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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는 운명을 바꾼다
장석주
저는 새벽마다 책을 읽으며 하루 일과를 시작합니다.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타인의 사유, 타인의 경험을 취하고, 내 좁은 사유와 유한한 경험의 영역을 확장합니다. 독서 행위는 의미의 바다를 가로지르는 항해이고, 미지의 가능성 세계를 향한 모험입니다. 독서는 정신의 쇠락, 그리고 망각과 맞서며 궁극의 나를 찾는 것, 다시 말해 나다움을 찾는 상상의 모험입니다.
책 읽기란 판독과 해석의 동시적 작동이에요. 책을 읽을 때 우리는 활자가 인쇄한 단어들과 문장들을 눈으로 재빠르게 훑어봅니다. 더 정확하게는 망막이고, 그 중심을 안와라고 합니다. 안와에는 빛에 반응하는 고해상도의 세포들이 밀집되어 있어요. 책을 읽는 건 안와를 통해 불러들인 정보들을 판독하고 동시에 해석하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 단어들을 한 번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시 살펴보고 문맥 속에서 그 단어의 의미를 반추합니다. 독서란 뇌에서 일어나는 정보처리 과정입니다. 앨런 제이콥스는 독서란 아무 마찰력 없이 굉장히 빠른 속도 속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광학적 춤”이라고 말합니다. 책 읽는 사람의 동공이 아주 빠르게 움직인다는 얘기지요. 뇌 과학자들에 따르면, 이 모든 일들이 ‘좌측 후두측두 열구’에서 일어난다고 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이 모든 복잡한 과정이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게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책읽기란 “자신의 무의식을, 그 욕망을 텍스트에 직접 접속하는 것”인데, 마치 “찌르듯이, 어쩌면 찔리는 듯” 이루어지는 접속입니다. 독서는 나와는 다른 타자와의 접속, 그리고 세계와의 접속이지요. 책을 읽는 건 전 존재로 세계와 쿵 하고 부딪치는 경험입니다. 그것은 그 무엇과 견줄 수 없는 강렬할 경험인데, 진짜 책을 읽는 일은 의식과 무의식에 텍스트가 찌르듯이, 혹은 찔리는 듯이 밀려들어오는 것이고, 자기도 모르게 제 안의 인지적 지형을 바꾸는 압도적인 경험이지요.
어린 시절부터 책을 잡으면 거기에 빠져 해지는 줄도 모르고 읽었습니다. 밥 먹는 것도 책읽기를 멈춰야 했기에 탐탁지 않았어요. 어머니의 거듭되는 독촉으로 마지못해 밥상머리에 앉아 겨우 몇 숟가락 뜨는 둥 마는 둥 하고 다시 책 읽던 자리로 달려와서 책에 빠져들었지요. 독서는 즐거움을 주는 유희였습니다. 저는 그 즐거움 속에서 종종 나 자신을 잊곤 했던 것이지요. 밤을 새우고 밥 먹는 것조차 건너 뛸 만큼 열렬한 독자였는데, 그야말로 ‘독서 자체를’ 즐긴 것입니다.
왜 책을 읽나요? 그 질문을 숱하게 받았습니다. 독서는 기억과 내면 감정을 일깨우는 사색적 삶으로 이끄는 활동입니다. 독서를 할 때 침묵이 우리 머리 위에 드리워지고, 고독은 마치 씨앗의 단단한 껍질 같이 우리를 감싸지요. 우리는 단단한 껍질 속의 배아 상태에서 책을 읽으며 몽상에 빠져드는데, 그 사이 책은 현실과 다른 세계로 데려갑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말했듯이 독서는 “마법의 열쇠로 우리가 들어갈 수 없었던 우리 내면의 문을 열어주는 독려자”와 같아요. 독서를 통해 내면의 공허를 채우고, 우리 안에서 그르렁거리는 인식욕을 채웁니다. 책을 읽으면서 우리는 예민한 감수성과 취향을 가진 존재로 발명됩니다. 독서는 자기도 모르는 자기 존재의 발명 행위인 것이지요.
무엇보다도 책읽기는 자기 정체성의 형성에 기여합니다. 사람들은 책 읽기를 통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세계와 함께 살아가는 타인들의 경험에 대한 이해를 키워나갑니다. 거꾸로 타인의 경험을 거울삼아 내가 경험한 것들의 진정한 뜻을 성찰하기도 하고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 나란 어떤 존재인가 하는 형이상학적 수수께끼를 푸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책 읽기는 내 상상력과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고, 이것들을 바탕으로 우리는 자아를 구축해가고, 자아 정체성을 형성해가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에 걸쳐 살았던 공자는 배우고 익히는 것을 아주 좋아했던 사람이지요. 공자는 『논어』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이 또한 기쁘지 않은가?” 배우고 익히는 것은 자기 수련, 자기 수양의 도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바로 독서 행위일 테지요. 공자의 기억력과 교양은 모두 책을 통해 얻었겠지요. 독서란 배우고 익히며 내 안의 무지를 깨고 앎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일이지요. 다시 공자는 말합니다. “한 가지를 아는 자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보다 못하다. 그것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 때문에 기뻐하는 자보다 못하다.” 독서는 개인적 성찰의 계기를 주고, 더 높은 이상을 품게 하며, 고매한 인격을 닦는 수단이지만, 무엇보다도 기쁨을 구하는 일입니다. 돌이켜 보면 독서의 시간은 내 것이 아닌 기쁨을 훔치는 시간이고, 독서는 외로움에 처한 헐벗은 영혼에 기쁨을 수혈하는 일이었지요.
독서는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바꿉니다. 책을 많이 읽는다고 다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돌프 히틀러 같은 악인도 젊은 시절 한때는 독서광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젊은 시절 독서광이었습니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헤밍웨이나 오에 겐자부로 같은 작가는 물론이고, 다윈부터 빌 게이츠,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 같은 이들도 소문난 독서광이었습니다. 매니언 울프라는 사람은 『책 읽는 뇌』라는 책에서 “독서가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 사람이 뇌 안에 이미 생리적, 인지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라고 말합니다. 책을 계속해서 읽게 되면 내 뇌가 돌이킬 수 없이 바뀐다는 사실을, 뇌가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는 사실을 어렸을 땐 잘 몰랐습니다!
매리언 울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서를 학습하면 뇌의 시각피질이 달라진다.” 놀랍지 않은가요? 책읽기가 뇌를 바꾼다! 숙련된 독서를 통해 네트워크 콜라주가 된 뇌라니! 책을 읽을수록 뇌는 책읽기에 더욱 잘 적응합니다. 숙련된 독서가의 뇌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뇌 전체에 퍼져 있는 네트워크 시스템을 가동시키면서 지적 능력을 발휘합니다. 책을 읽는 동안 “뇌가 독서를 하기 위해 사용하는 주요한 언어적, 인지적 프로세스”의 기반 위에서 주의력, 통찰력, 사고력을 폭발시키며 확장하는 것이다. 마침내 “유창하게 독서하는 뇌는 추리, 분석, 평가와 같은 독해 프로세스가 일어나는 동안 좌뇌와 우뇌의 전두엽, 두정엽, 측두엽에 새로 확장된 피질 부위를 활성화”시킵니다. 그리고 영혼과 개성에 활기를 불어놓고 그것을 한껏 확장합니다.
책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저마다 다른 장소, 다른 시간, 다른 역사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이 겪은 것들, 사유와 인식을 통해 숙성된 이야기를 책 속에 풀어놓습니다. 우리를 책읽기로 내모는 것은 남의 비밀스런 이야기를 엿보려는 왕성한 호기심, 지적 열망, 정서적 공감의 즐거움들이 한데 뭉쳐서 만든 욕구지요. 이야기들은 독자의 안으로 스며들어옵니다. 그리고 이야기의 힘에 의해 망각 되었던 기억들이 살아납니다. 책의 이야기들이 내 삶에 겹쳐지며 경험의 시공은 무한대로 확장됩니다. 그렇게 책읽기는 유한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서 우리에게 몇 겹의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모든 책을 읽는 사람들은 기억-이야기를 통해 두 번째 삶과 만납니다. 실제 경험으로서의 삶은 이 두 번째 기억-이야기의 삶을 통해 더욱 생생한 것으로 거듭나는데, 이게 책읽기가 만들어낸 기적입니다. 이 경이를 한 번이라도 겪은 사람들은 다시 그 마법 같은 경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반드시 책을 찾아 읽습니다. 책읽기는 취향의 문제이기보다는 본능이고 운명입니다. 책읽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제 삶의 작은 틈새들과 주름들 안으로 숨어서 남들이 알 수 없는 비밀스런 삶을 삽니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1948~ )는 이렇게 말합니다. 책을 읽는 자들은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속하는, 짧지만 수많은 삶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도서관을 설립한다.”라고 말합니다. 책읽기에 빠져든 자들은 고독 속에 칩거하며 저마다 ‘하나의 도서관’을 설립합니다. 오직 자신에게만 속하는, 짧지만 수많은 삶들로 이루어진, 이 ‘기적의 도서관’에서 자신의 삶이라는 책을 열람합니다.
인류가 독서를 발명해낸 것은 아무리 길게 호잡아도 3천 년을 넘지 않습니다. 중세 때까지 인류 대부분은 문맹이었지요. 대부분이 문맹이니, 문자를 읽지 못하는 게 그다지 큰 흠도 아니었을 뿐더러 사회생활을 하는데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문맹 사회에서는 굳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인쇄, 제지, 안경 따위와 같은 독서의 물질적 기반이 완성된 것은 대략 15세기입니다. 그러니까 독서가 인류의 지적 능력을 축적하는 수단이 된 것은 불과 6백년 남짓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중세 이후 문자를 해독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독서가 인류의 보편적 능력으로 자리 잡자마자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문명의 폭발적인 발달과 도약이 일어납니다. 그와 함께 인류의 생활과 제도 등을 바꾸는 혁명들이 연이어 일어납니다.
독서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게 하고, 불사의 삶에 대한 무의식의 욕망을 자극해요. 아울러 독서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지요. 행복에의 열망은 이곳에 행복이 없다는 사실의 확인에서 시작하지요. 독서는 메마른 현실에서의 도피이고,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행복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몽매함에 빠져 방황하던 20대에도 책이 있었고, 인생의 파란 속에서 난파하여 수습할 수 없는 위기에 빠졌던 40대에도 책이 있었지요. 인생의 수많은 곤경과 위기의 고비를 넘기면서 그 고통을 묵묵히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몸을 웅크린 채 꾸역꾸역 읽었던 책 덕분입니다. “나는 책을 읽습니다. 다시는 책을 읽지 않겠다는 말을 하려고 책을 읽습니다.” 책은 우리 안의 상상력을 자극해서 타성의 감옥에서 수인으로 사는 존재를 해방시킵니다. 이 새벽 내가 책을 읽는 것은 ‘나’라는 감옥, 고독이라는 감옥, 불행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함이고, 진정한 ‘나’에게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 타인의 것을 빼앗지 않고도 혼자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지요. 나는 독서를 통해 나날이 젊어지고, 뿐만 아니라 책을 읽는 동안 불멸 속으로 들어갑니다.
책 읽기에는 기분 전환, 정신적 고양, 열락 같은 보상이 따릅니다. 내면이 고요해지면서 내 안에 잠재된 막연한 실존의 불안이 가라앉는 걸 느끼기도 하고요. 또 우리는 책 읽기를 통해서 탁월한 지적 명석함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기도 합니다. 책을 읽다보면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가는 데 수반되는 짜릿한 흥분 같은 걸 느끼게 되지요. 그 흥분이란 나보다 높은 존재에 나라는 존재가 쿵, 하고 부딪치면서 생겨나는 기쁨과 지적인 즐거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책을 읽지 않는다고 아프거나 죽지는 않습니다. 사실 책을 읽지 않아도 사는 데 큰 지장은 없어요. 그래서 ‘살아가는 데 독서 따위는 필요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책 한 권은커녕 신문조차도 읽지 않고 평생을 사는 사람도 드물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어떤 결핍과 부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겉은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잘 살펴보면 제대로 된 인생을 살고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생각이라는 게 없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에 담긴 지식이나 사상이 자신의 인격과 내면으로 스며들어와 생각이 확장되고, 자아가 확장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면 반드시 책을 읽어야 한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뿐인 삶을 의미 있게 살고 싶은가요? 그렇다면 자신의 뇌를 책읽는 뇌로 바꾸어야 합니다.
첫댓글 와!!! 책읽기가 이렇듯 중요한 것을 처음 알았습니다.
독서는 불가능한 것을 꿈꾸게 하고, 불사의 삶에 대한 무의식의 욕망을 자극한다네요. 독서는 나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이고,. 독서는 메마른 현실에서의 도피이고, 눈사태처럼 쏟아지는 행복의 경험이라고 할 수 있다는 좋은 글 감사해요..
뇌를 건간하게 하는 것이 독서라니 책을 많이 읽어야겠습니다.
장 시인은 안성에 <수졸재>라는 작업실을 두고 열정적으로 글쓰기를 하는 왕성한 작품 활동과 기고문을 쓰는 분이십니다.
현대수필 문인회 행사에 특강 초대도 했었네요. ^^
정신의 확장 독서.
책을 읽지않는사람은 결핍과 부재가 있을수밖에없다.
독서는 메마른 현실에의 도피요 .행복의 경험이다.
명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