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의 어머니교회를 찾아서
(인천시 강화군 양사면 교산리 504-2)
글·사진 남상학
▲구 교회 건물 밖에 세운 종탑(아래쪽은 담쟁이 덩쿨이 온통 감싸고 있다)
선조들의 피와 땀이 없이 성장한 신앙공동체가 있을까? 강화도의 신앙역사는 감리교회 선조들의 꿈과 헌신으로 뿌려진 씨앗에 기초한다. 강화 교산교회는 1893년 존스(George Heber Jones, 한국명 趙元時, 1867-1919) 선교사의 복음전파를 통해 강화 최초의 자생적 공동체로 시작해 인근 지역선교의 초석을 마련했다. 따라서 교동교회는 강화도의 모교회인 셈이다.
선상세례(船上洗禮)로 시작된 신앙공동체
▲존스 선교사(George Heber Jones, 한국명 趙元時, 1867-1919)
미 감리회 소속인 존스 선교사는 1885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21세의 최연소 선교사로 내한했다. 존스 선교사는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어사전 편찬, 한국 역사와 문학, 철학과 종교 분야에 관해서도 깊이 있는 저술을 남겼다. 존스는 인천 제물포교회(현 내리교회)를 맡고 제물포지방 감리사의 사역을 하면서 1892년 강화에 들어가고자 하였으나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굴욕적인 강화도조약으로 외세에 민감한 강화도민들에게 배척당하여 강화 남문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사람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계(契)를 조직하고 곗날을 주일로 하여 교회로 끌어들였으나 계가 깨지면서 다 흩어지고 교인 두 명만 남았는데 그 중 한 명이 강화 출신 이승환이었다. 그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강화지방 선교역사는 존스 선교사와 함께 그에게 복음을 전파 받은 강화 출신의 주막집 주인 이승환과 관련된다.
▲교회로비에 선교사의 활동 내용이 적힌 역사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1894년 강화도의 북쪽 구석인 양사면 교산리에 선교사 존스 목사가 교인 이승환의 모친에게 세례를 베풀기 위해 이곳까지 들어왔다가 복음의 씨앗을 뿌리게 된다. 이승환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본인이 주막을 경영하고 있다는 점과 ‘어머니에 앞서 먼저 세례를 받을 수 없다’며 세례를 사양하던 중에 이승환이 존스에게 강화에 살고 있는 모친의 세례를 부탁했다. 그 때 이승환의 모친은 임종을 앞둔 상태였다.
그러나 지역 유림들의 반대로 존스 선교사가 강화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자, 이승훈은 한밤중에 모친을 등에 업고 갯벌에 정박 중인 배에서 한국 옷을 입고 기다리던 존스에게 찾아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승환은 모친이 함께 세례를 받았다. 이 장면을 헤스(M.Hess)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완강한 반대로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렸다.”
이로써 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강화 선교역사에 초석을 놓았고, 마침내 존스 선교사는 1893년 봄 강화도의 첫 교회인 강화 교산교회를 탄생시켰다.
▲ 교산교회 성장에 큰 도움을 준 김상임 전도사
▲김상임 전도사는 자신 소유의 주택과 토지를 기증하는 등 교회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런데 강화의 양반 중 이 말을 듣고 감명을 받은 이가 있었다. 벼슬을 하지 않고 초시 신분으로 고향(현 교산)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김상임(金商壬)이 바로 그였다. 김초시는 이승환 모자에 대한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전해들은 이후 한문성경을 전해 받고 읽은 가운데, 자신이 찾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란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十字架之道)’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했다. 이후 김상임이 마을의 가신과 산당을 불사르고,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결과 교산교회 신앙공동체의 한 사람이 되었다.
복음의 루트 역할 자임
▲김상임 기념예배당으로 지은 교산교회의 네 번째 건물
▲김상임 전도사의 사역을 밝히는 기념비가 구교회 앞에 서 있다.
가정교회로 시작한 이 교회는 이곳 출신 김상임 성도가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사역을 하기 시작하면서 강화-김포-서울로 이어지는 복음의 루트를 개척하게 되었다. 서민층 일색이던 신앙공동체에 양반층이 합세하자 강화 교산교회는 신자수가 갑자기 증가하게 되고, 그 영향이 주변 지역사회에 긍정적으로 파급을 일으킨 것이다.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배려로 인천의 신학회와 평양의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감리회의 한국인 3대 목사후보가 됐으나, 1902년 목사안수를 몇 달 앞두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에 심방을 갖다가 감염되어 아깝게도 55세를 일기로 소천하고 말았다. 김상임 전도사의 사역을 기념하는 기념비가 네 번째로 지은 구(舊)교회 건물 앞마당에 서 있다.
이후 교산교회 성도들은 김상임을 ‘강화의 바울’로 부르며 그의 신앙의 길을 따르기로 하고, 연이어 홍의교회(1896)를 거쳐 고부교회(1897) 상도교회(1899) 등 강화 전 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 헌신하며 강화 어머니교회의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선교 초기 이런 신앙의 선배가 있었기에 강화에는 현재 122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신축한 지금의 교회건물(앞)과 구교회 건물(뒤)
▲ 현 교회 건물은 2003년 교회창립 110주년 존스기념예배당으로 지어졌다.
▲우리 일행에게 교산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는 박기현 목사님
▲구 교회 건물 모습- 앞으로 역사전시관 및 영성훈련장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교산교회는 현재 두 동(棟)의 건물을 가지고 있다. 앞 건물은 다섯 번째로 현재 예배처소로 사용하는 교산교회 신축건물이다. 구(舊)건물 앞쪽으로 건평 1백50여 평의 ‘존스기념예배당’을 2003년에 창립110주년을 기해 건축했다. 미래를 내다보는 교산교회는 강화지역의 모교회로서의 저력을 갖고 구건물을 그대로 두고 그 앞쪽으로 새 교회건물을 신축한 것이다. 새로 신축된 교회 건물은 영화 상영 시설 등을 갖춘 복합 성전으로 꾸몄다.
또 하나, 오른쪽에 있는 교회건물은 김상임 기념예배당이다. 1959년 60여 평 규모로 완공된 네 번째의 교회건물이다. 자연석을 깎아 벽을 쌓고 지붕은 초록색 함석으로 덮은 건물이다. 교회 옆 외부에 종탑을 세웠지만 본 건물에 종탑을 세웠다. 또 하나의 건물은교회 아래 도로변에는 강화복음전래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교산교회 역사를 기록한 기록물들
교산교회는 성도들의 순례 발길이 이어지자 구교회 건물을 박물관을 겸한 ‘강화청소년영성훈련원’으로 운영한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 교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박기현 목사는 복음을 그 어느 지역보다 빨리 받아들인 강화의 어머니교회로서 자부심을 갖고, 기독교 유적의 가치를 인식시키는 동시에 교회 사랑과 민족 사랑을 바탕으로 한 강화의 신앙정신을 기독교역사체험에 나서는 도시 청소년들에게 심어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앞으로의 과제
이토록 강화 교산교회는 강화교회의 산파로서 초대교회 신앙유산을 회복·계승·전파하고, 미래교육의 산실로서 역사의식과 영적 비전을 가진 민족일꾼을 양성하는 동시에 복음의 빚진 자로서 영혼구원에 노력하면서 선교 2세기를 준비하고 있다.
그런데 강화 교산교회의 열정은 교회의 생존과도 직결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농어촌지역의 고령화가 갈수록 급박하게 진행되고, 인구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다수 농촌교회가 안고 있는 고민이지만, 이 지역은 도서지역 그것도 군사분계선을 바로 눈앞에 둔 특수한 상황이어서 상황은 더욱 급박했다. 현재 지역의 2백여 가구 중 교회에 출석하는 장년 수는 1백50여 명 정도로 인구대비 복음화율이 50%가 조금 못 된다고 했다. 따라서 교산교회가 발전하려면 무엇보다 지역복음화가 급선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 앞 도로에 세운 도로표지판(양사면 교산리는 강화도의 북단으로 검문을 받아야 한다) *
▷찾아가는 방법
강화읍에서 교동도로 향하는 48번도로를 따라 가다가 10km 정도 가다보면 우측으로 교산리로 들어가는 지방도로가 나온다. 이 지점부터 교회 팻말이 설치되어 있으니 유심히 보고 따라 들어가면 된다. 다른 지역과 달리 군사지역이어서 검문이 있다. 교산교회에 들어간다고 말하면 통과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