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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
시․군 |
인 명(호칭) |
마 애 불 상 |
비 고 |
충북 |
충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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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봉황리마애불상군(7세기) |
高麗初 劉兢達 |
진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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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태화사년명마애미륵불입상, 진천사곡리마애불입상(9세기) |
高麗初 林名必 | |
영동군 |
官昕(將軍) |
영동신항리삼존불입상(7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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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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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용암사마애여래입상(9세기) |
영동군 호족 | |
충남 |
태안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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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마애삼존불상(7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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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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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마애삼존불상(7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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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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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화전리사면석불(7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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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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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사마애불입상(799년) |
高麗初 洪規 | |
경북 |
대구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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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팔공산주봉석조여래입상(8세기),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 대구팔공산마애약사불좌상, 대구 신무동삼성암지마애여래입상(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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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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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외 19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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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시 |
興達(城主) |
문경봉정리약사불좌상(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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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
李能宣(城主) |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7세기), 봉화동면리마애비로자나불입상(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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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군 |
良文, 李공言(將軍) |
성주백운리마애불입상(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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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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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노석동마애불상군(9세기) |
성주군 호족 | |
안동시 |
元奉, 金宣平, 權行, 張吉(將軍) |
안동옥산사마애약사불좌상(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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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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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가흥리마애삼존불상, 영주신암리마애삼존석불(7세기), 영주월호리마애불좌상, 영주두월리약사여래불상(9세기) |
안동시 호족 | |
구미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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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황상동마애불입상(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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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위시 |
楊志, 明式(將軍) |
군위위성동마애삼존불상(7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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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
울산시 |
朴允雄(豪族) |
울산불당골마애여래입상, 울산어물동마애약사삼존불(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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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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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송현동석불좌상, 창녕감리마애불입상(8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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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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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방어산마애약사삼존불(801년) |
晋州「閏雄(將軍), 有文(將軍),王逢規(節度使 權知康州事)」 | |
창원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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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삼정자동마애불좌상(9세기) |
金海 「金仁匡, 蘇忠子, 蘇律熙」 | |
합천군 |
鄒許祖(將軍), 興宗(賊․城主) |
합천치인리마애불입상(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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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
남원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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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신계리마애불좌상(9세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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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
보성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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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유신리마애불좌상(9세기) |
高麗初 順天 朴英規 |
따라서 9세기 마애불상의 조성과 호족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9세기에 석탑이 국왕과 중앙귀족, 지방호족 등에 의한 願塔의 건립이 증가하고 있고, 다양한 계층의 참여로 각지에 원탑이 건립되고, 이러한 현상은 바로 9세기 석탑의 전국적인 확산에 가장 큰 변수로 작용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하겠다.
신라 하대는 정치․경제․사회적인 혼란이 호족세력으로 하여금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할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호족세력은 9세기 마애불상 조성에 있어서 주체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이는 용봉사 마애불상의 조상기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龍鳳寺磨崖佛은 造成記에 의하면 貞元 15년(소성왕 1, 799)에 大伯士 元烏法師와 長珎大舍가 조성하고 있어, 홍성지역의 촌주에 의해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大舍가 골품제도에서 4두품에 올라갈 수 있는 최고의 관등으로서 제지 토착세력의 경우 촌주층이 이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2. 조상 위치에 따른 특성
마애불상의 분포에 있어서는 지리적으로 교통로 상에 위치하고 있어 주목을 끌게 한다. 백제에 있어서는 한강으로의 진출로가 막힌 이후 주요 통로였던 서산‧태안지역에 밀집되어 있고, 신라의 경우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및 고구려와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짐작되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상의 조성은 중대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조성되었으며, 하대에는 교통로와 연관을 가지며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교통로는 선대부터 활용하던 군사작전로를 통일 후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을 것이며, 신라 5통로의 기저를 이루었을 것이다. 따라서 5통로는 당시 교통의 중심으로 경주와 지방을 연결할 뿐만 아니라 대당 교통에 있어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마애불상은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체로 군사․교통의 중심지에서도 산정이나 구릉, 길옆에 조성되어 교통로를 바라보고 있다.
<표 2> 삼국․통일신라시대 마애불상 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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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
8세기 |
9세기 |
산
정 |
태안마애삼존불 서산마애삼존불상 예산화전리사면석불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경주서악리마애석불상 성주노석동마애불상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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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칠불암마애석불 경주남산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 경주백운대마애불입상 팔공산동봉석조약사여래입상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
방어산마애불 월성골굴암마애여래좌상 팔공산마애약사여래좌상 옥산사마애약사여래좌상 합천치인리마애불입상 성주백운리마애여래입상 경주약수계곡마애입불상 삼정자동마애불 진천사곡리마애여래입상 동천동마애삼존불좌상 남원신계리마애여래좌상 신무동삼성암지마애약사여래입상 |
중
턱 |
경주남산불곡석불좌상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 중원봉황리마애불상군 영동신항리삼존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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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봉사마애불 보제사마애석불 경주두대리마애석불입상 창녕송현동석불좌상 감리마애여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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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배리윤을곡마애불좌상 울산불당골마애여래입상 남산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 삼릉계곡선각육존불 동화사입구마애불좌상 문경봉정리약사여래좌상 및 관세음보살입상 어물동마애여래좌상 경주남산부흥곡마애불좌상 |
길
옆 |
봉화북지리마애여래좌상 영주가흥리마애삼존불상 영주신암리마애삼존석불 군위위성동마애삼존불상 |
굴불사지석불상 낭산마애삼존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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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태화사년명마애불입상 봉화동면리마애비로자나불입상 영풍월호리마애석불좌상 영풍두월리약사여래석불 보성유신리마애여래좌상 구미황상동마애여래입상 |
특히, 백제의 마애불상은 태안마애불상과 서산마애불상의 입지조건을 볼 때 마애불상의 전면이 능선으로 막혀있다. 이는 신라의 석굴암이 동해구를 향하고 있고, 동해구에는 대왕암과 감은사가 건립되어 호국적인 의미를 지닌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라의 마애불상은 교통로를 바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조성되어 있다. 특히, 길옆에 조성되어 있는 마애불상들은 대체로 교통로 앞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고, 넓은 평야와 인접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길옆에서도 조금 높게 조성하여 왕래자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위치에 조성되어 있다.
마애불상은 교통로 상에서도 산정이나 구릉에 위치하고 있어 주위를 한눈에 내려 볼 수 있는 眺望을 생각할 때 마애불상의 위치 선정 또한 주목된다. 특히 마애불상은 대체로 높은 곳에 조성되어 있는데 이는 雲上世界에서 민중을 굽어보는 佛陀의 경지를 나타내고 있다. 佛陀의 眞理가 사바세계의 사방으로 전파되어 사회가 항상 편안하게 불심으로 모든 고통을 덜어 주기를 기원하는 마음과 이들이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往來時 안전을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거대한 마애불상을 조성하였을 것이다.
3. 신앙적 특성
신앙적인 측면에서는 미륵신앙, 아미타신앙, 약사신앙이 마애불상 조성의 배경을 이루고 있다.
삼국은 불교수용 초기부터 미륵신앙이 유행하고 있었다. 또한 삼국시대 불교에 대하여 삼국유사에서는 미륵에 관한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6~7세기에 들어와서 半跏思惟像의 유행은 당시 미륵신앙의 유행을 입증해주고 있다.
그런데 삼국에서 유행한 미륵신앙은 현세적인 미륵신앙하생이었다. 이 같은 미륵하생신앙의 성행은 6세기 마애불상의 造像 활동에 직접적인 동기를 제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고구려시대에 조성된 永康七年銘 佛像 및 □景四年銘 金銅佛에서 「彌勒」이란 용어가 쓰이고, 필자가 추출한 同 時代의 마애불상의 양식에서 첫째, 본존불이 모두 거대할 뿐만 아니라 시무외여원인을 결하고 있고, 둘째, 반가사유상을 동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같은 추정을 할 수 있다.
삼국시대 미륵불상의 조상례를 살펴보면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중원봉황리마애불상군, 경주 남산 삼화령 석조 미륵삼존불상 등이 있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아미타신앙과 약사신앙, 미륵신앙이 유행을 하였다. 또한, 삼국유사」에서 당시 신앙을 살펴보면 신라 중대에는 미륵과 아미타를 병행하여 신앙하고 있다. 이는 경덕왕이 남백월사를 창건하여 금당에 현신성불미륵을 모시고 강당에 현신성불아미타불을 봉안함으로써 불국토사상을 상징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화엄사찰인 부석사에 아미타불상을 봉안하였고, 불국사와 석불사를 창건하고, 굴불사 사방불의 조성은 아미타신앙의 성행과 현실세계에 아미타극락정토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아미타불상의 조상례는 군위삼존석불, 감산사 석조 아미타여래입상 등이 있다.
약사신앙은 현세이익적인 신앙으로 약사불상의 조성은 8세기 말에서 9세기 중엽에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정치적인 상황이 기근과 재해, 질병이 만연한 혼란기였으므로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기를 염원하는 당시 인들의 믿음으로 약사신앙이 유행하였을 것이다. 여기에는 함안방어산마애약사삼존불,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 실상사철조약사여래좌상 등이 있다.
미륵신앙은 중대에 들어와 아미타신앙과 같이 미륵신앙 병행하여 나타나는데, 이는 감산사 미륵보살상과 아미타불상이 같이 조성되고 있으며, 용장사에는 현재 석조미륵장육존상과 아미타마애불상이 남아 있어 당시 신앙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신라 하대에는 당시의 극한상황을 반영한 조신의 설화에서 石彌勒이 발굴되고 있고, 농민생활이 파탄되어 극심한 혼란기에 궁예가 말법사상을 통하여 미륵을 자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하생신앙이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삼화사 철불의 명문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과 같이 노사나불을 조성하면서 미륵불 신앙을 내세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미륵불상의 조상 예로는 진천태화사년명마애미륵불입상이 있다.
4. 양식적 특성
1) 삼국시대
백제의 마애불상은 일반적인 형식을 벗어난 三尊形式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마애불상은 대체로 삼존 형식을 지키고 있으나 일반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마애불상군을 이루고 있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삼국시대 마애불상은 形態的인 면에서는 일단 다르지만 세부적인 양식에서는 거의 같은 양상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의 마애불상은 立像과 坐像이 共存하고 있으나 입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臺座는 蓮華座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좌상에 있어서 裳懸座를 이루고 있는 것도 있다. 목에는 삼도가 없고, 두꺼운 通肩의 法衣로 U형 의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좌․우 대칭이다. 그리고 右肩偏袒의 의문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또한 입가장자리를 살짝판 고졸한 미소를 띄우며, 手印은 通印으로 불리워지는 시무외여원인을 결하였고, 머리는 대체로 육계가 표현된 素髮이다. 광배는 백제에서는 보주형 광배가 주를 이루고 신라에서는 원형의 연화문 두광이 유행하였다.
2) 통일신라시대
(1) 8세기
8세기 마애불상은 立像과 坐像이 共存하고 있으며, 臺座는 蓮華座로 앙연좌, 양복연좌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복연좌도 있다. 대부분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없는 것도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U자형 의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우견편단도 있다. 수인은 항마촉지인, 시무외여원인, 아미타인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두발은 소발과 육계의 표현이 주류를 이루고, 보살상은 보관과 보발이 표현되었다. 광배는 대체로 신광과 두광이 표현되나 칠불암마애불상군은 보주형 두광만이 표현되었다.
(2) 9세기
9세기 마애불상은 立像과 坐像이 共存하고 있으며, 臺座는 蓮華座로 앙연좌, 복연좌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앙복연좌와 상현좌도 있다. 대부분 목에는 삼도가 있으나, 없는 것도 있다. 법의는 통견으로 U자형 의문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우견편단도 있다. 수인은 약사인, 항마촉지인, 시무외여원인, 아미타인 등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두발은 소발과 육계의 표현이 주류를 이루고, 보살상은 보관을 쓰고 있다. 광배는 대체로 신광과 두광이 표현되는데 두광은 원형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Ⅴ. 결 론
이상에서 살펴본 내용을 정리하여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먼저 양식적인 면에서 살펴보면 삼국시대 마애불상은 臺座는 대체로 蓮華座를 구비하고 있으나 坐像에서 裳懸座도 나타나고 있다. 法衣는 두꺼운 通肩으로 U형 의문이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는 삼도가 없고 머리에는 낮은 육계가 있는 素髮이고, 頭光은 백제에서는 보주형광배가 성행하였고 신라에서는 원형이 유행하였다. 手印은 당시 유행한 通印으로 시무외여원인을 결하고 있다. 이는 필자가 앞에서 미륵불의 유행과 함께 당시 미륵의 수인으로 추정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상은 입상과 좌상이 공존하고 있으며, 대좌는 대체로 연화좌로 앙연좌, 복연좌, 앙복연좌를 구비하고 있으며 상현좌도 있다. 목에는 삼도가 있고, 머리는 낮은 육계와 소발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수인은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이 나타나고 있으며 칠불암불상군의 보주형 두광을 제외하면 대체로 원형의 두광을 구비하고 있다.
신앙적인 면에서 마애불상의 조성은 삼국시대는 당대에 성행했던 미륵신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같은 필자의 생각은 당시 조성된 金銅佛의 銘文에 미륵이 나타나고 있고, 백제에서 미륵사지의 창건, 신라에서 花郞과 미륵과의 관계가 표출된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에 주존을 미륵이라 칭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이같은 신앙의 형태는 마애불상의 조상활동으로 표출되었다고 믿어진다.
통일신라시대에는 아미타신앙과 약사신앙, 미륵신앙이 성행하였으며 신라 중대에는 아미타신앙과 미륵신앙이 병행하여 신봉되고 있어 당시 신앙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며 하대에는 극한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미륵신앙이 유행하여 궁예가 미륵을 자칭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하생신앙이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노사나불을 조성하면서 미륵불 신앙을 표방한 것으로 보아 민중들 사이에서는 미륵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약사신앙은 8세기 말에서 9세기 중엽에 약사불상의 조성이 급격히 증가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의 기근과 재해, 질병이 만연한 혼란기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신앙으로 유행하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마애불상의 분포에 있어서는 지리적으로 교통로상에 위치하고 있어 주목을 끌게 한다. 백제에 있어서는 한강으로의 진출로가 막힌 이후 주요 통로였던 서산‧태안지역에 밀집되어 있고, 신라의 경우는 경주를 중심으로 한 지역 및 고구려와 교류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짐작되는 경상북도 북부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삼국시대 마애불상의 조성은 당대의 교통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아울러 마애불상들의 방향이 이 같은 교통로와 일치하고 있고, 특히 경주지역 마애불상의 주방향으로 보아 왜구의 침입을 막고자 했던 신라인의 호국이념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통일신라시대 마애불상의 조성은 중대에는 경주를 중심으로 조성되었으며, 하대에는 교통로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하겠다. 이 교통로는 선대부터 활용하던 군사작전로를 통일 후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는 중심 역할을 하였을 것이며, 신라 오통의 근간을 이루었을 것이다. 또한, 마애불상이 조성된 지역에는 호족이 분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마애불상의 조성과 호족은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9세기에 석탑이 국왕과 중앙귀족, 지방호족 등에 의한 원탑의 건립이 증가하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마애불상은 교통로상에 위치하며 당시 유행한 신앙과 조화를 이루면서 현세구복적 신앙은 물론 불국토를 이루고자 했던 당시인의 염원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