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원문보기 글쓴이: 天金
탈해의 탄생과 이주, 신라 지역에 정착 이야기에는 BC 17세기 아나톨리아 고원의 Kanesh 여왕이야기, 이집트 출신의 페르세우스 이야기, Adygean 지역의 "Hath" 또는 "Hatti" 사람들, 난생설화 등이 종합되어 있다. "Hath"는 ᅘᆞ 신앙을 하는 사람들이고, 이들 중에 일부가 탈해와 같이 배를 타고 이주하였을 것이다. 탈해가 아버지로부터 외국으로 가라는 명을 받고, 새로운 지역 신라의 니사금이 되어 계림(鷄林) 왕국의 개조가 되는 것은, 페르세우스의 일생과 매우 비슷하다. 탈해의 아버지 함달파는 현재 Adygean 지역의 "Hath"와 관계있고, 이 지역은 BC 4세기에 카스피 해 지역에서 흑해 지역으로 진출하여 헬레니즘 문화인으로 변화한 최초의 아시아 지역 Sarmatian이 살았던 곳이다. Siraces는 Sarmatian의 헬레니즘 어법의 명칭이고, 라틴 어 이름은 Circassians (ser-KASS-ee-uhnz)이다. 이들 명칭에 들어있는 Sir(,ser)은 Sarmatians의 Sar에서 유래한 것이다. Sarmatians은 BC 7세기에 우랄 산맥 남쪽 Don 강 동쪽 스텝 지역에 나타나 스키타이와 공존하다가 세력을 키워 스키타이를 제압하고 아조프 해 연안과 흑해 주변을 장악하였다. Sarmatai는 종종 "Sauromatai"로 사용되고, 고고학자들은 'Sauromatian'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Sar-의 어원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는데, 이들이 미늘철갑으로 무장한 것이, 마치 비늘로 몸이 덮인 dragon/용(龍)과 같아서, lizard (sauros)와 연결시키는 것이 있다. 이는 용성국왕(龍城國王) 함달파(含達婆)와 적절히 연결된다. Oleg Trubachyov는 인도-아리안 어 *sar-ma(n)t (feminine – rich in women, ruled by women), the Indo-Aryan and Indo-Iranian word *sar- (woman) and the Indo-Iranian adjective suffix –ma(n)t/wa(n)t.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이 이론은 여자들이 고위직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Matriarchy), 적녀국(積女國)/여국왕(女國王)/여인국(女人國)과 연결된다. 이 지역의 Circassians은 그들 스스로 Adyghe (also transliterated as Adyga, Adyge, Adygei, Adyghe, Attéghéi)로 자처하고, {atté (,"height") + ghéi(,"sea")}, “바다 해안 가까이, 또는 두 바다 사이의 산악에 사는 사람”으로 이해하고 믿는다. 그런데 이들 지역에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온 Sarmatians이 살았다는 것과, 베트남 어 {con ga'i (여자,딸)/con trai (남자,아들)}를 참고하면, Adyghe는 ‘atté(ᄋᆞᄃᆞ) + ga'i(계집)>ᄋᆞᄉᆞ 녀>ᄋᆞᄌᆞ 녀’로 이해하는 것이 좋고, 이를 잘 나타낸 것이 아진포(阿珍浦)에서 탈해를 맞이한 “아진의선(阿珍義先)”이다. 의선(義先)은 ᄋᆞᄉᆞ의 존어 ᄋᆞᄉᆞん을 나타낸 것이고, 노파는 이진아시의 신녀(神女)였다. 그리고 탈해를 발견했을 때 까치 떼가 둘러싸고 울고 있어 성을 작(鵲)에서 석(昔[xī])라 하였다는데, 탈해의 출발지로 볼 수 있는 Kanesh의 여왕이 다스렸던 도시국가의 신상(神像)이 "Sius"였다. Siraces 지역과 관계있는 탈해와 가야 지역 사람들은 "Sius" 신앙을 하였던 적이 있었을 것인데, 이는 아조프 해/Surozh 해의 ‘의자:SEE’에 강림해 있는 ᅘᆞ(>ᄒᆞ,ᄏᆞ,ᄉᆞ)와 같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집트의 Shu (Egyptian for "emptiness" and "he who rises up") 신이 있고, 석(昔[xī])의 사성음 [xī](shi)와 같고, 《일본서기》에 5세기 이후 가야를 칭하여 수나라(須[xū]那羅)/수나라(須奈羅)/소나라(素[sù]奈羅)가 나온다. 고구려의 국가신이 수신(禭神·禭神)이다. 이것들은 아나톨리아 고원 일대에서 극동 지역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문화적 뿌리를 알려준다. |
도표31.⦗Siraces와 탈해⦘《wikipedia:Kültepe/Siraces》
그래서 탈해 집단은 페르시아와 파르티아 문화에 정통해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면서, 그들의 정치적 모델을 파르티아 Nisha에 두었기에 ‘니사금’이란 칭호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들보다 먼저 신라 지역을 주도하였던 ‘거서간’은 흑해 건너편 사르마티아와 스키타이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칭호이다. 이들의 모계 DNA 분석표를 참고하면, 거서간 집단은 ‘스키타이/사르마티아’와 매우 밀접하고, 니사금 집단은 카스피 해와 아랄 해에 접한 ‘우즈베키스탄’과 밀접하다.
그래서 탈해 집단(昔氏)은 동유럽 슬라브 족 문화와 밀접한 거서간 집단(朴氏)과는 문화적 배경이 약간 다른데, 니사금 집단의 조상들은 파르티아 지역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를 믿었거나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탈해가 유리 니사금 때 대보가 되어 사로 6촌을 6부로 조정한 것에는 파르티아의 국교였던 조로아스터교 문화에 근거를 두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러면 탈해 니사금이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였던 파르티아와 관계를 맺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당시 서방의 강자였던 파르티아 내부의 변화와 관계있다. 탈해 니사금이 활동하였던 시기의 파르티아 왕은 Vologases I(,Vologaeses or Vologeses, 재위 AD 51−78)이었다. 그는 메디아 아트로파테네의 왕국을 그의 형제 파코루스 2세에게 주었고, 다른 형제 티리다테스를 위해 아르메니아를 공격하였는데, 당시 로마 황제는 네로였다. 전쟁의 결과는 네로가 티리다테스에게 아르메니아의 왕으로 인가한다는 왕관을 씌워주었고,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는 로마 제국이 무력으로 파르티아를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 후 그는 아르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전통과 관습으로 복귀하는 정책을 펴서, 그리스 알파벳을 폐기하고 팔라비 문자로 대체하였다. 또한 이란 도시들의 그리스 식 이름을 버리고 이란 식 이름으로 바꾸었고, 조로아스터교와 관련 있는 고대 아베스탄 문서를 수집하는 것을 명하였다. 그가 제작한 일부 동전에는 처음으로 배화교 사원이 등장하였는데, 이 전통은 사산왕조 페르시아가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 수백 년을 이어갔다.
그래서 그를 이란 ‘왕 중의 왕’(,"King of kings of Iran")으로 부르고 있다. Vologases I는 알렉산더에게 빼앗겼던, 페르시아 문화를 되찾은 파르티아/페르시아(,이란)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는 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부분적인 패배는 하였지만, 결국 흑해 동쪽의 모든 지역을 파르티아의 땅으로 확정하였고, 조로아스터교에 바탕을 둔 페르시아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게 하였던, 위대한 왕이었다.
네로 황제와의 싸움에서 이긴 그의 활동 시기에 신라 석ㆍ탈해 집단은 박ㆍ혁거세 집단을 물리치고 권력을 차지하였던 것이다. 거서간을 ‘거슬한’으로도 말하고, 그것이 로마 황제 가문의 케사르 Caesar와 음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혁거세 거서간의 등장은 로마 제국의 등장과 같은 사건이었고, 탈해 니사금의 등장은 파르티아 제국을 통한 조로아스터교 페르시아 민족주의 문화의 부흥과 같은, 거서간 집단 이전 토착 집단 문화의 부활로 볼 수도 있다. 바로 이 점에 있어, 탈해를 토해(吐解)로도 부르고, 이것의 의미가 tohé와 관계있다는 것은 다시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토해/tohé 문화의 토착민들이 탈해 집단과 연합하여 거서간 집단을 물리치고, 니사금 시대를 열었을 수도 있다.
따라서 파르티아 제국과 관계를 맺고 있었던 탈해 집단은 이러한 세계정세의 변화에 맞추어 신라 초기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니사금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니사금 시대의 신라는 조로아스터교가 국교였다고 볼 수도 있다. 당시 천하의 대세는 조로아스터교 문화였고, 그 중심지는 파르티아 제국의 최초 왕도이면서 왕실의 네크로폴리스로 사용된 Nisha였다. 그리고 탈해니사금 다음으로 파사니사금이 즉위하였다. ‘파사’는 페르시아 문화권의 지배자를 칭하는 말이니, 파사니사금 때에는 페르시아/파르티아 문화가 신라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니사금 시대의 상황은 국호의 변경에 잘 요약되어 있다. 사로국 체제를 조정하고 니사금 시대를 연 것은 3대 노례니사금(재위 AD 4−24)이었으니, 이때 사로 시절부터 내려오던 구체제를 새로운 체제로 전환하면서, ‘서야벌(徐耶伐)ㆍ사라(斯羅)ㆍ사로(斯盧)ㆍ신라(新羅)’등으로 불리던 국호를 처음으로 ‘신라(新羅)’로 정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탈해9년 국호를 계림(鷄林)으로 바꾸었고, 그 후 약 300년이 지나 계림의 운이 다 되었을 때가 기림니사금 시대이다. 어느 왕조이든지 건국 후 250−300년이 지나면 무너지게 되어 있는데, 기림니사금 10년(307) 다시 ‘신라’로 하였다. 이는 계림시대가 막을 내렸다는 것이고, 이어 니사금 시대도 막을 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니사금 시대를 3대 노례니사금∼16대 흘해니사금(재위 310−356 )(《삼국유사》)으로 본 것은 타당하다.
‘신라(新羅)’라는 국호는 건국 초기에 있었고, 307년 기림니사금(基臨尼師今, 재위 298−310)이 다시 신라로 정하였고, 503년 지증마립간이 신라로 다시 확정하였다. 지증왕 때 국호 제정 연유에 보이는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은 주 무왕이 은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 주(周) 왕조를 개창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찬양하는 시대 상황이 담겨있는 혁명적 표현이다. 이러한 의미의 ‘신·라’가 기림니사금과 지증마립간 시대에 다시 국호로 사용된 것은, 307년과 503년에 새로운 시대를 향하는 대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지증왕의 경우를 보면 왕권강화를 위한 조치가 있었다.
기림니사금이 왕권강화를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당시의 상황은 고구려의 정세 변화를 참고하면 이해할 수 있다. 300년 고구려 국상 창조리(倉助利) 등이 봉상왕을 폐하고 제13대 서천왕의 손자이고, 고추가 돌고(咄固)의 아들인 을불(乙弗)을 왕으로 옹립했는데, 기림니사금 3년이었다. 당시 신라 조정에서는 미천왕의 즉위를 보고 전쟁이 있을 것을 예측하고, 즉각 (기림니사금 三年春一月) 왜국과 강화를 맺었는데, 이는 등 뒤의 적을 내 편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그리고 三年春二月 비열홀을 순행하고 나서, 三年春三月 태백산에서 망제(望祭)를 지냈다. 이는 북쪽 국경을 튼튼히 한 것이다.
미천왕의 즉위를 보고 정세 분석을 한 ‘낙랑과 대방 두 나라(의 일부 사람들이)가(신라로) 항복해왔는데(三年, 301)’, 이는 진역(秦役)과 전란을 피해 진한 지역으로 망명해온 중국인들의 전통을 이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 이듬해(302) 미천왕은 3만 명의 군사로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하여 8,000여 명을 포로로 잡았고, 이어 요동의 서안평(西安平)(311)과 낙랑군(樂浪郡)(313)/대방군(帶方郡)(314)을 정벌하여 고구려의 영토로 삼았다. 이로부터 약 100년 후 광개토왕의 군대가 백제/가야/왜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도와주면서, 점거하였던 것을 볼 적에, 당시 신라의 기림니사금이 국호를 신라로 하면서 강한 지도자 중심으로 국방을 튼튼히 하지 않았으면, 고구려 미천왕의 공격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계림의 니사금 시대에는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였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조로아스터교가 계림 사회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었는데, 계림시대가 너무 오래되어 나라가 위기에 처하게 되자 조로아스터교 대신 새로운 것을 받아들여 사회를 쇄신하고자하는 움직임이 나타났고, 그 작업은 아마도 기림니사금 때 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만 기림니사금 다음 흘해니사금(재위 310−356) 시대에 백제 근초고왕(재위 346−375)의 팽창과 고구려 소수림왕 (재위 371−384)의 체제 정비가 있었는데, 신라는 기림니사금의 업적을 더 발전시키지 못하고 결국 니사금 시대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립간 시대로 전환하게 되었는데, 《삼국사기》의 편찬자들은 18대 실성니사금(재위 402−417)까지를 니사금 시대로 보았다. 그것은 광개토왕 (재위 391−413)의 군대가 신라의 왕도 금성에 주둔하게 되면서 니사금 시대가 막을 내린 것으로 본 것이다. 이는 조선의 마지막 왕은 고종이었지만,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까지를 조선시대로 보는 것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