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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수대烽燧臺에서 불길과 연기가 치솟아 오르고, 연기가 가시거리 내에 산재해 있는 인근의 봉수대들을 이어주자, 고려성의 동북쪽에 흩어져 있는, 안시성安市城, 건안성建安城, 석성石城, 건흥성建興城, 요동성遼東城, 풍성豊城, 한성韓城, 택성澤城, 요택遼澤, 옥전보玉田堡 등 발해바다 서편, 요서의 십대성에서도 연달아 응답이 왔을 터.
이 십대성은 한漢나라의 열 개 성에 대응하기 위해 고구려 6대 태왕 태조무열제가 서기 55년에 개축하고 쌓은 성들이다<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삼국사기/고구려본기>.
한편, 고중상과 헤어진 여인이 아기를 안고 성문 루 아래로 내려가니 타고 온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아기를 품에 품고 마차 안에 다소곳이 앉은 여인의 얼굴에 그늘과 수심이 짙은 잿빛 하늘처럼 드리워져 있다.
“아가야, 아가야, 내 가슴이 왜 이리 답답한지 모르겠구나.”
여인은 아기에게 자신의 근심을 하소연하는 듯, 가끔씩 한숨을 내쉬며 아기의 머리를 쓰다듬고 아기에게 눈을 맞추었다. 덜거덕거리는 마차 바퀴의 소음과 진동에 따라 여인의 가슴도 괜스레 쿵쿵거렸다.
본가에 도착한 여인은 아기를 안고 곧장 안채로 직행했다.
“어머님, 다녀왔습니다.”
“오냐, 어서 들어오너라.”
안에서 중년 여인의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아기를 안은 고중상의 처가 방안으로 들어서자 온화한 얼굴의 중년 여인, 그녀의 시모가 아기를 받아 안으며 아기 얼굴에 뽀뽀를 했다.
“애비는 잘 있더냐?”
“네, 어머니.”
대답과 더불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다 말고 스스로 놀란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웬 한숨이 그리 깊고 기냐? 방바닥이 꺼지겠다.”
중년 여인이 핀잔을 주었다.
“죄송해요, 어머니. 요즘 며칠 동안 좋지 않은 예감 때문에 가슴이 답답했어요.”
중년 여인이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불길한 소리 하지 마라. 뭐가 좋지 못하다는 거냐?”
그녀는 다시 눈길을 내려 아기를 어르며 희롱했다.
“저, 어머니.”
“왜 그러느냐?”
그녀의 시모가 미심쩍은 듯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며칠 전 시장에서······.”
“······?”
중년 여인이 그녀를 빤히 쏘아본다.
“시장에서 어느 분에게 이런 걸 받았습니다.”
젊은 아낙의 손이 어느 새 품속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녀의 품에서 연노랑색 봉투 한 장이 나왔다. 여인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봉투를 꺼내 시모 앞에 내려놓았다.
중년 여인은 아기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봉투를 열었다. 그 안에는 매우 고급스런 오색금화지五色金花紙 한 장이 두 겹으로 접혀 있었다. 펼쳐 보니 안에 짤막한 두 줄의 문구가 섬세한 필체로 적혀 있었다.
高 城 天 下 血 雨 降 고성천하혈우강
麗 人 行 列 離 本 家 려인행렬리본가
“높은 성 하늘 아래 피비가 내리고, 고려인의 행렬이 본가를 떠난다?”
글을 읽던 중년 여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얘야, 이걸 네게 준 사람이 누구냐?”
“저, 저······.”
아직 고려어가 서툰, 거란족 왕가 출신의 대하씨大賀氏 새댁은 당황하자 입에서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았다.
“뭘 그리 떠듬거리느냐?”
“어머님도 잘 아실 거예요. 수십 년 전부터 이웃 나라 당唐에 파사(페르샤)인들이 들어와 경교景敎(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를 포교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당나라 임금 이치李治(고종, 재위 649-683)가 나라 곳곳에 파사사波斯寺(후에는 대진사大秦寺라 칭함. 교회당.)를 세웠다는 얘긴 나도 들었다.”
“얼마 전 저자거리에서 제게 이 봉투를 준 사람이 스스로를 바로 그 파사사 경승景僧(경교 성직자)이라 했어요.”
“어떻게 생겼더냐?”
“얼굴이 선하고 기품 있게 잘생긴 마흔 살 정도의 남자였는데, 부도교浮屠敎(불교)의 승려처럼 머리를 깎았고 긴 수염을 기르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유주幽州(북경) 서남에 있는 파사사 경승으로, 본래는 고려인이라고 했어요. 이걸 주면서, 고려인들에게 바야흐로 큰 환난이 닥쳐오고 있으니, 생을 구하는 길은 하늘의 삼신일체三神一體 상제님(하나님)을 찾는 거라 이르고 바람처럼 사라졌습니다.”
“너 혼자에게만 이걸 주었느냐?”
“아니에요. 여러 사람이 이런 봉투를 받았어요.”
“이걸 왜 이제야 말하느냐?”
“실은 별것 아닌 듯하여 버리려고 하다가 오늘 아침에야 생각났습니다.”
“······?”
“이걸 가지고 아범한테 갔으나 차마 보여주지 못하고 그냥 왔습니다. 혹시 요승妖僧의 유언비어인지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이던 중년 여인이 묵묵히 생각에 잠기다 말했다.
“아이 할아범과 상의해 볼 터이니, 너는 나가 보거라.”
여인은 단정히 인사를 한 후 아기를 안고 방에서 나갔다.
중년 여인은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종복을 불렀다.
“이것을 주인마님께··· 아니다, 바깥 마님을 이리로 모시고 오는 게 낫겠구나.”
한참 후 후덕하게 생긴 육십 여세의 노인이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웬일이오, 부인? 나를 부르고.”
“글쎄, 이걸 한 번 보세요.”
그녀가 연노랑색 봉투를 남편 앞에 내밀었다. 편지를 꺼내 읽던 노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사색에 잠기다가 여인에게 물었다.
“부인, 이런 글을 쓴 사람이 누구요?”
그녀가 자초지종을 설명한다. 그녀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있다가 노인이 대꾸했다.
“요새 나라꼴이 말이 아닌데, 꿈자리까지 뒤숭숭하오. 이건 괴승怪僧의 난언亂言이 아니라, 하늘의 계시임에 틀림없소. 그 광명한 경교 승들은 하늘의 상제님을 숭배한다고 들었소.”
“이 문구가 무슨 뜻인가요?”
“그걸 내게 묻다니 부인은 공부를 헛되이 했구려.”
그가 처에게 핀잔을 주며 설명했다.
“이것은 우리 고려(고구려)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에 휩쓸린다는 경고요.”
“어디, 우리가 전쟁을 한두 번 겪는 건가요? 하지만 그 난리 때도 용맹한 우리 군사들이 저 당나라 도적들을 잘 막아냈잖아요?”
“그 때와는 다른 것 같소. 비록 이십여 년 전 당나라 왕 이세민이 피눈물을 흘리며 본국으로 퇴각하고, 연개소문과 추정국, 양만춘의 군대 앞에 무릎을 꿇었지만, 지금은 연개소문의 아들들이 상호 으르렁거리다가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해, 대막리지 연남건과 형제간에 눈을 부라리며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고 있으니, 우리가 이러다간 우리 손으로 자멸할까 두렵소.”
“우리와의 전쟁에 혼이 난 당주唐主 이세민이 죽기 전, 당나라의 사직을 보전하려면 고구려를 절대 침략하지 말라고 유언했다는데······.”
노인이 부인의 말을 끊었다.
“어쩌면, 당나라에 투항한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동생인 우리나라 대막리지 연남건에게 이를 갈며, 현금의 당 왕 이치李治(고종)를 부추기고 있을지도 모르오. 좌우간 피비가 내리고 많은 사람의 행렬이 집을 떠난다는 것은 매우 불길한 말이오. 특히 두 줄 서두의 네 문자를 주의해 읽어보오.”
노인이 네 글자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당시의 글자는 위에서 아래로, 글줄은 우에서 좌로 나아감).
麗 高
人 城
“이것을 좌우로 연결해 읽어보오.”
“고려성인, 고려성 사람이란 뜻이군요.”
중년 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유주로 가서 그 경승을 만나보아야겠소.”
그 때였다.
“주인마님, 여기 계시옵니까?”
바깥에서 시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웬일로 그리 부산을 떠느냐?”
“방금 전에 영문營門으로부터 전갈이 도착했사옵니다. 당나라의 대병大兵이 이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북진하고 있다 하옵니다.”
“뭐라고? 그게 사실이냐?”
노인이 방문을 열어젖혔다.
“틀림없는 사실이라 하옵니다.”
그가 머리를 조아렸다.
노인이 옆의 여인에게 말했다.
“여보, 지금 즉시 아가를 데리고 성을 빠져나가 할 것 같소. 저들이 대낮에 공공연하게 대군을 휘몰아 오고 있다는 건, 당나라가 국력을 총동원한 대규모 전쟁을 시작했다는 뜻이오.”
여인이 주춤거렸다.
“하지만 성을 빠져나간다면, 성민들이 동요할 텐데요?”
곁에서 듣고 있던 시비가 입을 열었다.
“마님, 송구한 말씀이오나, 성주나리가 바깥 큰 마님께 큰 안마님과 작은 안마님을 모시고 속히 성을 떠나라고 부탁하셨다 하옵니다.”
그 말을 들은 노인과 중년 여인의 얼굴에 깊은 근심의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것은 성이 함락될 경우를 염두에 둔 조처였기 때문이다.
작년에 벌어진 연남생의 당나라 투항사건 말고도 고구려에서는 여러 가지 불길한 일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보장태왕太王은 국정에서 허수아비처럼 신하들에게 휘둘리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국가 통치자는 대막리지 연남건이었고, 중신들은 매일 태왕 앞에서 언쟁을 일삼았으며, 나라 안 곳곳에서는 흉악하고 괴기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흉년이 들어 도적떼가 들끓고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는가 하면, 늑대와 여우가 성안으로 들어가고 두더지가 성을 뚫는 등 민심을 흉흉하게 하는 일들이 다반사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신당서>.
중년 여인이 돌연 언성을 높였다.
“네 이것아! 만일 거짓을 말한다면 중벌을 면치 못하렷다! 아범이 우리에게 그런 비겁한 부탁을 했을 리 만무하다. 어찌 성민들을 외면하고 가속만 살리고자 했단 말이냐?”
시비가 쩔쩔매며 대꾸하지 못하고 있을 때 노인이 명했다.
“가서 작은 안마님을 이리로 모시고 오너라.”
잠시 후 젊은 여인이 아기를 안고 나타나자 노인이 말했다.
“아가야, 내 말 잘 들어라. 지금 즉시 집을 떠날 채비를 하고 아이를 데리고 유주 서남 파사사(경교교회당)로 가서 대덕大德(성직자의 존칭)을 만나 뵙고, 봉투 안의 문구가 무슨 의미인지 자세히 물은 다음, 이쪽으로 기별하도록 해라. 그리고 너는 전쟁이 끝나기까지 영주營州 계성薊城의 친정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젊은 여인이 머뭇거렸다.
“어서 속히 떠나거라. 무예에 능한 하인들과 하녀들을 데리고 가거라.”
젊은 여인, 고중상의 아내는 인사를 마친 후 유모와 남녀 하인들을 데리고 집을 나섰다. 그녀와 유모, 아이는 마차에 오르고, 남장한 하녀 및 남자 하인들은 말을 타고 앞뒤에서 마차를 호위했다.
여러 날 후 영주 계성의 친정에 당도한 고중상의 처 대하씨는 서둘러 대진사(파사사)를 찾아간다.
멀리서 보니 특이하고 웅장한 건물이 한눈에 들어왔다. 중앙 주전각의 날렵한 용마루 위에는 열십자 모양의 장식물이 위로 솟아 있었다. 대문으로 접근하자, 위로 선 두 마리의 물고기가 양쪽에서 떡 모양의 그림을 중앙에 두고 서로 대치하고 있는 기이한 문양이 보였다.
대문 입구의 종각 안에는 커다란 종이 매달려 있었다.
수백 명의 신도들이 정갈한 옷을 입고 대진사 경내로 모여들고 있었는데, 주전각 교당敎堂의 입구에서는 청아한 목탁 소리와 경문을 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녀가 바라보니, 한 경승이 교당의 넓은 현관 초입에서 목탁을 두드리며 경문을 외우는 한편, 들어오는 신도들에게 일일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여러 날 전 고려성의 저자거리에서 노란 봉투를 나누어주던 그 경승임을 알아보고, 고중상의 처 대하시大賀時는 몹시 놀랐다.
경승이 고중상의 처 대하시를 아는지 모르는지 인자한 눈빛으로 인사한 후 계속해서 다른 신도들에게 절했다.
대하시는 유모와 시녀들을 대동한 채, 여인 석으로 지정된 자리로 가서 무릎을 꿇었다.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잠시 묵도를 올리던 그녀가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전면 좌측으로부터 커다란 그림이 두 눈에 들어왔는데, 그것은 겨우 치부만을 가리고 높다란 열십자 나무 위에 매달린 한 서역인西域人 남자의 상이었다.
‘어머나!’
그 남자의 머리에는 이상한 관이 씌어져 있었고, 이마에서는 선혈이 낭자하게 흐르고 있었다. 이런 기괴하고 섬뜩한 나체상에 대하시는 속으로 몹시 놀랐다. 가슴을 진정시키며 우측 전면을 바라보니, 좌측의 그림과는 매우 대조적인 한 폭의 거대한 인물화가 걸려 있다.
그것은, 장려한 신인도神人圖였는데, 그 신인의 좌우와 하단을 흰 구름이 감싸고 있었다. 얼굴은 마치 서역의 대진인처럼 생겼는데, 긴 머리털에 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온화하게 웃는 모습이 너무나 아름답고 정결해보였다.
그림 좌편에는 이런 글자가 쓰여 있었다.
사망에서 부활 승천하신 경존景尊 메시아彌施訶 (예수 그리스도)
그녀의 눈길이 다시 호기심에 좌측으로 쏠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좌측의 끔찍한 그림 옆에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경존 메시아”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두 그림이 풍기는 인상과 분위기는 매우 대조적이었다. 한 동안 신비감과 괴기스러움에 사로잡혀 충격을 받고 있던 대하시가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주변을 얼핏 둘러보았다. 교당 안에는 남녀가 가득 차 있는 것 같았다. 대하시가 속으로 은근히 놀라며 어떤 동작을 취해야 좋을지 몰라 난감해하고 있을 때다.
앞의 높은 단 한쪽 벽이 가볍게 열리더니 키가 큰 한 경승이 단 위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의 발걸음이 안온했고 얼굴빛은 고요하며 경건했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니, 법당 입구에서 신도들에게 인사하던 그 분, 얼마 전 고려성에서 노란 봉투를 나누어주던 바로 그 대진사 승이었다.
그가 제단 위에 좌정하자 제단 옆에 있던 관현악대가 장엄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주는 의식이 있은 후, 경승은 설법에 들어가기 전 인사말을 건넸는데, 중국말로 먼저 말한 후, 스스로가 고려어로 이를 통변했다.
“오늘 오신 성도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특히 고려성에서 오신 분들, 정말 반갑습니다.”
대하시는 인사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우리 말고도 오늘 고려성에서 온 신도들이 있는가?’
경승의 설법이 끝나고 하늘을 향해 삼일묘신三一妙身(삼위일체 하나님)께 경배의 찬양을 올린 후, 이윽고 모든 예식이 종료되었다. 예배를 필한 후에도 예배를 집전한 경승이 법당 입구에 나와 일일이 신도들을 배웅하였다.
교당敎堂 안의 인파가 빠져 나간 후 나중에 천천히 걸어 나온 대하시가 경승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물었다.
“대덕大德님,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아, 대덕이라니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저의 속세 이름은 고양원高揚元이라고 합니다.”
“아, 그러시군요. 혹시 저를 알아보시겠어요?”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요. 수일 전 고려성 저자거리에서 만나 뵌 것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침 잘 오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동안 궁금한 게 많았죠?”
그녀가 묻기도 전에 경승이 먼저 적극적인 대화 의사를 비친다.
“우리가 올 줄을 어찌 아시고······.”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부인. 괜찮으시다면, 함께 오신 일행에게 제가 차를 대접하고 싶습니다.”
대하시와 그녀 일행은 경승을 따라 곁에 있는 조용한 저택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정결하고 깔끔하며 은은한 향내를 풍기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자니 경승이 직접 차를 내왔다.
“대덕님, 존함이 고씨 성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경승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성도님은 마음속에 있는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대수롭지 않은 것만 묻고 계시군요. 세상사는 잊은 지 오래입니다. 저의 선조들이 고려(고구려) 왕족이었다는 말을 들은 바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영화는 잠시 뿐이고, 영원한 하늘의 영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죄송해요. 실은······.”
그녀가 또 말을 멈추었다.
“네, 소승小僧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봉투 안 오색금화지에 기록된 문구 때문에 찾아오신 것이 아닌가요?”
그녀가 묵인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제가 섬기는 메시아 구주께서 제가 고려를 위해 기도를 드릴 때 제게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
“장차 고려에 큰 환난이 있을 것입니다. 이건 대단히 슬프고 조심스런 얘기입니다만, 어쩌면 나라가 망할지도 모릅니다.”
“네?”
대하시는 깜짝 놀랐다.
“하지만, 너무 놀라지 마시고 근심하지 마십시오. 옛말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듯이, 우리가 삼신일체三神一體 상제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내실 것입니다. 삼일묘신三一妙身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뜻밖에도 자칭 고양원이라는 경승은 신교神敎(우리겨레 전통의 하나님 신앙)의 용어와 경교景敎(당나라에 전파된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의 술어를 혼용하고 있었다. “삼신일체三神一體 상제”는 하늘의 창조주 유일신을 가리키는 신교의 표현이고 “삼일묘신”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뜻하는 경교의 단어다.
“대덕님은 신교도 잘 알고 계신가 보군요?”
고려 황가 혈통인 고씨 가문으로 시집 온 후, 시부모에게서 신교를 배워, 웬만한 것은 익히 알고 있었던 대하시의 물음이다.
“부인, 어찌 사소한 것에만 마음을 쓰고 계십니까?”
그가 반문하며 대하시를 빤히 쏘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바야흐로 고려는 백척간두의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지금은 고려와 고려성의 안위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빌어야 할 때입니다. 오늘 밤 소승은 밤을 새워가며, 구주께 우리 고려국과 고려성의 안위를 빌 작정입니다. 부인께서도 집에 돌아가시거든 하나님께 꼭 빌어주십시오.”
“간절히 빌면,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를 지켜 주실까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죄악을 참회하고 행실을 고칠 때 하나님이 도와주십니다.”
그는 갑자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연남생, 연남건 형제는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사나운 이를 드러낸 채 철천지원수간이 되어있고, 고려 조정에선 가련한 보장 임금 앞에 난신亂臣과 요승妖僧들이 날뛰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피할 길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피할 길이라뇨?”
“부군 되시는 분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성도님의 부군을, 제가 언젠가 뵌 적이 있습니다.”
대하시가 아연啞然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의 바깥어른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고려성의 욕살(고구려의 지방장관)이신 그 유명한 진국振國장군 고중상 대인을 모를 고려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당나라 사람들도 다 알고 있는데요. 고중상 장군께서는 장차 고려를 위해 위대한 일을 하실 분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저도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여인들을 둘러본 후, 말했다.
“저의 예감으로는, 고려의 성들에 환난이 닥칠 때가 임박했습니다. 특히 당나라 국경과 마주하고 있는 하간현 고려성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저는 지금 바로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에 잠길 겁니다.”
경승의 저택에서 물러난 대하시는 집에 돌아온 즉시 경승과 대화한 내용을 편지에 기록해, 하인 편으로 고려성 본가에 보냈다.
(다음회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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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2023. 5. 12.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