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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즈 글릭의 문학
복수적 주체의 서정시: 루이즈 글릭의 시 세계
오민석(문학평론가, 단국대 교수)
I.
2020년 노벨문학상은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Louise Glück; 1943~)에게 돌아갔다. 루이즈 글릭은 지금까지 열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시선집을 출판하였으며, 퓰리처상, 볼링겐 상(Bollingen Prize) 등 유력한 문학상들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2003~4년엔 미국의 계관 시인이기도 했다. 그러나 세계 문학의 단위에서 볼 때 루이즈 글릭은 널리 알려진 시인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문학 애호가들에게 상당히 놀라운 소식으로 다가왔다.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가 “꾸밈없는(소박한) 아름다움을 갖춘 확실한 시적 목소리로 개인적 존재를 보편적인 것으로 만든다.”라고 평가했다.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온갖 세련된 실험을 통과해온 현대 세계 문학의 추세로 볼 때, 심사위원들이 “꾸밈없는(소박한) 아름다움”에 주목한 것도 새삼 놀랄만한 일일 수 있다. 물론 노벨문학상이 문학에 대한 평가의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루이즈 글릭에 대한 이런 찬사는 문학을 대하는 한 가지 유구한 원칙이 세계 문학 마당에서 여전히 유효함을 확인해준다. 그것은 바로 예술 형식을 그 자체가 아니라 진정성의 표현을 위한 매개(medium)라는 각도에서 읽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새롭고 세련된 형식일지라도 ‘진정성이 없는 꾸밈’은 훌륭한 예술이 아니라는 ‘상식’이 여전히 통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루이즈 글릭의 시들은 한림원의 평가대로 실험적이라기보다는 소박할 정도로 장식이 없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들은 고통과 욕망으로 점철된 인간의 삶을 정확하게 포착하여 독자들의 정념을 찌른다. 그녀는 특히 삶의 고통에 매우 민감한데, 이는 널리 볼 때, 그녀의 개인사와 무관하지 않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죽은 언니에 대한 강박적 사유의 소유자였으며, 고등학생 때에는 거식증으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근 7년간에 걸쳐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 뒤늦게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그녀는 사라 로런스 대학(Sarah Lawrence College)과 콜롬비아 대학(Columbia University)을 다녔지만, 그것도 비학위 과정의 시 창작 관련 강좌와 워크숍에 참여한 것이 전부였다. 1980년, 그녀의 세 번째 시집 『하강하는 형상 Descending Figures』이 나온 해에는, 화재로 집이 전소되기도 했다. 그녀의 시들은 대부분 개인적 삶의 경험과 기억에서 시작되는데, 이는 그녀의 이런 고통스러운 개인사와 일정한 연관이 있다. 그녀의 시들은 대부분 일인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겉으로 보기에는 일종의 자기 고백처럼 들리기도 하고, 그리하여 종종 ‘자서전적’이라는 평가를 듣는다.
내가 말해줄게, 그것은 달이 아니야.
마당을 비추는 것은
이 꽃들이야.
나는 그것들이 몹시 싫어.
나는 그것들이 섹스처럼 너무 싫어
내 입을 밀봉하는
남자의 입, 마비시키는
남자의 몸―
그리고 항상 달아나는 비명
그 저급하고, 굴욕스러운
결합의 약속―
오늘 밤 내 마음속으로
나는 듣지, 질문과 추구하는 대답을
하나의 소리 속에 섞인
오르고 또 오르고 나서
낡은 두 개의 자아로 쪼개진
피로에 지친 적대감들을. 당신은 보여?
우리는 농락당했어.
그리고 가짜 오렌지 나무 향기가
창문을 통하여 떠다니지.
내가 어떻게 쉴 수가 있겠어?
내가 어떻게 만족할 수가 있겠어
세상엔 여전히
그 냄새가 있는데?
―「가짜 오렌지 나무(고광나무)」 전문(오민석 역. 이하 인용되는 모든 시는 오민석의 번역임)
이 작품은 페미니즘 관련 시선집(anthology)들에 단골로 실리는 시들 중의 하나이다. 이 시의 원어 제목은 “Mock Orange”인데, 우리말로 ‘고광나무’이다. 그러나 ‘고광나무’로 번역하면 이 시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서 옮기면 “Mock Orange”는 ‘가짜 오렌지 나무’라 해야 더 좋다. 오렌지 나무처럼 생겼고 향기로운 꽃냄새를 자랑하지만, 실제로는 오렌지 열매가 열리지 않는 나무라는 말이다. 이 시의 화자는 이런 ‘가짜 오렌지 나무’에 빗대어, 사랑이 없는 이성 간의 “섹스”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고백’한다. 여성으로 짐작되는 화자에게 남성의 몸은 여성-존재를 “밀봉”하고 “마비시키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성의 몸이 “농락” 당하는 이런 현실은 “가짜” “냄새”가 지배하는 세계이다.
루이즈 글릭은 이렇게 개인의 정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일인칭 화자를 주로 동원하기 때문에,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말에 미국에서 유행했던 고백 시(confessional poetry)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시인으로 종종 오해받기도 한다. 게다가 그녀는 주로 ‘나’의 느낌에 대하여 말하는 서정시의 오래된 전통 속에 서 있다. 니체의 말대로 “서정 시인은, 모든 시대의 경험에 따르면, 항상 ‘나’를 말하고, 자기의 열정과 욕망의 반음계 모두를 우리 앞에서 부른다.”(『비극의 탄생』) 그러므로 서정시는 늘 주관적 자기 고백이라는 한계 혹은 함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루이즈 글릭의 특징과 성과는 자전적인 서정시로 “개인적인 존재를 보편적인 것”을 만드는 데에 있다. 그녀의 고백은 주로 고통과 상실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나오지만, 그 고백은 개인사로 끝나지 않고 보편적인 것으로 전화된다. 헬렌 벤들러(Helen Vendler)는 그녀의 시들이 “반론의 여지없이 개인적이면서도, 완곡하고도 신중하게 일인칭 ‘고백’에 대한 대안을 제시한다.”라고 지적한다.
II.
그렇다면 루이즈 글릭은 서정시인을 자처하면서도 어떻게 자기 고백의 주관성이라는 서정시의 한계에서 벗어나는가. 마이클 로빈스(Michael Robins)는 글릭의 시가 실비아 플래스(Sylvia Plath) 혹은 존 베리맨(John Berryman)의 고백 시와 달리 “사적인 것의 픽션(fiction of privacy)에 의존한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픽션’이라는 용어이다. 글릭의 일인칭 화자는 글릭이 고안해낸 인위적 장치로서의 ‘픽션’이다. 이론적으로 볼 때 시인과 서정시의 화자를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실제로 대부분의 서정시에서 화자는 시인 본인과 일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루이즈 글릭의 시에서 “나”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그녀의 일인칭 화자는 본인뿐만 아니라, 자연물, 정원사, 신적인 존재, 화가 등 무수한 ‘복수적 주체(plural subject)’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녀는 주체를 하나가 아닌 무수한 것들로 대체함으로써, 일인칭 화자의 목소리를 다성화(多聲化)한다. 한마디로 말해, 그녀의 일인칭 화자는 탈중심화된 주체이다. 그녀는 초점이 잘 잡힌 주체의 단일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내 말을 듣지 마세요; 내 가슴은 상처투성이거든요.
나는 어느 것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요.
난 나 자신을 알아요; 나는 정신과 의사처럼 듣는 법을 배웠어요.
내가 열정적으로 말할 때,
그때가 바로 내가 가장 신뢰받지 못할 때예요.
정말로, 매우 슬퍼요; 나는 평생 칭찬을 들어왔어요
내 지성에 대해, 나의 언어 능력과 통찰력에 대해서 말이지요.
결국엔, 다 낭비되고 말았지요―
난 나 자신을 결코 보지 못해요,
현관 계단에 서서, 내 언니의 손을 잡고서도 말이에요.
그것이 바로 내가, 소매가 끝나는 곳
그녀의 팔목에 난 상처를 설명할 수 없는 이유예요.
내 마음속에서, 나는 보이지 않아요: 그것이 바로 내가 위험한 이유예요.
나 같은 사람들, 자아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
우리는 불구자들, 거짓말쟁이들이에요;
우리는 진실을 위하여
인수분해 되어야만 하는 사람들이에요.
내가 조용할 때, 그때가 진실이 떠오르는 때예요.
맑은 하늘, 흰 섬유질 같은 구름들.
그 아래에, 작은 회색 집, 빨간 그리고 연분홍색의
철쭉꽃들.
―「신뢰할 수 없는 화자」 부분
이 작품에서 보듯이 글릭에게 있어서 서정시의 주관적 주체는 “신뢰할 수 없는 화자”이다. 시인이 “상처투성이”이거나 “열정적으로 말할 때”일수록 주관성은 더욱 강화된다. 그런 “나는 어느 것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 주관적 주체는 “지성”과 “언어 능력”과 “통찰력”을 “낭비”한다. 루이즈 글릭은 그런 주체들을 “불구자들, 거짓말쟁이들”이며 따라서 “인수분해 되어야만 하는 사람들”로 지칭한다. 그녀가 볼 때 오히려 주관적 주체가 “조용할 때”, “진실이 떠오”른다. 그리고 일인칭 화자를 사용하면서도 주관적 주체의 단성성(單聲性)에서 벗어나는 길은 주체를 탈중심화, 즉 “인수분해”하는 것이다.
글릭은 일인칭 화자에 다양한 목소리들을 집어넣음으로써 “나”의 초점이 아니라 복수적 주체의 시각으로 세계를 읽는다. 이런 특징은 루이즈 글릭의 전체 시 세계를 지배하지만, 특히 퓰리처상 수상작인 여섯 번째 시집 『야생 붓꽃 The Wild Iris』(1992)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난다. 이 시집은 정원의 다양한 식물(꽃)들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삶과 죽음, 그리고 재생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는데, 이 시집을 출판한 후에 “(내가) 원예사도 아닌데, 원예에 대해 수많은 질문을 받았다”라고 고백할 정도로 꽃과 원예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보여준다. 이 시집에서 일인칭 화자는 ‘나’뿐만 아니라, 자연(다양한 정원의 식물들), 정원사, 신적인 존재들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내 고통의 끝에는
문이 있었어.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줘: 당신이 죽음이라 부르는 것을
나는 기억해.
내 머리 위에는, 소음들, 소나무 가지들의 일렁이는 소리.
그리곤 아무것도 없지. 나약한 태양은
메마른 땅 위에서 깜박거리지.
어두운 대지에 묻힌
의식으로
생존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야.
그러더니 끝나버렸어: 당신이 두려워하는 것이,
영혼이면서 말할 수
없는 상태가, 갑자기 끝나버렸지, 뻣뻣한 대지는
약간 굽었지. 그리고 내가 새라고 여기는 것들이
키 작은 관목들 속으로 휙 뛰어들었어.
―「야생 붓꽃」 부분
이 시의 ‘나’는 제목의 “야생 붓꽃”이다. 이 시의 일인칭 화자는 야생 붓꽃이 되어 죽음을 의식하며 사는 것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어두운 대지에 묻힌/ 의식으로/ 생존한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야”라는 고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야생 붓꽃은 그런 고통의 끝에도 항상 출구가 있음(“고통의 끝에는/ 문이 있었어”)을 청자에게 말한다. 루이즈 글릭은 다나 레빈(Dana Levin)과의 인터뷰에서 “시란 입과 귀 사이의 소통”이라고 말했는데, 이 시에서 ‘입’은 “야생 붓꽃”이고, ‘귀’는 시인 자신, 독자들, 혹은 정원의 다른 꽃들이다. 시인은 ‘야생 붓꽃’이라는 타자를 일인칭 화자로 내세우면서 자신과 독자, 그리고 다른 꽃들에게 죽음을 넘어서는 생명의 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같은 시집의 다음 시를 보라.
태양은 빛나고; 우체통 옆, 갈라진 자작나무의 잎들은
지느러미처럼 접히고 주름져 있지요.
그 밑에는, 흰 수선화들, 아이스 윙즈, 캔터트리스의 텅 빈 줄기들;
야생 제비꽃의 검은 잎들. 노아가 말하기를
우울증 환자들은 봄을 아주 싫어한다네요, 내면과 외부 세계의
이 불균형을 말이에요. 그래서 나는 다른
예를 들었지요―그래, 우울할 땐 그렇지, 그러나 어떤 의미로
살아있는 나무와 열정적으로 하나가 되면, 내 몸은
실제로 갈라진 나무 몸통 속에 웅크리고 앉게 돼, 거의 평화롭게 말이지, 그리고
저녁에 비가 올 때는 거의 느낄 수 있어
수액이 거품을 물고 올라오는 것을: 그러자 노아가 말하네요
이것이 바로 우울증 환자들의 오류라고요,
나무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 말이예요, 반면에 행복한 가슴은
정원을 마치 떨어지는 이파리처럼 부유한다는 거예요,
전체가 아니라 부분의 형상으로 말이지요.
―「아침 예배」 전문
이 시에서 노아(Noah)는 시인의 실제 아들의 이름이고, 아이스 윙즈(Ice Wings), 캔터트리스(Cantartice)는 흰 수선화의 다른 종류들이다. 『야생 붓꽃 The Wild Iris』에는 “아침 예배(Matins)”라는 동일 제목의 시들이 여러 편 나오는데, 이 시는 그중의 하나이다. 앞에서 인용한 시의 화자가 “야생 붓꽃”이었다면, 이 시의 화자는 시인이다. 이 시는 아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자연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를 비교하고 있다. 이 시의 화자(시인)는 자연을 마치 마틴 부버(M. Buber)의 ‘나-너(I-Thou)’처럼 전유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과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몸으로 대한다. 반면에 아들은 하나가 아닌 부분들의 집합으로 세계를 읽는다. 중요한 것은 앞의 시나 이 작품이나 화자가 여전히 일인칭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너희를 만들었을 때, 나는 너희를 사랑했다.
이제 나는 너희들을 측은히 여긴다.
나는 너희에게 너희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었다:
대지의 침대, 푸른 대기의 담요―
내가 너희와 거리를 가질수록
나는 너희들을 더욱 분명히 보게 되지.
너희의 영혼은 지금쯤 엄청난 것이 되었어야만 해,
지금 너희의 모습,
조잘대는 작은 것들이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모든 선물을 주었다,
너희가 어떻게 사용할 줄을 몰랐던 시간,
봄날 아침의 푸르름―
너희는 더 많은 선물을 원했다, 다른 피조물을
위해 예비된 선물까지.
너희가 무엇을 희망했든,
너희는 정원에서, 자라나는 식물들 안에서,
너희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의 삶은 식물들의 삶처럼 순환하는 것이 아니거든:
너희의 삶은 새가 나는 것처럼
고요 속에서 시작해 고요 속에서 끝나지―
시작하고 끝난다, 메아리치는 모습으로
이것은 흰 자작나무에서
사과나무까지 둥글게 펼쳐져 있지.
―「물러가는 바람」 전문
마찬가지로 일인칭 화자인 이 시의 ‘나’는 신 혹은 신적인 존재이다. 그는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들을 만든 존재로서, 자신이 만든 인간들에게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주었고, 그들이 엄청난 존재가 되기를 기대했으나, “조잘대는 작은 것들”이 되어 “다른 피조물을 위해 예비된 선물”까지 탐내는 인간들을 동정하고 있다. 루이즈 글릭은 신을 일인칭 화자로 끌어들여 자신을 포함한 인류에게 할 말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인칭 화자를 이렇게 복수적 주체로 만드는 글릭의 전략은 무엇을 의도하고 있을까. 앞에서 말했다시피, 그녀는 일인칭 화자의 목소리를 다성화함으로써 주관적 독백이라는 서정시의 한계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는 서정시의 극적 독백이라는 장치를 사용하여 한편으로는 진술의 ‘진정성’을 확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 목소리를 다성화하여 진술의 주관성에서 벗어난다. 그리하여 그녀의 서정적 주체는 그녀의 시들을 자전적 고백을 넘어 보편성의 반열로 끌어올린다. 또한 그녀의 복수적 주체는 초점이 잘 잡힌 ‘통합된 주체(unified subject)’의 개념을 거부하고, 그 자리를 ‘분열된 주체(split subject)’ 혹은 ‘탈중심화된 주체(decentered subject)’로 채운다. 이런 점에서 루이즈 글릭의 주체관은 포스트구조주의(poststructuralism)의 주체관과 유사하다. 그녀는 다원화되고 탈중심화된 주체의 앵글로 세계를 읽음으로써, 세계를 비결정성(indeterminacy)의 상태로 놔둔다. 이것이 그녀가 종교, 인종, 젠더 등의 다양한 주제들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를 종교 시, 사회비판 시, 혹은 페미니즘 시라는 협애한 범주로 가둘 수 없게 만드는 요인이다.
III.
루이즈 글릭의 서정시가 갖는 또 다른 힘은 그것의 정확함과 간결함, 그리고 압축성에 있다. 미국 시인 크레이그 모간 타이처(Craig Mrgan Teicher)에 의하면, 그녀에게 있어서 “단어들은 항상 최소한만 사용되고, 어렵게 얻어지며, 낭비되지 않는다.” 로라 퀴니(Laura Quinney)에 의하면, 그녀의 시는 “극심하도록 서정적인 압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내 자리 건너편 기차 전체엔
거의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지: 팔걸이 건너편엔
불모의 두개골을 가진 아저씨만이 있었고 아이는
제 엄마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처박고 잠들어 있었어. 독(毒)이
공기 대신 차지하고 있었지.
그리고 그들은 앉아 있었어―마치 죽음 이전의 마비가
그들을 그곳에 못 박기라도 한 듯이. 기차는 남녘으로 향했지.
나는 그녀의 사타구니에 뛰는 맥박을 느꼈어……머릿니들이 그 아기의 머리카락 속에 뿌리를 내렸지.
―「시카고행 열차」 전문
루이즈 글릭이 어떤 인터뷰에서 말한 대로, 이 시는 스물여덟 번이나 거절당한 끝에 겨우 출판되었던 그녀의 첫 시집 『맏이 Firstborn』(1968)의 첫 번째 시이다. 말하자면 이 시는 글릭이 세상에 내어놓은 최초의 신호탄 같은 시인데, 놀랍게도 이후 그녀의 시적 경향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우선 이 시는 그녀의 시선이 주로 세상의 불행, 상실, 비극, 욕망, 유한성에 가 있음을 알려준다. 불행과 욕망과 죽음의 맥락과 배경은 이 시에서 완전히 삭제되어 있다. 미동도 없이 남녘 시카고로 달려가고 있는 열차 칸에서 시인은 한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풍경을 냉혹할 정도로 단순하게 묘사한다. 시점은 여전히 일인칭이며, 그의 시선에 보이는 “아저씨”는 대머리인데, 그것을 그녀는 ‘bald head’라 하지 않고 “불모의 두개골(barren skull)”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지 머리카락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생성이 중단된, 메마른 ‘해골’이다. 그의 아이는 엄마의 사타구니에 “머리를 처박고” 잠들어 있는데, 이런 분위기를 글릭은 “독이 공기를 대신”하고 있다고 묘사한다. 이것에도 역시 아무런 설명이 없다. 단지 “죽음 이전의 마비” 상태에 못 박혀 있는 것 같은 한 가족의 풍경은 마치 모든 것이 끝장난 상태의 정지 화면 같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시의 일인칭 화자는 이 죽음 같은 풍경 속에서도 욕망의 기미를 읽어낸다. 아이 엄마의 “사타구니에 뛰는 맥박”은 죽음 속에서도 아우성치는 욕망의 기표이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던 첫 번째 문장은 마지막에 와서 어떤 요동의 ‘징후’를 제시함으로써 반전된다. 그것이 더욱 충격적인 것은, 마지막 구절 때문이다. 그 사타구니에 처박은 아이의 머리카락 속에서 “머릿니들”이 뿌리를 내렸다는 표현은 얼마나 처연한가. 이 시는 아무런 설명 없이 죽음과 욕망의 팽팽한 긴장을 “극심하도록 서정적인 압축”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정리하자면, 루이즈 글릭의 세계는 서정시의 유구한 전통을 이어받고 있다는 점에서 세계 시문학사의 보편적 궤도에 들어가 있다. 그녀가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강연에서 자기 시의 뿌리들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와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을 언급한 것은 이런 사실을 확신하게 해준다. 그러나 그녀는 (고백에 가까운) 내밀한 진정성의 표현 매체로서 서정시의 장점을 최대한 활용하되, 서정시의 주관적 주체를 복수적 주체로 바꾸어놓음으로써 서정시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그는 일인칭 화자를 다성화함으로써 다양한 각도 혹은 관점에서 세계에 말을 건다. 이런 전략이 사실상 자전적 고백에서 시작하는 그녀의 시들을 보편성의 반열에 올려놓는다. 그녀는 또한 말을 최대한 아끼고 압축함으로써 서정시의 감정 과잉 상태를 경계한다. 그녀는 화려한 실험보다 간결하고 절제된, “꾸밈없는(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서정시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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