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단_한국 생태담론의 궁핍한 현실
닫힌 생태주의에 대해 학계 비판...정치적 민주주의와 결합해야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지역학)
“생태의식이 대중화되고 개인화되면서 상품화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생태담론도 예전의 운동성과 집중성을 잃어버리고 점점 파편화되고 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생태담론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려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한면희 서강대 교수(환경철학)
“한국의 생태운동은 이제 겨우 2단계를 지났다. 여기에서 녹색평론의 역할은 컸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4단계로 도약해야 할 시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영역을 고집하기보다는 서로 토론하고 비판할 수 있는 문화가 필요하다.”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한국의 생태운동은 민주주의라는 대전제 아래 다시 재집결해야 한다. 정치적인 민주주의의 일정 수준의 성취 없이는 어떤 생태적 운동도 그 지속성을 갖지 못한채 일회성 사건으로 그치고 말 것이다.”
국내 생태담론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지적 토론의 풍경은 없고 집단시위나 정책회의만 있다. 한쪽에서는 이성보다 감성에 호소하는 매너리즘에 빠져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진국 따라잡기 위한 이론공부만 이어진다.
한면희 서강대 교수(생태철학)는 신간 ‘초록문명론’(동녘)에 국내 생태론자들의 글을 단 한편도 인용하지 않았다. 좀 의아해서 물어보니 “인용할 게 없다”는 답변이 돌아온다. 국내 생태론들이 대부분 에세이고 논문들도 외국 글을 짜깁기한 게 많아 곤란했다는 것. 그는 대표적 생태이론가로 알려진 구승회 동국대 교수(생태윤리)의 ‘환경윤리와 생태철학’(동국대출판부 刊)이 “톰 레간의 책 한 章을 그대로 옮겨와 실은 표절서”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그나마 김지하, 장회익 등이 비체계적이긴 하지만 이론적 영감을 풍부히 함유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회익 교수의 ‘삶과 온생명’(솔 刊)도 “그 실천성이 매우 취약한 저서인데 과대포장됐다”라고 비판했다. 문제는 이런 비판을 실제로는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생태학계가 너무 좁아 이견이 있더라도 그냥 속으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한 교수의 이 말이 국내문헌 미인용의 전체적인 이유는 아닌 것 같다. 달리 생각해보면 수준을 너무 서양 선진국에 맞추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또한 이론 vs 이론, 에세이 vs 에세이라는 도식도 생태이론이 열려있고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해하기 힘들다.
계간 ‘환경과생명’ 편집주간인 조명래 단국대 교수(도시지역학)는 이런 학계의 이론적 현실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응이다. 문순홍, 구승회, 한면희 등이 그래도 전공 이론가에 속하며, 한 단계 아래에서 혹은 다른 층위에서 최병두 대구대 교수(지리학), 박홍규 영남대 교수(법학),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과 자신의 작업이 이뤄진다고 말한다. 한국 생태이론의 기대주였던 문순홍 박사는 최근 2년간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중단중이다.
아무튼 수준 있는 생태담론을 펼칠 이들이 이 정도라는 학계의 판단은 꽤 놀랍다. 그 많은 환경관련 학과, 단체들이 있건만, ‘생태담론’은 그동안 담론을 위한 ‘사랑방’조차 꾸미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홍욱희 세민환경연구소장은 "제대로 된 생태론자 한 명, 아니 생태론에 관심을 갖는 후속세대 하나 길러내지 못하는 한국의 대학제도는 지식인 양성기관으로서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것일까. 생태이론이 그렇게 매력이 없는 것일까.
“학술대회에서 제대로 토론해본 적이 없다”는 한면희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결국 이는 담론공간의 부족 때문이기도 하다. 현재 한국에서 생태담론이 펼쳐지는 공간은 ‘환경과생명’, ‘녹색평론’ 등 두 잡지와 환경단체의 소식지 몇몇이 전부다. 놀라운 것은 이 마저도 필자 기근에 허덕인다는 것. 조명래 교수는 “젊은 학자들을 편집위원 등으로 많이 영입해오지만, 자기영역을 벗어나면 글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한다”라며 요즘 젊은 학자들의 좁은 시야에 안타까움을 표한다.
논쟁다운 논쟁 한번 없는 생태담론의 밋밋한 현주소는 생태주의자들의 고유한 특성에서 비롯하는 면도 있다. 대표적 사례가 김종철 ‘녹색평론’ 편집인이다. 그는 “국내 생태이론가들의 현실인식은 타이타닉 위에서 자리를 이리저리 바꾸는 꼴”이라고 비판한다. 서구 선진국들이 누리고 있는 삶의 ‘풍요’가 지구의 ‘생태적 순환’에 얼마나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이 없이는 모든 환경운동이 무의미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녹색의 역사인식은 정당한가
이런 절대적 근본주의는 김종철 교수 나름의 종합학문적 성찰과 현실적 판단에 기초한 것이지만, 점점 더 ‘감정’이 섞여 들어간다는 비판이 생겨난다. 김종철 교수는 국내 이론가들에게 “식민주의에 안주하거나, 역사적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비판해왔다.
하지만 이 말은 ‘녹색평론’에도 해당된다. 최근 스콧 니어링,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 등 ‘녹색평론’이 배출한 스타사상가들이 정치적으로 매우 보수적이고, 서구중심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박홍규 교수는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가 묘사한 티베트는 정치사회를 제외한 티베트의 극히 일부분만 보여주고 있으며, 다수 티베트 민중의 억압받는 상황을 외면하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출판평론가 최성일 씨는 “스콧 니어링이 청교도들의 미 대륙 침범과 인디언 학살을 삶의 개척이라고 평가하는 것은 제국주의적 역사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최근 지적한 바 있다.한마디로 요즘 ‘녹색평론’은 생태와 생태 아닌 것, 농촌과 농촌 아닌 것이라는 이분법적 틀에서 역사와 사회, 정치를 보고 있다. 녹색평론사에서 최근 펴낸 ‘쌀과 민주주의’(천규석 지음)라는 책은 쌀개방으로 위기에 처한 ‘쌀산업과 문화’를 살리기 위한다는 명목으로, 그동안 우리 사회가 성취한 그리고 추진하고 있는 모든 의미있는 제도와 정책을 공격하고 있다. 논리 자체가 매우 중앙집권적이며 ‘쌀’의 중요성을 역사에서 찾는 모습은 ‘쌀의 신격화’에 이를 정도다.
최근 ‘녹색평론’은 자신들이 국내에 소개해온 저명한 생태주의 필자들을 초청해 순회강연을 하며 저변확대를 꾀하고 있다. 이는 녹색평론의 주요 활동인 한살림 운동이 농업생산의 생태화, 농촌구조와 소비문화의 혁신이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도시지식인들의 ‘영성-웰빙’ 차원에서 질좋은 농산물을 공급하는 것으로 머물자 그것을 타개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에 대해 박홍규 교수는 “몇마디 되지도 않는 내용의 강연으로 대중들에게 감성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생태-포퓰리즘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크다는 우려를 나타냈다.
이런 식의 일방적 전진은 인접집단과의 연결고리를 상실하고 결국 이론가, 실천가, 운동가, 에세이스트 등이 모두 자기 목소리를 내는, 그러면서도 전부 합쳐보면 별 큰 차이 없는 동어반복으로 귀결되는 생태주의의 파편화와 매너리즘의 악화를 낳을 뿐이다. 이렇게 해서는 요즘 들어 두드러지는 생태주의의 ‘개인화’와 ‘상품화’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웰빙’이라는 말은 그것의 가장 극명한 표현이다. 오늘날은 누구나 생태적인 것과 환경보호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하지만 생태의 중요성을 아는 것은 생태적 삶을 위한 실천으로 쉽사리 옮겨지기 힘들다. 생태라는 것은 공동체적인 배려가 있어야 성취될 수 있는 삶의 시스템인데 비해, 생태의 개인화는 자신의 생활권에 속한 부분만 생태적으로 관리하는 '이기적' 차원에 머물 뿐이다. 또한 생태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이것에 반하는 삶의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생태대중화라는 말은 사실 그 한계가 무척 큰 트렌드다. 따라서 생태담론의 활성화는 최소한 생태적 삶에 관심있는 이들에게 끊임없는 도덕적 자극과 지적 호기심, 함께사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공동체에 대한 합리적 인식을 정열적으로 불러 일으켜야 한다. 이것이 생태주의의 근본주의적인 세계인식을 용인하는 제도권 사회의 기본적인 태도다. 그러나 현재의 생태담론은 자신의 '입장'에 따른 무모한 '주장'과 '실천'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 다이내믹한 ‘대화’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소수의 에피고넨들만으로 힘겹게 유지될 뿐이다.
그 에피고넨들이 대중들 및 지역주민들과 실천하는 행동은 새만금사업, 핵폐기장 설치반대, 파병반대를 위한 온갖 육탄저지 운동이다. 그리고 지역 이기주의와의 결합이다. ‘생명’과 ‘자연’은 무조건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논리이고, 그런 생명과 자연이 ‘보상금’을 위한 희생양으로 내걸리는 게 오늘날 환경운동의 현실이다. 하승우 경희대 강사(정치사상)은 이런 견해에 대해 너무 '중앙'의 시각이라고 비판한다. 사실 지역단위의 자치운동, 환경운동은 의미있는 실천들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매체에서 이슈파이팅 위주로 활동하는 중앙시민운동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지방의 의미있는 실천이 주목을 받지못한다는 환경운동의 중앙집권화에 대한 지적이다.
생태적 삶은 민주주의의 심화와 함께 가는 것
하지만 현재 지역단위 운동은 '대의제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생태-아나키즘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아나키즘이라는 것이 자생적 이념이 아니고 '수입된 이념'이라 한국적 현실과 맞지 않아 지속성을 갖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박홍규 교수는 지난 부안사태 때 자발적 시민불복종 운동을 조직해서 그것을 시민자치운동, 반핵, 반원자력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열심히 뛴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는 일회성 사건으로 그쳤다. 박 교수는 여기서 “정치적인 민주화가 없는 생태운동이 참 무의미하구나”라는 걸 느꼈다고 한다. 이 말은 어떤 개별적 생태운동도 지금처럼 겉옷만 걸친 형식적인 민주주의 아래에서는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는 자각이다. 그렇다면 생태적 행동을 취하기 전에 민주주의를 실질화, 토착화시키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전혀 뒷전의 일로 취급되고 있다. 한쪽에서는 개발과 투자를 다른 한쪽에서는 이에 대한 반대를 지겹도록 되풀이하고 온갖 잡스러운 논리들을 통해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 오늘날 생태적 주장들도 이런 혼란지중에 속해있다. 생태담론도 ‘생태화 이후의 생태주의’를 모색해야 할 때가 아닐까. 다수 대중의 표면적 의식이 생태화됐고, 일부 정부기구와 기업들이 최소한의 생태적 장치들을 갖췄다. 다른 한편에서는 대안 생태운동이 부딪힌 한계가 너무 명확하게 수면위로 떠오르고 있다. 한국 생태주의 10년사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고, 새로운 방향설정을 하기 위한 노력은 민주주의의 심화라는 문제제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생태주의가 민주주의와 만나는 방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그들의 정의를 재정의하는 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교수신문> 2004년 9월 20일 강성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