 무역의 확대로 한국과 중국의 영향이 조경분야에 반영
헤이안(평안)시대부터 중국 당의 침전조 건축양식이 도입
정토사상이 대두되면서 침전 건물을 중심으로 한 회유임천식 정원양식이 발달.
․중세 : 초기에는 정토사상이, 14c에는 선사상이 대두
정원은 건물로부터 독립하여 ‘고산수’수법이라는 일본 고유의 양식 탄생.
․근세 : ‘다정’ 양식
15c후반부터의 바다 풍경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평정고산수수법
회유임천식 수법이 정착화되는 시기
실용적 가치보다 기교와 관상에 치중한 세부수법 발달.
․현대 : 메이지(명신) 30년까지는 이전의 양식이 계속
메이지 말기부터는 유럽의 정원양식 출현
다이쇼(대정)기부터는 고대 정원양식에 대한 복고현상→차경을 중시한 자연주의 조경 양식 정착
※일본의 조경 : 전형적인 자연풍경식으로 일관되게 발전
자연자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자연 풍경을 이상화하여 독특한 측정법에 따른 상징화
포함되어 있는 사상, 정신적인 면을 중시
(1) 일본 정원의 시초
․6세기 초엽에 백제의 유민 노자공이 궁궐 뜰에 수미산과 홍교를 만들어 놓음.(일본서기에 기록)
(2) 14세기
․정원은 건물로부터 독립
․축산고산수수법 : 나무를 다듬어 산봉우리의 생김새를 표현하고 바위를 세워 폭포를 상징
왕모래를 깔아 냇물이 흐르는 느낌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것
물을 쓰지 않으면서도 유수의 운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수법.
(3) 15세기
․평정고산수수법 발달 : 왕모래와 몇 개의 바위만이 정원재료로 쓰일 뿐 식물은 일체 쓰이지 않음.
․일본 정원의 골격이라고도 할 수 있는 축석기교가 최고도로 발달한 시대.
․정원수를 선택하는데 있어 활엽수(상록)을 쓰는 경향.
(4) 16세기
․다실건물을 중심으로 하여 소박한 멋을 풍기는 다정양식이 생겨남.
(5)16세기 이후
․임천양식과 다정양식의 혼합 → 회유식정원이 오늘날까지 유지됨.
※일본 정원의 특색- 기교와 관상적 가치에 치중한 나머지 세부적인 수법은 발달하였으나, 실용적인 면이 무시
1. 상고시대
1) 신 지 : 신지는 당시의 종교적, 신앙적 의미에 치중한 일본 고유의 지천정원의 형태
이의 상징적 의미는 상세사상과 관계가 깊다.
․형태 -연못은 바다를, 중도는 바다의 섬을 상징
-신지의 중도는 상세국을 의미
․전체적 구성 -섬의 배치형태에 따라 3도직선배치, 7도직선배치, 3각형배도, 다도배도의 형태 등
3도직선 배치의 형태에서 3개의 섬이 삼신을 상징. 과거, 현재, 미래의 영원한 관련성을 표현.
※상세사상 : 과거, 현재, 미래에 현존하는 일본 민족의 역사 속의 원점의 나라로 일본의 건국신화
신령, 조상신이 거주하는 나라이며, 바다 건너 먼 곳의 영원한 나라인 상세국 기원과 신을 숭상.
2) 암 좌 : 산정의 돌을 조상신으로 숭배하는 행위, 암좌를 신의 신체로 여김.
거석문화의 한 형태로서 일본에서는 암좌, 암경 등의 단어로 표시되는 행위를 탄생
특히 농경사회에서의 생산의 상징체로 간주.
이는 일본의 정원양식에서 석조정원의 원류
※신지, 암좌의 조경적 형태 외에 485년경에 매년 3월 상기에 곡수연을 행하였다는 「기」의 기록 有
「행후원곡수연」기록 - 궁궐 내의 작은 지원을 중심으로 곡수연 행하여진 것 추정
2. 아스카(비조) 시대
․오늘날 정원이 꾸며지기 시작한 시대
․사상적 배경 불교사상-수미산의 축조형태
봉래사상-중국의 춘추전국시대부터 존재한 삼신선사상에서 비롯
※수미산 : 동해 한가운데 신선들의 섬이 있다고 믿는 고대 중국인들의 불로장생을 희구하는 사상
→신선설 정원의 골격을 이루는 축조물
돌에 조각을 가한 석조물의 일종, 즉 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던 가산을 돌로 만든 것
→ 옛날 한국에서 만들어졌던 전산로(=수미산향로)와 상통
․도대신(시마노오토도) - 뜰가운데에 작은 못을 파고 그 속에 섬을 쌓음.
․612년에 노자공(백제귀화인)은 수미산과 오교를 만듦. → 일본서기에 기록
․607년에 창건된 법륭사에서 주랑과 함께 조약돌을 깔아놓은 실개천과 돌을 쌓아 조성한 연못이 발견
․조경은 궁궐, 귀족계급의 주거공간 등에서 이루어짐.
자연풍경을 감상하기 위해 제명천황은 길라천 상류 에 큰 규모의 이궁을 조영.
3. 나라 시대
․정원은 자연풍경적인 모습에 사상적인 면이 강조된 것으로서 상징화의 수법이 주로 이용
․관상적인 봉래정원과 수미산정원의 형태가 많이 조성.(불교사상과 봉래사상 중심)
․「만연집」: 당시의 사람들이 정원석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함
→고대 일본에서 정원의 점경물로 가산과 같은 것이 즐겨 만들어짐
․평성궁(나라시대 후기 궁궐)
- 710년(원명천황시대) 천도이후 74년간의 황궁
- 연못을 중심의 정원이 여러 곳에 존재
- 속일본서기에 성무천황이 도지에서 곡수연을 행하였다는 기록 有
4.헤이안(평안) 시대 전기
․이 시대의 가장 유명한 정원 : 신천원과 차아원(사가인)
․신천원 - 자연적인 경관과 함께 인공적으로 입석을 적절히 부분적으로 배치한 정원
후기에 나타나는 침전형 정원의 초기형태
연못은 주유식 정원기능을 가진 지천정원의 특성을 잘 보여준다.
․차아원 - 북차아의 자연, 풍물에 순응한 자연풍경식 정원
북안에 국도와 천신도라는 2개의 섬과 그 사이에는 3톤 이상이나 되는 거석, 정호석이라느 입석 有
천신도 남안에 경석이 7~8개 남아 있으며 중국과는 달리 바닥에 고정된 형태
․하원원의 정원 : 못 속에 여러 개의 작은 섬을 배치
소나무를 심고 못가의 소금 굽는 연기로 저명
․평전재(쯔보센자이)풍의 정원 : 작은샘 또는 흐름에 작은 돌과 초목을 곁들인 꾸밈새.
․홍매전 : 규모 작은 정원 양식도 개발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줌
정원건물은 주로 중국적 색채가 농후한 누각과 무랑 따위가 즐겨 지어짐
5. 헤이안(평안) 시대 후기
․당시 귀족의 저택에서는 가장 주가 되는 건물을 침전형으로 꾸미는 것이 관례
․동삼조전 : 침전조 정원의 원형으로서 건물의 배치와 정원과 관계가 정형적
․불교적 정토신앙이 건축․회화․조각․정원양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침→정원이 상징적으로 변화되는 동기
정원과 건축으로 극락정토를 구상화시키고자 노력 → 정토정원(예:무량광원, 모월사, 관자재왕원, 중존사)
※정토 : 죄악, 고뇌를 초월한 청정상락의 경지를 의미하며, 깨달음을 얻은 불타와 보살이 사는 곳
헤이안시대 말에는 극락왕생설의 유행에 따른 아미타 신앙
모월사 : 1150년경에 건립한 대가람으로 대천지라고 불리는 큰 연못을 중앙에 파고,
한가운데의 섬에는 반교와 평교가 걸쳐 있던 교각이 남아있고 입석이 있으며,
축산을 한 유구가 남아있다.
[작정기] - 등원뢰통의 아들 귤준망이 직접 여러 정원을 감상 한 후 정원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 엮은 책
- 귀족들 사이에 전승되어 온 조정법비전서 내용은 침전조계통의 정원의 형태와 의장에 관한 것
- 정원 전체의 땅가름, 연 못, 섬, 입석, 작천등
정 원에 관한 모든 내용을 기록하고 있음
- 일본에서 정원 축조에 관한 가장 오랜 비전서.
- 이론적인 것에서부터 시공면까지 상세하게 기록
'조우전'과 '백하전' - 상식 밖의 큰 규모로 유명
'조우이궁' - 신선도를 본뜬 정원의 시초이며 창해도와 봉래 산이 축조
→ 우리나라 고대정원의 꾸밈새에 영향을 주었던 신선사상이 일본에서 성행 시작한 것은 평안조후기.
6. 가마쿠라(겸창) 시대
․건축과 정원의 관계가 평안조 후기와 유사 but 지형의 이용이라는 면에 있어서 한층 더 적극적.
․연못의 형태 : 중기 이후 주유식 지천정원 형태→회유식 지천정원이 가미된 형태→후반기 회유식 정원이 주가 됨.
․침전식 정원의 배치수법을 채용
․초기 선종사원 정원 -정토교적인 취미가 살아있었던 듯, 단 규모가 다소 축소
․정토사상에 입각한 사찰정원
: 남대문→홍교→중도→평교→금당으로 이어지는 직선에 의해 양단되는 터가르기에 의해 구성
7. 남북조 시대
․선원과 정토교적인 정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음
․몽창국사 - 갑비, 겸창, 미농 등지의 천석에 관심.
경도에서도 정원계를 위해 큰 활약. 아름다운 경관을 통해 선원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시도.
※ 서방사의 정원 : 몽창국사의 최고의 걸작, 실정시대의 정원에도 큰 영향을 미침.
금각사 - 족리의만이 조영해 놓은 별장 '북산전'의 후신.
'구산탈의석'이라 불리는 부석, 사리전인 금각과 그 앞에 전개되는 정원으로 정토세계를 구상한 것.
※ 정토신앙사상은 이와 같이 정원축조에 큰 영향을 미쳐 만다라에 그려진 불전과 칠보지를 정원의 구성 위에 표현하고 뜻을 부여하고자 하는 형식의 정원수법이 오래도록 후세 에 계승되어 강호시대에까지 이른다.
8. 무로마치(실정)시대
※ 광대한 산수를 응축하여 사의적, 상징적인 의장을 한 정원, 즉 고산수 정원이 선사를 중심으로 확립.
⑴ 족리의정의 동산전(=자조사=은각사)
- 실정시대의 초기정원을 대표하는 것.
- 꾸밈새는 금각사와 비슷. 은박을 입힌 '은각'이 있음 - 속칭 은각사
⑵ 실정시대 정원의 특색
① 과거의 지형위주의 경향으로부터 벗어나 조석이 두드러지게 중요시
부지가 협소해짐.
물을 쓰는 대신, 돌이나 모래를 가지고 바다나 계류를 표현
다듬어 놓은 수목으로 먼 산을 상징하는 수법.
돌과 나무 사이 아름다운 균형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생장속도가 느린 상록활엽수의 나무를 쓰는 경향.
식물을 완전히 거부하기에 이름.
② 한 그루의 나무, 돌 하나에 대해서도 표현을 소홀히 할 수 없는 고도의 세련 요구.
③ 선사상이 정원축조의 의도에 강한 영향. 추상적 구성과 표현을 가진 특수한 정원 출현
→경관의 상징화~추상화→ 그 궁극적 표현이 소정이고, 석정이며 고산수의 정원.
④ 선의 영향을 입어 고산수수법 출현. but 그 사상의 근저는 여전히 정토사상이고 신선사상이다.
⑶ 삼존석수법
- 정원석을 가지고 부처를 상징.
- 3개의 입석으로 중앙을 높게, 조우의 돌을 낮게 곁들어 짝을 지어 놓은 것
(석가여래와 문수보살, 보현보살을 상징)
⑷ 십육라한의 정원 - 16개의 입석으로 16체의 아라한이 늘어선 모양을 구성해 놓은 것
⑸ 용안사의 석정
․평정 고산수 수법(대선원서원의 축산 고산수 수법이 한 발 더 나아가 초감각적인 무(無)의 경지를 표현)
․좁은 평탄지에 흰 모래를 고루 깔고 그 속에 15개의 정원석을 왼쪽으로부터 오른쪽으로 강한 터치로 배치
․정원석 주변에 약간의 이끼를 곁들였을 뿐 한 그루의 나무도 한 포기의 풀도 심겨져 있지 않음
․흙 담장을 둘러 외부 공간과 구획
․왕 모래에는 파도 무늬를 그림
9. 모모야마(도산)시대
⑴ 삼보원정원
- 일본인에게 특유한 간소미와는 달리 호화로운 조석과 고르고 고른 명목따위를 가지고 사람을 위압
- 자연에 순응하는 태도로부터 벗어나 과장하고자 하는 경향
⑵ 다정원(일종의 자연식 정원)
․천리휴(千利休)라는 사람이 다정원 양식을 창출함.
․자연의 한 단면을 강조하여 전체를 표현하려고 한 것
․다정은 다실(실정시대에 비롯된 건축)에 이르는 길을 중심으로 한 좁은 공간에 꾸며지는 것
․대자연의 운치를 연상시킴
․소박하고 하찮은 소재 속에 담겨져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낸 소규모 정원
․이끼가 끼어 있는 정원석에서 고담과 한적함을 느끼는 개념.
․인간생활의 부족함을 초월하여 정원에서 미를 찾으려고 함.
→ 이 시대의 정원의 호화순란한 특색의 밑바닥에는 복고정신 有
10. 에도(강호)시대
⑴ 등원시대로의 복고적 정신 + 무인들의 호화로운 정원 + 다정
⑵ 중기 이후 : 경도지방이 저조해지는 경향에 비해 강호지방이 정원문화의 중심
강호지방의 대표적 정원으로 취상어원, 빈어전, 육의전, 계리궁, 수학원이궁, 동해사 등
․계리궁 : 산책과 뱃놀이를 통해서 연못가를 따라 축산․야근․ 수류․모래언덕․석조․섬 등 변화무쌍한 경치를 사철 관상할 수 있는 회유식정원
․수학원이궁 : 정원의 하부, 중부의 다실을 산의 경사를 살린 작은 폭포, 계류, 작은 연못으로 이어지는 경관 조성
: 사의적인 자연풍경식 정원의 극치
: 조망에 있어서도 정원과 자연과의 융합, 즉
하나의 풍치 조경의 이상상
⑶ 정원의 꾸밈새에 있어서 봉래, 방장, 영주의 삼신선도를 정원 연못 속에 만드는 수법이 오래도록 답습
※ 삼도일련의 정원 : 규격에 맞도록 삼신선도가 배치된 정원 (예 : 경도 화원 묘심사 동해암의 정원)
⑷ 신선도에 소나무 식재 - 소나무의 영겁성과 신선도가
지닌 영겁성이 결합됨으로서 신선도를 상징하고자 함
⑸ 신선도의 표현 - 처음에는 세 개의 섬을 축조 →시대의 흐름에 따라 2개(학․거북)or 1개(거북)의 섬으로 표현
: 학섬 - 동적인 느낌이 나도록 입석을 주로 조석(양)
: 거북섬 - 정적으로 거북이 헤엄치는 모습이 나타나도록 조석.
- 거북이 머리, 다리, 꼬리의 위치에 각각 귀두 석, 귀각석, 귀미석 등을 앉힘
→ 신라시대 경주의 안압지 축조에 쓰인 수법
※ 남선사 금지원의 정원 - 학, 귀의 정원으로 저명
⑹ 정원에 양, 음석을 두는 수법 출현
→ 우리나라 이조시대의 방지원도와 같은 사상
민족성의 차이에 따라 일본은 보다 현실적이고 노골적임
⑺ 다정의 발달이 정원 구성에 중요한 영향 ⇨※일본정원 제3황금기
→ 관상본위의 고산수 정원․축산임천식의 회유식정원의 구성․국부적인 구조에 큰 변화
중세에 축조되었던 정원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석등이나 수수분 따위가 대정원에 놓이기 시작
※ 정원 구성의 소재로서 석등과 수수분은 없어서는 안 될 존재
(8) 축경식 정원
- 에도시대 후기에 형성된 조경양식
- 자연풍경미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묘사
- 원근, 색채, 명암, 조화를 잘 활용해야 함
11. 메이지(명치)시대 이후
※ 명치시대로 접어들면서 양풍건축과 함께 양식정원의 수법 이 도입
※ 명치초기에 프랑스식 정형원과 영국식 풍경원의 영향이 大
⑴ 외국의 영향
․동경의 신숙어원, 적판이궁은 외국인의 손에 의해 설계, 곡선을 강조
․서양식 화단과 암석원 등을 도시공원에 도입
․명치 중엽 - 외국식 정원수법의 영향을 받은 일본인 조경가 출현
→이들의 정원은 잔디밭을 위주
→그 속에 설치된 원로나 식재군은 부드러운 곡선에 의해 표현
→일본식 고유의 요철이 심한 조석이나 뜀돌에 의해 구성되 는 원로보다 훨씬 실용본위의 경화식 풍경원
⑵ 경도 무린암의 정원과 동경 소석천의 춘산장
- 산현 유봉장군이 설계
종래의 일본 정원의 기법을 기초로 사실적인 자연풍경의 묘사수법을 가미
⑶ 나량시의 의수원 - 약초산과 동대사 남대문을 정원의
경관 일부로 받아들인 차경원
→ 명대 말기를 거쳐 대 정초기로 접어들면서 인습적인
대정원이나 귀족적인 취미 모방은 소멸.
→ 잔디밭과 어린이놀이터 따위 가 갖추어진 실용위주의 현대정원이 나타남.
※ 일본 정원양식의 변천과정
임천식(평안시대)→회유임천식(겸창시대)→축산고산수식(14세기)→평정고산수식(15세기후반)→다정식(16세기)→원주파임천형식(강호초기)→축경식(강호후기)
#히비야 공원 : 일본의 도시계획상 최초의 근대 도시공원으로 고시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