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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洪姓)의 연원(淵源)에 대한 고찰(考察)
한국족보문화 연구소 덕천(德泉) 호(號) 홍재덕(洪在德)
(1) 홍씨(洪氏)의 원유(源流)에 대(對)한 고사(古事)
우리나라의 홍씨(洪氏)는 학사공(學士公) 홍천하(洪天河)께서 동래(東來)하시기 이전(以前)에는 동무홍성(東無洪姓)이라 하여 홍씨는 학사공이 동래 하시무로 비롯되었다는 설(說)이 정설(定說)로 되어 있으며 세종실록(世宗實錄) 지리지(地理誌)에
<唐遺才子八人往敎高句麗 洪其一也 子孫世貴於三韓 名所居曰唐城>
<당유재자팔인왕교고구려 홍기일야 자손세귀어삼한 명소거왈당성>라고 하여 팔학사동래설(八學士東來說) 또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歷史的)인 사실로 확인되고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홍씨의 연원(淵源)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중국의 홍씨에 대한 원유(源流)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의 홍씨 원유에 대하여 *원화성찬(元華姓纂)이나 만성통보(萬姓統譜)등에 의하면 중국의 홍씨(洪氏)는 각각 뿌리를 달리하는 여섯 계통(系統)이 있으니,
첫째는 공공씨(共工氏)를 원유로 하는 공씨(共氏)가 기원전(紀元前)120년경에 홍씨(洪氏)로 개성(改姓)한 돈황홍씨(墩煌洪氏)가 있고,
둘째는 굉씨(宏氏)가 당(唐) 명황(明皇)(서기 685년 - 762년)의 휘자(諱字)(뜻; 돌아가신 높은 어른의 이름) 피(避)해 712년경에 홍씨(洪氏)로 개성(改姓)한 예장홍씨(豫章洪氏)가 있고,
셋째는 780년경에 홍씨(弘氏)가 효경(孝敬)의 휘자(諱字)를 피해 홍씨(洪氏)로 개성(改姓)한 상주홍씨(常州洪氏)가 있고,
넷째는 오(吳)나라의 노강탱수(盧江太守) 홍구(洪矩)를 시조(始祖)로 하는 선성홍씨(宣城洪氏)가 있고,
다섯째는 당(唐)나라의 청하승(淸河丞) 홍효창(洪孝昌)을 시조(始祖)로 하는 서성(敍城)(즉;서주(敍州)홍씨(洪氏)가 있고,
여섯째는 낙양(洛陽)에 사는 옹건도(翁乾度)의 아들 옹처후(翁處厚)가 송(宋)나라 초기(960년경)에 국란(國亂)을 피해 감숙성(甘肅省)의 돈황(墩煌)으로 피난(避難)을 하면서 홍씨(洪氏)로 개성(改姓)하여 육계당(六桂堂) 홍씩(洪氏)가 된 경우가 있다.
이와 같이 중국에는 여섯 계통(系統)의 홍씨(洪氏)가 있으나 공공씨(共工氏)를 연원으로 하는 돈황홍씨(墩煌洪氏) 이외(以外)의 홍씨들은 학사공이 동래(東來)하신 이후에 발생(發生)한 홍씨들이기 때문에 우리 남양홍씨(南陽洪氏)와는 무관(無關)한 홍씨들이며 오직 공공씨(共工氏)를 원유로 하는 돈황홍씨 만이 우리 남양 홍씨의 원유라는 사실(事實)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때문에 우리 남양 홍씨의 원유를 알기 위해서는 돈황홍씨의 연류인 공공씨의 원류를 고찰(考察)함으로서 가능(可能)한 것이다.
공공씨는 중국의 고대(古代) 신화시대(神話時代)부터 존재(存在)했던 것으로 중국의 고전(古典)에 그 사적(事跡)이 소상(昭詳)하게 전해오고 있어 공공씨에 대한 고사(古事)를 시대순(時代順)으로 간추려 기술(記述)하고자 한다.
첫째 공공노촉 불주산(共工怒觸 不周山); 중국의 고전(古典)인 회남자(淮南子) 천문훈(天文訓)과, 사마정(司馬貞)이 보필(補筆)한 사기(史記)의 삼황본기(三皇本紀)에 의하면 공공노촉불주산, (B,C 3,000경이라는 고사(古事)가 있다.
이 고사는 삼황(三皇)중에 하나인 황제(皇帝) 여(女)와씨의 말년에 제후국중(諸侯國中)에,(뜻; 고대(古代) 중국천자에 속하여 일정한 영토를 가진 나라) 공공씨(共工氏)는 공국(共國)의 국왕(國王)으로서 가장 뛰어나게 강성(强盛)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記述)하고 있다.
* 共工氏當時 最爲善戰 自稱天下第一英雄 無人敢與匹敵 戰無不勝 攻無不克
* 공공씨당시 최위선전 자칭천하제일영웅 무인감여필적 전무불승 공무불극
라고 하였다. 해설 즉<공공씨는 당시에 가장 강성(强盛)하여 천하제일의 영웅(英雄)이라 하여 감히 필적(匹敵)할 사람이 없었으며 전쟁에 당하여도 이기지 못한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淮南子 天文訓曰共工與顓項爭爲宰 怒而觸不周之山 天柱折 地維絶 天傾西北
(회남자 천문훈왈공공여전옥쟁위재 노이촉불주지산 천주절 지유절 천경서북
故日月星辰移焉 地下滿東南 故水潦鹿埃歸焉) (12칸 사람의 이름 옥)
고일월성진이언 지하만동남 고수요녹애귀언) 즉;공공씨가 패권(覇權)을 잡고 수덕(水德)을 가진 공공씨가 본덕(本德)으로 황제가 된 여와씨의 천하(天下)를 빼앗으려고 홍수(洪水)를 일으켰으나 제곡씨(帝嚳氏)가 이를 막고자 하여 화덕(火德)을 가진 축융중여씨(祝融重黎氏)를 출병(出兵)하도록 명(命)하여 여러 번 싸워도 공공씨를 이기지 못하므로 중여(重黎)를 파직(罷職)하고, 다시 오회(吳回)를 출병(出兵)시키므로 진노(震怒)한 공공씨가 머리로 불주산(不周山) (; 불주산 이란 하늘을 떠 밭치고 있는 기둥 역할을 하는 신화 속의 산(山))을 들이받았다. 때문에 불주산에 서있던 북두칠성(北斗七星)도 기우러지게 되었으며 땅의 지축(地軸)도 기울게 되었다는 중국 고대신화(古代神話)가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공공씨(즉; 홍씨(洪氏)는 인류역사(人類歷史)와 더불어 비롯된 뿌리 깊은 성씨(姓氏)다 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공공여치우지전(共工與蚩尤之戰)(약B,C 2,707년경)이라는 고사가 있다, 즉(卽), 치우(蚩尤)는 황제헌원씨(皇帝軒轅氏)와 4 촌지간(寸之間)으로 중국의 제후중(諸侯中)에서 가장 포악(暴惡)한 자(者)로서 모든 제후들이 황제에게 모두 복속(服屬)(뜻;복종)하는데도 불구(不拘)하고 유독(惟獨) 치우만이 복속을 거부(拒否)하여 황제가 항복(降伏)을 받아내기 위하여 10년 동안 치우와 73번 이르는 사상유례(史上類例)없는 전쟁을 하고도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다가 결국(結局) 10년 만에 탁록의 들에서 사로잡아 죽인 바 있다.
이와 같이 악명(惡名)높은 치우가 공공씨의 토지(土地)를 침탈(侵奪)하고자 하므로 공공씨가 치우를 물리치기 위해 치열(熾熱)한 싸움이 있어 결국은 공공씨가 치우를 물리치고 승리(勝利)하였다는 중국의 고사(古事)인 것이다, 이와 같이 황제가 10년 동안이나 싸워 겨우 포살(捕殺)한 치우를 공공씨가 단번에 물리쳤다는 것은 공공씨의 위력(偉力)이 얼마나 위대(偉大)했는가를 짐작케 하는 고사(古事)로서 우리들로 하여금 긍지(矜持)를 갖게 하는 것이다.
@ 사기 권1 5제본기 제일, 중국사전참조(史記 卷一 五帝本紀 第一, 中國事典參照)
셋째 공공여전옥 쟁위제위(共工與顓項 爭爲帝位)라는 고사가 있다. 즉 황제가 임이 노쇠(老衰)하여 후계자를 정(定)하고자 할 때 공공씨가 전옥고양씨(顓項高陽氏) (B,C 2,491년 출생)와 왕제의 후계 자리를 놓코 경쟁(競爭)을 하였다 라는 말이다. 결국 전옥이 후계자가 되어 제위(帝位)에 오르고 공공씨는 황제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 하더라도 후보자로 경쟁을 하였다는 자체만으로도 공공씨의 권위(權位)를 알 수 있게 하는 고사다.(중국사전(中國事典)
넷째 <요(堯) 임금의 후계자(後繼者) 후보(候補)가 된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오제본기에 의하면 요(堯)임금이 말년(末年) (약 B,C 2,250년)경에 후계자를 선정(選定)하고자 중신(重臣) 방제(放齊)에게 물으니 방제가 대답하기를 사자단주개명(嗣子丹朱開明) 뜻; 당연히 단주(丹朱)(*요(堯)임금의 적장(嫡長)에게 물려 주셔 야지요 하니, 요왈 흉불용(堯曰 凶不用) 뜻; 요임금께서 말하기를 그는 덕(德)이 없고 불초(不肖)해서 왕재가 못된다)라하고 다른 인물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요우왈수가자(堯又曰誰可者)뜻; 요임금께서 또 말하기를 누가 있는가, 이때 환두왈 공공제취 포공 가용(驩兜曰 共工帝聚 布功 可用) 뜻; 환두(驩兜)가 말하기를 공공씨가 많은 백성(百姓)들로부터 두터운 신망(信望)을 받고 있어 등용(登用)할만 합니다,)하였다. 그러나 요왈 공공선언 기용벽 이공만천 불가(堯曰 共工善言 其用僻 而恭漫天 不可) 뜻;(요임금께서는 말하기를 그는 말을 잘하고 공손한 것 같지만 그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교만(驕慢)해져서 하늘까지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엄수이 여길 것이니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 오제본기 참조(史記 五帝本紀 參照)
조연내(朝延內)에 공공씨(共工氏)만한 인물이 없다면 출사(出仕)하지 아니하고 초야(草野)에 묻혀있는 인물이라도 천거(薦擧)하도록 하여 사악(四嶽)이 기주(冀州)의 역산(歷山)에서 도자기(陶瓷器)를 구우며 효자(孝子)로 이름이나있는 우순(禹舜)을 천거하니 요(堯)임금이 자기의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을 우순 에게 아내로 주고 우순을 후계자(後繼者)로 선택(選擇)하니 이가 곧 순(舜)임금 (B, C 2,250)인 것이다.
(2) 4인(四人)의 정적(政敵)을 유방(流放)하다,
경서(經書)의 순전(舜典)에 의하면 “유공공우유주(流共工于幽州)라고 하였다. 즉; 순(舜)임금이 후계자로 선택되어 섭정(攝政)(뜻; 임금을 대신하여 통치권을 맡아 나라를 다스림, 또는 그 사람)을 하고 있을 때 순임금은 공공(共工), 삼묘(三苗) 곤(鯤), 환두(驩兜) 등 4인의 정적(政敵)을 제거(除去)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고 곧이어 공공을 유주(幽州)로 유방(流放)(뜻; 귀양)하고 환두를 숭산(崇山)으로 방수(放遂)하고, 삼묘를 삼위(三危)로 서출(黜)하고 곤(鯤)을 우산(羽山)에서 극형(極刑)에 처(處)하니 천하가 함복(咸服)하였다 라고 하여 중국 고사에서는 이 사건(事件)을 일러 사흉유방(四凶流放)이라고 한다.
이때 사흉(四凶)에 대한 유방이유(流放理由)를 살펴보면 첫째, 공공씨(共工氏)는 공사(工師) 즉;(백공(百工)의 우두머리, (즉 국무총리)를 맡겼는데 선치(善治)를 못했다는 것을 이유로 북적(北狄) (뜻; 북넠 오랑캐)의 유주(幽州)로 유방 하였고 곤(鯤) 즉;(전옥의 아들이며 우(禹)임금의 아버지)은 요(堯)임금 시대에 치수담당장관(治水擔當長官)으로 9년 동안 재직(在職)하면서 홍수(洪水)를 다스렸으나 뚜렷한 공적(功績)이 없이 무능(無能)했다는 이유로 동이(東夷)(뜻;동쪽의 오랑캐)의 우산(羽山)으로 유방하고 삼묘(三苗)는 형주(荊州)에서 자주 정부를 비판(批判)했다는 것을 이유로 서융(西戎)(뜻; 옛날 중국 사람이 서쪽의 이민족(異民族) 즉; 서쪽 오랑캐)의 돈황(燉煌)으로 유방하고 환두(驩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만 공공씨를 요(堯)임금에게 추천했다는 것이 이유가 될 수 있을 뿐이니 공공씨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남만(南蠻) (뜻; 남녘 오랑캐)의 숭산(崇山)으로 유방된 것이니 이는 정적(政敵)을 제거(除去)하기 위한 이유에 불과 한 것 이었다라고 판단(判斷)되는 것이다.
(3) 사흉(四凶) 유방설(流放說)의 오무(誤繆)(뜻; 잘못 전한 말)
우순(虞舜)이 공공, 곤, 삼묘, 환두, 등 4인의 정적(政敵)을 유방(流放)한데 대(對)하여 사기(史記)의 주석(註釋)에서는 4 인을 포악무도(暴惡無道)하고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악인(惡人)들로 규정하고 공공(共工)은 궁기(窮寄), 곤(鯤)은 도올(檮杌), 삼묘(三苗)는 도척(盜跖) 환두(驩兜)는 혼돈(渾沌)이라는 별명(別名)을 붙여 사흉(四凶)이라 하였다.
사기 사마천(司馬遷)이 (B, C 104년)에 착수(着手)하여 14년 (B, C 91년)만에 완성(完成)한 기전체 역사편찬(紀傳體 歷史編纂)에 효시(嚆矢)(뜻; 맨 시초)가 되고 있는 불후(不朽)(뜻; 썩다, 부패하다)의 명작(名作)인 것이다. 본 사기 원문(原文)에는 전술(前述)한 공공이 궁기(窮寄)라는 기록은 없으나 사기를 편찬한지 800년이나 지난 서기 700년경에 장수절(張守節)이 사기정의(史記正義) 130권을 기술하면서 그 주석(註釋)에 이르기를 순(舜)임금이 4인의 정적을 유방한 데 대하여 공공(共工)은 궁기(窮寄)요 환두(驩兜)는 혼돈(渾沌)이요 곤(鯤)은 도올(檮杌)이요 삼묘(三苗)는 도척(盜跖)이다 라는 별명을 붙여 인면수심(人面獸心)(뜻; 의리와 인정을 모르는 사람)의 포악무도(暴惡無道)한 악인(惡人)인 것처럼 묘사(描寫)(뜻; 베기다, 또는 그런 것처럼)하고 있다.
궁기, 혼돈, 도올, 도척, 등은 진실(眞實)로 포악무도한 자들의 별명으로 인용되는 이름으로 공공(共工)은 정직(正直)한 사람을 중상모략(中傷謀略)하여 곤궁(困窮)에 빠뜨리기를 좋아하여 궁기(窮寄)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하였고, 환두(驩兜)는 선량(善良)한 사람을 등쳐먹는 사기협잡(詐欺挾雜)꾼 이라 혼돈(渾沌)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고, 곤(鯤)은 포악무도(暴惡無道)하고 고집불통(固執不通)이라 도올(檮杌)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고, 삼묘(三苗)는 선량한 백성(百姓)들로부터 약탈(掠奪)하기를 좋아하여 도척(盜跖)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는 주석(註釋)을 덧붙여 놓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와 같이 포악무도한 사람들이 요(堯)임금의 측근(側近)에서 수십년(數十年)동안 요(堯)의 치세(治世)를 직접 도왔는데 어떻게 요임금의 후계자를 논의(論議)하는 자문역할(諮問役割)을 할 정도의 위치에 있던 정치거물(政治巨物)이었으며 공공(共工)은 백공(百工)의 수장(首長)(국무총리에 해당 함)으로 요의 후계자의 후보(候補) 추천될 정도로 신망(信望)이 두터운 인물이었으며, 곤(鯤)은 우왕(禹王)의 아버지로 요임금의 치세중(治世中) 9년 동안이나 건설부(建設部) 장관직(長官職)에 해당하는 직(職)에 있으면서 9년 치수를 다스린 인물이니, 그들의 능력(能力)이나 인품은 이미 검증(檢證)된 사실이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에 4인이 진실로 포악무도한 인물(人物)들이었다면 요임금이 곧 파직(罷職)하여 유방(流放)을 했어야 마땅한 일이거늘 어찌 요임금과 같이 명철(明哲)한 성군(聖君)이 9년 동안이나 등용(登庸)했단 말인가? 때문에 후자(後者)는 전자(前者)의 별명(別名)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실로 공공, 환두, 곤, 삼묘, 등 4인이 포악무도한 악인들이었다면 4인들이 수십 년 동안이나 태평성대(太平聖代)가 아니라 오히려 폭정(暴政)의 시대였다고 평가되어야 마땅할 것이며 오직 4흉을 유방 시킨 순임금의 시대(時代)만이 태평성대로 평가되어야 이론상 타당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장수절(張守節)이 요순(堯舜)시대를 맹목적(盲目的)으로 흠모(欽慕)하여 4인의 정적제거를 정당화 합리화하기 위하여 4인의 정적제거를 폭악무도한 악인들을 제거한 것처럼 4흉 유방이라는 이름으로 조작(造作)해 놓은 것으로 인정되나 그것은 오히려 요임금의 시대를 태평성대로 평가될 수 없도록 하는 자가당착적(自家撞着的)인 결과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편협(偏狹)한 조작이었다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후세(後世)의 사람들은 이에 대하여 아무런 비판도 없이 맹신(盲信)하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4) 공공(共工) 궁기(窮寄)에 대(對)한 고찰(考察)
공공(共工)의 별명으로 붙여진 궁기(窮寄)란 유명(有名)인의 이름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포악무도한 자를 지칭(指稱)하는 대명사(代名詞)로 인용되고 있는 동물(動物)의 이름으로 중국의 <신이경(神異經)>에 의하면 궁기란 신화(神話)속의 맹수(猛獸)의 이름으로 중국의 서북지방(西北地方)에 살고 있으며 외모(外貌)는 호랑이 같고 날개가 있어 날기도 하며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도 있어 선량한 의인(義人)만을 골라 잡아먹고 사기협잡꾼과 포악무도한 자들을 도와주는 의리(義理)없는 맹수다 라고 하여 악명(惡名)높은 자들의 공통된 대명사로 인용(引用)되고 있는 맹수의 이름이다.
공공씨에게 궁기라는 별명(別名)을 붙인 것은 전술(前述)한 바와 같이 중국의 장수절(張守節)이 우순(虞舜)의 4인 정적제거를 정당화(正當化)하기 위해 조작해 놓은 것으로 우리 홍문(洪門)에서 공공궁기(共工窮寄)를 거론(擧論)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 홍문의 족보(族譜)에는 공공궁기가 공공씨의 시조(始祖)로서 뒷날 공공궁기가 공씨로 바뀌었다라고 기술(記述)하고 있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크게 잘못된 이론이다. 때문에 앞으로는 우리 홍문에서 공공궁기를 거론(擧論)하는 경우가 없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5), 공공씨(共工氏) 개위공씨설(改爲共氏設)
공공씨가 공자(工字) 하나를 버리고 공씨(共氏)로 하게 된 유래는 이러하다.
<중국백가성씨사전(中國百家姓氏事典)>에 의하면,
於四千兩百年前,被虞舜流放到幽州,以後曾經把自己,家族的姓氏,省略爲一介共字
어사천량백년전,피우순유방도유주,이후증경파자기,가족적성씨,성략위일개공자
라고 하였다. * 즉; 4,200여 년 전에 공공씨가 우순에 의하여 유주로 유방된 후 일찍이 그들의 가족들이 사용하던 성씨(姓氏)인 공공씨에서 공자(工字) 하나를 성략(省略)하고 공씨(共氏)로 하였다 라고 하였다.
본래 공공씨는 치수관(治水官)의 관명(官名)을 성씨(姓氏)로 하여 자손대대로 세습(世襲)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공씨가 관직(官職)에서 파직(罷職)되고 우순(虞舜)에 의하여 혈족(血族)과 더불어 모두 유주(幽州)즉;요령성(遼寧省)로 유방(流放) 됨에 따라 공공씨 자체가 소멸(消滅)되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유주로 유방된 공공씨들은 공자(工字) 하나를 버리고 공씨(共氏)로 하였다 하였으니 이때가 기원전(紀元前) 2,200여년(餘年) 전(前)의 일이다.
또한 공공씨를 연원(淵源)으로 하는 공(共)씨 이외에 또 다른 공씨가 있으니 중국에서 발행한 명륜휘편 씨족전(明倫彙編 氏族典)에 의하면,
<공씨 상말후국금하내공성즉기지야.....(共氏 商末候國今河內共城卽其地也>라 하였다. 즉; 상 나라 말기에 후국(侯國)이 있었으니 현재 하내(河內)의 공성(共城)이 곧 그곳이다. 그 후손들이 나라 이름으로 성씨를 삼었다 하였고,
또한 <진태자신생 시공고 기후이위씨(晉太子申生 諡共故 其後以爲氏)라 하였다. 즉; 진(晉)나라의 태자 신생(申生)의 시호(諡號)가 공군(共君)이기 때문에 그 후손들이 공(共)으로 성(姓)을 삼었다 라고 하여 삼계통(三系統)의 공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6), 공씨피구 개위홍씨설(共氏避仇 改爲洪氏說)
중국의 성찬(姓纂)에는 <共工氏之後 本姓共氏 困避仇改爲洪氏(공공씨지후 본성공씨 곤피구개위홍씨)라 하였고, 중국의 만성통보(萬姓統譜)에도 공씨피“구개위홍씨,,라(뜻; 원수를 피해 홍씨로 개성) 하였다. 또한 중국백가사전에는
“又爲避仇才在原來姓氏的 傍邊加上 三點水
(우위피구재재원내성씨적 방변가상 삼점수)라고 하였다. 즉; 또 다시 피구(避仇)를 위해 원래의 공자(共字)에 삼수변(三水邊)을 더해 홍(洪)씨로 하였다. 라고 하였다. 따라서 우리들이 홍성의 연원(淵源)을 설명(說明)할 때에는 대개 공공씨가 공(共)씨로 하였다가 공씨가 다시 원수(怨讐)를 피(避)하기 위해 공(共)자에 삼수변을 더해 홍씨로 하였다 라고 기록해 오고 있는 것이다.
일설(一說)에는
“洪氏 共工氏之後 本姓共 後推本水德之緖 加水於左 遂爲洪氏,,
“홍씨 공공씨지후 본성공 후추본수덕지서 가수어좌 수위홍씨,,라 하였다.
즉; 홍씨는 공공씨의 후손으로 본성(本姓)이 공(共)씨였다, 본래의 성(姓)이 치수관으로 대대로 세습하여 수덕(水德)으로 성이 된 것을 흠모(欽慕)하여 공자(共字)의 좌변(左邊)에 수자변(氵字邊)을 더해 드디어 홍(洪)씨로 하였다.
이에 대하여 아래와 같다.
<而將共氏全族 遷到幽州去 當時的幽州 是在如今遼寧省邦襄 共氏避遷
<이장공씨전족 천도유주거 당시적유주 시재여금요령성방양 공씨피천
<又失去了諸侯的地位 想起祖先原起水官 如今降爲平民爲了記念祖宗做過水官
<우실거료제후적지위 상기조선원기수관 여금항위평민위료기념조종주과수관
<便將共字加三點水 而改爲洪姓
<편장공자가삼점수 이개위 홍성, 라고 하였다. 즉; 공씨의 전가족이 유주로 옮겨 갔다. 당시의 유주는 현재의 요령성이다. 공씨가 옮겨감으로 제후(諸侯)의 지위(地位)도 함께 잃게되어 평민(平民)상태가 되었다. 선조(先祖)들의 성(姓)이 공공씨 기원(起源)은 치수관으로 대대로 세습하여 수덕을 입은 것을 기념하여 공(共)자에 수(氵)자 변을 붙여 홍(洪)씨로 하였다 라고 하였다.
공씨개위홍씨(共氏改爲洪氏)에 대(對)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기술(記述)하면 유주(幽州)로 유방(流放)된 후(後) 서한무제(西漢武帝) 기원전 1210년 때에 공(共)씨의 후예(後裔) 공훈(共勳)의 아들 공보(共普)가
<困避仇歸隱 加三點水於左 成於洪氏 薦居西域涼州(甘肅省燉煌) 洪氏子孫
<곤피구귀은 가삼점수어좌 성어홍씨 천거서역량주(감숙성돈황) 홍씨자손
卽以洪普爲始祖 竝以燉煌爲堂號
즉이홍보위시조 병이돈황위당호)라고 하였다. 즉 공보(共普)가 피구은거(避仇隱居)를 위해 공(共)자의 좌변에 삼점수를 더해 홍씨로 하고 서역 량주 돈황으로 천거하여 정착세거(定着世居)하니 그의 후손들이 홍보(洪普)를 홍(洪)씨의 시조(始祖)로 모시고 아울러 돈황(燉煌)을 본관(本貫)으로 하였다.
(7) 육계당 홍씨(六桂堂 洪氏)
육계당 홍씨란 송(宋)나라 초기(960 - 970년)에 중국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 사는 옹건도(翁乾度)의 아들 6형제가 모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及第)하여 육계연방(六桂聯芳)이라 하고 옹씨(翁氏), 홍씨(洪氏), 왕씨(汪氏),강씨(江氏), 방씨,(方氏), 공씨(龔氏) 등 6개 성씨로 분성(分姓)했다는 설(說)이 있고,
또 일설(一說)에는 옹씨(翁氏)의 정자(亭子)에 옹(翁)씨, 홍(洪)씨, 왕(汪)씨, 강(江)씨, 방(方)씨, 공(龔)씨 등 6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친형제와 다름없는 우의(友誼)를 다지며 학문에 정진하여 6인이 모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월계관(月桂冠)을 썼다 하여 6계당 이라는 당호(堂號)가 생겨나게 되었다 라는 설이 있으나 어느 설이 정설(正說)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육계당간친회(六桂堂懇親會)에서는 전자(前者)를 정설로 하고 있다.
6계당(六桂堂) 간친회(懇親會)의 주장(主張)에 의하면 송(宋)나라 초기(初期)에 호이(胡夷)들의 내습(來襲)으로 백성들이 피난(避難)할 때 6계당에 살고 있던 옹건도(翁乾度)의 아들들도 동서남북(東西南北)으로 피난하였다.
장남(長男) 옹건후(翁乾厚)는 감숙성(甘肅省) 돈황현(燉煌縣)으로 도피(逃避)하여 홍(洪)씨로 개성(改姓)하고 당호(堂號)를 돈황(燉煌)이라 하였다.
둘째 아들 옹처공(翁處恭)은 산동성(山東省) 인양현(燐陽縣)으로 도피(逃避)하여 강(江)씨로 개성(改姓) 하였고,
셋째 아들 옹처역(翁處易)은 호이(胡夷)들과 맞서 싸우다가 전사(戰士)하므로 옹(翁)씨를 유지(維持)하였고,
넷째 아들 옹처박(翁處朴)은 개봉부(開封府)로 도피(逃避)하여 방(方)씨로 개성(改姓)하였고,
다섯째 아들 옹처염(翁處廉)은 무능산(武陵山)으로 도피(逃避)하여 공(龔)씨로 개성(改姓)하였고,
여섯째 아들 옹처휴(翁處休)는 강남(江南)으로 도피(逃避)하여 왕(汪)씨로 개성(改姓)을 하고 은거(隱居)하였다.
육계당(六桂堂)의 주체(主體)인 옹(翁)씨의 뿌리를 상고해 보면 주(周)나라 소왕(昭王) (B, C 1052 - 1002년)의 서자(庶子)가 옹산(翁山)에서 산나물을 캐어 먹으며 자랐다 하여 옹자(翁字)로 성(姓)을 삼았다 하였다 하였으니, 옹(翁)씨의 역사(歷史)는 약 3,000년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6계당의 회원종친(會員宗親)이 되는 것은 아니며 다만 서기 960년경에 6계당에서 동문수학(同門修學)한 옹건도(翁乾度)의 아들 6형제의 직계후손(直系後孫)들만이 6계당간친회(六桂堂懇親會)에 참석(參席)할 자격(資格)이 있을 뿐이며 기타 6개 성씨들도 모두 이와 같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6계당(六桂堂) 성씨중(姓氏中)에 홍(洪)씨가 그 일원으로 구성(構成)되어 있어 마치 우리 남양 홍씨와 종친인 것처럼 인식(認識)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으나 앞에서 이미 기술(記述)한바와 같이 여섯 계통 중 공공씨를 연원(淵源)으로 하는 돈황홍씨(燉煌洪氏)이외의 홍씨들은 그 뿌리가 이질적(異質的)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상호종친(相互宗親)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옹처후(翁處厚)를 시조(始祖)로 하는 6계당 홍씨도 일명 돈황 홍씨라고 하기도 하나 공공씨(共工氏)의 후예(後裔) 홍보(洪普)를 시조로 하는 우리 돈황 홍씨와 동일(同一)한 것으로 혼돈(混沌)해서는 안 될 것이고, 따라서 6계당 홍씨와 우리 남양 홍씨는 종친이 될 수도 동화(同化)가 될 수도 없는 이질적(異質的)인 뿌리다 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認識)해야 할 것이다.
옹건도(翁乾度)의 후손(後孫)들의 모임인 세계(世界) 6계당종친회(간친회)는 필린핀 마닐라시에 본부를 두고 숭조대제(崇祖大祭)와 겸하여 1990년 2월10일 개최하고 매년 종친 간에 친목을 도모하는 세계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세계 모임인 홍(洪) 강(江) 옹(翁) 방(方) 공(龔) 왕(汪)씨 6계당 본부에서는 한국에 있는 남양 홍씨 대종중 중앙종회에 통지(通知)하기를 우리는 나라가 다르고 성은 달라도 한 조상(祖上)이니 6계당 모임에 참석하여 줄 것을 알려왔다. 그러나 남양 홍씨는 홍보(洪普)를 시조로 하는 우리 돈황 홍씨는 옹건도(翁乾度)의 후손인 6계당 홍씨와는 종친(宗親)이 될 수도 동화(同化)가 될 수 없으니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예가 아니다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