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진평왕 시절 원광법사는 젊을때부터 중이 되어 불도를 닦았다. 조용한 곳에서 도를 닦기 위해 삼지산에 막을 짓고, 조용히 불경을 외우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언제부터인가 원광이 공부하고 있는 이웃에 또 한 사람의 중이 와서 절을 짓고 살았다. 그 중은 주술 배우기를 즐겨하였다. 어느 날 밤 원광이 조용히 앉아 불경을 외우고 있는데
"잘도 하십니다. 스님의 수행은 법대로 하는 수행이네요. 중도 많지마는 스님처럼 법대로 수행한느 이는 드뭅니다."
하고 허공에서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소리는 계속 들렸다.
"지금 이웃에 있는 중을 보니 진리를 탐구하지 않는 한 아무 소득이 없을 것이오. 주술을 외울 때마다 그 소란한 소리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고요한 마음을 시끄럽게 할 뿐이므로 내가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미운 생각이 들어서 그를 죽여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 뿐이오. 스님은 내가 살생의 죄를 짓지 않도록 그 중에게 말씀해 주시오. 그 곳을 떠나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소리는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날 밤. 자정쯤 되어서 우르릉 쾅하는 벼락 치는 소리가 하늘이 무너지는 듯 울려 왔다. 이튿날 아침에 그 중이 살던 곳을 보니 산이 무너져 내려 절은 자취도 없이 묻혀 버렸다. 큰 목소리가 또 들렸다.
"스님이 보기에 어떻습니까?" "대단히 놀랐습니다." "나는 나이 3천살이 넘고 신술도 많이 닦았습니다. 이런 일 쯤은 아주 작은 일인데 그렇게 놀라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나는 지나간 일도 모르는 것이 없고, 앞으로 올 일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스님께서 이 곳에서 이렇게 공부하신다면 한 몸은 이롭게 할 수 있으나 세상사람들 모두를 이롭게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찌 선진국인 중국의 불법을 배워 이 나라의 중생들을 밝은 길로 인도하실 생각을 아니하십니까?"
원광법사는 낯을 붉히며 불교가 크게 발전한 중국에서 도를 배우는 것은 어릴 때부터 품고 있던 꿈이었다. 바다와 육지가 멀고 스스로 갈 생각을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후 원광스님은 용기를 내어 중국으로 떠났다. 원광법사는 중국에서 11년동안 수학하셨는데 그 동안 불도를 힘썼다.
진평왕 22년(600) 원광스님은 그리운 고국으로 금의환향하였다. 진평왕께서는 원광스님을 만나 보고 성인처럼 모든 교서를 그에게 맡기고 정치하는 방법도 그에게 물었다. 원광스님은 성품이 겸허하고, 사람들은 상하없이 널리 사랑했으며 말 할 때는 항시 웃음을 머금고 얼굴에 노기를 나타내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은 그를 원광법사라 칭하였다. 어느날 밤 큰 목소리가 나타나서
"내 이제 법사에게 윤회의 세계에서 구제해 줄 것을 약속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법사는 이와 약속을 맺었다. 원광법사는 약속을 맺고 "당신의 모습을 한번 볼 수 있겠습니까?" 하고 큰 목소리에게 청했다. "법사가 만일 내모습을 보시고자 하거던 내일 아침 동쪽 하늘 끝을 보시오."하고 가버렸다. 이튼날 아침 법사가 동쪽 하늘을 바라 보니 큰 팔뚝 하나가 구름을 뚫고 하늘 끝에 닿아 있었다.
그날 밤 큰 목소리는 또 찾아 와서 "법사는 내 팔뚝을 보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네 보았는데 과연 신기했습니다." "비록 이렇게 큰 몸이라 하더라도 때가 되면 죽는 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얼마 아니 가서 나는 그 고개에 이 육신을 버리고 갈 것이니 법사께서 오셔서 육신을 떠나는 내 영혼을 전송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가버렸다.
원광법사가 약속한 날 삼지산에 가 보니 늙은 여우 한 마리가 누워 있는데 검기가 칡빛 같았다. 여우는 숨을 헐떡거리다가 법사를 보고 곧 죽어 버렸으므로 법사는 그 여우를 묻어 주었다. 삼지산은 여우의 팔뚝이 하늘 끝까지 뻗쳐 있었다 하여 비장산이라 불리기도 한다. 금곡사는 원광법사가 처음 공부하던 절이라 한다. 원광법사는 신라의 불교와 정치에 큰 등불이었으며, 화랑도 오계를 가르치는 등 젊은이들을 지도하는데 이바지 하였다. 원광법사는 99세(혹은84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사리는 삼지산 금곡사 사리탑에 모셔져 있다. ( 향토사학자 김태중 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