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연재물은 취금헌 박팽년 선생 탄신 6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순천박씨충정공파종친회가 발행하고,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송은석이 지은 [충정공 박팽년 선생과 묘골 육신사 이야기]라는 책의 원고이다. 책의 처음부터 순서대로 차근차근 시간 나는대로 게재토록 하겠다. 강호제현들의 많은 관심과 질책을 기다린다.
1. 묘(竗)골, 묘(妙)골, 묘(廟)골
필자는 종종 초·중·고등학교나 도서관·문화원 등에서 강의를 한다. 강의주제는 주로 ‘전통문화·전통예절·유가(儒家) 문화·유가 문화재’ 등에 관한 것이다. 예를 들면 지난 2016년도에는 모 단체 주관으로 일 년 동안 ‘칠곡 매원마을·달성군 묘골마을·성주 한개마을·구미 일선리문화재단지’ 등 대구 인근 유명 전통마을을 주제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전통마을은 오랜 역사와 더불어 자신만의 독특한 전통문화와 스토리를 지니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는 마을의 역사가 500-600년에 이르는 매원·묘골·한개는 물론, 1990년대에 임하댐 수몰로 인해 안동에서 구미로 집단이주를 해온 일선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전통마을 이야기는 글이나 강의의 소재와 주제로 아주 매력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마을 이야기가 무조건 강의나 글의 주제로 적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차고 넘치는 그 많은 스토리 가운데에서 적당한 주제를 취사선택하여 제한된 시간과 지면 안에 요약·전달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재 선택과 함께 스토리텔링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가 ‘묘골’을 주제로 강의를 할 때 즐겨 사용하는 스토리텔링이 하나 있다. 바로 ‘묘골·묘골·묘골’ 스토리텔링이다. 강의 시작과 동시에 칠판에다 큰 글씨로 묘골·묘골·묘골이라고 묘골을 3번 쓴다. 이건 PPT 수업일 때도 마찬가지다. 첫 화면에다 묘골·묘골·묘골만 띄우는 것이다.
“묘골은 묘골·묘골·묘골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한글로는 같지만 한자로는 다 다르게 쓸 수 있죠. 이렇게 말입니다.”
‘묘골[竗洞]·묘골[妙洞]·묘골[廟洞]’
1. 참 묘하게도 생겼구나, 묘(竗)골
‘竗’라는 글자를 좀 큼지막한 옥편에서 찾아보면 ‘땅이름 묘’라고 설명이 되어 있다. 이는 땅 모양이 묘하게 생겼을 때 이 글자를 사용한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일까. 묘골은 ‘묘골’이라는 이름만큼이나 땅 모양도 묘하게 생겼다. 풍수지리에서는 이곳 묘골을 용(龍)이 누워있는 형국으로 설명을 한다. 실제로 묘골을 360도 빙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야산의 이름도 누워있는 용, ‘와룡산(臥龍山)’이다.
묘골은 주변이 산과 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마을 안으로 직접 들어 가보지 않고서는 그곳에 동네가 있는지 없는지 잘 알 수가 없다. 마치 개울물에 떠내려 오는 도화(桃花)를 따라가야만 만날 수 있다는 무릉도원처럼 말이다. 그만큼 묘골은 외부와는 철저하게 격리되어 있다. 또한 묘골은 정남향에다 야트막한 산으로 빙 둘러싸인 탓에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하기까지 하니 풍수지리적인 형국이 정말 묘하다. 이 같은 묘골의 흥미로운 풍수지리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다. 그때 가서 자세히 알아보기로 하자. 여하튼 이곳 묘골은 그 땅의 생김새가 풍수적으로 묘하다고 하여 ‘묘[竗]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달성군 하빈면 묘골. 마치 여성의 자궁을 연상케 하는 묘한(?) 풍수 형국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자료출처: daum사진자료]
2. 마을 유래가 묘하기도 하지, 묘(妙)골
‘妙’는 묘할 묘이다. 나이 어린(少) 여자(女)를 묘(妙)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묘해서 마을 이름에다 묘자를 썼을까? 답부터 먼저 말하자면 이 마을의 역사와 유래가 ‘묘(妙)’하기 때문에 묘골이라고 한 것이다. 묘골의 역사는 어림잡아 560여 년에 이른다. 그래서 묘골은 그 긴 역사만큼이나 흥미로운 스토리를 많이 지니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스토리를 하나만 들라면 아무래도 ‘박일산[박비]’ 스토리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60년 전, 자신의 작은 아버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비운의 왕 단종. 그러나 그러한 단종의 복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여섯 충신이 있었으니, 역사는 그들을 ‘사육신(死六臣)’이라 기록하고 있다. 단종복위운동에 실패한 이들 사육신은 세조에 의해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아버지·형제·아들에 이르기까지 3대가 멸족되는 반역죄로 다스려진 것이다. 하지만 충신의 핏줄을 단 한명이라도 남기고자 했던 신의 뜻이었을까. 사육신 중 유일하게 직계 혈육을 남긴 인물이 있었다. 바로 묘골의 상징 인물인 취금헌(醉琴軒) 박팽년(朴彭年)[1417-1456] 선생이다.
묘골은 사육신 사건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던 박팽년 선생의 손자 ‘박일산[박비]’이 태어나 숨어 살았던 곳이다. 그 이래로 그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560년 내력의 ‘묘골 박씨’ 마을을 만들었으니 바로 지금의 묘골이다.
물론 이 스토리에 있어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사육신 사건 당시 임신 중이었던 박팽년 선생의 둘째 며느리는 나중에 사내아이를 낳았다. 사전에 사내아이면 그 자리에서 죽이라는 세조의 엄명이 있었지만, 이 아이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같은 시기에 출생한 둘째 며느리의 친정집 여종의 딸과 바꿔져 17년 동안이나 남몰래 키워졌기 때문이다. 믿기 힘든 이 미스터리한 이야기는 수많은 옛 기록은 물론이요, 조선왕조실록에도 등재되어 있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이 역시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 할 기회가 있으니 필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천천히 따라오기 바란다. 어쨌든 마을의 유래가 이처럼 묘하다고 하여 묘할 묘자를 써서 ‘묘[妙]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묘골에 있는 박순 부부의 묘[뒤]와 박일산 부부의 묘[앞]. 박순 부부의 묘는 ‘의관장묘(衣冠葬墓)’라고도 한다. 박팽년 선생의 둘째 며느리인 성주 이씨의 체백과 남편인 박순의 의관[옷과 갓]이 합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3. 사육신을 모신 사당이 있소, ‘묘(廟)골’
마지막 키워드는 ‘廟’. 이 글자는 사당(祠堂) 묘라는 글자이다. 사당이란 돌아가신 분의 신위(神位)를 모셔두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을 말한다. 참고로 사당(祠堂)과 비슷한 말로 사우(祠宇)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요즘은 사우와 사당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사당으로 통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엄격하게 구분하면 이 둘은 서로 다르다. 그 차이를 한마디로 이야기 한다면 사우는 공적인 성격의 사당을 말하며, 사당은 개인집의 가묘(家廟)처럼 사적인 성격의 사당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앞서의 설명처럼 이 둘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사당이라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니다.
묘골에는 사육신 여섯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육신사(六臣祠)’라는 사우[사당]가 있다. 이 사우의 전신은 지금으로부터 340년 전에 세워진 ‘하빈사’이다. 그 이후 하빈사는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금의 육신사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처럼 340년 전부터 이곳 묘골에는 사육신을 모시는 큰 사당[묘(廟)]이 있었다고 해서 묘골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서원이나 사우는 어떤 식으로든 제향 인물과 연고가 있는 곳에 세워지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제향 인물의 ‘출생지·근무지·유배지·은거지·절명지’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도 다 있다. 사육신을 모신 사우가 이곳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골에 있다니 말이다.
예를 들어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의 ‘민절서원’, 단종(端宗)의 유배지이자 능(陵)이 있는 영월의 ‘창절서원’, 김시습에 의해 사육신의 초혼제가 열렸던 계룡산 동학사의 ‘숙모전’ 등은 그 존재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대구 달성 묘골에 세워진 육신사에 대해서는 솔직히 그 존재이유가 퍼뜩 와 닿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 사육신과 묘골.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묘골에 육신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본래 이곳 묘골에는 박팽년 선생의 사당만이 있었다. 그런데 숙종 때에 선생의 사당 외에 사육신 여섯 분을 따로 모신 별묘(別廟)[별도로 세운 사당] 하나가 더 세워졌다. 이것저것 묘하다고 해서 묘골인 만큼 여기에도 흥미로운 스토리가 숨어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 역시 뒤에 자세하게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니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어쨌든 340년 전부터 이 마을에 사육신을 모신 사당, 곧 ‘묘(廟)’가 있었다고 해서 ‘묘[廟]골’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육신사 사우인 숭정사(崇正祠). 실제 육신사 사우의 편액은 ‘육신사’가 아닌 ‘숭정사’로 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