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 마자 휘어진 대를 뉘라셔 굽다턴고. |
|
☞ 주제 : 고려 왕조에의 충절 * 눈 : 조선 왕조에 협력하기를 강요하는 억압들
● 원천석(고려 말 ~ 조선 초) : 호 운곡(耘谷). |
대나무는 우리나라 전라남도와 경상남도에 집중 분포하는 온·난대성 식물이지만, 한 대성 식물처럼 한 겨울에도 그 잎이 말라죽지 않는다. 계절의 변화에도 곧은 모양과 푸른 빛깔을 잃지 않는 식물이기 때문에 이 노래에서와 같이 대나무는 세한 고절로, 혹은 군자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휘어진 대나무는 곧음을 상실한 모양이다. 그러나 작중 화자는 대나무가 눈을 맞아 휘어졌다 하더라도 그 곧음을 상실한 것이 아님을 역설하고 있다. 눈 속에서도 푸른 빛깔이 변치 않음은 휘어짐이 현상적이고 일시적인 굽음을 의미할 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작중 화자는 여기서 한 걸음 나아가 대나무만이 유일하게 세한 고절의 속성을 지녔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에 기대면 세한 고절이라 하면 소나무와 잣나무를 떠올리게 된다. 굳이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야(知松柏之後凋也)"라는 구절을 되뇌지 않더라도 상록활엽수 대부분이 세한 고절의 속성을 지녔음을 알고 있는 까닭이다. 그런 나무들 가운데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자주 언급되었던 것은 이 두 나무가 하(夏)나라와 은(殷, 상(商))나라에서 신주(神主)로 사용된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노래의 작자는 소나무나 잣나무가 아닌, 대나무가 유일하게 세한 고절임을 말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이 작품이 예사롭지 않음을 알게 된다. 자연물을 통해 세한 고절의 인간적 가치를 드러내려고 하였다면 작가는 하필 왜 대나무를 선택하였을까?
이런 의문과 관련하여 우리는 <만전춘별사>라는 작품에도 "얼음 위에 댓잎자리 보아"라는 구절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필자는 이 작품이 고려가 원나라에 의해 직접적으로 지배를 받기 시작한 원종(元宗) 11년을 전후한 시기(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한 직후)에 생성된 작품으로 추정한 바 있는데, 이 시기 고려의 영토는 동녕부(東寧府)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에서 관할하는 지역을 제외한 지역으로 축소되어 있었다. 특이한 점은 바로 이 지역이 대나무가 생장할 수 있는 북방 한계선 너머에 있는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이 지역이 고려에서 분리 이탈해간 만큼 고려의 통치 질서는 이 지역을 배제하는 방향에서 새로이 수립되어야 하였을 것인 바, <만전춘별사>는 바로 그렇게 수립될 통치 질서를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생각을 확대하면, 이 작품에서 소나무나 잣나무 대신에 대나무가 등장하는 사실에서 특별한 의미를 파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원천석이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조선 왕조의 계국(啓國)과 함께 원주에 은거한 까닭에 기왕의 학자들 가운데에는 이 작품에서 "눈"이 내린 자연적 상황을 조선 왕조가 계국되는 역사적 상황 곧 고려 왕조가 멸망하는 역사적 상황의 비유로 파악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 작품에서 회고의 감정을 파악하는 데에는 별다른 무리가 없지만, "눈"이 내리는 상황을 그렇게 파악할 근거는 찾기 어렵다. 얼음도 그렇거니와 눈은 북방의 찬 기운이 남하할 때 찾아온다. 그런 점에서 얼음이 얼거나 눈이 내린 자연적 상황은 북방 세력이 강성해진 역사적 상황의 비유적 표현으로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시기에 원천석은 고려 왕조를 섬기고 있었다. 다시 말해 원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고 있던 고려 왕조를 섬기고 있던 인물이다. 따라서, 역성 혁명에 적극 가담하고 또 왕조의 영토를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지역까지 확대하는 데 공헌한 유자(儒者)의 관점에서 볼 때 원천척은 올곧음을 상실한 인물로 인식될 수 있다. 이 작품의 초장은 바로 그와 같은 인식에 대한 부정으로 풀이할 수 있는 것이다.
원천석은 태종의 스승이기도 하여 새 왕조에서 누구보다 쉽게 권력을 가질 수 있었으나 벼슬살이보다는 치악산에 은거하는 길을 선택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몽주, 서견이나 길재와 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윤리를 실천한 인물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새 왕조가 들어선 이후 줄곧 은거 생활을 하였음은 분명하지만 원천석은 제 발로 태종을 찾아뵈었기 때문이다.
유자는 당대의 조건에 부합하는 통치의 방향과 원리를 마련하는 역할을 하는 집단이다. 만일 원천석이 확대된 지역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한 이성계(조선 태조)의 집권을 계기로 은거의 길을 선택한 것이 분명하다면 그의 은거는 고려왕조에 대한 충정을 저버리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기보다는 해당 지역을 통합하는 통치 원리를 마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더 합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지은 것으로 전하는 또다른 노래(
역사적 전환기에 선 원천석의 고민은 조선 왕조가 들어서면서 은거의 길을 선택한 이들의 그것과 공통된 점도 있지만 획일적으로 동일하게 이해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차이를 감안하여 이 작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기 바란다.
출처 : [기타] http://songkw.com.ne.kr/sijo/s19.htm