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고3인데, 아직 한 번도 안 맞았어요, 우리 학교에는 체벌이 거의 없어요." (인천 가림고등학교 3학년 학생)
"체벌이 다른 학교보다 훨씬 더 적은 것 같아요, 매맞을 때처럼 잔소리도 듣지 않고 기분도 안 나쁜 오리걸음이나 '104계단'이 더 나은 것 같아요." (서울 한성여중 1학년 학생)
대안학교 학생들의 얘기가 아니다. 체벌 대신 다른 수단을 택한 일반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이야기다.
물론, 이 학교에서도 '때리는 체벌'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이들 학교에서는 체벌을 대체하는 제도를 만들어 시행하고 있으며, 일부 체벌이 행해질 경우도 있지만 매우 예외적인 경우라고 한다.
[유쾌한 기합] 오리걸음과 104 계단... "모욕적이지 않아요"
▲ 서울 한성여중 학생 10여명이 학교 본관 옆 '104계단'을 오르내리는 벌을 받고 있다.
ⓒ 오마이뉴스 안홍기 7일 낮 서울 한성여중 정문 앞에서 만난 한 학생은 "체벌을 하는 선생님이 계시긴 하지만,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체벌을 아예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 학교가 체벌 대신 선택한 것은 '유쾌한 기합'이다. 체벌 대신 기합을 시키되, 너무 힘들거나 학생들이 인격적으로 모욕을 느끼지 않도록 기합을 주는 것이다.
이 곳에서 가장 큰 기합으로 분류되는 것은 오리걸음과 '104계단'이다. 오리걸음이란 말 그대로 오리걸음으로 학교 강당 안을 한 바퀴 도는 것이고, '104계단'이란 이 학교 본관 옆쪽에 있는 104개의 계단을 오르내리게 하는 것.
마침 이 학교 생활지도부장을 맡고 있는 김강환 교사의 감독 아래 10여명의 학생들이 '104계단'을 실시하고 있었다. 더운 날씨에 힘들어하는 학생들이 많았지만, 크게 불만스런 표정을 짓거나 덜 힘들게 받으려고 요령을 피우는 학생은 눈에 띄지 않았다.
계단 밑에서 이 모습을 보고 있던 1학년 담임 전수진 교사는 "금방 우리 반 학생들 20명도 '104계단'을 하고 들어갔다"며 "기합 자체가 크게 힘들지 않고, 기합받을 때도 서로 장난도 치면서 유쾌하게 받고 들어간다"고 말했다.
이 반의 한 학생은 "체벌을 받으면 아프기도 하고 반항심이 들기도 하지만, '104계단'같은 경우는 다 같이 모여서 장난치면서 재미있게 벌을 받는다"며 "힘은 들지만 벌받는 것 같지도 않고, 기분이 상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약 5분 정도 걸려 '104계단 3번 왕복'이 끝나고 학생들은 땀을 닦으며 각자 반으로 돌아갔다. '너무 기합이 약한 것 아니냐, 반성의 기회가 되겠느냐'는 질문에 김강환 교사는 "지금까지의 교직 경험으로 봤을 때 벌을 세게 준다고 해서 그만큼 효과가 큰 건 아닌 것 같다"고 답했다.
김 교사는 이어 "체벌에서 기합으로 바꿨다고 해서 지각생이 줄지는 않지만, 사회 규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며 "체벌이나 너무 센 기합으로 학생들이 반감을 품게 되면 반성같은 것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겠냐"고 반문했다.
[상·벌점제] 친구괴롭히면 -15점, 왕따 학생 도우면 +2점
▲ 인천 가림고등학교에서 지난해부터 가동하고 있는 '상·벌점 관리 프로그램'.
ⓒ 오마이뉴스 안홍기
7일 오후 인천 가림고 생활지도부실에 딸린 '쉼터'에서는 학생회 간부들의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이들은 기자가 취재하는 동안 생활지도부실을 수시로 드나들며 교사들과와 축제에 관한 의견을 나누었다. 가림고 학생들에게 생활지도부는 더 이상 체벌을 위한 장소가 아니었다.
가림고 생활지도부장 윤방용 교사는 "쉼터는 학생들이 수시로 와서 활동을 하는 공간"이라며 "생활지도부실이 학생들의 쉼터, 금연교실 등으로 이용되고 있는 곳은 인천에서 가림고가 유일할 것 같다"고 말했다.
가림고는 체벌 대신 철저한 상·벌점제를 택했다. 체벌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선생님께 맞아봤다고 말하는 학생들을 찾기는 어려웠다.
체벌 대신 상·벌점제를 택한 것이 가림고만은 아니다. 지금까지 많은 학교들이 이 제를 도입했지만, 거의 유명무실한 제도가 돼버리고 말았다. 상벌을 기록하고 통계를 내는 작업이 교사들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한 것이 큰 이유다.
그러나 가림고는 IT기술의 힘을 빌려 문제를 해결했다. 학교 내부 전산망에 '상·벌점 관리 시스템'을 설치, 모든 교사가 쉽게 학생들의 상·벌점을 입력하고 조회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친구괴롭힘'에는 15점, '단순 폭력 및 절도'에는 10점, '무단결석·지각·조퇴' 등에는 2점의 벌점이 각각 주어진다. 왕따 피해 학생에게 도움을 주거나 자연보호 활동을 열심히 한 학생에게는 2점, 분실물을 습득해 신고하거나 기타 선행을 한 학생에게는 1점의 상점이 주어진다.
각 교사들은 노란색 벌점카드나 초록색 상점카드에 상·벌점 내용을 기재한 뒤 학생과 공동서명하고, 실명확인 절차를 거쳐 상·벌점 관리 시스템에 내용을 입력한다.
점수는 1년 단위로 누적되는데, 벌점 누계가 15점 이상인 학생은 각종 시상과 장학생 추천대상에서 제외된다. 30점 이상은 교내 봉사활동 4시간, 50점은 이상은 교내봉사활동 3일이다. 이는 수행평가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학생들은 벌점을 받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쓴다.
윤 교사는 "체벌보다 상·벌점제가 학생들의 인격을 존중하면서도 교육의 효과는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며 "선생님들의 입장에서도 마음고생하면서 학생들을 때리지 않아도 되는 장점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상·벌점제도가 교사와 학생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든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윤 교사와 함께 생활지도부 일을 맡고 있는 김동복 교사는 "벌점 카드를 받는 학생의 얼굴은 바로 굳어진다"며 "교사와 학생간에 감정의 벽이 생기고 정이 사라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 학교 3학년인 한 학생은 "상벌점제를 하면서 학생들의 태도는 이전보다 많이 나아진 것 같다"면서도 "꿀밤 정도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것도 모두 벌점으로 처리하니까 냉정하지 않느냐"고 불만을 제기하기도 했다. 결국 체벌의 대안 개발은 아직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 인천 가림고등학교 곳곳에는 교사들이 즉각 사용할 수 있도록 상·벌점카드가 비치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