操聞上古弧矢之利. 《論語》 曰, “足兵.” 《尙書》 〈八政〉 曰, “師.” 《易》 曰, “師, 貞, 丈人吉.” 《詩》 曰, “王赫斯怒, 爰征其旅.” 黃帝湯武咸用干戚以濟世也. 《司馬法》 曰, “人故殺人, 殺之可也.” 恃武者滅, 恃文者亡. 夫差·偃王是也. 聖人之用兵, 戢而時動. 不得已而用之. 吾觀兵書戰策多矣. 孫武所著深矣. 孫子者, 齊人也. 名武. 爲吳王闔閭作兵法一十三篇. 試之婦人, 卒以爲將. 西破强楚入郢, 北威齊晉. 後百歲餘有孫臏, 是武之後也. 審計重擧, 明畫深圖, 不可相誣. 而但世人未之深亮. 訓說況文煩富, 行於世者失其旨要. 故撰爲略解焉.
나 조조가 듣건대 상고에는 무기를 써 세상을 바로잡는 이로움인 호시지리(弧矢之利)가 있었다고 한다. 《논어》 〈안연〉에서 확고한 군비를 뜻하는 족병(足兵)을 이야기하고, 《상서》 〈홍범〉에서 팔정(八政)을 예로 들며 군사문제를 언급한 이유다. 《주역》 〈사괘〉는 “군사가 바르니 현명한 군주가 이끌면 길하다”고 했다. 《시경》 〈대아, 황의〉에서는 “주문왕이 크게 화를 내며 군사를 가지런히 갖춰 침략의 무리를 막았네!”라고 했다. 황제(黃帝)와 상나라 탕왕(湯王), 주나라 무왕(武王) 모두 무력을 동원해 세상을 구제했다.
옛 병서 《사마법》에 이르기를, “큰 잘못을 저질러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힌 자는 죽여도 좋다”고 했다. 예로부터 칼의 힘에만 의지하는 시무자(恃武者)도 패망하고, 붓의 힘에만 의지하는 시문자(恃文者)도 패망했다. 오왕 부차(夫差)와 서언왕(徐偃王)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성인의 용병은 평소 무기를 거두었다가 필요한 때에만 움직이는 집이시동에 그 요체가 있다. 《도덕경》에 나오듯이 부득이할 때에 한해 용병하는 부득이용병(不得已用兵)이 그것이다. 내가 수많은 병서와 전략 등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이러한 이치를 담은 손무의 《손자병법》만이 가장 심오하다. 그는 생전에 오왕 합려를 위해 병법 13편을 지었다. 당시 그는 합려의 궁녀들을 이끌고 시범을 보인 뒤 문득 오나라 장수에 발탁되었다.
이후 서쪽으로는 남방의 강국 초나라를 격파해 도성인 영도(郢都)까지 쳐들어갔고, 북쪽으로는 제(齊)나라와 진(晉)나라를 떨게 만들었다. 그의 사후 100여 년 뒤 손빈이 나타났는데 그는 손무의 후손이다. 손무의 병법은 자세히 비교하고 신중하게 움직이는 심계중거(深計重擧)와 분명하게 계책을 세우고 깊이 도모하는 명획심도(明畫深圖)에 기초해 있는 까닭에 함부로 논할 수 없다. 세인들이 그 이치를 깊이 헤아려 깨닫기가 어려운 이유다. 더구나 여러 사람이 장황한 설명과 함께 멋대로 개작한 번다한 원문을 덧붙여 세상에 퍼뜨린 후에는 근본 취지와 핵심을 잃고 말았다. 내가 뒤늦게 간략한 풀이를 덧붙인 《손자약해》를 펴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해설]
이는 조조가 《손자병법》을 새롭게 편제한 《손자약해》를 펴낸 취지를 밝히기 위해 쓴 서문의 전문이다. 내용상 《손자병법》 첫 편인 〈시계〉의 첫머리에 나오는 병도의 취지를 밝힌 것이다. 조조는 이를 위해 두 사람을 예로 들었다. 춘추시대 말기의 오왕 부차와 서주시대 중엽의 서언왕이 그들이다.
부차는 춘추오패의 일원이다. 그는 오자서의 간언을 무시하고 막강한 무력에 의지하다가 끝내 월왕 구천에게 패망하고 말았다. 잦은 용병과 지나친 자신감이 화근이었다. 그는 오직 칼의 힘만 믿는 ‘시무자’에 해당했다. 서언왕의 사적은 자세히 알려진 것이 없다. 《후한서》 〈동이전〉 등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주목왕 때 인정(仁政)을 펼쳐 장강과 회수 사이의 제후 가운데 36국이 그를 따랐다. 그러나 주목왕이 초나라를 시켜 토벌하게 했을 때 백성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접전을 피하다가 목숨을 잃고 나라마저 패망했다고 한다. 오왕 부차와 정반대로 서언왕은 오로지 붓의 힘만 믿은 ‘시문자’의 전형에 해당한다.
조조가 오왕 부차와 서언왕을 거론한 것은 평소 무기를 거두어들였다가 부득이할 때에 한해 용병하는 병법의 대원칙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를 집이시동이라 한다. 집이시동은 〈시계〉에서 전쟁을 국가대사의 일환으로 파악한 것과 동일한 취지에서 나온 것이다. 조조는 병도가 바로 집이시동임을 통찰했던 것이다. 이는 노자의 무위지치를 병가의 입장에서 재해석한 것에 해당한다. 이에 관한 《도덕경》 제32장의 대목이다.
“병기는 상서롭지 못한 기물로 군자가 사용하는 기물이 아니다. 부득할 때 용병해야 한다. 용병은 담백한 마음을 높이 친다. 이겨도 좋게 여기지 않는 이유다. 이를 좋게 여기는 자는 살인을 즐기는 자다. 무릇 살인을 즐기는 자는 천하에 뜻을 얻을 길이 없다.”
노자는 비록 반전(反戰)의 입장에 서 있기는 했지만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전쟁을 용인했다. 《도덕경》은 이를 ‘부득이용병’으로 표현해놓았다. 《도덕경》의 부득이용병이 바로 조조가 《손자약해》 서문에서 말한 집이시동이다. 조조가 정립한 병가사상과 노자의 도가사상이 가장 높은 수준에서 서로 만나는 지점이 여기다.
《손자병법》에서 말하는 ‘용병’은 과거 미국의 부시 정부가 과시한 ‘완력’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부득이한 경우에 한해 행사되는 병도에 따른 용병이 요체다. 조조가 탁월한 주석을 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병도의 이치를 정확히 통찰했기에 가능했다. 동서고금의 모든 병서를 통틀어 집이시동만큼 전쟁에 관한 노자사상을 한마디로 응축해 표현해놓은 것도 없다. 《손자병법》의 진면목이 조조의 《손자약해》에 있음을 뒷받침하는 대목이다.
《한비자》 〈외저설 좌상〉에 따르면 하루는 초나라 사람이 정나라로 가 진주를 팔려 한 적이 있다. 목란(木蘭)으로 상자를 만들고, 계초(桂椒)의 향료를 넣고, 겉을 갖가지 구슬로 꿰고 붉은 구슬로 장식한 후 비취를 박았다. 그러자 구슬상자를 본 정나라 사람이 상자만 사고 진주는 필요 없다며 돌려보냈다. 이를 두고 한비자는 다음과 같이 꼬집었다.
“이는 상자를 잘 팔았다고 할 수는 있으나 진주를 잘 팔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시중에 나와 있는 무수한 종류의 《손자병법》 관련서가 대부분 매독환주(買櫝環珠)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조조가 《손자병법》의 사실상의 저자라는 사실을 무시 내지 간과한 결과다. 조조의 주석을 생략한 《손자병법》은 구슬을 빼놓은 채 구슬상자만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손자약해》 서문은 겨우 193자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심오하다. 《손자병법》을 관통하는 병도와 전략전술의 진수가 모두 담겨 있기 때문이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내며 말 위에서 책을 읽고 시를 읊었던 조조는 《손자약해》를 펴내면서 서문에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담았다. 천하를 평정하고자 한 웅혼한 기상과 제자백가를 두루 섭렵한 폭넓은 식견, 전쟁의 이치를 꿰뚫은 통찰력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조조가 말한 병도는 용병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치국평천하의 보편적인 이치가 ‘집이시동’ 4자에 집약되어 있다. 고금을 막론하고 난세에 무력에만 의존하는 시무자와 덕치로 일관하는 시문자 모두 패망의 길이다. 집이시동은 최후의 수단인 전쟁을 택하기 전에 더 나은 방안을 강구하라고 주문했던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바로 병도다. 이는 《손자병법》 전체를 관통하는 벼리이자 철칙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