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 “주님의 이름으로”
예식서에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는, 혼인 예식서를 관통하며 우리에게 특유한 향취를 전달하는 금실과 같습니다. 이 예식서의 서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문구의 중요성을 먼저 숙지해야 합니다. 본 예식서 첫 단락을 살펴봅시다.
광고
본 당회는 _________형제와 _________자매가 하나님의 법령에 따라 혼인 생활을 시작하고자 하는 의사를 밝혔음을 광고합니다. 이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이 거룩한 상태를 시작하여, 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완성하기를 바랍니다.
서언
_________형제와 _________자매, 당회는 혼인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두 분의 바람을 회중에 지체 없이 알렸으며, 합법적인 반대가 없었으므로, 이제 주님의 이름으로 혼인 서약 의식을 진행하고자 합니다.
혼인의 의무
_________형제와 _________자매, 이제 주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혼인생활에서 여러분에게 요구하시고, 또 약속하시는 것을 경청하십시오. 은혜로우신 우리 하나님께서 두 분에게 이런 요구와 약속의 방식으로 남편과 아내로서 함께 살 수 있도록 능력과 신실함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두 분에 대한 도우심이 하늘과 땅을 지으신 여호와 우리 주님의 이름 안에 항상 있기를 기원합니다.
성경
혼인 예식서가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의 성경 의미를 풀려는 분명한 시도로 성경에서 가져왔습니다. 신명기 21장 5절에서 우리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도 그리로 갈지니 그들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사 자기를 섬기게 하시며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축복하게 하신 자라 모든 소송과 모든 투쟁이 그들의 말대로 판결될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제사장은 단순히 “축복했던”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야”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는 사실로 중요한 의미가 더해졌습니다. 그 이유는 제사장의 행동이 하나님의 권위와 그들 배후에 하나님의 평판 무게가 실렸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복을 받는다는 것은 주님의 이름 없이 복을 받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의 축복은 정의상 효과적이며, 결말이 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혼인한다는 말은 혼인 생활에서 하나님의 평판과 권위와 사역을 고려한다는 뜻입니다. |
다윗이 골리앗에게 했던 말도 이 문구의 의미를 살려줍니다.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다윗이 자신의 권위나 가나안 신들의 평판을 등에 업고 골리앗에게 나아갔다면, 골리앗이 별로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다윗이 자신이 주님의 이름으로 나아간다고 주장했고, 다윗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었던 것은 바로 이 지식에 있었습니다. 비슷하게, 이스라엘의 바알 숭배자를 향한 엘리야의 도전은 유익합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왕상18:24) 사람들이 차례로 바알을 불렀지만 바알은 응답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바알이 존재하지 않았고, 단지 우상숭배자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상상물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엘리야가 여호와를 부르자, 즉각적으로 불이 내려와 희생 제물을 불로 살랐습니다. 그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여호와는 실재하시고, 강력하시고, 전능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행해진 행동은 효과가 있고, 결과를 가져옵니다.
위의 각 인용문에서, “주님”이라는 용어가 전부 대문자로 되어 있으므로, 이는 히브리어의 여호와를 나타냅니다. 이는 죄인들과 사랑의 언약을 체결하신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분의 신명입니다. 구약에서 주님이라는 용어가 소문자로 되어 있다면, 이는 하나님의 또 다른 신명입니다. 구약 히브리어가 헬라어(셉투아진트)로 번역되었을 때. 여호와에 해당하는 여호와LORD와 주님Lord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둘 다 헬라어 주님Kurios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하나님을 가리키기 위해 주님Lord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 때, 독자는 여호와LORD와 주님Lord으로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문맥이 어떤 의미가 옳았는지를 결정했습니다(때로는 두 개의 의미가 다 해당할 때도 있습니다). 이 사실이 신약성경 영어 역본을 가진 우리에게도 해당합니다.
예식서
제가 잘 알 수 없지만, 혼인 예식서에는 대문자로만 된 “여호와의 이름으로”가 아닌 소문자로 된 “주님의 이름으로”로 표기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고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혼인 예식서가 “이름으로”라는 구약에 있는 문구에 “주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을 볼 때, 언약의 전능하신 하나님의 권위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다름 아닌, 언약의 하나님이 언약의 두 자녀를 혼인이라는 거룩한 상태로 함께 데려오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친히 신랑과 신부를 함께 데려오신다면, 그들은(이들의 약점과 삶의 시련에도) 그들을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이 거룩한 상태 안에 함께 계속 살아갈 힘을 얻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역은 대단히 효과적입니다. 여기에 신랑과 신부에게 큰 격려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혼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평판과 권위를 고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시작하신 일은 반드시 여호와께서 이루실 것입니다(시138:8).
당회
여기에 질문이 제기됩니다. 예식서 첫머리에 나오는 “광고”는 혼인 의사를 밝힌 것과 관련해서 당회가 회중에게 주목하도록 해야 할 사항입니다. 왜 당회가 여기에 가담해야 합니까? 혼인은 가정사가 아닙니까, 아니면 혼인 당사자들과 하나님 사이의 문제가 아닙니까? 주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당회를 구성하는 장로들을 통해서 다스리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모든 삶이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장로들은 교회의 모든 회원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삶을 살도록 감독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장로들은 회원이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는지 살펴야 할 책임이 있으며, 그들이 혼인하는 이유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지를 살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장로들이 이 책무를 가정 방문을 통해서 수행하되, 대화를 통해서 혼인하고자 하는 두 사람의 마음에 새기도록 해야 합니다. 일단 장로들이 혼인하고자 하는 두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혼인하고자 하는지, 그리고 그들의 혼인 생활을 일생 “주님의 이름으로” 끈기 있게 하려는 의도가 있는지에 만족한다면, 당회는 그들이 확인한 사항을 회중에게 조언할 위치에 있습니다. 이에 대해 회중도 똑같이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회중에게 두 사람의 혼인 동기가 혼인의 거룩한 상태를 주시는 하나님의 목적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신하는 기득권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형제(자매)를 지키는 자들입니다. 그다음 당회는 광고로 정해진 혼인 일자를 알리는 이상의 일을 합니다. 광고의 목적은 부부가 될 사람이 피차 헌신된 삶을 시작하면서, 서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신실하다는 것을 회중에게 알리려는 것입니다. 회중 가운데서, 주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두 분의 동기나 신실함에 대해 다르게 아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있다면, 그들은 이 시점에 우려 사항을 당회에 알려야 합니다. 만일 이런 이의가 제기되지 않으면, 정해진 일자에 의식을 진행합니다. 역으로 혼인할 신랑 신부가 주님을 섬기는데 하나님 앞에 정직하지 않다는 증거가 드러나면, 그들은 분명히 “주님의 이름”으로 혼인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목사는 당회에 소속되어 있으므로, 당회가 두 사람이 회개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확증을 얻을 때까지, 목사는 주례해서는 안 됩니다.
셋
위의 관찰로, 두 사람 사이의 혼인은 궁극적으로 단지 두 사람만 가담된 사안이 아니라, 그 이상이 가담된 것이 분명합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친히 둘 사이에 계시며, 궁극적으로 혼인하는 날까지 일어나게 될 모든 일에 밀접하게 관여하고 계십니다. 혼인은 직선의 한쪽 끝에는 신랑이, 다른 한쪽 끝에는 신부가 있지 않습니다. 혼인은 본질상 삼각 구도, 즉 신랑과 신부가 하단 양쪽에 있고, 상단에 하나님이 계시는 구조입니다. 신랑과 신부가 서로 하나가 되는 결속은 그들 둘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경건한 신부와 경건한 신랑을 하나로 묶는 결속이 궁극적으로(수직적으로) 주님께 있습니다. 언약 안에서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주장과 믿음에 대한 그들의 반응에 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9장에서 살펴보게 될 핵심 요지입니다.
세속 세상에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와 하나님과 혼인 사이에 거리가 있지만, 교회는 혼인에 대한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하여 대담하게 처신합니다. 혼인식 때 “주님의 이름으로” 진행하여, 교회는 혼인이 하나님에게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주님의 축복으로 혼인이 가능하다고도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이름으로” 혼인하게 됨으로, 그리스도인 부부는 공개적으로 그들의 혼인 생활의 힘이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천명합니다. 경건한 커플의 혼인식 배후에는 신랑과 신부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며, 그를 향한 그들의 사랑과 의지가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기독교 혼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다음 장에서 혼인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밝혀낼 때 분명해질 것입니다.
토론 사항
1. 캐나다 개혁교회 교회 질서 63조에서 혼인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했습니다.
당회는 교회 회원들이 오직 주님 안에서만 결혼할 수 있도록 하고, 당회에 의해 권한을 받은 목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할 때만, 이와 같은 혼인을 엄숙히 서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엄숙한 혼인예식은 개인적인 의식이나 공적인 예배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채택된 혼인 엄숙 예식서를 사용해야 한다.
a. 회원들이 혼인할 대상과 방법과 관련하여 당회가 왜 책임이 있는지를 토론하십시오. 직분자들이 교회의 청년 남녀가 연애할 때 어느 시점에 관여해야 합니까?
b. WWJ vanOene, With Common Consent(Winnipeg, Premier Printing, 1990)의 도움을 받아 교회 질서가 혼인 엄숙 예식서를 “사적인 의식 또는 공적인 예배에서 어느 곳에서든”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는 이유를 이해하고자 노력하십시오. 더 나은 절차가 어떤 것인지, 또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c. 교회 회원들이 혼인할 때 왜 “채택된 혼인 예식서를 사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유를 열거하십시오.
2. 예배실에서 혼인식을 거행하는 일이 바람직하거나, 아니면 필수적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아니면 왜 그렇지 않습니까?
3. “주님의 이름으로”라는 문구가 혼인하는 두 사람에게 주는 위로가 무엇입니까? 또 이 문구에 어떤 의무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4. 혼인하기 전에 공적인 신앙고백을 고백했어야 합니까? 여러분의 대답을 설명하십시오. 연애를 시작하는 것과 관련하여 같은 대답을 하겠습니까? 왜 그렇게 합니까, 혹 왜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