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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람도 잘 모르는 대구 북구 도남동
프롤로그
팔공산 서남쪽 자락 도덕산 남쪽에 2021년 7월 기준 인구 약 24,000명이 살고 있는 국우동이 있다. 국우동은 행정동이며, 국우동에는 학정·동호·국우·도남 네 개 법정동이 있다. 이중 가장 북쪽에 자리한 마을이 도남동이다. 도남동道南洞이란 지명은 도덕산 남쪽에 있다 해서 얻은 지명이다. 그런데 대구시민 중에는 도남동을 모르는 이가 의외로 많다. 도남동이 대구 북쪽에 있는 북구에서도 가장 북쪽 골짜기에 자리한 마을이기 때문이다.
도덕산 남쪽이라 ‘도남’
도남동은 조선후기에는 칠곡도호부 퇴천면에 속했다가 1914년 행정구역 조정 때 인근 사창리社倉里[조선시대 때 고을 환곡을 쌓아 두던 사창에서 유래] 일부를 합쳐 도남동이 됐다. 1981년 대구직할시 북구 도남동, 1995년 대구광역시 북구 도남동이 됐다.
도남동 뒷산이자 주산[한 지역의 풍수지리를 관장하는 산]인 도덕산은 높이가 해발 약 660m다. 도덕산에서 산줄기 하나가 남쪽으로 10여km 내려와 함지산을 만들고 팔달교 인근 금호강가에서 멈춘다. 도덕산에서 함지산으로 이어지는 이 산줄기를 기준으로 동쪽 골짜기에 무태·연경동이 있고 서쪽 골짜기에 도남동·국우동이 있다. 도남동과 국우동 중 북쪽 도덕산 골짜기 아래에 바짝 붙어 있는 마을이 도남동이다.
우리가 마을이나 동네를 표현 할 때 사용하는 한자 중 가장 대표적인 한자가 ‘마을 동洞’이다. 이 한자를 풀어보면 참 재밌다. 동洞은 ‘물[氵]이 같다[同]’는 의미다. 말하자면 한 골짜기 안에서 주민들이 같은 내·우물·샘·강 등을 -+사용한다는 의미다. 도남동도 마찬가지다. 도남동 골짜기에 사는 사람들은 도덕산에서 발원한 반포천과 도남지의 물을 같이 사용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도남동 중심에 도남지가 있다. 일제 강점기 때[1941-1944] 만들어진 농업용 저수지다. 기록에 의하면 도남지를 만들 때 도남동, 국우동 주민은 물론, 대구 시내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부역에 동원됐다고 한다. 도남지 조성을 할 때 주변 작은 골짜기에도 농업용 못을 여러 개 만들었는데 신지·솟골지·완전지 등이 그때 만들어진 못이다. 참고로 도남 2동 당산나무에서 동쪽으로 들어가면 ‘광대골지[곤산지]’라는 못이 있다. 이 못은 1930-1940년 사이에 축조된 것으로 도남지가 조성되기 전까지는 도남동에서 제일 큰 저수지였다고 한다.
현재 도남동은 도남지를 기준으로 위쪽이 1동, 아래쪽이 2동이다. 도남지가 생기기 전에는 1·2동 구분 없이 그냥 도남동으로 불리다가, 도남지가 생기면서 1·2동으로 나눠졌다. 지금 도남 1·2동 사이에 있는 도남지에는 과거 ‘진걸’이라 불린 길이 있었다. 길이 길어서[질어서] 진걸, 혹은 땅이 질어서 진걸이었다고 한다. 도남동 자연부락으로는 진걸·사창리·정골이 있다. 진걸[징걸]은 도남지 윗마을인 도남 1동으로 못위 마을이란 뜻에서 모두이·모데·모리라고도 했고, 한자로는 ‘진흙 니’ 자를 써서 니동泥洞이라고도 했다. 사창리[국동]는 도남지 아랫마을인 도남 2동, 정골[덕응]은 사창리보다 더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도남동에는 북에서 남으로 마을을 관통해 흐르는 ‘반포천’이 있다. 도덕산에서 발원해 남쪽 팔거천에 합류하는 물줄기다. 그런데 반포라는 내 이름이 참 재밌다. 반포反哺는 “새끼 까마귀가 자라서 늙은 어미에게 먹을 것을 물어다 준다”는 의미의 고사성어 ‘반포지효反哺之孝’에서 나온 말이다. 반포지효 고사는 이렇다.
중국 진晉나라 때. 진왕 사마염이 학문과 덕을 갖춘 ‘이밀’이라는 선비를 등용하고자 높은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이밀은 관직을 사양했다. 왕이 관직을 사양한 이유를 묻자 이밀은 이렇게 답을 했다. “전하, 저에게는 저를 길러준 늙고 병든 할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전하에게 나라일이 중요한 만큼 저에게는 할머니를 모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까마귀는 어미가 기운이 약해지면 새끼 때 자신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 어미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부디 까마귀가 했던 것처럼 저도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할머니를 모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부모에게 불효를 하고 부모가 돌아가신 후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왕은 이밀의 말을 듣고 그의 효심에 감동해 큰 상을 내렸다.
지금은 인구 25만의 거대한 신도시로 변모한 대구 칠곡. 하지만 1970-80년대만 해도 대구 칠곡 주민들은 ‘팔거들[칠곡들]’에 의지해 살았다. 도남동에서 시작하는 반포천은 칠곡 주민들의 의지처였던 ‘팔거들’을 먹여 살리는 소중한 물줄기다.
도남동의 문화유산
도남동에는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몇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는 1970-80년대를 기점으로 근대화·도시화의 바람을 타고 생활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있었다. 옛 것을 없애고 무조건 새 것으로 교체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던 시절이었다. 대구 북구 칠곡은 대구 도심과는 거리가 멀고, 금호강이 가로막힌 탓에 개발이 좀 더뎠다. 하지만 1980-90년대를 거치면서 대구 칠곡에도 개발의 광풍이 세차게 불어 닥쳤고, 결국 전통문화경관은 파괴되어 이제는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산·명봉산·태복산·함지산 같은 산자락을 끼고 있는 일부 마을에는 아직도 옛 모습이 조금씩 남아 있다.
도덕산 남쪽 도남동도 얼마 전까지는 그랬었다.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최근 진행 중인 대구도남지구택지개발 여파로 도남동과 국우동 일부 지역은 주변 환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2-3년 전만 해도 국우동에서 도남동으로 가는 길 좌우는 온통 들판으로 시골 풍경 그대로였다. 하지만 지금은 들판이 있었던 자리에 고층아파트가 열심히 올라가고 있다. 심지어 마을이 마치 솥 속에 들어앉은 것 같다해 ‘솥골[솟골]’이라 불렸던 국우동 솥골까지도 아파트가 점령해버렸다. 도남동이 이렇게 변하기까지는 불과 2-3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상전벽해[뽕나무 밭이 변해 푸른 바다가 된다는 뜻]란 바로 이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도남동은 살아남았다. 아파트가 국우동과 도남2동 마을입구까지만 점령하고 도남1·2동은 남겨 두었기 때문이다.
도남동에는 2동에서 1동으로 올라가면서 덕산이씨 창렬각, 백암재, 당산나무, 유화당, 정효각, 남호정사, 도남재 등 과거 도남동을 살다간 옛 선조들이 물려준 문화유산이 남아 있다. 특히 도남2동 사창리[국동마을] ‘유화당·정효각·남호정사’는 그 가치로 볼 때 조선 후기, 근대기 대구 북구 유교문화를 대표한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에필로그
이제 도남동은 대구 북구에서 몇 남지 않은 전통문화경관을 지닌 마을이 됐다. 하지만 최근 대구 최북단이라 할 수 있는 이곳 도남동 입구까지도 고층아파트가 빼곡하게 들어서고 있는 중이다. 2021년 11월 현재 도남동 가는 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과연 도남동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전통문화경관을 지켜낼 수 있을까? 아니면 변화의 바람을 받아들일까? 누구도 쉽게 판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중요한 변화의 기로 한 가운데 서 있는 고가가 바로 도남동 유화당이다. 350년이 넘는 한 성씨 문중의 역사는 물론 도남동을 넘어 대구 북구 칠곡의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유화당. 그럼 지금부터 유화당 이야기를 한번 시작해 보기로 하자.
첫댓글 도남동 정효각에서
비오는 어느 일요일. 칠곡 도남동에서 행사가 있었다. 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편이라 도남동까지 가는 전철, 버스편을 검색하다 보니 "도남동"이라는 지명이 낯익어 곰곰 생각해보니 송은석 선비님의 글이 떠올랐다. 곧 바로 풍경산방 카페를 찾아보니 "국화 가득한 도남동 유화당"이었다.
그래서 도남동 일원을 잠시 둘러보려고 한두어 시간 일찍 집을 나섰다.
팔거역에서 버스를 타고 도남동 대단위 아파트 정류장에서 내려서 마을 향해 걷기 시작하였다.
얼마를 걷다보니 큰 나무 한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마을이 가까워졌다는 것이다. 정효각은 도로에서 왼편 콘크리트길로 접어들어야 한다.
콘크리트길에 접어들자 전원 별장 으로 보이는 3채의 현대식 건물이 전면에 나타난다. 이 건물을 왼쪽으로 끼고 골목길로 들어가니 오른편에는 최근에 새로 지은 한옥 건물이 나타나고 그 다음이 정효각이다. 대문은 굳게 닫혀 있다.
대문앞은 육중한 현대식 건물로 인해 전망이 완전히 가려진다. 도남동도 예전 정효각 시절은 지나가고 도외지인들의 전원마을로 변해가고 있는 듯하다.
도남동 정효각 대문은 다시 활짝 열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